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 to 9-124: 하나님의 축복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축복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이냐
1960.04.24 (일), 한국 전본부교회

9-92
하나님의 축복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이냐
마태복음 10:32-39, 22:1-14, 22:34-40

[기 도]

이 시간도, 아버님, 당신의 심정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 축복을 받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에 몰려왔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았사옵고, 아버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윤곽이나마 알았사옵고 아버님의 애달픈 심정의 부분부분을 체휼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전체의 뜻을 품으신 아버지의 그 심정을 몰랐고, 전체의 관을 몰랐고, 전체적인 체휼을 저희들은 하지 못했사옵기에, 부분적으로 즐기는 입장에는 섰으나 전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입장에는 서지 못했사옵니다. 이러한 저희를 두고 하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가 하는 것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려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자녀들이 성숙하여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고대해 오셨사옵니까? 그러나 역사노정에는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승리자로서 사탄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없었음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그러한 모습이 저희의 그리움의 표준이요, 저희가 바라는 소원의 표준임을 당신도 아시옵니다.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빼앗길지언정 그 한 모습만이 저희의 전소유로서, 저희의 전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서 높이고 그리며 나온 당신의 아들딸들이었사오니, 이제 좁은 마음을 열고 흩어진 심정을 수습하여 당신의 제단 앞에 드릴 수 있는 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당신이 찾으시려던 본연의 대상자로서, 당신이 품고 싶어 하셨던 자녀로서 그 마음과 더불어 즐기시면서 품으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해 주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지금까지 바라온 소망이요, 목적이며, 또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복귀의 노정인 것을 저희들이 아오니, 오늘도 내일도 이 표준을 향하여 나아가 싸우게 해 주시고, 싸워도 싸워도 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또 싸울 각오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지쳐 있거나 또 지치는 한이 있더라도, 딛고 일어서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인 것을 확실히 아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의 손길로 저희의 뒤를 보살펴 주시고 품어주시는데 저희 자신을 놓고 생각하게 될 때에는 서럽기 짝이 없사옵니다. 저희의 선두에 아버님께서 서시지 못하고 사탄이 서 왔던 것을 아옵고, 아버님께서는 저희의 뒤를 따라오시면서 저희들의 처량한 모습, 상처입은 모습을 보시고 눈물지으시며 오늘날까지 역사노정을 지켜 주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제 돌아서서 사탄을 원망하고, 아버지를 품고 자기의 사정과 역사적인 사정을 다 알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바라며 여기에 모였사오니, 이 시간 약속하여 주시옵고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심정을 통하여 저희에게 훈계하시고 싶었던 것을 이 시간 훈계하여 주시옵고, 권고하고 싶으신 말씀을 내려 주시옵소서. 멀지 않은 종말시대의 성도로서의 자격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아버지, 복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스러운 복귀의 한 고비를 넘고 아버지의 영광의 그 한날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약속하신 주권을 세워 길이 길이 기쁨과 영광이 가득찰 수 있게끔 승리의 방패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첨석하지 못한 식구들과 사방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같은 은사의 손길로 품어 주시옵고, 그들에게도 축복을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남아진 시간을 아버님 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94
말 씀
타락 이전 우리 조상들은 만물의 주인공으로서 자격을 부여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9-94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지 못한 인간이 걸어온 역사
그러한 축복이 옛날 우리 조상 앞에 내려졌는데도 오늘날까지 이 땅에는 하나님의 그 축복대로 온 하늘 땅을 주관한 자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 축복이 이루어졌다면 이 세계는 탄식의 세계가 되지 않았을 것이요, 고통의 세계가 되지 않았을 것이요, 인류는 한의 세계에서 허덕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연고로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비참한 역사노정을 허덕여 나왔습니다. 어떤 역사를 살펴보아도 거기에는 슬픔과 고통의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엮어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 나온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생각할 때,사람은 복된 자리를 잃어버리고 복되지 못한 자리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복된 자리가 아니라 복되지 못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복한 자리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존재의식(存在意識)에 있어서 생애의 가치를 존중시하면 할수록 무엇과 인연맺고자 하느냐? 기쁨의 요소, 행복과 자유의 요소, 무한한 해방의 요소와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실제생활에 있어서나 양심생활에 있어서 잘 체험한 사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 중의 사실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성현들과 많은 도주(道主)들도 이것을 개척하기 위하여 싸워 나왔지만 이러한 참이상의 요소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직까지 이런 기준을 찾아 세우지 못한 우리는 비애와 탄식의 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아니고, 인간을 세워놓고 모든 피조만물을 주관하며 살도록 축복해 주셨던 목적이 아님을 여러분이 느껴야 됩니다. 목적하지 아니한 세계가 이루어졌으므로 되어야 할 세계가 되지 못하였고, 인류역사는 그 본연의 세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구원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에게 구원이란 명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간들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본연의 상태에 있지 못한 것을 다시 본연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표 밑에서 막연하지만 어떤 목적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표와 우리 인간이 바라는 목표가 우리의 심정 기준에서 완결되어 기뻐하며 송영을 드릴 수 있는 한 장면이 이 천지간에 벌어진다면, 그때부터 인류세계는 행복의 세계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일 것인가? 그런 곳이 어디일 것인가? 그런 세계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가? 인간은 그러한 때와 곳을 향하여 수시로 자기들도 모르는 싸움을 계속해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선조들의 슬픈 후손들입니다. 반면 하늘은 잃어버린 사람을 재창조해 나오시고, 잃어버린 세계를 회복하는 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랑스럽게 품에 품으시고 소망의 심정을 기울여 오늘이야 내일이야 하며 바라보시던 우리의 참조상, 죄를 모르던 그들과 더불어 꿈을 꾸고 그들과 더불어 창조이념을 이룰 날을 그리시던 하나님의 심정, 그 심정은 오늘날 인간세계에서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이념과 세계관은 우리들이 꿈에도 헤아려 볼 수 없는 놀라운 심정이요, 놀라운 이념이요, 놀라운 세계관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이념적인 심정의 세계와는 하등의 인연이 없는 것 같은 입장, 그 세계는 영원히 가버린 것 같은 입장에 놓여진 채 허덕이는 인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축복하시던 그 축복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를 붙안고 뒤넘이쳐 나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9-96
목적세계를 향하여 역사를 끌고 가시는 하나님
인류역사는 사람들끼리만 움직여 온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계획 아래에서 끌고 나온 역사가 아닙니다. 시기와 시기, 시대와 시대, 세기와 세기를 거쳐오면서 많은 혁명도 있었지만, 그 혁명이념에 의해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에 이루어진 세계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인류역사가 인간이 꾼 꿈에 의해 되어지는 역사가 아니요, 인간의 어떠한 창조적인 계획 밑에서 되어지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는 대천륜의 목표와 계획 밑에서 하나의 이념적인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이렇게 인류역사에는 고난의 역사과정을 거쳐 자연적인 형태의 세계를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늘의 프로그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이런 프로그램이 없다 할진대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를 축복하시던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손을 들어 축복하셨다 할진대, 축복하시던 하나님의 그 손길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축복하시던 그 축복의 권한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축복이라 함은 즐겁고 행복스러운 인연의 조건일 것인데, 그 조건을 중심삼고 바라보시던 세계이념은 어디로 갔는가! 다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인간 위주한 이 세계를 수습하여 먼 시각의 세계를 가까운 시각의 세계로, 먼 감각의 세계를 직접적인 감각의 세계로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를 내적인 심정의 세계와 결부시켜서, ‘나’라는 하나의 존재가치와 전체 가치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적 밑에서 역사는 돌고 굽이치면서 이 세계를 이루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목적 없이 흐르는 역사 같지만 지나고 보면 어떤 목적의식 밑에서 하나 하나의 일들이 처리되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전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떠한 목적의식, 절대적인 플랜(Plan)에 의해 움직이는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의 대이념을 중심삼은 프로그램에 따라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지선열들, 성현현철들이 먼저 이 사명을 계승하여 분담하여 왔습니다. 이와같이 그러한 대목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인류가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도 동원되어 나온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이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이 기쁨으로서 당신의 심정 전체를 걸어 놓고 축복하실 수 있는 그 소망은 무엇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9-97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있어서 한 사람의 가치
아침에 눈을 뜨고 자연을 바라보면 그 자연이 은은하게 내 본성과 인연되어 새로운 이상의 감정을 싹트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바라보면 볼수록 절망과 슬픔의 감정을 돋구어 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 하면,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와 같은 정도의 가치로 지어진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피조만물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간이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모습으로서 천상을 대신하여 나서야 할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천주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인간은 여지없이 슬픔을 가해 주는 제물이 되고, 고통의 다리를 놓아 주는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시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의 대이념을 갖고 계신 창조주 앞에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인관계에 있어서 여러분이 슬픔과 고통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 할진대, 여러분은 전체의 이념을 세우시려는 하늘 앞에도 물론 슬픔과 고통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할진대 여기에서부터 소망의 세계는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늘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스스로 판단하고 그 위치를 결정하여 내가 머무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움직이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나로 말미암아 그 무엇이 남아져서 전체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인간세계에서나 천상의 이념세계에서나 용납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라가 나쁘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요, 사회가 부패했다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구원섭리를 하시는 데는 개인을 떠나서 가정의 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 개인을 중심삼고 아브라함의 가정을 구하려 하였고, 야곱이란 개인을 중심삼고 야곱가정을 구하려 하였고, 모세라는 개인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려 하였고, 예수라는 개인을 세워놓고 세계를 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구하기 위한 예수, 민족을 구하기 위한 모세, 가정을 구하기 위한 야곱과 아브라함, 이들 모두는 여러분 때문에 그런 길을 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끝날이란 어떠한 때냐? 전세계를 관할하시는 하나님을 상봉하는 시간이 가까운 때를 말합니다. 전세계의 통치권을 갖고 오시는 만왕의 왕이신 주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느냐? 옛날의 아브라함을 대신할 수 있고, 야곱을 대신할 수 있고, 모세를 대신할 수 있고, 예수를 대신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예수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가정이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우리들 개체 개체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때 그때부터 세계는 수습되어 나갈 것입니다.

9-99
낙망의 자리에서 찾게 되는 도(道)의 길
오늘날 우리들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나라 아닌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사회 아닌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살고 있지만 가정 아닌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 온 것은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노라고. 창조주의 이념 밑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부정적인 땅이 되었으니 여기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혁명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공산주의의 침략하에서 허덕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출발의 기원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슬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자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 인간이니 고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해야 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고, 통곡하고 절망하는 자리에 처해야 됩니다.

도의 길은 고통을 응당시하고 나아가는 길이요, 낙망의 길을 정당화시켜 가는 길이요,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을 세워 나아가는 길입니다. 왜? 인간은 배역자이기 때문에 배역의 씨를 뿌린 모든 것을 탕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응을 받아야 될 인간이니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보면,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이냐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슬픔을 달갑게 받는 민족, 고통을 달갑게 당하는 민족, 억울함을 응당한 것처럼 받는 민족, 그러면서도 하늘을 붙드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고이래로 선의 길을 따라 나온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기쁨과 행복의 세계를 소망하였으되 실제 생활은 고통의 길을 걷는 생활이었습니다. ‘고통아 오너라. 너에게 내가 소망을 빼앗길소냐! 슬픔아 오너라. 네가 나의 희락(喜樂)을 막아낼소냐! 죽음아 오너라. 승리의 한날, 영광의 한날을 바라는 이념의 세계관을 내가 빼앗길소냐!’ 하는 각오 밑에서 걸어 나온 길이 성현 현철들의 길이요,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역사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당하는 손의 고통, 원수들에게 당하는 발의 고통, 원수들에게 당하는 옆구리의 고통을 예수님은 당연하게 받으셨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예수님과 같은 무리를 통하여 수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9-100
낙오자들을 세워 섭리하시는 하나님
하늘은 어찌하여 인간들을 그러한 환경에 세워 놓고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세계가 이미 사탄권내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선두에 서서 인류를 지도해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뒤에서 역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악은 막혀 버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역사가 세계적인 무대를 향하여 출발하였으므로 그 끝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이루어집니다. 악은 구르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니 끝날까지 굴러 나오는 것입니다. 6천년 동안 그렇게 굴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악은 가다가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왜? 악의 궤도는 정상적인 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때 반드시 탈선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냐? 끝날입니다. 끝날에는 끊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하늘은 이 악의 세계를 정면으로 막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굴러 나오는 악의 세계 밑에서 낙오자를 수습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온 천지를 사탄에게 다 빼앗긴 하늘은 싱싱하고 늠름한 자들을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사망세계의 권세의 뒤에서 절망하여 떨어지는 낙오자들을 수습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종교의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낙오되거나, 큰 절망에 빠져 있거나, 실패를 하거나, 그 무엇에 충격을 받아 의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의 길을 찾아듭니다.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늘은 당신의 직계 자녀를 통하여 이 세계를 자유로이 주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사탄이 이 세계를 주관하게 된 그날부터 하늘은 낙오자를 붙들고 사정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원통합니다, 원통해요.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식하고 무력하고 아무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하늘을 믿어서 고임돌이 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구렁텅이에 돌을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메우고 또 메워 그것이 쌓여서 그 구렁텅이가 평탄해질 때까지 이 땅의 수많은 낙오자들이 도의 세계에서 제물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세상의 낙오자들을 수습하여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개인을 세우시기 위하여 무한히 애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운 사람이 아브라함이요, 야곱이요, 모세요, 예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정을, 모세는 민족을, 예수는 세계를 수습하는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개인을 세워 가정을 수습하고, 사회와 국가, 세계를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그 대표자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왔다 간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예수님이 다시 온다는 재림사상을 품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오실 것이냐? 세계를 수습하는 대표자의 사명을 갖고 오실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고 있는 이 판국에서 보더라도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가진 하나의 인격자가 이 땅 위에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못난 사람으로부터 다리를 놓아 어깨와 어깨를 연결시키고, 몸과 몸을 연결시켜 이 천지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하나의 이념적인 대표자를 내세우기 위해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동원되어 정성을 들였습니다. 또 부녀자들이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까지의 종교는 부녀자들의 종교였습니다. 남성들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가냘픈 여성들이 슬픔에 사무친 심정으로 정성을 들여 쌓고 쌓은 토대 위에서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이것이 점점 전체사회에 전파되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민주진영을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9-102
하늘의 진정한 충신, 효자, 열녀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냐? 이 세계를 수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축복받은 대표자, 축복받은 무리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독생자’라 하셨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너는 하늘 땅을 대신한 나의 신부다’라고 인정받은 사람은 이 땅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 모두가 자칭 신부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하늘이 ‘너는 틀림없이 하늘 땅을 대표한 신부다’라고 공인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는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진정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혹은 딸이다’라는 축복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주의 주’라고, 혹은 ‘절대자의 주체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 앞에 충신이라고 축복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충신이 나오지 않았고, 하늘의 효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하늘의 열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하늘이 그를 하늘 땅을 통치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축복을 해주고싶다 할진대, 그는 최고의 자리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는 그 나라의 최고의 충신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나라의 최고의 효자라는 이름을 가져야 할 것이며, 신앙자들을 신부라고 하였으니 그 나라의 최고의 열녀라는 칭호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6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지만 ‘너는 하늘 땅이 생겨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에서 둘도 없는 나의 충신이다’ 하고 축복해 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 오늘까지의 역사에서 너는 내 앞에 진정한 효자다’ 하고 축복해 준 사람이 없고, 열녀라고 축복해 준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국가가 있어야 충신이 있지요?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참부모가 있어야 효자가 있지요?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참신랑이 있어야 신부가 있지요? 이 땅의 국가들은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주권을 가진 나라가 못 되었고, 이 땅의 가정들은 하늘이 영원히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참부모를 가진 가정이 못 되었고, 이 땅의 사람들은 하늘이 영원히 믿어줄 수 있는 참신랑신부가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조주는 창세 이후 오늘까지 이 땅 위에 사는 인간들 가운데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고 내세운 사람이, 너는 천상천하를 대신한 효자라고 내세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 충신이라고 내세운 사람이 없고, 열녀라고 내세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재물을 가진 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에게 자기가 가진 재물을 지켜 줄 수 있고 자기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효자가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나 대견하고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하나나님도 그러하실 터인데, 대천주를 지으시고 축복했던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슬픔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셔야 할 온 하늘 땅이 원수가 주관하는 세계가 되었고, 이 땅의 가정들은 원수를 받드는 원수의 아들딸로 이루어진 가정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효자 충신은 있을망정 하늘의 효자 충신은 없습니다. 원수의 세계에서 원수의 뜻을 받드는 열녀는 있을망정 하늘의 뜻을 받드는 열녀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뒤집어 놓아야겠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요구하시는 충신이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소망하시는 참효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하시는 참신부가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이것이 세계를 수습하기 위해 오셨던 하늘의 왕자이신 예수님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무엇을 그리워하느뇨? 하늘이 인정하는 충신이 될 수 있는 그 나라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무엇을 그리워하느뇨? 참부모를 모셔 놓고 효자가 될 수 있는 그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참신랑신부가 되어 하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본연의 그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바라는 최대의 목표입니다.

9-104
예수가 재림해야 할 이유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타오르는 정열에 사무쳐 나라에 충성을 다했더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극진히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했더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충성 그 효도가 어떠한 조건은 될 수 있지만 하늘이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충성과 효도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리 열녀가 많았을지라도, 그들이 어떠한 조건은 세웠을지 모르지만 하늘이 전폭적으로 축복할 수 있는 하늘의 열녀는 못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알기에 나는 한때 이렇게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성기준 위에 설 수 있는 충신, 하늘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충신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이렇게 말하면 이단자라고 하겠지만 예수님도 하늘 나라의 완전한 충신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왜 못되었느냐? 하늘나라의 진정한 충신이라면 세계적으로 사탄과 싸워 승리해야 됩니다. 원수를 완전히 굴복시켜 완전히 물리치고, 슬픈 주인을 기쁨의 자리로 모셔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완전한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싸우다가 쓰러졌습니다. 충신의 절개와 지조를 세우려 한 대우주의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와야 됩니다. 이 땅을,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효도하는 자유천지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일을 다 못하였기 때문에 참효자가 못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는 했지만 실체로는 못 이루고 갔습니다. 나는 신랑이라고 외치기는 하였지만, 실체를 갖춘 참다운 신랑이 못 되었으니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축복을 받았지만 실체적인 권한은 행사하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슬픔입니다.

9-105
효자 효녀의 기반으로 닦아지는 충신의 길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아담 해와를 축복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로서 마음으로 무엇을 소망하셨을 것인가? ‘오! 너희는 내가 지은 대천주를 품고 나를 왕으로 모시고 충신이 되어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이 천지간에 충신의 지조를 세우고, 그것을 억천만년 전통으로 남겨야 했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참아버지로 모신 참다운 효자효녀가 되었던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세운 충효지절은 전통이 되었을 것이고, 이 땅의 역사는 하나님과 아담 해와의 연결된 심정을 중심삼고 이어져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악이 주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를 악이 주관할 수 있다면 복귀역사, 구원역사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어느 누가 무엇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거부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효자 효녀로서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었던들, 오늘날 이 땅은 절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충신지절을 잃어버렸고 효자 효녀의 지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들은 거꿀잡이로 신랑 신부라는 명사를 걸어 복귀해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신랑이 되려면 먼저 충신지절을 세워 나라를 사랑하는 충신이 되고, 부모를 사랑하는 효자가 된 후에야 하나의 남자로서 신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했으니 거꿀잡이로 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이 이렇게 거꿀잡이 노정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신랑 신부라는 명사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랑 신부가 되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는 데 있습니다. 신랑 신부의 사랑만 가지고는 안 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가정적인 하나님말고 대천주를 주관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부모와의 정의 인연을 기반으로 하여, 한 부부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한 주권자의 인정을 받는 것이 인간들의 생활윤리입니다. 철칙이 그래요. 나라없이 가정이 있을 수 없고, 가정 없이 부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신랑 신부라는 명사 앞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늘이여! 주님은 신랑으로 오신다는데, 신랑보다는 나를 다시 낳아줄 수 있는 참부모를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랑 신부의 사랑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나는 효자 효녀로서 아버지를 모시겠나이다’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만왕의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충신의 무대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무슨 구원? 지옥가지 말게 해 달라는 구원입니까? 지옥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어요? 구원의 목적은 신랑 신부로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탄식이 무엇인가? 하늘이 충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천적인 주권의 나라가 못 된 것입니다.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타락의 혈통을 벗어난 본연의 아담 해와가 없기 때문에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심정적으로 우리를 지켜줄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니 사탄이 우리를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라는 것입니다.

9-107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한 어린양 잔치
아무리 훌륭한 신랑 신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참부모로부터 효자 효녀라는 축복을 받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영원한 신랑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저나라에 가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예수를 신랑으로 모신 성도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먼저 효자효녀로서 참부모와의 인연을 맺고 난 후에야 신랑 신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칙이 그래요. 그래서 아무리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었다 할지라도 참부모의 인연을 맺지 못하면 보류예요. 보류. 영계의 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땅 위에 오시는 주는 어떠한 사명을 완결짓기 위해 오셔야 하느냐? 물론 신랑의 자격을 완결짓기 위해 오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부모의 내용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땅 앞에 참부모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참효자 효녀라는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효자 효녀로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잔치가 바로 어린양 혼인잔치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천지가 생겨난 후 처음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어 신랑 신부로 등장하는 날, 하나님께서 ‘땅 위의 갖은 역경 가운데서도 하늘의 심정을 찾아오기에, 하늘 부모를 찾아오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하시며 무형의 하나님 대신 실체를 갖춘 참부모로 축복해 주는 잔치가 어린양 잔치입니다. 참신부의 약속과 이념을 갖춘 기준과 참효자 효녀의 기준 위에 세워 식을 올리는 것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은 그날부터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유형의 실체를 쓴 인류의 참부모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원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선한 세계에서 잘 자라다가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그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거꿀잡이로 신부의 과정을 거쳐서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효자 효녀다’ 하실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완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이 통하지 않는 데 효자효녀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 줄을 알고, 하나님이 어떠한 노정을 허덕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창조이념 앞에 내세울 수 있는 본연의 아담 해와의 형태를 갖추어야만 됩니다. 어린양 잔치는 그 형태를 갖추는 식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린양 잔치는 무엇이뇨?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인 신랑 신부의 약속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참효자 참효녀의 축복을 받아서 참효자효녀가 되고, 이 땅의 만인간의 대표자로 세움받고, 효자 효녀의 조상이 되는 잔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참효자효녀로서, 인류의 참부모로서 등장하는 그 의식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 잔치가 벌어지면 가정적인 기준이 세워집니다. 새로운 가정의 기준이 세워진 다음에는 하늘의 주권을 중심삼은 국가와 세계의 기준이 세워져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늘 앞에 충신의 도를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시는 생활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모시는 생활입니다. 임금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때가 지상천국시대입니다.

9-108
하늘의 충신 효자 열녀가 되는 기준
우리는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바래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가? 성경 66권의 최종 밑바닥은 무엇인가?심정입니다. 심정, 심정이예요. 그 심정이 머물 수 있는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천지가 생겨난 후 처음으로 나타나는 신부, 하늘 열녀의 자리입니다. 열녀의 절개를 갖추고 나서는 것, 이것은 첫단계입니다.

여러분, 6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남편을 위하여 지성을 다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신랑을 위하여 별의별 노릇 다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열녀의 입장에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다 사탄세계의 열녀들이었어요. 선과 악이 부딪쳐 싸우는 어느 한 시대의 선한 입장을 대신한 열녀의 기준은 세웠을지 모르지만, 전체 이념세계에서 하나님의 심정이 완전히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하늘의 열녀로 왔다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세계적인 열녀를 선출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갔으니 그것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말씀입니다. 세계적인 열녀, 세계적인 열녀를 찾아 세우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땅 위에서는 신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 열녀라 합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 다 거기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효자도 부모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하고, 충신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준은 영원한 생명을 걸어 놓고 충성하고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 고깃덩어리는 죽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걸어놓고, 그것을 몽땅 아버지 것으로, 신랑 것으로, 부모 것으로 드릴 수 있는 자리에서만 천적인 열녀의 기준이 성립됩니다. 내 생명이 움직이고 느끼는 전체를 다 기울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다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세계의 어떤 충신보다도, 어떤 효자 효녀보다도, 어떤 열녀보다도 더 나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사탄세계에도 충신 열녀가 그렇게 많았는데, 그 사탄세계의 충신 열녀의 기준과 같은 기준을 세운 사람을 하늘이 충신 열녀로 세우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물며 사탄세계의 충신 열녀보다 못한 사람을 하늘의 충신으로 열녀로 세우겠어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역사적인 그 누구보다도, 옛날 그 어떤 선조보다도, 그 시대의 어떤 훌륭한 사람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 ‘누구’라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적인 환경 속의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정성을 다 기울이는 신부가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 신자 가운데서 나와야 됩니다.

기도를 해도 옛날의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해야 되고, 정성을 들여도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들어야 됩니다. 정성을 많이 들인 열녀, 6천년 동안 열녀의 전람회가 있다 할진대 거기에 있는 모든 열녀가 머리 숙일 수 있는 권위를 가져야 됩니다. 영계에 있는 열녀에게서마저도 ‘당신이 정성을 들이는 신부의 절개를 천추에 길이 찬양할 것이오’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또, 그런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신부라야 하늘이 사탄세계 앞에 세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믿으면 천당가는 줄 알고, 예배당에 가서 찬송이나 부르고 연보나 조금 하며 왔다갔다 하면, 또 목사 장로만 되면 다 되는 줄 알지만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렇지 않아요.

9-110
하나님의 심정과 부모의 심정과 부부의 심정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다는, 그러한 한계는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열녀들이 말없이 높여 줄 수 있는 그런 충성에 어린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표준입니다. 만일 신랑되신 예수 앞에 그런 진정한 신부가 나왔던들 이 세계에 벌써 하늘의 뜻이 다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끌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러한 분이 나온다 할진대 세상에 아무리 악이 성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들어오는 선의 강도가 그 악의 강도보다 몇 배 이상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런 심정의 기반에 흘러 들어오는, 선을 지향하는 힘은 사탄세계의 악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간세계에는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무한한 선의 지향력을 폭발시켜 줄 수 있는 원천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되신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시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신부가 이 땅 위에 나타나면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내 버리고 땅으로 뛰쳐 내려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2천년 동안 영계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통한 힘, 즉 악에 대한 공포의 마음이 아닌 심정을 통하여 우러나는 선을 중심삼은 강렬한 힘, 강한 천적인 힘이 오늘날 인류세계에 일면으로라도 들어온다 할진대 세계는 그 앞에 정복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악을 갈라 세우고, 악을 소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을 소화시킬 수 있는 선, 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악을 삼켜버릴 수 있는 선, 심정적으로 폭발되어 우러나는 천적인 선의 역사가 벌어져야 됩니다. 이러한 역사를 전개시킬 수 있는 시기가 인간이 바라온 재림 이후의 시기입니다.

부부의 심정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줄기에 비유한다면 부부의 심정은 잎과 같고, 충신의 심정은 뿌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모두 한 생명권에서 움직여야만 하나의 완성체를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노정을 거쳐 나가는 이 마당에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인 심정만으로 사모해서는 안 됩니다. 줄기를 거쳐서 뿌리까지 연결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개인적인 상대를 갖춘 후 가정을 이루어 세계와 연결해야 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뿌리와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요, 그 하나님을 향하여 정성을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나 부모를 대해 충성을 다하는 것은 줄기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완전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심정은 잎과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한때입니다. 한때예요. 여러분, 그런가 안 그런가 보세요.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고, 뭐 어떻고 저떻고 하다가는 얼마 안 가서 떨어져 버립니다. 줄기가 못 돼요.

만일 이 땅 위에 신랑 신부의 심정을 지니고 참부모 앞에 참아들딸의 심정을 연결시킨 자가 있었다 할진대, 오늘날 이 땅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한번 은혜를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 심정에 한번 접하면 암만 떼어버리려 해도 떼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를 만난 후에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지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요. 적신이나 칼이나 기근이랴’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인 이때에 있어서는 여러분들 자신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생사의 의식을 잊어버리고, 죽고 사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달음질 칠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여러분에게 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러한 길을 가는데 하물며 하늘 길을 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에 사무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오,주여!’ 하다가 주님이 나타났다 하면 목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다 해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데, 여러분에게도 이런 사무친 심정이 있느냐? 이것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아는 것도, 무슨 학박사가 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거치기 전에는 참효자가 될 수 없고, 참효녀가 될 수 없고, 참 충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9-112
심정이 통하는 곳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효자 효녀라는 말이 있고, 충성한 남자를 충신이라고 하는 말은 있는데 충성한 여자는 뭐라고 할까 하고 말입니다. 충성한 여자를 가리키는 마땅한 말이 없어요. 열녀라는 말은 있지만……. 효자 효녀란 말이 있다면 앞으로 ‘충남(忠男)’ 이란 말과 ‘충녀(忠女)’라는 말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왜 열녀만 있고 ‘열남(烈男)’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이 바라는 것은 충신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은 충신된 남자를 바라시는 동시에 충신된 여자도 바라십니다. 여기에서 효자 효녀가 중심입니다. 이 효자 효녀가 하늘을 향하는 첫 발판입니다. 신랑 신부는 두번째 단계입니다. 동양에 삼강오륜이 있는데 이것은 복귀섭리의 뜻에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 것이냐? 열녀만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열남도 사는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모순된 일이 어디 있어요? 열녀만 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열남도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남자의 절개를 존중히 여기는 때가 옵니다. 남자도 절개를 지켜야 돼요.

대창조의 원칙이 이렇게 혼란되게 안 되어 있습니다. 남자를 플러스라하면 그 플러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이라서 열남이라는 명사가 없다면 잘 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열남으로서 2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 절개를 지켜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2천년 동안 절개를 지켜나온 그 심정 앞에 설 수 있는 열녀의 심정도 역시 마찬가지여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실 수 있는 열녀도 없고, 열남도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됩니다. 하늘이 축복해 주실 수 있는 효자 효녀가 없습니다. 이는 어린양 잔치가 끝나야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 있는 충신 충녀가 없습니다. 예수가 주권을 잡는 세계가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대로 되어져서 하나님이 참다운 효자 효녀, 참다운 충신 열녀들을 세워 놓고 그들 앞에 6천년 동안 심정적으로 엉클어진 모든 원한과 모든 회포를 다 풀어 놓고 ‘얘들아, 내 원수를 갚아다오’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하나님의 뜻이 완결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부터 심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공인을 받은 충신이 아니고는 그 앞에서 사탄이 심판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공인을 받은 효자 효녀가 아니고서는 사탄을 심판할 수 없고, 하늘의 공인을 받은 열남 열녀가 아니고는 사탄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려분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한다고? 말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라는 말에는 6천년의 곡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와 더불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도 2천년 동안 이 역사와 더불어 나오셨습니다. 그 심정에는 피의 곡절이 사무쳐 있어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정이 통하지 않는 신부는 쓸데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궐기해 나섰습니다.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나선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정성을 다 기울여 하나님의 해원을 성사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합니다. ‘이 땅 위에 하늘의 충신이 없사오니 충신이 되게 하시옵소서. 효자가 없사오니 효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열남이 없사오니 열남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하나님도 통쾌해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정을 알기 전에는 안 됩니다.

예수는 끝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과 그때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에나 알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넘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심정에 대한 문제를 알 수 있겠나 하는 마음 가지고 백날 기도해 보십시오. 백날 천날 기도해 보라구요. 죽어서 천당 가나.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내 말이 거짓말인가 죽어 보란 말입니다. 별의별 정성을 다 들여 보십시오. 하나님은 행차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으로부터 하늘세계를 움직여 낼 수 있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한장의 편지가 날아드는 날에는 하나님이 행차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배반한 타락한 후손입니다. 여러분, 우리조상이 무엇을 배반할 줄 알아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하나 따먹은 것인줄 아세요? 천만에요. 심정을 배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배반했어요.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무슨 심정을 배반했느냐? 창조이상의 심정, 소망의 심정을 배반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 줄 압니까? 은혜 속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심정이 체휼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고도 심정으로 해명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효자 효녀니 열녀니 충신이니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얼렁뚱땅 적당히 하고도 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목이 달아나고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를 위한 심정을 안 놓겠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하늘 앞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궐기해 나섰습니다. 여러분은 욕먹는 이 스승을 따라 나섰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지상의 원수 앞에서 희생이 되고 죽더라도 하늘의 충신의 절개를 남기는 것입니다. 효자의 절개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열녀의 절개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이 기준에 서서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나의 아버지시요, 당신은 나의 주인이시요, 당신은 나의 신랑이십니다’ 하고 심정적으로 나서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를 심판할 자가 없고, 이를 주관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전 부활 주일날 ‘심정 부활의 날’을 선포한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잘 몰라도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설명보다도 더 앞서는 심정, 어떤 설명도 거부할 수 있는 심정은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의 엉클어짐이 하늘과 더불어 인연되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심판대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때 그러한 마음의 작용, 제지할래야 제지할 수 없이 폭발되어 우러나오는 이런 마음의 느낌을 못 느낀다 할진대 심판의 고개를 못 넘어갑니다. 절대 못 넘어가요.

하나님께서 인간 타락 이후 6천년 동안 이 역사를 끌고 나오시는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늘 땅을 걸어 놓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아들 딸을 찾는 것이요, 충신을 찾는 것이요, 열녀를 찾는 것입니다.이 역사는 땅 위의 어느 한 지역을 중심삼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심정을 통하여 하늘 대신 선포하는 말에 천상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 말이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전파되면 그들의 마음이 격동할 것이요, 그 움직임이 이 땅 위에 벌어지는 날에는 사탄세계는 붕괴될 것입니다.

9-115
우리의 각오와 갈 길
오늘날 이런 목표 밑에서 세계를 향하여, 천지를 향하여 봉화를 든 여러분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내건 이상 이 한 시대에 쓰러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꿰뚫어 가지고, 개인을 통하고, 가정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 천주로 갈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진대 간판을 떼어버려야 됩니다. 여기서 외치는 사람도 그런 놀음은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여기 선 이 선생은 일생의 목표를 이 길을 돌파하는 데 두고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라도 돌파해야 되지만 몇 사람과 더불어 돌파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 앞에 각오하고 나선 걸음이니 구경꾼 모양으로 믿으려는 사람은 오지 마십시오. 생사지경을 각오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그러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었습니다. 여러분,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보이지않은 무형세계에서 투전판의 도박꾼처럼 생명을 걸어 놓고 뒤넘이치는 싸움을 수없이 했습니다. 사탄이 이 땅을 침범한 그날부터 싸움이 전개되었으니, 우리는 영적 세계의 싸움에서부터 육적 세계의 싸움까지 수습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또 수습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수습이 안 됩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혹 사탄들이 와서 참소하면 ‘심정적인 참아들딸이 기도하는데 이게 웬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십시오. 그러면 물러갈 것입니다. 거짓인가 사실인가 해보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신랑 신부의 문을 헤치고 들어가 효자 효녀가 되자는 것입니다. 효자 효녀의 문을 헤치고 들어가 충신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싸워야 되겠습니다. 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지상을 유린하고 있으니 우리가 지상을 정복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칼이나 총을 가지고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가지고 가는 곳곳마다 심정을 갈망하는 사람은 넘어올 것입니다. 하늘을 위하여 충신이 되고 싶고, 하늘을 위하여 효자 효녀가 되고 싶고, 하늘을 위하여 열녀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불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혈족을 초월하고 동서양을 초월하여 틀림없이 불어날 것입니다. 자신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세계를 대하여 싸워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내재적인 주체로 계시니 여러분이 그 사랑에 접하고, 그 심정에 사무쳐 있을 때에는 어디가서 부흥회도 얼마든지 인도할 수 있습니다. 준비가 필요치 않아요. 자식을 사랑하는 진정한 참부모라면 자식에게 권고할 말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 들어간 자식을 구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친 부모라 할진대, 그 자식에게 권고할 말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을 아는자식이라면 부모가 한마디만 해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9-117
충신의 도리
오늘 우리들은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꿰어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성경이 알파와 오메가로 되어 있어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한장 한장이 전부 다 다른데 알파와 오메가가 될 수 있느냐 말예요. 그것은 심정을 걸어 놓고 하는 말입니다. 심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영존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이 심정을 품고 신랑 신부의 자리를 거쳐 효자 효녀의 자리, 충신 충녀의 자리까지 나아가야만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천상천하 어디를 가든지 그 사람은 굶어 죽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한 푼 없이 살고 있지만 밥 굶어 본 적이 없습니다. 몰려서 옥중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어떤 사람을 시켜서라도 밥을 갖다 주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있는 힘을 다 기울이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나서 ‘아이고 아버지, 오늘 내가 은혜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정성을 다하고 나서도 ‘나 이제 이만하면 되겠지’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갈수록 은혜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죄인된 자기 자신을 회고하고 역사적인 범죄상을 느끼는 그런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뻗대는 사람은 선한 심정을 갖고 나오는 사람, 진정한 심정을 갖고 나오는 사람 앞에 머리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충성의 심정을 갖고 나오는 사람 앞에는 하나님도 머리 숙이신다는 것입니다. 참효자 앞에는 부모도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참신부 앞에는 신랑도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고 뭐 이랬으니’ 하며 뻗대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세계에 대해서는 당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소망으로 쌓은 제단 앞에 제사를 드리고 나서도 부족했음을 깨닫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하늘 백성이 취할 자세입니다. 정성을 다 들이고 나서도 ‘아이고, 이런 것은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뉘우침과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거기서 밀려납니다. 깊은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는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문을 열고 천상천하의 모든 보화를 움직여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뉘우침과 깨달음이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럴 것인가 안 그럴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6천년 동안 찾아나오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뇨? 하늘주권의 나라를 세운 후 그 백성을 대하여 충신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나라에 가 보세요. 이런 사람이 충신이니 이렇게 가라고 가르쳐 주는 어떤 무엇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하늘의 충신이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세우고자 하시는 나라는 이러이러한 나라이니 원수들은 이렇게 굴복시켜야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충신의 교훈을 받았어요? 받지 못했어요. 하나님의 가정은 이래야 되니 하나님을 대신 할 참부모를 모시는 참효자 효녀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는 효자 효녀의 교훈을 받았어요? 못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너는 이러이러해야 내 사랑하는 신부라고 하늘땅 앞에 선포할 수 있다’ 하는 신랑 신부의 교훈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다. 성경이 이런 것 가르쳐 줍니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가야 할 길이 이러한 길일진대 생사를 개의치 않고 이런 길을 타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라 할진대, 우리는 어이 해야 할것인가? 희희낙락하며 오늘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생이 못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며 오늘 한 시간을 보내 버리면 우리의 후손들이 주먹을 부르쥐고 땅을 치며 심판대를 두려워하고 탄식할 것입니다. 그것이 염려되거든 오늘 한 시간의 편안한 자리를 피하여 천상의 심정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 허덕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2천년 동안 믿고 왔던 역사가 세워준 훌륭한 예수 말고, 요셉 가정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던 예수의 심정, 3년 공생애노정에서 바리새교인들에게 핍박받던 예수의 심정,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리던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의 그 심정을 아십니까? 예수를 팔아먹은 작자는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같이 먹고 살고 했으면서도 스승을 팔아먹은 배반의 사도가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고, 배반당한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9-119
하나님과 예수의 심정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는 혁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뒤집어엎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 엎어야 돼요. 인륜으로 안 되면 천륜을 의지해서라도 뒤엎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 놓지 않으면 안 될 어마어마한 시기에 우리는 당도해 있습니다.

쫓기던 예수의 심정, 베다니에서 배가 고파 헤매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던(막 11:12) 예수의 심정,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고 탄식하시던 예수의 심정,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하시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 압니까? 벙실벙실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신 줄 압니까? 천만에요. 눈물을 삭이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4천년 수고하여 보낸 예수를 대하여 시험이 웬 말입니까? 시험하던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압니까? 알아요? 알 것도 같지만 도무지 모를 내용으로 움직인 예수의 생애를 여러분은 이해하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총각인 예수의 발에다 향유를 붓고 머리로 씻어 주었는데, 그거 공인한 사람 손 들어 보세요. ‘오, 할렐루야 아멘’ 하며 칭찬한 사람 손 들어 봐요.복통 할 예수의 생애였습니다.

역사를 거쳐오면서 추앙을 받으시는 예수로만 알았지, 밟히고 쫓김당하던 예수, 십자가상에서 못박히던 예수, 민족의 반역자로 몰림을 받던 예수의 심정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요, 교단과 사회질서의 파괴자요, 광란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안 그랬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찌하여 당신은 그렇게 오셨다가 그렇게 가셨습니까?’ ‘내가 차라리 예수가 걸쳤던 옷이라도 되었던들, 그가 혼자 하시는 말씀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었을 걸…’ 하는 생각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예수가 쉴 수 있는 방석이라도 되었던들 피곤한 예수의 내적 심정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라도 해보셨어요?

막대기만도 못하고, 풀 한 포기만도 못하고, 바위돌만도 못한 베드로, 요한, 야곱, 열 두 제자들, 할 짓 다 하다가 죽여 놓고 뭐 이러고 저러고……. 나는 영계에 가더라도 바울이나 베드로를 대해서 선생이라고 못할 것 같습니다. 만나면 왜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했는가고 따지면서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오해할 것입니다. 뭐 이왕에 이단이란 말을 듣고 있으니 좋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대로 흐르고, 하늘은 정의의 법도대로 이끌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바람에 흔들리는 예수꾼이란 말은 듣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늘은 세례 요한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도 ‘너희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 11:17)’ ’30년을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준비한 꼬락서니가 그꼴이냐’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늘 땅을 눈물로 채우고 회개해도 다 회개할 도리가 없는, 용서받을 길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에게 용서받을 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복귀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의 구원섭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아시고 이제부터 옛날의 아담한테 배척을 받던 하나님을 붙들고 울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가정을 바라보고 통분해 하시던 하나님을 향해 ‘내 아버지여! 어디 계십니까?’하며 울어보았습니까? 1600년을 거쳐 노아를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있는 정성, 있는 수고를 다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지만 함의 실수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채 한없이 슬퍼하신 그 하나님을 붙들고 여러분, 울어 보았어요? 바로 궁중에서 모세를 찾아 세우신 후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수습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까지 끌고 나오게 했지만, 불신하는 그 백성들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갖은 수모를 당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보았어요? 천신만고 끝에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려 하셨으나 모세까지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보셨어요? 나아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통하여 보내 주마고 약속한, 역사적인 소망의 주체요, 섭리적인 목적체인 메시아를 이 땅에 보냈는데 잡아죽였어요.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예수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보았어요?

9-121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
심정을 통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도 낙원에 가 있습니다. 낙원이 뭔지 압니까? 대합실입니다. 천국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이예요. 땅 위에서 심정문제를 완결짓는 것이 이 땅에 온 예수의 책임이었는데, 그 책임을 완결짓지 못하고 갔으니 다시 와서 그 책임을 완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낙원문을 철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문을 열어 놓아야 사탄세계가 굴복됩니다.

지상에서 마음의 천국을 완성하지 못한 자가 천상의 천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 심정적인 영원한 안식의 복지를 찾지 못한 사람이 천상의 영원한 복지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적인 안식의 복지를 찾았어요? 여러분은 다 그 복지를 찾지 못한 채 고아와 같이 허덕이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걸어 놓고 볼 때 여러분의 심정은 위치가 없습니다. 위치가 없으니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존재 앞에 세계가 어떻게 인연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참다운 열남 열녀로서, 참다운 효자 효녀로서, 참다운 충남 충녀로서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여 생애의 이념을 즐길 수 있는 무리가 나와 그들이 이 땅에 선의 아들딸을 번식해야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축복해 준 것이 사탄세계에서 죄악의 자식들을 번식하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충신의 절개, 효자 효녀의 절개, 열녀의 절개를 가진 아들딸을 번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제2의 충신과 효자 효녀를 하나님은 그리워하십니다. 그런 아들딸이 나오지 않으면 이 땅은 영원히 사탄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왜 사탄세계의 아들딸은 하나님이 영원한 내 아들딸이라고 입증할 수 없느냐? 심정적인 인연이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 주 앞에 기도할 때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영원히 비켜나고 싶지 않은 심정의 세계를 체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안기면 아버지와 같고 어머니와 같은 느낌을 느껴야 됩니다.

충신 충녀라면 하나님이 위신을 잊어버리고 그의 목을 안고 통곡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생사지경에서 승리하여 사탄세계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승리의 발판을 닦아 나오는 충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에 대해서 ‘나는 왕이고 너는 신하인데’ 하는 감정을 가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그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로 통곡하시며 ‘천상천하의 온 만상이 네 것이다. 네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할 것이다’ 하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와야만 천지가 뒤집힐 것입니다. 그런 곳이 이 땅 위에 생겨난다 할진대 그곳은 앞으로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이요, 그런 민족이 나온다 할진대 그 민족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9-122
충효의 전통을 세워야 할 통일교인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늘은 그런 민족을 먼저 슬픔의 자리에 몰아넣습니다. 고통의 자리에 몰아넣습니다. 역사적인 역경의 자리에 틀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고통의 보따리를 다 짊어지고 찾아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고통이 우거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고통의 짐보따리를 풀어 청산할 자리요, 새로운 터전을 개척할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민족을 세계적으로 제일 불쌍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민족에게 제일의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대치하고 있지만 이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 아닙니다. 몇 해만 두고 보세요. 한민족은 절대 불쌍한 민족이 아니예요. 천적인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이 민족은 삽니다. 역사는 이 민족의 역사요, 세계는 이 민족의 세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뒤를 따라오시는 하나님의 해원성사는 슬픔의 뒷골목에서부터 이루어 나왔습니다. 거기서부터 기쁨의 터전이 세워져 나왔고 발판이 닦여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세계 기독교계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자랑이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영통한 사람은 증거합니다. 안하면 천상법에 걸립니다.

그러니만큼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앞으로 단단히 각오해야 됩니다. 이러다 말면 안 됩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핍박이 있어도 문제시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단지 하나, 우리가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해도 천적으로 세우고자 하는 충효의 전통은 세워야 합니다. 충남 충녀의 전통, 열남 열녀의 전통, 효자 효녀의 전통만 세워 놓으면 통일교회는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통을 세우는 데도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해명할 수 있는 전통, ‘이럴 수도 있다’가 아니라 ‘이렇다’ 하는 공식적인 전통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이 그리워 헤매는 인류는 어차피 이 전통의 문을 거쳐야 됩니다. 아무리 배반하고 반대하더라도 이 문을 안 거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그렇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거든 모두 가십시오.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면 가란 말입니다. 방해가 됩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그 심정이 체휼되지 않거든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그 심정이 체휼되지 않으면 밤을 새워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금식을 해 가면서라도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요, 최후의 심판에서 남아질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된다 할진대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안식의 자리를 닦을 것이요, 세계는 여러분에 의해 움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고 알았다 할진대 여러분은 이제 28억 인류 앞에 할 말이 있어야 됩니다.

이제 하늘의 충신이 되려면 하늘의 원수를 갚아야 됩니다. 효자가 되려면 부모의 원수를 두고는 될 수 없으니 원수를 없애야 됩니다. 열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원수를 갚는 날까지 영원한 생명을 걸고 각오하고 나가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여러분은 타락의 한스러운 고개를 넘을 수 없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모든 슬픈 심정을 풀어 놓으시고 여러분에게 ‘6천년 동안 고대하던 충신아, 효자야, 열녀야’하시며 쌍수를 들어 축복해 주실 것이며, 삼위신은 안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심정기준이 해결되기 전에는 안식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여러분 한 자체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이 저녁 느끼기 바랍니다.

9-124
기 도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황공한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도 여러 종류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도 있고, 의붓아버지도 있고, 원수의 아버지도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원치 않사옵고 참아버지를 원하옵니다.

그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다 할진대 많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하면 그것이 전부요, 그것이 모두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 자리에서는 감사하는 마음과 황공한 마음에 어리어 온 만물을 기쁨과 서글픔의 교차점에서 붙안고 바라보고 위로할 수 있음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이렇게 놀라운 명사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 이름만 부르는 아들딸들이 되지 말고 심정적으로 체휼한 아버지를 붙드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여기에 모여 이렇게 말을 하고 말을 듣게 되었습니까? 복귀의 한스러운 노정에서 허덕이던 발자취를 멈추지 못한 연고로 저희들은 오늘도 이 자리에 모여 이런 말을 듣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소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무한히 수고하신 하늘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되어졌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은 스스로의 창조적인 의식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피동적인 입장에서 움직이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편안하지 못한 것은, 저희가 이런 자리에 있게 된 것은 편안하지 못한 자리를 피하게 하시기 위해 하늘이 고통 가운데서도 저희에게 사랑의 손길을 가해 주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이미 각오하였습니다. 저희들의 붉은 심정을 아버지 앞에 다 바치고 어떤 보수나 보응을 고대하지 않고 충절만을 갖추어 아버지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갖기 위하여 모였사오니, ‘이 마음을 당신이 취하시어 만천하에 자랑하시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저녁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도 있사옵고,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도 많사옵니다. 그들은 당신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불쌍한 자들이오니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남기신 슬픔의 발자국을 메우고, 아버지께서 심정을 붙들고 위로해 주실 수 있는 기쁨의 동반자가 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드린 말씀이 이들의 생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