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9 to 9-243: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1960.05.29 (일), 한국 전본부교회

9-219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에베소서 4:1-16

[기 도]

이제 저희들은 어린애의 마음을 갖고, 또 배고픈 사람이 밥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아버지의 품속이 그립사옵고, 아버지의 사랑에 흐뭇이 잠길 수 있는 한시간이 그립사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단에서 열렬히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마음의 클클함을 풀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희들의 생명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저희의 생명 전체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때가 변함에 따라 마음이 휩쓸리기 쉬웠던 저희들은,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하여 이리저리로 방황하는 유랑아나 고아와 같은 불쌍한 모습이었던 것을, 아버지, 기억하옵니다.

저희는 세상의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시간 자신의 잘난 무엇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 앞에서 아들된 심정에 사로잡혀 일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가 그립사옵고, 그런 자리에서 ‘내 아들아, 딸아’ 하시며 품어 주시는 아버지의 그 품이 그립사옵니다. 그런 곳을 찾아 헤매는 인생의 행로를 아버지의 무릎 앞으로 옮겨지게 할 수 있는 그 한날을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저희들, 믿는 생활도 많이 해보았사옵고, 기도도 많이 해보았사옵고, 신앙훈련도 많이 받았사오나, 그것보다도 산 제물이되었느냐 하는 사실이 더 문제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의 생명이 저희의 마음을 휩쓸고 몸을 휩쓸어 승리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저희의 몸에 체휼되어야만 살 것이요, 저희의 마음에 체휼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사오니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많은 말을 해보았습니다만 인간의 그 무엇을 가지고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을 빚어낼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저는 주저하며 나섰습니다. 아버지, 친히 나타나시옵소서. 전하고 싶은 아버지의 심정이 전하는 자의 심정과 화하고 듣는 자의 심정과 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피살과 같이 움직여지는 그 자리가 그리워 찾아왔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은 간격을 노리어 역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부모의 품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심정으로써 아버지의 품에 안길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경 말씀에서 본 것과 같이 그 옛날 바울이 애달프게 외치던 그 심정을 그리워하고, 그를 따르던 초대교회 신도들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세계로 달음질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아멘.

9-220
말 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는 제목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믿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만천하에 자랑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리에서 믿을 수 있는 다른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내 자신의 가치를 망각한 채 다른 곳에 나와 인연될 수 있는 무엇이 없는가 하고 찾아 헤매는 우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백퍼센트 믿을 수 있고, 자기의 가치를 만천하에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동시에 만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가서 ‘당신이 찾고있는 가치가 이것인 줄 아오니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는 인생의 최고의 성공자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9-221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마음과 몸
지금까지 역사상에 위인이나 성현 현철들이 많이 왔다 갔지만, 자기를 믿고 자기의 가치를 만천하 앞에 공개하며, ‘나처럼 이렇게 사시오’ 하고 자신있게 외치고 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적, 더 큰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즐기고 있는 현실의 생활환경을 무시하고라도 마음은 그곳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체휼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분이 머물어 있는 그 환경이 영원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양심의 작용을 통하여 잘 알 것입니다. 이 양심은 머물어 있는 이 자리가 기쁜 자리가 못 되기에 나로 하여금 가라고 촉구하며, 어떤 목적과 가치에 미급되어 있는 내 자신을 폭로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절절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마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고 명령했을 때 몸이 가지 못한다면, 이는 선악의 싸움에 있어서 패배자요, 하늘이나 인간 세상에서 끊기는 자가 됩니다. 반면에 이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환경을 밟고 넘어서는 자는 그래도 역사상에서 무엇인가를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요, 전체를 섭리하시는 하늘 앞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라고 촉구하는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할 줄 모르고 환경이 변해도 변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안식의 터전을 갖추어 만천하 앞에 너는 안식의 왕자라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 묻게 될 때, 어느 누구나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면서 탄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늘의 동기로 하여 지음받은 인간의 운명이었던고?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류는 더 높은 양심의 추구를 따라 나가기 위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싸움의 역사노정을 거듭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짓지 못한 채 지금도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게 될 때에 마음으로 흐뭇이 웃으면서 ‘하늘이여, 땅이여, 만민이여, 저의 이 기쁜 심정을 본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습니까? 본래 우리의 마음은 그런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만 오늘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하니, 이것이 탄식이요 불행이요 원망스러움인 것입니다. 마음은 내 생명과 전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내적인 어떠한 내용의 조건도 해결되지 않은 몸을 그래도 끌고 생의 운명을 거쳐 나가고 있는 처량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어떤 큰 목적을 향하여 가라는 재촉과 자극을 받을 때마다 몸은 여기에 항거합니다. 이렇게 항거하게 하는 그 무엇을 대하여 대결할 수 있는 자신의 입장을 밝혀 거기서부터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않는다 할진대,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9-222
타락인간과 도(道)의 길
이 모든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던고? 인간이 스스로 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타락하여, 악을 동기로 하여 시작했기에, 그 악을 박차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런 길을 만들어 놓은 타락된 조상의 혈육을 받고 태어난 후손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 아무리 잘나고 만천하에 자기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타락의 혈통을 물려받은 후손이요, 타락할 수밖에 없는 종족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이기에 이 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고 이 이상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인 것을 절절히 느끼고 나 자신을 무자비하게 칠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심적 혁명은 싹트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본래부터 인간이 그런 자체가 되었다면 인간들에게 무심한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래부터 그런 자체가 되었다면, 역사노정에서 많은 생명들이 피를 뿌리고 갔다면 선의 목적을 추구해 나오시는 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않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탄식권내에 들어 있지만 선을 지향할 수 있는 동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우주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을진대, 그 절대자는 우리가 자나 깨나 먹으나 쉬나 어느 한 순간도 쉬임없이,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통하여 그 곳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양심적인 것은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환경이 아무리 만족스럽다 할지라도 마음에 무엇인가 클클함이 있고 슬픔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본연의 움직임이 재촉하는 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해결하기 위하여 허덕이고 허덕이며 찾아 나아가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종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조의 유행에 미련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떠한 사조를 혁명하기 위하여 그 첨단에 선 용사들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고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을 거부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사회와 격리하고 정치와 격리하고 생활 이념과 격리하라고 권고해 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용단을 내려 이 사회환경이나 생활환경을 떠나는 사람들, 또 거기에서 심정적인 상충과 비애를 느껴 그것을 부정하고 돌아서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도인은 어떠한 자뇨. 호화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눈물지을 수 있는 자입니다. 도를 아는 자의 심정은 어떤 것이냐? 아무리 늠름한 권세를 갖고 온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깊은 심정에서 남모르는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심정입니다. 어떤 사회나 단체를 막론하고 그런 심정을 지니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도인이나 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를 따라가는 신도라 할진대, 자기가 어떠한 영광의 자리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를 최고의 만족과 안식의 터전으로 삼아 기쁨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거치고 나서며 남모르는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자라야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을 가야 할 사람들이 못 감으로 말미암아 종교가 몰리고 쫓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러뇨? 죄악의 자리를 떠나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이요, 바로 가지 못하고 반대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으로 떨어져 굴러 내려가는 세상이 되었으니 반대로 찾아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존중할 줄 아는 민족은 자국의 국민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심정을 기준으로 하여 단결된 민족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진 주의가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역사를 숭상하고 절개를 지켜나온 성인 현철 혹은 충신들이 있다 할진대, 그 이상의 심정을 갖춘 자가 아니고는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대가 악하면 그 악한 것을 끊고 난 후에야 다른 어떤 기준에 접붙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발전과정에서 항시 보는 일입니다.

9-224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양심의 영역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고? 역대 충신의 기준을 넘고 효자 열녀의 기준을 넘어야 합니다. 또 그것을 넘고 나서도 가야 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세와 동떨어진 환경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세계에서 미래의 세계로 우리를 넘겨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프로입니다. 충신 중의 충신이요 효자 중의 효자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땅 위에서는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주관하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한 때가 온다고 했거늘,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님이 이 땅 위에 다시 오셔서 건설하실 지상천국 세계입니다.

세상에는 가정을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고, 국가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를 위하여 충성한 사람은 국가이념을 후대에 남기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전통의 조건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과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어차피 한번 심판대에 서야 됩니다. 이것을 넘기 위해서는 일개 민족을 위한 충신 말고, 일개 부모를 위한 효자 말고, 만천하 왕 중의 왕이요, 주인 중의 주인이요, 만유(萬有)의 아버지인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고 효자가 되라고 종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을 향해 이 세상을 버리라고 하셨느뇨? 이 세상은 어차피 지나갈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심정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기에, 비록 이 시대에는 버림을 받더라도 미래에는 효자요 충신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 찬양받을 수 있는 무리가 기독교적으로 보면 산양과 면양 가운데 면양에 해당하는 무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념을 향하여 충성을 다하고, 그 이념을 향하여 달음질치겠다고 나선 자들이 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도인들은 앞으로 그런 세계로 달려가는 데 있어서 신봉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망합니다. 망해요. 아무리 뭐가 어떻고 어떻다 해도 망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개개인으로 출발하였지만 전체의 세계를 붙들어서 그 개인과 세계가 연결되어 처음이자 끝이 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즉 여러분의 본 양심이 이루기를 바라는 것을 대하여, 이 세계가 ‘과연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힘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연계를 보더라도 목적 없이 움직이는 존재물은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화학작용만 하더라도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양심의 힘이 목적 없이 움직이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양심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양심의 주인공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고, 춤출 수 있는 영광된 환경, 이것이 인간이 찾아가는 천국입니다. 천국이 어떤 지역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갖다 놓아도 도망갑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떨어져 나간 인간들을 붙들고 나오고 계십니다.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천만번 죽여 버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휘발유를 끼얹고 흔적도 없이 불살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찾아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죄인된 인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입장에서 지극히 악한 자를 대하여 ‘심정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환경으로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 주려므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물을 죽 지어 놓고 잘못했다고 해서 덮어놓고 벌만 주고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라면 필요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여기서부터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죄에 대한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하기에 앞서 간절한 심정을 지닌 분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심판한다면 항의한다는 겁니다. 죄만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의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천만배 넘고 넘을 수 있는 심정을 지니고 심판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심판을 받아도 항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9-226
하나님을 새로이 인식해야 할 때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의식(儀式)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말씀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을 찾았어요. 그러나 동기의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타락 이후에 나타난 관계의 하나님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조들을 어떻게 대했고 타락한 후손은 어떻게 대했다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하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몰랐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해결지을 수가 없습니다.세상일도 그래요. 어떤 문제가 있다 할 때 그 동기부터 알아 가지고 해결지어야 후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다 능통해도 성경 가운데 숨어 있는 동기의 하나님과 과정의 하나님과 결과의 하나님을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과정의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천신만고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메시아의 발판을 세우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정의 하나님을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의 하나님은 어떨 것이냐? 어떻게 심판할 것이냐?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기뻐하겠다구요? 안 됩니다. 동기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동기를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예요.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다는 거예요. 질서적입니다. 동기를 중심삼고 원리 원칙적인 과정을 거쳐서 실체적인 목적체가 형성되는 세계가 창조이념세계입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들이 마음의 굳은 각오없이 성공합디까? 마음의 동기를 중심삼고 환경을 개척하고 변함없이 그것을 밀고 나가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개인이 성공하는 데도 그렇거늘 대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시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하나님말고 창조적인 하나님을 찾아보았습니까? 이 시대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말고 창조의 동기를 가졌던 하나님, 심판받아야 할 세계를 놓고 섭리하는 하나님말고, 심판한 후에 모든 인류를 품고 영광 가운데 만민과 더불어 기쁨과 행복으로 사셔야 할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한 사람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과거도 천리원칙과 그 원천이 같아야만 그것이 역사적인 전통으로 세워지고, 또 그 사람의 행적을 역사와 더불어 미래까지 자랑할 수 있지, 그 동기에서 탈선할 때는 어느 시기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동기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동기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되겠느뇨. 타락한 입장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해 나오셨느뇨.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타락되어 있는 우리를 동기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 주셨고, 미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 주셨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6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은 창조당시부터 인간을 아들딸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천리법도를 세웠기에, 이 피조세계를 깨뜨려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진 이것을 다시 붙이고자 하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구멍이 뚫어지고 깨어진 것을 때워야 된단 말입니다. 때우는 데는 동기로부터 과정을 거쳐 목적하던 바의 완결체로서 인연을 맺어 때워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온 우주 피조만상 앞에 완성품이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치가 그렇잖아요?

우리는 재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재각성해야 되겠습니다. 더우기나 청년들은 단단한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서 우리는 싸워서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종교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분은 무엇인가에 이용당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 보았습니까? 여기서 외치는 사람은 그것을 절절히 느껴 보았습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교파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역사 앞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세워진 어떠한 신학체계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어느것이냐? 해명해야 됩니다. 이것을 해명해 놓은 책자를 나는 못 보았습니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울부짖는 어떠한 학자도 못 만났습니다.

이 민족은 세상적으로는 세계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소망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 처량하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계가 몰각(沒覺)된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이때에 우리 민족은 재각성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재감정하고, 시대를 재감정하고, 신앙을 재감정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람이나 어떠한 기관이나 교파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할 수 있으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인간세계의 어떤 욕망을 걸고 나오는 것에 이용당하면 망하지만, 세상에서 몰리고 땅에서 배척받아도 하늘에게 이용당하면 망하는 것 같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뜻있는 청년들이라면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냉철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때에는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도 비판 해봐야 될 것입니다. 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9-229
인간의 타락으로 부자유하게 되신 하나님
예수님 이후에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을 알기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왔습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예수를 보내게 될 때 예수와 더불어 오시던 하나님, 예수는 갔을망정 예수의 십자가와 같이 계시던 그 하나님, 인간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망정 그 인간을 버리시지 못하고 후손까지도 붙들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생각해 봤어요? 이것을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은 신부될 꿈도 꾸지 마십시오.

우리는 말씀의 예수를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이치에 타당하고 마음에 혁신적이고 극단적인 무엇이 닿아, 지금의 나를 깨뜨려 버리고 새로운 무엇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 그것을 잡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경지를 통과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빚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붙들고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답하려면 27억 인류를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도 갚을 수 없습니다. 심정에 못을 박히면서도 수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하나님은 무지한 인간들을 대해 섭리해 나오심에 있어서 동기와 과정과 목적을 가지고 대해 주셨습니다. 대해 주시는 데는 네거리의 교통순경처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식이 아닙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의인을 대하여 명령하신 내용의 말씀이 있는데,하나님은 그 일의 몇 천배의 과정을 지내시고 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내게는 그런 것을 알고 차마 성경을 보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을 대하여 이렇게 하라 하실 때 편안한 자리에서 그렇게 하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몇 백번 통과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쯤 해보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 백번 몇 천번 해보고 나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탄과 싸움에서 이기면 이러이러한 것을 보장하겠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죽으라 한 것도 하나님이 죽음의 고충을 거치고 난 후에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만인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도 영광이나 받고 보좌에 앉아서 호령하는 하나님이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사탄이 참소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적인 애달픔이 사탄세계의 모든 것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리 원칙과 영원한 심정을 가졌기에 사탄이 참소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깨뜨리지 못합니다. 불가침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적인 심정으로 타락한 인간을 오늘날까지 품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타락한 종족은 누구인가? 그 하나님은 타락한 종족의 아버지라는 거예요. 만유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한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감옥에 끌려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오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거예요. 자유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어찌할래야 어찌할 수 없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습니다. 오랜세월을 하루와 같이 아들의 죽음과 아들의 쓰라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오신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타락한 조상의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자식된 마음이 복받쳐 올라 이렇게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창에 갇히어 찢기고 꺾인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 되신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하고 통곡하는 아들딸을 찾아 헤매시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멋대로 가고 시대는 흘러가도 하나님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일편단심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사태가 복잡하고 환경이 복잡할수록 하나님은 더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6천년 전에는 우리의 선조 개인을 대해서 애달파하셨으나, 세계 인류가 사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때에 있어서는 제일 처량한 심정을 갖고 애달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불효 막심한 것들입니다.

9-231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
한 나라의 군왕을 반대하면 역적이라고 하였고, 한 부모를 반대하면 불효자라고 하였는데, 만주(萬主)의 주(主)요 온 우주의 아버지를 대하여 우리는 몇 번의 역적이 되었던고! 몇 번의 불효자가 되었던고! 각자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기에 도의 길을 가면 갈수록 옷을 벗어 치우고 그래도 부족하며 칼로 몸을 찢고, 목을 교수대에 내어 놓아도 부족하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빚진 아들이 가져야 할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랬습니다. 딴 사람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만민앞에 나타날 때는 늠름한 모습이었지만 홀로 있을 때는 역사적인 깊은 눈물을 흘리신 분입니다. 슬픈 눈물을 흘리신 주인공입니다. 눈물 흘리는데도 왕자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을 누가 알았습니까?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오늘 통일교회 신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말고, 삼위신으로 지칭된 하나님말고 그 이전 동기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를 알게 됩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기쁨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대하여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환경이요, 아버지를 알아드리고 싶어도 알아드릴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싫어서 예수가 산중 적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한 줄 알아요? 아닙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붙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며 같이 울고 싶은 심정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아주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조의 혈육을 받았다 할진대, 이 세포 하나까지에도 저끄러진 죄상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뭐 어떻고 어떻다 해도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역사적인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우리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어요. 여러분, 나는 네 아버지이고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는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죄인된 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다음엔 소망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을 왈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홉가지 열매의 골자는 무엇이냐? 사랑과 인내와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들춰보면 뜻을 두고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뜻? 죄인을 구하여 아들을 만들어 가지고 그 아들에게 하늘땅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그런데 주관해 봤어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주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시 그 자리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갖고 찾아오셨고, 그런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 라고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라는 마음이 있기에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뇨? 너자 나요, 나자 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셨습니다. 목적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심정으로 하나되고 사정으로 하나되고 소망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9-233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
그런데 땅 위에는 현재 30억에 가까운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으되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요?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소원이예요?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여기서 외치는 사람은 그런 하나님은 안 믿습니다. 죄악에 썩어진 몸뚱이를 천당 보내는 그런 하나님을 믿어요? 그렇다면 모순된 하나님입니다.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천당 보내요? 그런 천리원칙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천당에 간 사람은 없습니다. 다 낙원밖에는 못 가 있습니다.

하나된 자와 행복하게 살고 하나된 자와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천상천하를 움직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된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으면 모두가 가짜입니다. 가짜. 사실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가짜들보다 못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배우들을 보세요. 전부 가짜지만 사실보다 더 잘 해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분의 사정과 내 사정이 하나되고,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내 마음도 향하고, 그분이 품은 심정을 내가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의 싸움은 인간끼리 하나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 하나되기 위한 싸움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없이 비참한 혈투극을 빚어 나왔지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주로 나타나시게 될 때,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나는 너를 위하여 심정을 다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얼마나 심정을 다했느냐. 나는 너의 사정을 다 알아주었는데 너는 내 사정을 얼마나 알았느냐. 나는 너를 위하여 죽자 살자 했는데 너는 내 뜻을 얼마나 생각했느냐?’ 하실 것입니다. 이것으로 문제를 해결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이러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한조각 먹었으니 지옥 간다 하는 식으로 안 되어 있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법도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법정에 한번 가보세요. 세상 법정에도 판사가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죄수가 있습니다. 공의의 심판대도 그와 같은 모양입니다. 검사와 같은 사탄이 여러분을 참소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변호사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그것을 변명해 주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6천년의 죄악사를 가져온 인간이기에 변명할래야 변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끄른 죄상이 너무나 큽니다. 사탄한테 걸릴 조건뿐이니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을 청산해 주기 위한 한 사람이 나와 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 나라에 가서 그걸 놓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까짓 땅에서 몇몇이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륜의 대도(大道)를 세우는 것을 걱정하시는 주님입니다. 여러분 하나쯤 지옥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망해요? 아닙니다. 구원은 개인의 것이요 천륜의 대도는 만인간의 것이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대도는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을 볼 때 혹은 기도할 때는 이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를 알아 가지고 하나님이 제일 슬펐던 하나를 붙들고 일생동안 울어 보십시오. 그러면 천당 갑니다. 다른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다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억울한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슬픈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기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니 기쁜 일이 없습니다. 슬픔뿐입니다. 배척받고 몰림받았으니 기쁜 때가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의 일 가운데 제일 슬펐던 것이 무엇인가. 문제는 거기 있어요. 이것을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상대방의 슬픔을 알아 가지고 심정을 통해야만 진짜 친구입니다. 효자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걸어나온 골수가 어떤지 알아야 됩니다.

9-235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는 재림주님
하나님은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품고 인간을 대해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을 백퍼센트 알았고, 사정을 백퍼센트 알았고, 소망을 퍼센트 알았지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왜 할 수 없었느냐? 그것을 말해 버리면 사탄이 먼저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들에게 ‘무슨 보물이 여기 있고 무슨 보물은 저기 있다’고 하면서, 주인을 배반한 종이나 그가 원수가 있는 데서 상속해 준다면 그들이 아들이 가지도록 가만 두겠어요? 사탄이 그런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다 말해 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하기 전에 사탄이 먼저 알고 다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과 떨어져 있습니다. 이 땅은 누가 지배하고 있느냐.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땅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딸에게 명령한 일을 아들딸이 하기 전에 원수들이 알아 가지고 먼저 해 버린 후 그것을 가지고 요구하면 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공의의 법도를 가졌기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했더라도 그것이 하라는 명령에 부합되면 인정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비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사로 되어 있어요. 억울하고 분합니다. 성경의 난문제를 붙들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기도하게 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은 어찌하여 만민을 구원해야 할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하고 호소하면, 하나님은 ‘네 사정보다 더 딱한 나의 사정이 있노라’ 하십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뻔뻔합니다.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고요? 뻔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를 모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하여 싸운 적이 있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 한번도 없다 해도 여러분은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던고?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으로 하나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면 4천년 동안 준비한 너희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기를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시대에는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나라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세계의 중심, 즉 제사장왕국이 된다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갖고 나가는 이들 앞에 하나님은 또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사정은 누가 갖고 왔느냐? 예수가 갖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변호해 주러 오신 것입니다. 사정을 변호하는 일이 끝나면 무엇이 하느냐?심정을 규합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재림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 표준은 사랑입니다. 맨 나중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은 어떤 입장에 있느뇨? 심정과 사정과 소망, 이 모든 것을 아는 자리에 있느냐? 모르는 자리에 있습니다. 백판 천치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하나에서부터 세계까지 전역사를 이끌고 나오시어 맨 나중에는 아버지로서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때를 만들어 놓기 위해 애쓰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종을 보내서 소망을 품게 하고, 신약시대는 아들을 보내서 사정을 통하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오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셔서 심정의 기준을 세우게 될 때는 끝날입니다. 심정의 조건을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에까지 세운 다음에는 그것을 만우주 앞에 공포해야 됩니다. 너는 나의 영원불변의 아들딸이라는 식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어린양잔치입니다.

여러분, 끝날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기독교에서는 소망을 품고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참지 못하면 천상의 대도(大道)를 깨뜨릴까봐 참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나 스데반 혹은 12사도를 보세요. 찢기고 별의별 짓을 다 당했지만 참았습니다. 소망의 한날을 바라보며 참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선조였습니다. 소망을 갖고 참아라. 내일을 걸고 놓고 참아라. 사정을 알려면 충성을 다하라. 너를 위하여 주께서 이렇게 죽었으니 죽도록 충성하라. 이것이 기독교정신입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忠)자는 중심의 마음입니다. 가운데 중(中)자에 마음 심(心)자이고, 성(誠)자는 말씀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하늘 앞에는 변명이란 것이 없습니다. 죽으라면 죽어야 됩니다. 솜을 한짐 지고 불에 들어가라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9-237
혼돈된 세상을 사랑으로 수습하시려는 하나님
‘사랑하라, 충성하라, 간절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의 때가 안 왔습니다. 내 심정의 임자가 안 왔습니다. 나의 사정을 알아줄자가 안 왔습니다. 그 시대가, 그분이 안 왔으니, 올 그때까지 예수와 성신은 눈물지으면서 ‘아버님, 참는 아들딸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충성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심정을 기울여 사모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인연을 역사적으로 수습할 때까지 심정의 짐을 지고 나오는 것이 예수와 성신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때가 오면 하나되기 위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가정, 모세의 민족, 예수의 세계, 온 천주까지 하나 만들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피조세계를 하나 만드시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이기에 역사도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견지에서 오늘날을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금방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습니다. 판결은 선과 악, 최고의 둘이 서로 상반되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역사적인 싸움입니다. 보십시오. 역사를 들추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 가인 아벨을 세워 타락한 아담 해와의 가정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수습하는 데는 어떻게 하느뇨?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심정, 사랑을 통한 사정, 사랑을 통한 이념이라는 겁니다. 즉, 심정을 통한 사랑이요, 심정을 통한 사정이요, 심정을 통한 이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아담 해와 대신 가인 아벨을 찾았던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접붙이라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접붙이는 놀음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로 귀결되었어야 할 텐데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전쟁역사는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9-238
중심인물들을 통한 섭리역사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사였습니다. 악이 먼저 선을 치는 역사였습니다. 보편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잘났다고 주장할 때 먼저 주장한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80퍼센트는 그렇습니다. 선이 먼저 악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 역사를 봐도 간신이 충신을 쳤지 충신이 간신을 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어디에서부터 벌어졌느뇨? 아담 가정에서부터 벌어졌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한테 접붙여야 했습니다. 절대 복종해라 그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배반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온 우주를 주관하라는 축복을 해주었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핏줄이 다른 두 인연이 생겼기에 이 법도를 따라 세계는 두 각도로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 세운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벨을 세웠더면 좋았을 것이나 아벨이 죽었기 때문에 그 대(代)를 이어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체로서 한 사람을 찾아 세운 것이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대신할 수 있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만천하의 인류는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아브라함한테 전부 복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굴복하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세워 놓고 아브라함 가정부터 아브라함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하나 안 되면 원수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했는데, 안받는 사람은 전부 원수인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모세에게 모두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접붙이려면 심정이 같아야 되고, 사정이 같아야 되고, 본질적인 소망이 같아야 됩니다. 모세가 죽자 하면 죽겠다는 마음, 살자하면 살겠다는 마음, 무엇을 하자하면 하겠다는 마음, 또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사정을 거쳐 소망의 터전까지 뻗어 나갔다면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었던고?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가 오셨습니다. 예수는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 앞에 심정으로서 접붙이려고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망적인 기준까지는 접붙여 놓았으니 사정을 통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 깊숙이 접붙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정도 못 통하고 갔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딴 피를 받았으니 돌감람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골수와 같이 응할 수 있고 화할 수 있고, 너는 나의 피살이라고 할 수 있는, 직계의 인연을 맺은 하나의 아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을 세워놓고 모든 인류는 그 앞에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에게 접붙이려면 돌감람나무는 베임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이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의 예수님을 중심삼은 세 제자, 그 중 어느 누가 못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때를 보아 심정 깊은 하늘의 비극을 얘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까봐 얘기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셨습니다. 불쌍한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전체이념을 세 제자를 통해 나타내려고 했는데 그들이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주권이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 죄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절대 순종하였다면 세계는 벌써 하나님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가나안 칠족을 쳐서 항복시킨 것과 같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게 되었다면 2천년 동안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믿는 후대 기독교인들이 학살을 당했겠습니까?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예수를 죽였으니 보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선조의 죄가 3,4대까지 간다고 했으니 다 보응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을 4천년 이내에 탕감해야 됩니다. 모세도 애급에서 4대만에 나왔습니다. 모든 것은 천지의 법도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나왔지만 심정적으로 사정적으로 소망적으로 하나님과 접붙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역사를 걸어 놓고 대번에 아들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 타락하여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창조이념에 하나님이 싸워야 된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념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종들을 시켜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에 떨어졌으니 거기에서 싸워 이기면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의 입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역사해 나오십니다. 꺾어서 접을 붙여야 되는데, 이 심정을 접붙이기 위한 것이 재림 역사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심정이 천상과 지상을 꿰뚫어야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늘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 때를 향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9-240
끝날에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
끝날은 어떤 때뇨? 하늘이 6천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온 이 땅을 향하여 일격을 가하는 때입니다. 최대의 정성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합하는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같은 자리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합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종이 한꺼번에 나오는 그때가 끝날입니다. 아버지도 나왔고 아들도 나왔고 종도 나왔으니 천국 살림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담 해와를 자녀로서, 천사장을 종으로서 지었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아들딸과 종이 평면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세계적인 완결의 때를 향하여 하늘은 지금까지 찾아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여러분이 파고다 공원 같은 데 가서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무슨 말을 하는가. 다 동기가 있는 말입니다. ‘나는 바울이다, 나는 예수다, 나는 하나님이다,나는 무엇이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종과 아들과 아버지가 상봉할 수 있는 세기말적인 때, 총 청산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가 한꺼번에 접붙여져서 살아나야 된단 말입니다. 줄기인 아버지, 가지인 아들, 잎사귀인 종이 한꺼번에 나타납니다. 세계의 사조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접붙인 사람들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워 주기 위한 것이 끝날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맡을 자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민주주의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에 일치하여 접붙여 살아남는 무리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골자입니다. 역사의 최후의 종착지는 그런 것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오늘날까지는 도인들이 밟혔습니다. 한때는 상류계급이 출세했고 군벌시대에는 중류계급이 출세했습니다. 지금 때는 노동자와 농민의 때입니다. 회사 같은 데도 노조가 있어서 노동자들이 행세하고 있습니다. 다 출세하고 다 성공해 봤지만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지리 못나서 상류계급 사람에게나 중류계급 사람에게나 하류계급 사람에게나 그저 예수쟁이라고 몰림만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에 접붙인 아들딸이 있게 되면 여기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들이 하늘과 땅을 지배할 것입니다. 도인들이 지배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한 하나님입니다. 그 한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긴 세월을 준비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려는가? 종을 세우고, 아들딸을 세워 아버지로서 그들을 품에 품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역사적인 눈물을 흘리시고, 벅찬 소망의 마음, 애달픈 사정의 마음, 처량한 심정을 다 풀어 놓으시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품고 딸을 품고 종을 세우는 그 순간 비로소 역사를 돌아보고 허허 웃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사탄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뇨? 악당들아 네 권한이 어디 있느뇨? 공의의 심판주 앞에서 물러갈지어다.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을 끝날에는 한번 알아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6천년만에 한번 이라도 알아달라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저의 아버지요, 저는 당신의 아들딸이옵니다. 이렇게 수고하신 아버지, 황공망극하옵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신 것을 아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선조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이 수고하신 것도 저 때문이옵니다’ 하며 눈물지을 수 있고 몸둘 바를 몰라하는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저에게는 심정의 주인공을 모실 수 있는 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립소이다. 사정을 가지고 있는 그 주인의 사정을 모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좋아할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 보았습니까? ‘아버지,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이것 잡수십시오’ 하는 마음이 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 한국 백성을 구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소원입니까. 그러면 제가 죽더라도, 먹을 것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 민족을 구해서 아버지 앞에 바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세계 인류뿐만 아니라 천상에 가 있는 수천 만의 영인(靈人)들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참아도 무한히 참아야 되겠고, 사정을 품어도 무한히 품어야 되겠고, 심정을 가져도 무한히 애달픈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면서 이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눈물지으며 죄책감과 황공망극하다는 마음에 사무쳐야 심판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로 시작한 기독교지만 최고의 죄인입니다. 사정을 몰랐고 뜻을 몰랐고 심정을 몰랐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승리의 그 한날을 위해서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해 싸워 나오신 아버지와 아들딸의 인연을 맺고 혹은 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6천년 동안 쌓아온 섭리역사를 이제는 내 대신 너희들이 맡아라.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청산해 버려라. 목을 자르겠으면 자르고 배를 째겠으면 째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쳐야 할 것을 우리들이 대신 치고 모든 것을 대신해서 청산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심정을 준비하는 기독교인,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성도들, 한날의 소망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기독교입니다. 이제는 심정을 다하고 사정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어야 하나되기 위해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아들의 인정을 받고 딸의 인정을 받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9-243
기 도
아버지께서 아무리 정열을 퍼부어도 저희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사옵니다. 하늘의 사정이 이렇다 해도 그 사정을 몰랐습니다. 하늘의 소망이 이렇다 해도 그 소망을 몰랐습니다. 항공망극하옵니다.

무지한 아들딸들을 6천년 동안 찾아오신 당신을 저희들은 얼마나 배반하였습니까? 몇 해 동안 찾아보았습니까? 몇 해 동안 추구해 나왔습니까? 몇 해 동안 아버지의 상하신 심정에 묻혀 보았습니까?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앞에 머리 들 수 없는 불초한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의 피와 저희의 피가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뜻과 사정과 심정이 같은 자리에서 저희 몸과 아버지의 몸이, 저희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저희의 심정과 아버지의 심정이 피 살을 동원하여 하나되어야 할 엄청난 과정에 저희들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다 잊고 가더라도 천륜의 대도가 이렇게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것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큰 울음 끝에 6천년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남모르는 가운데 욕을 먹고 몰림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던 저희들, 그런 날을 위하여 준비한 하늘 앞에, 그 심정 앞에, 그 사정 앞에,그 소망 앞에 천만번 죽어 마땅하옵고, 천만번 찢김을 당해도 마땅한 것을 느끼면서 감사할 줄 아는 아들딸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외쳐 보니 힘이 부족하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그 무엇으로 표시하겠습니까? 한이 없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저희들이 시시각각으로 느끼고 미래를 바라보고 참아 나가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슬프다면 이 땅에서 저희들보다 슬픈 자가 없다는 것을 하늘도 아시옵니다. 억울한 일생인 것도 알고 계십니다. 외롭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남기신 길임을 알았기에 눈물의 길도, 철창이 가로놓인 길도, 죽음의 길도, 모험의 길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부디 이 땅에 그런 조건을 갖춘 자들이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당신의 소망이요, 저의 소원이오니 쓰러지더라도 이런 아들딸을 만들어 쓰러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남기신 섭리의 뜻, 우리들의 사정과 우리들의 심정이 아버지의 것으로서 풀려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