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28 to 13-339: 승리의 한 날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자

승리의 한 날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자
1964.04.14 (화), 한국 대구교회

13-328
승리의 한 날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자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세계적인 터전을 인간이 유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슬픔을 느끼셨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13-328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고충
하나님께서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을 세울 때의 그 간절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세울 때는 민족만을 대표해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의 복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이요, 더 나아가서는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택하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택함받은 그 사람이 실수하게 되면 세계적인 복귀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이전 사람이 실수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후대의 사람을 택하여 그것을 그 사람 앞에 넘겨 주셔야 합니다. 이런 한의 조건을 품고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할 적마다 무한한 내적 고통과 외적 고초를 겪으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간이 책임할 수 있는 확실한 한계선을 가르쳐 주고 섭리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가르쳐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느 한 때에 이 책임을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하고 약속을 했는데 만일 그 사람이 실패한다면 그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후손들은 물론 오늘날의 인류의 실패로 연결되고, 역사의 목적까지 실패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들을 세워서 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 맹세를 받아야 할 입장이지만 맹세를 받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권고해야 할 입장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얼마나 고충이 크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도 하나님은 뜻을 위하여 충성하는 인간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를 위하고 싶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시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십니다. 왜 그러느냐? 충성하는 사람을 택해서 세우게 될 때 그가 뜻한 어떠한 기준을 완전히 세우면 그 기준에 의해서 주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세계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충성하더라도 그 기준을 다 이루기 전에는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애달픈 심정을 갖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우리들은 모셔야 되고, 그런 애달픈 심정으로 우리들을 대하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어떠한 자리에서 만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떠한 자리에서 만날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광의 세계에서, 기쁨에 충만하여, 하늘땅을 부여안고 천지를 호령하는 복된 자리에서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의 일반적인 염원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13-330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가 크나큰 집을 짓고 있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요,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풍족한 것도 아니지만 천신만고 끝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수 있는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 아버지는 기쁜 날을 맞이하여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에 했던 고생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 고생이 크면 클수록 그날의 기쁨은 거기에 비례하여 클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된 입장에 있는 아들딸은 아버지가 고생할 때 도와주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멀리 했었습니다. 그런 아들들이 아버지께서 기쁜 날을 맞으셨으니 그 기쁜 자리에 가서 같이 기쁨을 누리겠다고 하여 찾아 왔다고 합시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기쁜 날 나와 같이 기쁨을 누리자’라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아들들의 얼굴을 보면 과거의 슬펐던 일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협조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해도 기쁨의 날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복귀도상에 있어서 전체 복귀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섭리의 뜻을 두고 나오시면서 무한히 시달렸고 무한히 고충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협조하지 못했습니다. 한 고개 한 고개 어려운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나오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협조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동반자를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동반자가 없으면 하나님도 그 고개를 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도 인간들이 동반해 드리지 않으면 넘어가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을 때도 동반자가 없으면 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십자가의 책임을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제물된 실체가 없으면 하나님도 이 고개를 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노정이 있는 연고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반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지금까지 소원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차피 복귀의 목적은 종결될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 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을 맞이한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수많은 풍상을 겪어 오신 눈물겨운 모습이요, 천번 만번 억천만번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오시면서 거슬리고 상처받은 처참하고 비참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날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참석하게 된다면, 비록 하나님의 일을 직접 협조하지는 못하더라도 역사적인 풍상을 겪어 오시면서 오직 이 한날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 인류의 해방을 위하고 행복된 삶을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기쁨의 날을 맞이하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찌하여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고, 어찌하여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그 입장을 알지 못했던가’ 하며 회개하고 분통해 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난날의 자기 생활을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그냥 그대로 동참하고자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기쁨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소원이겠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때까지는 슬픔과 온갖 풍상을 겪으며 걸어 나오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십자가 노정을 가면서 어떤 하나님을 모셨습니까? 슬플 때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면서 하나님의 외로움을 위로해 드리고, 처참한 모습을 붙들고 통곡하며, 당하신 핍박을 위로해 드리며, 걸어 나오신 십자가의 길을 대신 책임지고 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아들딸이 있다면 그런 기쁜 날이 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딸을 불러서 모든 만물 앞에, 만우주 앞에 내세워 그 기쁜 날을 당신의 날보다도 아들의 날로 세우고 싶어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란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을 찾아 나오셨고 그런 아들딸로 이루어진 형제, 가정, 사회, 국가, 세계, 천주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복귀도상에 선 우리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 세계 인류가 하나님을 모시길 원해야 하고, 세계 인류를 형제같이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 본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게 할 수 있는 조건이라도 세워야 하며, 하나님의 슬픔을 막아 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13-332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상의 상과 소망과 칭찬과 행복이 없다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는 그 자리는 무한히 행복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고생하는 자리로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 뵙는 그 자리는 무한히 행복된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찾아 오셨고, 천군천사가 머리를 숙이며 그 서러움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적 심정의 고통을 이기고 난 후 자기를 그 자리로 내세웠다는 것을 알았고, 그 자리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슬픔의 심정이 컸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과 통하였고, 그 심정의 기준을 이 땅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만난 것은 기쁜 자리에서 만나는 것만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픈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슬픈 자리에서 하나님을 역사적으로 위로해 드리고, 현실적으로 보호해 드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가 자녀를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자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후에 아는 자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후에 아들딸을 불러서 기쁜 날을 맞이하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민이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슬픈 자리에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복귀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내 자신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간에 내 환경이야 어떻든 간에, 내 몸이야 어떻든 간에, 내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하나님을 모셔야겠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했던 우리 선조의 한을 내 한 몸이 풀어 보겠다고 지독한 마음을 품고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이 땅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탄의 포로가 되어 가는 인간을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의 화살을 하나님이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어떤 행사 때에 무슨 표창을 받았다고 기뻐하면 안 됩니다. 칭찬을 받았다고 기뻐해서도 안 됩니다. 천지에 있는 수많은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다 축복해 주고 싶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해야만 그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칭찬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더라도 나는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으니 나는 가야 되겠사옵니다. 뜻이 성사되는 그때에 가서 아버님께서 기뻐하시는 웃음 띤 얼굴을 한 번 뵙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보는 것 이상의 상(賞)이 없고, 그 이상의 소망이 없고, 그 이상의 칭찬이 없고, 그 이상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자라야 참다운 효자의 도리를 지켜 나가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고 걸어가고 싸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입장을 위로해 드리고 인간 앞에 있는 모든 십자가의 길을 제거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슬픔이 없겠습니까? 이러한 길이 세계사적인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만나기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목적하시는 것이 내 소원과 내 목적이요, 하나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13-334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관점
6천년 전에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갈라진 슬픈 심정을 여러분이 느껴야 됩니다. 한 많은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인간은 슬픔 가운데 신음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권내에서 죄악을 행하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인간들이 슬퍼하는 것보다 더 슬퍼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어쩌다가 우리 선조가 그런 한 많은 역사를 꾸몄던고! 이 역사의 분통함과 억울함을 어느 누가 슬퍼했으며, 어느 누가 이 역사적인 원한과 더불어 싸웠습니까? 본래부터 하나님과 우리의 선한 선조들이 이 원한과 더불어 싸워나온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선한 선조의 전통을 전달하기 위하여 나는 태어났으며, 그 사상과 그 이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나는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처참한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 `이 불행하고 처참한 현실을 개척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구나. 이러한 길이 하나님의 길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슬픈 일을 보게 되면 슬픔을 당하는 사람보다도 먼저 눈물이 앞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도성을 전도하기 위해서 갈 때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어디로 갑니까, 아버지, 어디로 갑니까? 내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오늘 어떠한 사람과 상봉합니까? 사탄과 상봉합니까, 혹은 괴수와 상봉합니까, 하나님이 싸워 굴복시키기를 바라는 사람과 상봉합니까? 아버지!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한 분을 통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이 고을을 책임진 아버지의 아들로서 가겠습니다. 딸로서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역군과 같은 입장에서 가겠습니다. 참생명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가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참된 길을 닦아야 합니다.

사탄세계의 잡초를 뽑아야 합니다. 땅 위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늘의 백성으로 만들어 그 실적을 바쳐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 도성을 몽땅 바쳐 드리겠다고 한마디 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내 발걸음을 통하여서 이 민족을 대표하여 제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이런 관점에서 보시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미미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흠모하는 내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여러분이 움직이는 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이나 산에 올라가서 남이 보나 안 보나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노아가 이렇게 한 것이 만세의 기쁨을 돌릴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혼자 땀을 흘리며 일했지만 탄식의 세계가 해방의 한 날을 바라고 있다는 견지에서 볼 때, 그가 한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소망의 심정으로 인간을 찾아오셔서 소원의 한 날을 준비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이 길은 누구를 위해서 가는 겁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하나님과 더불어 출발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싶은 자리에서 모시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만나 보았으며 언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 보았습니까? 모시고 살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탈피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원수의 품에 안겨 신음하고 있는 뭇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십니다. 사지(死地)와 같은 이러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기쁨의 한날을 위해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대에 내가 산다는 신념을 여러분은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신념에서 사는 것 뿐만이 아니라 원수를 굴복시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생활하고 싸워 나가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만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13-336
하나님이 같이해 주신 것이 생의 가치가 된다
여러분이 수고하여 어떠한 목적을 이룬 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의 하나님은 법적으로 공인된 아버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눈물 나는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생명적인 권내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며, 함께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십자가 때문에 슬퍼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을 중심하고 살지 않습니다. 만민을 위하고 자녀를 위하여 사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자기의 십자가 때문에 슬퍼해서는 안 되며,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만민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뜻을 따라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앞이 열리고 환경이 환영하면 할수록 행복하고 감사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환경이 올 적마다 도리어 비좁고 처참한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짓고 기도하던 때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갈 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고 선지자의 손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리에서 일하는 기간이 여러분의 생애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맹세를 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던 그때, 그 어떤 처참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나는 홀로 가지 않았사오니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라는 신념으로 나아가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원수 사탄과 부딪치는 시련이 있을 적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맹세했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맹세를 받지 못하고 위로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비참하셨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충성을 다하다가 배반하고 돌아서도 `야 이 자식아, 왜 배반하느냐?’ 하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의 슬프신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슬프셨던 하나님을 이제 우리가 만난 것은 귀한 것이지만, 만나는 기쁨을 대하기 위해서는 만날 때까지의 도상에서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반자가 되어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만남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버지를 직접 모시며 살고 있고, 모시며 실제 행동하며 사탄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유대를 가진 것이 무한한 행복이란 걸 느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민족적인 긍지를 좌우시킬 수 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영적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시대적인 혜택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내 자신이 이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이 길을 결정하고 개척하면서 피땀 흘리며 싸워 나간다는 통쾌감을 여러분들은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것을 느끼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전체의 움직임을 다 알게 되면 으례히 도망갑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보호를 해주는 뒷받침이 없다고 말입니다.

13-337
최후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어야
사탄세계에서는 추천을 받아 어떠한 일을 하게 되면 보호자가 배후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고 생활적인 모든 문제도 책임을 져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세계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고난의 길을 도맡아서 간다고 불쌍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지만 배후에서 책임을 져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프고 서글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려움에 지친 모든 식구들을 끌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어려움을 아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가고 또 가자’ 이렇게 스스로 환경을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없었던 최후의 투쟁을 하는 무대가 비장하고 심각한 자리일수록 하나님은 역사적인 가치를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땅을 주기 위해서 우리의 뒤를 밀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통일교회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분야에서 책임을 지고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 분야에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는 여러분이나 선생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활면이나 그 배후의 사명 분야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시는 분야 역시 크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굴복시켜 나오는 싸움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이 민족이 싸우지 않고 세계 인류가 싸우지 않더라도 이 싸움을 제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세운 기준이 있으면 이 땅 위에 세계적으로 수많은 식구를 세울 수 있는 것이요, 종족을 세웠으면 민족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인 고로 한 중심을 세우기만 하면 반드시 살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한 중심이 흥하면 그와 같이 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적인 표준을 세워서 가정에서부터 국가와 세계까지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부터 천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적인 기준을 배후에 두고 사탄세계의 전통을 칠 사람은 선생님입니다. 사탄 세계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써, 더 철저한 것으로써, 더 완전한 것으로써 한 많은 역사를 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나와 함께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은 우리 시대에서 마지막이다. 우리들은 이 삼천리 반도에서 하는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라고 해야 합니다. 모두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성을 다해 하는 이 싸움이 최고의 악전(惡戰)이요, 또한 최고의 결전입니다. 역사 속에서 세계적으로 많은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우리가 하는 이 싸움은 역사상 마지막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한과 더불어서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13-339
효자 효녀의 길
죄악된 세계를 수습하기 위한 마지막 싸움의 승리가 이 땅 위에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싸우는 마지막 고비가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종족을 위한 싸움의 마지막 고비가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이 민족을 위한 싸움의 마지막 고비가 올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이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이 되겠습니까? 이 싸움에 이겨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천하를 지배하지 못하면 얼마나 한이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 날을 맞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싸움이 없이 승리는 그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망하느냐 살아 남느냐 하는 싸움을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실전 도상에서 여러분은 개인적인 십자가를 지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가정적인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고개를 넘으려고 얼마나 많은 싸움을 했으며, 얼마나 슬퍼하고, 얼마나 애달파하고, 얼마나 몸부림치신 줄 압니까? 그런 한이 고개를 인간이 일대(一代)에서 넘지 못하다니‥. 6천년 역사를 중심삼고 하나님께서 이 고개를 넘기 위해 애달파하시던 그 한의 고개를 우리 통일교회가 일대(一代)에서 넘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개인의 원수는 세계사적으로 사라지고, 가정의 원수도, 종족의 원수도, 국가의 원수도 세계사적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원리를 배우며 나왔지만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원리는 원리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대로 따로따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민족을 대하여 승리의 첫 깃발을 들고 나서는 거룩한 일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피와 살을 하나님 앞에 바쳤으니 영광의 그날을 위해 원수의 적진을 무찌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10년, 100년, 아니 일생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충성을 다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대구 도성이 받고 안 받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충성을 다했느냐 다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받고 안 받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인이 불어나고 안 불어나고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주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줄 때는 다시 돌아오게끔 주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뜻을 알고, 지금까지 3년 노정에서 진정으로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해 오면서 원망하고 낙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된다면 그들은 변할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당하며 세계적인 고난과 싸운 것은 승리의 한 날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고자 하는 가치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효자 효녀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오늘부터 처음처럼 새롭게 출발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