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3 to 11-331: 실체부활에 대하여

실체부활에 대하여
1962.04.17 (화), 한국 전본부교회

11-333
실체부활에 대하여
[말씀 요지]

오늘은 작년에 새로운 기념의 날로 정했던 ‘실체부활의 날’입니다. 이날은 후대에까지 기념하게 될 날인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란 명사는 기쁨을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이상은 모든 피조물이 실체적 가치를 갖추어야만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조만물 전체가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 소망적인 기준, 승리적인 기준, 최고의 영광된 기준에서 융합할 수 있었다면 말할 수 없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11-333
부활해야 할 나
하나님의 손길로 지어진 만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현된 만물, 그 영광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의 하늘과 땅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다. 창조의 동기와 목적도 이러한 것이 아니었는데 뜻하지 않은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의 동기와 목적을 유린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타락은 고통과 슬픔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고 인간들이 싫어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원수란 칼을 든 사람만이 아닙니다. 타락!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원수요, 만물의 원수요, 창조주의 원수인 것입니다.

이 원수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수천년 전 우리 조상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결사적인 투쟁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해서는 타락의 본거지를 발본색원하여 폭파시키고 짤라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지상인간과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결과적인 것을 두고 투쟁할 것이 아니라 타락의 본거지를 찾는 데에 제1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원수의 근거지, 타락의 원천을 찾아 하나님과 인간과 사탄의 3자 사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불행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선을 추구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세계를 향하여 자기의 가치를 내세워 ‘나를 부러워할지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려면 이 땅에서 자기 자체에서부터 혈통적인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원수입니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이르도록 해결하지 못했으니 존재하는 모두가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우리는 모든 경전을 살피어 실패의 역사들을 지적해 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상에 있어서 원수가 등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떠한 가정이나 사회환경보다도 내 개체가 원수요,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끝날에 있는 우리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심판의 한 날을 앞둔 이상, 먼저 나 자신을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부활의 인연이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를 보호해 주는 사회환경 역시 원수의 입장에 있습니다. 왜?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의 동기는 선을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시대적인 사정과 형편으로부터 도피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시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소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의 시조 이전단계까지 올라가 창조주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도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도피하는 것이 곧 사망세계에서의 인생행로입니다. 그런 길을 갈 때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비로소 참다운 사람, 참다운 사랑, 참다운 역사, 참다운 형제, 참다운 부모, 참다운 민족, 참다운 세계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눈 앞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이상인 참된 평화, 참된 자유, 참된 행복, 참된 이상, 참된 가치는 지금 우리 앞에 없습니다. 타락의 본거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제물은 될 수 있으나 제사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과 일반 사람들의 관점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11-335
실체부활의 기준
하나님은 본래 심정의 인연을 맺은 터 위에서 대하기를 바라셨는데 옛날 아담과 해와 그 밖의 어느누구 할 것 없이 그냥 상대적으로 천지를 호령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인연을 아직 어느누구도 맺지 못했기에 이것을 맺기 위하여 메시아가 왔었던 것이요, 그의 재림도 이 인연을 다시 맺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국가들을 그냥 이끌고 나가기만 하면 이상세계가 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어 내려왔습니다. 당대에서 보면 역사가 직선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사는 돌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돌게 하는 중심으로 오신 분입니다. 메시아는 역사의 원천과 직선을 그을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돌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참된 ‘나’를 제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된 자아, 곧 본연의 자아를 찾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은 예수 한 분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민족, 국가로 확대시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소망하는 참된 세계는 이어졌을 것입니다.

예수와 마음으로, 생활로, 심정으로 같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곧 메시아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나 생활로나 심정으로나 메시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메시아의 생활과 접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모든 환경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니 색다른 것을 목표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과 복귀, 재창조,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기는 거꾸로 가되 결국은 중심점과 접하게 됩니다. 고마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에 예수를 보내어 그의 생활과 접하게 함으로써 돌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구원섭리를 종결지으려면 4천년 역사의 원수인 사탄을 굴복시켜 고비고비 맺힌 그 한을 풀고 사탄과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붙드는 것은 그가 타락의 뿌리까지도 뽑아낼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준은 예수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할 때 심정, 인격, 실체가 다 타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와서 심정, 인격, 실체를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체와 인격을 부활시킬 기준은 세웠으나 심정을 부활시킬 기준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신랑 신부의 소망의 기준으로 남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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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부활의 단계
우리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과 인격과 실체가 하나 되어 하나님과 불변의 기대를 연결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 목적입니다. 예수는 양심의 구원 기준은 세웠으나 실체의 구원 기준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양심의 기준 위에 선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실체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재림역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당신의 대신 실체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걷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가서 형을 받지 않더라도 그대로 가치적인 실체가 되어야 그 기반 위에 예수가 재림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라는 소망과 주권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재림이 연장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의 제자 가운데 예수의 대신 실체가 될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때 재림 역사는 끝났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본연의 양심과 하나 되어 신랑 신부의 기준을 세우는 날이 재림의 날입니다. 이러한 기준 위에 예수가 재림하여 뜻을 이루는 것이 재림의 역사입니다. 실체부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 신부가 될 리 만무합니다. 삼위신의 소망은 재림하실 한 분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에 왔다간 모든 사람과 현재의 우리, 그리고 미래인의 소망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죽어 천당 가면 그만이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기준까지 가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도리입니다.

6천년 동안 이어 내려온 만물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요소, 그리고 인간의 수천만 줄기의 고통과 탄식의 조건들을 한꺼번에 짊어지고 사탄의 도성에 들어가 사탄을 굴복시켜야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 데는 자기 개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노정에 있어 온 선조들과 만물의 모든 고통의 조건을 해소하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타락했기에 복귀해 나아가려면 원칙적으로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자녀로, 자녀에서 신랑 신부로, 신랑 신부에서 참부모로 나아가야 합니다. 타락되었기 때문에 아랫급의 입장은 그 윗급에 대하여 제물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각각 윗급을 위하여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통틀어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실로 한이 많은 길입니다. 제사장은 당대의 책임만 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모든 기준을 탕감해서 사라지지 않고 나서야 제사장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땅에 와서 선조들의 심정을 더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시대적인 예수가 될 뿐아니라 역사적인 예수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도 역사적인 하나님을 모셔다가 시대적인 하나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실체부활을 할 수 있는 한 존재가 되려면, 그는 역사적인 기준을 탕감하고 현실의 싸움에서 쓰러지지 않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체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날이 실체부활의 날입니다. 이 기준이 세워져야 ‘슬픔의 세상이여 잘 있거라. 우리는 되돌아간다’ 할 수 있는 것이요, 실체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투쟁과정을 거쳐 예수의 소망인 신랑 신부의 기준을 완결지어야 비로소 우리가 소망하는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최후의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심정의 말씀을 못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정을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의 도리를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자녀의 도리와 부모의 도리를 가르쳐 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상과 축복의 예식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성경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기준을 완성하여 무엇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해야 재림의 한 날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예수의 사명을 인계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인계받고 오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이 이 세계의 주인공입니다. 실체부활은 심정까지 통해야 합니다. 그날은 천지가 돌아가는 날입니다.

실체부활의 날이 나오려면 실체부모가 있어야 하고, 실체자녀를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실체부활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주권을 세워야 합니다. 이 길은 죽든 살든 가야 할 길입니다.

11-338
실체부활을 하라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인간들은 죽음과 이마를 맞댄 생활을 해 왔습니다. 실상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도 죽음 이후였으니 우리 또한 짧게라도 십자가의 길을 거쳐서 부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는 당시 민족적인 기준에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까지 국가적인 십자가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 세계적인 기준에서 역사와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싸우러 오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절대 쓰러지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적인 기준까지가 문제입니다. 그 기준만 넘으면 자연히 세계적인 기준이 접해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의 고난의 기준을 넘어야 실체를 중심한 영광의 기준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부터 예수까지 4천년,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40대, 이 공식적인 기준에 따라 뜻의 완결도 40 고개를 중심삼고 좌우됩니다.

실체를 쓰고 영광된 부활의 날을 맞아 하나님 앞에 보답할 수 있는 때가 끝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의 이름으로 사탄을 때려 부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하는 자리는 눈물짓는 자리요, 역사적인 선조들이 잘 싸워 달라고 축복해 주는 자리요, 미래의 후손들까지 기대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 자리는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로, 양자의 자리에서 자녀의 자리로 재생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러한 재생의 인연을 세워 실체부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역사적인 기준을 횡적으로 세워 부활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죽음을 모르는 기쁨만을 노래할 수 있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산다는 소망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이 실체부활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