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3 to 11-331: 우리들이 해야 할 일

우리들이 해야 할 일
1962.04.13 (금), 한국 전본부교회

11-323
우리들이 해야 할 일
[말씀 요지]

서로 사정이 다른 여러분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복잡한 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그동안 고독한 때도 많았고, 고충도 많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각한 일도 많았을 줄로 믿습니다. 이제 10회 수련생으로서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수련회의 마지막 날을 맞이 하였습니다. 미래에 추억이 될 한 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하신 분들과 훈련부장, 식구님들 그리고 수련생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릴 말씀의 제목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늘에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땅에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또 인류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선한 일도 악한 일도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우주적인 명제가 있으니, 기쁨도 슬픔도 우리의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1-323
하나님의 일이 내 일이라는 것을 느껴야 할 때
모든 일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일의 목적이 있고, 사명분담이 필요하며, 그 일을 추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역시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떠한 존재물이든지 반드시 해야 할 책임분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것을 원하시는가? 천지의 주인공과 만물이 일치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일치되지 못하고 제각기 갈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인간의 소망이 달라졌고, 하나님의 행복과 인간의 행복이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생활과 역사를 통하여 절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 인간은 개인적인 일과 가정적인 일, 그리고 기껏해야 민족적인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이나 가정, 국가 정도가 아니라 천주의 문제를 걸어 놓고 일해 오셨습니다.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동시에 만물이 기뻐할 수 있는 기준을 향해 지금까지 일해 나오셨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고충이 있었어도 전혀 변동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수고하고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를 몰랐고, 하나님이 우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몰랐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개체를 위한 일보다는 하나님의 목적관과 일치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내가 할 일이요, 내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천주적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협조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선조들을 이 일에 가담시켜 오셨으나 이 일에 대하여 확실히 안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한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날 한시도 그 목적을 망각하거나 방심한 때가 없으셨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한 이래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여 왔으나, 하나님은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쉬임없이 수고하여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껏 개인을 위해 살아왔고 부모나 형제를 위해 살아온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이러이러한데 우리는 그 뜻대로 살지 못했으니 후회하고 반성하고 원통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마땅히 충성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못한 것을 뉘우치고 충성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인계받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결심이 없는 한 하늘이 축복해 주어도 감당치 못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을 내 일로 상속받을 결심을 해야 합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하며 느꼈던 하나님의 슬픔을 내가 느껴야 합니다. 과거에 찾아 세우지 못한 기준을 오늘날 우리가 찾아 세워야 합니다. 가인을 아벨에게 굴복시키는 책임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120년 동안 수고하는 노아를 일시적인 기쁨으로가 아니라 영원한 소망의 심정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노아에게 부족함이 없는 우주적인 사명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진대 노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뜻을 대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함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타격도 컸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주적인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상속받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를 거쳐, 곧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지나 창조목적이 종결될 시기가 박두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일을 내 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비록 개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개체로 보시지 않고 우주적이며 천주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일을 책임맡는 대신 존재로 보시게 될 것입니다.

11-325
우리가 책임해야 할 것
여기에 아버지의 크나큰 뜻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역사상의 어느누구보다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여야 할 때가 이때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이 역사적인 일일진대, 여러분은 아버지의 일을 상속받은 사람으로서 역사상에 왔다 간 어느누구보다도 큰 사명을 진 자신임을 느껴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 당시까지만의 사명만 하면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6천년 동안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할 일이 나의 할 일이라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 합니다. 또한 내 자체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예수님의 해원, 그리고 하나님의 해원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나는 역사적인 목적과 소망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실천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아버지는 슬픔과 고통과 불행의 아버지였고, 일찌기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불행 중의 불행을 겪어오신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행복의 길이 아니라 불행과 탄식의 길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불행과 탄식과 원한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과 소망에 넘치는 날을 하루도 갖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일을 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 탕감적인 제물의 길을 걸어오셨고, 그 어려운 자리를 지키며 홀로 일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임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의 일을 상속받은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행복을 노래하는 길이 아니라 탄식하던 아버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과 더불어 기쁘게 살기를 바랬으나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상속받은 나일진대 어떠한 일도 책임져야 합니다. 개인, 가정, 민족,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상세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기쁨의 책임이 아니라 탄식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상속받은 나로서 아버지의 슬픔과 불행을 책임져야 합니다. 사탄을 굴복시켜 무저갱에 가두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탄을 막기만 하셨지 심판을 못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심판하여 무저갱에 가둘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완결짓지 못하면 하나님께 결코 기쁨의 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우리에게도 본래의 기쁨의 날과 기쁨의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지 못한 자신임을 알았을진대 그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과 역경을 느끼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아버지의 일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부터 슬픈 곳과 억울한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천하는 아버지의 일터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 해도 아버지의 일터임에 틀림 없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쉽다면 좀 더 어려운 데에서 일하지 못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려운 자리에 동참해야 혜택의 자리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제일 어려운 곳에 가서 일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수련을 받고 나가는 여러분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고이고이 이 민족 앞에 분배하고 전해야 합니다.

11-327
알고도 행하지 못하면 탄식은 더욱 크나니
이제 우리가 뜻을 알았을진대 아버지의 일을 아버지의 일로 남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저끄러 놓았으니 후손된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땅에서는 몰랐다가 저나라에 가서야 알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한 탄식도 크지만 알고도 행하지 못하면 탄식은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크나큰 아버지의 일을 부디 여러분들만은 상속받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한 순간이라도 슬픔을 잊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기쁨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셨지만 그 일을 여러분이 대신하여 기쁨의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천상에 가서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서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많이 남겨 놓고 어떻게 아버지를 찾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대할 수도 없고 모실 수도 없습니다. 비록 책임할 수 있는 분야는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심정만은 삼천만을 넘어서 천하를 대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친 모든 충성은 이 땅에 뜻이 이루어질 때 우리를 거기에 갖다 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심정적인 면에서는 큰 일을 하는 사람이나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충성에 있어서는 누구의 것이나 같은 가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작은 이는 작은 이대로 아버지께 충성을 바치어 기쁨을 함께했을 때 그것을 어디에 갖다 놓아도 기쁨의 조건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지역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쁨의 기준에서 볼 때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나의 기쁨인 동시에 당신의 기쁨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소가 되고 지성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을 갖고 아버지 앞에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겨 주고 보여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알았지만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터전, ‘아버님 받으시옵소서’ 하고 바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알았습니다. 아버님의 일이자 내 일이요, 내 일이자 아버지의 일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승리적인 터전을 만들고 이것을 점점 확대시켜서 하나님의 동산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동산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내 개체가 행복해서는 안 됩니다. 내 개체를 바치어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기쁨을 주는 것도 좋지만 나를 위시한 가정, 곧 영원한 하나님께 속하는 최소단위의 기준인 가정적인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복귀의 목적은 사위기대를 완결짓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승리의 조건을 제시한 후에 내가 안식할 수 있는 터전, 곧 가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만족이나 행복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출발했습니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선지자와 도인이 왔다 갔지만 섭리적인 사명의 분담면에서 볼 때 허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만은 다르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 섭리의 길에는 하나님께서 흘리신 피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피눈물의 흔적은 천상에도 남아 있고 지상에도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역사적인 과거와 시대적인 현재와 소망적인 미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11-329
책임분담의 실체적 사명자
하나님께서는 복귀의 역사를 제1 이스라엘과 제2 이스라엘과 제3이스라엘을 통해서 해나오고 계십니다. 뜻적으로 보면 제1 이스라엘은 영계에 해당하고, 제2 이스라엘은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성도들에 해당하고, 제3 이스라엘은 소망의 아들딸을 의미합니다. 제1 이스라엘을 통하여 제2이스라엘이 나오고, 제2 이스라엘을 거쳐서 제3 이스라엘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1 이스라엘의 상속을 받으려면 모세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제2 이스라엘의 상속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원래는 그렇습니다. 40일 금식을 조건으로 시내산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였으면 모세가 모세 될 수 없고, 골고다의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저주하여 축복을 받지 못하였으면 예수가 예수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에서 볼 때 다시 오시는 주님 역시 결정적인 최후의 자리에 가지 않고는 축복의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하여 얼굴을 돌이키시던 비참한 자리가 아니고는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 때에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그리고 선생님과 같이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동참한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석판을 가지고 내려왔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피살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을 지키고 피살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체 역사, 즉 섭리노정은 한결같이 탕감조건을 세워 내려왔습니다. 곧 모세의 석판과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활의 성체를 인류에게 주기 위한 것입니다.

가정이나 종족이 하늘 앞에 서는 데는 언제나 축복의 조건을 세웠습니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적극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를 말세에 세워 주셨습니다. 책임을 다하겠사오니 안심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조건이라도 세워 놓고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미치게 됩니다. 축복의 계대(繼代)의 일면이라도 상속받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호소하면서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조들이 수긍할 수 있는 승리적인 존재로 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책임입니다.

이제까지는 조건적인 모심이었으나 끝날에는 실체적인 모심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성도들은 실체적인 모심을 해야 합니다. 조건적인 모심을 해서는 충신이 되지 못하며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미래의 책임분담을 완수하겠다고 맹세하는 실체적인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통일신도들이 가는 발걸음 앞에 ‘조금 천천히 가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서어서 가야 합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한 입장에서 하늘의 보내심을 받고 승리의 발판을 세워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면 지역, 세계면 세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한 개체만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아버지께 ‘길이길이 영광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가는 나이기에 내 손은 내 손이 아니라 삼천만을 대신한 손이요, 세계 인류를 대신한 손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 손은 아버지의 손으로 선조들이 자랑하고 후손들이 기념할 수 있는 손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브라함의 모습, 모세의 모습, 예수의 모습, 하나님의 모습까지 다 있어야 합니다. 내 주관권내에 있는 것은 사탄이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불변의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이 몸은 아버지의 몸이라고 해야 합니다. 때문에 사탄이 덤벼도 까딱하지 않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일을 할 때는 아벨의 제단을 대신하는 마음으로, 노아의 일을 대신하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함의 타락을 대하시며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하는 심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하여 나만은 함이나 다른 선조들같이 실패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핍박을 받되 ‘역사적인 누구 누구를 대신하여 핍박을 받습니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승리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종중의 종, 즉 종 가운데에서 제일가는 종이 되어야 하고, 양자 중의 양자가 되어야 하고, 아들 중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식구들은 고생을 하더라도 자기가 속한 도에서 ‘내가 제일 고생하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지구를 책임진 지구장이 사탄에게 쓰러지더라도 나는 사탄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지구장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1-331
축복은 고생하는 사람이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은 많았으나 기쁨은 적었습니다. 끝날은 고통과 기쁨, 불행과 행복이 같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복은 편안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못 먹고 애달프고 눈물 흘리는 자에게 오는 것입니다. 심정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에 따라 축복은 커지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행동이 천추만대의 후손에까지 미치는 때가 이때입니다. 고통의 자리를 거치지 않은 자에게 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고통에 어리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자리가 아니면 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종 중에도 가장 고통스러운 종의 자리, 양자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양자의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가장 불쌍한 종의 자리보다 가장 불쌍한 양자의 자리를 거쳐야 더 많은 복을 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사는 사람보다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기준은 제일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여러분을 고생하는 자리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 분야에 있어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종 중의 종이 되고, 양자 중의 양자가 되고, 아들 중의 아들이 되어 후손까지도 공인하는 영원한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책임을 다한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종으로 가고, 양자로 가고, 아들로 가고, 성신과 예수의 자격으로 가고, 최후에는 아버지로 가야 합니다. 아들딸의 자리까지는 자기를 위한 탕감분야요, 성신과 예수의 자리는 아버지를 위한 탕감분야입니다. 아버지의 책임까지 다해야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대해 부족함이 없는 자신이 됩니다.

길을 가는 데는 협조를 받지 마십시오. 각각 흩어져서 책임맡은 곳으로 갈 때는 이곳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를 갖고 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힘차게 나서야겠습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하늘땅을 위해 싸우겠노라 맹세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