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 to 12-34: 기쁨과 영광의 세계를 살아서 싸워 이루라

기쁨과 영광의 세계를 살아서 싸워 이루라
1962.07.15 (일), 한국 전본부교회

12-25
기쁨과 영광의 세계를 살아서 싸워 이루라
[말씀 요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신 본연의 목적은 기쁨과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원치 않은 슬픔과 곡절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창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시고 소원으로 남기신 채 수고해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25
예수가 슬퍼하신 이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기쁨을 느끼시기 위해 지으신 것입니다. 특히, 여섯째 날에 지으신 인간은 보다 큰 기쁨을 느끼시기 위해 지으신 실체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역사적인 한으로 남게 되었는가? 누구나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해와의 실수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모든 슬픔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인간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간 어느 한때도 기쁨과 영광의 모습으로 계셔보지 못하시고 사탄과 싸워 오셨습니다. 그렇게 4천년간이나 수고해 오신 하나님께서 소망하던 실체로 오시고 기쁨과 영광을 돌리기 위한 실체로 오신 메시아 예수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4천년 역사의 결실체로, 영광과 소망의 실체로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해서는 기쁨과 영광의 실체였으나, 땅에서는 슬픔의 실체가 되어 30여년의 생애를 슬픔으로 보냈습니다.

영광과 기쁨의 실체로 오셨던 예수는 그의 생애에서 즐거움을 드러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예수와 하나님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흑암의 세계가 된 후 4천년을 경과하여 예수를 보냈으나, 그가 다시 슬픈 죽음의 길을 갔으니 하나님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제2차로 큰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이 땅 위에서 드러내지 못하고 가는 예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면목을 세우지 못하는 슬픔보다 영광과 기쁨 속에 계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가야 하는 슬픔이 더 컸습니다. 그 말 못할 슬픔의 창끝이 예수의 심정을 찔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는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느끼기 전에 이미 내적인 십자가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꿈결같이 사라지고 난 뒤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가 간구해야 하는 서글픈 사정을 제자들에게조차 알릴 수 없었던 슬픔, 뒷날 아버지 앞에 슬픔을 남길 것을 염려하는 예수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발걸음은 최대의 고통스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고통을, 외적으로는 성도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까지 가서 엎드려 기도하던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가 `아버지!’ 하고 부른 음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과, 책임 못한 자신의 심정과, 미래를 염려하며 애타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부르짖은 호소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한 것은 자기의 고통을 면키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성취 여부가 자기 일신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이 난관을 피하여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사정이 있다면 이 이상의 사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적인 수고의 노정을 알면서 `아바 아버지여….’ 하던 예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처참했고 비통한 심정에 사무쳤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천년 투쟁의 노정이 남아지고 구원섭리가 남아지겠기에 그토록 간구하였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생애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도 기쁨은 못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소망과 영광의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 앞에 기쁨과 영광의 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처럼, 그의 제자들도 예수 앞에 기쁨과 영광의 실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실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는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뜻을 남겨 주고 싶었으나 남겨 주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아도 예수는 기쁨과 영광 중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슬픔과 고난 가운데 태어나서 슬픔과 고난 가운데 살다가 슬픔과 고난 가운데 갔습니다. 올 때에는 슬픔으로 왔을지라도 기쁨과 영광 중에 갔으면 영광의 결실체가 될 것이었는데, 소망과 기쁨으로 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슬픔으로 갔기 때문에 그 뜻이 아직까지 소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12-27
바른 신앙자세
오늘날 우리는 고난의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요셉 가정에서 보낸 30년 사생에도 고난의 생활이었으니, 예수는 안팎으로 고난의 생애를 보냈던 것입니다.

12사도와 수많은 무리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따라다녔던가? 그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 즉 땅에서의 영광을 바라보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니 최후에 가서는 하나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예수가 당하는 내적인 고통과 외적인 고통을 알 정도만 되었어도 예수는 자신의 고통을 그들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예수의 고난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영광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지요.

예수에게 있어서 눈 앞에 보이는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는 그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대했습니다. 식탁도, 눕는 자리도 소원의 한 날을 고대하며 대했던 것입니다.

끝날에는 여러분들이 과연 예수가 바라는 신부, 혹은 제자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격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2천년 전 예수는 소망의 심정을 말 못한 채 안팎으로 고통을 품고 골고다의 길을 갔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품고 간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품고 갔습니다. 예수는 심중의 고통을 이 땅 위에 풀어 놓지 못하고 갔습니다. 영광도 남겨 놓지 못했지만 그 심중의 고통도 남기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은 예수께서 가실 때에 당한 슬픔과 고통을 인계받기 위해 골고다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바로 그런길입니다.

아직도 육적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기에 성신이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중심삼고 죄악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한 시기가 와서, 제자들에게 말 못하고 안팎으로 당하셨던 예수의 고통을 끝날의 성도들에게 알리는 것이 예수와 성신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예수를 부르셨다면 한을 품고 부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는 오늘날까지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신도 역시 이 땅에 와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성신 두 분이 인간의 죄를 책임지고 청산하여 기쁨과 영광의 세계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낙원에서 기도하는 예수는 결코 편하지 못합니다. 영광의 아들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30여년의 생애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이래 오늘날까지 2천년 동안 한결같이 십자가의 생활을 계속해 오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시여!’ 하는 기도도, 당시뿐만 아니라 낙원에 가 있는 2천년 동안에도 계속해 오셨습니다. 예수가 그러니 성신 또한 그렇지요.

기독교인들은 믿는 날부터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간구합니다. 그것도 땅에서의 기쁨과 영광이 아니라 저 나라에서의 기쁨과 영광을 바랍니다. 이렇게 그들은 기쁨과 영광을 누리려고만 할 뿐, 그 배후에 십자가의 노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모인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도 그들처럼 기쁨과 행복과 영광을 요구하지 그 반대의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과 영광은 하나님도 예수도 성신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명사는 있으나 아직까지 가져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과 영광을 나에게 주시고 슬픔과 고통은 아버지가 가지시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창조 이래 가져 보지 못한 기쁨과 영광을 땅에 있는 인간이 먼저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신이 가져 보지 못한 기쁨과 영광을 우리 인간이 먼저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영광을 상속받기 전에 십자가를 상속받아야 하며, 축복된 삶을 상속받기 전에 죽음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이 상속받아야 할 유업입니다.

천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기쁜 것이고, 예수가 기뻐해야 기쁜 것입니다. 예수가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는 기도하시는 예수를 고통 가운데에서 해방시켜 드려야 합니다. 예수가 기도로써 싸워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예수도 성신도 끝날이 어서 오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청산하고 기쁨과 영광의 날을 맞기 위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12-29
인간이 처해 있는 위치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살이에 있어서 고통이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예수와 성신의 고통이 지나가기 전에는 안 지나갑니다. 아직도 예수 앞에 기쁨의 문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개인이 고통 가운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싸우지만, 예수와 성신은 전세계와 영계와 육계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어느 날에나 그칠 것인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예수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느끼는 예수는 울 수도 없습니다. 따르는 제자와 이스라엘을 뒤에 두고 죽음 길을 가야 했던, 울래야 울 수 없었던 예수의 심정을 누가 알았을고? 고통 가운데 있는 예수를 해방시켜 드리기 전에는 우리에게 영광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믿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자리에서 믿어야 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믿어도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이나 예수가 왜 아직까지 이러한 자리에 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당시의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믿을 것입니까?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며 최후의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으려면 십자가와 생사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가 많다고 해서 그 전통이 상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전통은,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가 대표하였듯이 소수지만 세계의 기독교인을 대표하여 싸우고 죽고 한 무리들을 통하여 상속되어 왔습니다.

끝까지 견디면 사망 권세와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될 때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기도하지 말고 내 보좌에서 영원무궁토록 살자’ 하실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귀역사이기 때문에 첫째는 참부모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참자녀가 있어야 하고, 세째는 참형제가 있어야 하고, 네째는 참부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 이래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 `어화둥둥 내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말구유에 누인 예수의 모습을 보고 천군천사가 기뻐서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4천년간 고대하던 하늘의 왕자가 말구유에 눕혀지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자식은 자기 부모의 재산권이 있는 곳에서는 마음대로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아버지께서 지으신 땅위를 마음대로 걸어 다녔습니까?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뉘어지는 일이 왜 벌어졌겠습니까?

인간시조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은 참부모, 참자녀, 참형제, 참부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부모, 사탄의 자녀, 사탄의 형제가 되고 사탄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그렇습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을 반대방향으로 돌리려면 나치반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타락은 했을망정 나침반의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는 모양처럼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도 못 되어 있고 사탄의 자식도 못 되어 있습니다. 천지간에 대원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간부(姦夫)입니다.

아담이 완성했으면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의 실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부부가 되어 하나가 되었으면 해와는 하나님의 실체를 쓴 부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집 딸을 종 녀석이 겁탈한 것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딸인 해와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부모로 계셔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사탄이 인간과 혈통적인 관계를 맺어 먼저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사탄도 `내 새끼다’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이에는 양심이 있어서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탄은 인간에게 늘 공갈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과 혈통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자유만 주면 하나님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언제나 인간의 몸뚱이를 붙잡고 `가면 죽인다’라고 협박하며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종도 못 됩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참부모의 참자녀로서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었더라면, 그 인연은 누구도 끊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비록 사탄과 인연맺어졌지만 마음만은 하나님께로 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연을 맺으면 누구도 끊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탄과 인연맺었으니 그 인연만 끊어 버리면 됩니다.

사탄은 한편으로 인간을 원수같이 취급합니다. 인간은 사탄의 종도 못됩니다.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는 역사를 한 때가 구약시대입니다. 여기서 다시 종을 양자로, 양자를 직계 자녀로, 자녀를 형제로, 형제를 신랑 신부로 축복하여 참부모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참가정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찾는 것이 복귀입니다. 예수를 참부모의 자리에 등장시키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12-32
낙원에 가서도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
사탄의 종도 못 된 존재들을 하나님께서 종으로 삼으셨으니, 타락인간은 그냥 하나님의 종으로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끌어올려 참부모와 혈통적인 인연을 맺게 하려 하십니다. 이 인연을 맺는 날이 바로 끝날입니다. 흑세무민이 뭔지 압니까? 말세에 천지가 없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흑세무민하는 자들입니다.

어디에 참자녀, 참형제, 참부부가 있고 또 어디에 참부모의 자리에까지 나아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가정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직계가 됩니다.

예수가 땅에서 뜻을 이루었더면 육적인 골고다도 영적인 골고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갔기에 영계에는 영적인 골고다가 있고 지상에는 육적인 골고다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으면 영계에 가서 또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시험을 거쳐야 해요. 영계에서는 낙원이 최일선이고, 땅에서는 여러분의 몸뚱이가 최일선입니다.

복귀의 길은 평탄할 수가 없습니다. 1대, 2대, 3대를 거치면 더욱 가중됩니다. 여러분은 6천년 역사의 혈통적 죄의 총합실체입니다. 6천년 죄악사의 전시품입니다. 여러분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6천년의 죄가 엉클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 역사적인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30년간의 준비생활에서 무엇을 했는가? 역사적인 죄를 회개했습니다. 역사적인 실수, 역사적인 암이 되었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고 풀어야 역사적인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의 회개의 공으로 성도들이 들리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시대적인 죄를 회개했습니다. 유대교 성전을 중심삼고 이루어 놓은 제단이 이스라엘이라 할 때 시대적인 죄의 회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여 그들의 죄를 책임졌습니다. 그 다음은 미래적인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야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적이며 시대적인 죄를 청산하기 위해 회개했고, 미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가 어디로 갔는가? 죽음을 당함으로 그의 역사적인 회개의 공적과, 시대적인 회개의 공적과, 미래를 위한 싸움의 공적까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 후 지금까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낙원에 가서 다시 역사적, 시대적, 미래적인 죄까지 청산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 기도하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는 영적인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당신께서 쫓아내고 싶어하시는 사탄과 죄를 제가 쫓아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죄, 노아 가정의 죄, 모세의 실수 등, 이 모든 역사적인 죄를 예수가 30년 생애에 걸쳐 회개했는데, 그것이 다시 저끄러졌으니 그것을 회개해야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선조들을 대하여 `이놈들이….’ 해도 그들이 `예, 옳습니다’ 할 수 있어야 아담 대신, 노아 대신, 모세 대신 살아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흘린 땀과 눈물과 피는 그 시간이나 그 일대뿐만 아니라 4천년 역사와 온 세계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찌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어린 기도를 하고 낙원에 가서까지도 기도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심정까지 알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영광과 기쁨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천국은 날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골고다의 길을 거쳐서 가는 것입니다. 세계사를 보십시오. 종교사는 밑창에서부터 올라가고 세계사는 상류계급에서 하류계급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서로 올라가고 내려오다가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땅의 사람들에겐 역사적인 십자가의 역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역사적인 회개를 하려면 창조 당시의 영광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여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부활체, 실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나아간 노아의 부활체, 승리한 아브라함의 가치, 목적을 완성한 모세의 실체, 이상적 완성 실체인 예수를 기준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12-34
끝날의 성도가 거쳐야 할 3일 3년 30년 노정
예수는 4천년 역사의 열매입니다. 역사적인 고통과 시대적인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적인 고통까지 제거하여 행복의 문을 개방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심정을 알려주어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의 심정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 보아야 예수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모든 제자들과 이별한 입장에 섰었던 예수와 똑같이 어려운 자리에서, 그와 같은 어려운 고비를 극복함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모든 십자가를 거쳐 참부모의 가치를 가지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악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직계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만일에 12제자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 대신 졸지 않고 예수와 함께 통곡하고 함께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가 부활할 때 함께 부활하였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성신 강림도 필요없지요. 땅 위에서 그런 기준을 세웠어야 했습니다. 끝날의 심판은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와 십자가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졸지 말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필코 가야 할 길이 있으니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천당 가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현재는 하나님도 마음껏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천당입니다.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상에서 아버지를 부르던 예수의 대신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십자가로 갔으니 십자가로 오게 됩니다. 부활을 거치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죽지 않고 살아서 가야만 합니다.

선생님은 예수가 십자가를 질 때 함께 지지 못한 제자들을 대신하여 여러분들에게 그 길을 가게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3년 공생애와 같은 길을 걷고, 30년 준비생활과 같은 길을 걸어 예수가 탄생했던 위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모세를 중심삼고 이스라엘을 수습했듯이, 예수를 중심삼고 전세계를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끝날에는 예수가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수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3년 전도 기간에 그러한 입장을 대신해야 합니다.

예수는 30년 준비의 생애를 지내고, 3년 공생애를 거치고, 무덤속에서 3일을 거쳤습니다. 여러분은 반대의 경로로 3일, 3년, 30년을 거쳐야 비로소 `재생된 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3년 노정에는 3일 노정도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모두 지나 승리를 거두어야 영광과 기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