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2 to 14-324: 뜻 앞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뜻 앞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1965.01.10 (일), 한국 전본부교회

14-282
뜻 앞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기 도]

저희의 마음을 가라앉히시어 아버지께서 운행하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는 사정과 형편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사옵니다. 귀한 이들이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당신께서 살펴 주시고, 몸으로 무엇을 행하는지 당신께서 살펴 주셔서 이들의 마음과 몸이 하나된 그 기준 위에 아버지,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이들 전체가 하나의 마음과 몸으로 화하여 분부하고 싶어하시는 당신의 간곡한 심정을 체휼할 수 있고, 지금까지 저희를 찾아 나오시기에 수고하신 당신 앞에 ‘저희가 당신의 아들딸입니다’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또한 자녀의 명분을 갖추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실 때, 많은 사람과 많은 민족은 있으되 없는 것만 못하고, 많은 사람이 자녀의 명분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그들 또한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많은 사람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한 사람이, 많은 무리보다도 한 중심이 문제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한 한 분이시듯 아버지 앞에 완전한 하나의 실체적인 대상으로서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는 중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오늘날까지 완전하신 당신의 마음을 완전히 닮을 수 있고, 완전하신 당신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완전히 체휼할수 있는 그 중심을 찾고 계신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희들은 그와 같은 중심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살고 있사옵니다. 저의의 손이 거룩하지 못하고, 저희의 발이 거룩하지 못하고, 저희의 눈과 귀와 저희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가 거룩하지 못하옵니다. 때문에 당신 앞에 설 수 없는 사지백체인 줄 아오나, 당신께서는 사랑의 은사로 저희에게 ‘사죄의 은사를 주마’고 약속하시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사오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아들의 이름을 주마’고 약속하셨사옵기에, 허락하신 그 말씀과 약속을 바라보고 이 시간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진정으로 아버지를 부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중에는 남의 아버지도 있고, 의붓아버지도 있고, 참아버지도 있사오니, 참아버지를 부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마음과 몸을 합하여 나간다면 심정과 더불어 품어 주실 아버지, 저희들의 아버지, 저희가 할 수 있는 충성을 다하고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불리움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로서 당신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모두가 알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 가운데에는 잘난 사람이 없사옵니다. 죄악에 물든 추악한 사탄의 피를 받아 사탄세계의 모든 흠을 갖고 온 저희들이기에, 당신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하오나 당신께서 사랑의 은사로 다시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서는 스승도 원치 않사옵고 잘난 사람도 원치 않사옵니다. 어떤 권위를 가진 사람도, 학술적인 내용을 가지고 말할 줄 아는 사람도 원치 않사옵니다. 다만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심정과 당신의 사정을 느낄 때 마음과 뼈와 살이 녹아질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으로 엉클어지기를 원하오니, 오늘 그와 같은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허락하신 이 성일은 금년에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이오니,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물 앞에 복을 빌어 주고, 만세에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사온데 저희의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며, 저희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사옵니까? 자기를 위해 무엇을 찾고 자기의 염려에 사로잡혀 사망길을 헤매는 저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도 잊어버리고 사망선을 밟고 올라서서 아버지의 인연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뜻 앞에 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 아버지 앞에 사랑의 존재로 다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있는 전체를 아버지 앞에 바치고 새로운 각오와 결의 밑에서 새로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새로운 용기와 신념을 북돋우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특히 이 시간에는 아버지 앞에 머리 숙여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회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할 수 있는, 땅에 한번밖에 없는 기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그럴수 있는 아버지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진 것은 없지만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의 모든 외적인 문제를 대신할 수 있는 충성스런 모습이 되어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민족을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사옵니다. 이 민족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었사옵니다. 그런 자리에서 저희들이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권고해 주셨기 때문임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이 이 민족을 넘어 세계까지 연결되어 있기에, 공산 세계에도 저희들의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아옵니다. 엄청난 이 대과업에 어찌 슬픔이 없겠사오며, 어찌 괴로움이 없겠사오며, 어찌 비참한 일이 없겠사옵니까? 그러나 저희들은 지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죽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여 민족 전체가 아버지를 환대할 수 있는 그날까지 참아,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 이 고난의 민족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드려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사옵니다. 당신께서는 저희의 어려움과 낙망하고 있는 사연을 아시오니, 당신의 귀하신 뜻과 더불어 이 민족을 염려하여 주시옵고 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외로운 이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더라도 항상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더우기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눈물 흘리며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무리가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의 진정한 기도를 들어 주시옵고, 그들의 진정한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이들 앞에 소원의 한 날, 민족 전체 앞에 아버지의 뜻을 증거하고 아버지를 소개하며 기뻐할 수 있는 그날을 어서 속히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섰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무슨 말을 하오리까? 눈물과 피와 땀 밖에 드릴 것이 없고, 무엇 하나 말할 것이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의 이 간곡한 사정과 간절한 사연을 들어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사. 여기 찾아왔던 발걸음이 헛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저희의 귀를 거룩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느끼는 저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어서,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정하시면 저희도 정하고, 아버지께서 동하시면 저희도 동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면 저희도 기뻐하고, 아버지께서 슬퍼하시면 저희도 슬퍼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와 일심동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사지백체가 아버지와 일체되어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의 새로운 뜻을 놓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도 이 복음을 위해 남몰래 고생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을 아버지께서 친히 위로하여 주시옵고, 그들에게 평화의 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만사 위에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원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14-286
말 씀
오늘 여러분에게 ‘뜻 앞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혹은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루를 사는 데도 어떤 목적이나 뜻을 세워 놓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하루 하루의 생활태도입니다. 한 달, 혹은 일년을 지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4-286
뜻이 필요한 이유
여러분은 자신이 이 땅 위에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루를 넘어 생애노정을 걸어가는 데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세워 놓고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그러하듯이 인간들이 모여서 이룬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개의 국가가 한 국가로서 백년대계 혹은 천년대계를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 그 국가의 운명도 역시 어떠한 뜻을 중심삼고 나가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이 그러하고, 가정이 그러하고, 사회, 종족, 민족, 국가가 그러하듯이, 범위를 좀더 크게 생각해 보면 세계 역시 그러한 뜻을 중심삼고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아 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도 역시 어떠한 뜻을 중심삼고 천주를 움직여 나간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한 개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나 한 나라가 하루 하루를 살아 나가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어떠한 뜻을 중심삼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운세 역시 뜻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방향으로도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도 역시 이 천주의 대운세를 어떤 목적과 어떤 섭리의 정점을 향하여 몰고 나가시기 때문에, 이 천지를 그 섭리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짐작해아만 되겠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생각할 때, ‘뜻앞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즉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 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스스로 요구하는, 혹은 스스로 개척해야 할 뜻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개체가 그런 입장에 선다면 가정이 그러할 것이요, 그러한 가정이 모여 종족을 이루면 그 종족 역시 그러할 것이요, 그러한 종족이 모여 한 국가를 이루면 그 국가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전체를 움직여 나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뜻을 중심삼지 않고 나가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타락하지 않고 본향의 세계로 계속 발전되어 나왔다면, 이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 곧 뜻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요, 뜻을 벗어나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생활 자체가 뜻을 향한 생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어떤 뜻을 세워 놓고 그 뜻을 중심삼고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타락한 까닭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가 이룩되었던들 하나님도 달리 뜻이라는 것을 세워서 인간과 더불어 관계맺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입장에서, 하나님도 뜻에 귀일된 입장에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떠한 뜻을 세워 관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뜻이 필요한 것은 타락한 연고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을 심판해서 청산짓고 제거시켜서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본연의 개인과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뜻을 다시 한번 세우기 위해 역사는 오늘날까지 뒤넘이쳐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이 땅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으되 아직까지 천지를 창조할 당시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그 본연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뜻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뜻 가운데는 하늘땅이 다 들어있고 세계가 자동적으로 하나 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지역에서 혹은 수많은 환경에서 개인적인 뜻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족, 민족, 국가, 세계도 그 뜻을 찾아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개인, 즉 창조 당시에 인간과 더불어 세웠어야 했던 본연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개인, 그 뜻과 일치될 수 있는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에 뜻을 따라 나가는 섭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받들어 나가는 사람이 그 뜻을 세워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 뜻은 개인을 수습할 수 있는 뜻이요, 가정을 수습할 수 있는 뜻이요, 본래의 소원을 수습할 수 있는 뜻입니다. 또 그 뜻은 역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시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미래와 관계맺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뜻을 세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14-288
뜻은 어디에 나타나야 하는가
그러면 그 뜻은 어디에 나타나야 하느냐? 인간과 관계맺은 뜻이라면 그 뜻은 기필코 인간세계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면 그 뜻이 언제 어디로 우리를 찾아올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불변의 뜻을 세운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과 더불어 이 뜻을 성사시켜 나오실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성사시켜야 할 뜻인 동시에 인간이 받들어 이루어야 할 뜻입니다. 역사는 지금까지 구원섭리노정에서 부대끼고 깨어지면서 그것을 다시 재기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반복된 역사를 거듭해 나오면서도 하나 남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뜻입니다. 이 뜻,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 가정적인 뜻과 민족적인 뜻, 그리고 국가적인 뜻과 세계적인 뜻은 반드시 이 땅 위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비약된 세계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을 해방하는데 있어서는 개인을 빼놓고 가정을 세울 수 없고, 가정을 빼놓고 종족을 세울 수 없습니다. 또 종족을 무시하고 민족을 세울 수 없습니다. 또한 민족을 무시해 버리고 국가를 세울 수 없는 것이고, 국가를 무시해 버리고 세계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한 개인이 얼마만큼 큰 뜻을 품고 나가느냐에 따라, 즉 한 개인이 얼마나 큰 사상을 갖고, 역사와 시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의 뜻을 품고 나가느냐에 따라 발전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세운 뜻은 그들 스스로가 주장한 뜻이 아닙니다. 시대적인 책임을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짊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뜻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인간들은 몰랐지만 배후에 그런 인연을 갖추어서 이땅에 왔다간 사람들이 선지선열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 나라를 중심삼고 보면 거기에는 충신이 있습니다. 모든 국가의 배후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큰 뜻을 세움으로써 개인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혹은 가정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혹은 종족적이요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책임,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혹은 역사의 한 분야에서 시대사조와 반대되는 책임을 짊어지고 와서 그 사명을 다하고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서도 개인으로서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명자, 아벨의 사명과 뜻을 대신할 수 있는 가정의 대표자, 혹은 종족의 대표자, 민족의 대표자, 국가의 대표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러한 대표자를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이 사실이요, 또 이 땅이 악하다는 것도 사실이거늘, 이 악한 땅을 그냥 그대로 두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대신할 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계 만민, 즉 30억이면 30억 세계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 혹은 역사와 시대에 있어서 그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섭리라는 명사를 세우시고 인간과 더불어 관계맺어 오신 역사적인 배후에는 어떠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유일무이하시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섭리적 개체인 한 사람이 세운 뜻이기 때문에 역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 분도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시대를 초월한 한 대표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4-290
역사적인 개인
기독교 역사, 더 나아가서 유대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인간과 관계를 맺고 역사와 관계를 맺으며 오늘날까지 나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하나의 이념적인 형태를 갖추어 그 역사의 시대시대에 반응을 일으킨 민족사와 국가사를 이루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사가 있기 전에 먼저 종족사가 있어야 되고, 종족사가 있기 전에 가정사가 있어야 되고, 그 전에 개인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개인사를 연결하여 역사노정에 면면히 빛낼 수 있는 뜻의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이 땅에 뜻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하나의 개인을 세우셨는데, 그런 공의의 존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워 놓고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너는 네 개인을 위해 살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유대 나라를 대신하여 하늘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이 땅에 아들딸을 낳고 부모를 모시고 잘 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라’고도 하시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자리 펴고 자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 장사였던 연고로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인류 복귀를 위해 그런 아브라함에게 ‘그 환경에서 벗어나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우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죄악된 인간들이 살고 있는 가운데에 혹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사는 가운데에 세울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은 본래 아담이 만물 위에 세우려 한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뜻을 세우기 위해 세우신 아브라함은 그런 자리에서 모든 것을 행해야 했습니다. 마음으로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념을 갖되 그 이념이 갖고 있는 내용을 재고하고 자신의 환경이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으면 그런 환경을 벗어나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얽히어진 잘못된 모든 죄상을 전부 벗겨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계에 있어서 어떠한 한 개인이 자기의 사정에 개의치 않고 인류를 위한 터전을 마련한다면 누구든지 그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이 그러하다면 가정도 그러할 것이고, 민족, 국가도 그러할 것입니다.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싸움, 국가의 생명을 좌우하는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원수와 최후까지 싸워서 그 나라의 행복을 세운 사람이 있다면, 그 역사적인 사람을 그 나라의 국민 전체가 잊을 수 없어 할 것이요, 그에게서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상도 그와 더불어 세우고 싶어하고, 전통도 그와 더불어 세우려 하고, 생활도 그와 더불어 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한 인간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인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14-291
하나님과 다른 사탄의 근성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부를 시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너로부터다’ 하실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기를 ‘정든 고향산천을 버리고 행낭 보따리를 싸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라. 네 사랑하는 부모와 가정과 종족도 다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일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모험이었습니다.

부모와 갈라지게 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던 그 가정의 터전이 아무리 아깝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환경이, 혹은 종족적인 기반이나 민족적인 기반이 아무리 아깝다 하더라도 다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떠날때도 ‘오! 내가 잘살기 위해서 간다’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번성하리라’고 축복하셨던 것은 아브라함 일개 가정을 위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잘살게 하고, 아브라함 한 개인에게 복을 주기 인한 축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한 개인을 들어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세계사적인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에게 내린 축복이었지만 세계의 대표자로서의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었기에, 그것은 영원불변한 뜻을 펴나갈 수 있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축복 가운데는 가정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종족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민족, 혹은 국가, 세계가 모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에 그 축복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나중에 하나밖에 없는 만득자 이삭을 번제하라고 명령 했을 때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 번제를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오늘날 현실적인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도 정신 나갔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역사를 심판하고 시대를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역사는 망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세운 생활적인 터전과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서 만세에 영원히 복되게 살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그런 명령을 아니 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큰 뜻을 세우는 데 있어서 인간이 타락했다고 인간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사탄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탄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사탄으로 하여금 공격 역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근성은, 사탄의 속성은, 사탄의 욕망은, 자기를 위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끌어다가 ‘나를 위해라’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가? 사탄은 모든 일을 자기를 위주로 합니다. 자기 가정을 위주로 하고, 자기 아들딸을 위주로 하고, 이 세계가 전부다 자기를 위주해서 살아야 할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근성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당신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정을 위하고, 종족을 위하고, 민족, 국가를 위합니다. 보다 더 큰 것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전체의 가치가 나에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선(善)이란 나를 넘어서 더 큰 것을 위하는 것이요, 악(惡)이란 세계보다 나를 더 위하는 것입니다.

섭리의 뜻을 대한 아브라함은 언제나 자신을 위주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자기의 가정을 위주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었고, 또 자기 아들딸을 위주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하려 할 때 ‘이삭아, 네가 나의 아들이지만 나는 너를 위주하지 않고 너보다 더 큰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세계보다 더 큰 하늘을 위하여 너를 번제드리는 것이다’ 하며 칼을 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자기 가정을 전부 하나님의 뜻앞에 결부시키기 위해 쌓은 제단이 이삭 번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해 나온 역사적인 대표자들은 그 시대를 대표한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인 기준을 세워야 할 책임까지 짊어졌기 때문에 그들 앞에는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시련과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4-293
복귀섭리의 공식
복귀노정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 이렇게 7단계 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7단계지요? (판서하심)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경륜해 나오시는데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이 불변의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뜻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뜻 앞에 개인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요 높이(가정)에 해당하는 심정이 요구되었습니다. 가정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개인이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 즉 죽지 않을 만큼의 시련을 가한 후에야 비로소 가정으로의 출발을 시켰던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되 반드시 환경에 부딪치게 하여 거기에서 승리해야 축복을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위로는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옆으로는 환경의 책임을 짊어지고 뒤넘이쳤던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아브라함은 여기(가정)에 해당하는 뜻을 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은 뜻과 언제든지 일치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 이었습니다. 또한 뜻을 중심한 개인과 가정의 터전을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아브라함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대한 아브라함은 개인의 시련을 받는 동시에 가정의 시련까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개인적으로 승리한 뒤에는 가정적으로 출발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한 개인이 출발할 때 가정적인 시련까지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개인적인 시련은 물론이요, 가정적인 시련까지 받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정을 중심삼고 설 수 있는 환경적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인을 터로 한 가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뜻을 품고 생활을 하되 가정과 뜻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엔 역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행동이란 방향 제시입니다. 환경이 어지러워 뜻앞에 설 수 없을 땐 그 환경을 정비해야 했습니다. 원수가 덤빌 땐 또 그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환경 속에서 뜻을 품고 생활무대에서 개척자로서의 행동을 했습니다. 또 그는 세계사적인 대표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3개 민족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거기에서 굴복당하고 쓰러졌다면 뜻을 세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하다 간 수많은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을 볼 때, 하나님 앞에 영원한 승리자로 결정될 수 있는 최후의 책임과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뜻입니다, 뜻. 영원불변한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더라도 이 뜻만은 남아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 뜻을 빛낼 수 있는 생활과 행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에 이 뜻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개인을 불러 세워 선민의 발판을 닦아 나오셨습니다. 그것이 야곱 때의 역사입니다. 야곱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갖춘 다음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 땅에 들어가 민족의 발판을 닦으면서 가정적인 축복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언제나 한 단계 앞당겨서 준비했던 것입니다. 만일 준비없이 축복을 받았다가는 대번에 깨져 나가게 됩니다.

축복의 기준을 세우는 데는 개인이면 개인으로서의 시련이 있고, 가정 이면 가정으로서의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종족이면 종족으로서의 시련이 있고. 민족이면 민족으로서의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고,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종족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종족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고, 민족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시련을 거쳐야 하며, 국가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적인 시련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공식입니다.

14-295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키려 할 때는
그러면 하나님은 이 사탄세계에 한 개인을 세우고 한 가정을 세워서 그 터를 잡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실 것인가? 싸움을 붙이기 위해서는 이 사탄세계의 전체 가정을 일치단결시켜서 결속된 입장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전통과 습관과 태도를 진부 희박하게 만들어 놓고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가 불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환경을 재검토하게 되고, 새로운 그 무엇을 찾게 됩니다. 하늘은 이런 환경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한 개인을 세워 사탄세계에 싸움을 붙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권은 혼란된 환경에 있기 때문에, 그때 강하고 담대하게 전체를 위하는 뜻을 품고 전체를 위해 생각하는 태도를 갖고 전체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탄편은 자기들도 모르게 자연히 그 사람 주위에 들어와서 그 환경을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뜻보다 낫고, 자기들의 생활 태도보다 낫고, 자기들의 행동보다 낫기 때문이지요. 가정이면 가정도 역시, 종족이면 종족도 역시 그런 환경을 거쳐서 세계적인 목적의 세계를 향해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를 보아도 온통 싸움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오는 데에 온갖 싸움투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도 원수들이 나타나서 그가 가는 길을 막았었고 야곱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고용살이할 때, 라반이 열 번씩이나 속였지만 그것을 참고 21년을 보냈기 때문에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라반과 그의 딸들이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에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우상을 훔쳐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민족을 출발시키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키려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사탄세계를 혼란시키십니다. 그런 다음에야 역사적인 새로운 중심을 세워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편에서 하나님편을 옹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20세기의 종말에 있어서 하나님이 세계사적인 뜻을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 민주주의면 민주주의가 자랑하는 사상과 전통, 그리고 공산주의면 공산주의가 자랑하는 사상과 전통을 서로 부딪치게 하여 분열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종말시대가 가까와 오면 가까와 올수록 세계적인 뜻을 세우시기 위해 사탄편의 배후에 하나님의 뜻을 옹호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어떤 개인을 위한 뜻이 아니요, 어떤 가정을 위한 뜻도 아닙니다. 또 어떤 종족만을 위한 뜻도, 어떤 민족만을 위한 뜻도, 어떤 국가만을 위한 뜻도 아니고 현 지구상의 세계만을 위한 뜻도 아닙니다. 그 뜻은 보다 큰 만우주를 위한 뜻인 것입니다. 때문에 그 뜻은 넓고 크고 또 그만큼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뜻을 품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정적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떠한 종족적으로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또한 어떠한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인 어떤 주의사상을 중심삼고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만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끝날에 그 뜻을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 개인적인 뜻을 대표하여 세운 사람은 아브라함이요, 가정적인 뜻을 대표하여 세운 사람은 야곱이요, 민족적인 뜻을 대표하여 세운 사람은 모세요, 세계적인 뜻을 대표하여 이 땅에 세우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유대 나라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 민족은 모세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에 4천년 동안 로마의 속국이 되어 압박받는 불쌍한 입장에서도 ‘메시아가 오면 모든 나라가 우리 앞에 굴복하고 충성할 것이다’하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 민족을 발판으로 하여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이지, 유대 나라만을 위해서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던 것이지, 유대 민족만을 위해 오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4-297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란 하늘과 땅, 즉 천지가 합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영계에 있는 영인과 지상에 사는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일개 국가면 그 국가의 영토 내에 사는 사람을 자기 나라의 백성이라 하고, 국경선 내에 있는 땅을 자기 나라의 영토라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위주로 하여 하늘과 땅, 즉 무형세계와 유형세계 전체를 영토로 삼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이 땅에 왔다가 하나님을 위주하고 살다 간 수많은 영인들과 오늘날 현세에 하나님을 위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후대에 있을 수많은 후손들까지도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천주적인 뜻이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런 뜻을 중심 삼고 그런 이념을 중심삼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만우주 존재가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최대의 목적점이기 때문에 그 점만 나타나면 우주는 통일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났든 못났든 전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세계를 제패해 보겠다, 천지를 내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된 것은 그러한 배후의 이념과 관계권내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뜻은 천지가 바라는 뜻이요, 인류 대대 어느누구도 싫다고 하지 않을 뜻입니다. 과거에 왔다 간 성현 군자들도 좋아하는 뜻이요, 오늘날 이 시대에 국가를 지도하는 수많은 위정자들도 역시 좋아하는 뜻이요, 우리의 후손들도 좋아할 뜻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은 역사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이런 시대권내에 있어서나 이념권내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러한 뜻을 위해 책임을 해 나가는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이지, 어떤 개별적인 인간이나 개별적인 가정, 그리고 개별적인 민족이나 개별적인 국가를 찼아오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을 발판으로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이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찌하여 이방 종교를 수습해 나왔느냐? 세계적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섭리적인 관점으로 볼 때 예수님이 그러한 천적인 뜻을 대표하여 이 땅에 오셨다면, 그는 전체적 뜻에 해당되는 거대한 원형을 그릴 수 있는 생활적인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세계사적인 책임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싸워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은 가정적인 기준과 책임을, 가정은 종족적인 기준의 책임을, 종족은 민족적인 기준의 책임을, 민족은 국가적인 기준의 책임을, 국가는 세계적인 기준의 책임을 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기준의 책임을 지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인 뜻을 완수할 수 있는 생활기준과, 가정적인 뜻을 완수할 수 있는 생활기준과, 종족적인 뜻을 완수할 수 있는 생활기준과, 민족, 국가, 세계적인 뜻을 받들어 세울 수 있는 생활기준을 세워 나가야 됩니다. 메시아는 종적 섭리의 대표자로서 모든 섭리의 기준을 종합한 형태를 역사상에 전개시켜야 할 인격적인 종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찾아 세웠던 개인를 뜻을 세계적인 기준으로서 완결지을 수 있는 대표자요, 야곱이 세웠던 가정적인 뜻을 세계적인 가정으로 세울 수 있는 대표자였습니다.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가 당한 시련과 고통이 그 당시에 있어서는 그 국가적인 한계권내에 있지만, 국가적인 한계를 넘어 세계권으로 들어갈 때에 세계사적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과거 선조들이 세워 놓은 횡적인 모든 기반 위에 탕감기준을 세운 후 그것을 전부 전개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0년 사생애 동안에 무엇을 해야 했느냐? 과거 역사를 수습해야 했습니다.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과거 역사를 수습해야 했던 것입니다.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친척을 수습함으로써 종족 중에 모범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줄 수 있는 직계 혈통, 즉 종손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손이 모범적인 기준을 세워 예수님의 이념을 민족적인 사상으로 전개시켜 나가야 하고, 유대교는 물론 유대 나라까지도 소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책임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30년의 사생애 노정에서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을 전부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했으니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14-299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첫째는 요셉 가정이 책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종족적인 대표자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가정적인 책임을 하지 못하고, 세례 요한이 종족적인 책임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세례 요한은 종족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친척들을 모두 규합시켜 하나의 내적 기준을 세웠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중심삼고 모범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유대교 사상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 오게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명 때문에 세례 요한이 나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 사회는 로마로부터 업신여김당하고 피폐 상태에 있어서 시대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장들이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 상황에서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그때까지의 제사장들이 세워 나온 역사적인 전통만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규합시킬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사상적 터전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같은 특별한 선지자가 나와서 시대에 없는 선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에 모든 유대교인은 세례 요한을 종족의 대표자로 세워서 민족을 움직일 수 있는 종손을 만들므로써 국가적인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30년 사생애 노정 동안에 이루어져야 한 일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은 개인적인 부활체, 가정적인 부활체, 종족적인 부활체, 민족적인 부활체, 국가적인 부활체, 세계적인 부활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생활 가운데에서 횡적으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의 종합된 실체의 입장에 서야만, 그런 기준 위에 서야만, 모든 부활의 실체로서 역사적인 모든 것을 상속받아 가지고 시대적인 부활체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실권을 세울 수 있는 상속의 터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출발해야 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14-300
예수님이 겪으신 시련과 탕감의 생활
그러면 예수님의 개인 출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가정입니다.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교법사들이 예수님 개인의 터전이 되어 주었더라면 예수님은 가정적인 터전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가정들이 예수님의 가정적인 터전이 되었더라면, 예수님은 그 가정들을 모두 규합하여 종족적인 터전을 마련하고 민족적인 터전과 국가적인 터전까지 마련한 후 그 위에 역사적인 전통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예수님은 비참한 환경에 놓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오! 예수님의 세 제자, 오! 예수님의 12사도’라고들 하지만 그렇게 못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어부를 찾아 다녔겠습니까? 거기에는 역사적인 고충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워 놓은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이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메시아가 왔을 때 제대로 된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예수님 앞에 진정한 제자가 있었습니까? 그때에 4천년 역사를 책임진 대제사장, 아브라함보다도 훌륭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외적인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4천년 역사 전체를 대신한 민족의 대표자로서의 시련과 생활적인 대표자로서의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가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그저 밥 먹고 사는 그런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내외적으로 고충을 겪으며 역사적인 모든 짐을 짊어지고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영적으로만 뜻을 이루었는데, 그것이 곧 영적 구원역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날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체의 뜻을 중심삼고 횡적인 생활을 하는 기준, 즉 시련과 탕감의 생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실제적인 면에서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생활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아 예수님의 가정적인 이념,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이념을 목표로 삼고 그 테두리를 에워싸고 개척해 나왔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복귀의 사명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2천년 동안 무엇을 해 나왔는가? 육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영적으로 투쟁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인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닦아 놓은 모든 기반을 개인적인 시기에 상속받았더라면 개인적인 싸움이 전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가정적인 싸움 또한 전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종족적으로 세워 놓은 예수님의 기준을 상속받기만 하면 될 것인데,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다시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독교는 횡적 섭리를 해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무대의 중심이었던 크나큰 대우주의 이념, 그 불변의 뜻을 중심삼고 생활적인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전개해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영육을 합한 실체의 이념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만을 중심한 이념인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자는 이념이에요.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영육을 합해서 뜻을 이루어야지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은 개인적인 대표자로서 영육 모두의 시련을 받았습니다. 민족의 대표자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우리 조상들은 영육을 합해 가지고 사탄과 싸워 나왔지, 영적으로만 싸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체로 세운 이스라엘 나라, 실체로 세운 유대교가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다 깨져나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으로만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 영적 기준에서 유대교를 대신한 종교가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이 종말시대에 예수님이 오셨던 그 당시의 환경을 영적으로 재현시켰으니, 영적 기준에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유대교의 사명을 해야 할 것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 사상에 커다란 혼란이 벌어져서 전통이 흔들리는 환경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의 사상에도 그때와 같은 현상이 벌어질 끝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14-302
아직 남아 있는 육적 기준의 승리
그러면 지금까지 이러한 영적 기준을 수습해 나온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될 것이냐? 세계적인 육적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육을 합해 가지고 오시는 주님이 승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수많은 종교들도 통일의 운세로 들어갈 것입니다. 개별적으로는 갈라지지만 모두가 통일의 운세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불교도 총본부라는 세계적인 울타리를 만들어 가지고 ‘통일하자’ 하게 되고, 기독교에서도 개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갈라져 나가고 있지만, 세계대회 등을 개최하여 그 테두리는 점점 커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울타리를 뻥뻥 뚫고 들어가야 됩니다. 어느 한줄기만 끌어당기면 전부다 끌려 나올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았으니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런 역사를 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대의 선지들이 하나님의 뜻 앞에 수고한 공적은 이 종말시대에까지 아직 최후의 결정적인 승리가 판가름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영육 아울러 역사적인 모든 죄를 탕감하여 청산짓고 역사적인 유업을 상속받아 시대적인 승리의 발판을 닦았으면 완전한 승리의 기준을 세웠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영과 육이 갈라진 입장에서 영적인 사명만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육적인 기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육 아울러 수고하던 역사적인 선조들의 공적이 아직도 끝을 못 맺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수많은 선조들이 개인적 승리를 했고, 가정적인 승리를 했고, 종족적, 민족적인 승리를 했지만 아직까지 국가의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 앞에 나타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사명은 육적 기반을 닦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가 영육을 합하여 닦아 나오던 그 터전을, 예수님이 연결시켜 영육 아울러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는데, 영적인 승리의 터전만을 닦고 육적인 복귀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육적 기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가 육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상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세계는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다시 오시느냐? 뭐 잘 믿는 사람들 모아 가지고 공중으로 구름 타고 올라가서 혼인잔치 하기 위해서 오신다고요? 아닙니다. 천하를 통일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까?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땅이 그대로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니 땅위에 하늘나라를 만들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천국인으로 만들고, 땅 위에 선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구름 타고 와서 뭐 잘 믿는 사람들을 공중으로 들어올려 가지고 혼인잔치를 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질 않아요.

오늘날까지 뜻 앞에 있어서 최후의 승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영적 승리의 기준만 세워 놓았지, 영육을 합한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으니 최후의 승리자는 못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도 참된 아브라함이 되지 못했고, 야곱도 참된 야곱이 되지 못했고, 모세도 참된 모세가 되지 못했습니다. 역대의 선조들이 모두 참된 선조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참된 아브라함의 대신자로서 영육을 합한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운 사람, 참된 야곱의 대신자로서 영육을 합하여 가정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운 사람, 참된 모세의 대신자로서 영육을 합하여 민족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운 사람, 혹은 국가를 대표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운 사람이 안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예수님이 세워야 했는데 예수님이 국가를 이겼습니까? 유대 나라와 유대교를 정복했습니까?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 나라의 주권에 몰리다가 죽어 갔지 유대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육 합한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시나니 오셔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영육 합한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계형으로 전개시켜서 일시에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 하나의 천주를 만들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14-304
하늘이 요구하는 사람
그러면 통일교회는 왜 나왔느냐? 하나님께서는 섭리 도상에 있어서 영육을 합한 최후의 승리자를 요구하십니다. 가정을 대표한 승리자를 요구 하시고 종족을 대표한 승리자를 요구하십니다. 때문에 그러한 승리의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의 자리를 지켜야 됩니다. 예수가 그 당시에 바라본 것이 무엇이뇨? 유대 나라요, 유대 교회였습니다. 유대 나라와 유대 교회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적인 섭리를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으니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자리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국가 전체를 심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오시는 주님이 오시자마자 세계적인 섭리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고생해야 됩니다.

발판이 없으면 하나님도 별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6천년 동안 고생해 나오셨습니까? 사탄의 참소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준을 세운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탄세계에 있어서 국가를 대신하여 섭리할 수 있는 사탄의 모든 참소 조건을 벗어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 전에는 세계적인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여 통일의 이념을 안고 나온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예수님에게는 행동으로 악을 제거시키고 영육을 합하여 이 땅에서 국가적인 기준을 세워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죽 안타까왔으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모두 둘러엎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날 하나님의 뜻 앞에 내외적으로 싸워서 악을 청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에서 공고한 터전을 닦고, 내일의 희망인 천국 건설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꾸준히 싸워 나가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모든 섭리적 단계는 어떻게 상속시켜 나왔겠는가?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생활에서 그 범위에 해당되는 원수와 접촉하게 됩니다. 민족이나 국가적인 사명을 해야 한다면 민족과 국가에 해당되는 수많은 원수와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제 아무리 원수가 강하더라도, 다윗이 그 강한 기세 앞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골리앗 대장의 머리를 물매와 돌로 쳤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신념을 가지고 사탄을 이 지구상에서 추방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있겠나 없겠나, 천국 가겠나 못 가겠나 하는 식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찾던 사람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적으로도 아브라함을 대신할 수 있는 개인적인 승리자, 야곱을 대신할 수 있는 가정적인 승리자, 모세를 대신할 수 있는 민족적인 승리자, 혹은 국가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게끔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대원수 로마에 대결할 수 있는 환경을 다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단결하여 일심동체가 되었더라면 거기에서부터 문제는 벌어졌을 것입니다. 4백년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게 되는 것이나 로마가 무너지는 일들이 그 당시에 이루어졌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영적 승리의 기준만을 세웠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세운 개인적인 기준, 야곱이 세운 가정적인 기준, 모세가 세운 민족적인 기준도 모두 영적 승리의 기준에 머물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14-306
복귀섭리의 종국적인 책임을 짊어질 곳
그러면 앞으로 이 복귀섭리의 종국적인 책임을 짊어질 곳은 어디겠는가? 세계 앞에 자기 나라의 명망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큰 나라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지극히 작은 나라를 세워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왜? 많은 무리는 단결되기가 어려워서 복귀섭리에 지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사상적인 혼란을 일으키게 해놓고 내적으로는 단결할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혼란하고 생활적으로 핍박을 당하게 하여 앞으로 나갈 길을 전부 막아 놓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같은 나라가 딱 들어맞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밥 한끼 얻어 먹기도 힘들 만큼 각박한 때가 올것입니다. 이거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 가지고는 어떻게 못할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 놓아도 그만큼 망할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니 잘살겠다고, 출세하겠다고 하는 생활태도를 버리고 나는 망하더라도 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됩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나중에는 별수 없이 물러나야 되게끔 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나라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사상과 생활은 모두 틀린 것이었으니, 그것을 다 버리고 세계에 없는 새로운 일을 해야 합니다. 잘살겠다고 자기 배를 움켜쥐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입을 봉해야 되고, 잘입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잘입으면 좋던 몸에 누더기를 걸쳐야 합니다. 반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칭찬받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욕을 먹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살리고, 이 세계를 살려 보겠다는 운동이 한국에서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그때를 대비해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지도한 것입니다.

한끼만 안 먹어도 눈이 쑥 들어가 가지고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일주일 금식을 해요? 하지만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일주일 금식 해야 됩니다. 내가 했으니 여러분도 해야 됩니다. 내가 감옥살이를 했으니 여러분도 무모하게라도 감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하나의 뜻을 중심삼고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적인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모세, 그리고 예수가 ‘처량한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나라를 위하고 하늘을 위하는구나!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너에게 복을 빌어 주마’ 하며 감동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됩니다. 역사적인 선조들이 ‘네가 나를 울렸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일교회의 여러분을 대하여 아브라함의 대신자가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뜻을 중심삼고 사는 생활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본받게 해야지, 여러분이 아브라함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영계에 있는 아브라함이 그런 여러분을 바라보고 눈물지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바라 볼 때에도 ‘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이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며 여러분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에 그런 제자들이 있었던들, 예수님이’할 말이 많아도 너희들이 감당치 못할까 하노라’ 하는 말씀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처량하고도 비참한 말입니까?

14-308
사랑의 예수님, 심판주 예수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성경을 보면 그냥 안 넘어갑니다. 한 장을 넘기는 데 10년이 걸리더라도 결판을 짓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자세로 나왔더라면 세계는 벌써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기독교에 들어와서 일부 기독교가 편파적인 입장에서 그 이념을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로 인해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환경적으로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가 뜻 섭리에 지장되는 면이 많지만, 하늘이 공산주의를 세우신 것은 배후에서 섭리의 뜻을 공고히 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역사적인 전통 위에 서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시련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볼 때 눈물지을 수 있는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복귀는 완결지었지만 육적인 면, 즉 영육을 합한 실체적인 복귀는 완결짓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자기를 지켜 준 애급 궁전을 버린 것은 하늘의 섭리를 위해서였지, 영광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영광스럽게 죽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호화찬란한 생활이 싫어서 바로 궁중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어 애급보다도 더 훌륭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런 마음이 있어야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애급으로부터 압제받는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어 반대로 애급을 지배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마음은 불탔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지극히 형편없는 자리에 있었지만, 조국의 어려운 과거에 대한 공분심에 불타 오른 모세는 애급을 정복하려는 야망과 정복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로와 싸울만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민족적인 대표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질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의 예수님’이라고 부르짖는데,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 앞에는 사랑의 예수님이지만 불의와 악을 일삼는 사람 앞에는 용서없는 심판주이십니다. 불쌍한 어부나 세리, 그리고 창녀 같은 사람들, 즉 그 시대에 배척받고 몰리는 무리가 엎드려 뼛골에 사무친 하소연을 털어놓는 자리에서는 사랑의 예수님이지만, 정의의 길을 가기 위해 정성들인 무리에게 칼을 들고 나서는 로마 제국과 유대 관원들 같은 무리 앞에는 심판주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 앞에는 사랑의 예수님이지만 불의와 악을 행하는 악당들 앞에는 공의의 심판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랑의 예수님이기만 하다면,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시대의 심판 역사는 없어야만 됩니다. 유대 관원들은 모두 지옥 갔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지상에서 모르겠으면 영계에 가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투사로서, 혁명가로서 오셨는데 혁명을 못 하고 갔으니 한스러운 것입니다. 사탄세계를 심판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오셨지만, 심판하지 못한 것이 예수님의 한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14-309
최후의 승리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민족 앞에 사무친 한이 많아도 참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무골충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뼈 없는 사나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30여 년의 생애를 참으셨던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이후 2천년간이나 참으시며 뜻을 이루기 위한 터전과 때를 마련하기 위한 공고한 토대를 닦기에 노심초사하시는 것이 복귀의 노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태풍아 불어라, 설한풍아 불어라, 동삼삭아 와라’ 하며 참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한 때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생님의 책임이 무엇인가? 몰리고 쫓김받을 때, 감옥에 들어갈 때, 이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이냐? 세계 인류를 위해 맞고 세계의 고난을 전부 끌어다가 섬멸해야 합니다. ‘아무려면 세계의 고난 길을 개척해 나가는데 이만한 어려움이 없을소냐? 하며 고난을 오히려 당연시했습니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귀섭리역사는 필시 그런 자리에서 결정을 짓고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복귀섭리의 역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길을 가려 했고, 또 그런 사람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창설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모인 젊은 남녀들은 눈을 감더라도 이 지구와 천주를 투시할 수 있고 감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남루한 거지 모양의 옷을 입어 모습이 초라할망정, 생활이 비참할망정, 그 생활을 밟고 올라서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호화찬란하게 살고 있는 백악관 꼭대기도 누를 수 있는 마음까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도 심판의 한 때를 바라보고 공의의 법도를 세위 나오십니다. 그러니 오늘날 여러분도 정의에 입각한 자아를 다짐하고 역사적인 공고한 발판을 닦기 위해 누구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모세까지도 내 뒤에 서시오’ 할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 앞에 하나님이 통사정을 안 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역사적인 최후의 승리자, 섭리 앞에 설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기반을 닦지 못했기에 그들의 책임까지 지고 30여 년의 생애 노정을 허덕이며 살다 가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있는 여러분들은 이 민족을 바라볼 때 남의 민족 바라보듯 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은 남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은 남의 땅이 아니예요. 이 세계가 여러분의 것이요, 여러분의 땅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을 잘 관리해서 앞으로 이루어질 세계적인 나라 앞에 잘 상속하고, 그 나라에 알맞는 백성이 되고, 그 나라에 알맞는, 하나님이 세우신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주권을 세워 세계를 통일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됩니다.

수만은 국가가 전부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본래의 책임인데도 불구하고 개인은 개인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민족은 민족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각각 다른 뜻을 세워 놓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의 뜻보다, 가정의 뜻보다, 민족이나 국가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원칙이기 때문에 그 뜻 앞에 전부다 심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뜻을 세워야 할 천지 해원의 한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이 때에 해원성사의 선봉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을 느끼고, 하나님의 가슴에 사무친 원한의 심정에 들어가서 ‘당신이 눈물 흘리신 사정과 당신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원한의 심정이 이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제가 알아 위로하오니 푸시옵소서’ 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네 아들딸아 네가 그것을 알아주니 고맙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역사상에 이렇게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 최후의 승리자가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다. 안 나왔어요.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명을 하기 위해 재림주님이 오시는 것이지, 영광된 것만을 부르짖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명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아들로서의 효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공인을 받아 충신의 명분을 갖춘 다음에야 비로소 영광의 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성신이 무슨 일을 해왔습니까? 죄인들 찾아가서 그들의 똥걸레 빨아 주는 식의 일을 해왔습니다. 예수님과 성신이 죄인을 좋아해서 그런 것입니까? 죄인의 뒤치다꺼리나 하게요. 얼마나 비참합니까? 죄와는 인연이 없고 상관도 없는 예수님과 성신이 어찌하여 죄와 인연을 맺어 뒤넘이치게 되었느냐? 아버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땅 위에 사는 자식들이 다 죄와 인연을 맺었으니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죄를 탕감시켜 주고 용서해 주실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다.

14-311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
오늘날 이 땅 위에 하나님 대신, 예수님 대신, 성신 대신 나타나 ‘이 세계의 죄를 내가 책임질테니 하나님은 쉬십시오’ 하는 사나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나라를 대신하여 ‘아버지, 염려 마시옵소서’, 이 세계와 인류를 대신해서 ‘아버지, 염려 마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안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 뭘 합니까? 선지자면 무엇 합니까? 권능이나 선지자라는 명사 자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권능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선지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사무친 역사적인 한을 풀어 줄 효자가 필요한 것이지, 권능이나 행하는 심부름꾼이 문제입니까? 여러분, 이거 알아야 됩니다. 효자가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섭리는 효자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눈물 흘리셨으니 그 6천년의 아픔을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효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 그럴수 있는 충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왕의 염려를 없애 주어야 할 것이 충신의 도리이듯, 하나님 앞에도 그런 충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적 기사를 행하면 무엇 합니까? 자비를 베풀면 무엇 합니까? 그런 것은 다 하나님께 있는 것들인데요. 단지 하나님께 없는 것은 가슴에 사무친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는 한 사람입니다. 6천년의 한을 풀어 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가슴에 박힌 그 슬픔의 못을 빼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아버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며 눈물지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이 빼지 못한 그 못을 뺄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을 수습하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수습하여 아버지 앞에 바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통일교회 젊은이들을 보면 머리들이 썩었습니다. 사상이 틀렸어요. 그러니 그 위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이 땅 위에 예수님이 지니셨던 거룩하신 이념과 거룩하신 뜻을 나타내야 되고, 거룩한 생활 태도를 나타내야 되고, 거룩한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병정에게 매를 맞고 쫓김당할 때 말을 했습니까? 가슴에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한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셨던 뜻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뜻은 어디로 갔으며, 성신이 2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우고자 하신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 뜻은 민족과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뜻입니다. 그러고 그 뜻 속에는 세계가 들어가 있고, 국가가 들어가 있고, 민족이 들어가 있고, 종족과 가정, 개인까지 전부 포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를 전부 포괄할 수 있습니까?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밀려 들어와 쫓김받고 몰림받고 몸부림치면서도 자리를 못 잡고 둥둥 밀려 나가는 민주주의 사상의 중심이 된 기독교가 세계를 포괄할 수 있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뜻입니까? 여러분, 이거 새겨 들으십시오.

14-313
최후의 승리자가 되려면
뜻 앞에 있어서의 최후의 승리자가 되려면 역사적인 모든 선조들을 불러 놓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한을 해원성사하는 데는 내가 선봉자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귀가 됩니다. 역사가 떨어져 내려왔으니 다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심정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상에서 무엇 때문에 제일 슬퍼하셨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시시하게 하루에 눈물진 그런 것 말고, 역사적으로 개인을 찾아 세울 때 무엇 때문에 슬퍼하셨는 지, 가정을 찾아 세울 때 무엇 때문에 슬퍼하셨는지, 혹은 종족, 민족, 국가를 찾아 세울 때 무엇 때문에 슬퍼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이 끝날에 이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시는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 알게 뭡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들은 역사 앞에 돌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사탄세계이니 전부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잘 먹겠다고 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자기는 안 먹고 희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그냥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어라!’ ‘네가 먹고 싶으면 남을 먹여 주어라’ ‘대접받고 싶으면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남을 희생시키려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내 자신보다 가정을 위해 희생해야 하며, 가정보다 종족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가정이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면 그 가정이 친척 전체 앞에 봉사해야 됩니다. 친척 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지요. 싸움을 하고 법석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전체 앞에 봉사한 기준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때가 되면 봉사한 사람이 높은 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영광은 그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반대로 망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마음에 역사적인 모든 한을 품고 종횡의 중심에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을 해원성사해 드리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가 역사적인 희생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 앞에 공헌을 못 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길에 다리를 못 놓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라도 재림하실 수 있는 다리를 못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에게까지 맞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 놓았다 하더라도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고난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발판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면 그 나라의 개인이 핍박하고, 가정이 핍박하고, 종족이 핍박하고, 민족 전체가 핍박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고난, 가정적인 고난, 종족적인 고난, 민족적인 고난을 받게 되는 거예요. 기독교는 그런 고난 속에서 세계적인 발판을 넓혀 나온 것입니다. 민족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종족적인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하고 가정적인 십자가와 개인적인 십자가까지 져야 합니다. 큰 뜻을 품으면 품을수록, 때가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기독교의 시련과 핍박은 더욱 가중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교단적인 입장에서 그런 책임을 할 수 있는 주의가 나와야 되는데, 그 주의를 가진 사람은 욕을 먹고 밟히고 몰리고 별의별 일들을 다 당해야 됩니다. 그 주의는 민주주의도 싫어하고 공산주의도 싫어해야 합니다. 기성 민주주의와 기성 공산주의가 모두 싫어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주의가 하나님주의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전도해 달라고 합니까?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말라고 하십시오.

14-315
앞으로 나와야 할 주의와 심정의 조상
주는 데는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는 자리에서 주어야 합니다. 하나의 선물을 주는 데도 정성을 다해서 주어야 합니다. 자기는 굶으면서도 주고 피를 흘리면서도 주라는 것입니다. 잘 준 후에는 잘 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에게 잘 주었는데 민족이 안 주면 하나님이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예수님도 잘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권내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주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받는 기간이 빠르고 늦는 데에 차이가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주었으면 받게 되는 것이 틀림없는 철칙입니다. 그러니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매맞는 자리에 들어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공산당에게 매를 맞을 때는 비굴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천하를 호령하는 이 사탄의 괴수야 해보자’ 했고, 또 왜놈들에게 매를 맞을 때는 ‘국가적인 아담형으로 나타난 한국인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 했습니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어요. 정의는 비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의롭게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까지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에게 명령하지 못한 것은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 앞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역사적인 섭리노정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심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와 예수까지도 불러서 ‘당신 어찌하여 그때에 이런 책임을 못했습니까?'하며 추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오냐 그때 내가 그런 책임을 못했다’ 하는 답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 추궁해서 그런 답변 받아 봤어요? 복만 받겠다고 하고서 그저 가만히 있으면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나라 이 민족 가운데도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이 그저 가만히 앉아서 주먹 구구식으로 돈 번 줄 알아요? 부정 축재를 했든 뭘 했든 밤잠을 자지 않고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 이상 수고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건 모두가 건달들이 되어 가지고 수고는 하지 않고 전부 입만 벌리고 ‘아 복 주소’ 하고 있으니 복이 들어갈 게 뭡니까? 그런 사람들 전부다 도둑심보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 쓸 데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 전부다 없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은 세계의 맨 밑창에 반석을 만들어야 합니다. 반석 중에서도 제일 강한 반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발판으로 강한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하고 결속할 수 있는 무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핍박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 나왔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모험을 잘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적인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계와 육계에 이 뜻을 세우기 위한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에게 나의 복까지 첨부해 주기 위해서 이런 모험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눈물짓게 하고,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을 불러서 눈물짓게 해야 합니다. 또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한을 풀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3대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면 역사적인 선조들은 여러분 앞에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그들 모두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있어서 심정의 조상은 누구일 것이냐? 심정의 조상이 누구일 것이냐? 예수님과 통일교인들입니다. 보십시오. 통일교인들은 심정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골수에 사무친 슬픔을 압니다. 하나님의 억울함과 분함을 알고, 또 이 원수 세계를 일시에 심판해 버릴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통일교인들이 심정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뜻과 생활과 행동이 섭리도상에 있어서 최후의 문제가 될진대 예수님과 성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해 나왔느냐?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세계적인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오시는 주님도 행동적인 면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공산주의를 없애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종교의 자유,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를 세워 오시는 주님의 그 터전 위에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공산주의를 없앨 수 있도록 그 길을 만들어 오십니다. 그래야 사탄들이 꼼짝 못하고 반대를 못하는 것입니다.

14-317
끝날에 나타날 이단들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그러니 이 끝날에 여러분들은 이 세계적인 사명 앞에 자신을 세워 가지고 스스로 어떤 입장에 서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통일교회 문선생이 거룩하신 예수님을 예수라 그런다고 야단입니다. 그런 말 할 수 있는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말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람이 천지에 수두룩하게 많이 나올 것입니다. 하늘은 조건만 세우면 가르쳐 주십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바로 나다’ 하는 사람, ‘내가 여호와다’ 하는 사람, ‘예수도 나에게 경배해아 한다’ 하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 끝날 말세에 나타날 이단들을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내 앞에 있는 젖과 꿀을 먹지 않으면 내 아들딸이 못 된다’ 거나 ‘나는 성신의 어머니다’ 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내가 신랑이니 나를 모셔라’ 하는 말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요? ‘내가 여호와니 나를 믿어야 된다’ 하는 말을 감당할 자신 있어요? 자신이 없으면 심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훌륭한 아들딸들을 찾고 계십니다. 또한 만민 앞에 환희와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성신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런 성신 만나 봤습니까? 또 하나님은 한국과 만천하 앞에 승리의 왕자로 등극하여 만민을 호령할 수 있는 왕자를 찾고 계시는데 그런 왕자님을 모셔 봤습니까? 인간의 타락을 보지 않고 천지창조 이념대로 목적을 이루시어 만만세 영원무궁토록 찬란히 빛날 영광과 행복과 기쁨이 넘쳐흐르는 그런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모셔 봤습니까? 그러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 앞에 ‘당신들의 바라심이 이것이 아닙니까?’ 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스승이란 본시 제자가 자기보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그 제자가 잘났더라도 ‘야 너 왜 나보다 잘났느냐? 그러면 안 된다’ 하는 스승은 없습니다. 혹시 그런 스승이 있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역시 자기의 아들딸들이 자기들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자기보다 잘 된 아들을 보고 ‘넌 나보다 못해야 돼’ 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망하는 거지요. 한 나라에 있어서도 주권자가 치리를 받는 백성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의 목을 자른다면 그 주권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천리의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민족을 위해 한탄하는 입장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저 믿고 천당 가겠다고요? 그건 엉터리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망하는 거예요.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벌써 천국 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잘 믿었다고요. 누구보다 잘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40여 평생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엉터리예요.

지금까치 선생님은 무수한 욕을 먹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갈 때도 갖은 욕설을 다 뒤집어 쓰고 들어갔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있다면 이 삼천만 민중이 다 원수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 지방에 가면 별의별 짓을 다 당합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맞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반대로 우리 통일교회가 그들을 찢고 밟아도 꼼짝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탕감조건이 있기 때문에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찢고 밟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이렇게 처참하고 몰리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개인의 뜻이 이렇고 가정의 뜻이 이렇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뜻이 이런 것이고, 세계를 구원하는 데는 민주주의의 뜻 가지고도 안되고 공산주의의 뜻 가지고도 안 되며, 병신들이나 곰배팔이까지 전부 달려와서 ‘맞다’ 할 수 있는 뜻, 만민이 모두 좋아하는 뜻, 즉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14-319
천주주의
그러면 그 뜻은 어떤 뜻이냐? 무한히 줄 수 있고, 무한히 받을 수 있는 뜻입니다. 완전히 줄 수 있고 완전히 받을 수 있는 뜻,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는 세계의 뜻, 무한히 크고 높고 귀하신 하나님과 언제나 주고 받을 수 있는 뜻입니다. 내가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이 ‘오냐’ 하시며 위로해 주실 수 있는 그런 뜻입니다.

통일교회는 행동적인 기독교, 생활적인 기독교를 만들자고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식구라는 명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적인 기독교를 세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싸워서 지상을 개척하는 기독교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상과 영계가 힘을 합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영계에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적인 면에서 생활적인 면에서 십자가의 시련과 죽음의 길을 넘자고 하는 곳이 통일교회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를 상속받아 가지고 실적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 땅에서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다오’ 하시는 예수님의 소원과, ‘내가 땅에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을 대신 가르쳐 다오’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과, ‘내가 다하지 못한 사명을 대신 해다오’ 하는 성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성교회와는 달리 행동적인 면에서 십자가 위에 영적인 기준을 세우고 생활적인 풍토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활 자체가 신앙을 대신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독교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생활적인 면에서 가치적인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오늘날 만민이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나의 뜻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 전부터 있었던 뜻이요,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뜻이요,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뜻입니다. 또한 그 뜻은 하나님의 최고의 소망입니다. 그 뜻은 가정을 희생시키더라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이요, 나라를 잃어버리더라도 저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나라를 다 잃어버리면서도 그 뜻을 세우기 위해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어떤 환경에 있습니까? ‘민주주의가 살 길이냐, 공산주의가 살 길이냐’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살 길이 못됩니다. 그러면 무슨 주의가 우리의 살 길이냐? 천주주의입니다. 천주주의만이 우리의 살 길인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 천주주의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에서 무슨 무슨 대학 교수, 어디 어디 대통령들을 모아 놓고 가르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한국에서 태어난 통일교회가 역사에 밟히면 역사는 끝입니다. 때문에 역사를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또 사상에 밟히면 그 사상은 끝입니다. 때문에 사상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가정까지도 스스로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입니다. 안 가겠다고 하는 종교의 도주들을 전부다 끌고 갈 수 있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나 모두 끌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천국을 건설하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것을 알았기에 욕을 먹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나왔던 것입니다.

14-320
식구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
역사는 발전해 갑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 앞에 피력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뜻 앞에 있어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예수가 책임을 다 못했습니다. 예수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을 여러분은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죄의 보따리를 풀어 모두 청산짓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목적이 이것이 아니옵니까? 오늘 이와 같은 날을 맞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하면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여러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뜻을 알자고 하는 것입니다. 원리! 원리! 원리! 원리를 알자는 거예요. 원리는 무슨 원리냐? 무슨 과학의 원리가 아닙니다. 예수의 동생이 되자는 원리, 예수의 누나가 되자는 원리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원리이지요. 하나님의 충신 열녀, 하나님의 효자 효녀가 되자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본심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다 예수님의 누나가 되고 동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충남 충녀 효남 효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교회의 원리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 미래에도 없을 하나밖에 없는 원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배짱을 가질 만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수많은 종교의 도주들과 싸워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은 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알아야 됩니다. 앞으로 불원한 장래에 통일교회가 세계를 움직일 때가 올 것입니다. 이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원리는 보다 높은 진리, 보다 높은 사상, 보다 높은 뜻, 보다 높은 생활관, 보다 높은 행동관으로서 만민이 따라야 할 역사와 시대와 미래의 결과체입니다.

선생님이 맨 처음 3년노정을 가자고 했을 때 여러분, 꿈같이 생각했지요? 그 동안에 통일교회는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희생이 요구될 것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남아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가 문제입니다. 수천 개의 유리병보다 한 조각의 다이아몬드가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이 여러 분에게 채찍질을 하고 어려운 곳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아직도 여러분을 끌고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세계 전체를 대해 싸워서 역사적인 한을 풀고, 하나님의 가슴에 새겨진 원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의와 공분심에 불타서 공의의 심판을 해야 하는데 그런 자리에 설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남과 다른 것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기도할 때 다른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게 되면 천지가 넘어갑니다. 그 ‘아버지’라는 말 가운데에는 곡절이 어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곡절이 많아요. 아버지 앞에 충신으로서, 효자로서 이 세상을 책임지겠다는데 눈물없이 기도할 수 있겠어요? 아직까지 한많은 복귀의 길이 남아 있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14-322
심정이 뒷받침된 뜻과 생활과 행동
여러분은 하나의 뜻을 세워서 그 뜻과 더불어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동할 수 있는 생활, 역사가 동할 수 있는 생활, 인류가 본받아야 할 생활, 후손이 뒤따라야 할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은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역사적인 하나님을 네가 잊지 말라’고 했듯이, 하나님은 섭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중심인물에게 미리 권고해 두시는 것입니다. 원수와의 싸움을 하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뜻을 세워 그 뜻에 따라 생활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하면 거기에는 사탄이 침범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뜻을 세웠느냐가 문제지요.

세상에서 공인된 뜻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공인하는 생활로는 안 됩니다. 심정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통일교회 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하다는 거예요. 욕을 먹으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을 보면 모르긴 해도 무엇인가가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사탄이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뜻을 여러분이 찾아야 합니다. 그 뜻을 세우기 위해서는 나라를 등져야 하며, 현재 따르고 있는 주의를 등져야 하며, 세상을 등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겠어요? 그 뜻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 감추어진 심정의 뜻입니다. 만민은 이 뜻과 더불어 생활해야 하고, 이 뜻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뜻과 생활관과 행동의 관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알겠어요?

이 뜻과 생활과 행동에는 심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심정, 복귀적인 심정, 창조적인 심정, 범인류적인 심정, 이런 심정들을 중심삼고 뜻과 생활과 행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담 해와에게는 소생, 장성, 완성의 단계를 거쳐 완성한 이후에야 심정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완성한 이후에야 심정 문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의 중심 문제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생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복귀적인 심정, 창조적인 심정입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복귀의 심정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영광의 심정만이 있었을 거예요. 보기만 해도 좋은 창조의 심정만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타락하여 복귀의 심정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뜻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이념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복귀노정에서 슬퍼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 앞에 영광의 한 날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타락했으니, 그것을 여러분이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복귀적인 심정과 창조적인 심정을 뒷받침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의 한 날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14-323
행동통일, 생활통일, 이념통일, 심정통일
지금까지는 복귀하기 위한 뜻을 이루어 나오는 과정이기 때문에 탕감법도에 의해 생활해야 했습니다. 탕감법도를 세우기 위한 복귀적인 생활, 탕감법도를 세우기 위한 복귀적인 행동을 해 나왔던 거예요. 이 탕감법도를 세우기 위한 복귀적인 생활과 행동은 어떤 것인가? 자신의 몸을 치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앞으로 복귀된 본연의 심정세계와 가까운 자리에 설수록 필요합니다. 그것이 창조적인 심정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이 심정을 본받아라’ 할 수 있어야만 명령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 뜻이 새로운 이념과 더불어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범세계적으로 퍼져 새로운 차원의 새로운 행동의 무대를 거쳐서 온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존재물들과 통합될 때에야 비로소 지상천국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을 하나 만들자고. 복귀적인 심정을 박차고 창조적인 심정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뜻과, 하나의 생활관과, 하나의 행동관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동통일’을 주장하고 ‘생활통일’을 주장하고 ‘이념통일’을 주장하고 ‘심정통일’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4대 원칙을 중심삼고 여러분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까지 천국의 기반을 전개시키는 책임을 여러분이 져야 됩니다. 또한 앞으로 민족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전체 인류를 대표하고 혹은 하늘땅을 대표할 수 있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오늘날 이 세계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책임을 여러분이 져야 합니다.

그러면 복귀적인 심정의 탕감을 누가 할 것이냐? 여러분이 탕감해야 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복귀적인 심정을 완전히 탕감한 후에야 창조적인 심정을 알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복귀적인 심정으로 하나의 뜻을 세우고 그 뜻과 더불어 생활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소망의 창조적인 심정을 바라보고 복귀적인 심정권내에서 뒤넘이치는 수많은 선조들의 숨은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있느니만큼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가 뒤넘이치는 가운데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폭풍우 앞에서도 깨지지 않고 골고다의 십자가라도 늠름히 넘어갈 수 있는 예수의 수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은 뜻 앞에 있어서 역사적인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4-324
기 도
저희의 손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기더라도 아버지를 붙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사옵니까? 저희의 몸이 크고 커서 아버지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사옵니까? 저희가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일 때 천지가 같이 머리 숙일 수 있다면, 저희들 전체가 그런 입장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사옵니까? 하늘과 땅에 가로막힘이 없어서 가고 싶으면 가고, 있고 싶으면 있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자유 천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사옵니까 ?

아버지께서 그렇게도 소망하신 창조목적의 세계에 어떠한 곡절이 벌어졌는지 인류는 모르고 있사오니 원통, 원통, 원통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이들과 함께 3년 동안 눈물도 흘렸사옵고, 땀도 흘렸사옵고, 통곡도 했사옵니다. 가슴 깊이 아버지 앞에 호소도 했사옵니다. 그 결과가 아버지 품에 돌아갔사옵니까? 아니면 이들의 가슴에 돌아왔사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가슴에 묻혀 있어도 안 될 것이요, 이들의 가슴에 묻혀 있어도 안 될 것이요, 이 민족과 세계 인류와 이 땅과 하늘 전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뜻과 사명을 다하여 세계적인 무대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없다 할진대 이 이상의 슬픈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아버지, 이 시간 당신의 아들딸들을 모아 놓고 당신 앞에 호소하오니 이들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남을 위해 사는 생활에 미숙하옵니다. 하오니 다시 한번 자신들의 생활을 정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생활이 얼마나 거룩한 생활인지를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과 더불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위해서 사는 생활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피눈물을 흘리고 땅을 치면서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거룩한 자리인가 하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또한 아버지의 뜻 앞에 피눈물과 더불어, 자신의 손끝에 피를 찍어 ‘맹세’라는 글자를 벽지에 쓰면서 아버지 앞에 맹세한 그 시간이 얼마나 거룩한 시간이었는지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싸움을 할 때까지도 ‘민족통일’과 ‘세계통일’을 외치면서 아버지 앞에 호소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위해서 피투성이가 되고,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피로해 쓰러지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나는 너와 더불어 있겠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사옵니까? 그 자리가 진정으로 거룩한 지성소인 것을 저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귀노정, 한 많은 복귀의 노정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복귀의 심정을 알게 되니 지금까지 창조의 심정을 억누르시고 복귀의 싸움을 해 나오신 아버지의 원통함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한 당신을 붙들고 진정으로 위로해 드리는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참다운 충신 충녀들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하오나 그렇지 못한 저희들 자신을 밟고 쳐야 되겠사옵니다. 자신을 천대해야 되겠사옵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여 모든 사탄의 속성을 때려 부숴야 되겠사오니,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슬픈 호소를, 아버지, 들어 주시옵고, 단말마적인 한의 노정에서 갈 길을 잡지 못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한을, 아버지께서 아시오니 풀어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와 같은 운세 가운데 저희들을 내세운 데에는 아버지의 각별한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뜻을 저희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심정을 일체화하여 아버지 앞에 합당한 뜻을 세우고, 생활적인 면에서나 행동적인 면에서 아버지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거룩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선 무리들이오니, 이들이 도중에 지치지 말고 끝까지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만사의 역사에 사랑과 기쁨으로 남아질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그날까지, 아버지, 저희들을 지켜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겨 주신 복귀의 한 많은 그 심정을 더듬어 당신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저희들의 걸음마다 감사에 감사를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남아진 기간 동안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민족을 지켜 주시고 이들을 위해 눈물지으신 아버지, 앞으로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어디를 가든지 당신이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소서. 남아진 한 주일 동안 저희들이 혹시라도 탄식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강하고 담대히 내일을 기약하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여기에 모인 이들 전체가 말씀에 취해 생활하고 끝까지 참고 남아져 뜻 앞에 있어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복귀의 심정과 창조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이 모든 말씀 주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