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15 to 11-321: 심정만이 하늘과 동반할 수 있다

심정만이 하늘과 동반할 수 있다
1962.03.23 (금), 한국 전본부교회

11-315
심정만이 하늘과 동반할 수 있다
[말씀 요지]

인간들은 어떤 한스러운 일이 있으면 형제나 자녀, 혹은 동지를 붙들고 의사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한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무한한 고통과 슬픔과 탄식 속에 계시는데 아직까지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지 못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11-315
자신의 불행을 말씀하시지 못하셨던 하나님
인간에게는 한이 있다 해도 1대의 한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푸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한은 역사적인 한이요, 하늘의 원수는 역사적인 원수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제아무리 큰 한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하늘 앞에 내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종족, 혹은 민족을 붙들고 한을 토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왜? 이 세계가 원수의 세계요, 인간들이 원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고통이나 불행이나 억울함이 있어도 인간 앞에 ‘내게 이러이러한 억울함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원수에게 찢기는 원통함과 고통스러움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 앞에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정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정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깨깨(충분히 또는 심히, 《평북방언 사전》참조) 불행해야 합니다. 전세계 인류가 다 깨깨 불행해야 합니다.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워서는 아니 될 하나님을 인간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이 땅의 인류는 고통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불행을 갖고 계십니다. 이 불행을 청산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끌고 심판의 한 날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누가 앞장을 서야 할 것이냐? 하나님을 안 사람이 앞장을 서야 합니다. 먼저 뜻을 안 사람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평화를 노래해야 할 하나님이 어찌하여 양을 잡고 소를 잡아 드리는 제물을 받아야 하는가? 참다운 도라 할진대 제물의 과정을 밟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 비참한 자리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비참을 당신의 것으로 연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쓰러지시는 대가로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세계적인 시대로 넓혀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적인 뜻을 가지고 쓰러지셨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동반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은 책임지고 나오십니다.

기독교에서는 끝날에 7년대환란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자는 행복을 노래한다거나 부러움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7년 대환란은 가정적인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것이니 세계적인 심정을 가지고 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오시는 분이 끝날에 오실 메시아입니다.

하늘 길을 가는 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입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행복이니 평안이니 하는 명사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늘이여, 온 세계 인류여, 쳐라. 과거의 역사를 통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짓는 심정을 걸어서 쳐라. 과거의 원수와 현재의 원수와 앞으로 나타날 원수까지, 나아가 영계의 사탄까지도 전부 동원하여 쳐라’ 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불행을 탕감하려면 주위환경이 총동원하여 나를 몰아쳐도 그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자가 됩니다. 사탄들이 있는데 어찌 불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쓰러져도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생활입니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아벨, 모세, 예수는 모두 효자로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아담 가정이나 노아 가정이나 아브라함 가정,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붙잡고 쓰러지지 못했습니다. 불행의 왕자가 되더라도 불행이라는 명사에 깔려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불행의 명사를 깔고 하늘을 붙들고 쓰러져야만 천적인 뜻이 이루어집니다. ‘내게서 모든 불행을 청산하시옵소서’ 해야 거기서부터 민족적인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쓰러지되 하나님을 붙잡고 쓰러져서 심정의 터전을 남겨 놓아야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쓰러져도 소망의 일념을 가지고 ‘하나님’ 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새로운 시대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11-317
심정과 탕감복귀
지금 때는 이념주의시대요, 세계주의시대입니다. 자녀를 중심삼은 가정이 종족, 민족을 위하는 때가 아니라 세계를 위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이며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세계와 오늘의 나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차이가 크면 클수록 고통과 불행은 커지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불행이 탕감됩니다. 그냥은 안 됩니다.

과거와 현실을 두고 볼 때 앞으로도 불행의 요소와 대결하게 될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불행과 고통을 느끼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불행이 크면 클수록, 즉 그 불행이 세계적이거나 천주적일수록 복된 시기가 빨리 돌아옵니다. 현실의 복잡한 것들이 모두 지나가야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굶주리고 있고, 또는 억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바라시던 세계는 이러한 세계인데, 오늘날의 세계는 이렇습니다’ 하는 탄식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물의 극치점을 넘어가야 합니다. 심정의 골수는 직선을 그으면서 외적으로 환경을 넓혀 나왔습니다. 개인적인 기대 위에 가정, 종족, 민족, 세계적으로 환경을 넓혀 나오면서 하나님의 심정은 그 사명을 맡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탕감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심정의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첫째는 타락의 심정, 둘째는 복귀의 심정, 세째는 부활의 심정, 이 3단계의 심정을 알아야만 합니다.

멋진 하나님의 이상은 깨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치적으로 보면, 역사상의 모든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이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재림은 세계사적인 왕자가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복중의 아이는 어머니가 겪는 모든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은 사람입니다. 제아무리 내가 누구니 누구니 해 보았자 다 죽은 자들입니다. 타락의 심정을 모르고 복귀노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심정이 현실과 미래의 생활의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이러한 심정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늘의 한이 있다면 그것은 심정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종족, 민족, 세계 그리고 하늘땅을 대신한 심정의 소유자가 필요합니다. ‘너는 누구냐’ 하면 ‘나는 역사적인 아담이요, 해와요, 노아요, 아브라함이요, 또 누구 누구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타락의 심정과 복귀의 심정과 부활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나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무엇으로 심판하시겠습니까? 심정을 가지고 하십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나와 같은 아들딸이 되었느냐?’ 하며 심정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에도, 어느 누가 ‘아버지 앞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느냐’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을 풀 수 있는 실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을 풀 수 있는 실체다’ 라고 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는 개인이로되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실체입니다.

만물을 주관하라는 것은 아무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인 존재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 전의 심정과 창조 후의 소망의 심정을 가진 자의 주관을 받으려 합니다. ‘삼라만상 모두는 내 심정권내에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내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 피조세계와 심정을 통하여 인연을 맺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야곱의 노정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노정도 문제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인간세계가 빈대하고 하나님이 버린다 해도 나는 변할 수 없습니다. 변치 않을 것을 하나님의 심정과 맹세합니다. 나는 변치 않습니다’ 해야 심정적인 탕감이 됩니다.

예수가 당한 십자가의 고통을 실체적으로 당할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비원리적인 고통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생각하지도 않고 소망하지도 않는 것을 누가 갖다 주겠습니까?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려 역사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한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겠습니까? 심정입니다. 길을 걸어도 아담, 노아, 모세, 예수,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11-319
탄식하는 만물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뜻을 부탁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일면이라도 제게 책임지워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 봤습니까? 해 봤느냐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정과 모세의 심정과 예수의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진 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역사적인 그 곡절의 사정을 걸고 심각한 기도를 해 봤느냐 말입니다. 천지를 밝게 비추며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거나, 어두운 밤하늘에서 총총히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 역사적인 한과 소망을 느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햇빛이나 달빛을 보기에도 미안해하십니다. 아들을 세워 만물을 주관하고 축복해 주신 것이 거꾸로 되었으니 하나님이신들 면목이 있겠습니까?

만물이 탄식한다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자기들이 고통스러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기에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팔을 들어 사방을 휘둘러 부딪치는 것중 어느 것 하나 한을 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슬퍼할 줄이라도 알아야겠는데, 그러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탄식권을 누가 풀어 줄 것이냐? 하나님 혼자서 못 하십니다. 만물도 못 합니다. 사탄은 더욱 못 합니다. 사탄은 파괴만을 하지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슬픔의 동지라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입니다.

여러분은 남이 안 가는 길을 무엇하러 왔습니까? 이 길은 우리가 안 가면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가야 하는 심각한 길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합니까?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길을 가야 해요.

여러분, 만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입니까?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밥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밥에게 ‘너 하루 세 끼를 봉사하는 데 마음이 시원하냐’고 할 때 `아! 억울합니다’, ‘네 동지는?’ ‘모두 같습니다’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그 밥들이 일제히 파업을 한다면 이 소란한 세상은 일시에 조용해질 것입니다.

밥은 인간을 대하여 말할 것입니다. ‘남의 신세만 지는 무가치한 인간들아! 너희들은 아담 해와 때부터 내게 신세만 져 왔다’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밥이 동맹파업을 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밥만이나 합니까? 밥만도 못하지요. 사람 같으면 ‘이놈의 인간들아’ 했을 것입니다. 또 공기를 불러서 ‘나와의 인연은’ 하고 물어보십시오. ‘온통 사람의 안팎을 점령하고 있노라’ 고 할 것입니다. 만일 이 공기까지 동맹파업을 하는 날엔 전세계의 인류가 7분이내에 죽게 될 것입니다. 하다못해 장마 끝에 질퍽대는 진창도 큰 소리를 칠 것입니다. ‘내 꼬리는 전세계에 뻗쳐 있으며 지구의 3분의 2는 내것이다’라고. 땅도 항의하며 본전을 찾아간다 할진대 세상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태양도 같습니다. 밥을 먹을 때 찬송도 안 하고 인사는커녕 소식도 없이 먹는다면 도둑놈입니다.

만물을 내 것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 때 가능한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별한 가치를 갖고 살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만물보다 먼저 있었고 이후에도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면 무엇보다도 앞설 수 있습니다. 중심, 즉 뿌리와 인연을 맺고서야 비로소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심정입니다. 이 심정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심정을 가지고 호령할 때에 만물은 ‘예 지당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만물도 왜 슬퍼하느냐? 그것은 이 심정의 인연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끊어진 심정의 인연을 잇기 위한 것이 복귀역사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당신은 내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부정할 논리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자간의 심정적인 인연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11-321
아버지의 심정을 소유하라
세상이 다 갈라지지만 신앙자들은 연연히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심정이 재현될 한 날을 바라보고 역사하고 계시니, 우리도 그러한 심정을 가져야 하나님의 해원역사에 동참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해원역사는 오직 심정으로만 가능합니다. 다른 어떤 것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인간은 본래 우주의 왕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것인 하늘과 땅은 내 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해야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점령하면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만물 만상을 품어야 다른 어느 누구도 점령할 수 없게 되어, 거기에서 비로소 천운이 움직이고 천하의 복이 머물게 되는 것이며, 에덴 동산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 또 하늘과 사람과 땅, 이 셋이 심정적으로 합친 곳이 지상의 낙원입니다. 심정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역사적인 사정과 심정이 연결된 자리에서 고통스럽다 억울하다 분하다 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 가지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고통도 한으로 삼지 말고 심정으로 소화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러하셨으니 여러분도 심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정복하되 칼이나 주먹이 아니라 심정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기를 가지고 정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직까지 위신을 세우지 못하고 계시니, 오늘 우리들도 온유하고 겸손하게 못난이같이 머리 숙이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승리의 터전이 되었고, 예수님의 희생은 후대의 복된 자리가 되었습니다. 벌거숭이가 되어서라도 이 세계를 정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의 재산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재력도 명예도 아니요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벌거숭이의 몸으로 하나님의 심정의 상대가 되어 황무지 같은 원수의 세계에서 모진 바람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잠을 자도 자기 잠으로 자지 말고, 밥을 먹어도 자기 밥으로 먹지 마십시오. 식구의 것으로, 아버지의 것으로, 세계 30억 인류를 대신해서 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불행이라는 두 글자에 깔리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세계적인 싸움터를 이겨 나가야 하는 것이 통일교도입니다. ‘인간들은 몰라도 내 아버지는 아신다’는 역사적인 심정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의 가치는 역사상의 그 누구, 어떠한 충신의 것보다도 더 값비쌀 것입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아버지, 눈물지으시는 아버지를 찾아 모십시다. 행복을 노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하나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신의 도리입니다. 한술의 밥을 먹고 쓰러지는 자는 시대적인 대표자가 될지 모르지만, 밥 한술 못 먹더라도 하늘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자는 역사적인 가치 위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성 프란시스’의 성업을 통해 알고 있듯이 만물, 즉 온 피조물이 옹호해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물론 그동안 여러분들은 핍박도 많이 받았을 줄 압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으니 말입니다. 대신 아버지를 소유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소유하십시오. 금년 일년은 중대한 기간입니다. 명심하고 열심히 일해 주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