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62 to 14-279: 구세주는 오셨다

구세주는 오셨다
1965.01.03 (일), 한국 전본부교회

14-262
구세주는 오셨다
[기 도(Ⅰ)]

이 아침은 1965년 새해 들어 첫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인 동시에 주 강생 1965년째를 맞이하는 날이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메시아의 탄생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여 축하했사옵고,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인류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우주와 더불어, 어떠한 인연과 가치를 결정지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명성만 기억하고서 메시아의 탄생일을 축하했사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모인 소수의 무리들은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당신의 넓고 높으신 뜻과 존엄하신 경륜에 의해 보내심을 입은 예수님이었지만, 가련한 입장에 처했던 그의 사정을 마음으로 동정하면서,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사명 다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울러 민족적인 사명을 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시며 마음 졸이시던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을 더듬어 생각하게 될 때, 이제 때와 시기가 찼사오매 약속한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어 보내신 아버지의 애달픈 심정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되겠사옵니다.

이 땅 위에 당신의 귀하신 아들로 태어난 그분은, 천지창조의 이념을 저버린 아담을 잃어버린 슬픔을 해원하기 위해 보내진 분이었음을 아옵니다. 그를 통하여 뜻을 이루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받으시고, 그를 통하여 행복의 세계를 이루려 하신 소망을 성사시키기 위해 당신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은 태어나는 그날부터 초초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고대했지만 정작 메시아로 오신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메시아는 홀로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홀로 하나님의 소망을 지니고 살아야 할 생활적인 사정을 지니시고, 남모르는 가운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가 불쌍한 신세로 십자가에 달려 눈물과 피를 흘리고 가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희 선조들이 부족했던 것을 저희들이 이 시간에 사죄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고, 책임을 짊어진 유대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죄악을 저희들이 사죄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수많은 역대 우리 선조들을 피흘리게 한 죄의 역사를, 하나님을 배반해 온 수많은 인류의 죄악상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더듬어 생각하고 회개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메시아가 오실 그날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사람은 오신 그분이 당해야 할 슬픔을 책임진 자임을 아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의 이념을 세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공신의 입장에서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저희들의 본분이온데, 저희들이 언제 그런 자리에서 그분을 모셨사옵고, 그분을 위하여 눈물지었사오며, 언제 그분을 위하여 몸 굽혀 정성들이고 손을 움직였고 충성했사옵니까? 또한 언제 그러한 자리에서 당신을 위해 일했사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서글픈 사실들을 그 무엇으로 사죄를 드린다 해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 당신의 서러움을 저희들이 살펴야 되겠사옵고, 예수님의 억울한 사정을 저희들이 동정해야 되겠사옵고, 지금까지 피의 노정을 걸어 나온 그의 제자들의 처량하고 비참했던 사정을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2천년 역사는 지나갔사옵니다. 그동안 슬픈 사정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아버지도 슬펐고 예수님도 슬펐고 성신도 슬펐으며 기독교인들도 슬펐던 것을 아옵니다. 또한 이토록 슬펐던 한을 풀기 위한 최후의 마지막 한 날, 즉 모두가 고대하는 심판의 그날이 가까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쌓이고 쌓인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를 다시 맞이해야 할 입장에 있는 이 끝날의 성도들은,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오시는 메시아를 섬길 수 있는 마음과 준비는 갖추지 못하고 메시아를 고대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사오니, 저희들 각자가 이런 것을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위에,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사오나 초조한 심정과 상처입은 몸을 그대로 아버지의 제단에 바치며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고 십자가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일생을 심정으로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진실로 바라옵니다.

많은 수가 문제가 아님을 아옵니다. 나라가 있기 전에 민족이 있어야 되는 것이요, 민족이 있기 전에 종족이 있어야 되는 것이요, 종족이 있기 전에 가정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기 전에 개인이 있어야 되는 것이 이치이온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나라도 갖지 못하고, 하나의 민족도 갖지 못하였으며, 종족도 갖지 못하고, 가정도 갖지 못하고, 자기 일신의 위신도 체신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그를 메시아로 모시는 참다운 제자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을 종족과 민족, 국가와 세계의 메시아로 모시는 개인도, 가정도 없었사옵니다.

이제 다시 오실 메시아, 세계사적 기준으로 찾아오실 메시아를 맞이해야 할 저희들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메시아의 공인을 받아야 되겠고, 가정적인 입장에서도,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책임진 전체적인 입장에서도 메시아의 공인을 받아야 되겠사옵니다. 이런 엄청난 과제가 저희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연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해야 되겠사옵니다.

역사적인 한을 품고 가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위로하고, 가정적으로 위로하고,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나아가 세계적으로 위로해 드리는 것이 오늘 메시아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전체적인 목적임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부복한 저희의 무릎은 연약한 무릎이요, 저희의 몸은 상처받은 몸이요, 과거와 현재 모두 아버지 앞이 면목을 세울 수 없는 몸들이옵니다. 하오나 당신은 역사노정에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시고 섭리해 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고, 메시아가 운명하는 그 순간, 그 찰나에 있어서 인간들을 염려하신 당신이었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니, 여기에 부복한 저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남들처럼 화려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를 부르기를 원치 않사옵니다. 눈물지으며 마음을 졸이는 가슴을 부등켜 안고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저희가 당신의 아들딸이오니 당신의 한이 저희의 한이옵니다’라고 울부짖으며, 그 한을 저희가 풀어 드리겠다고 결의하고, 저희가 다하지 못하면 저희의 후손을 통하여서라도 풀어 드리겠다고 결의할 수 있도록,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분부하여 주시옵고, 명령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을 버려 두지 마시옵소서! 당신을 위하여 눈물 흘리기로 각오했사옵고, 당신이 가시는 피어린 길을 따라가기로 각오했사오니 이러한 저희들이 옛날 예수를 잘 모시지 못한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는 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터전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서 하늘 가정을 찾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늘종족을 찾기 위해 싸우게 하여 주시옵고, 종족과 민족을 찾게 되면 하늘의 국가와 세계를 찾기 위해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염려하시기 전에 그 모든 사실들을 부여안고 그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당신 앞에 효자가 되지 않을래야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요, 당신 앞에 충신이 되지 않을래야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이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려고만 하였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지 못하고, 고통의 가시밭길을 개척하는 개척자들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당신께서 도리어 고통의 길을 가셔야 했고, 희생의 길을 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제 아버지를 향하여 쌍수 합장하고 엎드린 저희의 몸을 아버지 앞에 고이 드리고자 하오니, 재차 살피시어서 모든 쓴 뿌리,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시키시옵고 선과 일치될 수 있는 요소를 세우시옵소서. 새로운 성탄일을 맞아 기념하는 이 시간, 새로운 성일을 맞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이 시간, 새로이 다짐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새로이 맹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오며, 그 맹세의 실체가 되기 위해 영원한 아버지의 산제물이 되겠다고 결의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외로이 눈물 흘리며 아버지 앞에 이날을 기념하는 쫓김받는 무리, 몰림받는 무리, 핍박받는 무리들이 남한 각지에 많사오니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곳을 줌심삼고 만방에 널려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목적을 위하여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눈물짓는 자녀들 또한 많사오니, 아버지, 그들에게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가 아버지의 영원한 세계와 하늘땅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움직여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고 주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는 이날,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만교회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날도 뜻을 위하여 숨은 제단을 쌓고, 마음과 몸을 다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치려 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을 예고하시어서 하나의 세계로, 본향 땅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윈하옵니다.

이 시간 전체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14-266
기 도(Ⅱ)
아버님! 저희들은 진정 당신의 소망을, 당신의 사정을, 당신의 심정을 알고 싶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당신을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영원히 모실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세우겠다고 맹세하는 아들딸을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그리워하시며 찾아오셨는지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불러 드린 분은 이땅에 왔다 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그는 당신의 소망을 알았사옵고, 당신의 사정을 알았사옵고, 당신의 심정을 알았사옵니다. 당신의 소망은 역사노정에서 유린당하고 시대적 환경에서 배척을 받았으며, 미래의 환경을 개척하는데 어려운 소망으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당신의 그 사정은 애절한 눈물의 사정이요, 어느누가 동정할래야 동정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사정이요, 인류와 더불어 죽음의 길을 가며 몸부림쳐야 할 사정이라는 것을, 또한 당신의 심정, 즉 아담을 잃어버릴 때의 원통하고 분한 심정과 메시아를 보내시고 안타까와하시는 심정을 그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소망과 당신의 사정과 당신의 심정을 잃치 않고 당신의 크나큰 뜻과 이념을 소망하면서 묵묵히 준비 기간을 거쳤으며, 죽기를 각오하고 아버지 앞에 맹세를 하고 개척의 길을 나섰던 것을 아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루지 못하고 남아진 소망을 마음에 품은 채 아버지 앞에 되돌아가야 하는 자기의 사정을 처량하게 느끼면서도, 불효라는 명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충성의 도리를 세우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던 예수님의 심정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그런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참다운 아들과 참다운 딸을 당신께서는 얼마나 그리워 하셨습니까? 그리하여 그 아들의 손으로 원수를 굴복시키고, 그 딸의 손으로 원수를 멸망시키고, 자녀가 합하여 ‘한 많은 이 땅을 대한 당신의 소원과 당신의 해원을 이루시옵소서! 그리고 영광받으시옵소서!’ 하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당신을 시봉하는 참다운 아들딸을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

당신께서는 그런 아들딸들이 그런 자리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고대하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하오니 아버지! 여기 모인 불쌍한 무리들, 이제 당신을 부를 때 ‘아버지’라는 이름만을 부르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라는 명사 가운데는 남의 아버지도 있는 것이요, 의붓아버지도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양아버지도 있는 동시에 진정한 아버지도 있사옵니다. 또 아버지 가운데에는 효도하는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가 있고 불효자를 대하는 아버지도 있사옵니다. 저희들 모두는 아버지만을 붙들고 아버지 앞에 효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아버지의 위신을 세워 드리는 충신 열녀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런 자리에서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또한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본향 땅, 저희가 그리워하는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천국인 것을 알았사옵고, 그 나라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형제와 형제가 하나 되고, 슬픔이 없는 사랑의 가정을 이뤄야 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가정의 주인이 되셔야 할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무릎 앞에 자라고 있는 저희들이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원치 않사옵니다. 세상의 영광도 원치 않사옵고, 세상의 권세도 원치 않사오며, 세상의 학식도 원치 않사옵니다. 다만 진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 아버지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참다운 충신 열녀가 되기를 원할 뿐이옵니다. 이것만이 저희의 재산이요, 이것만이 저희들 생애의 목적이옵니다. 지금까지 이 길을 위하여 온갖 시련을 감당하며 살아왔고 오늘도 이 길을 가고 있사옵니다. 이제부터 또 가야 되겠사오니, 죽음이 가로막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께 슬픔을 돌리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슬픈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아버지의 슬픔으로 여기면서 서로 붙안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하겠사옵고,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을 그리워하고 찾아갈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한 자는 남루한 옷을 입었을지라도 당신의 아들이 아닐 수 없고, 배척받는 자리에서 최후의 운명을 맞아 사라지더라도 당신의 아들이 아닐 수 없으니, 그 아들과 그 아들이 부르는 아버지가 이 천지간에 나타나는 것이 복귀역사의 종말이요, 복귀노정의 소원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세계적인 아들로서 세울 수 있고 하늘과 땅의 전체를 그 앞에 유업으로 맡길 수 있는 한 아들이 이 땅에 오는 것이 재림 이상임을 저희가 알았사옵니다. 하오니 저희가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의 내정적인 심정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외적인 모든 사정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전체적인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로서 이 땅위의 세계를 지배하고, 남아진 무리를 통솔하여 아버지 앞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남아진 원수를 소탕하며 재심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이날, 이 성일을 기념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그러한 사명자로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역사적인 첫출발자로 오셨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분이 남기신 모든 원한과 사명과 책임을 저희들이 맡겠다고 새로이 각오하고 다짐하면서 이날을 기념하였사오니, 아버지, 복을 빌어 주시옵고 기억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새해 벽두의 이 거룩한 날, 나머지 날들을 기억하시고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충성하는 수많은 무리들의 그 가슴을 지켜 주시옵고, 그러한 인생을 고대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에게 복을 빌어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 주의 성호 받들어 아뢰 었사옵니다. 아멘.

14-269
말 씀
오늘은 ‘구세주는 오셨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여러분과 더불어 생각해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4-269
구세주는 오셔야 한다
우리 인간이 우리를 구해 줄 주님을 바라는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만이 구세주를 요구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그 창조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양심의 목적을 성사하는 한 날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도 슬픔의 자리에 계시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 아담 해와 두 사람의 실수가 전인류를 슬픔의 자리로 몰아넣은 것이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도 그들로 말미암아 슬픔의 자리에 머물게 된 것이요, 하나님께서 슬픔의 자리에 계시게 되니 모든 피조만상도 역시 슬픔의 자리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세주’라는 존재는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필요한 존재요, 피조만물에게도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는 고통 같은 것이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늘은 기쁨과 영광과 소망과 행복의 모든 요건이 갖추어진 완전무결한 곳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버지 입장이라던 고통스런 자리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편할 것 같습니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하여 슬퍼하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 역시 슬프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메시아를 고대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하늘도 메시아, 즉 구세주를 고대하고 땅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좌 밑까지 사탄이 침범하였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의 혈통, 즉 핏줄기에까지 사탄이 침범하였으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만물까지 사탄의 소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지 못하고, 인간의 것도 되지 못하고, 원수의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14-270
메시아가 오셔야만 했던 사연
그러면 메시아가 오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늘을 해방시키고 땅을 해방시키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해방시키고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세계가 점점 악해질수록 메시아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이 무력하고 행동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메시아를 고대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늘과 땅을 그냥 원수의 손에 넘겨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갈라 세워서 선을 중심으로 전체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와야 합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신 데에는 그만한 소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심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소망과 사정과 심정을 가지고 메시아를 보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수세계에 와서 원수들이 반대하는 와중에서 원수들의 모든 것을 전부 하늘편으로 돌이켜야 할 책임을 짊어지워서 보낸 메시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아가 오기 전에 그가 와서 활동할 수 있는 섭리의 뜻에 따라 그 목적을 성사시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선민 가운데 그 터전을 마련하시기 위해 4천년 동안 개인을 구별하시고, 가정을 구별하시고, 종족과 민족을 구별하시어서 나라를 창설해 나왔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일치되어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이념과 더불어 생활함으로써 그 내용을 확정하여 그날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요 유대교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환경이 어지러울수록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바라는 마음은 컸으나 메시아를 맞이할 내적인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회는 오신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비극을 빚어 내고 만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과 유대의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4천년이란 피어린 투쟁의 역사노정에서 죽다 남고, 몰리다 남고, 쫓기다 남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는 유대교단 위에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탕감원칙에 의해서 수리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와 그 시기를 책임질 수 있는 민족적인 준비가 되지 않았을망정, 4천년의 기나긴 역사는 지나 수리적인 연한이 차옴으로 하나의 뜻을 중심삼고 메시아를 보내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기 위함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메시아의 이념을 중심삼고 천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새로운 메시아 사상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사에 찬란히 빛날 역사적인 전통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 전통을 중심삼고 그 전통에 화하여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해 가지고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안식의 터전에 모셔야 할 것이 오셨던 메시아의 책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왔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는 종교적인 기반인 유대교를 찾아왔었습니다. 유대교의 대제사장, 교법사들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렇게 찾아왔던 메시아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왔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상하가 일치되어 전체가 메시아를 만나야 될 것이었습니다. 그때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와는 원수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피폐한 민족을 바라보며 나라의 주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애쓰던 국가적인 지도자, 혹은 교단적인 지도자들은 로마 앞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메시아의 사상을 중심삼고 단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때의 유대교와 유대 나라를 지도하던 지도층들이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왔을 때에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몰아내고 죽이기 위하여 로마 병정이나 빌라도, 그리고 헤롯왕과 일치가 되어 예수를 몰아내는데 제1선구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하나 되어 기쁨 가운데 예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원수인 로마와 그외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메시아의 이념으로 단결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 앞에 하나가 되어 메시아의 이념을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단과 유대 나라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메시아 예수는 비참한 길을 갔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14-272
요셉 부부와 예수
예수는 태어날 때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런 후에 3년 공생애 노정을 지나면서 뜻하신 바를 세우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간 예수의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생각할 때, 그는 이 땅에서 메시아의 권한을 어느 한 날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서의 환경도 갖지 못했고, 가정도 갖지 못했으며, 친척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세운 그 시대의 선각자 세례 요한도 그를 환영하지 못했고, 그 시대의 예언자들도 그를 환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전생애노정 중에서 어느 한 날, 민족 전체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그를 메시아로 대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인을 대하지 못한 슬픔을 품고 갔을 것이요, 가정을 대하치 못한 슬픔을 품고 갔을 것이요, 혹은 종족, 민족, 국가를 대하지 못한 슬픔을 품고 갔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왔다 간 메시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소망으로 이 땅을 찾아온 메시아보다도 소망을 품고 왔다가 슬픔을 품고 간 메시아의 생애를 알고,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아가 탄생할 날을 축하하는 참다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하나의 가정에 보내셔야 하므로 요셉 가정을 택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은 하나님이 품에 품으신 가정이었습니다. 천사가 처녀 마리아를 불러 동정녀로서 잉태할 것을 예고할 때 마리아는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재삼 권고하는 말을 듣고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던 마리아, 메시아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르겠다고 각오한 입장에서 메시아를 잉태할 수 있었던 동정녀 마리아, 이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요셉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아기를 배었으니 요셉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그때의 사회 환경으로 보나 모세의 율법으로 보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고민하던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분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요셉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없는 출발을 한 마리아와 요셉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아기를 길러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요셉 가정의 책임이었지요. 민족이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지 못하니 요셉은 민족을 대신하여 자기의 의붓아들과 같은 예수를 메시아로 모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할 책임이 요셉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도 역시 이 땅에 신랑의 이름으로 오신 메시아를 대하여, 만우주의 여성을 대신하여 최고의 신부의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예수를 어릴 적부터 메시아로 모셔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메시아를 그 가정에 보내신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그런 사명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정적인 기준에 있어서도 어떤 가정보다 귀한 가정에 보내진 예수, 이스라엘의 어떤 고귀한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로,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귀한 존재로 온 구세주 예수를 마리아와 요셉이 진정으로 알고 받들었던들, 예수의 생애는 슬픈 생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단정합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 성모 마리아를 숭앙하지만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다했더라면 예수는 그렇게 불쌍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천륜의 뜻을 신봉해 나가기 위해서 정성들이는 마리아의 생활을 본받아서 예수를 중심삼고 생활했던들, 예수를 목수인 자신의 조수로 생활하게 하지 않았던들, 예수가 그렇게 불쌍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요셉은 예수가 자신의 아들의 입장에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평면적인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예수와 요셉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였지만 뜻적인 입장에서는 상하관계였던 것입니다. 벌써 출발부터 다르고 내용이 달랐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안 그 시간부터 누구보다 충성되게 예수를 모시는 제사장의 사명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딸, 즉 예수의 동생들은 아버지인 그 요셉을 따라 형님이고 오빠인 예수의 말에 누구보다 절대 순종해야 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유대 민족 전체가 받들어야 할 말씀이요, 모세의 오경을 중심삼은 교리나 모든 법도를 전부 무시하더라도 순종해야 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랬던들 예수는 슬픈 가정 생활을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 가정이 예수를 가정적으로 환영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개인적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 입장도 찾지 못하고, 가정적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 입장도 찾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올 때 요셉 가정을 통해 왔지요? 요셉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택한 귀한 혈족으로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충성의 도리를 세운 선조들의 혈통적인 인연을 갖춘 후손이지요. 이런 요셉은 다윗보다 중요하고 솔로몬보다 중요하고 역대 어느 선조보다도 중요한 메시아를 만난 그날부터는 과거의 잘못된 전체를 버리고 메시아를 위주로 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요셉이 그런 생활을 했더라면 베드로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정적인 환경에서 안식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던들, 예수가 외부로 나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식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하는 동생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14-275
예수의 울타리가 되어 줬어야 할 요셉 가정
하나님이 수천년 동안 수고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성별된 혈족을 세워 탄생시킨 메시아가 그 혈족을 버리고 섭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태어나서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보기 전에,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요셉,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리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요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인 밑에서 메시아로 나타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와 하나 되면 민족 전체가 바라보는 소원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전체의 뜻과 소원을 대신하는 중심적 터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요셉의 손을 붙들고, 마리아의 손을 붙들고, ‘내 뜻과 소원이 이것이요’ 하고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비참함이었습니다.

이 땅 위에 메시아로 태어난 예수는 마리아의 복중을 통해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과 같이 마리아의 육신을 통해서 태어났지만 예수의 이념과 사명을 볼 때,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정을 기반으로 안식의 터전을 닦아서 그 가정을 피난처로 삼고, 위안처로 삼아 친척을 수습하고 종족을 수습하여 민족이 반대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터전을 만들어 놓고 예수는 공생애 노정을 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준비의 노정을 거친 예수가 준비의 노정에서 무엇을 바라보았던가? 예수는 민족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자기 가정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가식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역사적인 심정을 통하고 시대적인 심정을 통해 가지고 미래적인 심정까지 염려하면서 예수는 그의 부모를 사랑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내게는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나를 배어서 낳아 준 마리아는 어머니 중의 어머니다’ 하던 메시아 예수,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습니다. 그렇지 않았겠어요?

요셉은 예수의 의붓아버지로 되어 있었지만 예수를 자기 아들딸 이상으로 사랑해야 했습니다. 예수의 동생들은 형님인 예수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이 되려고 하는 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가까왔을 때 그 형제들이 예수에게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했습니다. 그때 예수는 형제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올라갔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의 속 마음을 알고 있는 동생들로 하여금 형님을 위하고 받들 수 있는 입장에 세우지 못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어요? 요셉과 마리아에게 있었습니다.

이 땅에 메시아로 와서 부모를 부모로 모시지 못한 예수의 한을 누가 알았으며, 형제를 형제로 대하지 못한 예수의 한을 누가 알았으며, 친척을 친척으로 거느리지 못한 예수의 한을 누가 알았습니까? 이것이 예수의 비참함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것을 모르는 기독교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숭상하는 것도 지극히 비참한 것입니다. 만일 친척들이 울타리가 되어 예수를 감싸고 나갔던들, 세례 요한도 그 울타리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의 친척이거든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간 메시아를 축하하는데 무엇을 축하하는가? 그가 나신 것을 축하하는가? 그가 살으신것을 축하하는가? 그가 가신 것을 축하하는가? 무엇을 축하하는 것인가? 그분은 비참하게 태어 나셨습니다. 살기도 처량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비참하게 죽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축하하느냐는 말입니다. 비참하게 태어나서 처량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 간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까?

예수는 나면서부터 살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사람됨과 인격을 중심삼은 뜻, 즉 인생관, 우주관, 섭리관을 중심삼고 대할 수 있는 개인을 그리워 했을 것이요, 가정을 그리워했을 것이요, 종족과 민족을 그리워했을 것이요, 교단을 그리워했을 것이요, 나라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선 메시아의 탄생을 우리는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14-277
출발부터 영광받아야 할 예수
예수는 밥을 먹을 때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마리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한없이 많아도 말을 못했습니다. 그저 묵묵했다는 것입니다. 왜? 자신이 메시아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온 것을 아는 어머니가 해야 할 책임,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아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못하고 있으니 메시아로서 인간 세계의 전체를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 자식이지만 메시아로 모셔야 했습니다. 요셉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경배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중심삼고 형제 친척들도 전부 그렇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예수는 인류의 참부모였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전,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창조이상을 이룰 날을 소망하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담 해와, 즉 참아들딸을 중심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그리워하며 즐거워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깨져 나감으로 역사적인 비참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지가 생긴 이후 처음 벌어진 비참한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예수입니다.

타락 전의 영광의 세계는 전부 누구의 것이었느냐? 아담의 것이었습니다. 타락 전에는 아담의 것이었어요. 그 영광의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누구 것이었느냐? 아담의 것이었습니다. 세계가 모두 아담의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움직이는데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되고,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에 장애가 없어야 하고, 그가 하고자 할 때 제재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하가 전부 그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러한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셨으나 그들이 깨져 나감으로 모든 것이 전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목적은 이 아담과 해와가 실수한 전부를 회복하여 본연의 아담 해와에게 부여해 주려고 한 전체의 이념을 생활 가운데에서 내적으로 느끼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태어난 첫날부터 시작했어야 할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 능통하지 못함이 없어야 할 입장에 선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의 환경이 어땠었나요?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유대교단이 어땠었나요? 모세 오경의 틀에 잡혀 있었습니다. 요셉 가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나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늘적인 맡은 바의 책임과 생활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가지고 제재받지 않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생활해야 할텐데 그러지 못한 예수의 내적 고충이 얼마나 컸겠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런 내적 고충을 느낀 반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떠했는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예수가 고충을 당하고 슬픔을 느끼면 그를 붙들고 ‘우리가 있으니 네 소원은 기필코 이룰 것이다’ 하며 그의 내적 슬픔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 어머니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요 형제들이 할 일인데,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30여 년의 준비 기간에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대도 다 무너지고 깨져 나갔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기대는 몇 번씩 꺾여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부모인데 부모에게 천법을 적용할 수 없는 간곡한 예수의 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갈 길이 이렇고 이러이러한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간접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알아 주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30세에 집을 나갔습니다. 집을 나간 것입니다. 공생애 노정을 출발한 거예요. 공생애노정이 거룩한 노정이라고요? 아닙니다. 예수의 공생애 노정은 슬픈 노정이었습니다. 슬픈 노정이었어요. 예수가 집을 나갔을 때 그의 동생들이 따라다녔습니까? 그의 어머니가 따라다녔습니까? 아무도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예수를 찾을 때 예수는 “누가 내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럴 만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찾는 개인은 어디 갔으며, 메시아가 찾는 가정은 어디 갔으며, 종족은 어디 갔으며, 교단은 어디 갔으며, 민족은 어디 갔는가? 아무것도 찾지 못한 메시아의 울부짖음 소리를 누가 들었던고! 아직까지도 기독교는 깊은 잠에 빠져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이런 내용은 모르는 것입니다.

14-279
참부모로 오신 예수
이 통일교회가 나와서 특별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며, 또 말로만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쌍한 예수를 위로하고 그의 방패가 되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는 민족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개인적인 슬픔의 방패가 되고, 가정적인 슬픔의 방패가 되고, 종족적인 슬픔의 방패가 되고, 교단적, 민족적인 방패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역사적인 선조들이 하나님 앞에 책임 못한 것을 한탄하고, 과거에 왔다 간 메시아의 생활적인 슬픔을 붙들고 현실에서 그 슬픔을 풀어 드리기 위해 호소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오시는 메시아를 맞기 위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30여 년의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그 마음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한 줄 아세요? 개인적인 상대자가 없으면 ‘하나님이시여! 저를 보내셨으니 개인적인 저를 소망의 상대자로 삼아 주시옵소서! 제가 남아 있사오니 저를 보고 위안 받으시옵소서!’ 하며 수없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온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나라의 주권자라면 그 입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구할 구세주로 온 예수도 구세주의 입장에서 민족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의 인격 기준에 상대가 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서 예수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을 했습니까? 메시아가 어떻게 오시는지나 알았습니까? 죄를 지긋지긋하게 지어 놓고도 천국이 이루어지면 거기서 한 자리 해먹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나라를 찾기 전에 교단이 필요했고, 교단을 찾기 전에 민족이 필요했으며, 민족을 찾기 전에 종족이 필요했고, 종족을 찾기 전에 가정이 필요했으며, 가정을 찾기 전에 개인이 필요했습니다. 그 개인이 누구였습니까? 여자의 대표자는 마리아요, 남자의 대표자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들을 세상적으로 보면 어머니 아버지였지만 뜻을 중심삼고 보면 아닙니다. 예수는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였습니다.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왔습니다.

인간 조상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혈통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본연의 이상세계, 타락하지 않은 그 세계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직계 혈통을 받아 아들딸을 낳아야 할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사탄과 인연을 맺어 죽은 자식을 낳은 사탄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인류는 전부 거짓부모를 만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부모의 혈통을 부정하고 참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로 왔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무엇인가?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지만 뜻으로 보면 참부모인 예수 앞에 부모가 아닙니다. 예수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 위한 이념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온 메시아였기 때문에, 아무리 그를 낳은 사람이라도 그 메시아 앞에서는 자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가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믿어집니까?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있지요? 무엇이 천지개벽이냐?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들이 그 아버지 앞에 아버지가 되어 일을 하는 것이 천지개벽이라고 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 앞에 효자는 요셉이요, 효녀 중의 효녀는 마리아요, 메시아 앞에 충신은 요셉이요, 메시아 앞에 충녀는 마리아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죽더라도 먼저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제자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할 말을 다 못하고 갔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말을 다 못하고 갔어요. 천적인 사명을 짊어진 예수가 세상적으로는 아버지요, 내적으로는 아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요셉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다 말하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고 했지요? 이런 구절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이 땅 위에 왔던 메시아, 슬프고 슬프도다 ! (이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안 되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