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36 to 13-158: 승리적 주관가가 되자

승리적 주관가가 되자
1964.01.01 (화), 한국 전본부교회

13-136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
[기 도]

아버지! 1963년도 곡절 많은 가운데 보냈습니다. 하늘의 슬픔이 온 천지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있어서, 아버지의 수고의 노정 위에 슬픔이 더해진 지난해였음을 저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 앞에 저희의 있는 정성을 다 모아 이 한 해만은 아버지께 기쁨의 해로 바쳐드리겠다고 호소하고 간구하였던 지난해를 회고 해 볼 때, 그저 면목없이 머리 숙일 뿐이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저희들을 부족다 아니하시고 작년 한 해도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품으시사 큰 곡절 없는 날들이 되게 해 주셨사옵니다.

오늘 1964년 새날 새아침 첫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사옵니다. 저희에게 생명이 있음은 아버지의 노고 때문이옵고, 저희에게 자랑이 있음은 아버지의 피값 때문인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있는 정성을 다 모아 엄숙한 자세를 갖추고 새로운 자신을 세워 진정으로 부리시는, 아버지의 심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음성을 듣고 `불초한 아들과 딸들이 여기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죽음의 길도, 어떠한 어려움의 길도 가겠습니다’ 하고 눈물어린 심정으로 아버지께 호소하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아들딸을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 새벽, 여기에 모인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아버지시여,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 무리를 연하여 민족이 있사옵고, 이 민족을 연하여 인류가 있사오며, 이 인류를 연하여 천천만 성도와 만물에 이르기까지 천주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 기뻐하심은 저희들 자신으로 말미암은 기쁨보다 더 큰 기쁨, 이 온 천주를 대신한 기쁨이라고 생각되오며, 이 불초한 저희들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이 너무나 과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나이다.

사망의 흔적을 벗어나지 못한 죄악의 후손인 연고로 이다지도 많은 곡절을 하늘에 남기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제 또 새해를 맞아 아버지께 장담하고 결의와 맹세를 할 용기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맹세하고 가고, 또 맹세하고 가야 할 복귀의 한의 고비고비가 남아 있는 연고로, 이날 다시 새로운 광명의 아침 햇빛도 보기 전에 새벽부터 저희는 새로운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옵니다.

새로운 해에 새로운 마음, 새로운 심정으로 이 민족과 인류를 대신한 선봉자의 책임과 선각자의 책임과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드리오니, 저희들이 한 이 맹세가 하늘을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흑암의 세력을 대할 적마다 하늘의 권위를 갖고 사랑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자아가 되게 해 주시고, 오늘 맹세의 한 빛을 세워 주시사 1964년의 365일 전부가 이와 같은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해의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각오가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이 되게 하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사망의 세계에서 고난의 강을 건너는 범선의 키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가 원하시는 소망의 동산, 그 복지까지 도달하는데 있어서 장애를 느끼지 않고 피해를 입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새벽에도 이곳을 향해 뜻을 품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식구들이 남한 각지에 널려 있사오니 품어 주시옵소서. 더구나 지금은 하늘의 중대한 기간을 앞에 두고, 눈물어린 심정으로 새해를 맞는 외로운 식구들이 있사오니 그들에게 이날부터 새로운 광명의 빛이 깃들게 하시옵고,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을 높이고 빛낼 수 있는 아버지의 날을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새벽 여기에 머리 숙인 모든 아들딸들의 심정을 굽어살펴 주시옵고 새로운 한 날 아버지를 모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통일의 무리로 이 민족의 과거의 죄를 용납하시옵고, 이 민족을 위주로 세계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옵고, 세계 인류를 위주로 천상 천하의 모든 애혼(哀魂)들의 죄를 용납하시옵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왔다 갔던 선조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아버지의 기쁨의 한 날을 저희들과 이 민족이 세계 만방에 생명의 빛으로 나타낼 때까지 지키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남겨진 승리의 날들이 어서 속히 저희들에게 찾아들고, 남아진 싸움터의 험악한 조건들이 생명의 빛과 더불어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온 천주에 가득하여 축복받은 가정들과 더불어 이 민족과 수많은 인류 위에 같이하기를 바라면서 거룩하신 참부모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3-138
말 씀
우리는 4년노정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4년간의 표어로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13-138
승리의 터를 닦으려면
여러분들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려면 전체의 승리를 바라기 전에 먼저 개체의 승리적인 터를 닦아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승리라는 것은 과거에도 바라왔고, 현재에도 바라고 있고, 미래에도 바라야 할 명사입니다. 하나님도 바라오셨고, 땅도 바라왔고, 우리의 선조들도 바라왔던 명사였으나 타락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와 하나님은 지으신 이 이념의 세계에서 승리라는 명사를 지니지 못하고 슬픔과 비참의 명사를 지니고 나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환경 속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모든 요건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완전한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도 지금까지 승리를 위하여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또한 자고로 시대시대, 혹은 시기시기를 거쳐 오면서 하늘의 뜻을 책임지고 나오던 우리의 선조들도 역시 승리를 위하여 싸워 나왔습니다.

유구한 6천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이 승리의 한 날을 고대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조차도 그 날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있어서도 완전한 승리의 한 날을 지녔다고 할 수 없는 이런 단계에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직까지 우리는 승리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크나큰 승리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준비를 위하여 우리는 결단하고 용단하고 결의하여서 우리의 싸움의 상대, 즉 원수를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시면서 우리 선조들에게 믿기를 권고하셨습니다. 믿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허락하신 소망의 터전 위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일체가 됨으로써, 영원히 아버지의 기쁨이자 우리 인류의 기쁨이요 영원히 아버지의 승리이자 우리 인류의 승리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자리까지 허락하셨으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을 잃어 버렸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망을 잃어 버렸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복귀섭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으로 남아 있고, 또 그 섭리의 뜻을 받들려는 인류의 소원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소원과 인류의 소원이 오늘날 우리 개체에도 남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을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믿어 줄 수 있는 믿음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소망하는 소망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 행복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할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이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기필코 찾아야 할 것이지만 이것을 찾는다는 것은 수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믿음을 세우기 위하여는 개인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믿음과 소망을 성취한 그 기반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도 투쟁이 없이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13-140
믿음·소망·사랑의 목적
그러면, 믿음의 목적은 무엇이며, 소망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랑의 목적은 무엇이냐? 물론 그 가운데는 천지의 삼라만상도 포함되겠지만 그보다도 하늘과 땅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신 존재로 지은 우주의 중심체요, 핵심체인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 그 자체가 믿음의 목적의 실체요,인간 그 자체가 소망의 목적의 실체요, 인간 그 자체가 사랑의 목적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장이 의미하고 있는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인간 그 자체입니다. 물론 이 세계가 목적이 되기 전에 민족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민족이 목적이 되기 전에 종족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종족이 목적이 되기 전에 개인, 즉 나 자신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을 위주로 하여 소망이 목적하고, 믿음이 목적하고, 사랑이 목적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창조 당시에 바라셨던 소망의 사람, 완성하여 완전한 사람, 천지가 그로 말미암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실 수 있는 참다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천지를 움직이는 말이요, 그 사람이 속삭이는 말은 천지와 더불어 속삭이는 말이요, 그 사람이 즐기는 즐거움은 천지와 더불어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위주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명사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소망의 이념과 하나의 귀일점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천지와 더불어 기뻐하고, 천지와 더불어 통하고, 천지와 더불어 화할 수 있는 하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 하나가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복귀원리를 배워서 알고 있겠지만 믿음을 세우기 위한 탕감조건이라든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 등 모든 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소망의 실체이신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소망의 한 때를 바라고 나오고 있는 것은 무엇에 귀결되느냐? 타락한 인간에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메시아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그 자체가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이며, 사랑의 목적체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이루어진 목적체, 즉 메시아를 위주로 하여 목적을 완성한 그 때에는 무엇만이 남을 것이냐? 목적이 다 달성되었으니 사랑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은 믿음의 완성실체를 통한 사랑이요, 소망의 완성실체를 통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하나를 위주로 대표자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입장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하느냐? 믿음을 위주로 한 입장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하고, 소망을 위주로 한 입장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불가능함이 가능함으로 될 수 있는 한 때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불가능함으로 말미암아 한 때 한 분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그 한 분을 찾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부르짖을 때는 믿음의 실체가 필요한 것이요, 소망을 부르짖을 때는 소망의 실체가 필요한 것이요, 사랑을 부르짖을 때는 사랑의 실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체는 누구였던고? 그는 바로 타락의 인연을 받지 않고 타락의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참다운 사람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지는 수습되는 것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늘의 영광이 시작되는 것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자의 인연을 중심삼은 부부의 인연과 부부의 인연을 중심삼은 가정의 인연이 연하여 새로운 천지의 기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13-142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
그 기원은 반드시 하나의 실체, 즉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 때에는 사랑의 실체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 세계에는 사랑을 위주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도 그렇게 말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바라는 그 실체, 즉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체를 세우기 위해서 타락한 개인으로부터 인연을 맺고 하늘의 섭리의 손길과 연결시켜서 가정을 세우고, 종족, 민족을 세워서 오늘날 현세까지 이끌어 나오신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믿고 갔지만 믿음의 목적을 아직까지 달성하지 못하였고, 소망을 바라고 나왔지만, 소망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사랑을 바라고 나왔지만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야 달성되는가? 믿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나타나게 될 때, 소망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나타나게 될 때, 사랑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달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시는 메시아는 어떠한 분이냐?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가 되는 분입니다. 믿음의 목적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을 위주로 하여 세계사적인 투쟁과정에서 승리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로 없이는 안 됩니다. 소망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소망의 투쟁역사에서 승리한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각자각자를 놓고 볼 때, 우리 개체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찾는 목적은 개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믿는 경우도 있을 것이요, 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믿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종족, 국가, 세계, 하늘 땅을 위하여 믿음의 실체를 찾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보다는 가정이 더 구하기 힘든 것이요, 가정보다는 종족이 더 구하기 힘든 것이요, 종족보다는 민족이 더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는 어떤 분이냐? 개인은 물론이려니와 가정, 종족, 국가, 세계, 천주 전부를 걸어 놓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체로 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이러한 자리에 서야만 비로소 인류의 역사상에 남아 있는 믿음이 결실될 수 있는 것이요, 소망이 결실될 수 있는 것이요, 사랑이 결실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결실될 수 없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은 개인적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런 신념을 가지고 외치게 될 때, 그 말은 개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로되 세계사적인 내용과 인연을 갖춘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3-143
완전한 승리와 투쟁
지혜로운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이냐, 세계적인 때를, 소망의 때를 먼저 구별할 줄 아는 지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실천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 위에 오실 때 그는 개인으로 오시되 개인이 아닙니다. 그분의 가치는 온 세계 인류가 믿고 있는 신앙의 결실체요, 온 세계 인류가 바라고 있는 소망의 결실체요, 온 세계 인류가 바라고 있는 사랑의 결실체입니다. 그 결실체에는 모든 역사노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전부 연결되어 있고, 하늘과 땅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러한 결실체로 나타나셨지만, 그분이 믿음의 화신체, 소망의 화신체, 사랑의 화신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이 믿음의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을 중심삼고 승리의 주관자가 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을 한 과거가 있는 것이요,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소망의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소망의 기준을 중심삼고 승리의 주관자가 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을 한 과거가 있는 것이요,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의 실체로 나타나기 이해서도 마찬가지의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은 4년간의 표어와 같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느냐? 신앙을 중심삼고 믿는 데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투쟁해서 이겨야 합니다.

완전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부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이긴 후에는 하늘 땅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믿음을 위주로 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인을 받는 데는 어떤 공인을 받아야 하느냐? 어떤 한정된 시간권내에서만 공인받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무대에서만 공인받아서도 안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입장에서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소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요,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3-144
모세와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
여러분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들어가게 되었을 때 먼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민족을 인도하는 모세를 믿었습니다. 모세는 어떠한 사람인가?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한 신앙의 목적체였습니다. 60만 대중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신한 지도자요,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소망의 나라를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야 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도 민족을 더 사랑하고 자기 부모보다도 민족을 더 사랑하는 목적체로 믿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존경했더라면 민족적인 믿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요, 민족적인 소망을 성취하는 것이요, 민족적인 사랑의 세계를 찾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하나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잃게 되었고, 소원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 민족의 사랑마저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세주는 어떠한 분이냐?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목적은 믿음의 실체인 메시아와 일체가 되는 것이요, 소망의 목적도 사랑의 목적도 그분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를 수습하여 에덴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분을 완전히 차지하는 사람은 그분의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요, 그분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을 완전히 붙들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을 완전히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평면적으로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대하는 기준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모세는 민족적인 믿음의 실체요, 민족적인 소망의 실체요, 민족적인 사랑의 실체로서 하나님을 대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인 믿음의 대상, 개인적인 소원의 대상, 개인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일체가 되어서 모세의 실체를 중심하고 우리 같은 것 천만 명을 합해도 모세를 대신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남아지지 않더라도 모세는 남아져야 한다는 신앙을 가졌더라면, 60만 대중은 신앙을 잃게 되지 않았을 것이요, 사랑의 낙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일체가 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믿음을 부르짖고 소망을 부르짖고 사랑을 부르짖어도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모세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메시아인 예수, 전체의 소망의 중심존재인 예수를 통하여 공인받아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가 총동원하여 예수 실체 한 분을 위주하여 민족복귀를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면서 세워 온 믿음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면서 연면히 이어온 4천년 역사의 그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음과 소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그들이 예수를 믿음의 실체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믿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고, 소망의 실체로 맞이하지 못하여 소망을 잃어버렸으니 비참한 역사노정을 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 사랑의 실체를 저버렸으니 심판의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146
끝날을 맞는 성도의 자세
그러면, 여러분들은 끝날의 이 때를 맞이하여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소망의 실체, 믿음의 실체, 사랑의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를 중심삼고 세계사의 최종점을 세우려 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한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분은 세계사적인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분과 같은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개인을 위주로 하는 시대, 자기 가정을 위주로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날은 새 주인을 위주한 세계주의 시대입니다. 생활도 세계주의의 무대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세계사적인 믿음의 실체, 세계사적인 소망의 실체, 세계사적인 사랑의 실체로 서게 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수고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인의 생활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하늘 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이여, 당신이 소원하시던 것이 이러한 실체가 아니옵니까?’ 하고 담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행함이 세계사적인 무대에서 믿음의 실체와 같은 커다란 부분으로 나서지 못할 것 같으면, 그런 범위권내에서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적 결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앞으로 오시는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그분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여러분은 오실 믿음과 소망의 실체인 그분 앞에 상대적인 입장에서 저울질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인연을 파헤쳐 세계사적인 종말시대가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국가와 민족, 종족, 가정, 개인의 가치를 알고 지금까지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개인, 종족, 민족, 국가를 거쳐 나온 믿음의 전통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모세면 모세, 노아면 노아의 믿음보다 월등히 나아야 합니다.

노아는 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모든 환경을 버렸습니다. 가정의 식구들까지도 반대했지만 노아는 그 모든 것을 초월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심하고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노아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혹은 가나안 땅으로 혹은 애급으로 유리고객하면서도 그는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 세상의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13-147
신부의 사명
선조들보다 낫다고 하는 것 하나를 세우기 위하여, 믿음의 소망을 바라면서 찾아 나오신 하늘 앞에 사랑받기 위하여 소망을 두고 싸워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 종말시대에 처해 있는 여러분들은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나 각오에 있어서 그들보다 못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들보다 못해서는 오시는 주님 앞에 신부로서 설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시는 주 앞에 신부로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천하를 수습할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계사적인 믿음의 터전 위에서 신부로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그 믿음의 기대 위에 신랑되신 주님이 나타나서 뜻을 세워 소원성취를 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6천년 동안 신앙의 기반을 닦은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오늘날까지 인간은 그것을 이루어 놓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말살해 버리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 있다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 비록 외적인 면에서 역사적인 투쟁은 하지 못할지라도 내적인 면에서 역사적인 모든 투쟁을 부여안고, 오시는 주님 앞에 십자가가 남아질까봐 염려하며 역사적인 십자가를 부여안고 뒤넘이칠 수 있는 투쟁의 역사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로 오시는 주님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런 기반을 닦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터전을 세우면 오시는 주님은 고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한다면 신랑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생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을 닦으면 애급노정도 지나고 광야노정도 지나 가나안노정에 들어서는 입장에 설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 앞에 고통이나 시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은 신부가 하여야 할 이 모든 싸움을 대신하여 오시게 됩니다.

주님이 오시면 오시는 그날부터는 주의 날이 시작되는데 이 날을 대비하여 가나안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이 신앙자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터전을 못 닦게 될 때는 오시는 주님이 환난의 노정을 걸어 신부들이 가야 할 길을 수습하여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이것을 재차 수습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완전한 믿음의 목적 기반 위에 서 있느냐? 완전한 소망의 목적 기반 위에 서 있느냐? 완전한 사랑의 기반 위에 서 있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같이 갈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1960년을 위주하여 출발한 노정입니다. 주님을 맞아야 할 신부의 입장에 있는 이 땅 위의 신앙자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목적의 날을 바라보며 그 기반을 닦아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재차 승리의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을 거쳐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3-149
승리를 위한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노정
오늘 우리들은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습니다. 이`승리적 주관자’란 어떠한 것이냐? 과거를 대해서도 승리적인 주관자요,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도 승리적인 주관자요, 미래를 대해서도 승리적인 주관자입니다.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어느 분야에 있어서는 승리적 주관자의 기준을 세웠을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앞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절대의 소원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노정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시대를 지내고 나면 가정적인 승리의 시대, 종족적인 승리의 시대, 민족적인 승리의 시대, 국가적인 승리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늘의 주권을 위주로 하여 땅 위의 주권, 즉 이스라엘의 주권을 중심삼고 세상에 승리적인 영광의 한 날을 세우려 했던 것을 다시 우리들이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국가와 민족의 승리적 기반 위에 서지 못하여 해원성사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 4년간을 국가와 민족의 승리적 기반을 닦기 위하여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노정이 끝난 후에는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하여 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노정을 거쳐 오면서 가인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 무한히 수고하셨습니다. 노아 때는 노아를 세워 승리자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아브라함 때도 역시 그랬고, 모세 때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가 가신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부 이런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는 이 시대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과거를 책임져야 하고, 선생님이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현실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역사노정에서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개인적인 승리적 주관자, 가정적인 승리적 주관자, 종족적인 승리적 주관자, 민족적인 승리적 주관자, 국가적인 승리적 주관자,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의 주권을 위주로 한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주로 하여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달성하려면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이 따릅니다. 이 노정은 투쟁의 노정이요, 고통의 노정이요, 비참의 노정입니다. 이러한 것이 전체의 조건이 됩니다. 이것을 무시해 버린 `승리’라는 명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들을 따르던 민족도 불쌍한 민족이요, 고통받는 민족이요, 비참한 민족이 되어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적인 투쟁을 엮어나오는 과정적인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슬픔의 고비를 넘어야 하고, 고통의 고비를 넘어야 하고, 비참의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13-150
인내를 통한 극복의 단계
이것을 넘으려면 무엇을 넘어야 하느냐? 인내로써 넘어야 합니다. 인내가 아니면 넘을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에게는 참고 견디는 것, 즉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이냐?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를 잃어버리는것 이상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 이상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 이상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기쁜 것은 무엇이냐? 잃어버렸던 부모를 찾고, 처자를 찾고, 자녀를 찾고, 형제를 찾고, 종족을 찾고, 국가를 찾고,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은 무엇인가? 굶주리고, 헐벗고, 질고에 시달리고 자유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고통을 인내로써 극복해야 됩니다.

승리의 길을 가는 데에는 반드시 이런 것들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는 피흘리는 슬픔과 고통과 비참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슬픔의 고개에서 후퇴하는 자는 결코 기쁨의 고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여 후퇴하는 자는 고통 너머에 있는 기쁨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비참함을 당하여 후퇴하는 자는 비참 그 너머에 있는 행복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는 그곳은 어떠한 곳이냐?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을 밟고 넘어야 찾아지는 곳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비참과 고통과 슬픔은 세계사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어떠한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달성하려면 거기에 대비되는 슬픔이 수반되고, 고통이 수반되고, 비참함이 수반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안 그렇겠습니까? 여러분이 소망의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믿음의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사랑의 승리적 주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과 대등한 세계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을 당하여서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찾아 나가는 목적과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졌으니, 여기에 수반되어 어떤 것들이 찾아오면 그것을 인내로써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닥쳐 오는 슬픔과 비참에 대해서 세계사적인 감정과 세계사적인 신념과 세계사적인 믿음과 세계사적인 소원과 세계사적인 사랑을 가지고 용진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슬픔을 극복해야 하고, 고통을 극복해야 하고, 비참을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의 복귀를 위하여 개인적인 고통과 개인적인 슬픔과 개인적인 비참을 중심삼고 싸워서 승리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대로는 가정시대를 못 넘어갑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태어난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대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시대로 발전해 나오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인 슬픔이 개재되고, 역사적인 고통이 개재되고, 역사적인 비참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세계사적인 비참과 세계사적인 고통과 세계사적인 슬픔에 가담하면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통과한 곳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시느냐? 개인을 위주한 개인적인 섭리시대에는 한 개인을 비참과 고통과 슬픔의 자리에 세워 가지고 이것을 극복시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를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그것을 극복했다는 가치를 부여하십니다.

모세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 하나를 비참과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를 따랐더라면 민족적인 비참과 슬픔과 고통이 극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자리에 세우셨을 때도 그를 따랐으면 세계적인 비참과 슬픔과 고통이 극복되었을 것입니다. 좋아도 따라가고, 슬퍼도 따라가고, 죽어도 따라갔으면 세계적인 비참과 슬픔과 고통은 극복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세계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탕감해 놓고 인류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게 하여 구원섭리에 참여시키자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음서입니다.

13-152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한 각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끝날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6천년의 종말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자리에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승리하면,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고통과 비참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반을 못 닦아 놓게 될 때는, 오시는 주님은 성도를 대표하여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찾아 세우신 유대 나라가 책임 못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맛보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탕감복귀의 조건이 세워진 자리에서 불리움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어느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되느냐? 하나의 주권을 세워서 한 나라, 한 민족을 동원하여 타락된 생활을 칠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명령에 언제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느냐? 가나안 칠족을 멸할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노아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복종해야 했느냐? 3대 이상, 즉 손자 때까지는 절대 복종해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때가 오면 절대 복종하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시대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극복했다는 조건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승리적인 주관자’란 말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갖추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피어린 투쟁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최고의 슬픔, 고통도 최고의 고통, 비참도 최고의 비참의 기준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 피를 토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원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연고로 어느 한 때를 지나게 되면 찾아 세울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느냐? 세계사적인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과 분립시켜서는 안 됩니다. 가정적인 슬픔도 슬픔이겠지만 국가적인 슬픔이 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슬픔으로, 세계적인 슬픔이 있으면 그것도 여러분의 슬픔으로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고통, 가정의 고통도 고통이겠지만 국가적인 고통이 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고통으로 알고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도 고통이요, 남에게 줄 수 있는 입장에서도 고통인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세계적 목적체를 맞이하여, 전체가 소망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고, 전체가 믿음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고, 전체가 사랑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기 전까지는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그대로 남아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놓고 냉정히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더우기나 1964년은 숫자적으로도 좋지 않은 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해동안 여러분들이 고통을 당해도 역사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이요, 비참함을 당해도 역사적인 비참함을 당하는 것이요, 슬픔을 당해도 역사적인 슬픔을 당한다는 자세로 모든 것을 완결짓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해야 할 1964년입니다.

13-154
홀로 가야 할 탕감복귀노정
이것을 위하여는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인내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넘어가려면 그것을 넘어가기 위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내력의 동기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느냐? `나는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것, 아버지와 나는 같이 가야 한다는 것, 내가 안 가면 아버지가 가셨다가도 다시 돌아오셔서 나와 함께 가셔야 된다는 것, 내가 여기에서 주저 앉으면 아버지는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또 끌고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에 가지 못하면 세 번을 거쳐 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림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갖다가 십자가로 와서 십자가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에서 그런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개인에게 그런 곡절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요, 가정에서 그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는 가정에서 그런 곡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갔다가 다시 와서 또 다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 국가, 세계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를 통하여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자간의 인연입니다. 같이 가야 할 타락의 한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으면 인간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당하면서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황공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천신만고의 수고를 하며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할 때 아버지께서는 그 길을 슬픔으로 할 수 없이 가셨다가 슬픔으로 오셔서 슬픔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슬픔으로 움직이고 하나님과 더불어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위안을 받으실 것이요, 소망을 가지실 것이요, 원수에 대한 울분심을 더 크게 가지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움직여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소망을 느끼시기보다, 원수에 대한 울분심보다 고통을 더 느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야 할 걸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고통을 끼쳐 드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슬픔이 닥치고, 어떠한 비참한 자리에 가게 되더라도 그것들이 꺼리낌이 될까봐 그것들을 물리치러 오시는 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자리에 있을 때는 혹시라도 누가 동정할까봐 걱정해야 합니다. 제삼자에 의한 후원도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와 나 둘 뿐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제삼자의 후원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저 나라에 갔을 때, 그가 여러분보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되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자리에 있게 되면 여러분들이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렇듯 탕감복귀노정은 결코 후원받아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천사의 후원도 받지 않고 가는 길이요, 동지의 후원도 받지 않고 가는 길이요, 오직 홀로 가는 길입니다. 노아도 홀로 갔고, 아브라함도 홀로 갔고, 모세도 홀로 갔고, 예수도 홀로 갔습니다. 이렇게 개척을 해 왔지만 아직도 복귀해야 할 한이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13-155
이 시대의 가장 슬픈 자리로 나아가야 할 통일교인
이런 많은 고비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인내심을 기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을 안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고생시켰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원인이 될 수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늘 가는 길은 그 과정에서 혈기를 내뿜고 싶어도 내지 않고 끈기 있게 가야 하는 길이요, 악의 공격을 고이고이 받으면서도 정면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개인적인 시대로부터 종족, 민족을 대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세계적인 환경을 중심삼고 하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세계를 향하여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문제는 세계가 아니라 민족입니다. 국가와 민족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문제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세계는 문제 없습니다. 세계로 가는 길은 단번에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예수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일체가 되어 세계적인 주권 국가를 이루었더라면,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이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세계는 벌써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준을 닦지 못했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걸어간 비참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은 인내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는 형무소에서 쇠고랑을 차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들이 뜻을 대하여 저런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가면 얼마나 복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또한, 그런 사람을 보고 `내가 뜻을 위하여 저렇게 비참하고 저렇게 고통을 당해도 괜찮다’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까? 만일에 그러한 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못 가면 하나님이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인 비참, 슬픔, 혹은 고통을 볼 때마다 그것들은 남의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인류를 눈물과 피와 땀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록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심정을 중심삼고 눈물과 피땀을 통하여 마음과 행동이 일체가 되었다는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그럼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행동했다는 조건을 안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인인 여러분들은 민족과 국가가 세계를 위하여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여러분은 오늘 이 시대의 가장 슬픈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제일 슬픈 자리로 나가는 것이 사는 길이요,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로 나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자기 자식이 굶어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뜻을 위하여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까지도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간다면, 이 민족의 운명은 바뀌어질 것입니다. 또 이 민족의 비참사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들은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한 최단거리를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는 것이 최단거리를 가는 것이냐? 앞서 말한 최고의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인내를 가지고 극복해야 합니다.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만일에 이 길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오셨다가 다시 가셔야 하는 슬픔을 당하시고, 나 하나 때문에 삼 배 이상의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빚진 것만 해도 청산할 수 없을만큼 많은데 오늘 이 시대에 부과된 책임을 못하여 황공스럽기 한이 없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민족의 모든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민족의 모든 고통도 느껴야 합니다. 이 민족의 모든 비참도 우리의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13-157
4년노정을 가는 자세
그러면, 그 기간은 얼마나 길 것이냐? 모든 것은 원칙적인 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민족의 고통과 슬픔과 비참을 4년 안에 탕감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도, `환란 중에서 참고 견디어 슬픔과 고통과 비참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주시고, 그 자리에서 그 비참한 환경을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제단을 꾸밀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에 날마다 피땀을 흘리며 정성들이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사실을 고하고 복을 빌 수 있는 통일교회라 할진대, 4년만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은 삼천만 민족 앞에 여러분을 세워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를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때는 이 민족이 완전히 굴복될 것입니다. 이런 인연을 거쳐야 이 민족이 국가적인 기준 앞에 세움을 받고, 크나큰 천적(天的)인 사명을 짊어지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 이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냐? 자기 민족을 남의 민족보다 더 사랑해서는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자기 민족은 굶주리게 될지언정 이방 민족을 배부르게 하고 잘 입히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민족이 역사상에 없어서는 안 될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갖춘 민족이 된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은 그런 길을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모든 것을 바쳐 이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건강하고 기력이 왕성하기 때문에 안일의 한 날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환난이 크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내적인 면으로나 외적인 면으로나 울상을 보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13-158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길
선생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인 이 국가와 이 민족이 책임을 못 하는 자리에 설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앞세워 영광이 있으면 그 영광을 여러분에게 먼저 주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알고 앞으로 남아진 4년 기간을 가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입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돌아서 갈 것이 아니라 똑바로 가야 하겠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한꺼번에 맞게 될 때에도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차 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은 모두 지칠 수 있는 때니 우리는 더욱 분투해야 되겠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을 하여 가인과 아벨이라는 열매를 맺었으니, 식구들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때문에 축복가정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각 지역에서 남이야 가든 말든 충성을 다하여 가는 효자 효녀의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선생님이 지향하는 목적을 대신하여, 눈물과 피와 땀으로 민족적인 이 한의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복을 빌면서 하루하루를 감사히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선생님의 상대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천적인 역사가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닦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가나안 칠족과 대결하기 위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남길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축복받은 가정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신하고, 이스라엘 민족 대신에 자기의 아들딸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 아들딸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 이동의 기준을 세우고 가나안 복귀의 위업을 완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갖고 전부를 탕감하겠다고 하는 식구들이 있다면,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탕감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4년 기간 동안 여러분이 책임을 다하여 민족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민족적인 승리의 날을 여러분이 맞이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고 일구월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끝난 후에는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만민이 그런 혜택권내에서 머물게 되어 하나님을 찬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해방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날을 완전한 승리의 날로 세우게 됩니다. 또 이 세계를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로 완전히 복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요, 우리는 완전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이요, 천지간의 모든 것이 완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십 년, 이십 년, 혹은 자기 일대에서 되지 않으면 아브라함처럼 이대, 삼 대까지라도 연장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끈기를 가지고 전통적인 사상을 스스로 남기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도정(道程)을 인내로써 극복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시는 주님의 완전한 승리의 그 한 날을 여러분의 날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의 자리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여러분 앞에 다시 한번 천명하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