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37 to 14-260: 승리적 주관자가 되라

승리적 주관자가 되라
1965.01.01 (금), 한국 전본부교회

14-237
승리적 주관자가 되라
이제 7년노정 가운데서 3년노정은 지나가고 앞으로 4년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노정은 여러분 전체가 가야 할 노정이지만, 특히 이번 7년노정은 선생님이 친히 가야 할 노정이기도 합니다. 지난 3년노정은 자녀를 찾아 세우는 노정이었고, 이 4년노정은 환경을 찾아 세워야 할 노정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얼마나 촉박하고, 초조한 입장에 놓여 있는가를 우리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14-237
7년노정의 섭리적 의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그때에 7수를 완성하였다면 이 7년이라는 탕감복귀노정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다 저끄러졌기 때문에 6천년의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온 것입니다. 즉, 7수의 원한을 풀기 위한 노정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의 우리 조상들은 반드시 7수를 중심삼고 역사해 나왔습니다. 선생님도 이 길을 나설 때는 7년 기간을 중심삼고 이 길을 완결지으려 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21년노정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번이 그 21년노정의 마지막 7년 기간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이 14년 기간에 가정을 중심삼고 축복의 기준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60년대를 중심삼고 내적 외적으로 그러한 승리적인 기간을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반은 자유스럽고 평화스럽고 뭇 사람들이 환희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빼앗아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열 번씩이나 속임을 받아 가면서도 빼앗기 싸움을 하여 승리적인 결정권을 세웠던 것과 마찬가지의 노정을 지금 거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기간에 만물복귀와 더불어 환경복귀, 즉 자유 통일의 이념이 거쳐나갈 수 있는 자유스런 환경을 전체 분야에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이 4년노정의 표어를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기간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 앞에 땅을 찾아 세워 드려야 됩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까지 어디를 가든지 전체가 환영할 수 있는 안전하고 자유스러운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이 4년노정에 있어서 여러분의 책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승리적 주관자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승리적인 입장에서 하늘땅을 주관하고 계시냐 하면 그렇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승리적인 터전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하늘과 땅과 만민을 주관하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받들어 나온 수많은 선조들도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2천년 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도 그 사명을 완결짓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분도 역시 이 땅 위에서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신이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승리적 주관자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승리적 주관자의 최후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먼저 이 승리적인 기준에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적인 자리에 올라가기 전에는 이 땅의 그 누구도 승리적인 자리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승리적인 주관자의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주님인 것입니다.

14-239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한 섭리역사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본래 하나님은 참다운 인류의 조상을 중심으로 승리적 주관권을 가지고 천지를 주관했어야 했는 데도 불구하고, 이 주관의 위치를 잃은 것이, 누구 때문이냐? 아담 해와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해와 때문에 일이 이렇게 저끄러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참다운 인류의 조상,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참부모의 혈족으로 우리 인류는 태어나야 했습니다.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던 인류의 참부모, 그 참부모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로서, 인류 앞에는 승리적인 영원한 실체로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담 해와는 승리적인 실체로서 나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슬픈 역사를 이루어 나온 원한의 터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하늘의 법도를 떠났고, 자기의 실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한 우리 인간은 말씀에 따라서 실체를 찾고, 심정의 세계를 찾는 복귀의 노정을 더듬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만물보다도 더 악한 자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대할 수 없는 슬픈 입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는 다시 회복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일깨워 재창조 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종의 자리를 거치고, 양자의 자리를 거치고, 아들의 자리를 거쳐서 승리적인 주관권을 갖추어 참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해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약시대는 소생시대요, 신약시대는 장성시대요, 성약시대는 완성시대라 할진대 구약시대는 종의 시대요, 신약시대는 양자의 시대였습니다. 이 양자의 시대를 거쳐서 실체 자녀의 시대를 완결짓고 나서야 부모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입니다. 이러한 복귀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종의 시대와 양자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실체 자녀의 시대로서 승리적인 기준을 세운 다음에,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할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종이 되어, 여기서부터는 종의 세계이니 사탄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 승리의 팻말을 꽂고 종으로서의 전체적인 조건을 세운 우리의 선조들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또 종의 승리적인 터전을 상속받아 하늘편 전체의 종을 통할하고, 하나님 앞에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양자가 되어 하나님이 찾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양자로서의 승리적인 결정권을 세운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탄은 사람 하나를 놓고 싸워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워 놓으면 번번히 사탄이 침범하여 망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뒤넘이치는 이 역사가 6천년이나 흘러왔지만 어느 한 때 종으로서 사탄을 쳐부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고, 어느 한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탄을 쳐부수고 하나님의 권한을 세울 수 있는 양자를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한스런 복귀역사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그러면 이것을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지는 입장에 서서 한 사람의 사명자를 세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갈라 세워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한 기반 위에 한 사람을 불러 세워서 명령을 실천하게끔 역사하셨는데도, 명령을 받은 사람이 번번히 실패를 한 연고로, 수많은 사람을 동원시켜서 연이어 나갈 수 있는 후보자를 세워 나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의 역사, 양자의 역사, 자녀의 역사, 부모의 역사, 이러한 종적인 역사가 오늘날 횡적으로 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아직까지 종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요, 양자의 도리를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 하면 ‘내 아들딸아’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책임은 어떠한 것인가? 통일교회는 종의 시대를 지나고, 양자의 시대를 지나고, 자녀의 시대를 지나서 부모의 시대로 넘어가는 때에 처해 있습니다. 승리적인 주관자는 개체로서만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이 개체인 아담 해와로부터 가인 아벨 셋의 세 아들에까지 미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가정을 중심으로 시작한 복귀의 노정은 노아 가정을 거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치고 모세를 거치고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에 이어 세례 요한, 예수님 때에 와서 세계를 중심삼고 완결지으려 했으나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 1차적인 이스라엘의 섭리노정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기독교가 재차 이것을 탕감복귀해 나왔던 것입니다.

14-241
승리적 결정권을 가졌다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수없이 벌어진 복귀의 인연들을 집결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가운데는 세계에 널려 있는 종들 중에서 승리한 자가 있어야 하고, 양자 중에서 승리한 자가 있어야 하고, 나아가 직계의 자녀로서 승리한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승리한 터전 위에서 승리한 부모를 모시는 모임이라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승리적인 부모를 모셔야 되겠고, 승리적인 자녀를 가져야 되겠고, 승리적인 양자를 가져야 되겠고, 승리적인 종의 무리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울타리 안팎에 있어서 어떠한 입장에서든지 나가 사탄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종으로 나가서도 사탄을 물리치고 양자로 나가서도 사탄을 때려 부수고, 직계 아들딸의 명분으로 나가서도 사탄을 때려 부수어 물리쳐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부모의 이름으로도 사탄을 물리쳐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야만 승리적 주관자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종의 자리에서의 승리적 주관자, 양자의 자리에서의 승리적 주관자, 자녀의 자리에서의 승리적 주관자, 부모의 자리에서의 승리적 주관자 중 그 어떠한 위치라도 갖춰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자리에서 전부가 단결하여 승리적인 결정권을 가졌다 할진대 어떤 제한된 환경에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승리적 주관자의 권한을 민족이면 민족 전체가 환영해야 되고, 나아가서는 그 위신과 권위가 민족을 넘어 지상에서 승리적인 결정을 세우는 것은 물론, 국가적인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세계를 대하여 명령할 수 있는 그 기준까지 가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지상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지상에 천국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종의 종, 종, 양자, 자녀, 부모의 자리까지 거쳐 나와야 하는 역사적인 숙명이 있습니다. 종적으로 흘러나온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는 승리적인 실체로 서서 이를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책임진 선생님에게 있어서 어떠한 시대가 있어야 하느냐? 종의 종의 시대부터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14-242
승리적 주관권을 회복하자
많은 가정들을 축복해 주고 보니, 이들이 악한 세상에서 재타락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비참한 탕감이 있을 것입니다. 축복은 가장 귀한 것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한 많은 역사노정에서 소망하던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고대하는 기준과 땅에서 축복해 준 분이 소원하는 기준에서 어긋나는 날에, 하나님의 참소와 축복해 준 분의 참소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계와 육계의 참소를 받는 것이니 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의 승리적 주관권, 양자의 승리적 주관권, 자녀의 승리적 주관권을 유린했기 때문에 이는 삼중(三重)의 범죄자 입니다. 심판을 받는다면 그들부터 받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통일교회는 승리적 주관권을 회복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담 해와는 승리적 주관권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아담 해와가 참부모로서 영계를 통솔할 수 있는 주관권을 결정짓지 못했기에,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승리적 주관권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땅 위에 상하가 일치될 수 있는 승리적 주관권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을 중심삼고 하나의 백성, 하나의 국토, 하나의 주권을 세워 이것을 결정짓게 될 때에 비로소 천국건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에게는 아직까지 나라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났다고 해서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요, 이 세계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과 하등의 인연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세계를 위해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연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벨의 제물섭리를 연결시켜 가지고 이를 역사적인 승리의 발판으로 삼아 노아를 세워 대를 이어나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한을 풀고자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여 천상 천하를 움직이시게 해야 되며 거기에 반항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경륜 앞에 참소하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 다르고 금년 다르게 역사는 점점 급변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전환점과 더불어 생명을 같이하며 영계를 수습하고 생활환경을 수습해야 하는 것이 통일신도의 사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통일교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천하를 주관할 수 있는 때가 와야 합니다.

오늘날 소수의 무리를 중심삼고 나온 이 통일교회의 환경은 어떠하였습니까? 여러분들이 3년노정을 걸어오지 않았던들 이 땅 위에 통일교회는 존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부가 우리들의 원수였습니다. 어느누구가 원수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 우리는 하나에서 출발하여 둘로, 둘에서 셋으로 그 수를 늘리면서 소수의 무리를 동원하여 오늘의 민족적인 수고의 노정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역사적인 제물이 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천륜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 들이는 사람을 통해서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은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호화찬란한 영광을 누리며 사는 사람을 통하여 섭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을 위하여 공적인 눈물을 흘리고 공적인 피와 땀을 흘리는 무리가 있는 그 나라와 그 민족을 위하여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피와 눈물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들이는 그들을 통해서 역사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변치 않는 가운데 책임을 다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국가는 그 사람들 앞에 굴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14-244
죽음의 길로 내모는 이유
우리 통일교회의 표어를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라고 했는 데 어찌하여 이런 표어가 필요합니까? 이는 눈물을 흘리되 부모를 대신하여 흘리고, 땀을 흘리되 부모를 대신하여 흘리고, 피를 흘리되 부모를 대신하여 흘리자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죽음의 길을 도맡아서, 하늘을 위하여, 땅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내가 먼저 죽음의 제단에 오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존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눈물짓는 것은 죽음의 길을 일소하기 위한 것이요, 고통의 길을 일소하기 위한 것이요, 슬픔의 길을 일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길을 일소하기 위하여 먼저 눈물짓고 피땀을 흘려 나온다는 것을 알고 오늘 우리는 그뜻을 대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자리에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최후의 죽음의 자리, 최후의 눈물을 흘릴 자리, 최후의 피땀을 흘릴 자리에 우리의 선조들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를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도 그 이상의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그 순간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받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픈 심정을 가지고 인류역사 이후 고통을 받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일대를 중심삼고 한번 고통받고 넘어가면 우리로서는 책임이 다 끝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죽음의 길을 갈 적마다, 눈물의 길을 갈 적마다, 피와 땀을 흘리는 길을 갈 적마다, 슬픔과 고통의 길을 갈 적마다 심한 고통을 받아 나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섭리를 중심삼고 시대적인 책임을 짊어졌을 때에 공적인 입장에서 하늘과 땅과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던지고,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을 뿌렸다면 모든 일들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이러한 목표를 향하여 따라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을 어떠한 자리에 세우려 하느냐 하면 부모를 따라 나가는 자녀의 자리에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수고를 하였으니, 오늘날 그 수고를 우리들이 상속받아 이 땅 위에서 탕감복귀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의 길에 인연되어 있는 연고로 이 길을 중심삼고 가는 길은 눈물의 길이요, 피와 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사정을 대할 때는 눈물 없이 대할 수 없고, 비참한 그 소식을 대할 때는 피가 솟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내 피와 살을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그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다 해드리고 싶습니다. 수천만의 제자들을 희생시키더라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여러분을 종으로서 눈물과 피땀을 흘리게 하여 양자로서 혹은 직계 자녀로서 나아가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계 자녀로서 죽음의 자리를 개의치 않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오시는 그 분의 실체적인 십자가의 노정을 대신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의 선조들을 내세워서 탕감복귀의 사명을 하게 했듯이, 실체적인 참부모에게도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워 가지고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민족이 완전히 복귀될 때까지는 이 일을 계속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최후의 한 날을 맞이할 하나의 중심존재를 세우고 바라시는 소망은 무엇이냐? 죽음의 자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갖춘 사랑하는 자식들을 세워서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 승리할 수 있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딸의 자리에서 결정지어야 하고, 양자의 자리에서 결정지어야 하고, 종의 자리에서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임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평면적으로 움직이지만 거기에는 소생, 장성, 완성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운세(運勢)를 중심삼고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14-246
7년노정의 중요성
오늘날 축복 받은 가정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교회의 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가져 왔습니다. 또 들어온지 오래된 사람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지장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21년을 거쳐 나온 것과 같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 있어서도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처지에서 사명을 다해야 되느냐? 여러분들이 이 복귀의 노정을 한 단계 한 단계 걸어 나가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한 중심이 그런 사명을 종합하여 승리적 기반을 닦아 나왔기 때문에 소생의 7년 기간을 중심삼고 받은 명령을 밀고 넘어가면 이 7년 기간에 완결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와 앞으로 이 이념을 찾아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 이 7년노정을 안 넘으면 안 됩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잃어버렸던 천적인 심정을 되찾아 나오는 복귀의 심정을 이어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왔고, 선조들이 그렇게 나왔고, 선생님이 그렇게 나왔기에, 여러분도 그 길을 더듬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국가적인 기준까지 넘어서면 짧을 수 있어요. 7년이 7개윌이 될 수 있고, 7개월이 7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세계사적인 7년 대환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7년 기간에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이냐? 개인적인 승리의 주관권을 갖춰야 되고, 가정적인 승리의 주관권을 갖춰야 되고, 종족적인 승리의 주관권을 갖춰야 되고, 민족적, 국가적인 승리의 주관권을 갖춰야 됩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손인 여러분은 직접 7년노정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을 세워 영계와 육계에 그러한 길을 닦게 해 가지고 여러분들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이 이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누구를 찾아 나왔느냐? 승리적 주관자입니다. 하늘과 땅을 중심삼은 승리적 주관자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영광의 참부모가 오실 때 그분 앞에 반대하는 사탄이 없어야 됩니다. 그분의 뜻과 이념에 상충되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때가 와야 됩니다. 절반만 넘어가면 잘라 버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새로운 이념이 나와서 모든 사상을 한 곳으로 휘몰아칠 때에 여기에서 하나 되지 못하면 세계를 다시 절반으로 갈라 놓을 것입니다. 아담에서부터 가인과 아벨이 갈라졌던 것이 합할 수 있는 운세에서 하나 되어 가지고 완전한 자리를 잡아야 되는 데, 여기에서 하나 되지 못하면 반드시 갈라 놓는 것입니다. 아벨과 가인을 갈라 놓은 다음 가인을 때려 부수고 아벨과 셋으로써 가인 아벨형을 대치하여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승리적 주관권의 표를 받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축복한 가정들은 3년노정 뿐만이 아니라 4년노정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전한 축복이 아닙니다. 이 4년노정에서 싸우다 쓰러지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걸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4년노정을 넘어 국가적인 환영리에 재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그 다음엔 세계적인 노정을 완전히 넘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가야 3차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4-247
믿음·소망·사랑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살고 있으되 자신만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승리적인 주관권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모심의 생활을 중심삼아 일체적인 입장에서 생활해 나가야만 승리적인 기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한 그들을, 창조이상을 이룬 자리, 즉 창조목적을 완성한 자리에서 주관해 보셨느냐?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천지는 아직까지 미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원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소망을 이루지 못했으니 뜻도 이루지 못했고,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인간 중심삼고 살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소망을 이루지 못했고,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인간을 중심하고 살아보지 못하셨으니 이 천지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찾아 나오고 있느냐? 역사 발전과 더불어 도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가느냐?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는 먼저 무엇을 바라보고 찾아가느냐. 소망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것을 연결 시키기 위해서 신앙이란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저 믿어라, 믿어라 하는 것은 막연합니다.

고린도전서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소망으로 삼고 다음엔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생활의 실체, 즉 믿음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조 본연의 인간이 소망하는 기준이 원리주관권 내에서 완성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 할진대, 그 기준과 일치화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찾기 위하여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간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신랑 신부가 된다는 막연한 기대라도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류의 구원섭리를 막연한 소망을 중심삼고 하느냐? 이 소망은 인간을 위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러한 뜻을 정확히 알기 전에는 이 소망이 명확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배워서 알다시피, 원리결과주관권의 완성기준선까지 나아가 직접주관귄과 접선되는 그 경계선에서 모든 소망을 완결짓게 될 때, 그 기점은 하나님도 바라는 곳이요, 인간도 바라는 곳이요, 원리의 궁극에 도달한 곳이 됩니다. 이 3점이 일체가 될 때 진리와 인격과 사랑이 합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진리를 대신하고 인간(식구)은 인격을 대신하고 하나님은 사랑을 대신하여서 이 3점이 혼연일체화되는 그 자리가 말세에 나타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역사적인 기준으로나 복귀섭리의 기준으로 볼 때도 하나님은 승리적 주관자가 못 되었습니다. 왜 못 되었느냐? 아담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창조목적이 하나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중심삼고 피조만물을 상대적인 이념으로 지었기 때문에 상대적 대상인 아담 해와가 결정(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망을 중심삼고 볼 때에 소망하는 승리적인 주관자가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4-249
믿음 소망 사랑을 완성한 실체
그러면,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주체는 누구이뇨? 승리한 메시아입니다. 예수님,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적인 주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승리한 메시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왔었지만 패배의 도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만민을 승리의 입장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승리의 기준을 세워 놓고 가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사탄의 침해를 받는 역사적인 곡절을 거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이상, 즉 소망을 중심삼은 승리적인 주관자가 나와야 됩니다. 소망은 반드시 믿음을 표방하고 나갑니다. 믿음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믿음을 완성한 실체에 있어서, 백을 믿었으면 믿은 백만큼의 실제적인 가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이상과 일치될 수 있는 사람, 즉 원리법도와 일치 될 수 있는 사람,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사람을 표방하여서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서 승리하게 될 때, 그는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과 믿음에서 승리한 실체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소망할 수 있는 승리의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중심삼고 인격을 갖추어서 신앙면에서 승리한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받드는 이 신앙의 실체, 그 실체로써만이 오늘날 종교계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억천 만민이 아무리 믿고 아무리 소망하는 그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 한 분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믿음의 승리적 주관자가 결정되어져 그가 소망과 일체가 될 수있는 자리에 나가게 될 때에, 비로소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이룬 자리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과 믿음에 있어서 승리한 실체가 되어 사랑을 중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 위의 인간이 차지해야 할 최후의 기준에서 승리했다는 영광된 모습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고, 그 사랑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시행하는 것이면 하나님도 시인하게 됩니다. 사랑은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사랑에는 부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을 완수한 자리에 서서 소망과 믿음의 승리적 주관권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승리적 주관자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온 인류는 그 주관자 앞에 와서 사랑을 분배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류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권자가 나타나서 사랑을 소개할 수 있는 운세가 오게 되는 날에는, 타락한 인간 끼리끼리 사랑하던 것은 자동적으로 버리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추구하는 수많은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만물과 천상의 천천만 성도들 역시 그 사랑 앞에 굴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천주통일의 결정적인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계의 기준이요, 원리적인 기준이요, 인류의 소망의 기준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준에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무대가 모두 연결되어 그 주권자의 권한 밑에서 사랑받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의 방향을 갖출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새로운 천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의 주관권내에 있게 될 때에는 아무리 끝에 있다 해도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는 층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무한한 평화와 무한한 평등과 무한한 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이나 상하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요, 영원히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서 하나만 들고 나서도 거기에는 전체가 통합이 안 되는 것이 없고 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기준에 입각한 사랑을 중심삼은 승리적 주관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그러한 자리를 찾지 못했기에 우리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인하여 소망을 잃어버린 인간들이기에 믿음을 중심삼고 실체를 찾아 사랑을 연결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효자요, 충신이요, 열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누구나 통일교회에 맨 처음 들어와서 원리 말씀을 들으면 말씀에 취해서 자기 집 생각도 안나게 됩니다. 또한 세상과 관계가 없어집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도, 사랑하는 자식도 귀찮아집니다. 자기의 갈길이 바빠 그 말씀 외에는 만사가 귀찮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하나님을 대신한 소망에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요, 믿음에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요, 사랑에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분이 나오면 만민을 그 앞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만 결정되면 30억 인류를 그 앞에 주겠다는 거예요. 모든 실권을 그 앞에 갖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하늘의 질서도 잡히는 것이요, 땅의 나라도, 세계도 질서가 잡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권을 하나님은 인류의 시조 앞에 주셨으나, 그들이 이것을 잃어버림으로 인하여 복귀의 길을 더듬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을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슬픔의 길을 거치지 않을 수 없고, 고통의 길, 죽음의 길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그러냐? 오늘날의 세계가 슬픔과 고통과 사망의 골짜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4-252
승리적 주관자가 거쳐야 할 과정
이러한 승리적 주관권은 단번에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과 무수히 부딪치고 부딪혀야 되는 것입니다. 순금은 몇 천만번이고 불에 집어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더 깨끗해지면 깨끗해졌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기준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운 역사노정을 거쳐 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뚫고 나가는 데는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관자로 오셔야 할 그분은 개인적으로 될 때 이 땅 위에서 불쌍하다면 최고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승리의 기준을 갖출 때까지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정적인 기준에도 불쌍한 사람이요,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무대를 거쳐 나갈 때까지 불쌍한 기준을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도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승리를 세워야 할 책임자요, 죽음 길에서도 하나님의 승리를 세워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자입니다.

오시는 주님은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슬픔과 고통을 짊어져도, 세계적인 슬픔과 고통을 짊어져도 달게 받아야 됩니다. 만민을 위하여 죽음의 길을 가라 해도 달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서 이 땅 위에서 승리의 주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슬픔의 세상에 있어서 슬픔을 못 이기는 패자가 되지 말고, 그 이상의 슬픔을 가졌다 하더라도 감사하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의 경계선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고통을 중심삼은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죽음을 중심삼은 승리적 주관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팔방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소원과 소망을 중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믿음을 중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사랑을 중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힘을 써도 누구보다도 더 써야 되고, 정성을 들여도 누구보다도 더 들여야 되고, 싸움을 해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차피 이 길은 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14-253
세 번 이상의 시련 기간
오늘날 하나님은 참 무자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사람이 생겨나야만 천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1대로만 섭리하지 않고 3대 이내로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만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아들을 찾아 세워 3수를 맞추어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체이면 그 다음엔 반드시 3수를 거치는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쳐 줘도 중요한 문제는 3수를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3수를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을 잘 믿으면 내 것이 됩니다. 잘 수습하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중심하고 볼 때에 하늘과 땅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천지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삼위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3수를 세워 가지고야 됩니다. 나를 찾아야 할 때는 반드시 내 후손, 내가 땅 위에 연결지을 수 있는 후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잘 키우면 그때 가서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키워 가지고 잘 자라면 그때서야 천리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를 그렇게 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키워 준 만큼 한 생명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몸부림치게 될 때에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밤잠을 잘 수 없으리만큼 식구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슬픔이란 외부의 환난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운 것도 슬픈 것입니다. 뜻을 알았지만 그것을 자랑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슬픔입니다. 외적인 고통과 환난에 의한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내적인 고독이나 뜻을 전달해야 할 상대가 없을 때도 슬픔이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있다 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고통을 받더라도 자녀들을 중요시하고 책임진 환경을 중요시하고, 또 그것을 자기가 수습하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나아갈 때에 한 고개를 넘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결정지을 때는 반드시 가인 아벨을 세워 가지고 합니다. 가인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 슬픔도, 고통도, 죽음의 길도 자기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끝까지 참고 개척해 넘어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승리의 기대를 세워 놓고 성신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출발을 해 가지고 기독교를 세워 세계적인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를 계속해 나오셨습니다. 그런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무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갖고 슬픔의 길도, 고통의 길도, 죽음의 길도 각오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세 번 이상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죽음의 자리를 세번 이상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를 거쳐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실체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승리적인 주관자의 자리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길에서도 승리적 주관권을 갖출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선생님도 이 길을 출발할 때에 죽음을 몇백 번 각오했습니다. 그러한 시련 기간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그런 훈련 기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죽음의 고개와 민족적인 고통의 고개와 민족적인 슬픔의 고개를 넘고, 세계적인 죽음의 환난과 세계적인 고통의 환난, 세계적인 슬픔의 환난을 당해 보아야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이 슬퍼하고 하늘땅이 생사의 기로에서 몸부림칠 때, 이것을 해결지어 가지고 승리의 일로를 개척해야 하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하늘땅의 죽음의 길, 슬픔의 길, 고통의 길에서 뒤넘이치다가 한 면, 즉 영적인 면만 해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길을 다시 가야 할 복귀도상에 있어서, 오시는 주님은 반드시 양면의 책임을 감당해야 되겠기에 영광중에 못 나타납니다. 제일 슬픈 자리에서 눈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눈물로 다짐하고, 고통의 생활을 거쳐 죽음의 길을 왕래하면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슬픈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을 품고,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을 품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을 품고 그 실체로써 나타날 수 있는 실력을 맞추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최후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완성하는 소망의 주관자, 혹은 사랑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255
천국 도달의 7단계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얼마나 슬픈 자리에 서 있느냐?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슬픈 자리에 서 보았느냐? 뜻을 위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 보았느냐? 얼마나 죽음을 각오해 보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뜻을 위해 슬픈 자리,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지 않는 한 승리적 주관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사에 나타나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더라도 그들은 믿음 하나를 가지고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았고, 믿음과 소망을 부여안고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한 천국이념과 함께 그리워하면서 고통과 슬픔과 죽음의 길을 더듬어 갔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길을 걸을 때 죽음으로 제물이 되었지만, 오늘날은 그러한 길을 가더라도 죽거나 제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중략)

고통과 슬픔과 죽음의 길을 넘어서서 부활의 영광을 갖춰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내적 외적으로 결의를 하고 산 실적을 세워야 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되겠습니다. 소망을 찾아서 옛날과 같이 믿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뜻을 알지 못할 때에도 어떤 소망을 품고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갔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 찾은 길을 가면서도 그런 자리에 못 서 있겠거든 믿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길을 거쳐 나가지 않고는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개인적인 승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가정적인 자리에서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가정을 지나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7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까지 가려면 7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일곱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절대 믿고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무슨 명령을 하든지 거기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의 길목에서 꼭 필요한 조건만 내세워 여러분에게 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나왔습니다. 안 가면 생각하지 않았던 환난과 시련에 부딪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생길 때는, 가슴을 활짝 열어 제치고 믿고 넘어가면 상처 하나 없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고 뱅뱅 돌다가는 목적지까지 다 못 갑니다. 그걸 보면 인간이 넘어야 할 탕감노정은 지극히 적고 짧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부 길을 닦아 놓고 한 고개를 넘어가게 되면 하나님은 그것을 조건으로 삼아서, 10년에 할 일을 10일동안에 수고시켜 10년 공생의 터전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어려운 길이지만 이 길은 하나님이 10년 동안 수고했으면 수고한 전부를 걸어놓고, 백명의 사탄과 싸웠으면 그 싸운 전부를 걸어놓고 한꺼번에 탕감지어 넘어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동원된 사람은 동원만 되어도 사탄이 시험한 조건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최후의 고비에 가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때려 모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 여러분은 수백명의 사탄이 있는 좁은 골목으로 갈지라도 그들과 싸워 패배하지 앉고 그들을 다 무찌르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향하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여러분 앞에 점점 더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거기에 굴복하지 말라는 겁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모두 졸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기운이 빠져 기진맥진하더라도 그들과 같은 무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여러분, 때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4-257
자기 갈 길은 자기가 닦자
하나님은 백의 은사를 주었다가 그것을 잘 가꾸어 가게 되면 거기에 비례한 몇천 몇만 배의 은사를 주십니다. 백의 은사의 자리에서 싸워 승리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몇천만 배의 은사를 가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한국 실정이 점점 더 쪼달리게 될 것입니다. 쪼달려 갈수록 더욱더 갈등이 생기고 괴로운 입장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소망을 갖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중략)

아무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오래된 우리 식구들에게 있어서는 작년이 큰 고비였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지금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외국에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안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왜 외국에 가지 못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이 한국민의 어려운 입장을 멀리하고 혼자 보따리 싸 가지고 살짝 가면 큰 야단이 난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민족적인 사명을 하고, 하나님이 이곳에 관심을 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잘 움직이면 새로운 역사가 전개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4년노정의 표어를 준 것과 같이,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느냐? 문제가 크다는 겁니다. 나에게는 고통의 자리, 죽음의 길을 갈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필요없다고 하는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지금 지도하는 방법을 모를 거예요. 선생님이 왜 자꾸 뒤넘이치는 일을 시키는지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다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끌고 못 넘어가면 한 두 사람이라도 끌고 넘어가야 합니다. 때가 촉박해짐에 따라서 여러분을 바라보는 선생님은 무자비하고 냉정해집니다. 개개인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40년 동안 갈 길을 닦아 놓고, 지금에서야 구경을 가고 싶으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런다고 전부다 골동품처럼 놀아? 자기 갈 길도 닦지 못하고 구경을 다녀? 책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뭐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날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은 이 길을 가기 위해서 극장의 문 앞에도 안 갔어요. 어디를 마음대로 가고, 사먹고 싶다고 다 사먹고, 하고 싶은것 다해? 앞으로 7년노정을 못 간 사람들은 선생님이 책임을 다해 하나님의 공인을 받게 되면 더욱 힘든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해야 할 책임과 본분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선생님이 옛날같이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좋지 않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쉬고 여러분이 어디든 앞장서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은 승리적 주관자의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다가오는 모든 길이 험하고,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더욱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멋지게 책임지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모든 어려움과 슬픔을 내가 책임지겠다 해야 됩니다. 여러분! 통일교회 전체의 고된 책임을 내가 짊어지고, 통일교회 운명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제 앞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것입니다. 큰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선생님이 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안하면 어머니가 하든지 선생님의 아들이 하든지 해야 됩니다. 종적인 역사는 3대를 거쳐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을 모시고 싸워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승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시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축복가정이나 할머니들을 보면 한심합니다. 가만 보면 뭐 먹는거나 주면 좋아하고 돈만 보면 좋아하고, 이런 사람들이 통일교회 사람이에요?

14-259
자기 책임을 완수하라
여러분들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길에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보다도 그 반대적인 자리에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 그 권한을 자랑할 수 있다 할진대, 영광의 세계는 자동적으로 올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할 여러분인 것을 알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에서 그러한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지역을 책임지면 책임진 곳에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은 내 것이다, 내가 아니고서는 풀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그것을 책임지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축복받은 사람들을 지방에 배치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 가서 기도한 사람 손들어 봐요? 기도나 하나? 그러나 선생님은 매일같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현재 머물러 있는 땅, 한국이면 한국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밥을 먹으나 굶으나, 자나깨나 언제든지 눈만 뜨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뜻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그러니 남은 만 2년 동안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선생님이 가는 이 길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있는 힘을 다해 주길 바랍니다. 이 기간에는 여러분들이 영광을 바라지 말고 제일 슬픈 자리, 고통의 자리, 죽음의 자리, 그런 십자가의 길을 자기가 뚫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차지하는 그 영광이 선생님의 영광이 아닐 거예요. 하늘땅에 세워진 모든 공적이 선생님 것이 아닙니다. 다 여러분에게 상속해 줘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기준에서 나아간다면 밥은 왜 굶어 ? 그런 기준을 못 세우면 지지리 고생해야 됩니다. 앞으로 본부에서는 고생하는 곳이 있어도 도와 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한편에선 도와 주고 한편에선 내몰고, 선생님은 뜻길을 걸어올 때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와주기는 뭘 도와줘? 전부 들이치지. 그렇지만 여러분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렵든가 고통스러울 때에 하소연할 선생님이라도 있지만,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전에 일본 선교사가 가지고 온 편지의 내용을 봐도 그렇다는 겁니다. 일본 식구들이 쭉 편지하는 것을 보면, 선교사님이 선생님 앞에 가서 어린애 노릇을 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 파파상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래요. 친구가 있나, 언제나 혼자입니다. 선생님의 섭섭한 마음을 여러분 앞에 분풀이한다면 전부다 머리를 박살내도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도 홍릉 성지로 해서 인왕산 성지로, 성지를 쭉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오늘도 선생님이 미국에 가게 되면 가지고 갈 예물을 준비하기 위하여 새벽에 떠났다가 해 진 뒤에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뭐하러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알아요? 선생님이 어떠한 마음 가지고 다니는지 꿈이나 꿔요? 여러분은 별의별 일을 다 하지만 선생님은 할 일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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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희생하며 나아가라
때가 가까와지면 가까워질수록 여러분이 승리하느냐 패하느냐 하는 결정의 시기가 가까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느냐 책망을 받느냐 하는, 즉 승리의 결정권을 어느 자리에서 세울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길을 세우지 못하겠거든 선생님의 마음과 선생님의 생활과 선생님의 모든 언행과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이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어디 가게 되면 따라가고 싶어서 야단하고 그랬지만, 이제는 선생님이 어디에 가도 무관심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생님과 멀어집니다. 엊그제 정석온 할머니가 와서 하는 말이, 선생님을 너무 보고 싶어하는 것도 폐가 될까 봐 보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했더니, 하늘에서 말하기를 ‘오!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고 하시더랍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따라갈 수 없다는 겁니다. 밥을 먹으나, 굶으나,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됩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그리운 마음이 앞서야 됩니다. 어떠한 소망을 중심삼고 볼 때에 소망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보고 싶고, 가고 싶고, 살고 싶은 마음이 죽음의 길보다 더 강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라야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 누굴 따라갈 거요? 영감 노인네 따라갈 거요? 아들, 며느리 따라갈 거요? 다 별것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선생님의 신세를 져야 됩니다. 신세는 지지만 갚을 도리가 없으니 몸뚱이를 들이 패더라도 고맙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도 하나님 앞에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갖은 고생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알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하나님 앞에 그랬으니, 여러분들도 선생님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가신 길을 기쁜 마음으로 상속해 주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기쁜 자리에서 상속해 주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남은 노정에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의 기준을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서 결정할 것이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 분야가 얼마만큼 큰 것인가를 알고, 있는 정성을 다 들여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정성은 내 것이요, 충성도 내 것이요, 효성도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래 봤어요? ‘내 것입니다, 내 것’ 그러한 배포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방을 책임졌다면 그 지방에서 효자의 할 일을 내가 한다는 배짱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못 하면 가정에 있어서라도 자기 가정을 대표로 하여 효성을 다하여 ‘이 가정은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그런 뭐가 있어야 해요.

금년에는 여러분들이 승리적 주관자의 권한을 어디에 세울 것이냐? 슬픈 자리, 고통의 자리, 죽음의 길을 넘어서, 최후에 하나님의 소망과 심정의 자리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참고 희생하면서 자진해서 가지 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머물러 있는 곳이 어떠한 방향인가 하는 것을 알고, 더 높은 승리적인 자리를 찾아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최후의 결판을 하는 자리까지 여러분이 따라가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