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2 to 14-67: 불쌍하셨던 예수님

불쌍하셨던 예수님
1964.05.03 (일), 한국 전본부교회

14-42
불쌍하셨던 예수님
마태복음 8:20―22, 12:46―50, 25:31―46

[기 도(Ⅰ)]

지극히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지극히 영광스러워야 할 우리의 아버지께서, 슬픈 이 땅을 대해 오시기에 마음과 심정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는지,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계시게 되었는지를 저희들은 감히 생각할 수 없나이다.

선의 자녀를 세워 놓으시고 선의 천국, 선의 이상세계를 마음속에 그리며 소망의 한 날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 ! 인간 조상 아담 해와를 통하여 소망의 한 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아담 해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셨사오며, 그 목적에 대한 책임을 느끼면 느낄수록 아담 해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셨사옵니까 ?

그러한 아버지의 보호와 아버지의 사랑의 품을 인간 조상이 배반하고 돌아섰던 한 많은 역사를 돌이켜 생각할 때, 저희들이 타락한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심히도 억울하고, 심히도 분하고, 심히도 원망스럽사옵니다.

저희의 마음과 몸은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물결에 밀려 여지없이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파괴를 당해야 할 자체들이 되었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숱한 역사노정을 두시고 하루같이 그러한 저희들을 염려하시기에 수많은 고통을 당해 나오셨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류의 역사적인 미래를 염려하시는 마음이 크셨기에 슬픈 마음을 지니시고 저희 부족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나오셨지만, 어느 한 날 어느누구에게 당신의 심정을 하소연하지 못한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사옵고, 어느 한 날 당신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자식을 갖지 못한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복귀노정을 거쳐오기를 6천년! 지금 이 끝날을 맞이하여 삼천리 반도 위에 삼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모으셨사오니, 이 인연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님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들은 말씀을 통하여 배웠사옵고 사실을 통하여 증거를 받았사오나, 그 말씀과 증거를 저희들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그 말씀과 증거가 아버지 앞에서 저희들을 심판하게 된다는 두려운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통일의 무리를 모아 놓으신 아버지, 이 민족 가운데에서 불쌍한 이들을 이끌어 나오시기까지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역사 도상에서 수고하신 아버지의 비참상은 말할 수 없는 것인 줄 아옵니다. 보잘것없는 연약한 무리들을 모으시어 한 날의 승리를 약속하시고, 고난의 길로 몰아 내시는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과 사정을 저희들이 꿈에서라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자리에서도 그것을 마음속 깊이 명심하게 하옵시고, 슬픈 자리에서도 슬픈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이들이 처량하고 비참한 자리에 떨어지더라도 십자가 노정을 넘으시는 아버지의 비참한 심정을 망각하는 아들 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2천년 전. 아버님께서 이 땅 위에 보내셨던 하늘의 황태자, 만민의 구세주, 메시아께서 슬픈 생활을 하다 가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도 아버지의 염려 속에서 태어났고, 자랄 때도 아버지의 염려 가운데서 자랐사옵니다. 또한 책임을 짊어진 공생애 노정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핍박의 도상에서 원수들과 대결하여 고난의 노정을 책임지고 간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된 모든 것은 저희의 선조들이 책임 못한 연고임을 알았사옵고, 끝날을 정하고 그날을 대비하시는 아버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았사옵고, 역사적인 모든 죄상을 탐지하여 알았사오니, 오늘날 이 땅 위에 실체를 세워 역사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전체적인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날의 탄식의 역사가 저희들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시대적인 사명을 알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세우신 저희들을 통해 주고 싶어하시는 아버님의 마음이 있고, 받기 위해 준비한 수많은 무리들이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은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된 수고를 통하여 저희들을 세우셨고, 그러한 수고로 말미암아 저희들이 세움받았을진대, 저희들도 그와 같은 수고의 노정을 통하여 진정한 눈물과 진정한 땀과 진정한 피로 역사를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있사오니, 이 엄숙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한 자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믿을 수 있고 아버지께서 불러서 의논할 수 있는 자체들이 되게 하옵소서. 맡겨진 사명과 책임을 완수하고 원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하늘의 역군들이 되게 하옵시고,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새달 들어 첫번째 맞이하는 주일이오니, 아버지시여, 이날을 중심삼고 이들 앞에 특별히 새로운 약속을 세우시어서 이들이 새로운 사명을 받아 새롭게 각오를 하는 동시에, 이들이 결의하는 모든 것이 민족의 곁의를 대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만민을 대신하여 아버님 앞에 결의하고 새롭게 맹세하는 이날,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주시하시는 이 자리가 되는 동시에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이 자리가 되고, 천천만 성도들이 해원성사를 요구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탕감해원의 조건이 우리 실체를 통하여 세워질 수 있는 거룩한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탄이 일절 틈타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각자의 몸과 마음을 악으로부터 격리시켜 아버지 제단 앞에 산제물로 바쳐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성호를 찬양하는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회들 위에 친히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나타날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사명을 그들의 내적인 심정을 통하여 인연 맺어 주셔서 아버지께서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은사권내로 옮겨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진체를 맡기오니 이 한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면서 주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4-42
기 도(Ⅱ)
각각 사정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가운데에서 생활하던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사오니, 아버지, 살펴 주시옵소서. 지금 저희들이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저희들의 몸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사옵니까?

아버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옵니다. 그러한 당신 앞에 부복한 저희들, 지극히 높으신 당신 앞에 지극히 낮고 천한 자체들임을 명시하여 놓고, 이것을 직고하여 부족한 것은 보충하고 옳지 못한 것은 제거시킬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하겠사오니, 아버지여 불꽃같은 눈으로 살펴 주시옵소서. 저희들 마음속 깊은 곳에 죄악의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고 죄악의 쇠사슬과 어둠의 권한이 남아서 이 몸을 주관하고 있거든, 아버지시여! 특별히 이 시간에 저희들의 마음을 분석하시고 하늘의 것과 사탄 것을 분별시키시어 사탄 것은 치고 하늘의 것만을 세워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과거의 자신을 세워 현실의 내 자체를 변명할 수 없는 저희들인 것을 깨달았사옵고, 현실의 내 자체를 세워 미래에 변명할 수 없는 저희들인 것을 깨달았사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오니,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청산받을 수 있는 오늘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는 과거에도 이러했고, 오늘도 이러한 모습이지만, 미래에는 절대로 이러한 내가 되지 않겠다고 당신 앞에 맹세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이 연약하고 힘이 부족하여 아버지 보시기에 합당한 내가 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거든, 아버지시여 힘과 능력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에 아버지의 힘을 주입시키시어서 스스로 양심적인 호소를 느껴 충동될 수 있게 하옵시고,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여 그 가운데 굴복할 수 있는 자신이 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날 여기에 나온 걸음이 헛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와 인연 맺기 위한 걸음들이었사오니 더더욱 깊은 인연을 맺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과거에 부족했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자신의 선한 부분을 아버지와 든든히 인연맺고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세파에 시달리더라도 아버지 앞에 내려진 닻줄로 자체를 매어 놓고, 언제나 아버지 앞에, 아버지의 뜻 앞에 오기 위한 간곡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항하여 그 밧줄을 당겨서 달음질치고 수고하여 하나의 목적점, 아버지 품에 안기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아들딸로 이 시간, 만들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약속을 하는 이날이 되게 하시옵소서. 새로운 세계를 고대하고 있사옵고, 아버지께서 새로운 무리들을 그들 앞에 보내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런 무리를 세우셔서 만민이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인 시대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민족이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이 시간이오니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 외로운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통일의 식구들을 친히 굽어 살피시옵소서. 어느 곳에 있든지 당신의 가호 밑에서 당신이 분부하신 명령과 사명을 책임지고 당신 앞에 충성과 효성을 다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옵고, 멀리 이국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찬양하는 숨은 아들딸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은 시간 위에도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14-46
말 씀
오늘 이 시간에는 ‘불쌍하셨던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14-47
예수님을 보내시기까지의 역사노정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이 땅 위에는 고통과 슬픔과 비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 당시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런 세상을 원치 않으셨고, 인간도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은 이러한 비참한 역사, 슬프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본래에 소망 하셨던 평화의 세계, 행복의 세계, 자유의 세계, 선의 세계를 되찾기 위한 목적을 세워 놓고 이 타락된 세상을 수습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것이 곧 복귀의 길이요, 구원섭리의 길인 것입니다.

구원을 하기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이 땅에 대한 모든 고통을 방관하는 무책임한 입장에서는 이 세상을 수습할 수 없는 연고로,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인간만의 고통으로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고통권내에 들어가 책임을 지고 대응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슬프고 비참한 역사적인 대응의 노정 위에 하나님께서 직접 참여하지 않고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기에 인류의 슬픈 역사에 동반하여 지금까지 싸워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땅을 구하는 데는 어떠한 기준에서 구할 것이냐? 전체적인 기준에서 온 세계를 한꺼번에 구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뜻 앞에 설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기 때문에, 터를 닦고 택한 사람을 세워서 하나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복귀의 순서를 거쳐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기준에서 섭리할 수 있는 환경과 시대적인 배경을 만들어 놓고, 전체적으로 구원함으로써 복귀완성의 소원과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요, 구원의 섭리입니다.

그러면 역사노정에 있어서 노아시대 혹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시대는 어떠한 시대였는가? 개인과 가정을 중심삼은 섭리시대였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가정의 섭리시대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과 인연맺은 전통과 심정적 기반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통과 가법을 세우신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민족적인 절개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것이 택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절개를 세우지도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은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시대적인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400년 애급고역 기간을 통한 이스라엘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약속했던 민족 복귀의 뜻을 성취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이루려한 뜻을 여호수아와 갈렙을 세워서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 당대에 민족적인 복귀의 완결을 지을 수 있는 민족이 되지 못하고, 환경을 갖추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은 다시 각 시대시대마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워서 민족을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사사시대를 거쳐서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 시대를 거친 다음 남북조 분립시대를 거치고 바빌론 포로 귀환 210년을 거쳐 메시아 강림 준비 기간까지 민족적인 복귀의 기준을 완결짓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예수를 보내기 전까지 역사와 더불어 수고해 나오신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14-48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한 유대 민족
이러한 민족적 기반 위에 주권 국가를 세워 놓고, 민족 정신과 내적 사상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유대교는 외적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되고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하여 민족적인 복귀의 기준을 완결지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올 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민족적인 복귀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터전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세계적인 복귀의 사명을 완결짓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유대교와 일치단결하여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복귀섭리와 구원섭리를 완결지을 수 있는 민족적인 터전을 결정지어서, 오시는 메시아 앞에 고스란히 바쳐 드렸다면, 그리하여 예수님이 민족 전체를 지배하고 주관하는 입장에 설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출발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때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아의 목적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과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소원이 일치되어 메시아와 연결되었다면, 역사적인 하나님의 소원이 성사되었을 것이요, 민족적인 소원이 성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새시대에 하나님이 축복한 제사장의 이념을 갖춘 선민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보낸 하나님의 소망을 알지 못하고, 메시아와 일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복귀의 터전이 이뤄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민족기준을 중심삼고 국가의 기반을 거친 후 오늘날 기독교를 통하여 전세계로 연결시켜 나왔습니다. 이것이 2천년 기독교 역사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해 나온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전체적인 기준을 세워 이 천지를 하나님이 이상하신 창조목적의 세계로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섭리입니다.

메시아는 이미 2천년 전에 왔다 갔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에는 그분으로서의 소망과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그분에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악의 세력으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천적인 사랑의 인연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그 민족 앞에 몰리고 쫓김받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으로 가게 되었던 예수님은 그의 소망을, 그의 사정을, 그의 심정을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도 상속하지 못했습니다. 땅 위에서 이루려던 소원이요, 땅 위에 세우려던 심정이었으나 그냥 그대로 십자가와 더불어 지고 갔다는 것을 전세계의 기독교 인들은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믿는 성도들은, 종말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은 2천년전 예수님 당시를 다시 한번 회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책임을 다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종교의 이념을 가지고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보낸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책임을 못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복귀, 즉 영적 구원만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민족적인 발판을 연결시켜서 세계형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 역사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2천년 전에 하나님이 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슬픈 자리에 세우고자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14-50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음 가운데에 몰아 넣으면서까지 새로운 한 날을 준비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적인, 민족적인, 국가적인 지도자로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세주를 보내기 위하여 긴 역사노정을 통하여 선지자를 보내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택해 놓은 이스라엘 민족, 야곱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을 수많은 환난노정을 거치면서도 보호해 나오셨고, 한 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을 끌고 몰면서 나오신 것이 예수님 때까지의 4천년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슬픈 자리에 세우기 위해 보내셨겠습니까?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으며 어떠한 생활을 했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목수의 가정에서 목수의 조수로 생활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아닙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날 분이 아니예요.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길래 오신 메시아를 그토록 천대해야 했느뇨? 그토록 몰라보고 박대해야만 했느뇨?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를 그토록 처량한 자리에서 맞이해야 했느뇨? 그렇게 하는 것이 4천년 동안 준비하며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그 나라의 왕궁에 모시고 제사장들과 교법사들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교직자들이 자기들 이상의 영광의 자리에서 왕으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자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이던 메시아가 머물러야 할 자리요. 그것이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에게 메시아 탄생을 예고하신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것은 다 인간들이 책임 못한 연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만민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는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영광의 자리에까지 터를 닦아 나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법사들을 다스리고 제사장들과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 나라의 군왕을 대신해서 만민에게 명령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낸 목적이요, 이 땅 위에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지고 온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최고의 권위 있는 사람들과 의논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세계적인 발판을 잡고 악한 세계를 무찌를 수 있는 심판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14-51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어떻게 살았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어떻게 살았느냐? 욕을 먹으며 쫓겨 다녔습니다. 이 마을에서 몰아내면 저 마을로 피하고 저 마을에서 몰아내면 이 마을로 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은 4천년 동안 준비한 터 위에 오셨던 메시아가 해야 할 생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그렇게 생활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런 자리로 보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메시아로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고 나와 가나안 7족을 전부다 쳐부숴야 할 사명적인 책임을 느끼던 모세의 심정보다도 더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세계의 사탄 국가들을 전부다 쳐서 하나님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원수를 갚고, 만민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온 예수님의 본래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생활무대가 어떠했습니까? 비참했습니다. 유대 민족의 어떤 대제사장이나 교직자, 혹은 그 시대의 어떠한 사람 입장만도 못했던 예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있을 곳이 없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 부모가 누구뇨? 내 형제와 내 누이가 누구뇨?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요 부모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뜻대로 하는 부모를 찾고 아버지 뜻대로 하는 형을 찾고 아버지 뜻대로 하는 동생을 찾기 위해 헤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이 있었느냐? 종족과 민족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있을 때 동생들로부터 반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는 또 마리아에게도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하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심상치 않은 말씀입니다.

요셉 가정에 태어난 예수는 그렇듯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예수가 태어날 때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천사를 보내 예수의 잉태를 예고해 주던 그때의 심정과는 판이하게 변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예수를 가만히 보니, 그는 어떠한 아이였느냐? 성신으로 잉태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긴 들었지만, 의붓아들이란 말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그렇게 변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느 때나 뜻을 위하는 충절의 마음을 갖고 예수의 30여 평생의 노정에서 예수를 모셔 주고 예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입장에 서야 했지만, 그는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구박했다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의 명절이 되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동생들에게는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주고 싶어했으나, 예수가 하나님이 택해 세운 아들이라하여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유난히 후하게 주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서글프고 분한 생애 노정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게 까뀌가 웬말이며, 톱이 웬말이며, 대패가 웬말입니까? 메시아가 목수의 조수라니요? 하나님과 더불어 만민의 운명을 책임지고 개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할 준비 기간에 목수 생활이 웬말입니까?

14-53
유대민족이 고난의 길을 걸은 이유
암흑 천지가 되어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신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 멋대로 틀어진 방향으로 나가니. 그들을 수습해야 할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달팠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내셨으니 예수님은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원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는데, 예수님이 설 발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을 대하기에 면목없어 하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일국의 사신으로서 나라의 특명을 받고 나간 사람이 해야 할 책임과 임무를 모두 실패하고 국왕 앞에 다시 돌아갈 면목이 있겠습니까? 일국의 사신도 그렇거든, 하물며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어떠했겠습니까?

4천년 동안이나 피땀 흘려 수고하고 천신만고하여 준비하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 예수님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생활은 비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밥을 굶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벌거벗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온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할 면목이 없으니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준비해 오신 피눈물 어린 역사적인 제단을 연결시켜 예수 앞에 상속해 주시고 예수가 그것을 수습하여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민족을 위주로 주권국가를 세워서 만왕의 왕의 권한을 갖고 만민을 통치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 위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주권자의 입장에 서 보지도 못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분한 입장에 있었고, 역적과 간신에게서 쫓긴 이상의 슬픔을 당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황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고 불쌍하게 될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4천년 동안 고대해 온 메시아를 배반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전부다 벌을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주권을 세우지 못하고 유랑하는 민족이 되었겠습니까? 어찌하여 6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죄값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랑하게 만들었으니 유랑하는 민족이 되어 보고, 예수님을 고아의 신세로 만들었으니 고아와 같은 생활을 해 보고, 예수님을 쫓기고 몰리는 신세로 만들었으니 쫓기고 몰려 보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몰림받고 쫓김받아 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택한 중심 국가가 책임을 못한 것은 한 국가에 국한된 평면권내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적인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평면적이고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를 대표한 메시아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이 하나님의 한이 되었으니, 그 한이 이 땅에서 모두 탕감되고 이 땅에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가 건국되고 회복될 수 있는 때가 뜻으로 보면 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가장이 되어 보지 못했지만, 천지가 생겨난 이후 이 땅에 왔던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가장의 인격을 갖추고 오셨던 분이요, 족장의 책임은 못해 보았지만 이 땅의 어느 족장보다도 훌륭한 책임자로 오신 분이요, 군왕이나 제왕의 자리에 앉아 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군왕이나 제왕보다 크나큰 책임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책임을 이땅에서 완수하여 이 천지를 소원하던 나라, 하나님의 창조 당시에 세우려 하신 나라, 사랑의 나라, 희망의 나라, 자유와 해방의 나라를 이루어야했습니다. 그런 나라를 세계적으로 한꺼번에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을 죽여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믿게 하여 세상을 수습한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비록 30여 년의 생애 노정을 걸어갔지만, 하나님이 4천년 역사노정에서 느끼신 슬픈 심정을 체휼했고, 이 땅에서의 패배의 쓴잔을 다 마셔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내가 헐벗고 굶주렸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모함하고 배반하였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자신보다도 자기가 그렇게 해서 죽어 가면 후대의 신약 신자들 앞에 엄청난 고난의 길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더 슬퍼하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3차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여 주옵소서 (마 26 :39)”라고.

주님이 가신 길은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이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아버지가 가는 길을 그 아들딸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니 그 자식들도 그 나라까지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까지 순종하면서 가다가 도중에 쓰러지면서도 죽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계사적인 최후의 전장을 향하여 한 분 메시아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우신 하나님의 소원은 곧 선한 이스라엘의 건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1이스라엘이 멸망했지만 제2이스라엘로 기독교를 세워서 전세계 이스라엘 국가형을 형성하셨는데,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여기에서 유대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14-55
예수님의 소원과 통일교회가 출현한 이유
2천년 전 유대 땅에 오셨던 주님, 민족적인 메시아를 맞이하여 국가적인 주권을 세워서 세계적인 출발을 하려 했던 역사는 중단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하늘적인 기준에서 외형적으로라도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서 그것을 제 2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민주진영과 제2유대교로서의 기독교에게 상속시켜 가지고 일으켜 나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기독교는 통일되어야 합니다. 통일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려 한 책임,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야 할 책임을 기독교가 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명과 책임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당대에 세계적인 복귀를 완성시켜서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을 품고 돌아가셨으니 다시 제2이스라엘을 세워서 민족적인 기반을 연결시켜야 될 세계적인 무대에서 만나야 합니다. 또 세계적으로 제2유대교를 세워서 민족적인 출발 지점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와 민주주의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예수님 당대에 했어야 하는데 못했습니다. 그러한 책임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못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에서는 ‘내가 그런 나라에서 같이 살고 싶고 그 나라에서 거느리고 싶은 참다운 효자는 어디 갔느뇨? 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소망이 완성되는 날, 예수님을 중심삼고 온 천지를 거느리고 하나님 앞에 그 영광을 돌려 드릴 참다운 자녀를 고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온 예수님이었지만 한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말도 한번 못해 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라 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원수이고 내가 사는 나라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내 자체에서는 이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원수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이 세계가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 고아와 같은 신세로 이 땅에 와 가지고 언제 자신의 소원을 말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성경에 있어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 :49)”라고 했습니다. 불을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이 안 붙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마음의 답답함이 오죽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중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하시던 예수님의 그 서글펐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분한 마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판국은 그때에 비틀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30여 평생 동안 고이고이 지녔던 마음, 그 내적인 소신을 예수님은 전혀 피력하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철석같은 결의는 갖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멍텅구리 같은 제자들이 무슨 사도라고요? 불리하면 내빼는 녀석들이 사도라고요?

그들은 한 나라만을 대표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앞에 불림 받았던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만을 대표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세계를 대표하고 만민을 대표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명으로 만민을 대표해 나타난 특전대였습니다. 그런데 칼이 무서워 도망을 가요? 목이 달아날까봐 도망을 가요? 그런데도 사도라고요?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다시 찾아가서 수습했기 때문에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일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이 다 죽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철석같이 맹세한 자들이 뒷걸음을 쳐 도망을 갔어요. 그런 처참한 자리에서 죽어 간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그들을 찾아갈 때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이구, 내가 부활해서 왔다’ 하며 기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14-57
말 못할 예수님의 사정
낙원은 누가 먼저 들어갔어요? 강도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당하신 억울함을 알아야 합니다. 억울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리 억울하고 분했으며, 땅 위에서 자기의 소원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하지 못했으니 억울하고 분했던 것입니다. 매를 맞고도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하여 사탄세계로부터 몰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고?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눈물 흘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충신답게 하나님의 효자답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매를 맞고 쫓기더라도 원통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늠름하게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책임을 못하고 간 예수님의 사정, 이 땅 위에 책임과 소원을 품고 와서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간 예수님의 사정, 당대에 세계의 만민을 구원해서 복귀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4천년 역사와 함께 죽어 가야 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눈물을 흘려도 천주사적인 입장에서 흘렸고, 천주사적인 비참한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도 절망하지 않고 늠름하게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땅의 역사적인 모든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을 저주하면 인류구원섭리는 다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의 원수를 갚아 주시옵소서!´ 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전부 다 지옥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을 유린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유린했으니 심판하려면 모두 다 쓸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4천년 동안이나 수고하여 세우신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대하고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하기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듯, 망하면 수습하여 다시 세우고 몇천만 번 수고하여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소망을 가지시고 이스라엘 땅에 보내셨고 나는 30여 년 동안 이들을 위해 살았고 이들을 위해 싸웠다. 이들을 위해 싸운 목적은 이들을 구하려는 것이었지 벌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여기서 이들을 저주하면 이들은 물론 이들의 후손들까지도 전부 다 지옥에 가게 될 것이고, 또한 지금까지 세워 나온 복귀역사가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차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피맺힌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오늘날 예수 믿고 천당 가서 신부 되겠다는 사람들이 아는가? 신부? 말이야 좋지요. 그 명사야 물론 좋지요.

그러나 그 명사를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공의 노정과 고난과 슬픔과 비참의 과정은 어떻게 합니까?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빚진 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4-59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할 우리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없었고 땅을 바라볼 때는 배반의 아우성 때문에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그들을 붙들고 가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나를 죽이는 한이 있을지라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애원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죄과의 사죄를 호소한 것이요, 자신에게 한을 맺히게 한 원수들을 용서한 것이요, 미래의 후손들이 맞이할 탄식권을 놓고 해방시키기 위해 갈구한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책임지고 꿋꿋이 넘어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승리권을 세울 수 있었고, 시대적인 주도권을 세울 수 있었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전개 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따라오면 부활할 수 있다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반한 자를 용서했다는 조건이라도 세워서 세계적인 결판을 지은 기준에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사탄의 공인을 받은 터 위에서 사도들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의 주권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처량한 사나이입니까 ! 여러분, 역사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권한을 갖춘 예수님을 마주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당시의 예수님을 볼 면목이 있겠어요? 구약 성서를 믿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쫓겨다니고 유대교인들에게 쫓겨다니고 몰림 받는 몰림뱅이, 바알세불이 들어간 미치광이 라고 놀림받던 예수를 믿을 수 있겠어요?

더벅머리 총각이 과부를 데리고 다니니 별의별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뭐 향유를 발에 부어서 머리칼로 씻어주고…. 여러분, 이런 예수 믿겠느냐 말이에요? 세계적인 무슨 신학박사들, ‘아, 나는 주님의 일등 신부다’ 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런 예수를 믿겠어요? 아마도 돌을 던지는 선봉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예수님이 훌륭하다고 인정받게 되고, 또 예수님의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 믿지요.

고아와 같은 예수님, 방랑자 예수님,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던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처량하고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한발 한발 떼어 놓던 예수님, 억울하고 분한 예수님, 남모르는 분함을 품고 속죄의 제물로 가셨던 예수님, ‘내 피가 죽지 않는 한 내 기도가 죽지 않을 것이요, 내 기도가 죽지 않는 한 내 소원이 죽지 않을 것이요, 내 소원이 죽지 않는 한 내 사정이 죽지 않을 것이요, 내 사정이 죽지 않는 한 내 심정이 죽지 않을 것이요, 내 심정이 죽지 않는 한 다시 찾아올 날이 있으리라’ 다짐하면서 재림을 약속하고 가셨던 예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예수님께 물어 보세요. 예수님은 살아생전 먹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야 뭐 하나님이 다 주셨겠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소변도 안 보고 뒤도 안보는 줄 알고 있습니다. 물도 안 마시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겠습니까. ‘오 ! 능치 못함이 없는 예수님’ 하지만 그렇습니까?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권세를 굴복시키는 데 있어서 전능하신 예수님이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능력 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14-60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이유
예수님은 준비 기간에 무슨 기도를 하였느냐? 30여 평생 동안 무슨 기도를 하였느냐?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살더라도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왕궁에서 사는 깃보다도 더 좋습니다. 내가 이렇게 까뀌질하고 대패질하고 사는 것이 왕궁에서 호강하면서 사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낙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고 하나님을 위로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아들 앞에 부모가 자기의 위업 등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었는 데 그것을 상속받은 아들이 자기는 하나도 갖지 않고 자기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부모가 그것을 보고 상속해 준 자식을 불러다가 ‘이 자식아 내가 너에게 다 주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비참하게 살고 형제들에게 전부 나누어주었느냐?’ 하며 벌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것은 당신의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고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당신의 심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노래하며 살아야 할 환경에서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 살더라도 선한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그 반대적인 가치로 하늘 앞에 거두어 지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낮은 자리에 들어갈수록 그 가치는 커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입장에서 못 먹고 비참하게 살았던 것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만민이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여 년의 생애 동안 그런 조건을 세워 나오면서도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하던 예수님! 한 때를 바라보고, 말할 수 없이 혼란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로마의 압제하에서 성전을 유린할 대로 유린하는 세력 앞에 안 나설래야 안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30년 동안 메시아로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민이여, 나를 따라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길을 출발할 당시에는 죽더라도 싸워야 되겠다고 몇백 번이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니 그들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며 하류층의 사람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어부와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그 시대의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꼴이었으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원통했습니다 또 답답하고 불쌍한 그들을 모아 놓고 세계를 수습하고 책임지라는 명령을 하고 분부를 해야했던 예수님의 가슴이 얼마나 탔겠으며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렇게 왔다 간 예수는 지금까지 이 땅을 위해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한다고 했는데, 편안하면 기도할까요? 만사가 형통한데 기도할까요? 예수님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4-62
예수님은 왜 재림해야 하나
하나님의 복귀역사의 목적은 전세계를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영육 안팎으로 완전복귀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그것을 완결 짓는 것이 예수가 왔던 바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복을 달라고요? 가진 복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세계 앞에 복을 줄 수 없어요. 예수님이 기도를 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복을 준다면 모를까? 예수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기에 동참시켜서 성과를 거두게 되면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축복의 기반은 닦아 나올 수 있지만, 그 민족이 축복받는 민족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축복받은 사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잘난 사도요, 수제자요, 세 제자라 해도 그들은 신부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는 종입니다. 신부의 자리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귀의 한을 남기고 간 연고로 예수님은 하늘 앞에, 이스라엘 앞에 역사적으로 책임 못한 모든 것을 다시 수습해 나오면서 한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한 가정이 고통을 받으면 대신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대신 탕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불쌍하신 분입니다. 역사이래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천만 가지 고통과 비통한 사연을 예수님과 인연맺어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성도들은 고통을 받게 될 때에 반드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조건을 세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시체를 수습하여 실패하기 전의 입장에서 세계적인 이스라엘을 복귀하기 위해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부 깨져 버렸기 때문에, 영육이 아닌, 영적으로만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을 수습하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수습해야 했던 것입니다.

4천년 준비하여 메시아를 맞았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영육 아울러 메시아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죄악에서 해방을 받아 지상에서 죄 없는 아들딸들을 번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적으로만 이루어 놓았으니 오늘날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종교생활이 무엇입니까? 육신을 치는 생활입니다. 먹고 싶은것 먹지 않고 금식하고 몸을 치는 것입니다. 몸을 사탄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이 모든 것은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날은 잔칫날인데 잔칫날엔 그냥 먹고 노는 것입니다. 슬프게 살기 위해서 신랑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랑을 죽였으니 슬프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사명으로 보아 불쌍하신 분이고, 시대적인 한을 품고 갔으니 불쌍하신 분입니다. 그는 또 역사적인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갔으니 불쌍하신 분입니다. 아직까지도 그는 한스러운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영육 아울러 주님을 상봉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이 아직까지 지상에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은 평면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져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시대적인 환경은 종교의 자유를 주고 또 국가적으로 국교화를 실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낙원세계와 맞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외적 기준이 영적인 기반에 화할 수 있는 세계적인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기준에 화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이스라엘권을 다시 세우고 세계적인 유대 교회를 세워, 오실 주님이 만민을 상봉할 수 있는 환경적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의 주권국가를 중심 삼고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영육 아울러 통치의 기반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의 날입니다.

14-64
예수님을 해방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책임과 사명을 하여야 할 예수님, 왔다 간 이후 지금까지 2천년사를 짊어지고 속죄의 사명을 하고 있는 예수님은 불쌍한 분입니다. 언제 한번 하나님과 같이 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산다고 나와 있어요? 기도하고 있다고 했지요. 언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여! 이제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옵고, 만국이 있사옵고, 만민이 있사옵고, 천하가 있사옵고, 이는 본래의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은 선의 세계와 같사오니, 아담 해와의 승리의 기반 위에서 받아야 했던 영광을 나로 말미암아 받으시옵소서’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다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는 데는 어떻게 오느냐? 구름 타고 와요? 구름을 타고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믿어야 할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예수는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보내기 위해 수고하신 하나님이 목적의 한 날을 맞지 못하고 슬픔의 한 날을 맞이했으니 불쌍하시구나! 이스라엘이 불쌍한 민족이 되었구나! 제1이스라엘이 망하여 하나님의 축복권내로 다시 부활해야 하니 불쌍하구나! 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사를 바라보시며 우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 번 기도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 가면 이스라엘 후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육 아울러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예수님이 원한을 품고 가니 후손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후손들의 원한을 지상에서 탕감복귀시켜야 할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 위의 골고다 산정에 하나님의 한이 맺혀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이 맺혀 있고 그 후손과 인류의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리적인 골고다의 길이 기독교에 남아진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가 개인적인 골고다, 가정적인 골고다, 종족적인 골고다의 길을 거쳐서 이제 세계적인 골고다의 산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예수는 역사적인 슬픔을 품은 예수요, 시대적인 슬픔을 품은 예수요, 미래적인 슬픔을 품은 예수였습니다. 억울한 심정을 품고 간 예수였습니다.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를 때려부수고 원수들을 심판하고 총진격해야 할 예수가 억울한 심정을 품고 죽어 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지 않고 살아서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여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몰리던 골고다를 넘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을 감당치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굶고 통곡하는 자리에 있는데 신부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신랑이 하늘 앞에 무릎을 꿇고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데 신부가 편안히 먹고 잘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어느 한 날 편안한 날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민족적인 기준에서 한이 맺혔기 때문에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갈 때까지 기독교 역사는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2이스라엘이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세계적인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출발할 때 3대 시험을 받아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3대 시험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워 놓고 나가야 됩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렇듯 불쌍하셨던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슬퍼하신 것보다도 더 슬퍼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실 때는 4천년 역사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지만 예수가 왔다 간 이후 하나님에게는 4천년의 한에다가 예수가 죽은 이후 2천년의 한까지 플러스(+)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슬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는 맨 처음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영계에 있는 천사들과 영계에 있는 조상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해방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편안한 자리에 계신 줄 알아요?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운세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면서 ‘오 주님, 나 천국 보내 주소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쌍하셨던 예수님을 해방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역사로부터 ‘불쌍하구나’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역사의 선조들로부터 ‘너 하나만은 우리의 후손으로서 당당하구나. 전체 역사를 네가 일으켰구나,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거기에 더하여 ‘시대적인 사명과 민족적인 사명을 책임지고 아들의 사명과 부모의 사명, 효자와 충신의 사명을 다했구나’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4-66
진짜 양자와 가짜 양자
오늘날 기성교회 목사들 ‘아,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다’라고들 하는데 종이 천국 가겠어요? 종의 몸으로 천국 갈 수 있겠어요? 못 갑니다. 종의 몸으로는 못 가요. 천국은 아들딸들이 가는 곳입니다.

충신의 칭호를 받은 후에는 양자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직계 아들이 되기를 그리워하며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면 상속받는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혈통이 다른 자식이 직계 아들의 자리에 들어가 상속을 받게될 때 욕심을 품고 ‘오 저 재산을 내가 상속받겠다’ 한다면 그는 양자가 아닙니다. 가짜 양자입니다. 진짜 양자는 ‘아버지의 혈통적인 아들이 이런 아들이 아닙니까?´하며 ‘아버지께서 괴로워할 때 그 이상 괴로워하고 아버지께서 슬퍼할 때 그 이상 슬퍼할 수 있는 아들을 가져야 할 당신이 그런 아들을 갖지 못하였으니, 내가 그 아들의 대신자가 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적으로 갖추어야 할 양자의 명분을 완전히 갖춘 다음 상속을 받아야 아들을 대신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자가 되려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하고 땅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충성하는 충신으로 살다 갔으니, 예수님을 보호하여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 아들의 본분이므로 ‘나도 아버지를 따라가야만 된다’ 하는 마음을 상실하지 않고 충신의 길을 가야만 진짜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적의 심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알고 있는 양자관은 그렇습니다. 직계 아들의 대신자로서 몸부림쳐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아야 양자의 명분을 앞세우고 상속권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종의 자리에 있습니까? 종의 자리에 있거든 그 믿음이 아브라함 이상 되어야 합니다.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 위해 야곱이 하란에 가서 21년 동안 고생한 이상의 고생을 해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 궁중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복귀노정 40년 해서 120년 동안 고생한 이상의 고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 아벨과 같이 형제가 되어서 아버지 앞에서 서로가 ‘형님을 인정해 주세요’ ‘동생을 인정해 주세요’ 하여 아버지가 ‘오냐’ ‘오냐’ 할 수 있는 땅에서 그런 인연을 맺어야만 양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자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인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 신자들이 양자 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내적인 한과 외적인 한과 가정적인 한을 알아 가지고 한 개인을 볼 때에도 세계사적 개인으로 보고, 가정을 볼 때에도 세계사적인 가정으로 보고, 종족도 세계사적인 종족으로, 민족도 세계사적인 민족으로, 국가도 세계사적 국가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종교적 이념을 세워서 소망적인 국가, 소망적인 세계를 세우려 하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나를 위주로 해서 ‘나만 잘살자’ 하면 안 됩니다.

14-67
신부로서의 자격
그러면 참제자형으로서 길러 온 신부는 어디에 있느냐? 오늘날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오, 신랑되신 예수님을 내가 40년 동안이나 믿고 기도하였는데…’ 하며 자신들이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신부가 되는 특정 기준은 무엇이냐? 첫째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한을 품고 몸부림쳐 개인적인 승리의 증명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가정적인 한을 품고 세계사적인 시련노정에서 승리한 가정으로 등장하여야 하며, 종족적, 민족적인 기준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 세계, 하늘땅, 사탄까지도 ‘옳소이다. 그는 천지의 역사상에 처음으로 승리한 아들입니다. 혹은 딸입니다’ 하며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이 알고 있는 신부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며느리가 되겠다고요? 하나님의 사위가 되겠다고요? 황태자의 신부가 되겠다고요? 세상에서는 대통령의 아들딸만 되어도 으시댑니다. 돈 몇 푼에 사람이 팔려다니는 세상입니다. 몇 백원만 주어도 사탄의 심부름을 하는 세상입니다. 얼마나 더럽습니까? 돈을 몇 백만원, 몇 천만뭔, 몇 억원만 가지고 다니면 ‘아이구 좋다. 아이구 좋다’ 하며 따라다니는 판국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개인을 수습하여 만민을 호령할 수 있고, 가정을 수습하여 수많은 가정을 호령할 수 있고, 흩어진 종족을 수습하여 수많은 종족을 호령할 수 있고, 수많은 국가와 세계 인류를 호령할 수 있는 승리적인 권한을 갖고 하나님 앞에 공인받고 사탄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인 모든 인연을 거치는 자리에서 하나님 입회하에 사탄으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처해 있으되, 하나님께서 섭리해 오신 6천년의 눈물의 역사를 청산하고 그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이요, 6천년 역사의 십자가의 기대를 연결시켜 밟아 나오려는 사람이요, 6천년간 인류를 농락한 사탄을 대하여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만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인 것입니다. (정전으로 이 이후는 녹음이 안 되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