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5 to 9-270: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다
1960.06.05 (일), 한국 전본부교회

9-245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다
요한복음 17:1-26

[기 도]

아버지, 분부하시던 당신의 음성이 그립습니다. 최고의 선을 향해 가라 하시던 비장한 그 음성이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가 남기신 핍박의 길, 고통의 길, 환란의 길, 골고다의 산정을 넘어 역사적인 비운의 길을 가라고 권고하시던 애달픈 당신의 사정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마음대로 자랐고, 마음대로 살았고, 멋대로 되어 있는 저희들을 모으시사 지극히 높으신 주의 성상을 닮으라고 하옵시는 황공한 은사에 머리를 숙이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본질이나 성품을 다 분석해 보아도 당신 앞에 내어 놓을 아무런 무엇이 없는, 죄악에 가득찬 저희들을 불러 모으시고 한량없는 축복의 은사를 베푸신 당신께 이 시간 감사드리옵나이다. 다만, 간절한 믿음과 심정 하나만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애달픈 그 사정과 심정을 저희들이 체휼하고 실증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떠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말을 들었고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하여 보았고 은혜스럽다는 자리도 찾아가 보았지만, 저희 자신과 관계맺지 못한 채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은혜는 은혜대로 지나가 버렸고, 사람들은 사람대로 지나가 버려 남은 것은 혼자밖에 없는 역사적인 고아와 같은 저희입니다. 때문에 저희는 새로운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은 은사를 허락하실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나이까? 저희들, 갈급하고 조급한 마음과 직고하는 심정을 갖고 아버지의 성상 앞에 모이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말하기 전에 마음 속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사무친 감격이 체휼되게 하여 주시옵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하여져서 눈물 흘리며 통곡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천 만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 체험이 더 귀한 것을 아옵니다.

지금 이때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속았기에 어떠한 말이라도 비판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오늘날의 성도요, 끝날의 사람들이옵니다.

비판할래야 비판할 수 없고 어찌할래야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 움직이는 그 하나만이 최대의 권한이요, 최대의 방패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께서는 이러한 은사로써 저희들을 울리셨사옵고, 저희들을 회개시켰사옵고, 저희들을 굴복시켰던 것을 아옵니다. 오늘 당신의 무릎 아래에 있지 못하고 먼 거리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멀다 할지라도 당신이 보시기에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당신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은 물건이 어디 있사오며, 당신이 생명의 권한을 갖고 움직이게 될 때에 부활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사옵니까? 해골떼와 같은 저희들을 다시 부활의 생명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더더욱 하나의 심정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이것이 천륜의 최대의 목적인 것을 말씀을 통하여서 알았사옵니다. 이래도 하나요, 저래도 하나인 것을 말씀을 통하여서 알았사옵니다. 하나의 심정의 동기를 갖추고 천상의 제단을 지키는 무리를 예수께서 얼마나 고대하였던가를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제 부족한 모습들이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배워서 안다 한들 얼마나 알며, 자랑할 무엇을 스스로 갖추었다 한들 천상에 내세울 것이 얼마나 있겠사옵니까?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조금 전에 봉독한 말씀은 2천년 전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30여 년을 사셨을 때 땅 위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끼시고, 제자들을 모아놓고 기도로 부탁하신 말씀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이들이 역사적으로 먼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때의 예수의 성상을 애달픈 심정으로 대할 줄 아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명보다는 사실, 사실보다는 심정의 체휼이 저희가 죽은 후에 수거될 것이요, 남아질 것임을 알고 있사오니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할 저희들 위에 친히 현현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말을 원치 아니 하오니 당신의 뜻대로 하여 주시옵고,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이나 전하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동하면 저희의 마음이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저희의 마음 또한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늘과 화(和)하고 동(動)해서 승리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바쳐지기를 바라옵나이다.

남아진 시간을 맡기오니 일체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지방에 있는 식구들에게도 같은 축복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247
말 씀
여러분들과 잠깐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다’입니다. ‘모든 것을 남기고 가신 예수님’, 이런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9-247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모든 존재물
이 땅 위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또 다른 소망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늘 땅의 모든 근본 진리를 정하고, 하늘 땅을 지으신 절대자되시는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 그 주인공까지 움직일 수 있는 기준을 완결지었다고 할 수 있는 어떠한 성현 현철도, 또한 다른 어떠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성공을 했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무엇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시대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대 시대, 혹은 세기 세기마다 지도자를 보내시어 경륜하시는 섭리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도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을 대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니 인간을 대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니 하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역사노정에서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이러이러한 성공을 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성공을 하여 자기 일대에 명성을 떨치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은 자가 없었겠지만, 자기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대로 이루고 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역사노정에서 새로운 혁명의 깃발을 들고 그 시대를 이끈 인물들 가운데에는, 그 시대의 환경에 휩쓸리고 그 시대의 사조에 힘입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기적인 사명을 이루고 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아무리 확고한 자신과 신념을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행동을 개시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임을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운명이나 인생행로는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크나큰 흐름과 함께 화하여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흘러 나가는 역사요, 이런 입장에서 자신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우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가 어떠한 곳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어느 한 때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물은 그러한 한 때와 한 장소, 하나의 환경을 소망으로 하여 나아가고 있고, 이 때와 이 환경을 수습하여 인류역사의 목적을 종결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한 때이며 사회는 어떠한 환경이냐? 그리고 이 때와 환경을 누가 지배해서 이끌어 갈 것이냐?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는 이때는 어떠한 때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냐? 또, 때와 환경을 조성해 가지고 어떠한 지도자를 맞자는 것이냐? 이것이 현대 인텔리 계급에 있는 지성인들이 고민해야 할 중대한 문제거리입니다.

어차피 그러한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 가야 할 역사노정입니다. 왜 그러뇨? 이것은 인간들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의 목적관을 세워 가지고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런 주인공이 없다면 이 역사는 소망하는 한 때와 환경을 향하여, 그리고 이념의 중심을 향하여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민족 감정이 저마다 달랐고, 역사적인 배경도 달랐고, 생활의 형태까지도 전부 달랐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류는 이런 것을 초월해서 종래에 가지고 있던 완고한 기반을 깨뜨려 버리고, 시대적인 모든 조직을 혁명하는 어떠한 사조에 휩쓸려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이어 나왔지만 그 배후에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의 목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절대적인 목적관에 이끌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9-249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주의
오늘날 인류는 그러한 한 때를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 평화의 환경을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 세운 후에는 인류의 영원한 심정세계로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향하여 역사가 흘러 나간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피조세계가 왜 그렇게 되어 있는고? 이 땅의 도인들이나 위인들은 대부분 이 세계를 수중에 넣고 한 때를 맞아 주도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일개 부류나 일개 민족, 국한된 범위에서만 실천했을 뿐, 세계적인 입장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이러한 대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만일 세계적인 대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때를 움직이고 환경을 움직여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천륜을 중심삼고 전인류를 통치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창조의 이념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을 두고 만물의 영장이니 모든 만물의 주관자니 하는 말도 전부 허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에는 그러한 한 분을 세워서 역사를 처리하고, 시대를 처리하고, 환경을 정리하고, 인격을 다시 갖출 수 있게 하는 때가 필시 와야만 됩니다.

이런 견지에서 관찰해 보면 어떤 종교나 주의가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특출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어나고 보니 한국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한국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극히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때와 하나의 환경을 찾아 세우려는 하나님이 있는 한 어디에 있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한국에 태어났다고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의 상황이 자기의 마음과 생활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탄식할 것 없습니다. 한국에 지도자가 없다고 탄식할 것 없습니다. 다만 염려할 것은 한 때를 맞이하게 될 때, 그 때를 대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환경을 맞이하게 될 때에 그 환경에 화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세계적인 어떠한 새로운 주인공이 나타날 때 그 분과 심정이 통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앞으로 역사는 씨족주의를 넘고 민족주의를 넘고 국가주의를 넘고, 어떠한 주의나 사조를 넘어서 심정의 귀일점을 향하여 흘러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럴 것입니다. 종족이 다르고 혈족이 다를망정 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따르는 마음,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 형제지간에 서로 위하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은 역사적인 어떠한 것으로도 혁명을 못했던 것입니다. 수천년 역사과정을 거쳐 왔지만 원칙적인 이 기준만은 영원히 본체를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역사적인 하나의 주의가 있다 할진대, 어떠한 주의일 것인고? 그것은 부모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만민을 대할 수 있는 주의일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가진 주의가 나오면 세계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모하는 힘보다 더 강한 심정이 이 땅위의 어느 한 곳에서라도 나오면 세계는 통일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쓰러져 가는 사랑하는 형제를 보고 사선을 넘어서라도 구하고 싶어하는 심정 이상의 심정이, 이 세계적인 사조 앞에 등장한다면 세계통일은 문제없는 것입니다. 그 외의 어떠한 학설이나 어떠한 주의, 어떠한 인격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종교라는 명사를 가진 어떠한 단체, 어떠한 교파를 분석해 볼 때, 심정을 무시한 종교는 역사노정에 남아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창조주를 대하여, 절대자를 대하여 아버지라 하고, 만민을 대하여서는 예수를 맞이할 신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땅 위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신부의 사랑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등장하는 날에는 세계는 통일됩니다. 죄악의 역사는 그것으로만 종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9-251
선한 사람을 희생시키며 섭리하시는 이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역사노정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악당들 앞에 희생시키고 학살시키면서 섭리해 나오셨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뇨?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그거예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시키느뇨? 사랑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신랑이라 했지만 신부로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아버지라 했지만 아들딸로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자, 하나님의 딸 된 자, 하나님의 가정에 식구 된 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 위에 등장해야 합니다.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전선만 이어지면 몇 천리까지도 전달되는 것입니다. 발전이 되려면 주고 받아야 됩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전기가 서로 주고 받아야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도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심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아무리 억만 장자라도 자기가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면 소유한 모든 물건이 아무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사탄 앞에 넘겨준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어떠한 것을 갖고 오셨던 것인고? 심정적인 주의와 이념을 갖고 이 땅 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주가 못 돼요. 설혹 구주가 되더라도 외적인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구주는 될지 모르나,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생명을 연결시켜 나가는 구주는 못 됩니다. 진정한 구주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춘 분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주가 그런 입장에 있는 분임을 느껴야만 됩니다.

오늘의 현실을 넘어서 우리 인류의 선조시대를 다시 한번 회상해 봅시다.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때, 하나의 환경, 하나의 중심존재를 고대하는 것은 우리가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이라는 명사를 접하기 전, 즉, 우리의 선조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세운 한 때를 이루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느 한 때에 이러이러한 환경을 이루고 이러이러한 지도자를 세워 놓겠다는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가지고 만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했던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한 때를 맞이하여 만물을 지휘하고 창조된 환경 전체가 그 호령에 움직일 수 있었던들, 오늘 여러분에게 탄식이란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가 하나님께서 세운 하나의 환경과 때를 맞아 지배할 수 있는 대표자가 되었다면, 오늘의 이 세계는 아담주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심정을 중심으로 너와 내가 한 형제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심정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조상에 의해 타락이라는 두 글자가 만들어진 그날부터 인간은 뚝 떨어졌습니다. 얼마만큼 떨어졌느냐? 국물도 없을 만큼 떨어졌습니다. 속을 보아도 죽었고 겉을 보아도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뒤적거릴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약을 주고 주사를 놓아서 다시 살리자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어냐? 떨어져 죽은 걸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약을 주든지 주사를 놓든지, 냉수를 붓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살려 놓자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면 살려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뇨? 한 때를 하나님과, 한 환경을 하나님과, 주도적인 행사를 하나님과 더불어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섭리를 하시지 않는다면 인류는 불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면 알게 됩니다.

9-253
때와 환경과 주권을 회복해야 할 인간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한 때로부터 영원한 때를 허락하셨고, 하나의 환경으로부터 영원한 승리의 환경까지 허락하셨으며, 하나의 책임적인 권한에서 영원한 책임적인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때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갖추어 주시고자 했던 환경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다시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인간들을 누가 이끌고 있느냐? 원수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임에도 불구하고 원수가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반대 방향으로 끌려가는 이들의 양심을 움직여 가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분이 하나님이요, 이 땅에 왔다 간 성현 현철이요, 생명적인 섭리의 기반을 닦기 위해 애쓴 선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때를 잃어버리고 환경을 잃어버리고 만물을 주관할 주인공의 입장을 상실한 채, 의지할 곳 없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떠도는 부평초처럼 지금까지 방황하여 나왔습니다.

이제 방황을 끝내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이뇨? 하나님께서 본래 아담 해와에게 베풀어 주신 그 축복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오냐! 네 것이다’ 하고 축복해 주실 수 있는 그 환경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 다음엔 거기에서 ‘너는 내 아들딸인 천상 천하의 모든 것을 주관하라’는 권한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를 향하여 세계 인류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어떤 사람이 아무리 갖춘 지식이 많고 수완이 좋고 모든 일을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배후의 조건을 완비하고 있다 할지라도, 때를 못 맞추고 환경을 못 갖추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게 될 때에 지금 때는 어떠한 때이냐? 전세계가 하나를 향하여 나아가는 때입니다. 이 세계는 어떠한 하나의 환경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타락하지 않고 때와 환경을 갖추어 하나님의 축복을 이룬 참조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되고 타락한 조상이 되었으니 만민 앞에 타락하지 아니한 선의 조상이 등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 가 있는 영인들에게도 아버지요,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한 분을 기독교에서는 재림 예수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이냐? 그분이 아버지로 오셔서 어머니를 세우는 잔치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요,예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성경의 중심도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심은 신랑 신부요, 신랑 신부의 중심은 어린양 잔치입니다. 그러면 어린양 잔치의 중심 뜻은 무엇이뇨? 본래 하나님이 허락한 때와 환경을 갖추어 가지고 하늘과 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참다운 인간 조상으로서 축복받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이것을 이루지 못했으니 다시 회복하여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인류는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부모와 타락한 형제와 타락한 부부의 정을 끊지 못한 채 허덕이며 나오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와 정적인 인연을 맺었던들, 형제가 형제를 미워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혈육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잎사귀와 같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체 나무와의 인연을 떠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9-255
하나님 앞에 의붓자식이 된 인간
그런데 원통하고 분한 것이 무엇이뇨? 우리가 의붓자식이 된 것입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자와 친자는 다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하늘을 대하여, 주를 대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가 되기를 고대한다’고 했습니다. 양자는 피가 다릅니다. 피가 달라요.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은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타락의 인연을 청산해 버리고 새로운 한 때와 새로운 환경을 맞아 재창조목적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와 환경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때와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주인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최대의 정력을 기울여 천신만고 끝에 그러한 주인공을 지으셨는데 바로 우리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일찌기 아담을 그런 조상이 되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그런 주인공이 못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타락하여 그 자격을 잃어버리고 고향(환경)을 잃어렸으니 다시 찾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돌고비 길을 걸으시면서 천신만고 저 밑창의 거지떼와 같은 무리부터 끌어 올리는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죽으면 응당히 지옥에 가야 할 무리들을 먼저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들을 보내어 사탄편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종으로 택해 세운 시대가 구약시대요, 아들을 보내어 사탄세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의 인연을 맺게 한 시대가 신약시대요, 마지막에 부모의 자격을 갖춘 참다운 아들딸을 세워서 축복하는 시대가 앞으로 오게 되는 재림주시대입니다.

여러분, 천당을 가겠다구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요. 주님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주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천당 못 갑니다. 못 가요. 이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 해와에게 때와 환경을 허락했던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잘못하여 타락했지만 끝날을 대비하여 한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끝날을 대비하여 하나의 환경을 개척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에 제일 가까운 것은 둘입니다. 이제까지는 두 사조가 서로 싸우면서 그 무엇을 향하여 흘러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의 때가 가까왔으니 끝날입니다. 세계는 동서가 서로 통하고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의 이념의 세계, 하나의 심정적인 인연의 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심정주의를 부르짖는 시대가 됩니다. 세계주의가 아닙니다. 인간주의를 지나서 심정주의입니다.

때를 잃어버린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역사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깨졌으니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한 뿌리로 연결되었을 것인데, 타락하여 수많은 죄악의 곡절을 가진 사람을 번식하였으니, 이 번식된 인간들을 한 뿌리에 접붙이자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와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접붙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붙일 줄기로 이 땅 위에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환경을 갖추어야 할 때, 세계 만민이 끝날이라고 할 수 있을 때, 세계가 하나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주의니 무슨 시대니 하는 말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러한 것을 준비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때를 만들기 위해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시며, 어느 때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무리가 있다면 그런 때와 환경을 개척하고 그런 주인공을 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민족을 택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악한 세상과 접하지 말고 내 말 따르라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2천년 동안 수고하여 이스라엘민족을 세워 놓고 거기에 주인공으로 보내신 분이 누구냐 하면 메시아 예수입니다. 구주예요.

그러면 예수는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오셨느뇨?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허락하셨던 본연의 때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또,무엇을 지배하기 위하여 오셨느뇨?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들로 이루어진 모든 국가와 민족을 지배할 만왕의 왕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온 천지를 그 장중에 넣고 지배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이를 준비하는 데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위에 나타나 철이 들면서부터 바리새교인이나 사두개교인이나 제사장들을 대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예’ 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어요?

9-257
예수님을 핍박한 이스라엘 민족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동안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으니 그 메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철석같이 단결해야 했습니다. 그가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고, 사지가 떨어져도 같이 떨어지고, 목을 매도 같이 목을 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약속하였던 한 때를 맞이한 그 민족은 그 주인공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야, 네가 뭐냐’ 이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하늘의 때를 맞추어 30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예수는 심중으로 필시 이 때가 민족을 구할 때라고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한 때를 붙들고 나왔지만,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땅 위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하늘의 때를 몰랐습니다. 누가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때를 몰랐던 이스라엘 민족이니 지옥 가야 합니다. 당연히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환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피 흘리고 찢기게 하면서 닦아 놓으신 선의 공적을 두둔했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 때를 갖고 오신 주인공을 두둔했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 오신 주인공 앞에 환경의 터전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민족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세계 도처에서 죽도록 고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천적인 때를 맞추기 위해 심정적으로 준비했고 그 환경을 그리워하면서 밤낮으로 애썼으나, 그가 준비한 때를 알아 주고 맞이하기 위해 나타난 무리가 어디 있었습니까? 예수가 찾아 나섰던, 예수의 환경이 되어야 했던 성전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오히려 예수를 보고 바알신에 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유대교가 아직까지 지상에 남아 있다니 원통합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많은 수고를 하시어 굳게굳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셨는데 그렇게 박대할 줄이야! 예수는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늘의 때를 가지고 온 분이요,하늘의 배경을 갖춘 분이요, 하늘의 주권을 가진 왕자요, 하늘의 황태자입니다. 하늘의 배경을 갖추고 지상을 치리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때를 맞아 환경을 갖추어야 할 이스라엘민족은 오히려 예수가 세우시려는 때를 무너뜨리고 환경을 개척하려는 것을 가로막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우리 선조들입니다.

예수가 죽으러 왔어요? 그렇다면 예수를 보내는 데에 왜 4천년이나 걸렸습니까? 왜 선한 선조를 죽여 가면서 그런 일을 하느냐는 거예요. 예수는 할 수 없으니 패배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비밀리에 제자들을 찾아 하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는 패배의 장군입니다. 땅위에 왔다가 때를 잃어버린 패자요, 환경을 잃어버린 패자입니다. 때를 이루고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는 예수 앞에 죽음이 웬말입니까?

그 때를 소망하면서, 그 환경을 소망하면서 그 때와 그 환경을 이루어 달라고 맡긴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나온 것이 사도 이후의 기독교사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똑똑히. 예수는 다 남기고 갔습니다. 만일에 예수가 이 땅 위에서 때를 맞이하고 환경을 맞이하여 황태자로 등장했다면 천지는 모두 그의 수하에서 치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예수는 만우주를 통치하여야 할 우리 인간의 참조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는 아담 이후 4천년이 지난 후에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조상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꺼꿀잡이로 찾아 세우니 참조상인 것입니다. 제 1아담이 실패해서 타락한 조상이 되었으니, 제 2아담으로 오신 예수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법을 한 장중에 넣고 때와 환경을 정리한 후 하늘 주권국가를 세워 이 땅 위에 백성들을 지휘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오늘날 우리는 타락된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했습니까? 못 했어요.

그러기에 예수는 가시면서 다시 올 터이니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복받고 편안히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였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몰림뱅이로 지내온 무리였습니다. 역사의 뒷골목에서 은밀히 약속해 나온 무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들을 수습하여 제 2 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제 2이스라엘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인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은 무엇이뇨? 주가 이 땅 위에 오셔서 때를 잃어버렸으니 때를 찾아야 됩니다. 우리의 선조들 이스라엘민족이 때를 잃어버렸으니 때를 찾아야 됩니다. 환경을 잃어버렸으니 환경을 찾아야 됩니다. 때와 환경을 갖추어 가지고 ‘주인공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끝날의 성도들이 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9-259
바라시던 때와 환경을 남기고 간 예수
예수는 갔습니다. 어떻게 갔느뇨? 사명을 갖고 왔다가 모든 것을 남기고 갔습니다. 남기고 갔어요. 예수가 찾고자 했던 그 때를 남겼고, 예수가 보고자 했던 그 환경을 남겼고, 예수가 행사하고자 했던 그 주권을 남기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래도 하나 되고 저래도 하나되라. 때가 이르면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밝히 이르리라’하셨습니다. 예수는 때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원수 앞에서 자기가 만왕의 왕으로 왔다고 말하면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있는 이스라엘이 배겨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느꼈으나 때를 말하지 못하였고, 환경을 닦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바라던 무리들이 해야 할 행동입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1 이스라엘이 세계적인 사명의 발판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때를 남기고 가신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그분이 소망으로 남기신 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제2이스라엘의 입장에 있는 세계 기독교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고? 알아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는 옛날의 유대교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원수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아 죽였잖아요?

여러분들, 예수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자랄 때에도 몇 번씩이나 천륜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은 후 기르며 젖을 먹일 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고 하나님이 택한 귀공자인 줄 알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마음이 퇴색되어 예수를 보통 아이와 같이 대했습니다. 예수는 요셉 가정에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면서 심정의 왕자로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깊이에는 때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한 한 때를 위하여 준비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한 환경을 위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또는 인격적인 분야에 있어서나 갖출바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 혹은 만민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를 고대했던 것이다. 그랬겠나 안 그랬겠나 생각해보십시오. 열 두 살 때에 부모 몰래 성전을 찾아간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 앞에 증거해야 할 그의 형제들까지도 희롱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가상적인 역사형의 인격자가 아닙니다. 성경에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병자의 친구요, 죄인과 세리의 친구하고 하였는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왜 그랬겠느냐 이겁니다. 그걸 생각할 때 여러분은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겠는가?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이 자기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당신은 만왕의 왕이요,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며 경배해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손가락질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유린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욕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죄인의 친구가 되고 세리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이루어 놓은 제단이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제사장은 대심판 때에 첫번째로 불리어 심판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를 맹목적으로 믿었어요, 맹목적으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으니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하고 간단하고 쉽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먹지 못하고 입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먹으려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겠습니까? 편안하고 태평스럽고 배가 불렀던 예수가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세가 이렇게 폭락될 줄이야….

본래 예수는 예루살렘 성 앞에서 빌라도와 가야바의 머리를 밟고 ‘이놈들아’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면 이스라엘이 단결하여 죽이려할 때 폭동이라도 일으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서 벌벌 떨던 빌라도 앞에 이스라엘 제사장 전부가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가 되었다면, 60만 명을 이끌어 나온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의 채찍을 주어 역사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앞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를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또한 환경을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과부의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오늘날 같이 자연스러운 때 그랬던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에 그랬단 말입니다.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항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얼마나 안타까왔겠습니까? 그런 자리에까지 쫓겨난 예수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가 유린되어 들어가는구나. 여기가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를 흘리며 닦아 놓은 역사적인 터전이 무너지는 자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으나 입을 봉한 예수였습니다. 저주를 하면 4천년 동안 수고하였던 하나님의 수고가 끊어져 나가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 온 터전이 무너져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입을 다무셨습니다. 예수는 슬프고 어려울 때마다 홀로 감람산을 헤매며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을 헤매며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그 시대에 철석같이 세워 놓고 가야 했는데,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의 인격관이 어떠하다고 뚜렷이 말할 수 있어요? 막연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이념을 갖고 와서 이 땅을 지배했다고 해보았습니까? 때와 환경을 정리하여 이러이러하게 지배했다고 해보았습니까? 못 해보았습니다. 패배자로 사라져 간 예수입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3년 동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중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 끌고 다니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는 다 불신했어요. 3년 동안 있는 정성을 다하고 피살을 깎고 희노애락을 같이하면서 길러 놓은 제자가 그 꼴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가고 제자는 제자대로 가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다 남겨놓고 갔습니다.

9-262
끝날 성도의 자세
예수는 저 세상에 가서도 이 땅을 바라보면서 ‘이 역사적인 종말에, 내가 대하고 싶었던 하나의 사람아 나타나라, 하나의 가정아 나타나라, 하나의 사회야 나타나라, 하나의 교회야 나타나라, 하나의 민족아 나타나라, 하나의 주의야 나타나라’ 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늘에서나마 목적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이 이념은 민주진영을 조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반대되는 외적인 유물론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지요, 여러분들?

이제 우리들은 세계의 운명과 생사의 결판을 걸어 놓고 슬퍼하기보다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남기고 가신 그 때를 몸에 지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는 ‘때가 이르려니와 지금이 그 때’라고 했습니다. 즉, 바라는 때와 이루는 때가 있었는데, 이루는 때가 바라는 때로 남아졌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때의 끝이 되었으나 지금이 그때라고 말하지 못한 예수의 심적인 고충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때와 같아요. ‘때가 이르려니와 지금이 그 때’ 라고 말한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것은 모순된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남기고 가신 말씀을 이루는 때입니다. 지금의 때는 마음의 때, 하늘의 때입니다. 이루는 때는 이 세상에 이르는 때를 말합니다. 이것이 한 박자에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마음 속에 때를 품고 왔으나 마음 속에 품고 온 때를 펼쳐 놓을 데가 없어서 갖고 가셨습니다. 그 마음의 때가 오기를 기도하고 고대하는데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마음의 때를 위해 준비해야 됩니다. 신랑되신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주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봐도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신지 모릅니다.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모릅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예수는 ‘네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 있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여러분을 찾아 오게 될 때,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의 때를 맞이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성전을 이루어야 됩니다. 마음의 때와 마음의 성전을 갖춘 완성된 인간들로 이루어진 성전에 주인이 와서 주인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이예요. 여러분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때를 맞이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예수께서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 민족을 넘어,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듯이 여러분도 그리워해야 합니다. 예수가 오시는 때에 내 마음은 개인적으로 예수와 성신이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나를 찾아왔다가는 다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신 주님을 대해 ‘한번 오시면 가시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적인 터전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믿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놓고는 세상의 물질이 문제가 아니요, 자기의 명예가 문제가 아니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수의 이름을 놓고는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는 심정적인 입장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보세요. 목사끼리 으르렁대고 물어뜯고, 장로와 교직자들은 서로 싸우고, 형제는 형제끼리 다투고 있습니다. 이래서 되겠어요? 예수는 오래지 않아 가야 할 입장에 계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하나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너희들도 나를 그리워하고 너희들 끼리끼리도 그리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때와 환경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환경 가운데 제자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말해주지 못하던 제자들 말고, 털어놓고 말해줄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런 교회를 보지 못하고 간 동시에 그런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세워 놓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9-264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권내에서 예수를 맞을 수 있는 무리가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가정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국가적이요, 세계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분야의 주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여러분, 주님이 하늘에서 구름 타고 풍악을 울리며 오실 줄 알아요? 절대 안 그렇습니다. 그것을 똑똑히 알려면 여기에 와요. 절대 안 그렇다는 것을 설명해 주겠습니다. 그런 망상 믿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우리 통일교회를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단이든 삼단이든 한 번 부딪쳐 싸워 보잔 말입니다. 누가 깨지나.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세계적인 때를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 세계적인 환경을 지배하기 위하여 오시는 그 주님을 맞으려면 여러분은 어떤 자격자가 되어야 하느뇨? ‘주님, 어서 이리로 오시옵소서’ 하면 ‘오냐’ 할 수 있고, ‘당신이 계실 만한 집이 여기 있사옵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예? 되어 있어요? ‘주여, 당신이 이 땅 위에 이루시려던 때와 환경을 개인으로부터 백성 전체에 이르기까지 남기고 가셨는데, 이제 당신이 머무를 수 있는 개인과 백성이 여기 있사옵니다’하고 주님 앞에 소개할 수 있습니까?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나 하겠지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던 제사장들 중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당신이 거느려야 할 것이 여기 있소이다’ 하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예수를 살려두면 전부 다 예수 앞으로 넘어가겠으니 눈이 뒤집혀 가지고 예수를 그냥 놔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모든 것을 소개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소개하는 동시에 넘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주여, 이 집도, 이 사회도, 이 교회도, 이 세계도 내 것이 아니오니 당신의 것으로 취하옵소서’라고 했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교파간에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때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환경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오실 주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오시겠어요? 어다가도 도로 갈 것입니다. 어디에 오실 수 있습니까? 교파마다 때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지도이념이 다릅니다. 그것이 예수의 교회입니까? 그것이 예수가 머물 성전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준비한 교회가 그러니 문제는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끝날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와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믿지 말란 말입니다. 아무리 피땀을 흘리며 이야기해도 듣지 말란 말입니다. 어느 것이 거짓인지 참인지 모릅니다. 자기 부모도 못 믿고 형제도 못 믿는데 누굴 믿는단 말입니까?

지금의 때는 마음 심판에서부터 스스로 승리해야 됩니다. 마음 심판, 마음으로 심판해서 그릇된 것이면 끊어버려야 됩니다. 마음은 압니다. 모든면에 있어서 마음 심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해서 담판지어야 됩니다. 교파도 많고 잘났다는 사람도 많은데 무엇이 끝날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까? 어느것이 주께서 임할 수 있는 환경의 터전입니까? 어떤 것이 주의 이념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백성입니까? 기도해 봤습니까? 괜히 죽을 구덩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입을 벌리고 허덕이며 야단들입니다. 어느 그물에 싸여있는 줄 알아요?

9-266
끝날에 벌어지는 일
한국에 있는 42개 교파 가운데 41개 교파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여러분은 마음의 때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교회,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과 동생동사(同生同死)할 수 있고 동고동락(同苦同樂)할 수 있는 예배당을 찾아가야 됩니다. 여기에 그런것이 없으면 다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가십시오. 여기서는 막지 않습니다. 다 가란 말이예요.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마음의 때가 이루어지는 곳이 여기로구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마음의 환경이 여기로구나! 여기만이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는 곳이로구나’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와 환경과 기준을 만들어 놓고 무얼 하자는 것이냐? 세계를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통일이 됩니다. 꼭 우리 통일교회가 통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통일하든 세계는 하나의 이념을 향하여, 하나의 때를 향하여, 하나의 환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의 지도자와 하나의 환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의 지도자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교파가 하나될 수 있는 환경이 못되어 있으면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때의 개척자가 나와야 됩니다, 때의 개척자가. 지금의 때는 단단히 정신차려야 할 때라고 강조하는 무리가 어느 교파에서든지 나와야 됩니다. 때에 대해 강조하는 무리가.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끝날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지금 기독교에서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때의 증거자가 나옵니다. 환경의 증거자가 나옵니다. ‘아, 내가 제일이다’ 하는 도자들, 대표자들이 나옵니다. 서로가 주님이라고 야단입니다. 그런 무리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무리가 서로 부딪치고 또 부딪치게 되는데, 거기에서 남아져야 합니다. 기성교파들이 그냥 그대로 남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새것에서부터 벌어져 연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청년남녀들이 각 교파를 헤쳐야 됩니다. 안 헤치면 하나님이 들이칩니다. 그러니 자기들끼리 싸우게 됩니다. 안 싸울 수 있어요? 하늘이 헤치게 한다는 거예요. 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쳐라! 가까운 데서부터 헤쳐라’ 싸움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파에서부터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벌어집니다. 그러기에 기성교회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어요? 그뿐이 아니예요. 어떻게 되고 있느냐 하면 목사들과 청년들이 싸웁니다. 지금 때는 청년들이 개방되어야 할 때입니다. 천지운세는 청년들의 가슴 가슴을 움직여서 과거의 탈을 벗고 새로운 이념세계로 넘어가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당회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교회. 그런 때가 옵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두고 보십시오.

교회가 하나에서 둘로 갈라지고 둘에서 넷으로 갈라지고, 이렇게 세 번만 갈라지게 되면 하나님은 떠납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정적으로 모입니다. 은혜 있는 사람은 가정적으로 모입니다. 교회에 안갑니다. 가정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나 안 되나 두고 보세요. 교단에서 외치다가 옛날 제사장의 입장에 서기 쉬운 때입니다.

그런 만큼 오늘 우리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몸의 문을 열고, 생활의 문을 열고, 국가의 문을 열고, 주의의 문까지도 열어야 합니다. 그 문은 나로부터 세계까지 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찾아오시는 주님이 개인까지 찾아오실 수 있는 인연을 조성하는 교회가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세계에 온 주님이 수시로 자신을 찾아오실 수 있도록 완전히 개방된 길을 닦아 놓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주님을 만날 거예요. 그러면, 어떠한 문까지 열어야 되느냐? 심정의 문까지 열어야 됩니다. 여러분, 심정 뭔지 알아요? 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놓고 같이 좋아하며 거기에 박자를 맞추고, 주님이 요구하는 것에 응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의 문까지 열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지금 하늘에 계시는 주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땅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이 땅에 그런 사람 있어요? 오늘날 기독교가 제2이스라엘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과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택함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국 백성이 아무리 불쌍한 처지에 있더라도 예수가 손을 들어 축복해 줄 수 있는 무리가 된다면, 이 국가는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축복을 안 해줘도 세계의 어느 국가보다 충성을 다하면 하늘이 주지 않으려던 복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하나님? 무슨 선진 국가의 하나님?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심혈을 기울여 이제까지 인류가 들이지 못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일대에 안 되면 2대 3대, 몇 대를 걸려서라도 충성하겠다, 세계적인 충성의 종족이 되겠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 민족은 구원받습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예?

9-268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신앙
오늘 여러분은 통일교회라는 이름 아래 모였습니다. 우리가 심정세계를 개방합시다. 주의나 사상 모든 것을 전부 열어 놓읍시다. 열어 놓고 찾아봅시다. 찾아 볼 때에, 내 마음이 있을 수 있는 곳이요, 내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이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발견하거든 목이 잘라져도 그 곳에 가십시오. 그 곳은 마지막 곳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와서 그런 인연이 뼈살에 스며들지 않거든 다 가십시오. 다 가란 말이예요.

그러한 무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인연을 맺기 위해서 이 시대의 갖은 모략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자기만 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인생행로에서 그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모진 바람에도 시달려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싸워도 보았습니다. 이래 봐도 저래 봐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 놀음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지나가는 말꼬리로 비소하고 농락하는 말에 좌우되는 그런 놀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는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때를 내 일신에서 거두어 드립시다. 예수의 환경을 내 일신의 환경에서 수습하여 바칩시다. 더 나아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자기의 모든 권한을 상속하여 주고 싶었던 그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됩시다. 그러면 우리로 말미암아 천국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나아가 때를 맞지 못한 기독교는 우리로 말미암아 때를 맞을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을 이루지 못한 기독교가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은 선포하지 못한 것을 우리로 말미암아 선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하고 돌아보지 맙시다. 정성을 다하고 뒤돌아 보지 맙시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33년의 생애를 살고 멀지 않은 죽음을 바라보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는, 자기의 생애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과거를 헤아려 보는 자를 나무랐습니다. 여러분들도 있는 정성을 다 들였으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하지 마십시오. 나는 누가 알아줄까봐 걱정이예요. 알아줄까봐 걱정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라고 하였거늘,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오실 주 앞에 내 충성의 절개를 세우고 높여 드리기 위하여 쓰러지는 무리가 있다면 주님은 눈물을 머금고 오셔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얼마만큼 사랑하였으며, 예수가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그때를 얼마만큼 흠모하였으며, 예수가 개척하던 그 환경을 이 시대에 개척해 보겠다고 얼마만큼 애써 봤습니까?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하늘의 축복을 받았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민을 위하여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나에게 복을 주고 나에게 축복을 해준 것은 만백성을 살려 주기 위해서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이 심정을 열고 마음을 열고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데는 피부의 색깔이 문제가 아닙니다. 동서양의 어느 민족, 종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혈색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환경적, 감정적, 관념적인 일체를 넘어서서, 모든 것을 잊고 예수가 소망하던 사랑의 심정과 예수가 요구하던 생활적인 감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세계적으로 오시는 주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세계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때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찾아오는 이 천지운세의 때를 수습할 수 있는 무리를 하늘은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수습하는 무리가 됩시다. 또 우리는 그 환경을 건설하는 무리가 됩시다. 그리하여 그 앞에 충신이 될 수 있고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바쳐드릴 수 있는 무리가 된다면 남기고 가신 주님이 찾아 오실 때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찾아오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시기 바랍니다.

9-270
기 도
아버지, 당신은 발걸음을 멈추고 삼천리 반도를 얼마나 서글픈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시나이까? 당신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눈물이 이 강산에 뿌려졌고, 당신이 심혈을 통해 흘리시는 피 땀의 노고는 이 동산의 민족과 인연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한 때를 그리워하시던 주님, 한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세계를 이끌고 나오며 기도하시던 주님은 하늘의 주권자로서, 천상의 축복을 받고 만민에게 축복을 해줄 수 있는 주인공으로 세우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아버님,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이 민족을 택해 주심에 황공하옵니다. 이제 지나가야 할 복잡하고 혼란한 끝날의 환경이 되었사오니, 때를 결정지을 수 있고, 환경의 안식처를 해결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성전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 때와 환경을 개척한 기쁨으로 세계의 사조를 넘어 천상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고, 하늘과 직접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저희를 대하여 아들딸이라 할 수 있으며, 저희가 주를 대하여 신랑이라 할 수 있고, 주께서 저희를 대하여 신부라 할 수 있는 내적 생활의 인연이 저희의 몸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잃어버린 그 때와 잃어버린 그 주인공을 찾아 주기 위하여 당신은 천신만고의 수고를 하시면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셨사옵니다. 저희가 동으로 갈 때 먼저 동으로 가셔서 저희들을 인도하셨고, 또 저희가 북으로 가면 먼저 앞에 가셔서 저희를 바르게 안내하시던 아버지, 얼마나 수고가 많았사옵나이까? 저희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저희 멋대로 살면서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이 인간의 갈 길을 다 가는 것인 줄 알았사옵니다. 그런 허황된 저희였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 모르는 가운데 저희들을 불러주신 아버지시여! 이제 저희들은, 역사적인 심정을 감히 헤아릴 줄 알게 하여 주셨고, 시대적인 심정을 알게 해 주셨사오며, 미래적인 심정을 저희들이 헤아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그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아는 만큼의 실적을 갖추고, 하늘 용사로서의 갖출 바를 다 갖추어서 남기신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한날의 가치를 천상에 자랑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 되고,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 하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있는 정성을 다 바치면서도 자기를 잊어버리고, 수고의 피 땀을 흘리면서도 피 땀 흘리는 무리들을 위하여 복을 빌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원수의 무리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고, 예수도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사옵거든, 오늘 저희들도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피 땀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님께서 남기신 충절의 전통이 일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무리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무리 피 땀을 흘리고 외친다 해도 심히 부족한 저희임을 알았사옵니다. 저희의 마음에 사무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천상의 인연을 갖추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본질적인 문제를 통하여 그 마음에 복받쳐 오르는 감격이 지금까지의 생애노정을 돌이키게 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힘있게 용진할 수 있고 출발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기신 사명을 염려하시는 아버지, 저희도 승리할 때까지 마음 졸이며 싸우려 하오니, 힘과 힘, 인연과 인연을 두텁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것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