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2 to 14-235: 십자가 상에 있는 예수의 고난

십자가 상에 있는 예수의 고난
1964.12.27 (일), 한국 전본부교회

14-212
십자가상에 있는 예수의 고난
[기 도]

아버지의 소원이 기필코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이며, 선한 선조들의 소원도 기필코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소원과 저희의 소원이 한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어느 한 때 이 천지간에 나타날 것을 아옵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러한 은사를 고대하면서 죽음의 길, 눈물의 길, 피의 길을 개의치 않고 간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가야 할 곳은 저희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곳이 아니요, 저희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곳이 아니요, 현실의 이 사회가 즐거워하고 영광스러울 수 있는 그런 자리도 아니요, 수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번성과 영광을 바라는 그런 자리도 아니옵니다. 아무리 험하고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외롭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죽음의 길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곳, 우리 선조들이 선의 뜻을 위하여 죽어 가면서 소원하던 그곳을 향하여 가고자 하옵니다. 그곳을 가는 것이 개인의 소원이요, 가정의 소원이요, 이 민족과 이 세계의 소원이며, 그곳이 앞으로 전인류의 목적지인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선조들의 전체 유업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승리의 한 날이 천지간에 나타나기를 저희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이와 더불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하고 저희의 해원을 성사할 수 있으며, 저희 스스로 승리의 영광을 갖추어 만세에 자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를 저희가 바라고 있음을 당신께서도 아실 줄 믿사옵니다.

그러한 자녀를 찾으시옵고, 고대하시는 영광을 그 자리를 통하여 받으실 수 있는 그 한날이 이 땅 위에 어서 속히 와야 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지께서도 인간을 대하여, 그날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피의 제단을 연결시키며 오늘날까지 섭리해 오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중심의 터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를 인류는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역사적인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이 나라 이 민족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남이 모르는 가운데, 품은 뜻을 세우시기 위한 아버지의 수고를 염려하면서 그 길을 찾아 나가야 하고, 아버지께서 몰림받고 쫓김받고 투쟁하고 피 흘리고 눈물 흘리는 자리를 통하여 인연을 맺는다는 이 한 사실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억울한 것인가를 저희들이 다시 한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인간은 자기만의 행복을 찾고 있사옵고, 수많은 나라들도 자기 나라의 국익만을 바라고 있사오매, 그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도리어 아버지께 슬픔과 원한을 더하는 것이며, 심정을 유린하는 것들이옵니다. 알지 못하는 이 모든 국가와 민족들을 긍휼히 보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이 분부하시는 말씀과 더불어, 당신이 찾고 있는 자녀와 더불어 당신이 나누고 싶어하시는 심정과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승리를 찬양할지어다. 만세의 영광을 노래할지어다. ‘하늘이여, 땅이여, 이 뜻을 받들어 영광을 돌릴지어다’ 할 수 있는 기쁨의 한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도 그날을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사오니 아버지, 염려마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이 알지 못하는 길을 저희들은 가고 있사옵니다. 이 길은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박차고 따라 나선 저희들이옵니다.

지난날을 회고해 보게 볼 때, 많은 고난의 길도 있었사옵고 눈물의 길도 있었사옵니다. 그 험한 돌짝밭길, 가시밭길을 저희들이 헤맨 사실을 아버지께서는 아시옵니다. 그 모두가 아버지를 위함이요, 아버지의 영광의 한 날을 찾기 위함이요, 아버지와 더불어 증거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영광의 기준을 지상에 세우기 위함이었음을 아버지께서는 아시고 계시옵니다.

아버지를 찾아 이 길을 따라 나온 사람들이 아버지의 영광과 더불어 아버지 앞에 찬양을 드리는 무리가 되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는 그러지 못하고 갔사옵니다. 여기 이 사람들도 지치고 있사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이 한 곳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새로이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참된 모습을 찾고 계시옵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붙들고 다시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슬픈 마음을 품고 저희들을 대하여 나오신 아버지, 저희를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1964년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날은 아버지를 모시고 찬양할 수 있는 이해의 마지막 날이온데 무엇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무엇으로 아버지를 찬양하오리까! 아버지 앞에 부끄럼 없이 보여 드릴 아무것도 없사옵고, 당신을 위로해 드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남루한 형상, 굶주린 몰골, 떨고 있는 모습, 아버지 앞에 보이기에 부끄러운 이 모습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적인 슬픔과 역사적인 한이 이 민족과 저희에게 잠겨 있음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이러한 역사적 분함을 풀어야 할 당신의 소원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이것을 아는 저희가 아니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현실을 넘어선 크고 높은 가치의 존재가 되어야 할 저희들이오나, 그리되지 못했을지라도 불을 지를 수 있는 하나의 성냥개비와 같고, 마른 나무와 같은 모습들이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불을 지르기에 합당한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진정으로 바라옵고 원하오니, 이날 이 시간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민족의 한을 기억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의 처참상을 당신이 책임져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과 더불어 당신이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 민족에게서 빼앗아가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이 민족의 눈물과 이 민족의 고충이, 남아진 복귀의 한이 해원되는 조건이 되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금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지으며, 이 민족의 새역사를 위해 그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는 자가 없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일을 맡고 있는 통일의 역군들을 불러 모았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를 수습하시옵소서. 비록 믿음직한 모습은 갖추지 못하였사오나,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새 시대의 음성을 듣고 진지하고도 떨리는 마음,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또다시 원치 않는 한의 터전을 남길까봐 염려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버지 ! 1965년을 맞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당신이 인간을 인도해 나오시는 길에는 우여곡절이 많으셨고, 당신이 가시는 노정에 슬픈 일이 많으셨으니, 당신을 따라가는 자녀들이 어찌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겠습니까? 아버지 앞에 역사적인 선조의 죄를 저희들이 짊어지고 탄식한 사연이 있었사오나, 이제는 승리의 때인 것을 저희들이 명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 때에 맡겨진 바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훗날 눈물짓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맡겨 준 바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고 이를 완수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둔탁한 마음을 일깨워 주시옵고, 저희의 병든 심령을 치료해 주시옵고, 쓰러졌던 저희의 몸을 일으키시어 아버지의 분부하시는 말씀을 받아 감당하기에 합당할 수 있는 각오와 신념과 맹세의 마음을 갖도록 다시 한번 북돋우어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이 기억될 수 있는 한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즐거이 찾아왔사오니 그 마음에 흡족하게 하시고 스스로 힘찬 결의를 하고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마음과 몸이 하늘 앞에 필요하다는 자신을 발견하여, 당신 앞에 책임을 다하고 당신의 심정을 체휼하기에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찾아오신 당신 앞에 저희의 전부를 맡기옵고, 내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내 아버지의 사랑을 지니겠다고, 내 아버지의 사정과 이념을 깊이깊이 지니고, 아버지의 가슴 깊은 곳에 거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당신의 명령 앞에 다시 한번 다짐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남은 이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로운 날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기에 부족함이 없고, 아버지가 맡겨주신 사명에 대하여 순응할 수 있고, 제사장의 책임을 감당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이 시간 전체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날도 해외에 널려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눈물지으며, 당신의 사랑만을 고대하는 그 마음을 아시오니,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사정과 형편이 여의치 않은 환경에서 기쁨을 고대하는 마음,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는 그들 앞에 안위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행복을 약속할 수 있는 새로운 아버지의 은사를 다시 한번 이날 이 시간에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또 남한 각지에 널리어서 외로운 길을 가며 외로운 곳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사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추운 자리에서 떨고 있거든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고, 저를 대해 분부하셨듯이 그들에게도 분부하여 주시옵고,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복귀의 노정에서 민족적인 사명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여기에 믿음이 적은 자녀들이 있사옵니까? 그 마음과 몸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그 몸을 자기 몸이 아닌 몸으로서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생각과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고스란히 바쳐서 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아버지 섭리하시는 대로, 아버지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몸과 마음이 이 시간 온전히 아버지 앞에 사로잡힌 바 되어 아버지의 약속을 고이 받을 수 있는 자녀들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최후의 한 날을 두고 소망하시는 그 뜻과 이념이 저희들로 말미암아 결판지어져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사오니, 그 앞에 자신을 갖고 담대하게 행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선의 길을 찾아 죽음의 길이나 고통의 길을 개의치 않고 스스로를 제물삼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에게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약속한 한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에게도 그 약속의 날을 놓치지 않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남은 전체를 당신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기쁘신 뜻, 바라시는 소원을 저희들과 더불어 길이길이 같이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4-217
말 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왔을 때, 그의 형제들이 예수를 대하여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요 7:3-4)”라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 가정 전체가 예수를 믿지 않고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4-217
슬픔과 고통과 한을 남겼던 예수의 생애
하나님의 뜻과 민족의 운명을 해결하기 위한 엄청난 뜻을 실현해야 하는 예수에게 있어서 제 1의 발판이 되어야 할 것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 깨져 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할 수 없이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이 의심되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명절이 되어 먹을 것이 있으면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끼리 숨겨 놓고 예수를 따돌리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몰리던 예수는 그런 것보다도 명절을 맞이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고 부모의 손을 잡고 그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것이 말할 수 없이 그리웠다는 거예요.

크나큰 사명과 크나큰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요셉 가정을 하나의 터전으로 삼아 이 터전 위에 하나님이 소원하는 가정을 세우고, 예수의 친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례 요한을 포섭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 떠나가고 부모가 떠나가고 형제가 떠나가고 친척이 떠나가니, 예수는 갈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2차적인 노정이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노정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가정을 잃어버리고 공생애 노정을 출발할 때 그는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가정에 대해 크나큰 천륜의 뜻을 두고 바랐는 데도 불구하고 그 가정을 버리고 나서야 했던 외로운 그 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에는 오직 승리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이 오면 알리라’ 하며 참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외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비장한 결의가 있었던 반면 그 마음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슬픈 마음을 품고 나선 예수를 향하여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그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일파는 모심의 도리와 충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예수와 분립된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 외적인 가정, 즉 가인적인 가정의 입장에 있던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예수님 앞에 그마저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품은 뜻을 알지 못하고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툴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분한 사실이었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례 요한으로부터 증거는 받았으되 그 앞에 마음을 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중심삼고 외적 울타리를 만들어 가지고 전체를 수습하시려 했던 소망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예수는 유대교를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유대교를 찾아간 것은 세례 요한의 실수까지도 수습하기 위해서 였는데, 그 유대교도 역시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자기를 배척하는 유대교를 뒤에 두고 교단이 반대하던 민족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 나라가 하나의 독립국,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어 있었더라면 군왕이나 그 나라의 주권자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 나라는 주권을 상실하고 로마의 속국이 되어있었고, 그렇다고 로마를 대적하여 나설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해 있던 예수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33년 생애 노정에서 슬픔과 고통과 한을 남겼지, 소망과 행복과 뜻을 남기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예수는 민족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고, 교단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 세례 요한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고, 그의 가정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는 할 수 없이 이 고을에서 반대하면 저 고을로, 이 거리에서 반대하면 저 거리로, 유대인이 반대하면 이방민족에게로, 이 가정이 반대하면 저 가정으로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갈래야 갈 곳이 없고 올래야 올 곳도 없는 예수였지만,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내적으로 고뇌해야 했던 사실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14-219
가족과 세례 요한과 유대교단으로부터 몰림받은 예수
그러면 이렇게 가정에서 몰리고 친족에게서 몰리고 교단에서 몰리고 민족 앞에서 몰린 예수는 어디로 가야 했던 것이냐? 할 수 없이 맨 비참한 자리를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있어서 뭇 사람이 환영하고 뭇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자리에 선 사람들은 단념하고, 할 수 없이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어찌하여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되었던가? 예수는 이 땅에 와서 누구보다도 고귀한 자리에 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하고, 그 시대의 제사장 교법사들을 전부 그의 휘하에 두고 유대 나라를 재창건해야 할 사명을 가진 주님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민족적인 기대는 뒤로 하고 비참한 무리들을 찾아가게 되었던가? 이러한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할 수 없이 원통해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가슴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 미천한 자리를 찾아가던 예수는 최고의 자리에서 민족을 수습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수습하여 만방에 널려 있는 나라들을 장중에 휘어 잡고 악을 심판하여 원수의 국가를 전부 항복시킨 후 아버지 앞에 영광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통일의 한 날, 승리의 한 날을 그 마음에 얼마나 고대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크나큰 소망과 크나큰 책임, 크나큰 사명이 그 가정으로부터, 세례 요한 일파로부터, 유대교로부터, 그 시대의 지도자로부터 배척을 받아 여지없이 일그러진 그러한 환경에서 이것을 다시 수습 해야 하는 내적 고충은 순탄한 길을 가는 사람의 몇 백배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충을 품고 가야 했던 애절하고도 불쌍한 예수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찌하여 예수가 감람산 기슭에서 그토록 애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야 했으며, 어찌하여 이거리 저거리로 몰려다녀야 했는가? 그가 가는 곳곳마다 어찌하여 배반자의 무리를 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이것이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요, 인간적인 사정으로 보게 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하늘편에서 볼 때는 분하고 원통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은 유대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며, 세례 요한의 책임이 얼마나 크며, 요셉의 가정과 마리아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어디로 갈래야 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등 무식한 어부와 세리를 찾아가던 그 발걸음마저 민족이 곳곳에서 막고 있으니 갈곳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뚫고 갈래야 갈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리고 이방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복귀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4천년 동안 수고한 터전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적인 모든 것을 판결지어 가지고 내적으로라도 이끌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은 잘못했지만 책임진 분야에서 그들을 어떤 조건이라도 세워서 하나님 앞에 내적으로라도 상속받아 가지고 가면 모르되, 그 상속을 받기 전에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예수였음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는 세계를 갖기 위해 오신 분이요, 하늘땅을 품기 위해 오신 분이요, 만민을 통치하기 위한 주권자로 오신 분이요, 만세의 영광이 그로 말미암아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그런 중심적인 존재로 오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전부다 이땅에 주기 위하여 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함으로 줄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포옹해 주어야만 했던 예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소망, 천주사적인 소망을 품고 환경을 개척해 나간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저주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예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책임을 짊어진 예수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저주해 버리면 4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수고가 여지없이 깨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분하고 원통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수고가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른손에 쥐려 했던 것을 쥐지 못하면 왼손으로라도 쥐고 나아가 격돌해서 하나님이 남기신 뜻과 수고한 터전을 상속받아, 그것을 다시 세워 드릴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예수였습니다. 분하고 원통하게 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

14-221
제자들과 하나 되지 못한 예수의 슬픔
하나님의 소원과 역사적인 한을 전부 해원성사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이 민족을 세워 나오시기까지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의 노정을 갈 적마다 다칠세라 피해를 입을세라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길이 남겨질 무리로 이끌어 나오시며, 유대교단을 중심삼은 메시아 사상에 의하여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역사적인 터전이 예수 앞에 모두 반대된 입장에 서게 될 때에, 이를 바라보는 예수는 그 개인적인 서러움도 컸지만, 하나님의 수고의 공적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가 이러한 환경을 다 잃어버리고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길에 섰을 때, 그를 반대하던 무리들은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그를 세운 하나님과 그를 따르던 민중의 소망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슬프고 고통받는 것쯤은 당연하고 또 그 어려움은 참을 수 있으되, 그 배후에서 4천년 동안 찾아 나오신 하나님의 수고의 전부가 깨어져 나가는 것이 슬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개척해 나오시는데 제물이 되었고, 모든 수고의 노정에서 남아졌지만 현실에서 책임 다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바라보는 예수는 하나님의 기대에 비례하여 그들에 대한 저주와 분함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 저주를 돌려서는 안 될 사정이 있었기에 그는 땅에 왔던 한 조건을 민족과 세계 앞에 남겨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사정이 어떠했다는 것을 오늘날 신부 되기를 자처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는 3년여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제자들, 즉 ‘당신이 가시려는 곳은 저희가 소망하던 곳이요, 당신이 계신 곳은 저희가 찾아 나오던 곳이요, 당신이 사시던 그곳은 저의가 행복의 터전으로 바라던 곳인 줄 아오니, 당신과 더불어 살고 당신과 더불어 죽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 등 12제자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형용할 수 없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사정할 수 없는 외로운 심정을 품고 하나님 앞에 면목없어 하시던 예수, 민족에게 쫓겨 갈람산 또는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은 진정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이 땅을 행복의 터전으로 바꾸기 위하여 독생자인 자신을 이 땅에 보냈는데, 도리어 자신이 슬퍼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남기고 가게 됨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는 하나님 대하여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수고해 온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서 오신 이스라엘의 구세주요, 이스라엘의 군왕이 되실 예수가 민족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담판을 짓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던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천지의 불쌍한 고아였습니다. 이 땅의 어느 한 곳에도 마음 둘 수 없었던 가장 불쌍한 고아와 같은 예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슬픔과 기쁜 감정은 있기 마련인데 예수는 기쁨의 대상 하나를 찾지 못한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에서 제일 슬펐던 고아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사명과 책임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기에는 정말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떠나가서는 안 됨을 다짐하던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를 부르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세포가 뛰고 뼛골이 녹아지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같이한 세 제자들은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도 참지 못해 거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메시아를 대접해야 할 이 땅의 인간으로서, 이 이상 원통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의 슬픈 심정에 공명하여 그 옷깃을 붙들고 그와 함께 통곡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기독교가 이토록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와 더불어 수제자가 되어 죽었으면 그들은 부활했을 것입니다. 전인류를 위하여 찾아온 메시아 앞에,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진 예수 앞에 그들이 해야 할 책임을 못다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가신 이후의 기독교는 비참한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다 누구의 죄 때문이냐? 세 제자가 책임 못한 죄 때문입니다.

14-223
주님은 어떠한 신부를 원할 것인가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메시아를 찾기 원합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신랑된 예수를 만나고 싶습니까? 어떠한 준비와 어떠한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기를 원합니까? 오늘 이 현실에 있어서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 호화찬란하게 갖춘 영광의 등불을 가지고 ‘그대는 나의 신랑이요’라고 하며 ‘맞이하는 신부를 예수께서 원할 것이냐?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끓어 오르는 심정을 붙안고 ‘우리의 선조들이 책임 못하여…’ 라고 말하는 그러한 비참한 모습의 신부를 원할 것이냐?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주님은 영광의 신부를 만나기 전에 고난의 신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고난의 신부된 인연을 거쳐 가지고 여기에 신부의 자격을 만들어 놓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이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슬픔을 그 자식이 벗으려면 아버지의 슬픔 이상의 슬픈 자리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신부를 맞기 원할진대 어떠한 신부를 원할 것이냐? 예수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전부를 알고 그 가슴속에 맺혀 있는 모든 것을 알아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신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가슴 속에 맺혀 있는 한과 고통을 풀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신부, 그런 신부를 예수는 요구하실 것입니다. 보세요. 선민으로 택하여 4천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수고를 하면서 찾아 나오시던 그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려야 하는 하나님, 그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둘도 없는 독생자인 예수를 메시아로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배반하는 민족을 대하여 그래도 복을 주어야 할 하나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신부를 요구할 거예요.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황태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자입니다. 황태자로 오시는 메시아, 그 메시아 앞에 신부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되느냐? 신랑 될 그분 앞에 안팎으로 상대될 수 있는 자라야 됩니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듯이 그 신부도 인류를 사랑해야 되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여 염려하듯 그 신부도 염려해야 되고, 그가 현세로부터 앞으로의 세계를 책임지듯이 그 신부도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러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복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화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왜? 복을 주러 왔던 예수를 배반해 버렸기 때문에, 그 역사적 죄를 나를 희생하여 탕감하고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신부관은 그래요. 내 죄를 용서받기 전에 '역사적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됩니다. 아담 해와가 저끄린 죄의 뿌리까지 몽땅 뽑아 가지고 뒤넘이칠 수 있는 결의와 함께 슬픔과 고통, 곡절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모든 것을 탕감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고 말했던 것입니다. 말로만 천번 만번 사랑한다 하면 뭘 합니까? 몸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는 심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과 말은 시대적인 한계선을 못 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명을 통하여 보게 될 때 예수는 시대적인 한계선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이분은 과거 현재 미래를 대신한 천적 사명을 가지고 왔던 연고로 그 마음에서 우러나는 모든 이념도 역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못내 흘리는 눈물 가운데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눈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개인을 위주로 한 기쁨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이 세계의 선민을 울타리로 하고, 진리의 기반 위에 택한 제자들을 울타리로 하고, 직계 가정을 울타리로 하여 자기의 아들딸까지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14-225
아버지! 저를 때리시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예수는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한을 품고 갔기 때문에 그러한 예수의 한을 찾아서 풀어 드려야 됩니다. 그러한 다음 먼저 개인적인 회개, 가정적인 회개,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회개를 하고 나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감당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 다 탕감을 해 가지고 그 다음에는 ‘당신의 어렵고 수고로운 길을 제가 대신 가겠소’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죽을 판국에서는 보따리 싸 가지고 다 도망갔습니다. 이것이 그의 피와 그의 이념을 통해서 남아진 결과란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보다 죽음의 길을 먼저 가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 현세에 있어서 신부가 되겠다고 하는 신자라 할진대,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면 그 원수 앞에 먼저 서야 합니다. 오늘의 이 복잡한 사회 환경, 수많은 교파가 나와 서로 싸우고 있는 이런 환경 가운데서 어느 것이 참인가를 알아 가지고 수많은 교단들을 심판할 수 있고, 수많은 나라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대신 책임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할 거예요.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아버지 나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했겠지만 통일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복이라는 것은 지극히 공적인 것입니다. 공적인 것이에요. 여러분이 복을 받아 신부가 되기를 원하거든 개인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하늘땅을 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시집을 가려면 그 집안에 맞추어 준비를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황태자요, 만민의 메시아요, 만물의 주인에게 나타날 신부가 ‘나를 일등 신부로 만들어 주소서’ 할 수 있습니까?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세계적인 싸움을 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적인 싸움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똑똑히 아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대신해서도 싸우시지만, 수많은 민족을 위해서도 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죽음의 고비가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진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슬퍼해 주어야 되고, 그의 갈 길을 개척해 주어야 되고, 싸움의 방패가 되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루 한 시간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고 하루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야 됩니다. 또한 그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땅에 맺혀 있는 역사적 분함을 풀기 위해 세계를 대표해서 ‘아버지, 저를 때리시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효자는 자기의 동생이 잘못하여 부모가 채찍을 들면 ‘아버님, 어머님, 저를 때리시고 동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본질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 한국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불리울 수 있는 대표적인 신부가 있다 할진대, ‘아버지시여 ! 수많은 교단의 슬픔을 전부 저에게 책임지워 주시고 저를 때려 주십시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대신한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저를 채찍해 주시옵소서’ 해야 할 것입니다. ‘나 하나 배척받고, 나 하나 버림받고, 나하나 핍박받고 나혼자 책임져서 전세계 인류가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 영광이요 소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과, ‘좋은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신부로 택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니 그들은 이미 반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당신이 가지고 온 복은 우리가 짊어질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그랬다면 세계가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그 당시 그의 제자들은, 요즘 말로 하면 너는 좌정승, 나는 우정승, 이런 얘기나 했다는 겁니다. 고난받고 핍박받으며 몰림길에 선 예수에게 있어서 그런 영광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예수에게 핍박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으니 천하통일은 문제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4-227
예수의 역사적인 최후의 한 마디에 담긴 뜻
민족과 교단을 잃어버린 예수에게는 이를 다시 수습해야 할 2차적인 노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2차적인 노정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내적인 인연과, 교단과 민족에게 남은 외적인 인연을 결정지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이 예수에게 있는데도 그의 제자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무식한 자들이 알게 뭡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는 말을 했겠어요. 이 얼마나 처량한 말입니까?

예수가 가는 길은 민족 앞에 쫓김받는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핍박의 길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재창건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고 유대교단을 세우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신 그 수고를 단시일 내에 조건만이라도 갖추어 가지고 탕감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영광만을 바라는 제자들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할 수없이 홀로 하늘과 땅과 역사적인 인연을 책임지고 십자가 앞에 나갔던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세운 민족이 책임하지 못한 것을, 세운 제자들이 책임하지 못한 것을 대신 책임지겠다고 나선 걸음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골고다 산정까지의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상에 매달려 계시던 예수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가 운명하기 직전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4천년 동안 그렇게 섭리를 이끌어 나오시며 하늘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고대하여 보냈던 메시아가 운명하는 그 시간에는 하나님까지도 십자가에서 얼굴을 돌리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자로 왔던 예수가 어찌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비운의 말을 남겨야 했는가? 이것은 인류 역사의 오점입니다. 역사적인 오점이예요.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크리스찬들은 가야 할 길이 있나니 무슨 길이냐? 예수가 골고다 산정에서 남기신 한을 청산짓기 위해서 눈물과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을 오를 때 그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 눈물은 인류에게 남아진다. 내가 가는 십자가의 길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십자가의 길이 된다고 하는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면 내 책임은 끝나지만, 내가 간 후 너희들의 책임은 남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책임, 가정적인 책임, 종족적인 책임, 민족적인 책임, 국가적인 책임, 세계적인 책임, 천주적인 책임이 남아 있으니,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눈물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벅찬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던 예수는 역사를 더듬고 세계를 더듬고 혹은 과거를 뉘우치고 시대를 비판하면서 심판의 한 기점을 남겨야 할 억울한 입장에서도 수고하신 하나님을 이 땅에 모실 수 있는 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엄숙히, 묵묵히 골고다 산정까지 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한 그 말은 자기 개인만을 중심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크나큰 사명을 갖고 온 메시아로서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와 더불어 같이했던 수많은 사람은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버리지 말고, 세례 요한을 버리지 말고, 열두 제자를 버리지 말고,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지 말고, 앞으로 올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역사적인 최후의 한마디였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14-229
메시아를 만나려면
그런 길을 따라가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민족을 부여안고 몸부림치오니 민족을 버리지 말고, 이 세계를 부여잡고 몸부림치오니 이 세계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는 심정에까지 도달해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십자가상에 서신 예수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는 하늘을 바라보니 앞이 깜깜했던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아도 깜깜했고 만민을 바라보아도 깜깜했다는 거예요. 너무도 깜깜했던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상에서도 한줄기 끓어오르는 마음은‘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가운데는 ‘하나님이여 영원히 버리지 마시옵소서. 아담 해와로 인하여 인류가 버림당한 것은 당연하지만,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수고하신 당신의 수고를 버리지 마시옵고, 당신이 공들인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나를 버릴 지라도 당신이 세우고자 하셨던 소망은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통치하고자 하신 당신의 이념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하는 벅찬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가도 괜찮지만 당신의 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을 위한 충신의 도리는 세우지 못했사오나 충성된 마음만은 갖고 있습니다. 또한 효자의 도리는 세우지 못했사오나, 효성된 마음만은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는 이런 사람마저도 없는 상황에 저마저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자기 개체를 한탄하여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역사성을 띤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를 부여안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념이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거기서 재창조, 부활의 권능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 예수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한 것도 사랑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노고를 생각한 것입니다. ‘저들을 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됩니까? 제가 천번 만번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저들을 버리면 하나님의 수고의 공적이 깨져 나갑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붙들고 호소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오늘 우리들을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4천년만에 왔던 메시아를 우리 선조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제자들이 행동입니다. 세상의 한 나라를 위해서 가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거늘, 자기가 섬기던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가는 데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죽음 길을 자진해 가서야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자 하는 여러분도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서 부활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자리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십자가가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예수의 한이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의 한의 실체가 제물이 되어 나온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을 거쳐서 하나님의 한 주권 국가를 세워 가지고 이 세상을 수습해 나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의 판도를 수습해야 하는 기독교는 예수와 성신의 이름으로 수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와 성신은 다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긴긴 세월을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을 찾기 위해서 아브라함 가정을 세우던 이상의 수고를 해야하고, 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난을 당하던 이상의 고역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환경에 떨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사, 2천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 간 예수는 역사적인 실체입니다. 역사적인 소망의 실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옛날 아담이 소망하던 실체요, 노아 앞에 약속했던 소망의 실체요, 노아의 애달픈 사정을 대신한 실체요, 노아의 심정을 대변하는 실체였던 것이며,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그렇고,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혀를 깨물고 이룰 악물며 참아 나아간 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그는 역사를 걸어 놓고 마음속으로 호소했습니다. ‘나는 아담과 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이 땅에 불신의 씨를 뿌린 아담과 같이는 되지 않겠습니다.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인 가인과 같이는 되지 않겠습니다. 죽일 수 있는 자리에서도 용서해 주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14-231
선지자들의 화신체였던 예수의 각오
여러분들이 그때 노아 할아버지의 친아들로 태어났더라도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방주를 짓던 작업에 대해서 전부 별의별 욕을 다했을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나 바닷가에서 지을 일이지 산꼭대기라니…. 그것은 일부러 세상의 어떤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꿔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내나 아들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전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민족은 물론이요, 눈뜬 사람 전부, 집안 사람 전부가 배척하면 할수록 뜻 앞에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노아 할아버지의 아내가 날이 새기 전에 와서 ‘영감님, 방주 지을 시간이 늦어지니 어서 일어나세요. 새벽기도 해야 되는데 어서 올라가 보세요’, 그랬겠어요? 여기 아주머니들 생각해 보라구요. 요즘 한국 여자들 일년만 고생시켜도 바가지 아니라 멱살을 쥐고 그럴텐데…. 그랬겠느냐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 120년이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 세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어서 하십시오.’ 그랬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는지 그들이 알턱이나 있나요?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야 노아야 반드시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라고 했겠어요? 그러나 노아는 한번 받은 명령을 120년 동안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끌고 나갔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를 쳐라, 그를 배반해라, 동료들도 반대해라 해 가지고 그들을 치기에 합당한 조건을 성립시켜 가지고서야 심판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방주를 짓던 노아의 화신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가 내 일신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생명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정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충신입니다.

아브라함도 우상 장사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 호화롭게 살던 환경에서 하나님은 불러냈습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 한 것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 부모 잃은 자식이 되라는 것입니다. 친척이나 가정을 중심으로 애착을 느끼던 전부를 깨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버지가 우상 장사인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며, 이것을 다른 무엇으로 뜯어 고칠 수 없겠는가 하는 혁명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불러내 보니 쓸만했던 거예요. 그래서 ‘제물을 드려라’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려라’ 하니, ‘예’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쳤지요? 미쳐도 잘못 미쳤지요? 미쳐도 올바로 미쳐야지, 이것은 잘못 미친 겁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는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아담 대신자요, 아벨 대신자요, 노아 대신자요, 아브라함 대신자요, 이삭 대신자요, 야곱 대신자이니, 믿음의 아들딸을 대해서 참다운 어버이가 되겠다는 입장에서, 그는 십자가 상에서도 ‘네 몸이 제물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천번이고 만번이고 죽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예수 자신이 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전부 다 저버려야 할 입장에 계시니 이 후 고난의 노정을 생각할 때 안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예수도 육을 썼으니 어쩌고 저쩌고…. 사실이 그렇다면 그가 메시아 될 자격이 있어요? 안 그래요? 스데반도 돌에 맞으면서도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예수가 죽기 싫어서 그랬다구요? 예수는 자기가 가는 길이 십자가로 굳어지면 자기를 따르려는 모두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기에 그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와서, ‘내 신부 될 사람 있으면 목을 내놓고 나와라’ 할 때 서슴지 않고 나올 사람 있어요? 지금 아이가 우는데 젖 좀 먹이고 나서…. 그래도 되겠어요? 목숨을 걸고 가야 됩니다.

하늘을 찾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십자가 도상에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이놈의 사탄아,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파탄시켜 온 사탄아’ 하고 참소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부활의 영광된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성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망하는 자리예요. 십자가는 전부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다 버리는 것입니다. 어미를 버려라! 자식을 버려라!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14-233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노정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구원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고난의 열매로써 한을 청산짓기 위한 자리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떠나서 승리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영생의 자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놓았는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원통하다고 그럴거예요. 부활의 도리를 믿어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도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그런 길을 밟고 나온 것입니다.

신부의 도리를 찾아 나가는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예수의 심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민족을 부여안고 세계를 부여안고 통곡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슬픈 사정이 있다면 나를 제물로 삼아서 내가 비참한 자리에 나가겠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여, 내가 그런 각오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인 오점을 내가 탕감하고 청산하겠습니다’ 하는 부르짖음이라도 있어야만 예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이런 입장에서 ‘나는 아담같이 안 되겠습니다. 가인같이 안 되겠습니다. 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제물 실수하던 아브라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2타 하던 입장에는 서지 않겠습니다. 책임 못한 세례 요한의 자리에는 안 서겠습니다. 책임을 완성하는 자리에 내가 서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믿지 못하여 실수한 것을 믿고 넘어가야 합니다. 땅을 적신 피의 호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기준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아신 예수는 ‘내가 죽더라도 피로써 호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공적으로 하나님의 분한 역사를 막아야 했던 것처럼 예수도 그에 못지 않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 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역사적인 원통함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예수는 했던 것입니다.

원래 모세가 아버지라면 아론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론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던 것과 같은 역사적인 모든 실수의 조건을 자기 일신에 걸어 가지고 그 반대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넘어가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탕감하겠다는 것이요, 부활했다는 사실은 재역사가 출발한다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탕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자리를 통한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담 가정에 아벨을 세우고, 노아 가정에 함을 세우고,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을 세우고, 야곱 가정에 요셉을 세우고, 모세 앞에 아론을 세우듯이 예수 앞에도 세례 요한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왜? 아버지와 아들이 역사를 망쳤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부자가 역사를 망쳤으니, 이러한 역사를 복귀하기 위한 쇠사슬을 짊어진 예수는 세계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세계 인류의 대표인 세례 요한을 맏아들격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런 후계자가 자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일로 목을 내놓고…. 그것이 세례 요한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는 유대 관원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자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3년여 동안 도의 생활을 겸비한 사람이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선지자로 또는 예언자로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실수하여 넘어지니 할 수 없이 그 대신으로 베드로를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례 요한 대신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힘쓰는 자가 얻나니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결판짓는 마당에 베드로에게 ‘역사적인 선조들의 모든 잘못은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너는 아들의 책임을 다해라’ 한 것입니다. ‘아담 가정의 참다운 아벨이 되고, 노아 가정의 참다운 함이되고, 아브라함 가정의 참다운 이삭이 되라. 복귀의 산물인 이 모든 것을 믿는 입장에서 제물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아버지라면 베드로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아들 만들려고 했던 것이니 베드로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비참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14-235
하나님의 섭리를 종결지으려면
그리하여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제자들을 수습하여 영적 구원의 복귀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육적 복귀는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성교회와 통일교회의 다른 점입니다. 기독교는 영적 구원의 입장에 있지만 통일교회는 영육 구원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이 땅에서 죽지 않고 뜻을 이루었다면 예수의 아들딸들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멘’이고, 신앙생활이고 다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를 믿어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잘났든 못났든 예수의 핏줄로 태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가 민족적인 책임자가 되고, 교단적인 책임자가 되고 국가적인 책임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 예수가 책임자가 못되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길을 가기까지의 예수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이스라엘 민족과의 모든 관계가 다 청산되었느냐?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길을 가면서 자기 가정에서 쫓김받고, 친척에게 쫓김받고, 교회와 나라에서 쫓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죽인 연고로 배반받고, 죽음의 길을 간 예수 이후부터 험한 길을 가는 민족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심판관(審判觀)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이후 지금까지 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쫓김받고 몰림받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그렇게 대했으니 탕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쫓김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자들도 전부 쫓김받았습니다. 세계에서 국가에서 자기 가정에서 전부 쫓김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집안이 전부 반대를 합니다. 그것은 왜? 예수가 배반받던 그 노정을 전부 걸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종결지으려면, 한 나라에서 예수가 당대에 당하던 모든 고난을 탕감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예수 가신 이후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유리고객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배척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를 죽인 죄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