15-09 to 15-42: 예수의 최후와 우리의 각오

예수의 최후와 우리의 각오
1965.01.31 (일), 일본 동경교회

15-09
예수의 최후와 우리의 각오
마태복음 27:45-46

우리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정말로 구세주라면,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이 천주(天宙)는 예수님과 그의 이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마땅히 그 하나님께서 구세주의 이상을 실현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구세주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이며 하나님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 그러기에 구세주는 천주의 극소한 것에서부터 극대한 것에 이르는 모든 존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관계와 인연을 바탕으로 하는 천주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모든 인류도, 만물도 그 생활의 기준이 예수님을 중심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15-09
하나님의 마음, 부모의 마음
그러기에 예수님의 소원은 곧 땅의 소원이고, 하늘의 소원이며, 인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 소원은 언제 어느 시대든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소원이고, 역사와 시대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절대적인 소원인 것이다.

이러한 소원의 터전 위에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지셨지만, 과연 그의 소원이 땅에서 이루어졌는가? 또한 하늘과 인류가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 우주간에 이루어졌는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소원이 나타나기에 앞서 이 지상에는 본연의 소원에 배치되는 하나의 소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나타난 소원은 인류가 바라는 본연의 소원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그 소원은 하나님에게 혹은 하늘에 대해서 배치되는 소원이 되었다.

따라서 참된 소원은 그러한 소원과 충돌하여 그것을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다. 그것을 배척하여 본연의 소원을 이루려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상에 구세주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소원과 목적과 이상이 순수한 길을 통하여 이 지상에 이루어졌었는가?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배치되는 이 지상의 사랑이 사탄을 중심하고 있는 소원이며, 또 사탄을 중심으로 한 목적을 가지고 기반을 만들었으므로 그것이 커다란 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힘은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과 이상에 대해서 극히 마이너스적, 혹은 반대의 힘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시기 전에 이 반대의 소원과 목적이 예수님과 충돌하더라도, 전세계적으로 그 이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승리의 기대를 만들려고 하셨던 것이다.

창조본연의 이상세계에서는 구세주나 종교, 그리고 기도가 필요없다.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입장에 섰다는 것은 타락했기 때문이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만나 심정을 표현하고 그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접하는 것 자체가 종교 이상의 종교이고, 기도 이상의 기도인 것이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자체가 지상에서 사탄의 소원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는 그와 같은 하나님이 창조목적에 합당한 조상이 되지 못했다. 말씀에 의한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서는 ,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천주(天宙)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정과 함께하는 그 생활관을 세계화하고 혹은 이상화하는 데 있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류와 함께 기뻐하고, 인류와 함께 행복을 노래하면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에서 스스로 참아버지의 위치에 서고자 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최고의 존재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원리를 통하여 아는 바이다.

타락한 아담과 해와, 거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탄생되고 아담 가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가정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바의 가정은 아니었다. 그 혈통을 계승하여 수많은 자손이 생겼지만, 그 자손은 더욱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이 하나님에게 슬픔의 조건을 더욱 증대시켰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하겠다.

그들이 하나의 민족, 국가, 그리고 하나의 세계인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 자신은 그것을 그냥 버려 두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된다. 참부모라고 하는 본래의 심정 기준에서 보면, 타락은 하였지만 사랑하는 자녀였던 인류를 사탄에게 빼앗기고, 그들의 슬픔의 밑창에 있는 상태를 바라보시고 그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천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하한 고통의 길을 걸으시더라도 인류를 전부 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수가 점점 늘면 늘수록, 지상에 퍼지면 퍼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에는 더욱 괴롭고 비참한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사탄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참소를 한다. ‘원래 아담을 중심으로 한 세계와 인류를 당신의 품에 품고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 당신의 이상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를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세계가 만들어졌다. 이 세계에 당신이 바라는 참된 자녀가 있는 가? 가정이 있는 가? 혹은 민족, 국가가 있는 가? ’라고. 이러한 입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에게 참소를 할 때, 하나님은 사탄의 그러한 참소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관계라고 하는 심정 기준이 있기에 그러한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원수를 물리치고 이 세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이상세계로 복귀하여 돌려 놓으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역사이다.

지금까지의 하나님은 섭리노정을 통하여 구세주를 보내려고 하셨다. 그 구세주의 희망은 전세계와 천주에 걸친 것이다. 거기에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시대, 즉 예수님이 오신 때, 사탄이 구세주에게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한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아담 가정으로부터 노아 가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한 사람을 찾았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오직 한 사람을 사탄세계로부터 빼앗아 찾아 세우는 데 2천년의 역사를 소비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기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어떠한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다는 기준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는 지상의 한 인간을 중심으로한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5-12
하나님의 소망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본래 소망하던 길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가르쳐 주어, 그 내적 생활이나 외적 생활에 있어서 사탄세계의 가책을 받지 않도록 인도하려고 하셨다. 데라라고 하는 우상장사의 아들이었던 아브라함을 빼앗아, 그가 살던 환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어 거기에서 쓰라린 고생을 시키고 가혹한 시련의 길에 세웠다. 그러나 그런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한 약속의 일념과 하나님에게 기여하는 일념만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그러한 하루를 기다리면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그의 고향 땅에서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때까지의 역사적인 환경, 혹은 심정적인 환경, 사정의 환경, 소원의 환경이 있었다. 자기의 부모나 형제, 친척을 중심한 환경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런 고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거기에서 출발했다.

아브라함이 목적삼고 찾아간 땅은 아브라함 자신이 흠모했던 곳이 아니었다. 전연 알지 못하는 이국의 땅이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고 아브라함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명령에 복종하여 자기 고향인 갈대아 우르 땅을 용감하게 떠났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중대한 시련(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타향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믿으면서 여기저기로 방랑하는 나그네의 생활을 안 아브라함이었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일관하여 하나님을 흠모한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아들, 인류가 타락한 이래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한 사람을 이 지상에 결정적으로 세운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삭의 실체헌제이다. 모리아 산상에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서 제사의 제물로 이삭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에게 약속한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은 아브라함이었기에, 여하한 사탄의 시련이나 박해가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었기에 이삭헌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탄을 분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과 관계맺어 나아갈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중심한 하나님의 소망의 그 한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정이었다. 그러한 가정이 생기면 그 가정보다도 씨족을 원하시고 민족이 되면 국가를 원하셨다. 또한 나라가 세워지면 그 나라를 통하여 하나의 세계를 세우기를 원하셨다. 이와 같이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한 사람으로부터 전체로 그것을 키워 하나님을 이루시려는 창조이상세계에까지 끌어 올리려고 한 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였다.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분별된 지역으로 직접 인도하시면서 야곱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가정적 승리의 기대를 조성하셨던 것이다. 야곱도 아버지의 고향을 떠나서 하란으로 갔다. 그 때문에 야곱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 이를 테면 자신의 애정이라든가 사정, 앞으로의 희망 따위 등, 자신의 모든 생활 환경을 버리고 갔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몸만 하란으로 향하던 그의 심중은 오직 하나님을 흠모하는 심정이었다. 야곱에게 보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는 확신, 어떠한 곳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 그것이었다. 야곱은 그것을 최상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최상의 권위로 생각했다.

15-14
타락한 해와(라헬)의 복귀노정
그래서 하란 땅에서의 고통의 길도 그에게는 괴롭지 않았던 것이다. 괴로움의 밑창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하나님에게 심정의 깊은 곳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양을 몰면서도, 양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항상 하나님께 ‘제가 이 양의 무리를 사랑하는 것같이 당신은 축복받은 이 야곱의 자손들을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온갖 만상을 볼 때에도 ‘내가 만상 하나하나를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 물건으로 사랑하는 것같이, 하나님이여! 부디 저희 많은 자손을 사랑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야곱의 21년간의 생활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생활이었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생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심정 깊은 곳에 접하려고 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생활하는 일체가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나타냈던 것이다.

야곱이 가는 곳은 모두 반대의 길이었고 모두가 허락되지 않은 불완전한 환경이었지만, 그 환경이 험하면 험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마음도 강해졌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도 강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환경에서 괴로움, 혹은 쓰라림을 참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 서면 설수록 거기에 대응해서 야곱의 길을 타개해 주셨다. 이것은 사실이다. 야곱이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고난의 21년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때가 차서 이제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천명이 있는 것을 안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외삼촌인 라반과의 일이 있었다. 라반은 야곱의 21년간의 생활 가운데서 열 번이나 야곱을 속여서 야곱이 축복받은 은혜를 빼앗은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야곱의 장인이었지만, 섭리상으로 볼 때 실체를 쓴 사탄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에게 진실로 충성하는 야곱을 진실로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사탄편 사람이라 해도 야곱의 탕감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용서할 수 없지만, 그 기간이 지나거나 조건이 다 갖추어지게 되면 하나님은 사탄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 있었던 사람이 라헬이었다. 그녀는 라반의 딸이었으며 야곱의 아내였다. 그녀는 아버지 라반이 야곱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랜 생활 가운데 알았다.

그런 라헬은 만약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간다면 야곱을 따라가야만 했다. 라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재산을 속여서 빼앗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멀지 않아 하나님의 벌이 내린다는 것을 알고 남편이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 라반이 야곱과 약속한 재산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아버지 라반이 야곱과 약속한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을 훔쳐 가지고 가려고 결심했다. 이러한 처를 가졌다는 것은 야곱이 천명(天命)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야곱이 21년 동안 고역한 결과로 라반과 약속한 재산을 백 퍼센트 찾아 가지고 가겠다는 결심, 라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산을 끌어내 가지고 가려는 결심을 한 처를 가지고 있었던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 즉 복귀섭리로 보아 그러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가정적인 섭리를 출발할수 없다고 하는 입장에 섰던 셈이다. 거기에서 야곱은 라헬과 일체가 되어 지금까지 라반과 약속했던,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재산을 3일 동안 챙겨서 자기 고향을 향해 출발해야만 했다. 이것은 역사상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에 그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이상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대신자로 사탄세계에 들어가서 사랑하는 라헬과 재산을 취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모든 것을 사탄세계로부터 분별하여 하나님편으로 넘기는 것과 같은 가정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섭리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부터 처와 재산을 취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라반이 눈치채고 뒤를 쫓으니, 그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사랑하고 찾으려 하던 우상을 말 안장 밑에 용케 감추어 발견되지 않게 하고 라반을 자기 고향으로 되돌려보냈다.

사탄세계에 있어서 타락한 해와의 복귀노정을 걸은 라헬 자신이 라반을 실체의 입장에서 돌려보냈다는 것은 실체 사탄을 분별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사탄이 좇는 조건을 끊고, 야곱 가정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15-16
지상의 승리 ‘이스라엘’
이와 같이 라헬이 자기의 아버지를 돌아가게 하였지만, 야곱에게는 영적 기준에 있어서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야곱은 고향인 가나안을 눈앞에 둔 얍복강가에서 밤을 지새며 기도하던 중에 천사가 나타나 생사를 걸고 씨름을 했다. 축복을 받기 위해 야곱은 아무리 상대가 천사라도 싸워 이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결의로 밤을 새우면서 싸워서 씨름에 이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키고야 야곱은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그러한 내용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절대적 조건과 사탄이 야곱의 가정에 대해서 하나님쪽에 가지 못하게 하는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런데 야곱 가정은 사탄쪽을 끊는 동시에 하나님쪽에서 바라시는 승리의 기반 위에 섰던 것이므로, 처음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 지상에 승리, 즉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어서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지만 야곱에 있어서는 승리를 얻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된 것이다.

야곱은 자기의 형인 에서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양과 종을 앞에다 세웠던 것인데, 고향을 방문할 때, 왜 에서는 야곱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았던가. 야곱이 자기의 축복을 빼앗아 갔던 일은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단히 격분하고 있던 에서의 마음 가운데는 혹 야곱이 오면 단칼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야곱을 환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인가? 그 배후의 이유로서는 야곱이 온갖 모험에 의해서 라헬의 아버지를 격퇴하고 천사를 굴복시켜, 이른바 영적 천사와 반대하는 실체인 라반을 물리쳤다고 하는 내면적인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에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야곱가정을 반대한다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승리의 기준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곱이 가지고 있던 그 조건을 치게 되면 친 자가 맞게 된다고 하는 내용을 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본심 가운데에 자기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야곱의 승리와 라헬의 승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졌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가정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고 그 가정으로부터 12자식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던 것이다.

야곱의 가정을 성별하는 데 많은 수고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 있어서는 이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의 씨족과 하나의 민족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수많은 씨족과 민족을 세우고 탕감조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쪽이냐 사탄쪽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지상의 인간이 없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때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인간을 중심으로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의 중심이라고 하는 하나의 심정 기준이나 신앙의 기준에서, 혹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하는 기준에서, 즉 아담이 타락할 때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내용을,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오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책임을 진 사람들이 언제든지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행동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에 통했다고 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발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야곱을 중심으로 승리한 기반을 갖고 가나안에 섰던 이 가정을 애급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사전에 요셉을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길에 그를 내보내 시련 가운데 두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걷고, 행동하며 사탄세계의 어떠한 유혹에도 빠지지 않고 일정한 심정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애급 땅에 있었던 요셉은 그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승리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이 애급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처의 유혹도 거절하고, 지위를 잃어도 정의의 편에 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 나감으로 말미암아 애급권내에서, 또 사탄세계에 있어서 한 사람의 승리의 기준이 세워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기대를 중심으로 하나님은 축복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은 그 땅에서 총리대신까지 되었고 자기의 가정을 애급땅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소원은 그가 총리대신이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기간에 요셉에게 애급 백성을 영원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 국민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책임관념을 갖도록 섭리하셨지만, 요셉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요셉은 기근으로 굶고 있던 가족은 구제할 수 있었지만, 섭리상 하나님 자체에 있어서 영적 기근을 해결할 내용을 생각하지 못했다.

15-18
모세의 믿음과 지도자로서의 자격
요셉이 자기의 가족은 인도하였으나 그 민족이 400년의 역사를 통하여 고역의 길을 갔다고 하는 것은, 요셉이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자기 씨족의 승리의 환경을 만들고, 그것을 터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민족을 가인 입장에 두고 아벨 입장에 있는 야곱에게 순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면,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의 국가적 승리의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데 요셉이 그 내용을 모르고 그 기준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4대(大)를 지나 모세를 부르시고 재차 하나님의 소원에 부응한 책임을 지게 하여 바로 왕 밑에 보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한 것같이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을 하고 고통 가운데 견디고 있는 것을 보고, 바로 궁중에서의 영광을 버리고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기준으로 애정의 심정을 세웠던 것이다. 참으로 축복받은 민족은 이와 같은 비참한 결과에 세워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은 마땅히 이 민족을 새로운 희망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임에 틀림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에게 기여하니,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념이 모세의 마음속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 외적 박해가 크면 클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고향이던 가나안 땅에 대한 애정이 환경적으로 육박하는 고난에 비례해서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맹세를 세우고, 또 애급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야 할 것을 절실히 느끼며 돌을 가지고 애급사람을 쳐죽였던 것이다. 이것은 보통 평면적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죄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그러한 행동을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심정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을 때에 모세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친 것이라고 하나님은 인정하셨던 것이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모세는 그들을 말렸다. 그러나 그른쪽의 사람 때문에 그 전날에 있었던 일의 소문이 퍼지게 되어, 모세는 자기의 입장에 위험하게 된 것을 깨닫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곳에서 양을 친 40년의 모세의 생활은 처참하고 고생스러웠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가나안 땅을 누구보다도 흠모하고 사랑했던 마음은 모세의 훌륭한 점이었다. 그것은 하늘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세우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마음이었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사랑하는 모세의 마음은 가나안으로 복귀시키려는 하나님의 희망과 부합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바로 궁중에 대해 반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때 그의 처 십보라는 모세가 어떠한 곤란한 땅에 가더라도, 언제나 한 몸이 되어 그의 수족이 되고 그를 위로하며, 모세의 곤란한 입장과 같이하여 하나님의 책임을 같이 진다는 결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볼 때 그녀는 모세가 귀중한 섭리를 흠모하면서 완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였고, 또 탕감의 기준이 되었다.

모세는 자기 가족을 데리고 바로가 있는 곳에서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열번의 기적을 통하여서도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려 하지 않았다. 모세가 만약에 바로 궁중에서만 살았더라면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때 바로와 최후까지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과거 미디안 광야 40년 생활의 고난에서 직접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언제든지 나의 편이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마음에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지켜줄 하나님이시다’라는 신념을 굳게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세는 바로가 몇 번이나 속이고 이스라엘 민족을 돌려보내지 않는 입장에서도 한번도 낙담하지 않고 당당히 싸워 이겨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일간의 여유를 타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탄세계로부터 전부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15-20
지도자의 심정
이것은 섭리상으로 본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생활 역사의 일단이지만, 이 신앙생활을 인도하시고 명령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개인, 자기 가정, 자기 민족을 그러한 고통스러운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쓰라린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역사 위에 나타나 있는 사실보다도 역사를 움직이시고 사람의 배후에서 섭리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명령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내정, 곧 그 속사정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심정을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모세가 일치하여 가나안을 바라고 그리워하는 심정, 최후까지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모세의 마음과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다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마음만 가지고 모세의 뒤를 좇아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향에 가는 일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고통과 그 이상의 쓰라림이 있으면 모세에 대하여 반항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신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러한 60만 이상의 군중을 이끌고 가는 하나님이나 모세의 내적 걱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생사를 결하고 가나안 땅에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상하 일체, 혹은 내와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모세와 하나 되어 전진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반 가량이 사탄편을 지지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머지 반의 백성만이라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족의 5분의 1, 혹은 10분의 1을 희생시키더라도 모세와 일치시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적을 갖게 하여 가나안 땅에 복귀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서 민족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섭리는 완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했다. 자기의 생활 조건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민족을 생각할 여지도, 하나님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자기들의 지도자의 마음이 대체 어떤가 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했지만 그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과 생활이 안정만을 바라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에서의 생활 이하의 상태에 부딪치자 불평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거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가야 할 미래의 고향 가나안을 버리고 애급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리 모세의 지도하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모세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되고 하나님과도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모세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에 그러한 민족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민족으로부터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입을 것이 없다, 살 곳이 없다’는 불평을 듣는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쓰라림, 지도자로서의 고통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고통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모세가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와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중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실 수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배반하는 것에 대해 괴로와하지 않으실 수 없었고, 모세에 대해서는 불쌍하고 가여운 생각에 괴로운 심정이셨던 것이다. 그러한 불신앙의 경지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누가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벌하소서’했다면 정말로 벌하고 싶은 경지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그러나 모세는 그럴 때마다 `당신이 간난신고를 거쳐 애급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선민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수많은 민족이 아벨을 저주한 것은 사탄에게 좋은 조건이 아닙니까? ‘ 하며 아픈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했다. 모세의 그러한 심정이 뒷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혹은 족장과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민족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은 차라리 자신이 죽어 버리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선조들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역사적인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자손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시고 자기의 씨족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실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모세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대로 둘 수도 없고 팽개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지도자의 입장에 서 있던 모세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의 기도를 하였다. 민족과 일체가 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제단의 장(場)으로서 타락세계와 분별하여 하나의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나안 땅을 민족적인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모세 앞에 모두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가진 모세마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모세를 세워 이끌어 온 역사노정이 그렇게 끝나 버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나타난 역사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비참한 심정과, 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책임을 진 지도자의 심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와 함께 죽음의 경지를 넘으면서 원수들 밑에서 온갖 괴로움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을 대표하여 싸워 주는 모세와 그 모세를 격려하고 그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마지않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서로 충돌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대하여 ‘우리들에겐 하나님도 없다, 우리들에겐 지도자도 없다’고 하며 우상을 만들어 춤추며 난동을 벌였다. 2천 4백년 동안의 수고의 역사가 그 거칠어 빠진 황야에서 그러한 결말을 맺고 말았으니, 그 이상의 비참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5-23
메시아와 일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한편,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민족은 그 지도자와 결속하고 일체가 되어 승리의 제물을 바치고 갈라지지 않는 이스라엘 국가가 되었더라면, 그 이스라엘 국가는 영원히 이어질 국가로서,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승리한 국민의 입장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서로 다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예언자, 혹은 지도자에 대해서 반항하고 위해(危害)를 가하고 학살하고 했던 것이다. 역사상에서 연속적으로 그런 행동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성취, 말하자면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이상국가의 실현이 연장된 채 역사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흐르면 흐를수록 그 나라를 흠모하는 마음이 강해졌다. 때문에 역사상에 슬픈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이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은 괴로운 골짜기를 헤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역사를 더듬어서 구원의 섭리를 담당해 나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신앙자들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이 성취될 한 때를 바라보시면서, 민족과 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가될 수 있는 한 사람을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환경에 보내시어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고 지금까지의 역사의 한을 풀려고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목표로 해서 이스라엘 역사상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구세주 메시아는 오신다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민족을 수습하여 하나의 신전을 중심으로 일체가 되게 하셨으며, 거기에 반대하는 자에게는 벌을 가하셨다. 개인적으로 배반하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배반하면 가정적으로, 씨족적으로 배반하면 씨족적으로 벌하셨다. 민족이 배반하면 민족을 벌하셨다.

그러한 역사의 괴로운 경험을 통하여 일체가 될 날을 소망하셨는 데, 예수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벌을 받아 망하게 되었다. 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타락하고 축복하시면 타락하기를 거듭하였다. 하나의 때와 하나의 환경에 보내려고 하나님이 결정하고 있는 인간은 뜻을 섬기는 기준에서 세계적인 승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것을 바치는 기대(基臺)가 될 민족과 그 지도자도 그리고 신전(神殿)의 의식(儀式)도 전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복귀섭리는 때를 중심으로 탕감조건을 세워 가는 것이니, 4천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모든 탕감조건을 세우고 민족적인 승리의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섭리적으로 볼 때, 민족적 신전을 정비하고 그 민족과 일체가 되고 메시아에게 접하는 지상의 모든 민족과 국가 주권과 신전과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될 날을 소원하시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도자나 예언자의 명령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신전의 이상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애급 땅에서 황야에 나온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자기 개인의 희망만을 문제삼고 ‘나는 이렇게 살면 된다. 내가 바라는 소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소원과 같은 가나안이 아니다. 그런 것은 필요도 없다. 단지 현세의 나의 욕망이 채워지면 된다’고 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애급 땅으로부터 인도해 나왔을 때와 같은 생활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간 민족이 바라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원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2천년 수백년간 백성을 사랑하시며 그와 같이 괴로운 길을 더듬어 오신 것이다.

그것은 왜인가? 그 길이 희망의 나라, 목적의 나라를 위하여 세계적인 사탄을 굴복시키려는 노정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것을 해주기를 원하셨지만, 그 민족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에 참으로 합당한 자, 혹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책임을 진 자, 또 하나님 자신이 미래의 세계를 사랑함 같이 비참한 입장에 있는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장래의 이스라엘, 미래의 희망에 찬 이스라엘을 사모하는 자는 없는 가 하며 그런 자를 찾으셨다. 그러나 없었던 것이다.

15-25
하나님의 소원, 예수님의 소원, 역사의 소원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나라들의 속국이 되어, 최후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로 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시대와 환경에 예수님은 보내어졌던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는 하나님을 믿는 환경이 준비되지 않았지만, 때는 차고 약속의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편에서 때와 사람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시점에 보내졌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 예수님을 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환경이 예수님을 사모할 수 있도록 준비할 자를 , 역사를 통하여 보내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온 자가 세계 요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는 세례 요한을 보내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슬픔이었다. 세례 요한이 보내지기 전에 민족이 일체가 되고 메시아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다면 요한을 보낼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이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한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모아 예수님에게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요한마저 그러한 내용과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환경에 휩쓸려 예수님을 모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도 배반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인물이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에, 그에게로 이어져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히 사탄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내적 사상의 중심인 유대교와 외적인 이스라엘 국가와 하나로 이어져, 즉 내외 일체가 되어서 그 위에 메시아를 희망의 주로 맞이하여 모시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주로 보내어진 예수님을 흠모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연 알지 못했던 것이다.

때는 차고 하나님으로부터 준비된 인물은 보내졌지만 때와 인물을 받아들일 환경이 없었다. 하나님의 이상(理想)이 전해질 기대(基臺)가 없었던 것이다. 그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 최상의 목적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대망하기를 바라셨다. 그러한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메시아가 가는 곳에 민족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메시아의 소원이 민족의 소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메시아의 생활이 민족의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메시아의 행동이 민족의 행동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갈라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메시아와 민족이 결국에는 갈라졌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때까지 민족을 중심으로 흘러 전해진 역사적인 모든 것도 민족의 중심으로 보내어진 메시아도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적으로나 입체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예수님은 하는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최후의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성령이 강림하여 부활의 길을 통함으로써 지금까지 영적 구세주를 의지해 왔다고 한다면, 땅을 대하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하나님의 소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소원은 민족을 통한 국가인 것이다.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 오실 때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과 같았으며 그것은 민족을 지도하여 국가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민족이라기보다는 나라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이루어야 할 주체적인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원하시는 국가는 그 시대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었다. 영원한 역사적인 국가였던 것이다. 곧, 그의 민족을 영원히 이끌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 가운데는 민족이 있고 씨족이 있고 가족이 있고 개인이 있다. 하나님의 소원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내어진 그리스도의 소원도, 또 하나님을 흠모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소원도 결국은 민족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로서 이 지상에 오신 예수님의 희망과 목표는 곧 이스라엘 국가였던 것이다.

15-27
예수님의 심정과 그 슬픔
국가를 형성하는 데는 세 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 먼저는 국토가 없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주권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국가의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 하면, 역사 가운데 전통을 북돋아온 이스라엘 민족이며 국토는 축복받은 가나안 땅이다. 그리고 주권을 세우는 중심인물이 국가적, 전체적 지도자로 서야 하는 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보내진 분이 메시아였다.

메시아는 죽어서 영적인 만민의 구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서 만능의 왕자로서,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의 중심으로서, 또 로마의 중심으로서 보내어졌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축복받을 때 고향 땅에서 불림받아 무조건 보내어졌다. 야곱은 축복을 받고서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원수가 있는 땅으로 들어갔다. 모세도 그러했다. 축복을 약속받고 광야에 보내어졌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고, 절대적 가나안 땅을 결정하고, 절대적 이스라엘 민족을 결정하고, 절대적 이스라엘 주권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최대의 사람을 세워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이념을, 그리고 국가적 전통을, 그리고 그 시대의 지상 전체를 움직이고 있던 세계적인 중심이 로마를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신을 나타낸 일이 있었는가? 만민의 왕으로서 자신의 명령을 들으라고 하시며 명령하신 적이 있었는가?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로 탄생하셨던 메시아를 향해 지상의 어느 누가 ‘참으로 당신은 하늘의 왕자이십니다’하며 모신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개인도 없었거니와 가정도 없었다. 씨족도 없었거니와 민족도 없었다. 민족이 없었으니 국가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 오셔서 일개인에 대한 완전한 가르침 하나도 전하지 못한 것이다. 개인에게 완전한 가르침을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 어떻게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말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가정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 어떻게 민족, 국가, 세계를 대해서 그 가르침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예수님의 내면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따라, 혹은 빵을 얻고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는 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천천만만의 여러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모여 왔었지만, 예수님의 참된 심정을 알아 ‘나는 당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결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흠모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런 가정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런 가정이 없었으니 물론 민족도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예수님은 비참하고 처량한,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입장에서 생애를 보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보더라도 그렇지 않았던가. 3인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간의 희비애락을 함께하였고 스승을 사모하면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에서의 세 번의 기도 때마다 그들은 졸고 말았다.

그것이 예수님을 흠모해 오던 제자들의 최후의 결과였다. 예수님은 죽음을 결정하든가, 혹은 삶을 택하든가 하는 기도를 하시며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셨던 것이다. 그런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 죽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그 시간에마저, 예수님과 일체가 되지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대신 죽는 다고 하는 자리에 설 수는 없었다. 약속을 정하는 그때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약속을 이행하는 지도자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는 다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4천년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보응이었던 것이다.

15-29
죽음의 탕감길을 넘어가야
하나님은 수많은 예언자와 선조들을 보내시어 그 민족이 배반하면 그들을 벌하고 잘못된 길을 바로잡으며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셨던 것이다. 2천년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사람들의 소망인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의 운명을 인도하고, 세계적인 운명을 좌우할 책임을 질 메시아를 배반한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었다.

인간 시조가 타락한 것은 선조들의 수고가 없는 위치에서 되어진 것이었지만, 이 4천년의 역사를 통한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모셔야 할 입장에서 메시아를 그와 같이 대우한 것은 그때까지 수천년간 수고한 선조들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이며, 수천년간의 하나님의 수고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상, 예수님의 생애에 목적, 인류 전체의 목적에 대해서 그 이상의 죄는 없다고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 까닭으로 그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비참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를 읽어 보면 언제 어느 시대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고 학대한 민족은 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길리워져 온 민족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2천년간 여기저기 유랑민의 생활을 하고 어떠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민족관념을 주장할 수 없는 불쌍한 민족이 되고 말았다. 최후에는 제2차 대전 때에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대학살의 결과를 가져온 것은 당연한 보응이었다. 그것은 역사적인 탕감을 민족적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4천년간의 역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서 또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비참한 역사를 통하여 4천년간의 하나님의 수고의 기대 위에 쌓아 올려진 이스라엘 민족과 그 공적도 전면적인 파괴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기독교 신도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제2이스라엘 민족이 되어 국가적 기준을 중심으로 하고 세계적인 출발을 약속하기 까지 되었다. 메시아가 이상했던 기준은 영적인 기준으로서 진전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발전사인 것이다.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이 저질러 놓은 그 역사적인 죄행(罪行)을 청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을 지고 죽음을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이 죽는 것과 같은 탕감의 고비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정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가정끼리 죽는 것과 같은 탕감의 고비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민족끼리 그러한 죽는 것과 같은 탕감의 고비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순교의 길에서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의 탄식의 일단을 지상에 호소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라옵건데 부디 당신이 약속한 재림주를 보내 주십시오. 초림 메시아에 대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끝까지 불신하였지만, 저희들은 재림주를 사모하고 모시는 신앙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민족이 되었으니까 부디 저희에게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죽음의 탕감길을 넘어, 시체의 무덤을 넘어 하나님에 대해서 두 손을 들고 애걸하며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있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인 것이다.

2천년의 역사가 지나간 지금 수많은 피와 수많은 희생의 제단 위에 선 기독교의 이상은 세계의 태반(殆半)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다. 현세의 민주주의 세계는 기독교 문화를 중심으로 한 권내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섭리는 개인적 섭리시대, 가정적 섭리시대, 씨족적 섭리시대, 민족적 섭리시대, 국가적 섭리시대, 이렇게 점점 넓혀져 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이상에 합당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지금까지 섭리의 무대를 확장시켜 온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이상세계는 둘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뿐이다. 그런데 현세에는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 있는 크리스찬들이 교파끼리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대망하는 메시아를 보내지 않는다든가, 역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셔서 자기들을 남겼는가, 혹은 그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들이 잊어버릴 때는 크리스찬도 또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게 반대한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전세계를 통하여 외적 국가의 운세는 하나로 향한다. 그리고 그 외적 전세계의 이상의 중심이며 정신적 지도의 중심으로서 기독교계는 , 이른바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 기독교가 국가적 정신을 책임지고, 메시아 강림 때에 내외 일체화할 수 있도록 특권을 가졌던 것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다.

지금 지상에서는 세계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어디에라도 자유자재로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옛날의 로마에 해당한 것이 미국이다. 그들을 따르는 민주주의, 이것이 기독교를 중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5-31
하나님 주의, 하나님 사상
그러면 오늘날에 기독교는 어떠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마치 예수님 시대가 각 교파끼리, 분파끼리, 민족끼리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 곤란한 시기였던 것과 같이, 그러한 시기가 이 민주주의 가운데 시대상으로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를 가지고도 세계를 이끌 수가 없는 것과 같이, 당시 로마의 주의를 가지고도 세계를 이끌어 갈 수가 없었다. 로마가 지도하는 이상보다도 메시아가 지도하는 이상이 높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세계에서도 그러한 상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때에 내적인 입장을 지키고 굳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독교가 분파하여 싸우게 되면 이 종말시대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교단은 세계적 단결운동을 내부로부터 일으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원리가 나타난 한국의 상태는 과거 이스라엘 민족의 그 시대상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민주주의 속국과 같고, 신앙면에서는 교회, 교파의 대립, 분쟁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말이 안 될 정도로 신앙의 열의가 식어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 가운데 우리 통일교회가 그 명칭을 말하는 대로 통일이념인 원리를 가지고 있는 기대를 만들기 위해서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비참한 예수님 당시에 상응하는 굴욕의 노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많은 주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수많은 박해의 길을 걸어서 여러 가지 일이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이른바 승리의 기대를 만들어 왔다.

예수님의 이상이 로마를 시켜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 것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들의 이상도 일개국만의 이상은 아닌 것이다. 우선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 교파의 장벽을 타파하고 결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현세에 있어서 사상적인 단결인 것이다. 바야흐로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공산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이론에 있어서 실증적인 과학의 기대 위에 선 체계적인 이상관(理想觀)을 가지고 민주주의에 대결하고 있다. 이것을 이겨낼 사람이 필요하다. 유심관(唯心觀)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그야말로 실증적이고 실질적인 사상체계, 생활과정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체계, 생활무대를 움직여서 이상적 세계를 만들 수 있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사상체계가 갖추어진 이념이 나오지 않으면 이 공산주의를 타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타나지 않고 가인과 아벨이 최후까지 싸우면 함께 망하는 것이고, 둘이 다 멸망하면 구원도 아무것도 없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과 싸워 아벨을 죽였다. 가인이 하나님을 배반했다. 그래서 하나님 측으로서는 셋을 출산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거역한 가인이 먼저 치고 있다. 지는 편이 먼저 쳤다. 제1차 대전도 그러하고, 제2차 대전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맞는 편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반대하지 않고 죽지 않는 다고 하는 입장에 있으면 역사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맞은 자가 때린 자를 능가하여 주권을 세울 힘이 없으면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세우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세의 상황을 보면, 사상체계를 갖춘 세계주의, 세계주의와 함께 사상주의, 사상주의와 함께 정신주의, 이 세 가지 주의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주의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 주의는 현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능가하고, 실질적이고 실증적인 생활에 부합하고, 그리하여 종래에 전체의 가치를 가진 중심과 대체(代替)되는 것이다. 그 대체된 주의가 관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의 중심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러한 신앙의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이상체계라든가 사상체계라든가 혹은 종교체계라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해결되는 것이다.

15-33
하나님의 목적관에 맞는 가치
우리들이 생각하는 관념적인 하나님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전부터 알아 왔던 하나님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신앙을 통하여 숭상하는 하나님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우리들은 생활의 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정과 심정이 소원하는 것에 부응할 수 있는 그런 기쁨을 흠모하고 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계적인 지위나 명예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생활감정이라든가 그의 심정이라든가 사정에 부응하는 가치를 갖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가치가 세계의 어떤 사람에게도, 또 현재에 있어서의 2대 진영의 모든 사람에게 견주어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인정되어진다면, 그 사람은 역사를 초월하여 하나님까지 움직이게 할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심정이 있다. 인간은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하는 데는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은 소원을 통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더 나아가서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목적에 맞는 가치관, 개인의 가치관, 자기 가정의 가치관, 자기의 가정끼리 공통으로 갖는 가치관, 이것이 절대적인 가치인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의 목적관에 맞는 가치인 것이다. 그것은 먼 세계의 문제가 아니다. 직접 자기의 문제로서 생활가치 이상의 가치라고 안다면, 인간으로서 그 이상 가는 소원이 없고,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상 가는 성공이 없다.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의 심정 가운데서 혹은 희망 있는 인간생활의 수많은 요건 가운데서 무한한 가치적 존재로 흠모받고 칭송받는 존재로 계시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사람들이 먼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이상보다도, 무슨 주의보다도 생활사정인 것이다. 사정의 하나님이니까 생활사정에서의 인간의 가치가 세계의 모든 것 이상의 가치로 인정되는 사상이 나온다면 이 사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거기에 서 있는 심정 자체가 메시아의 심정이며, 그 심정이 필요한 것은 여하한 목적도 성취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그 사정은 생활무대에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정인 것이다. 천지가 갈라지더라도 하나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갈라지더라도 하나로 할 수 있는 사정인 것이다. 그 소원은 누구일지라도 공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원이다. 옆의 사람에게도 ‘그 소원은 나의 소원입니다’ 하고 그 성공을 기리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현대의 세상에 개인 개인이 서로 성공을 투기(妬忌)할 수 있는 감정이나 소원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에 철(撤)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심정을 보라. 하나님의 사정을 보라. 하나님의 소원을 보라. 모두 하나님이 목적관에 맞도록 하나님을 주체로 하고 우리들은 대상적인 입장에 서서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면 우리도 함께 기뻐한다. 내 기쁨은 하나님 자체의 기쁨이 되고 내 슬픔은 하나님 자체의 슬픔이 되는 존재의 기대(基臺)로 되어 있는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치는 우주의 그 어떤 물건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자기의 가치는 우주의 가치 이상이며, 자기가 생활하는 가운데 이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느끼는 그러한 기준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 메시아의 생활인 것이다. 그것을 개인 개인이, 그리고 가정 가정이, 또 씨족과 민족을 통하여 국가, 세계가 상속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던 세계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 자신이 창조이상으로 세우시려 했던 천국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생활 자체는 하나님의 가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셨다.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에 모여 있는 개인은 무엇을 바라야 되느냐? 우리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소원은 본연의 우리들이 원하던 집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원하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한 생활관념, 가정관념, 사회관념, 국가관념이다. 아직까지는 때가 오지 않았지만, 그때가 오면 이런 관념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기 쉬운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15-35
최고의 심판주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현세의 우리들로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자신이 심판하기 전에 우리들이 자신을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의 심판 때에 앞서 심판의 권위를 가지고 심판의 권위를 가지고 심판을 담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민족 이상의 심판을 통과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 즉 국가 기준 이상의 심판의 권위와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배후의 심정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가 하는 것을 원리에 의해서 배우고 있는 우리들은 모든 내정을 통하고, 심신을 통하고, 실천을 통해서 그 입장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2대 주의로 되어 있다. 즉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통일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점차 세계정부를 외치는 시세로 옮겨오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세우기 위해 경제적인 통합운동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대적하는 것이 있으면 부득이 힘으로써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섭리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각국이 연합한 국제적인 하나의 세계정부를 보장할 수 있는 방도도 나올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통일교회는 그것들보다도 훨씬 앞선 것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서 있는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기의 가정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를 심판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동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심판이란 무엇인가?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과 같이 하면 좋다고 하는 것이다. 목적은 거기에 있다. 즉 여하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죽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정말 거룩한 심판을 담당할 자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탄과 싸우는 데 실력으로 대항하고 올바른 입장에 서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심판을 하는 하나의 완전한 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금 불완전한 자의 기준으로부터 완전한 자가 되는 기준상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련과 존재가치의 위치가 그 내용에 해당하는 자인 것이다. 어떤 것이 진짜인가, 그것에 대항해서 도리어 역으로 부딪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어떠한 심판을 받을 것인가? 심판의 역사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악의 역사에 대하여 지지않고 최후에 남아서 그것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후에 남아지는 사람은 최고의 심판주인 것이다. 거기에서 금후 최후의 하나님의 이념에 맞는 어떤 세계적 움직임이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움직임은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일찌기 없었던 민족의 혼란과 혹은 세계적인 혼란의 조류 가운데서 부딪쳐 갈 사태가 예상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세계의 지도자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일본의 명도(名刀)를 만드는 데도 두드리는 법이 있다. 오직 한 곳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천주정신을 주입하고 천지의 힘을 합하여 해머(hammer)로 때린다. 하나의 해머에 자기의 힘과 함께 천주의 힘을 합해서 때리면 우리 동맥은 약동해 올 것이다. 우리들이 절대적인 심판의 천위(天位)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진대, 어떻게 해서 통일교회를 남아지는 교회로 만들 수 있을까, 시대는 지나가고 세계의 사상 주의는 지나 갈지라도 통일교회의 이념은 남을 수가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들의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최후와 우리들의 각오, 예수님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셨던가. 최후의 심판을 원하셨던 것이다. 불완전한 존재는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중에서 끊기는 것이 아니다. 현세에 와서 기독교회는 왜 힘이 없어졌는 가? ‘아, 이것은 안 되겠다. 저것은 안 되겠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안 되는 일이 안 되는 것일 뿐,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정한 사상관으로 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의 사상을 가지고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다면 거기에 따라서 행하라. 그리고 그것은 앞의 위치를 빼앗기는 것 같은 신앙관념 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밀어저쳐야 한다. 천번 만번 밀려올지라도 그것을 밀어저치고 자신보다 권위와 힘을 가진 모든 자가 인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시는 것이다.

15-37
심정심판
오늘까지의 기독교가 죽음의, 혹은 탕감의 조건을 세계적으로 세우는 그 역사에 있어서는 어떤 승리의 기준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탕감의 세계만은 아니다. 이상세계의 건설인 것이다. 이 이상세계에 가까와짐에 따라서 탕감의 세계의 최후의 한계가 나타날 것이다. 그 한계를 넘을 때는 과거와 같은 신앙의 상태로서는 안 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현세의 인류가 흠모하고 있는 최후의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곧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이상세계인 것이다. 전부를 포괄하고 전부를 포용한 완전한 소원…….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의 것을 놓아 두고 다른 것으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그 완전한 것을 목표로 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와 문화의 원천으로 되어 온 종교가 최후의 단계에 와서 그 자체가 화해한다고 하는 것은 최후의 역사가 가까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느껴야 하느냐?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는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의 탕감의 조건을 세우셨다. 즉 희생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희생으로 시작해서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희생으로 시작한 역사를 때려치고, 심판해 버리고 새로운 이상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심판을 거쳐 이상 단계에 달한 완전한 개인, 완전한 가정, 완전한 세계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신다. 그 완전한 이상을 예수님은 가르치지 못하셨다. 성경에는 아무리 읽어도 그런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사회를 떠나 있는 것이었다. 사탄세계의 한가운데 들어가서 이것을 사방 팔방으로 물리치는 힘을 가진 종교는 생활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의 철저한 생활기준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의 편이다. 하나님이 안쪽이라면 인간은 바깥쪽에 있어서 일체라고 하는, 내가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나도 슬프다고 하는 종교의 목적을 완성한 종교의 가치, 우리들은 그 의미와 가치를 알고서 종교관념이 우리의 생활이 근원이 되는 이상이라고 하는 견해로 이 종말의 시기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심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세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 전에 자기 개인을 심판하라.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서인가? 중심을 기준으로 하고서이다. 중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데 하나님이 외적인 것으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 지상에 대한 명령관계 등을 가지고 심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심정을 중심하고 심판하라. 문제는 간단치 않다. 따라서 금후의 세계를 움직일 이상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통하는 심정적인 것이다. 그 심정을 중심으로 하는 곳에는 평화가 없을 수 없다.

그러면 심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경에 이어지는 모든 것을 맡고 있다. 그것은 생활관념 등 모든 것을 통과할 수 있는 내용과 힘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근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심정이니까 생명을 부정하더라도 심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심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심정은 존재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교회는 심정을 중심으로 하고 산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심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심정이라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심정이 긴 것이냐, 둥근 것이냐, 높은 것이냐 하고 따져 묻는 다면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이 떠나면 그리움이 가득히 고여 온다. 신경의 최고 촉감까지 가득히 괴어 온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득히 차 온다.

우리는 오감으로 한계를 잴 수 있는 그런 심정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설명은 되지 않으나 확실히 충일(充溢)되는 것이다. 거기에 접하면 닫힌 입이 열려진다. 울고 있는 눈이 반짝반짝 하고 웃는다. 사색(死色)을 하고 있던 사람이 평화스럽게 된다. 그것이 사라지면 비참한 것이다. 그것이 찾아오면 세계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정만 하여도 이러하니까 절대적 심정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그 심정에 접한 사람은 어떠할 것인가? 이것은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심정주의를 , 심정 이념을 중심으로 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통일용사들인 것이다.

15-39
우리의 목적과 책임
그러면 심판은 어디서부터 하는 것인가? 심판의 한계는 어디까지 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이 복귀의 최정점으로 하는 것은 국가인 것이다. 앞에서 예수님의 소원은 국가라고 하였다. 그 국가는 이상국가인 것이다. 지금의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심정심판의 한계를 넘은 개인들이 모여 가정, 민족, 국가를 이룬 것이다.

이렇게 ×를 그려 보자. ×를 그릴 때 부작용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교차점에서 일어난다. 통일교회가 이 세계에서 어떤 시대에 한 점을 일으켜 교차하는 곳에는 부작용이 일어난다. 개인에 있어서는 육심과 양심의 경계에서 부작용이 일어난다. 개인으로부터 가정에, 가정으로부터 교회에 부작용이 일어나고, 만약 통일교회가 동경에 나타나면 동경의 모든 교회에 부작용이 일어난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회운동의 문제가 된다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이상세계 실현으로 나타날 것 같으면 문제가 일어난다.

그러면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 부작용을 막는 것이 심판인 것이다. ‘반대하는 자는 죽여 버려라’고 하는 것은 통용되지 않는 다. 그 부작용을 그대로 두다가는 하나도 남아지지 않는다. 하나도 용서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상대를 세워라. 내가 죽는 위치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까 참으로 불행한 입장에 들어서 사는 그 일에 의해서 두 입장의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까닭에 교차하는 일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니까 교차하지 않고 뒤에 붙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함께 평행 위치를 지키고, 함께 가더라도 부작용은 없는 것이다. 부작용이 일어날지라도 둘 가운데서 통일교회식구는 그 입장을 취할 수가 있지만 상대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를 앞에 세운다. 그러한 방침을 세우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최고로 완전한 것은 최고로 불완전한 곳에 가도 점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본의 맨 밑창에 들어가서 폐품 수집을 하는 것은 물론, 몇 천 만, 몇 억을 가진 재벌 앞에 가서 ‘신문 한 장 주십시오’ 하더라도 당당한 심정으로 달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1년이 경과하고 2년이 경과하여도 때의 경과와 함께 반대방향에는 부작용이 일어난다. 최하급에서의 일이 최상급에서 부작용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을 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일본을 복귀하려면 세계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을 복귀하기까지 일본의 통일교회를 필요로 한다. 일본이 복귀되면 일본의 통일교회는 필요치 않다. 따라서 세계를 복귀하면 통일교회는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더 큰 것이 필요하니까 작은 것을 세우시는 것이다. 세우시는 데는 완전한 것을 세우신다. 이 위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것에로의 고통의 길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완전한 것,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만이 대상이 아니다. 세계를 보라. 세계복귀를 위하여 우리는 생활에서 부딪친다. 심판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를 친다. 예를 들면 ‘저쪽으로 가지 않겠어? ’ 하면 ‘가’하고 한마디로 명령하여 자기가 자기를 차 버린다. 전세계를 울릴 수 있는 영웅을 만드는 데는 선생님은 진지한 자리에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보통으로 여기고, 채찍을 맞더라도 보통으로 여긴다. ‘때려라. 때리는 네 손이 아픈가, 매를 맞는 나의 정강이가 아픈가 보자. 살가죽이 찢어지는 가 때려 보아라’고 한다. 과거에도 여러 번 그랬다. 그 입장 이상의 효행자, 그 이상 전세계를 울릴 수 있는 효행자, 그 이상 하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효행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도 하고도 하늘에 감사하는 효행자는 하나님을 울리고 세계를 울린다. 세계를 울리는 자는 모든 것을 움직인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자는 모든 것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심정의 기초를 쌓아온 것이다. 개인이 그러한 생활을 하면 개인의 심판을 완성하는 것이다. 가정이 그러한 생활을 하면 가정의 심판이 끝난다는 것이다. 통일교회가 그러한 생활을 하면 이 일본에서는 통일교회가 조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 전국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일본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인류 전체가 할 수 없는 일을 일본 국민이 앞장서서 하면 일본 국민은 세계를 리드하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격에 합당한, 그러한 이념과 그러한 완성의 기대가 된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남아질 수 있는 천국의 백성인 것이다.

우선 일본을 복귀하라. 선생님 이상으로 사랑하라. 세계를 선생님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하라. 하나님 아버지를 선생님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하라. 만약 그대들 앞에 선생님이 쓰러지면 선생님이 시체에 매달려 울어서는 안 된다. 선생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누가 사랑하느냐? 선생님이 사랑하는 인류를 누가 사랑하느냐? 선생님이 사랑하는 천주를 누가 사랑하느냐? 선생님이 진 책임을 누가 지느냐? 그렇게 사랑하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께 탄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남기고 싶은 말이다.

우리들은 이 시대와 이 환경에서 심판의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판받을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그들을 구원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거든, 부디 눈물과 함께 피와 함께 땀과 함께 그들을 구원하기 까지 노력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지상에서 그 무엇을 얻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늘에서는 최고의 승리자인 것이다. 이 곤란한 세계의 사정과 운세 가운데에서 통일의 식구가 각국에서 어느 누가 움직일 수 없는 기반을 만든다면, 세계는 재창조, 재부활할 수가 있다고 하는 자신을 가지고 나아가 주기를 바란다.

15-42
기 도
하나님 아버지여! 이렇게 해서 참으로 당신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눈물 빛도 그 맛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흘린 눈물과 땀의 그 고통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심정을 짜면서 지금까지 역사를 움직여 나오신 그 수고의 심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웃는 그 이상(理想)의 얼굴이 필요합니다. 보좌에 앉으셔서 승리의 권세를 가지고 천주를 명령하는 그 당당한 의기와 몸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여!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통일교회 무리들을 갖추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의 경지를 참고 가는 가련한 무리들을 필요로 하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과거의 중심인물들이 섰던 위치에 세울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일찌기 최고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죄악 가운데서 슬픔의 역사로 흘러왔습니다. 부디 과거의 조상들이 범해온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혹시 일본이 과거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이 일본 통일교회 식구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수고를 보고 용납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 나라 가운데 하늘에 대하여 충성을 다짐하는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이 일본의 장래에 새로운 방향을 나타내실 것을 약속해 주실 당신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굳히어 하늘을 향해서 일어섰습니다. 아버님을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이 일본을 짊어지고 세계 어디까지라도 갈 하늘의 용사로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이들을 인정하시고 이 훈련받은 사람들을 믿는 다면 세계 어떠한 곳에라도 이 민족을 앞에 세워 주실 것을 원하는 바입니다.

아버지여! 특히 지금까지의 역사상에서 비참한 길을 더듬어 온 동양문명권에 있는 모든 백성을 사랑해 주십시오. 물질 문명이며 외적 문명인 서양문명권 앞에 동양문명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든 것은 내적 위치에 서는 자에 의해서 주관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에 의해서 드디어 서양문명은 동양의 문명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역(逆)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동양이 내적 정신 문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시대가 되어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현실에 있어서 동양만이 아니고 우주 전체에 대처하여, 우주 통일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우리 통일교회를 이 동양의 일각에 세워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부디 지금 사탄의 속박 가운데서 고통받고 참고 탄식하는 인류를, 우리들의 손에 의해서, 우리들의 피와 눈물과 땀을 통하여 구할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우리들이 힘을 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들에게 결심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