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2 to 9-300: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
1960.06.12 (일), 한국 전본부교회

9-272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
요한복음 3:16-21

[기 도]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간곡한 마음으로 하늘을 찾아나서는 자에게는 시간과 처지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언제든지 길잡이가 되어 주셨사옵니다. 저희들의 울타리가 되시어서 모진 원수들의 화살을 홀로 받으시며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오늘까지 살아 남아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해주신 은사에 먼저 감사드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사옵니다. 스스로 잘났다는 사람도 많사옵니다. 그 가운데서 만물보다 못한 저희들을 불러 세우시어 인연 맺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인연맺어 주시고, 형편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도 긍휼의 손길을 펴 주셨사옵니다. 저희들을 인도하시기에 저희보다 더 수고하신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진실로 아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에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 기쁨은 아버지 것으로 돌리고 슬픔이 있으면 아버지 앞에 돌리지 않고 저희의 것으로서 책임지고 청산할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이 되기를 저희들은 바라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한스러운 6천년의 기나긴 역사를 홀로 책임지시고, 버려 마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신 채 앞장서서 싸우시며,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저희 인간들의 생명문제를 책임져 나오신 아버지, 그 과정에서 저희들의 슬픔보다 아버지의 슬픔은 더 크고 저희들의 실망보다 아버지의 실망은 더 컸사오나, 세우신 부자의 인연이라는 천리의 원칙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인간을 두고 돌아설래야 돌아설 수 없는 너무나 한스럽고 애달픈 심정을 지니신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니시고, 쓰러진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 찾아가셔서 쓰러진 자들을 붙들어 일으키셔야 하는 아버지의 사정과, 핍박받는 자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 찾아가셔서 핍박받는 자들을 구해 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서글픈 아버지의 입장을 저희는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그런 아버지를 모신 아들딸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는 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고 저희가 어떠한 불쌍한 처지에 놓인다 할지라도 거기서 낙망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천성의 한 뜻을 세우기 위하여 싸움을 각오하고 나가게 될 때에 어떠한 핍박의 화살이 날아온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않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당신은 그런 아들딸을 얼마나 고대하셨사오며 그런 아들딸을 맞기 위하여 사탄과 싸운 날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지 못하신 채 탄식에 탄식을, 한에 한을 거듭해 나오셨사옵니다. 이날까지 지치는 것도 개의치 않으시고 또 다시 인간들을 붙들고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 앞에 저희들은 모든 정열을 기울여 아버지를 위안해 드리고, 아버지의 어려움을 도맡아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성경 말씀을 보았사오니 2천년 전에 외로이 왔다 가신 예수의 사정이 어떠했던가를 저희들이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이 땅 위의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전체를 제물로 드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염려의 마음을 가지셨사옵고, 그 모진 어려움도 달게 받으셨사옵고, 외로운 자리도 즐겨 가셨사옵니다. 그런 예수님의 외로운 모습을 이 시간 저희들이 동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는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싸우신 것이 아니라, 죄인된 뭇 중생을 구하는 동시에 사망권 내에 있는 이 세계를 하늘세계, 즉 광명의 세계로 이끌어 내시겠다는 천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싸우신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전체 생활환경은 어느 것 하나 기쁜 것이 없었사옵나이다. 가는 곳곳마다 핍박이 있었고 가는 곳곳마다 억울함이 앞을 가로막았사오나 그는 탄식하지 않았사옵니다. 낙망할 자리에 처해도 결코 낙망하지 않았사옵니다.

소망의 세계를 위하여, 미래의 천국을 위하여, 아버지의 경륜을 바라보며 참아 나오신 그 뜻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제 여기 모인 아들딸들, 비록 2천년이라는 역사적인 거리는 있사오나 심정적으로는 2천년 전 예수의 심정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천적인 책임을 짊어진 입장에서 아버지를 대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외로운 심정을 붙안고 이 땅 위의 인류를 대신하여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이 민족과 이 세계 인류 앞에 호소하여 그들을 아버지와 인연맺게 해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과 대하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심정과 같이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뜻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저희가 은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무릎을 모으고 외로이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식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염려하며 부복한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맡고 있는 제단을 아버지 친히 붙들어 주시옵고, 영광의 품에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것을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275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입니다.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9-275
피조세계의 최대의 소망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더 나아가서는 환경적으로나 새로우면서도 크나큰 그 무엇을 맞이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무엇을, 더 귀한 무엇을, 더 가치있는 무엇을, 더 높은 무엇을, 더 빛나는 무엇을 고대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이 그러하듯이 개인이 모여서 된 민족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하고, 세계도 그러하고, 이 세계를 넘어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존재세계의 모든 피조물도 더 높고, 더 귀하고, 더 빛나고, 더 영광스러운 그 무엇을 고대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활을 통하여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이나 인간, 혹은 유형세계나 무형세계나 궁극적으로 무엇을 맞이하는 것이 제일 기쁠 것인고? 그것은 잃었던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아니요, 죽어간 부모가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니요,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찾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 것인고?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 더 큰 기쁨과 이 이상 더 큰 영광과 이 이상 더 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고, 온 피조세계를 넘어 쉴 새 없이 허덕이는 목적은 무엇이냐? 허덕이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위치를 잡기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치는 인간 자신만으로서는 잡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만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천주를 창조하신 절대적인 주인공이 있다면 그 주인공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물들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일 것인고? 어떠한 주의나 주권하에 머무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성현현철들의 지혜 밑에 처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공, 즉 절대자 하나님의 무릎 앞에 모이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요 최대의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들이 요구하는 이념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좀더 고차적인 이념, 지선(至善)을 중심삼은 이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으로까지 뻗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거든 우리의 민족정신도 그러하여야 되고, 세계의 문명도 그러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 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절대적인 주인공을 위주로 한 이 세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그런 절대적인 가치의 세계를 추구해 나왔지만 ‘이것이 만인이 다같이 향유(享有)할 수 있는 바로 그 세계다’ 하고 주장한 자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미해결의 상태에서 해결의 한날을 보기 위하여 역사를 끌고 나가는 이 세계는 달리고 있습니다. 민족을 이루고 있는 백성들도 달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륜을 세워나가는 하나님도, 인간도, 피조세계도 그곳을 향하여 총행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이 세계를 찾아오시고 인간들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만우주의 피조물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역시 마음으로 의지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바라는 최고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시기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되는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고 계십니다. 인류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는 인류는 어느 한때 그 하나님을 맞이할 것이냐? 맞이한다면 어떤 사람이 먼저 맞이할 것이며, 어떠한 백성이 먼저 맞이할 것이냐? 궁금합니다. 어떠한 주의나 어떠한 사회, 혹은 어떠한 종교를 통하여 찾아오신다 할진대, 어떠한 형태를 거쳐서 찾아오실 것인가? 하나님과 인간이 상봉하는 최후의 시간은 언제일 것인가? 이것이 궁금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그의 심정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세기말적인 이 시대,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하는 이 때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277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종교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세계를 찾아오시는데 어떠한 모양으로 찾아오실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전체의 분야에 걸쳐 찾아오십니다. 지금까지 4천년 원한의 역사를 지닌 한국을 중심삼고 본다면 4천년 동안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찾아오셨어도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모른 것이지 어느 한때도 찾아오시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야, 어떠한 계층을 막론하고 찾아오고 계시기에 상하고저(上下高低)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은 그 한 곳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분야를 찾아오시되 거기에 중심적인 한 곳이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인간의 양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을 중심삼아 찾아오시는 목적은 그 한 개체만을 찾기 위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체를 통하여 전세계를 차지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양심가(良心家)들을 격동시켜 세계적인 이념을 향하여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 분야에 있어서 책임을 지고 나오는 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인류역사를 회고해 볼 때에, 어떠한 문명도 그 근본지주(支柱)는 정신입니다. 시대 시대를 넘고 세기 세기를 지나면서 역사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연면히 이어나오는 정신적인 지주의 입장에 있는 것이 무어냐 하면,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아닙니다. 불교를 보십시오. 유교를 보십시오. 기독교를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시대는 변해 그 창설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변하지 않고 끝날에 이룰 목적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를 수습하여 하나의 목적세계와 연결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양심의 방향을 향도하고 그에 따라 사회환경을 개척하면서 범위를 넓혀 나오고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종교를 통해서 세계는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섭리에 의해 종말시대에는 인간과 하나님이 상봉하여 인간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한날이 와야 합니다. 동서양은 물론 어떠한 인종의 차이도 넘어선 입장에서 그 양심과 심정이 변치 않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때가 기필코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싸움의 역사는 종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종교를 세워 시대적인 사조를 거슬러가게 하면서 한 목적지를 향하도록 지도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는 반면 인간 개개인의 마음을 수습하여 그런 방향으로 접선시키기 위해 역사해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늘이 그런 섭리를 해오셨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인간들은 역사적인 빚을 진 존재들입니다.

9-278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과 중심종교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찾아오십니다. 동시에 인간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우리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고, 영과 육, 즉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속사람이 무한히 즐길 수 있는 이념의 세계가 완성되어야 겉사람이 무한히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양심을 기준으로 속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속사람이 완성되는 날에 겉세계가 창조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끔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속사람의 인격의 가치를 중심삼고 천주적인 이념의 세계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인격자를 세우려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만일, 속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완전하고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완전하다 할 수 있는 사람, 즉 하나님도 즐길 수 있고 만민도 동할 수 있는 안팎이 겸비된 사람이 나타나서 그가 좋아하는 이념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이념이요, 온 인류도 기뻐하는 이념이 된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한 사람일 것이며, 인류가 맞이해야 할 최후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절대자되시는 창조주가 존재하는 한, 이 세계를 수습하고자 하시는 그 절대자와 더불어 이 세계를 가치적인 세계로 완결지을 수 있는 인격자가 지상에 출현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한사람, 그러한 가치적인 한 존재를 인간세계에서는 세워야 하고, 하늘세계에서는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어느 도(道)를 막론하고 최후에는 재림을 논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재림을 말하고 있고, 불교에서도 역시 재림사상을 설법하고 있고,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도주들이 세운 종교이념을 총완결하여 하나님의 심정세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섭리를 하셔야 하고, 하나님을 맞는 것이 목적인 인류도 인류를 대표한 하나의 인격자를 세워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상봉하는 것을 최후의 목적으로 세우고 지금까지 수많은 도를 세워 나오셨는데, 그 도주는 어떤 사람을 택하셨는가?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일개 민족을 중심삼은 사람은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일개 국가를 중심삼은 사람을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중심삼은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무대가 세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도에서 발상된 불교를 보더라도 그 이념은 세계적인 이념입니다. 세계적인 관점을 가지고 현실적인 생활무대를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세계의 이념까지 내포한 종교라야 끝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하늘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기성종교들을 다시 한 번 헤아려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운 종교를 위주하여 이 세계를 수습해 나간다 할진대, 그 중심종교는 동서양을 망라하여 문화사조를 움직이고 사상과 문명에 공헌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가 세계의 문화사에 공헌을 하였는가. 또 그 공헌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것인가, 지역적인 범위에 그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지역적인 범위에서 가치를 발휘한 종교는 그 지역을 통솔하여 더 큰 이념의 종교에 연결시키기 위한 중간적인 사명을 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많은 종교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수습되고 수습되어 지금 형태를 갖추고 남아진 것으로서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와 회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세계를 기필코 한 목적의 세계로 몰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세계적인 이념을 내포하고 현실의 생활무대를 여기에 융합시킬 수 있는 도(道)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동시에 현실의 생활에 있어서 시대적인 문화를 융합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춘 도라야만 끝날까지 남아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불교도 일면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유교도 일면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불교는 영적인 면으로 치우쳐 인간이 처한 현실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있으며, 유교는 하늘, 즉 영계의 내용을 모른체 삼강오륜을 중심삼고 인륜적인 분야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이 두 면을 화합한 실제적인 종교, 즉 아무리 역사가 변천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혁명적인 변천이 잇따르고 환경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생활적인 감정을 그 시대와 더불어 융합시킬 수 있는 종교는 끝날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이러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러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섭리하신다면 이 종교의 흐름은 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흘러나가야 됩니다. 어느 한 곳을 향하여 흘러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출발지는 다르되 도달하는 목적지는 한곳이라야 합니다. 흥해도 그곳을 향하여, 쇠해도 그곳을 향하여 움직여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인류 앞에 공헌한 국가도 많지만, 그 국가의 주권이 종교적인 이념 밑에서 움직여 가지고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는 어떤 나라일 것이냐?한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고 역사를 거쳐 나온 국가는 많지만, 수많은 종교가 들어와서 그 이념의 국가의 주권을 좌우하는 국민들의 생활전체를 움직였던 역사를 가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9-281
종교를 통한 섭리에 있어서의 한국의 입장
개괄적으로 한국의 종교를 살펴보면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들어와서 일대의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 시대의 국민은 물론이요, 사조와 주권까지 좌우했습니다. 종교의 기원지가 어디이든지 창설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종교문화를 꽃피운 나라가 한국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상했지만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 들어와 가지고 국가와 주권을 움직여 판가리 싸움을 하였습니다. 또 그 이후 이조시대에는 유교가 들어와 나라의 주권을 지배하고 사회제도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근대에는 기독교가 들어온 지 80여 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를 움직여나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볼 때, 극동문화와 서구문화는 기필코 그러한 하나의 기점을 중심삼고 융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천륜의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극동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나와 가지고 명치(明治) 45년, 대정(大正) 15년, 소화(昭和) 20년, 모두 80여 년의 역사를 거친 다음 그 제국주의는 망했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국가로 등장하였을 때, 여기에 공포를 느낀 중국이나 소련(帝政러시아)은 한국을 놓고 싸웠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동기가 어디에 있었느냐? 일본이 극동에서 융성해감에 따라 그 세력 무대를 넓히기 위해 한국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한국을 놓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고자 벌인 싸움이 청일전쟁입니다. 또한 노일전쟁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결국 한국을 수중에 넣고 36년간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청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삼켜 자기들의 수중에 넣으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은 것 같았지만 손을 떼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새로운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또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는 무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세에 있는 이 민족은 공산주의가 어떻다는 것도 알았고, 민주주의가 어떻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공산주의도 민족을 삼켜 버리지 못합니다. 공산주의가 어떻다 하는 것을 그 끝을 보아 다 알고, 민주주의가 어떻다 하는 것도 그 끝을 보아 다 알고 있습니다. 다 보았습니다.

시대적인 사조에 입각하여 볼 때에 오늘의 이 한국, 이 삼천리 반도를 점령하여 영원한 복지의 무대로 만들 수 있는 주의는 무엇일 것인고? 또한 외적인 분야만이 아니라 내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종교심이 강한 이 삼천만 민족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일 것인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형편에 봉착해 있습니다.

한국 백성은 석가모니를 보지 못했고, 공자도 보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주장한 종교의 밑바닥을 다 구경했습니다. 세계적인 대종교를 주장하던 도주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 도의 밑창은 다 보았습니다. 다 보고 나니 그것들은 이 민족 앞에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반당하고 돌아서야 할 것들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불교, 유교, 기독교가 형태를 갖추고 지금까지 남아 있으되 불교는 불교대로, 유교는 유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도(道)들이 최후에는 어떠한 해결점을 지어 놓고 이 민족의 운명과 동반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들은 새로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조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은 세계문명의 전시장이 되었습니다. 이 한국은 수많은 민족을 대해 보았습니다. 미국을 위주로 한 유엔기구에 가담한 수많은 종족들을 대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어떠한 주의나 이념도 이 민족에게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은 공산주의가 점령했습니다. 그 북쪽은 공산진영의 초점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은 민주진영의 초점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민족이 공산주의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것도 아니요, 민주주의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종교를 세워 모든 역사를 수습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신다 할진대, 오늘날까지 한국 백성을 대하여 해 나오신 섭리는 실패였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한국에서 완전한 발판을 갖지 못하고 돌아섰다고 해서 한국 백성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섭리가 실패로 끝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이 민족으로 하여금 종교이념을 중심삼고 그 문화적인 한계를 달리하며 살아 나오게 하셨던고?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은 현대의 문명세계에 공헌한 이념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족적으로 어떤 특별한 무엇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한국이 등장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 할진대, 이 한국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고? 이것이 우리 청년 남녀들이 염려해야 될 문제입니다.

9-283
신앙의 본질
우리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세운 교리, 공자가 세운 교리, 예수가 세운 교리의 밑바닥을 다 들여다 보았지만 그것들은 이 민족에게 맞지 않아 다 지나갔습니다. 아까 봉독한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道)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최후에는 도(道)보다도 사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류는 종교라는 형태를 가질 것이 아니라 종교의 도주를 가져야 할 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도주를 가질 수 있는 이념과 사상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실패입니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머물 곳은 어떠한 예배당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불교도 아닙니다. 유교도 아닙니다. 최후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셨으니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민족 앞에 외치고 싶은 것은 ‘불교를 믿으라, 유교를 믿으라’ 혹은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석가모니를 가져라, 공자를 가져라, 예수를 가져라’는 것입니다. 천륜이 이렇게 나온다 할진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인고? 그 민족은 종교를 갖는 민족이 아니라 종교의 도주를 갖는 민족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에 불교의 일색만을 갖고는 안 됩니다. 유교의 일색만을 갖고도 안 됩니다. 기독교의 일색만 갖고도 안 됩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대도주(大道主) 세 분이 서로 상봉하여 공동의 목표 아래 하나의 세계를 이룰 것을 결의한, 하나님께서 공인하실 수 있는 그런 이념적인 내용을 갖춘 주의와 종교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였거늘, 도를 창시한 주인공이 끝된 나중에 나타나서 처음과 나중을 맞추어 가지고 우리의 심정, 우리의 생활, 우리의 사회, 우리의 세계에 생명의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내지 않는 한, 도(道)의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믿을 것이 아니라 그 도주를 믿어야 합니다. 교를 가질 것이 아니라 도주의 최고의 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도 백만 이상의 기독교 신도들이 있지만 성경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장로교니 무슨 교니 하며 갈라져 있습니다. 통일교도 그 중의 한 교파 모양으로 되어 있지만 어떠한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간판을 버리고 예수를 가지려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각 종교가 그러한 실체현현(實體顯現)을 완결시키도록 세계의 이념은 움직여 나가고 역사는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도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전세계의 이념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하늘이 세운 하나의 주인공을 상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예수를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파적인 도(道)로 세웠으니 오메가적인 도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역사의 종결과 더불어 어느 한 때에 한 개체를 대해 ‘너는 알파도 되고 오메가도 된다’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극히 작은 나라입니다. 어느 큰 나라의 한 주(州)보다도 더 작은 나라입니다. 이런 작은 나라가 극동에서 4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쳐온 것만 해도 신기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종교든지 다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느 사조의 냄새도 다 맡아보았지만 이제는 모두 싫다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슨 주의도 싫고, 무슨 정당도 싫고, 무슨 종교도 다 싫다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계 인류가 이런 입장에 있다 할진대, 이런 인류를 하늘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최후의 수습을 해야 할 섭리가 있는 연고로 그럴 수 있는 한 지역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다 싫다고 집어 던질 수 있는 나라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9-285
각성해야 할 한민족
만일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현현하신다면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 이 세계를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나타나시어 세운 도(道)라 할진대 그 도를 불교에서도 틀렸다, 기독교에서도 틀렸다, 또 누가 틀렸다고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 종교를 세워 섭리해 나오시는 것은 모든 것을 최후에 나오는 하나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 종교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내용을 모두 절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은 갖고 있으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냥 그대로 나가 봐야 안 됩니다. 그러니 싸워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 두어 가지고 이 나라에 새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습니다. 각 교단이 다 싸워야 합니다. 나중에는 여러분들이 교직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는 설명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그러한 섭리를 하시는 하늘 앞에, 그리고 세계 앞에 극동에서도 지극히 작은 이 삼천리 반도가 역사적인 하나의 초점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암흑의 세계로 몰아넣느냐, 광명의 세계로 옮겨 놓느냐 하는 기로의 촛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 한국이 불을 켜는 날에는 세계가 밝아지고, 꺼지는 날에는 세계가 암흑 천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극동에서 선교를 하여 성공을 했다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입니다. 중국도 아니요, 일본도 아니요, 다른 어떠한 나라도 아닌 한국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운명에 따라 세계 기독교 전체의 운명도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오늘날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겠습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은 똑똑히 정신을 차려야 되겠습니다. 어떤 교권자의 농락을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주권자의 농락도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이 세계를 하나의 목적의 세계로 수습하시려 한다 할진대, 그것은 공산주의로도 아니요 민주주의로도 아닙니다. 기독교로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도(道)의 형태로도 아닙니다. 그 내용을 가졌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형태로는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로 수습한다 할진대 기독교는 불교나 유교 또는 수많은 종교를 포섭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도 된다면 역사노정에서 기독교만 남겨 두고 다른 종교는 모조리 없애 버리지 왜 심판 때까지 미루어 두었겠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굶고 앉아 있을망정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주시해야 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합니다. 바라보는 데는 현실만을 보지 말고 오랜 역사를 거쳐 우리가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게 된 근원과 동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9-286
최후의 문제는 심정
선한 것은 무엇이고 악한 것은 무엇이뇨? 선한 것을 간단히 말하면 처음과 나중이 같은 것입니다. 선한 것은 처음과 나중이 같습니다. 억천만년이 가더라도 같은 것이 선입니다. 진리가 그렇습니다. 한번 출발하면 억천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같아야 합니다.

반면에 악한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건 어떠한 주의건, 혹은 어떠한 사조나 종교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안 됩니다. 심정세계에서 변천과 발전이 없는 한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생활환경은 아무리 변해도 심정의 세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심정세계에 발전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연과 동기가 연결된 사정을 중심삼고 심정에 엉클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나라의 백성이면 애국심을 갖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부모를 가졌으면 그 부모를 심정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그냥 그대로 이렇게 나간다면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종교도 의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저 교회나 왔다갔다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또 물질에 좌우되는 종교여서도 안 됩니다. 돈이나 갖다 주면 기도를 해주고 염불이나 해주는 그런 종교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잘났다고 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도(道)로서 갖추어야 할 최후의 것은 무엇이뇨. 심정입니다. 심정.

세계가 종단(終端)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 우리 한국 백성도 맨 끝에 와 있습니다. 더 가질래야 가질 수 없고, 더 바라볼래야 바라볼 수 없는 끝에 와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최후에는 종교의 탈을 쓰고 또는 어떠한 이념이나 주의의 탈을 쓰고는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어떤 주의를 가지고는 못 나타납니다. 어떠한 종교의 이름만 가지고는 못 나타나요. 무엇을 가지고 나타나야 되느냐? 심정을 갖고 나타나야 됩니다. 자기가 믿는 도주(道主)이상의 사무친 심정을 갖고 하나님을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날에 있을 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도를 심판하게 될 때, ‘네가 몇 년 믿었느냐? 교회를 몇 개나 세우고, 법당을 몇 개나 세웠느냐?’고 하시지 않습니다. 몇 천 개든, 몇 만 개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최후의 문제는 심정입니다.

천상의 독생자인 예수께서 만민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와서 도를 펴시던 애달픈 심정,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면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던 심정, 그런 심정을 가진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도를 믿어 복을 받고 내 아들딸이 잘 살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도가 아닙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겠습니다. 믿을 자가 누구입니까? 없습니다. 바라볼 자가 누구입니까? 없습니다. 소망을 가질만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종교도 없고, 소망을 가질 주의나 사상도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더우기나 우리 한국 백성은 세계의 수많은 민족보다 더 믿을 것이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는 한국의 실정입니다.

현실의 모든 사정과 환경, 정세를 보게 될 때에 한국은 딱한 사정에 처해있으며 악조건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늘의 크나큰 섭리가 있습니다. 이때 하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끊어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이제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단결하는 데는 세상에 있는 어떤 종교를 중심삼고 단결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떠한 사회단체를 중심삼고 단결할 때도 지나갔습니다. 다 지나갔습니다. 공산주의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니요, 어떠한 교파도 아닙니다.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새로운 이념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이 민족은 단결해야 하겠습니다.

9-288
한민족의 살 길
한국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상이 있는데, 정도령사상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망해 들어가고 당장은 죽어가는 자리에 있더라도 앞으로 한국은 이렇게 된다 하는 사상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한국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최후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 것은 무엇이뇨? 옛날 도주들의 인격과 대등할 수 있는 가치와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수십년 동안 도를 닦아 도주가 된 그 가치를 갖출 수 없다면 심정만이라도 갖추어야 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도를 붙안고 억조창생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이여, 이 인류를 구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환경을 무시해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도를 닦던 석가모니나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와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민족이 살 길은 어떠한 교파나 주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망해 들어가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가 전세계를 품고 나타났던 것처럼 이 땅에 그러한 인격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비록 이 민족이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인격자를 세워서 세계적인 무대를 닦으려 하시는 하늘임을 알고, 이 말세에 어떠한 도주 이상의 심정을 갖추어서, ‘하나님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이 된다면 이 민족은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야 됩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처자도 잃어버리고 형제도 잃어버리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혼란통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나라는 잘 되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서 사랑하는 처자와 부모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연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내어 이런 불쌍한 운명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앞에 이 민족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할진대, 이 민족에게는 분명히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뇨?

예수는 말하였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이 민족도 자꾸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니 하나님은 이것을 다 끊어버리고 자연적으로 ‘하나님이여 살려 주시옵소서’ 하는 입장에 이 민족을 두신 것입니다.

이 민족 가운데 세계를 인도할 수 있는 어떠한 민족은 깨어서 심정적으로 합하여 하늘을 붙들고 옛날 도주들이 천상으로부터 도를 받고 나오던 그 이상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 이러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살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도의 세계에 가르쳐 주지 않은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땅 위에 보내지 못하신 하늘의 선지자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때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우주의 어머니야, 여호와의 부인이야, 혹은 내가 예수야, 내가 공자야’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파고다 공원에 가보십시오. 많이 있습니다. 그거 왜 그러는지 여러분 모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가짜가 나오면 진짜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렇지요? 천지의 이치는 상대적인 원칙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가짜가 나오면 진짜가 나옵니다. 이단이라는 명사, 적그리스도라는 명사가 나온 것은 진짜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종교계에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고 여기에서 외치는 이 사람도 이단의 괴수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최후에 남아질 것은 무엇이뇨? 어떤 도주가 주창한 교리나 경서가 아닙니다. 자선을 행하고, 사랑을 행하고, 또 무얼 하고 무얼 하는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때는 ‘네 속에 무엇이 있느냐? 내 놓아라’할 때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심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여 ‘이 끝날에 세계를 수습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하며, 그 아버지께서 한국 백성을 위하여 통곡하시면 나도 그들을 위해 통곡하고, 공산국가를 위하여 통곡하시면 나도 그걸 위해 통곡하고, 민주진영을 위하여 통곡하시면 나도 그걸 위해 통곡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통일교인이라고 해서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어떠한 교리에 능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굴복시키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 빼앗기고, 다 잃어버리고, 배척받는 자가 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백만장자가 자기의 유산을 넘겨줄 때에도, 무슨 대학의 학박사로서 능력만 있는 아들보다 일자무식이지만 심정으로 자나깨나 아버지를 염려하는 그런 아들에게 유업을 넘겨주지 않습니까?

오늘 이 나라는 누가 지배하느냐? 애국자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못하면 이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누가 이 세계를 지배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아들딸이 지배해야 합니다. 참다운 선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뛰어 넘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도의 심정을 통한 아들딸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밟히는 세계이니 망해야지요. 심판이 있어야지요. 없다면 내가 호소할 겁니다. 하나님께 항거라도 할 겁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9-291
한민족의 책임
내가 무엇이 없다고 한스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한스러워하지 말자 이겁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가에서 몰리고 천대받는 어부들이나 데리고 다니던 예수라는 존재가 로마를 정복하고 20세기의 문명을 움직이는 인격자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는 어부의 친구였지만 그 마음에는 세계의 심정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천지의 심정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원수라도 점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심정의 기준이 서 있었기 때문에, 세계는 그의 심정의 기준을 중심삼고 수습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의 심정은 인간의 심정이 아니라 천정(天情)이예요. 천정을 중심삼고 수습되어 나오는 역사이기에 그래도 그의 주의, 그의 이념이 지금까지 남아져서 명실공히 세계를 움직이는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이 없다고, 불쌍한 거지 모양이 됐다고 한스러워하지 맙시다. 옛날에 도를 따라나오던 우리의 선조들 중에는 옷 잘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잘 먹은 사람이 없어요. 고루거각에서 흥청대며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몰리고 쫓기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바위에 머리를 박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편안히 살 수가 없어 토굴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붙들고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한국 백성들은 무엇을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고, 기성종교도 아니고, 어떠한 이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 살아 계시고 세계의 심정을 갖고 허덕이는 하나님이시라 할진대, 그러한 심정을 가진 아들딸을 찾으심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우리 한국 백성들은 그런 입장에 제일 놓여지기 쉬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부모가 있습니까? 자식이 있습니까?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더우기나 땅이 있습니까? 집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피난민들이 와서 교회를 세우는 것을 보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심정에 사무쳐 울부짖는 마음을 갖고 하늘과 연결되어 나와야 할텐데, 그러지 않고 외적인 사조와 결탁을 해 가지고 움직이는 데 급급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를 갖춘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왜?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륜을 중심삼은 지정의가 아니라 천륜을 중심삼은 지정의입니다.

어떠한 도의 교리를 보더라도 출세하라고 한 것은 없습니다. 못 먹고 못 입고 희생하고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밟히라고 했습니다. 밟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도의 기준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민족이 이 민족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담판해야 합니다. 담판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실존주의니 뭐니 하는데 부지런히 찾아보십시오.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보란 말입니다. 어떻게 되나. 나중에는 절망과 고독에 부딪치게 되고, 개인주의적인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다시 변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할 것 없이 현실의 조류에 따라 흘러나가 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자기네 주장대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갖가지 도를 중심삼고 나아온 민족이기 때문에 도를 중심삼은 민족성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 민족처럼 신앙심이 강한 민족이 없습니다. 외롭고 불쌍한 처지에 놓여지게 되면 곧 점장이한테 가서 물어 봅니다. 요즘에도 그래요. 상하를 막론하고 그러한 심정이 농후한 이 민족은 무엇엔가 귀의하며 살아야 할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종교들이 이 민족 앞에 거부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민족적인 종교가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민족적인 종교가 나와야 할 때가 왔고, 민족적인 주의가 나와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 주의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심정입니다. 심정. 이 민족은 이제 ‘하나님! 당신의 목적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 인류 가운데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민족은 세상적인 인연과는 먼 입장에 있으니 하늘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머리를 싸매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밥을 잘 먹고 배가 요만큼 불러 가지고 기도하란 말이 없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루는데 있어서 딴 민족은 안 하더라도 한국 민족은 해야 합니다. 이제 할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정을 압니까? 자기 부모의 심정을 모르니 불효를 하지요. 자기의 부모가 자기를 얼마나 심정적으로 사랑하고 어느 만큼 애지중지 길렀는지를 진정 아는 아들이라 할진대 불효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9-293
하나님의 작전법
오늘날 이렇게 처량하고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는 이 민족이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제일 깊이 통할 수 있으니 기도해야 됩니다. 머리를 동여매고 ‘하나님, 어찌하여 이 민족은 이렇게 되고 이 세계는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어봐야 합니다. 기도 제목이야 많지요. 한국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불쌍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찾아오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예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믿는 것 같고 좋은 자리에 선 것 같은 사람들도 죽어서 영계에 가 보면 형편없는 곳에 가 있습니다.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믿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내노라 하던 사람들이 영계에 가 보면 형편없는 데 가 있습니다.

천국은 심정의 세계입니다. 교리의 천국이 아니요, 교파의 천국이아니요, 심정의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백성과 교인을 찾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어떠한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들을 몰아내십니다.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시면서 그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전법은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어느 민족을 빼앗아 오려면 하나님이 가서 먼저 그 가치 만큼 맞으십니다. 세상의 작전법과는 다릅니다. 도인의 작전법은 열만큼의 가치를 찾으려면 열만큼의 것을 희생합니다. 그게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희생해서 천년후에 찾게 되면 그때에는 선의 무대가 세계적으로 넓어질 것이니 천년 후에 찾는 것이 지금 찾는 것보다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넓혀져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무대가 좁은 천년 전에 선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천년 후에 가서는 그 몇배로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2천년 전의 예수님도 그래서 희생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날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찾기 위해서 선한 사람들을 많이 희생시키셨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을 희생시켰으니, 사탄이 빼앗아 갔으니 한꺼번에 빼앗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맨 나중에 찾으려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몇 천 년 전에 잘 살고 잘 입고 잘 해보았댔자 하나님의 백성밖엔 못 됩니다. 종 아니면 백성밖에 못 돼요. 종의 종을 불러 역사하던 시대가 구약시대입니다. 종이 역사하던 시대예요. 선지자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들을 종에서 아들권내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 독생자로 오셨던 것입니다. 종시대의 열 사람을 희생시켜서 아들시대에 열 아들 찾는 일이라면 할 만한 일이지요.

하나님은 잔인한 분입니다. 천 년 만 년 후를 바라보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많은 희생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어느 국가에 들어가든지 그 교인들이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 떳떳이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그렇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 자신들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나에게서 이 잔을 면케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그걸 아는 예수님이셨으니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도를 통하여 살아 나오다가 도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은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종파를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도주도. 나중에는 예수를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뭐 석가모니, 공자를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하시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 신부를 세워 하나님 앞에 가서 축복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신부가 필요합니다. 신부가 없으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신부를 찾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9-295
심정의 참아버지를 모시자
오늘날에는 ‘아, 나는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우리가 최후에 교파를 잃어버리더라도, 그 어느 누구에게 배척받더라도 하나님만은 배반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은. 오늘날 이 한국사회에서는 예수님의 성가(聲價)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폭락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폭락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떨어졌을지언정 예수님 그 자신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밟히는 때입니다. 그러다가 심판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이 못난 자리를 거쳐 가지고 심판합니다. 심판은 새로이 출발하는 때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밟히기 마련입니다.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떠한 목사의 말도 겉으로만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이 젊은 사람의 말도 귓등으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부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체휼하며 들으라는 것입니다.

최후에는 여러분이 어떤 말을 듣고 맹세를 했댔자 그건 흘러갑니다. 누구를 보고 ‘야! 좋구나.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맹세했댔자 그것도 다 흘러갑니다. 최후에는 마음을 통하여 심정으로 맹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 못 해요.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보고 듣고 나서는 ‘누가 설교를 잘하더라’, ‘뭐 어떻더라’ 하는 것은 다 지나갑니다.

우리의 심정이 어떤가가 중요합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을 보면 딱 앉아 가지고서는 ‘아무개 목사는 이렇게 설교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구나’하며 전부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전부 다 재판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은혜받은 것 같아요? 은혜란 무한히 침투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끝이 없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화(不和)를 일으키면 거기에 은혜가 있겠습니까? 설교야 잘하든 못하든 그 자리에 들어가면 자기의 심정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바람결에서도 본연의 깊은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여기서 외치는 이 사람이 강조하지만 예배드리는 그 시간은 원수와 일격전을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자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아나가 모시는 자리에 예복을 안 입고 참석할 수 있습니까? 겉 모양의 예복이 아닙니다. 심정의 예복입니다. 이렇게 모인 여러분들의 모습이 불쌍하다 해도 그 마음에서 말씀과 더불어, 찬송과 더불어 감격된 심정이 흘러 나온다면 하늘은 여러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눈물을 흘리며 쫓겨났지만, 여러분은 눈물을 흘리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웃는 얼굴로 하나님을 상봉해야 됩니다. 슬픔의 눈물도 흘려보지 못한 자가 기쁨의 눈물부터 흘리면 안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잃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내 눈으로 찾은 하나님은 잃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내 귀로 들은 그 하나님, 내 촉감을 통해 느껴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심정으로 스며들어오는 그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간섭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나 권세가도 심정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을 떼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심정으로 사무쳐 들어오는 그 하나님을 모십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물들은 보다 좋은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훌륭한 스승이 아닙니다. 그 스승은 세상과 더불어 지나가 버리고 말 스승입니다. 지금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를 넘지 못하고 다 지나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니 하나의 이념을 향하여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의 통일적인 기준은 학리적(學理的)인 기준도 아니고, 조직적인 기준도 아니고, 세력적인 기준도 아닌 심정적인 기준입니다.

천만인이 대하는 그 하나님은 자기 부모보다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자기의 어떠한 사업보다도, 이 땅 위에서 귀하다는 어떠한 것보다도, 이 나라를 주고도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심정을 가진 사람만 이 세계에 나타나면, 세계는 하나님의 이념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통일 천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표준으로 움직이십니다. 심정! 심정의 귀일점을 향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참아버지입니다. 참아버지예요.

9-297
심정세계의 주도권을 한민족이 갖자
오늘날 인간들은 말뿐인 아버지는 알았지만 내용적인 아버지는 몰랐습니다. 슬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은 했지만 체휼하지 못했고 안타까운 하나님이라 했지만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효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심정을 알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정경을 보고 자기의 생사지경을 넘어서서 ‘주여, 웬일이십니까?’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놈의 열두 제자들! 베드로니 뭐니 하던 사람들! 배반자들입니다. 배반자. 배반자들이예요.

저는 한 때 베드로에게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뭐냐 이겁니다. 뭐 훌륭하다고? 훌륭하긴 뭐가 훌륭합니까? 예수님이 죽기 전에 믿음을 갖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간 베드로라면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있는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많이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분하신 하나님, 성나신 하나님, 매를 드신 하나님, 통곡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면 같이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땅을 대하여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조가 망하게 되고 어떤 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이 땅에 많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나 수많은 도인들은 도통한다고 합니다. 도통은 뭐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인간들이 심정을 갖고 있으되 그 심정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는 자들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였지만 참사랑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헤아려 볼 때에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데에 있는 우리이니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시대에서 몰리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몰려야 됩니다. 이단자, 괴수로 몰려야 합니다. 참을 위해 몰리다가 철창에 갇힌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그런 자리에서 엎드려 ‘주여’ 하는 사람에게는 천정(天情)이 녹아든다는 것입니다. 천정이 녹아져요. 철창이 하늘의 심정을 막아요?

여러분들은 여기에 아무런 감정도 없이 와서 앉아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 움직임이 있기까지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치지 않았다면 깨져야 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죽을 사람을 끌어다가 모아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인데 느껴집니까? 알겠습니까?’하면, ‘예’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는 도(道)가 끝날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기독교도 다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차지할 수 있는 움직임이 한국에서 나오기가 가장 쉽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왕 한번 해보려면 어리석은 자같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최고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리석게 알고 있습니다. 천만부당한 사실입니다. 그 심정의 기준을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곳에도 갑니다. 옥중에 있다면 옥중에도 가고, 토굴에 있다면 토굴에도 가고, 빈민굴에 있다면 빈민굴에도 갑니다. 세기의 난관이 있는 곳이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곳에 가겠다고 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진 통일신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 외치는 사람의 배포입니다. 편안한 자리서 그것을 즐기면서 웃고 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뒤넘이치는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문명의 첨단에 선 오늘의 세계 인류는 공동 운명의 자리에서 인간이 이루어 놓은 문명 앞에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 주의도 종파도 전부 다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하나님 한분을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는 데는 무엇을 갖고 점령해야 하는가? 사정도 물질도 어떠한 교파도 아닌 심정입니다. 심정을 갖고 점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되, 만우주를 움직일 수 있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 땅에 나타난다면, 이 한국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만천하 인류 앞에, 혹은 저 천상세계 앞에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시 그런 때가 오리라고 자신합니다. 이런 한국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인이 사랑하던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장로가 사람을 죽입니다. 이런 시대에’ 다 가라, 부모도 나에겐 상관없다. 다 지나가라’ 하며 부모 이상, 사랑하는 자식 이상, 이 세계의 어떠한 주의 이상의 다른 가치적인 것을 가진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나서도 감사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러한 이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수습 못할 것이 없습니다. 싸움이든 수백억짜리 금전 문제든 수습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권세를 갖추고 절대자의 심정의 권한을 갖춘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이 땅에서 행세하기 위한 것이 인간을 대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원컨대 그러한 섭리가 한국 땅을 통하여 이 세계 앞에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9-300
기 도
아버님이 거치신 길고 긴 그 노정에서 핏자국이 어려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그러고도 탄식과 서러움이 앞길을 막을 적마다, 통곡하시는 아버님의 형상을 볼 적마다 외로우신 아버님의 아들된 것을 원망하기도 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에서 많은 수고를 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분은 우리의 어떠한 선조가 아니요, 어떠한 애국자도 아니요, 이 세계의 문명을 위하여 공헌한 과학자도 아니옵니다. 우주 전체가 동원하여 영광을 드리고 찬양하여야 할 그분은 어떠한 도주(道主)도 아니요, 어떠한 지배자도 아니오라 홀로 수고하시는 아버님이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어 만민이 찬양하고 심정을 다하여 그리워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사옵니다. 역사상에서 수고하신 아버지요, 역사적인 고통을 받으신 아버지요, 피눈물의 제단이 연속되는 노정을 서슴치 않고 걸어오신 아버지인 것을 알았사오니, 그 아버지를 무한히 높이고 그 아버지를 무한히 찬양하는 소리가 이 민족을 통하여 울려 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은 아버지를 배반 하였사오나 아버지는 이 민족을 배반하지 아니하셨사옵고, 세계는 아버지를 배반 하였사오나 아버지는 세계를 배반하지 아니하셨고, 수많은 역사는 아버지를 거부하였사오나 아버지는 그 역사를 거부하지 아니하셨사오니, 온 천하에 그런 아버지를 자랑하고, 온 천하에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자랑할 수 있는 때가 어서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수고하셨사오나 당신을 대신하여 땅 위의 악한 세계와 싸울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은 갖지 못하셨사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아버지의 이념을 위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싸워줄 수 있는 백성을 갖지 못하셨사옵고, 아들딸을 갖지 못하셨사오니 얼마나 안타까우시옵니까?

어떠한 주의와 어떠한 사상을 위하여 죽은 자들은 있었으나 하늘을 위하여 간곡한 심정을 갖고 희생한 자를 찾지 못한 아버지이셨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한국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다 나은 환경이 되었사오니 여기에 심정을 기울여 세계적인 생명을 염려하시던 옛날 예수님의 심정과 수많은 도주의 심정을 넘어서서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있는 아들딸이, 여기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가 세계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셔야 할 입장에 있는 한국, 역사적인 위치에 있는 한국임을 알고, 심정으로 각오하고 결심하여 당신이 자랑할 수 있는 늠름한 아들딸의 기세와 모습을 어둠과 혼돈 가운데서라도 스스로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에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아들딸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남아진 전체의 시간 위에도 아버지의 생명의 권한이 떠나지 마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