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9 to 11-287: 보여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

보여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
1962.01.03 (수), 한국 전본부교회

11-279
보여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
[말씀 요지]

1962년, 이 해는 역사적으로 두 번 다시 없을 해입니다. 그러면 이 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을 몇몇의 통일신도들만이라고 해원해 드리겠다는 목표 아래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고 또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다.

11-279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금년에는 여러분들이 사탄의 참소를 피하여 하나님의 염려의 대상이 되지 말고 전후 좌우 상하 안팎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해 오시면서 자랑하고 싶어하시던 소원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늘과 땅, 온 피조만물 앞에 인정받고 더 나아가 이 땅과 사탄세계에까지 보이고 자랑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한 해에는 그것을 실천하고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창조이상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온 피조세계를 대하여 당신의 심정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온 피조세계 앞에 보여 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만물은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그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만물의 주인공인 인간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만물과 인연을 맺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종의 자리로부터 시작하여 양자의 자리를 거쳐 자녀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까지 끌어 올리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한스러운 타락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만물과 인간과 하나님이 일체의 인연을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요, 인간의 기쁨이 만물의 기쁨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을 만물세계와 천사세계에까지 자랑하고 보여주고 위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느누구나 창조 당시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성품이 있기에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서로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고, 인간은 자기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주고 받는 기쁨입니다.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데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끌어올리는 역사를 하십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협력하면 복귀섭리는 쉬울 터인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정을 걸어 놓고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을 찾기에 무한히 애써 오셨으나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반기를 든 사람은 있었으나 하나님을 환영하고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가정, 민족, 국가, 세계에까지 뜻을 넓혀 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외적으로 받으신 고충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국가나 민족도 평면적으로는 고생을 했노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생했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상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왔다 간 모든 인간을 다 총합해 봐도 뜻을 위해 수고하고 협조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끌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책임지고 친히 수고하시며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영광으로 나타나실 존재입니다. 인간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 되는 것이 창조의 이념인데 그 이념은 간 곳 없고 하나님께서는 처참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인간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처참한 개인이나 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었으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그 반대의 모습으로 계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녀인 인간에게 맡길 수 있고, 인간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입장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자녀들 앞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고통과 사정을 통고하고 싶지 않고 무한히 애쓰는 슬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하나님입니다.

11-281
불쌍하신 하나님
이 땅의 수많은 신앙자들은 자기의 소원을 위하여 주님이 오실 영광의 한 날을 기다리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분을 보내시기까지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자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자기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들라 하면 들어야 하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책임자라도 그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생에 대하여 동정하기에 앞서 그들을 보내기까지 하나님의 고생이 더욱 컸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보게 되는 이면에는 이미 하나님의 고생이 있었고, 우리가 소원을 이루는 배후에도 이미 하나님의 고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하기까지 하나님은 몇천만 번 패자의 쓰라린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이 엉킨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리움을 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까지, 우리를 승리의 그 한 자리에 세우기까지 하나님은 제물이 되어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누리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고난의 길을 거쳐 오셨기에, 우리도 고난의 길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영광을 누리실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수고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 또한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지 않았습니다.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자신의 수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덮어 내려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셨는가? 무한히 슬픈 모습이었습니다. 피조만물세계에 하나님의 고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랑을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하나님의 심정이 여지없이 유린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든 사람이 있었느냐? 민족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반대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은 있었어도 책임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책임을 다하라고 밀어 준 사람은 더욱 없었습니다. 책임을 해보려한 사람마저 꺾여 넘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분한 마음에 당장 심판해 버리고 싶었으나 매번 참으셨습니다. 아브라함까지 2천년, 민족복귀의 400년, 국가복귀 2천년을 참아 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뜻을 위해 염려할 때에 그가 헐벗는지 입는지 굶는지 먹는지 염려하고, 외로울 때에 위로해 준 사람이 있었는가? 모두가 강탈을 했지 안식의 터전을 제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죄상의 대가를 받는다면 무엇 하나 남아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 하나의 개인을 심판할 때에, 나는 개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심판할 수 없다고 변명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처량한 일입니까?

개인을 위하여 나간다면 다 꺾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나가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개인을 걸고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은 쓰러져도 그 개인을 보낸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너는 개인적으로 대하지만 나는 우주적으로 대한다’ 하시기 때문에 사탄이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탄과 싸우는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정을 고하면 물론 들어주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사정을 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붙잡고 가정을 대하시고, 가정을 붙잡고 민족을 대하시고, 민족을 붙잡고 세계를 대하십니다. 이렇듯 한 단계를 넘어서서 대하는 심정적 발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심정적 발판에 의해 가정을 대하다 그 가정이 쓰러지면 다시 개인을 세워 역사하시는 수고를 계속해 오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그 고통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붙들고 이 현세와 싸우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땅에 얽매여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하시니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11-283
사탄을 굴복시켜야
때가 가까와 올수록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무한히 슬픈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굴복시켜 하나님을 옹호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몰리고 쫓겼으나 이제는 난관 앞에 몰리거나 쫓겨서는 안 됩니다. 죽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과 인연의 형태는 옛날과 마찬가지이지만 죽어서도 안되고 밀려나서도 안 됩니다. 왜?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손길을 느껴야 합니다. 개인을 붙들고 가정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리기 전에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사정을 통하고 분한 모든 것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인간의 무엇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체는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존재가 못 됩니다. 타락하여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께서 그토록 비참한 모습을 하고 계시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소원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영광 가운데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제일 험한 곳을 안내하더라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탄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도 서슴지 않고 가야 합니다. 사탄들을 따라가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인간이 최후의 고비를 돌파해야 하나님도 비로소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수 있습니다.

조건을 세워 사탄을 쫓아 낸다면, 삼천만을 녹여내던 사탄은 어누누구도 데려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다시 소망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지극히 바라십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6천년 동안이나 심판하시지 못했는가? 사람 때문입니다. 무조건 심판하면 사탄이 ‘죽여 주시오’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없어서 심판을 못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세워 인간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들어 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원수를 갚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아들이 갚아야 합니다. 원수는 자기 자신이 갚거나 그의 아들이 갚아야 합니다. 예수가 못 했으면 그의 아들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아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끝날에 예수를 세우지 못하고 슬픈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슬프신 아버지십니다. ‘불쌍하다 억울하다’ 하는 말은 하나님을 두고 해야 합니다. 슬프다, 분하다 억울하다 하실 분은 오직 아버지 한 분이십니다.

처참한 아버지 앞에 참소하는 사탄을 붙잡고 호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옥의 밑창으로 갈 것입니다. 거기서도 몰아내면 무저갱(無底坑)으로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오랜 역사를 통하여 싸워 나오신 아버지, 모셔야 할 아버지, 상처 입으신 아버지를 위해 좋은 군마를 대기시켜 놓고 ‘아버지, 이제 오십니까?’ 하며 맞이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잘 입고 따라오는 아들보다, 못 입었어도 자기를 따르고 모시는 아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다가 화가 날 때 화를 풀어주고 저주를 내리기 전에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는 이가 메시아입니다. 슬픔과 억울함과 분함을 하나님과 함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 앞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느냐?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피조만물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탄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사적인 고통을 받은 사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팔이 부러지더라도 가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과 분함을 청산할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슬퍼하지 말라, 소망을 갖자’ 하고 나갈 때 민족은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년, 이 해는 뜻적으로 볼 때 중요한 해요, 하루 하루가 중요한 날들입니다. 예수가 넘은 한 고비를 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는 선두에 나서서 싸우셨습니다. 예수의 사상을 상속받아 하나님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신앙자, 끝까지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신앙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을 중심삼고 최후의 결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통일신도를 중심삼고 그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분하게 만든 원인자가 우리의 선조요, 더 나아가 사탄이니 복수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대신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일 불쌍한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복귀의 심정과 소망의 심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의 심정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러분의 소망의 심정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사탄을 밀어 내기 전에는 하나님의 소망의 심정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11-285
하나님 대신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이 투쟁은 6천년 인류역사 이래 최고의 투쟁입니다. 지금 이 때는 자기 아버지가 죽어간다 해도 그 아버지를 붙들 여가가 없는 절박한 때입니다.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하나님이 ‘네가 내 대신 악을 치는구나, 네가 내 대신 핍박을 받는구나, 네가 내 대신 피땀을 흘리는구나’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보다도 더욱 용감하게 싸워야 하나님께서 ‘오, 과연 너는 내 아들이구나’ 하십니다. 이렇게 싸우고 돌아와서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했지요? 그는 영적으로 다 이루었다 했지만 우리는 육계에서 ‘다 이루었다’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보여주고 자랑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비통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나 사람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서글펐던 역사적인 내력을 분하게 여기고 아버지 대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믿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무엇을 보여드려야 하느냐? 복귀의 심정, 소망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대신 사탄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참아들딸, 참부모, 참가정, 참민족, 참세계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인 천상천하를 주관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려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모셔보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이 한은 내 한인 동시에 하나님의 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이 걸렸지만 그 터전 위에 있는 우리는 6년이나 6개월, 혹은 6일이라는 수리적인 기간에 걸쳐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민족만의 것이 아니고 전세계의 것이니 하나의 민족에서 그치지 말고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모인 무리이며 무엇을 위한 역군인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모인 무리입니까? 아닙니다. 사탄과 싸우기 위해 모인 무리입니다. 우리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싸우면 사탄은 도망갈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책임진 무리입니다. 우리는 세계사적인 종적인 슬픔과 고통을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이 3년은 짧은 기간이지만 중요한 노정을 형상적이며 상징적으로는 걷는 기간이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잘 넘겨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기 싫어하는 길을 가는 데 선두에 서고, 세계의 민주주의 진영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데 선봉이 되어야 합니다. 복귀적인 심정, 소망적인 심정을 가지고 가다가 쓰러지면 육신은 사탄이 끌고 갈 수 있어도 정신(영혼)은 끌고 가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점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영광의 시대로 들어가야 합니다. 계속 싸워야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행복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가운데 내부에서는 자리를 정리해야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최고의 고통을 겪으며 사탄의 최일선을 붕괴시켜 우리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해야 합니다. 한 쪽에서는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이고 한 쪽에서는 승리적인 영광의 모습을 자랑해야 합니다.

11-287
승리의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자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 개인적인 싸움이 끝나면 가정적인 싸움, 가정적인 싸움이 끝나면 종족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종족적인 싸움이 일어나면 문제는 다릅니다. 내적으로 개인적인 싸움, 가정적인 싸움이 끝나면 더 이상 외적으로만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찾아진 개인이 있고 가정이 있으니, 이런 환경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가 싸우는 동시에 내적으로 자랑할 수 무엇을 가져야 됩니다. 보여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져야 됩니다. 최일선이 후방이 되고 점령지대가 넓어지며 내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야곱을 세우시고, 모세를 세우시고, 예수를 세우시어 종적으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이제 끝날에는 개인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 가정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한 가정, 종족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한 종족을 횡적으로 찾아 세우십니다. 이것이 어느 한도까지 차면 세계는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삼천만 민족 가운데에서 추방됩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기 위하여 싸우고,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죽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딸로 죽습니다’ ‘당신이 찾으시는 아들딸을 위해 죽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아들딸로 자랑하시고 축복을 해 주십니다.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와 생각해 봅시다.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랑은 싸워서 승리한 다음에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랑하면 사탄이 참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형의 아버지 대신 싸워 유업을 상속받고, 오시는 실체의 참부모 대신 유업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금년의 표어는 ‘보여 드릴 수 있는 자가 되자,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입니다. 도망가는 사탄을 어디까지라도 쫓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하시고 가정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하시니, 이것을 위해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계와 육계를 연결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됩니다. 싸움에서 이겨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 가정의 복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1962년은 보여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싸울 때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또는 하늘 가정을 중심삼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해야 합니다. 싸워도 가장 고생스러운 자리에서 싸워야 합니다. 제일 어렵고 힘든 노동, 혹은 거꿀잡이로 왕거지로부터 시작하여 꼭대기를 눌러 굴복시켜야 됩니다. 부모와 합동작전을 해야 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합력하여 전도해야 할 때입니다. 부모와 자식, 한 가정이 총대를 나란히 하고 싸워서 천적인 가정, 종족, 민족을 이루어 온 세계를 복귀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가정을 중심삼고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낙망하면 그 상처는 가정에 미치게 됩니다. 여기서 밀려 나가면 마지막입니다. 통일신도가 가져야 할 오직 하나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 심정에는 하늘과 땅이 왔다갔다 합니다. 세상에서 보기에 우리는 바보같이 보일 것입니다. 돈을 써도 심정적으로 하늘편에 이익이 될 수 있게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여주려면 고생의 최고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고생은 혼자 하지 말고 부부끼리, 식구끼리 해야 합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고생할 때입니다. 금년에는 민족적으로 세계 앞에 보여줄 수 있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세계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