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2 to 9-326: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
1960.06.19 (일), 한국 전본부교회

9-302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
요한복음 1:1-13

[기 도]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은 여기에 부복하였사옵니다. 저희들은 이 자리에 설 적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서 있는 것이냐고 스스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아버지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고,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아닌 다른 무엇이 저희를 지배하는 시간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립사옵니다. 은밀한 자리에서 약속하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그립사옵고, 저희를 사랑하사 참고 견디며 가라고 권고하시던 아버지의 충고의 말씀이 그립사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자극, 더 강한 자극을 받고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역사를 창조해 나왔사오며, 개인의 인연을 넓혀 사회를 개척하고 나아가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와 세계를 세워 나왔사옵니다.

인간들이 이렇듯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새로운 기쁨을 맛보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을 지으신 아버지는 더욱 그러하실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을 지으신 아버지는 더욱 그러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인간이 슬퍼하며 눈물 흘릴 때 아버님도 눈물 흘리셨사옵고, 인간이 한숨 지을 때 아버님께서도 한숨 지으셨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참다운 선을 위하여 죽음도 개의치 않고 생명을 바쳐 달음질치는 자들에게는 어두움과 원수의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민족은 굶주린 민족이었사옵고, 의지할 곳 없는 민족이었사옵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었사옵고, 자랑할 것이 없는 민족이었사옵니다. 어느것 하나에 의지할 적마다 이 민족은 그것에 사로잡혔고 그것에 유린당해 나왔사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민족을 대하시는 아버님의 슬픔이 컸던 것을 저희들은 부인할 수 없사옵니다.

이 민족의 역사를 살펴볼 때, 다른 민족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곡절이 얽히고 설켰사옵고, 그때마다 백성들은 찢기고 유린당하고 몰리고 처참한 자리에 처했었던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여기에 이 민족의 피살을 받은 저희들이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이 민족의 한을 풀기 위해 하늘 앞에 호소할 때는 되었사옵니다. 이 민족이 처참한 지경에 놓여 생사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 판국에 중심이 될 자가 누구이겠사옵니까?

저희들은 인간의 그 무엇을 믿기를 원치 않사옵니다. 그 무엇도 의지하고자 하지 않사옵니다. 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는, 하늘을 중심삼고 폭발되는 그것이 민족을 지도하는 한날이 오기를 저희가 몰리고 쫓기면서도 호소했던 사실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이날도 그러한 인연을 맺기 위해 여기에 섰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그 마음으로 무엇을 찾고 있사옵니까. 자랑할 것이 있사옵니까. 세상의 지식을 갖추었사옵니까. 세상 영광된 무엇을 가졌사옵니까. 그러나 인간적으로 갖춘 모든 것은 인간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오며,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명백히 알았사옵니다. 하늘을 대해 솟구쳐 오르는 심정과 충절을 다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어떠한 철학이 준 충격에 의해 우러나는 것이 아니옵고, 인류 역사가 준 충격에 의해 우러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그 무엇을 가지고도 부활의 은사를 찬양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옛날 초대교회 신도들의 충천되었던 심정을 충격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믿고 바라고 나오다가 피를 흘리기도 하며 낙망도 하던 저희들이, 이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벌거숭이 몸으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옵니다. 많은 학식은 저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사옵고, 많은 주의(主義) 역시 저희의 생활환경을 처참하게 만들었사옵니다. 알고 보니 저희에게 스승이 있었다 할진대 오직 양심과 그 양심에 충격해 들어오는 천륜의 어떠한 경고밖에 없었사옵니다.

이제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때가 되었사옵고, 새로운 심정의 봉화를 올리고 행군의 나팔을 불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 뜻 있는 청년들을 모으시옵소서. 피눈물을 흘리며 이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모으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떠한 주의를 좇아 호소하는 무리가 아니옵니다. 그보다는 저희가 먼저 죽음으로써 거름이 되어 이 민족 위에 새로운 싹으로 돋아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저희들이 되겠노라고 당신 앞에 맹세하옵니다. 하오니 아버지, 말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만이 간절한 마음으로 저희의 가슴을 점령하시고, 저희의 심장을 녹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초자연적인 인식으로 자신을 재감정하고, 자기의 존재 위치를 확정지어 새로운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당신은 얼마나 그리워하였사옵니까?

아버님께서 바라고 바라시던 소망의 한 때가 가까운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어린애의 심정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그 무엇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이 천상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만족함이 있어야 시간 관념을 초월하여 영원히 기뻐할 수 있고, 시간 관념을 초월하여 영원히 감사할 수 있고, 영원히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세계,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창조이상세계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할 것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는 사회에서 빚어지는 곡절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사오나 이것을 메우고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영원한 자유와 행복과 평화의 세계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그러한 세계와 인연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사오며,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이것을 위하여 나서는 걸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자녀된 명분을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도성을 긍휼히 보시옵고,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고, 이 인류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에게는 사망의 물결치는 환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생명선이 필요하옵니다. 그 생명선을 타고 구원받은 은사를 노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개가가 이 천지에 울려퍼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허락하신 뜻을 받들고 나섰사오니 전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소원과 뜻을 나타내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과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며, 새로운 그 무엇을 갖고 돌아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305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고 하는 말씀의 제목은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입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9-305
말세에 처한 인간이 바라는 것
우리 개개인은 많은 존재물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 데에는 어떤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동기는 나와 비교해 볼 때 어떤 면으로 보든 나 이상의 절대적인 것이요, 힘의 원천이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은 풀 한 포기에도 그 배후에는 그 이상의 힘이 있으며, 생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절대적인 원천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 즉 내 한 개체를 보더라도 생리적인 현상이 있고 감정과 심정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러한 현상을 있게 하는 작용을 일으키며 심정을 유발시키는 동기적인 그 무엇이 반드시 우리의 배후에 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자기의 존재가치도 모르면서 자기를 그저 높게만 평가하려고 합니다. 땅 위에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갖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외적인 것을 가지고는 생명 이상의 가치를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또는 다른 어떤 면에 있어서 최고라고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모체로부터 태어나면서 받은 생명의 가치 이상의 그 무엇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 이 세계가 과연 진실한 세계이며 이상세계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귀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움직이고 이 생명에 충격을 주는 힘의 대상체로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 힘의 상대적 세계인 이 세계에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내 생명 이상의 절대적인 생명체와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뜻을 세워 놓고 섭리해 오시는 분에게 절대자니 하나님이니 하는 명사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시기인 이때를 살아가는 사람은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민이 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 고민이 자신의 생명력을 지배하여 생명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를 개척할 수 없게 한다는 것 또한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있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절대자로 말미암은 생명의 안식처입니다. 이를 너나할것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고, 민족을 넘고 동서의 문화를 넘어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절대자와 인연 맺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을 갖추고 인격수양을 한 자일수록, 의식을 통하여 인식하는 감각이 예민한 자일수록, 자기가 알고 있는 전문 분야만으로는 생명의 안식처를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민으로 출발하여 고민으로 종결짓게 된 인생노정이니 자랑할 무엇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이 세계는 망할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의가 땅 위에 나오지 않는 한, 인류는 후퇴할 수 없고 전진할 수도 없는 절망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절실히 느껴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을 통해 하나의 생명의 문을 온 천지간에 개방하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분이 계시나니, 그분이 바로 절대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생명의 복지를 건설해 주실 주인공,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러한 신의 실존을 인정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아 나오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종교는 관념적인 것을 붙들고 허덕여 왔습니다. 때문에 이 관념적인 종교의 형태를 어떻게 생명적인 종교의 형태로 전환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종교가들은 이 문제에 최대의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천상에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에게서 직접 해답을 얻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9-307
목적의식에 의하여 지어진 모든 존재물
창조주가 계셔서 그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피조물이라 할진대, 그 피조물에게는 반드시 어떤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목적의식이나 목적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의 미물도 그것을 지은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 그 미물에게도 반드시 주인공으로부터 부여받은 목적의식 내지 목적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목적의식이나 목적성보다도 그것을 지으신 절대자가 부여해 준 목적의식이나 목적성이 선재(先在)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물은 절대자의 어떤 목적의식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배운 것이 많고 안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목적의식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커지면 커질수록 목적의식도 커지는 것입니다. 어떤 주권을 세운 주권자가 있다 할 때, 그가 그 주권을 중심삼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를 크게 느끼면 느낄수록 더 새롭고 넓은 범위의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개인에서부터 가정을 넘어 사회,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6천년이라는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인간이 소망한 세계가 이러한 세계로 종결될 것이냐? 그렇다면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 완전무결한 세계는 없을 것인가, 종교를 초월하고 동서의 차이를 넘어서고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이 하나의 생명체에 접붙여져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목적의식이 실현된 세계는 없을 것인가 하고 머리가 좀 깨인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때가 왔습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느끼는 감각의 일체는, 우리가 어떠한 목적의 세계로 향하여 나가도록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세계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오관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은 더 큰 목적의 세계로 향하여 나아가도록 나를 내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내모는 데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모는 것인가? 인간은 이념과 의식을 통하여 인식된 관념을 세워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전체의 목적의식에서 느껴 들어오는 감각과 생명을 기반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식이 무엇입니까? 의식은 쉽게 말하면, 실제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일체의 경험이나 현상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의식에는 경험이 내포되어 있고 표상이 내포되어 있고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체험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절대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목적의식으로 생명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철학이나 심리학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모든 학문은 이 문제에 봉착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비록 작지만 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무한한 세계로 뻗어나갑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생활 속에서 세계적인 어떠한 목적의식과 연결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탈선하고 맙니다. 악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가 절망 상태에 빠져 버릴 거예요.

인간에게는 환경을 수습할 수 있는 양심이 있습니다. 또 그 양심을 수습해 주는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이 윤리와 도덕은 더 높은 이념과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은 그 이념을 기반으로 하여 더 높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는 생명적인 문제에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9-309
다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인간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목적과 가치를 세워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 존재를 세워서 생명적 기준을 완결짓고, 목적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지 않는 한, 인류에게는 참다운 해방이 있을 수 없고, 참다운 자유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생명을 주창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적의식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의 방향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몸이 먹고 살기 위한 생활적인 방향이요, 둘째는 그것을 넘어서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생명적인 방향입니다. 오늘날 어느 철학가도 이 둘 사이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생명적인 방향에 중점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몸적인 방향, 외적인 방향에 중점을 두고 목적의식을 향하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여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느 때에 규합시킬 것이냐? 하나님께서는 도의 길을 걸어오는 사람, 심령이 갈급하여 모든 정성을 다하며 하늘을 따라 나오는 충성된 아들딸들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으로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인간이 다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세계를 내적인 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무한히 투쟁과 무한한 고충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생명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부정하게 하고 이 세계의 나아갈 길을 개척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런 방향으로 인도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수습하기 위해 종교를 세워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를 따라나가는 사람들은 외적인 일체를 부정해온 것입니다. 외적이고 환경적인 모든 인연과 사정으로 엉클어져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가 심정문제까지 넘어 혈혈단신 생명의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나가라고 충고해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발자취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의 목적의식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귀결점을 찾아나가는 것이고, 하나님도 그렇게 섭리하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목적하는 실체의 가치를 이루게 해서 만천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세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야할 길이 바로 이 길인데, 이 길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막연한 목적의식이 아닙니다. 막연하더라도, 주위의 환경에서 십자가의 고통이 가해지고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느껴지는 의식 관념을 중심삼고 정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생명적인 내용을 다 갖추고 복지의 내용을 갖추어 생명에 충격을 주는 이념을 가졌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도달해야 할 귀일점을 어디뇨? 의식이나 관념을 넘어서 자유로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일 것입니다.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절대자의 창조이념이 있을 것이요, 창조이념이 있다 할진대 그 이념이 추구하는 목적의 세계가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라면 목적하는 바의 그 세계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가치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찾아나오는 하늘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또한 먹는 것도 그 목적 때문에 먹고 사는 것도 그것 때문에 살아야 합니다.

그 목적의식과 생활적인 관념과 가치적인 인연을 맺는 데 있어서, 하늘 앞에 책임을 하는 데 있어서 양심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인간입니다. 그 목적의식은 인류를 움직이고 천륜을 움직여 역사를 수습하고 관념을 바꾸어 나가면서 이념적인 종족을 선택하여 그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9-311
잃어버린 목적의 세계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입장에 계시는가를 알아봅시다. 하나님은 목적의식을 통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는 것같이 하나님에게도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정의의 본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목적의식을 갖고 계시는가? 창조하고 나서부터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창조 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시고 창조하셨음에 틀림 없습니다. 만일 그런 분이 아니라 할진대, 역사를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힘이 역사의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그런 인연이 없다면 역사와 모든 인류를 목적하는 세계로 인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였을망정 타락하지 않은 인간에게 부여하여야 할 세계적인 목적의식을 뼈저리게 느끼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적의식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세계는 자유의 세계요, 무한한 행복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목적의식을 넘어 심정의 세계까지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워 놓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만물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존재물을 인간이 주관하게끔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옛날에 아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주의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이 뜻하시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창조이상세계의 주의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지 했습니다. 그런 주의가 안 나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땅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땅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배반하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니 이 땅은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세계의 문화사를 좀 안다 하고 자기의 주의 관념을 세워 이만하면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겠지 하며 자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소원하시던 것이 무엇이오?’ 또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가치를 세우고자 하셨겠소?’ 하면 ‘모르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인류는 원초적인 목적을 잃어버렸고 이념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이념의 목적과 하나님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 할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세계는 어디로 갔는고? 인류는 꿈에도 그 세계를 그리워하고 생시(生時)에도 그 세계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은 오늘도 쉬지 않고 그 세계를 향하여 가려 하지만, 이 생명의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선을 나타내기 위해 인류의 대표로 왔던 모든 도인, 혹은 수많은 성도와 성현들이 악한 땅을 그 세계로 끌고 가려다 전부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으로, 그 자체를 목적의식으로 체휼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죽음의 고비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인류 앞에 다리를 놓아 나온 것입니다.

9-312
심정을 통한 천지신인(天地神人)의 일체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신과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세계는 이 천지신인(天地神人)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각 다릅니다. 하늘과 땅, 신과 사람이 따로따로 갈라져 있습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으로, 신인은 신과 인간으로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수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양심과 보다 높은 천륜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양심은 천(天)을 대신하고 몸은 지(地)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화합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를 지닌 존재,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와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대표적 존재로 세워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대신한 몸과 하늘을 대신한 마음과 하나님을 대신한 심정이 규합하는 날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인간의 몸과 마음, 하나님과 인간을 심정적으로 일체가 되게 할 수 있다면 세계통일 뿐만이 아니라 천지통일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이렇거늘, 하물며 창조이념을 세워 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생각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이 천지와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 천지만상(天地萬象)을 지으셨을 것이뇨? 인간은 이것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만일에 이 문제에 대해, ‘천지신인(天地神人)은 일체요, 심정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최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승리의 용자가 있다 할진대, 그의 몸은 하나님의 몸일 것이요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나는 하나님과 일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존재물을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심정을 벗어난 만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과의 심정의 귀일점을 찾아 그 자리를 닦아 놓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와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메시아! 덮어 놓고 메시아라구요? 무조건 메시아가 아닙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위인들, 혹은 선지들이 왔다갔지만,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어느 누가 자신은 신랑이라 하고 인간을 신부라 하고 자녀라 하였습니까? 여기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주의나 사상을 중심삼은 사회제도에 의한 가정 말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가정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백성과 인류는 어디 있습니까? 목적의식을 통하여 영원한 행복을 노래하며 생명을 걸어 놓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응당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세워 놓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다 할진대 그 생명을 그냥 그대로 두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내용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게 되면 심정이 나옵니다. 심정은 사랑입니다. 생명이자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을 주창하고 사랑을 주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생명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로서 당신의 목적의식 아래 참생명체가 된 인간과 더불어 사랑의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9-314
목적의 세계에 당도하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절대적인 생명기준 앞에 모든 것을 귀결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절대적인 창조목적과 절대적인 목적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 데는 이념적으로 접해야 되고, 나아가서는 생명적으로 접해야 됩니다. 생명적으로 접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나는 생명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을 남기고 갔느뇨? 사랑을 남기고 갔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뇨? 목적하는 세계에 당도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이라도 받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나가요? 하나님을 반대해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도 끼리끼리 한번 사랑한 사람은 죽어도 못 잊거늘, 하물며 목적의식의 세계를 넘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이 이 땅의 그 무엇에 항복하겠습니까? 예수가 원수를 대해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바라봅시다. 감정과 감촉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움직임이 그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내 개인이 그러하고 가정이 그러하고 사회가 그러하고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가 그냥 그대로 그 목적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천지개벽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종교의 경서(經書)를 보더라도 마지막에는 천지개벽이 결론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천지개벽이예요.

9-315
영원한 인식과 체휼
여러분,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높은 용상에 앉아있는 황제나 거지를 막론하고 사람이면 모두가 생명적인 물건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인식의 수준이 높고 낮음에 따라 좋아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좋아하는 그 자체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하나로 귀일되고 듣는 것도 하나로 귀일되게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예술과 문화입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어야 되느냐?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듣고 싫증나는 음악은 명곡이 아닙니다. 성이 났을 때나 슬플 때나, 고통받을 때나 희희낙락할 때나 다 좋다고 할 수 있어야 명곡입니다. 즉 시간을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시대를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 못합니다.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느낌은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문명인이나 미개인이나 사람이라면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본질을 분석하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관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감각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였다 할진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느낀 행복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게 된다면, 그 하나님은 이상적인 창조주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적인 창조주요, 한계적인 창조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하더라도 추상적인 관념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이라면 미개인이나 문명인을 막론하고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 보더라도 영원히 체휼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것에서나 느끼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이상적인 하나님이요, 절대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인간에게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의식과 인식을 넘어서 직관적인 양심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칸트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그 세계를 포착하여 그 세계의 문을 열고 거기서 직감적인 그 무엇을, 영감적인 그 무엇을 체휼하였다 할진대, 한번 본 것은 꿈에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본 것이 천 년 만 년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은 자기가 본 영적인 세계의 일편을 주장하는 데에 죽을지 살지 모르고 생명을 바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음악도 한번 들으면 그 감정이 영원해야 합니다. 한번 빠져들면 마지막인 것처럼 취해야 됩니다. 최고의 이상주의라는 것은 인간을 그렇게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생활환경을 넘어서 세계적인 감정의 세계까지도 넘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이상주의자들이 거쳐가야 할 노정인 것입니다.

인간이 천지신인(天地神人)을 합성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감정하고 체휼하며 감별할 수 있게끔 지었다면, 하나님은 멋진 창조주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도통(道通)이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인간을, 또 땅을 어디로 총집결시키느냐? 목적의식을 통하여 하나의 세계로 집결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의식이나 관념을 지배할 수 있는 생명적인 내용을 가지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생명적인 내용을 어떻게 내적인 의식관념과 접촉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여기에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이 땅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부르짖다 갔지만, 목적의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자는 없습니다. 이것을 체휼하고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인간에게 그 사랑을 자각할 수 있도록 충격을 주려 하신 분이 신랑으로 오셨던 예수입니다. 하늘을 대신한 예수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늘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예수에게 들어가셨으니, 예수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 세계를 뒤넘이치게 할 수 있는 실존체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념,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이념이요, 인간의 이념입니다. 이것이 나라는 한 존재에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생명적인 기준, 즉 사랑을 세워가지고 오늘날까지 인류를 대하여 나오시는 것입니다.

9-317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야 할 인간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으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목적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목적의 세계로 우리 인간을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목적의식을 통한 생명과 사랑의 인연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이 등장한다면 목적의 세계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슨 세계가 올 것인가? 천지와 신인이 일치된 세계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오고 그 심정의 귀일점을 통하여 인연을 세워 나가고 수습하는 세계가 오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인연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창조주는 아버지요, 인간들은 아들딸이라는 부자의 인연을 맺는 세계가 올 것입니다.

천지가 생겨난 그날부터 하나님은 그런 세계를 소망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그런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사랑의 인연을 맺고, 예수와 성신이 사랑의 인연을 맺어서 사탄세계를 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승리적인 기준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성신이 하신 일은 여러분을 살려주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목적을 달성해야 사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6천년 전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그러한 세계를 이룰 날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말을 타고 다닐 정도의 장성한 사람으로 지었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도에 의해 창조한 것입니다.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심고 태어난 아들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채찍에 몰려 쫓겨난 우리의 조상입니다. 그런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아담아, 사랑하는 해와야, 내가 너희를 만우주의 창조목적의 세계, 사랑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해 지었으니 너희는 평화의 왕이요 행복의 왕이다’ 하는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땅 위에 다른 어떠한 존재도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조상만이 왕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천추만대 영원무궁토록 지상의 왕이요 천상의 왕으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지가 생겨난 이후에, 신과 사람의 인연이 생겨난 이후에 비로소 ‘왕’의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의 조상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 왕은 곧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입니다. 만약 아담 해와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조상이 되었던들, 왕이지 뭐겠어요? 그렇게 되었으면 우리는 모든 존재세계 앞에 왕자로 탄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담을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생명과 영원토록 동반할 수 있는 황태자로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해와를 황후로 등극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조상인 아담 해와를 대해 원망해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쌓여온 하나님의 분함은 칼을 들어 그들의 목을 쳐도 풀릴 수 없겠다’하며, 과거 조상들의 천륜을 배반한 사실을 오늘의 생활에서 크게 느끼고 격분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를 축복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인간과 천지의 창조 이후 하늘의 왕자가 오지 않았기에, 그 왕자를 등극시키려는 것이 재림사상입니다. 재림사상. 믿으면 천당간다는 것은 막연한 신앙입니다.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신앙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식을 통하여 세상을 수습해 나오고 있으며 인간을 그 목적의 세계로 몰아내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왜? 목적을 이룰 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를 몰아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인간을 치며 역사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민족을 세웠다가는 칩니다. 그렇게 들이치며 역사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노정은 직선이로되 가고 있는 길은 꼬불꼬불합니다. 꼬불꼬불하게 가고 있어요. 그러니 들이쳐서 개인을 움직이고 가정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이고 국가를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9-319
세계통일, 천주통일을 이루어야 할 재림예수
오늘날 세계의 사조는 두 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좌우(左右), 유심(唯心)과 유물(唯物)로 갈라져 있는데 이들은 어느 한날 서로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부딪치는데 기쁨으로 부딪치느냐 공포로 부딪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공포로 부딪치는 날에는 전세계는 사망이요, 기쁨으로 부딪치는 날에는 전세계는 행복입니다. 위협과 공포로써 하나를 만들고자 하면 끝이 있으되, 평화와 기쁨의 내용으로 하나를 만들고자 하면 영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로에 놓여 있는 현실입니다. 더우기나 이런 현실에서 최고의 제물된 입장에 있는 것이 한반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불쌍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떨어졌습니다. 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떨어진 기독교인들에게조차 배척을 받는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시간을 넘고 시대성을 넘어서 보고 듣고 느껴 낙망하지 맙시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거예요. 시간관념권 내에서 느끼는 만족은 얼마 안 갑니다. 쉽게 해명할 수는 없지만 초월적인 그 무엇을 체휼합시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의 의식관념을 제거시키지 못한다는 기준을 갖고 하늘을 기반으로 자기의 가치를 하나님의 목적의식과 결부시키는 하늘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는데는 개인이나 가정, 혹은 사회나 국가나 세계에 어떻게 천적인 심정을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런 내용을 인간에게 충격시키십니다. 해결해야 할 심정적이고 생명적인 내용을 갖고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예요? 맹목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이쿠 할 것입니다.

나는 의식세계를 넘어선 창조목적의 세계를 원합니다.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거기에서 무궁무진한 평화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 존재가치를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보는 것도 그러하고 느끼는 것도 그러하여 인간이 비록 작은 존재로되 ‘한 개체가 움직일 때마다 천지가 움직이고, 하나님의 심정이 움직이고 영원한 생명이 움직이니 놀랍소이다’하는 피조만물로부터의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인간이 가야 할 곳이 그런 곳입니다. 존재목적의 가치와 그 의식이 하나된 세계, 우리들이 느끼는 감각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진대, 우리의 생명을 통하여 양심을 넘어 심정의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영원한 생명의 감촉은 인간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도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조나 풍습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폭발시켜 만인간에게 접촉시켜 준다 할진대, 세계는 통일이 될 것입니다. 천주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재림예수는 실제로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맞을 수 있지요. 생각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또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이 괜히 해보는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목적의식은 나를 추궁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데 환경은 그렇지 않으니 ‘이게 웬일입니까?’ 하고 호소한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양심의 깊은 곳에서는 자유와 해방, 통일과 귀일, 무한한 행복을 노래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살고 있는 생활환경은 어떠합니까? 공포와 위협이 나를 결박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수천년 동안이나 이렇듯 결박당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온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가까웠거늘, 이 결박을 풀고 하나의 목적의식을 통하여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적인 존재, 하나님도 어쩔 수없이 심정적인 인연을 맺고 그가 지옥으로 가면 지옥에까지 따라 가실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심정적인 귀일점을 갖춘 분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어요.

여기에서 외치는 이 사람은 지금까지 이 민족 앞에 반대를 받았으나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어림없습니다. 두고 보자 이겁니다. 한날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나가는 것입니다. 입이 있음에도 말하지 않고 눈이 있음에도 보지 않고 귀가 있음에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분한 일이 있어도 세상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거기에서 반응이 없다면 보따리를 싸 짊어지는 거예요. 반응이 있으면 10년, 혹은 20년이 걸려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9-321
타락세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앞으로 세계는 심정주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 세계가 이루어지는 때가 이 땅 위에 평화의 왕권을 갖고 하늘 왕자가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가 바로 재림시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생명, 심정의 왕자가 등장할 그 때, 여러분은 그를 모시고 따라 그와 부자의 인연을 맺고, 가족의 인연을 맺고, 백성의 인연을 맺어 세계를 재건설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적의 세계, 지상천국의 이념입니다. 맹목적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 목적의식이 강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당신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아버지로소이다’ 할 수 있는 충격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먹을 움켜 쥐면 천지가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연결된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목적의 세계를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생활적인 것과 영원한 생명적인 것을 위해서 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이 땅 위에서 자기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생사 문제입니다. 세계를 통일할 수 있고 세계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영생에 관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초월적인 생명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인연된 어떠한 무엇을 땅위에 세워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지, 그러지 않고서 사랑의 하나님은 무슨 사랑의 하나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한한 생명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양심의 혁명도 못하고 생명의 혁명도 못했습니다. 자식이 죽는 것을 보며 좋아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타락한 이 세계에서 타락의 혈통을 이어받아 타락의 피가 흐르고 죽음의 자리에 처하더라도 자식들은 기뻐 뛰며 그 자리를 넘어가 주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천국갈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간섭 못하십니다. 예수가 온 것은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문이예요. 예수가 온 목적도 ‘나’때문이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것도 ‘나’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을 수습하고 시간성을 넘어서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면, 천지가 생겨난 이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아들딸을 택하실 것 같습니까?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까? 만일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아들딸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를 택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물은 반드시 이 타락의 세계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포가 엄습해 들어오고 환경이 어지러운 이 세계를 마음의 기반을 잡아 수습하고 자유롭게 개방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945년 이후 20년 내에 세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입니다. 그 세계는 경제력을 갖고 지배할 수 없습니다. 정치력을 갖고도 지배 못합니다. 기성종교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문화나 역사로도 지배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꾸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런 때에 들어와 있습니다. 급속도로 흘러가고 있는 역사적인 사조는 반드시 어느 한때 돌아서야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냥 흘러간다면 지옥행입니다. 반드시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는 데는 무엇을 축으로 하여 돌아서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과 생명을 축으로 하여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력과 더불어 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인간에게 다리를 놓아주는 중보자로 오신 예수였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자기가 어떤 전문분야에서 세계적인 자랑할 만한 무엇을 했다 해도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9-323
주고 받는 데서 벌어지는 사랑의 세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최후에 승리자가 되어 하늘 앞에 나서는 날 이 세계는 어떠한 세계가 될 것이뇨?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사랑의 심정만이 있는 안식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세계는 공포를 내재하고 공포를 동반한 이 세계의 인식과 관념 위에서 허덕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려 한 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형제 아닌 형제, 부모 아닌 부모, 즉 모든 백성들이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조화라는 것은 주고 받는 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상대적 관계에서 조화의 묘미는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기에 하늘의 생명과 땅의 생명, 하늘의 사랑과 땅의 사랑이 서로 주고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것은 무엇이뇨? 그것은 이제까지의 역사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창세 이후 처음으로 있게 되는 개벽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한번 보면 영원하고 한번 들으면 영원한 세계입니다. 오관을 통하여 한번 느끼게 되면 전체가 하나되고 마는, 그러한 느낌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또, 내재된 감정이 자동적으로 폭발되어 몸을 움직이고 생활분야까지 움직일 수 있는 영원하고 근본적인 세계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러한 세계를 이룰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만 되겠습니다. 그런 세계를 창조해야 하나님도 멋있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되어야 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양면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눈도 플러스(+) 마이너스(-)로 되어 있습니다. 전부 그렇습니다. 마음은 하늘과 하나되고, 몸은 땅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인격을 닮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고 체휼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세계가 그런 세계입니다. 거기는 일단 가기만 하면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 놓아도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갈 수 없어요. 사실이 그래요. 한번 듣고 나면 모든 세포가 움직입니다. 망상이 아닙니다. 한번 느끼면 그 느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편입니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를 수습하여 그러한 소망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내재적인 심정세계와 실질적인 외형세계를 하나로 느끼어 만물을 호령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거친 만물이 그런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에 로마서에서 바울은 ‘만물도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탄식할 일입니다. 하늘세계의 내용을 체휼하고 실체세계의 사정과 환경을 수습하여 그 내재적인 무한한 세계와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은 아무도 끊지 못합니다. 세상의 사랑도 끊을 자가 없는데 그 세계의 인연은 더욱 끊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세계와 연락될 수 있는 백성이 나와야만 됩니다. 그러한 백성이 나와야, 우주사적인 가치를 넘어서고, 우주사적인 위치를 넘어서고, 우주사적인 목적 관념을 초월한 실체로서 인정받게 될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어떻겠어요? ‘너는 미국사람이요, 나는 한국사람이다’ 하는 관념이 있겠어요? 심정으로 ‘하나님! 아버지!’ 하면 전부가 하나입니다.

9-325
말세에 처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
그러기에 모든 존재는 이러한 목적의식의 관념을 중심으로 타락한 입장에서 재창조라는 과정을 거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재창조입니다. 깨어졌으니 다시 만들어야지요. 아무리 잘나도 깨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깨진 뚝배기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깨졌다는 거예요. 타락한 아담 해와의 모양을 그대로 닮 것이 여러분이니 별 수 있습니까? 깨졌으니 두드려 가지고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온유겸손하라 하면서 다 버리고 죽게 해 가지고 다시 빚어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창조입니다. 무엇 가지고 만드느냐? 심정을 가지고 만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실 수 있는 심정의 세계를 세워서 이 우주가 심정을 노래하며 심정 앞에 전부 기울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종말적인 이 세계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적인 입장에 있다 할진대, 우리는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려면 진리를 중심삼고 인격적으로 비판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움직이고 심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이 문제를 항의할 수 있는 청년 남녀들이 이 무지한 한국에서 나온다면, 이 민족은 그들을 중심삼고 세계를 지배할 날이 멀지않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합니다. 심정이 귀하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그 나라의 통치자 앞에 한 마음으로 귀일되어야 합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심정이 귀일되어야 효자, 열녀,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심정이 일치되어야 ‘충’자가 들어가고 ‘효’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각 교파를 초월할 수 있고, 각 종파를 넘어설 수 있고, 민족관념을 넘어설 수 있고, 지금까지의 사정이나 인정적인 모든 관념을 넘어설 수 있는 일대의 변혁이 천상과 지상에서 벌어져야 됩니다.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그런 세계가 세워질 때, 하늘과 땅,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춤을 춥니다. 이러한 세계가 되어야 오늘 말씀의 제목인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목적의식적인 감정을 수습한 후 종교적인 인연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사조를 준비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정적인 기반을 움직여 인간들을 난국에 빠뜨려 더 이상 살 길이 없게 만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도록 해놓고, 그 해결점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봅니다.

그러니 현실의 시간적인 감정을 천적인 감정이나 의식에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신만고의 노력을 다 해서라도 해결해야 합니다. 믿는 신도들은 전세계적으로 동원되어 교파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여 이것을 찾아 헤매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벌어져야, 그런 사람이 나와야 이 세계는 빨리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9-326
기 도
아버님, 이 길이 험하다 할지라도, 목적의 세계는 평화의 왕궁임을 알았사옵니다. 이 길이 험하고 오늘의 고충과 충격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민족과 세계를 망하게 하는 그 충격이나 타격만큼 크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탄식하는 저희 일신이 해방되기 전에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영계와 예수님과 성신, 하나님이 해방받아야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사옵고, 그분들을 해방시켜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 아니었고, 삼위신이 삼위신 자신들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이념으로 세웠던 목적의식을 통과하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신이 세계를 이루기 위해 수고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건설하여 그 속에서 노래하며 기쁘게 살기 위해 목적의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저희들은 윤곽적으로나마 들었사옵니다.

저희의 존재의식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생활감정은 어디로 움직이고 있사옵니까? 저희 한 자체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륜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의 가치를 논하고 주위 환경을 수습하고, 세계를 수습하는 한때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날이 타락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모든 것을 저희 자신을 중심삼고 해결짓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이고 천주사적인 중요한 시대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임을 망각하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때가 오기를 당신은 끝날이 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옳습니다. 지금의 때는 누구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니라, 자기의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하늘의 가치와 연결지어야 할 때이오니, 새로운 세계의 이념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무리가 이 땅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오늘 내려진 말씀을 듣고 이들이 느낀 바가 있사옵고 새로이 각오한 바가 있사올진대, 그 생명이 영원토록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함께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