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16 to 13-235: 아버지와 그 나라

아버지와 그 나라
1964.03.22 (일), 한국 전본부교회

13-216
아버지와 그 나라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려는 제목은 `아버지와 그 나라’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3-216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목적
인간이 만들어 놓은이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에는 그것을 지은 주인의 목적이 있고, 또한 지음받은 그 물건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천지를 지으신 주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있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세계가 타락한 세계가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천지 만물은 주인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지 만물은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다시 인연맺어야 할 입장에 서게 된것입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나가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주인은 어떠한 목적을 갖고 있었겠습니까? 그 주인은 인간의 아버지로 계시기 위해, 인간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소망의 중심체로 계시기 위해 천지 만물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천지만물은 그 주인이 사랑할 수 있고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리된 이것을 수습해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수습하고 땅을 수습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전체를 수습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걸어 나오신 복귀의 길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영원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 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자식을 가진 부모가 그 자식을 자식이라 할 수 없는 사람, 부모를 모시고도 부모라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이상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인연과 약속을 통해서 천하에 맹세하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지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면 그 사람 이상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3-217
부자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하나님과 인간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어떠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이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렇지 못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라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천지 창조의 원칙적이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과 인간(아들딸)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천하가 된 것 이상 비참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도 슬퍼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또 신랑으로 모셔야 할 하늘을 잃어버린 땅의 슬픈 이상 더 큰 슬픔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천지를 동원하여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 것이요,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것이요, 잃어버린 신랑 신부를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찾아 나오는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도상에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이다’ 할 수 있는 한 날을 가져 보았습니까? 못 가져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하여 세상을 지었지만 `내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나오는 수많은 백성 혹은 수많은 성도들이 이 천하는 내것이라고 해 보았습니까? 못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천지는 주인을 잃어버린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대신 무엇이 이 천지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의 원수인 사탄이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원래 속해야 할 주인을 잃어버린 만물이요, 원래의 부모를 잃어버린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을 잃어버리고 부모를 잃어버린 천주요 인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잃어버린 부모를 찾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의무로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귀의 길은 무엇을 찾기 위한 길입니까?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를 중심삼은 나라를 찾기 위한 길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종의 종에서부터 종, 양자, 자녀의 자리를 거쳐 승리한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참다운 부모가 되어서 가정을 만들고 종족을 만들고 민족을 만들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세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복귀의 목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 때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세워 놓고 `내가 너의 아버지가 틀림없고,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는 천지를 창조한 주인이니 내가 동하면 같이 동할 수 있는 천지요, 내가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천지다. 너는 내 아들이니 너도 내 대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하는 말씀을 받은 아들딸이 있었습니까?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이요 독생자로 이 땅 위에 보내셨으되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창세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라는 명분을 가진 메시아를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이상 원통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그러하시지만 보내심을 받는 예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아버지여! 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라고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크나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응당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사랑받을 수 없는 어떠한 조건과 한계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라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믿는 많은 성도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불타는 정열의 마음을 가진 아들딸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냐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며 가슴을 헤치고 품을 수 있는 아들딸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는 그대로 남아 있고, 인간의 형태를 갖춘 사람은 많지만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13-219
복귀의 책임을 짊어지고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천상에 가신 예수님도 기도해야 됩니다. 성신도 해산의 수고를 해야 됩니다. 무슨 연고로 그래야 되는가? 타락으로 인하여 생긴, 탕감해야 할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거쳐 세계와 하늘땅, 영계와 육계에 맺혀 있는 한을 해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을 해원하지 않고는 하늘과 땅이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신랑이요, 땅은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부모요,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탄, 혹은 이 마귀는 무엇이뇨? 영원히 가를래야 가를 수 없는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도둑질한 도적놈입니다. 이 사탄으로부터 항복을 받기 전에는 가정의 파탄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후손들은 본심이 지향하는 것을 따라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쓰러지고 자빠지면서도 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쓰러지고 뒤넘이치는 역사노정을 거쳐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고마운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숱한 뒤넘이치는 노정을 거쳐왔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갔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나는 옛날부터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아요.

역사노정을 걸어오는 동안 숱한 곡절도 많았지만 오늘에 이르러 인간 후손들 앞에 하늘을 신랑이라 할 수 있는 땅의 신부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을 신랑이라 할 수 있고 신도를 신부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인간을 자녀라 할 수 있는 이런 명사, 이러한 가르침이 복잡한 이 세상 가운데 전파되어 세계적인 무대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모두가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제물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배후에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라도 남겨 주고, 당신이 소원하는 기준이라도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남겨 주기 위해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임을 시대적으로 인간들에게 다리를 놓기 위해 눈물 지으면서 지금까지 섭리를 전개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순교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기독교가 들어간 곳에서는 반드시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피를 흘리며 선교의 기반을 닦아 나왔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 가정, 혹은 단체가 비참하게 희생되었다고 하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비참함보다도 그들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비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적이 모든 비참상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사탄세계에 가서 풀어 놓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분함과 우리 인류의 모든 분함과 억울함을 사탄세계에 가서 퍼부어 복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복수를 할 때가 바로 대심판 날입니다.

13-221
하나님이 가야 할 길과 부름받은 인간이 가야 할 길
여러분, 성경 말씀(마태복음 25장 35절 이하)을 보면 오른편에 있는 무리를 대하여,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시고 오른편의 의인들을 대하여는 영생을, 그렇지 못한 왼편의 악인들을 대하여는 형벌을 내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은 단순히 비유와 상징으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없다(마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준비하여 보낸 메시아가 땅 위에서 이런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메시아를 맞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4천년 역사를 준비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충신이 되고, 효자 효녀가 되고, 열녀가 되겠다고 하는 무리들은 이러한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충신의 이름은 있으되 충신으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효자 효녀의 이름은 있으되 효자 효녀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열녀의 이름은 있으되 열녀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주어서 죽음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이 길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신, 효자, 효녀,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군왕과 부모와 신랑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죽음의 자리로 내던질 수 있어야 되는 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림을 받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갈 길이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는 길에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가는 길에도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사정을 중심삼고 가지만 하나님은 개인사정뿐만이 아니요, 인간은 가정적인 사정을 중심삼고 가지만 하나님은 가정사정뿐만 아니요, 인간은 민족이면 민족만을 위주해서 가지만 하나님은 민족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개인을 넘어서 가정, 가정을 넘어서 종족, 종족을 넘어서 민족, 민족을 넘어서 국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 세계를 넘어서 천주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희생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이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들을 합하여 가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가야 할 가정적이 십자가를 탕감해야 됩니다. 민족과 민족을 합하여 하나님이 가야 할 국가적인 조건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효자 효녀가 되고, 진정한 충신 열녀가 되려면 먼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다 간 후에 하나님이 가는 길을 도와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업고 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도와 주어야만 됩니다.

복귀의 길은 인간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가고 계십니다. 인간은 지상을 통해서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지상뿐만이 아니라 천상세계의 복귀의 노정까지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해 가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고 나서는 지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가 그래요.

내 개인이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불림을 받아 제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더 큰 십자가에 가담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한 발자국 발전해 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개인보다 가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하는 하나님은 가정적인 희생자를 세웠고, 가정보다는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 세계를 위한 희생자를 세워 왔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를 수습해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기독교로서의 희생적인 사명을 완결짓는 동시에 기독교를 이끌어야 할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탕감해야 됩니다. 그래서 세기말적인 대환난이라는 명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13-223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물의 자리로 내모는 이유
이러한 환난 도상에 제물로 세움을 받는 사람은 그 자신이 죄가 있어서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위치보다 더 큰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 제물적인 자리로 내모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원칙입니다.

이렇게 탕감복귀해 나오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의 선조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의 도상에서 승리하여 그 기반 위에서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겠다고 사탄 앞에 선포하고 나서면 민족적인 십자가의 노정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적이 십자가가 무엇인지 몰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것을 몰라 가지고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로서 짊어진 십자가를 탕감하고 하나님의 십자가까지도 탕감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완결짓겠다는 조건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는 그 책임과 사명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깨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교단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교단을 세울 때 외적으로는 국가 주권을 세워 가지고 저끄러진 것을 수습해 나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세계적인 무대, 혹은 천적인 기반을 닦기 위한 내용을 중심삼고 하나님 대신 탕감해 나오는 무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가 없다 할진대 세상을 구원할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한때를 마련하여 그런 무리를 준비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이러한 내용을 알고 협조해 나왔느냐? 개인적인 십자가에서 승리했으면 가정적인 십자가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님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 중에 가정적인 핍박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억울하고 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적인 핍박을 당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종족적, 민족적인 핍박을 받고 있으며, 또한 십자가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여러분 이상의 수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수고를 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가정적인 십자가 노정에서 꺾이는 한이 있더라도 종족적인 기반을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꺾이더라도 다시 수습할 수 있는 기반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대적인 혜택권을 미리 만들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인 시대와 종족적인 시대를 빨리 종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할을 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노정에서 인간이 당하는 핍박과 십자가의 희생보다 더 큰 십자가의 무대에서 홀로 투쟁해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길이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길이요,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13-224
하나님 앞에 자녀와 신부의 자격을 갖추려면
오늘날 이 세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나와서 그의 민족을 지도하려면 먼저 종족적인 시련 도상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종족을 민족권내로 옮길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민족권내의 시련도 물론 당해야 되지만 미디안 광야에서의 민족적인 시련과 국가적인 시련을 극복하여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민족을 인도해 나와야 참소를 받지 않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인간을 지도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당하는 시련과 환난보다 더 큰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정적인 혜택권내에서 혹은 민족적인 혜택권내에서 시련을 참고 견디어 나가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발판을 세우시기에 급급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대해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몰랐기에 자기의 슬픔만을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아버지여, 내 눈물을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효자, 효녀, 충신, 열녀가 되겠다고 하는 무리들이 지금껏 이렇게 해 온 것입니다. 내 개인이 당하는 십자가는 내가 잘못됨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가정적인 십자가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사탄을 물리치고 나서 `아버지여!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았으니 민족적인 십자가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저 복은 내 것으로 하려 하고, 모든 어려움은 죄다 아버지께 맡기려 합니다. 이건 도둑놈심보예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할 때 하나님은 인간보다 한 세계를 앞서 가신다고 가끔 말했을 것입니다. 한 세계를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걸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정을 세우기 위해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족적인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요, 우리가 민족적인 시련을 넘어가는 과정에 있을 때 하나님은 국가와 세계적인 기반을 넓히기 위해 벅찬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 통일교인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축해 드려야 할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신랑을 부축해 드려야 할 신부이거늘, 과연 그러한 생활을 해 왔느냐?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그 나라,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요, 그 나라는 우리의 나라이거늘, 인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렇게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 홀로 져야 할 십자가를 하나님이 지시고, 인간이 가야 할 고난의 길을 하나님이 가시다니…. 이런 분한 마음을 여러분이 체휼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딸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신랑 앞에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지방에 가서 통일교인들의 무지한 심정을 바라보게 되면 이 통일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교회의 사정을 바라보고 우리의 갈 길을 개척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보다 앞서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뒤를 따르며 `어서 갑시다’ 하고 격려해 드리며, 하나님 앞에 있는 힘을 다 바치고 맡은 바 책무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리에서 효자의 칭함을 받을 수 있으며 충신 열녀의 칭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길에서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도상에서 생명과 바꾸는 자리에서야 그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가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요?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고요? 욕심들이 너무 많습니다.

13-226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이루어져
효자, 효녀, 충신, 열녀의 이름은 평탄한 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이 애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뼈저린 사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성도들입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어가는 성도들을 눈을 감고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그 고통에 대항하라고 할 수 없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시련과 핍박과 환난에 부딪치고, 사정의 틈바구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에 비례하여 하나님도 십자가도 가중되어 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굶주림의 길을 가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위하여 언제 정성 한번 들여 봤습니까? 좋은 것이 있으면 전부 도둑질해다가 자기 배만 채웠지요. 하나님을 위해 가는 길은 먹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닙니다. 놀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닙니다. 편하기 위해 가는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정한 주인(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종이 되려면 썩어져 가는 몸을 버리고 참다운 종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모셔야 할 어버이가 있거든 그 아버지 앞에 딱한 자리에서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칭호를 받아야 되고, 모셔야 할 군왕이 있거든 그 군왕 앞에 딱한 자리에서도 충신이라고 하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원수 사탄이 점령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존재가 되면 다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잃어버리겠지만, 이러한 존재가 되고 나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효자, 충신,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자리에서 참다운 아들딸을 찾겠습니까? 그 곳은 십자가 도상입니다. 결국은 십자가 도상에서 부르신다는 겁니다. 그 아버지를 따라 나서려면 십자가의 도상에서 인연맺어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서 만사가 다 통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가 있는 동시에 가정적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에서 앞에서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무난히 넘은 후에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한 후에는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애급 땅에서 다시 국가, 즉 이스라엘 나라를 찾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나안 땅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후에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도 있는 조건이 성립된 것입니다.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한 기반을 토대로 하여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이 이 땅 위에 오셨던 메시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인들이 하나되어 오시는 메시아를 믿어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군왕의 자리에서 모세의 자리보다도, 야곱의 자리보다도, 낮은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4천년의 고난 가운데에서 준비하여 세워 놓은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인 기준에서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가정을 떠나고, 종족을 떠나고, 민족을 떠나 광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탄에게 끌려 광야로 나간 예수님은 그와 싸움을 하여 유대 민족과 하나님이 닦아 나온 4천년의 기반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준에서 다시 찾아 나왔습니다. 영적인 판가리 싸움을 통해 승리의 기반을 조성해 나온 것입니다. 복귀의 길이 이런 길입니다.

이 시대의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제 우리 통일교회는 4년노정을 바라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4년노정을 어떻게 갈 것이냐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도 4년노정 이후의 노정을 어떻게 준비할 것이냐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4년노정은 필히 잘 갈 것이라 생각하고 4년 이후에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13-228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오면서 악의 핍박 도상에서 쓰러지지 않고 남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몰리는 자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느냐? 발걸음을 세우려 하면 점점 빨라집니다. 안 그래요? 점점 빨라집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에서 지쳐 쓰러지면 가정적이 십자가의 기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에서 쓰러지면 종족적이요,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4년노정을 중심삼고 민족과 국가의 기준 위에 세계적인 기준을 끌어다가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이 세계적이 골고다 산상에서 하나님 앞에 충신 열녀가 될 수 있는 자리로 어떻게 돌파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적이 한계를 넘어 한 시대를 앞서 가십니다. 우리가 민족적인 시대를 책임지면 하나님은 국가적인 시대를 준비하시고, 우리가 국가적인 시대를 책임지면 하나님은 세계적인 시대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와 하나님의 십자가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이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십자가의 산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실 때, 그 길로 가서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이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십자가를 다 가고 난 후에 이제 너희들에겐 승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 음성을 들을 때까지 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쉴 사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선생님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역사적인 모든 것이 전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때에 자신을 느껴 보아야 됩니다. 요즘 가만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그 나라, 내가 걸어온 목적은 아버지를 찾기 위함이요, 내가 사는 목적은 아버지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눈물짓고 계시니 내가 편히 살 수 없고, 아버지가 걱정하시니 내가 편히 쉴 수 없고, 아버지가 십자가를 지고 계시니 내가 편안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3-229
십자가를 정복해야 할 우리
여러분, 이 뜻을 앞에 놓고 생각해 볼 때, 현재 한국의 실정은 매우 긴박합니다. 세계 정세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긴박해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십자가의 정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 책임질 수 있는 무리는 어떠한 무리일 것인가? 이러한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습니다. 이러한 길이 싫다고, 이것을 마다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님을 배반한 무리의 뒤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백성들은 세계의 수많은 민족을 우리 손으로 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명을 다른 민족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신념에 차 있어야 됩니다. 또한 통일교회 신자들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는 데는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십자가는 우리가 먼저 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굶주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니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나서겠다는 각오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래야 효자입니다. 굶주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도 주고 싶고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드려야 할 것을 알지만 나에게는 눈물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러한 일을 내가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목마른 입장에 계시면 나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마른 자리에서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내가 짊어지고 하나님에게 편안한 것을 넘겨 줄 줄 알아야 됩니다. 외로운 행로에서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안식할 수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신세를 첨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세를 덜어 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자기가 진 십자가를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것을 알고, 드릴 수 있고, 위할 수 있고,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다운 효자, 효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섭리해 나오십니까? 가정을 넘어서 민족을 위해서 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위해서 입니다. 민족의 입장에서 국가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 민족권내에서 하나의 책임이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이라도 가벼이 대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같은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당하시는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드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으로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가정적인 십자가를 지고 민족적인 십자가를 첨부시켜 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교인의 자세입니다. 만일 가정적인 제단에서 실패하더라도 민족적인 기준에서 충신의 칭호를 남기고, 효자 효녀의 칭호를 남기면 됩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 통일교회가 민족적인 사명을 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4년노정을 바라보고 있는 이 마당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세계적인 길이요, 우리가 찾아야 할 나라는 하늘땅이거늘 이 하늘땅을 하나님께 찾아 드릴 때까지 남아진 십자가의 길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당하는 십자가는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발걸음을 멈추면 여러분은 길만 닦아 놓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소생시대, 장성시대, 완성시대 이렇게 해서 단계적으로 연결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남아진 십자가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시련에 부딪칠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갈 때는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십자가를 붙들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정복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정복하기 전에는 사탄세계의 환난 고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정복한 후 부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세워 신약 복음의 역사를 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통일교인들도 십자가를 정복해야 합니다. 현세의 십자가를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시련과 핍박을 받아도 망하지 않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도해 나오시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연고로 여러분의 신세가 외롭고 처량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와 같이 걷고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13-231
여러분은 쉬어도 하나님은 수고하신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국가, 세계를 넘어 하늘땅, 천주에 사무친 모든 십자가의 고개를 돌파해야 합니다. 영계의 골고다를 돌파하고 지상의 골고다를 돌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고, 가정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고, 민족, 국가, 세계적인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일 어려운 일을 골라서 해야 합니다. 제일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 저도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까지 첨부해서 지고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천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이 노정에서 어떠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고달픈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주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굶주리고 있는 것은 밥을 못 먹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못 마셔서 목마른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들은 말로는 뭐 어떻고 어떻고 하지만 그것이 말 가지고 되는 겁니까? 생명에 관계되는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면 그때뿐입니다. 그때만 하는 척합니다.

우리는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됩니다. 개인적인 시련과 가정적인 시련은 종족적인 기반을 닦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나타나는 핍박과 시련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갈 길이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앉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졌지만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됩니다. 과거에는 십자가를 지고 한 곳만을 바라보고 나갔지만, 이제는 한 곳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동서남북을 살피며 나가야 됩니다. 과거에는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고개를 올라가면 되었지만 이제는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살피며 가야 됩니다. 범위가 넓어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가시는 길을 받들어야 되고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는 길을 받들어야 됩니다.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서로 동떨어지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여러분보다 더 가중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지도하시는 선생님은 한 수 위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들어 있어도 하나님은 소생, 장성, 완성의 3수의 단계를 거쳐 관계를 맺어 나오셨습니다.

소생급을 거쳐 장성급에서 심판받는 거와 마찬가지로 차자가 문제입니다. 둘째가 문제입니다. 상하가 있고 전후가 있고 좌우가 있는 것도 둘째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에서 모든 것을 해결지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를 바로잡고, 전후 좌우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둘째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일본교회의 소식을 들어 보면, 일본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전부 교회로 온답니다. 책가방을 교회에 두고는 노방전도를 하는데 전부 한 사람씩 전도를 하고 집으로 간답니다. 이런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장년, 청년들은 지금까지 뭘 했습니까? 여러분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안 하면 내가 할 겁니다.

최후의 결전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결전을 치러야 할 입장에선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평생 가도 못 다 갈 길이기에 여러분은 자나깨나 꿈 가운데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공적인 책임을 질 때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당당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자기들이 가야 할 환경의 울타리를 지고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있으면 그의 방패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공적인 사명과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입니다.

13-233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자
선생님은 배가 고파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염려하는 그 길를 내가 앞놓아 갈 것이냐,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면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러한 길을 가려고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모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나가야 되겠습니다. 천번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십자가를 감당하고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와 그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부를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겠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효자가 되고, 여자는 아버지의 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같이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타고난 백성이요, 효자, 효녀,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십자가 도상에서도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까? 고생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예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니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앞으로 오시는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딸이 되고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한 날을 맞기 위해 우리는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패자가 되지 않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 각오하는 통일교회의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한번 지긋지긋할 정도로 일을 해봅시다.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가 되고, 그 나라 앞에 충신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형제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어야 하고, 그 백성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어야 됩니다. 형제를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는 자가 효자 효녀요, 그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는 자가 충신 열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할 때 효자 효녀요, 군왕의 사랑을 차지할 때 충신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시대적인 환경을 넘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얼마나 개척했습니까? 개인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지나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무대를 향해 나가는 이 도상에서 하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서서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를 부르짖고, 충신 열녀를 호소하여, 내 피와 살은 악의 피와 살과 합할 수 없는 피와 살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나라가 여러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아버지가 여러분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똑똑히 알고 십자가 도상에 선발대로 책임을 다하여 꼭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선생님이 축복가정을 모아 놓고 새로운 모험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에 돌아가서, 여러분 자신이 어느 단계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지요? 누가 이 뜻을 이룰 거예요? 누가, 누가 이룰 겁니까? 하나님도 혼자 돼요? 인간이 땅에서 보조를 맞추어 드려야 됩니다.

여러분, 가야 할 길이 있나니 허리띠를 졸라매야 되겠습니다. 방심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바쁜 걸음입니다. 달려가야 할 길에서 낙오자가 되지 말고, 약속한 통일의 그 곳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승리를 이루어 놓고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어디 그러겠다는 사람 손 들어봐요.

13-235
기 도
아버지께서 슬픈 가슴을 부여안고 가야 하다니 원통하고 애통한 일이옵니다. 자기의 친아들딸을 그 험한 산상으로 몰아 넣어야 했던 아버지의 채찍이 저희의 배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아버님 앞에 맹세한 저희들이오니 이 길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은 불쌍하신 분이옵니다. 아버님은 억울하신 분이옵니다. 인간들은 배반하고 돌아설 길이라도 있지만 아버님께서는 배반할 길도 돌아설 길도 없기에, 가고 또 가야 하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후퇴라는 명사를 요하지 않는 아버지의 길임을 감히 알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바쁘시옵니까? 진정한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 열녀가 되고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사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하나의 바위가 되고, 하나의 옷자락이 되게 해 달라고 호소하지 못한 저희들, 과거를 뉘우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각지에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분부를 알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가야 할 행로를 알고 있지만 이들이 가는 걸음을 다시 재촉하고 채찍질해야 하는 딱한 사정이 아버지께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참아 남아지는 자는 아버님의 복을 받을 것이로되, 낙오되는 자는 후대에 참소를 받을 것이요, 탄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나로 말미암아 이런 고통의 길을 가는 사람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부디 강하고 대담한 마음을 갖게 해 주시어 끝까지 참아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에 끝날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지 않았사옵나이까? 혼자 가게 되면 낙오자가 되기 쉬우니 모여야 되겠습니다. 끝날에는 끝까지 참는 강인함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살피다가는 가지 못할 운명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이 가시는 걸음은 저희들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도 아옵니다. 천 가지를 했으면 만 가지를 하라고 명령하고 싶으신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선 아들딸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뜻 앞에 진정한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저희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겠고, 그 나라를 찾기 위하여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 이념은 거룩하오나 가는 길은 비참하옵니다. 그 내용은 아름다우나 나타난 현상은 죽음의 길이었사옵나이다.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속으로는 소망을 가져야 할 길이었사옵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기에 아들딸 된 저희들도 그러하고, 아버지가 그러한 길을 가시기에 저희도 그러한 운명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 이 도상에서 지치지 말고 백절불굴의 심정을 가지고 최후의 승리자로 결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젠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안식의 한 날, 너희는 내 것이요, 이 천하는 나의 아들딸인 너희들의 것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한 날까지 참고 견디어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날을 맞이하기까지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새로운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3년노정을 출발하던 때와 같은 결의를 갖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제 쉴 사이 없이 아버님을 위하여 싸워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사오니 이런 환경에서 책임 다할 수 있는 무리들로 세워 주시옵고 책임 다할 수 있는 자리로 내몰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스스로를 반성하여 책임과 사명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후손들 앞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운 조건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만만사 영광의 터전이 저희들의 협조로 말미암아 빨리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