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0 to 9-216: 찾아오시는 아버지

찾아오시는 아버지
1960.05.22 (일), 한국 전본부교회

9-190
찾아오시는 아버지
마태복음 25:29-46

[기 도]

지금부터 2천년 전, 택해 놓으신 이스라엘을 품기 위하여 오셨던 그리스도의 성상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회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모습은 하늘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찼사오나 그 누구도 그를 바라보며 염려해 주지 않았사옵나이다. 아버지의 뜻 하나만을 위하여 30여 년의 생애를 기울였고 그것만을 생애의 표준으로 삼고 나가셨으나, 그 심정을 알고 ‘당신은 수고하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하고 위로해 드리고 안식시켜 드린 자가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쫓겨 다니시던 예수의 심정,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시면서도 지친 다리를 끌고 한스러움을 풀기 위하여 감람산 기슭을 거니시던 그 처량한 심정을 저희들도 몰랐사옵니다.

‘주’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보았으나 진정한 주의 모습을 알지 못했던 저희였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사오나, 독생자의 처참한 사정은 들어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하늘이 영광의 구원섭리를 만민에게 무조건 허락한다는 엄청난 말은 많이 들었사오나, 아버지를 따라 나가던 믿음의 왕자인 예수의 모습에 대해서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은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어떠한 교단의 지도자를 받을 것도 아니었고, 어떠한 교회의 지도자를 본받을 것도 아니었사옵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자가 못 됨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믿다가 낙망도 많이 해 보았고, 힘을 다하여 정성을 기울였으나 그 정성마저 유린당한 저희들이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헤쳐 놓고 의지할 것은 교회도 아니고, 어떠한 교회의 지도자도 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이 땅 위의 어떠한 정치적인 지도자도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역사에 숨어 있고 시대에 몰리고 있는, 깊은 심정을 지니신 주의 성상을 모시는 것만이 이 시대의 신앙자가 해야 할 일임을 저희들은 느끼고 있사옵니다.

어느 한날 그와 같은 동지를 하늘이 그리워하지 않은 때가 있었사오며,어느 한날 그러한 동지가 핍박받게 될 때 하늘이 그의 편이 되지 않은 때가 있었사옵니까? 쓰러지는 자리에서는 같이 쓰러지셨사옵고, 한탄하면서 싸우는 자리에서는 같이 싸우신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그런 자리에서도 주라고 부를 수 있는 외로운 모습이 도리어 그립사옵니다. 이와 같이 의지할 바 없이 한스러운 이 땅을 저버리고 아버님만을 붙들려는 심정의 동지가 되기 위해 애쓰는 무리를 아버님께서는 몹시도 그리워하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 이들 앞에 섰사온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오라 하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가야 할 책임을 느낄 적마다 부족한 자신임을 아버지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고, 사망의 물결을 막아야 할 적마다 아버지의 권고를 듣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여기에 나온 아들딸들, 이들은 누구를 따라가는 자가 되지 말게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자기의 마음을 통하여 느껴지는 천적인 심정에 끌리어 갈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진정한 자, 진실한 자에게는 지도자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천륜은 내 양심과 더불어 영원한 스승으로 계신 것을 알았사옵고, 영원한 주인공으로 계신 것을 알았사옵고, 영원한 신랑으로 계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가까이 있는 하늘이 부여하신 본연의 그 자체, 당신을 높이는 내 본연의 자체를 찾기에 급급해야 할 자신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상대적인 세계에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그러기에 예수도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 하시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기를 고대하신 것을 아옵니다. 이 마음을 넓히시옵소서. 이 몸을 낮추시옵소서. 넓히고 낮추어야 할 저희의 마음과 몸이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한 가슴에 한을 품었다 할진대 이것도 잊어버리고 넓혀야 할 것을 알았사옵고, 원수를 대하여 미움이 싹틀 때에도 마음을 넓혀 잊어버려야 할 것을 알았사옵니다.

수고하고도 보수를 바라지 않고 몰아치는 억울한 자리에 처할지라도 복을 빌어 주어야 할 노정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이 왜 이런 길을 가라고 하시는가도 알았사옵니다. 하늘이 이렇게 가셨기 때문이요, 그래서 이렇게 오라고 하시는 것이 원칙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으로 이 땅 위에 오셨사오나 만주의 주 되신 모습을 낮추시어 죄인의 발을 씻어 주셨사옵고, 죽음의 무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숭고한 그 인격 앞에 머리 숙이고 감격하여 말을 잃은 채 한없이 흐느껴 울 줄 아는 아들딸이라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런 무리가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니다. 말 많은 세상에서 당신의 사람을 찾는 일은 많았사오나, 말로써 아버지 앞에 인연된 적은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로지 심정만으로 되어질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자기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립고 보고 싶은 그 마음은 아버지 속에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애달픈 그 심정은 저희의 가슴 깊이 숨겨져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 예수와 성신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 선한 일을 위하여 죽어간 선지선열들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로지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증거의 아들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어려운 길, 험한 고비를 다 지내고 당신 앞에 무릎을 꿇은 아들딸들이오니,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분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말씀을 하였사온데, 이제 또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맺고 돌아갈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고, 심정적인 인연을 그 마음에 옮겨 주고 기뻐하실 수 있는 아버지가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같은 심정으로 머리 숙인 수많은 형제들 위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193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고 하는 제목은 ‘찾아오시는 아버지’입니다. ‘찾아오시는 아버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생각해 보겠습니다.

9-193
천주의 슬픔을 해결하시려는 하나님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영원히 행복을 노래하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나 가정, 더 좁혀서 내 한 자신을 두고 볼 때도 내 몸과 마음에 탄식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들은 여실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내 생활에 위협을 느끼면서 이리도 저리도 움직일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사로잡힐 때가 많은 것을 우리들은 항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한 모퉁이에서는 이러한 나를 거부하기 위해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또한 여실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기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떠한 그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수시로 몸을 재촉하는데도 몸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그런 걸음을 걷지 못한다면, 이 이상 더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며, 이 이상 더 마음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생애를 지나고 역사를 거쳐도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어 나가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내 한 자신을 어떻게 해결지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이 문제를 맡아 해결지어 만민 앞에 공인될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웠다 할진대, 나로부터 새로운 역사, 나로부터 새로운 시대, 나로부터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기쁨이 시작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에서부터 해결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무가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 둬야 되겠습니다.

9-194
하나님께 슬픔을 안겨 드린 인간
만일에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고 충격을 가하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 것인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넘고 이 세계를 넘어, 지으신 피조세계와 천상천하의 모든 문제를 해결지으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한을 느끼며 살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주위에 있는 친구에게나 형제에게나 혹은 처자에게 원망도 하고 분풀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대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상대를 가져 보지 못한 채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싸워 나가는 인간의 모습과 세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내 가슴에 터질 듯한 근심이 있고 수심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고통입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러한 모습으로 지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실 때 이렇게 슬픔과 고통권내로 쓸어넣기 위해서 지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본래는 기쁨을 느끼도록 지으셨습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심정을 갖춘 모습이 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만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기쁨이 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5일간 만물을 지으신 후 6일째 되는 날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본따 지으신 우리 인류의 조상은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요, 지극히 귀한 존재요, 지극히 자랑스러운 존재요,지극히 기쁜 존재요,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사랑하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 혹은 여러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하나하나 헤쳐 보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고,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만물 앞에 축복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더하고 기쁨의 자극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순간적인 기쁨을 느끼기 위해 지으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대할 적마다 가슴 깊이 스며들어오는 기쁨의 자극과 행복을 느끼시기 위해서 최고의 심정을 기울여 지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정 전체의 총합체로서, 만우주 전체의 창조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쁨의 대상체로서 지었던 인간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지었던 창조세계는 한과 슬픔의 세계로 변하고 말았고, 기쁨과 소망의 실체였던 아담 해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추방당한 무리이니 응당 고통을 받아야지요. 응당 슬픔을 당해야 됩니다. 천륜을 저버린 배도자의 보응으로 슬픔과 고통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9-195
마음을 통한 구원
그러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우리에게 찾아갈 수 있는 기쁨의 목적지와 모든 슬픔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여러분과 나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본래의 세계, 본래의 목적지를 찾아야 합니다. 또, 내 주위에 엉클어져 있는 흑암의 모든 고통을 헤쳐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 목적지를 찾지 못했고, 그 어둠과 흑암의 탄식을 제거시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수천년 역사를 거쳐나오는 동안 인류는 탄식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허덕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면 고통, 슬픔이면 슬픔, 흑암 권세면 흑암 권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비까지입니다. 죽음의 고비까지.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의 관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이를 밀어 터치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시대적인 소망이나 역사적인 소망을 찾아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대들기 전에는 하나님은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인간인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놓여진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시고 다시 붙들어 행복만이 있는 그 세계로 되돌아가게 하시려고 수고해오셨습니다.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천당은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땅 위에서는 비록 고통 가운데 살지라도 그 고통을 삼켜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천당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절대 천국 못 갑니다. 못 간다는 거예요.

믿으면 천당 가요? 그렇다면 봅시다. 4천년 동안 뜻을 중심삼고 성별시켜 놓았던 이스라엘 민족, 그들이 오죽 잘 믿었습니까? 아브라함 이후 모세를 거쳐 예수가 오기 전까지의 2천년 동안 그들은 모세가 세워 놓은 율법을 오죽 잘 지켰습니까? 그렇게 잘 믿고 나온 무리가 믿음의 왕자로 오신 예수를 배반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을 거룩하게 단장하고 속죄소에 들어갈 때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신한 듯하였고 믿음의 실체인 듯하였으나, 그런 자들이 예수 앞에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를 일입니다.

그토록 잘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절개가 지금 땅 위에서 예수를 믿고 있는 신도들의 신앙의 절개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준은 얼마나 믿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난 후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마음에는 강도의 심보를 품고, 도적의 심보를 품고, 살인자의 심보를 품고도 믿으면 천당 간다구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구원하는 것이뇨? 구원은 밑창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근본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인격자로 만들기 위하여 지도하는 스승이 있다 할진대 그 스승은 먼저 제자의 마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 제자를 인격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왜 구원하시려 하는고? 구원시켜서 무엇을 하실 것인고?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던 본연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섭리를 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마음에서부터.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붙안고 나오시면서, 마음의 행로를 지키고 마음의 행로를 보호하고 마음의 행로를 이끌어 가면서 인간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9-197
하나님과 예수의 집이 되었어야 할 인간의 마음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지어 놓으신 만물을 보시고 실망하고 울기만 하셨느냐? 아닙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운명하신 예수도 가신 그날부터 쉬고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계십니다. 뭘 다 이루었어요? 기도라는 것은 목적의 완성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에서 열 두 사도를 이끌고 다니실 때, 그 사도들에게 마음으로 원한 것이 무엇이었느뇨. 그 고깃덩이가 따라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겁니다. 그 마음, 예수가 그들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마음을 원했습니다. 예수를 모시려면 그 마음이 예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예수의 집이 되었더면 예수는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고하실 일이 있으면 ‘주여, 제가 대신 수고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고통받으실 일이 있으면 ‘제가 대신 고통받겠나이다’, 예수께서 슬퍼하실 일이 있으면 ‘제가 대신 슬퍼하겠나이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 그분은 모심을 받아야 할 분이요 우리는 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상하의 절차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3년 공생애노정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주님보다도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무한히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자기가 살아 있었다는 거예요. 거기에 예수가 살아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적 기준 위에서 예수와 인연을 맺고, 영원한 승리의 토대 위에서 나는 영원히 영원히,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 땅을 점령하였노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이 땅 위에 와서 30여년의 생애를 살다 가신 예수를 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이 다시 주인행세를 하는 환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 역사가 흘렀지만 하나님은 아직까지 ‘이건 영원히 내 것이야. 어떠한 사탄의 괴수도 이것을 점령할 수 없어’ 하실 수 있는, 온 피조만물과 하늘 땅 앞에 천주의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어디 찾았다고 보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마음에 안주하고, 거기에 하늘의 모든 심정을 옮겨 놓고, 그 마음을 통하여 땅에 대한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것이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까지 그러한 마음을 가진 인격자를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네 마음에 천국이 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무형천국을 그리워하기 전에 유형천국을 건설하라! 무형천국을 소망하기 전에 유형천국, 즉 실체천국을 완성하라! 이것이 예수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집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 둘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맺어지고,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위로하고, 마음으로 동정할 수 있는 터전을 못 가졌던 예수였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할진대, 예수는 불쌍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불쌍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도인들을 통하여 마음의 궁전을 개척하려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마음의 궁전을 개척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찾아나오고 계십니다. 사망세계인 이 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찾아오셨습니다.

9-199
고난받았으면서도 아들의 도리를 다하신 예수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을 찾아오셨는고? 빌라도와 같은 권세를 가진 자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기세가 늠름하고 세도가 당당한 제사장 교법사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내밀고 얼굴을 쳐드는 자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어도 죄인과 같은 마음, 먹을 것이 있어도 먹지 않고 입을 것이 있어도 입지 않고 살 곳이 있어도 자기가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고, ‘민족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세계 인류의 사망권을 열어주시옵소서. 민족의 고통을 제해 주시옵소서’ 하는 자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민족을 벌주고 책망하며 욕하는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눈물짓는 무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러한 곡절로 하나님과 세상이 상반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기뻐하는 자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이고,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는 세상이 기뻐하는 자리입니다. 유대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과 더불어 기뻐할 때는 하나님이 슬퍼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찾고 찾으시면서 허덕여 나오셨습니다. 왕자의 권한을 가지고 이땅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땅 위의 가장 낮은 자리서부터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귀역사를 잘 알아야 됩니다. 구약시대는 어떠한 시대냐? 종을 시켜서 역사하시던 시대입니다. 천사, 즉 천적인 종을 시켜서 역사하시던 시대입니다. 신약시대는 어떠한 시대이냐? 종의 시대를 지나서 구약시대보다 한 단계 올라간 시대입니다.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시고 종들이 터를 닦아서 아들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 놓고 아들을 보내 역사하신 시대입니다. 이렇게 자꾸 올라가는 것입니다.

종은 어떠한 종들이었습니까? 충성을 다하는 종들,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그 시대에 몰리던 종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선지자들 중 택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환영받던 사람이 누구 있었습니까? 이렇게 종들 중에서도 몰리는 종들을 통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후에 아들을 보냈더란 말입니다.

그 아들은 이 땅 위에 와서 무엇을 했느뇨. 영광을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자기를 중심삼은 기쁨이나 만족을 소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누구를 찾아가셨습니까? 빌라도의 법정에 가셔서 빌라도와 어깨를 겨루고 천지의 대도를 밝히는 공론을 해보았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무릎을 맞대고 의논하고, ‘야! 이녀석아. 너는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의 절개를 유린한 자다’ 하고 항의해 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나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자’고 해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너희들을 택해 세우신 것은 나 때문이니,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모셔라’ 하고 말해 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하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로 추대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위신과 환경적인 모든 것이 그렇게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좋아서 ‘오! 잘한다’고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예요.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는 4천년 동안 종들이 법도를 따라 천상을 대신하여 충절을 세운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 앞에 자기의 위신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몰리는 처참한 환경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연만은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천년 동안 아들을 찾아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아셨기에 죽더라도 하늘 앞에 효자가 되겠다고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는 종들이 세워 놓은 절개를 생각하면서 아들의 입장에서 아들의 절개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상에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셨으니 그분을 대신하여 가야 할 곳이 그곳이요, 나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그분에 의거한 생활을 해야 하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각오한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본연의 아버지의 심정 앞에 역사적인 불효의 죄명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그 모든 어러움을 넘고 넘어 아들의 도리를 다 지켜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신이 무엇입니까? 성신은 어머니신입니다. 그리고 성신은 하나님 앞에서 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와 성신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성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의 아들은 나요, 당신의 딸은 성신입니다. 당신의 뜻은 땅을 찾는 것이요, 나를 찾는 것이요, 성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의 뜻은 우리에게 있고 우리의 뜻은 이 땅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할 수 있었기에, 예수가 온 그날부터 하나님의 일이 예수와 성신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래 가지고 땅 위에 죄를 짓는 민족이 있으면 그들을 대신하여 예수와 성신은 아들딸 된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속죄제를 드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찾아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끝날이 오면 재림주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것인고? 종의 시대가 지나고 아들의 시대가 지나갔으므로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셔서 무엇을 하실 것이뇨. 인간 개체 개체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아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신랑으로 오셔서 신부를 맞이한 다음엔 무엇을 하셔야 했는가. 하나님 앞에 가서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민을 품에 품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아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었으니 예수와 성신은 만민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축복을 받으려면 이 땅에 아버지의 역사적인 기준을 세워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오시는 재림주는 아버지의 역사를 일으키러 오시는 것입니다.

9-202
아버지의 성상과 형상을 갖추어야 할 인간
아버지의 역사를 일으켜 가지고 타락한 우리 인간의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을 불어넣고, 아버지의 성상을 재창조시키실 것입니다. 창세기 1장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구원의 최고의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성상을 이루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고를 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수고의 복귀노정을 거쳐 나오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인간들, 응당 천만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찾아오시기를 지금까지 그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예수와 같은 완전한 인격자가 못 되어 있습니다. 이 땅 위에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종교도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대하는 형상도 천태만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해 보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보잘것없는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수고하셨습니다. 만일에 찾아오신 아버지의 뜻을 내가 완결하지 못하고 영계에 가면 하나님은 또 다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를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심정의 인연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의 심정이 한 자리에서 만나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갖추어 가지고 그것이 전체의 가치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넘기 전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슬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아버지는 찾아오고 계십니다. 저 사망의 물결치는 죽음의 장소에도 아버지께서는 찾아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고? 본래 인간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에 최고의 정력을 다 기울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심정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의 백퍼센트 다하고,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을 다하고, 몸이 있다 할진대 그 몸을 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9-203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의 심정
하나님은 왜 아담 해와를 이토록 귀한 존재로 지으셨겠습니까? 심부름시키기 위하여? 아닙니다. 심부름시키기 위해서는 천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지으셨겠습니까? 아들딸 만들기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요 너희들은 내 아들딸이니, 너희가 슬프면 내가 슬프고 너희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 할 수 있는 관계로 지으신 것입니다. 여기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불효하고 살인범이 되어 철창에 갇힌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부모의 마음은 철창을 넘어서 그 자식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늘 하물며 본연의 천심 그 자체로 계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랴! 어떠한 고통도 이 마음을 제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떠한 슬픔도 이 마음을 제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떠한 비통함도 분함도 이 마음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기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저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아버지 앞에 아들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딸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패악한 무리였다는 것을 반성하며 스스로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피를 맺히게 한 철천지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원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만 억울한 입장에 있다 해도 원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을 천도가 공인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인류는 다 죽어야 하기때문에 그러기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자식된 입장에 있는 인간이 부모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 본연의 인연, 심정적으로 엉클어진 이 정리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한 구원의 역사도 사랑을 가지고 합니다. 사랑. 믿음도 아니요 소망도 아니요 사랑입니다. 맨 나중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6천년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라고 붙들고 울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사탄이 못 끌어갑니다.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사탄이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그 부모의 자식임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못합니다.

아버지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을 해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담아, 내 사랑하는 해와야, 너는 내 아들이고 너는 내 딸이로구나. 천지가 변할지언정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소냐’ 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고 고대하였는데,그 때를 맞지 못한 채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더불어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몰리는 민족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저주 받고, 하늘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무리를 붙들고 나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사정은 인간보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죄의 원인과 결과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죄를 용서해 주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시 인간의 심정이 어떠했다는 것까지 아시기에 하늘은 죄를 기억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9-205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처량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찾아 나오시되 맨 끝에서부터 찾아나오십니다. 타락한 자식들이 몰림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선두가 되셨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쫓겨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선 것도 모세가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서신 것입니다. 모세만 운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보다 더 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김삿갓과 같다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짊어진 짐을 풀 곳이 없어 이스라엘 민족한테 풀려고 했는데 그 민족이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보따리를 짊어지고 세계를 유랑하시는 신세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 사무치는 마음과 그 끓어오르는 심정을 누가 알았더냐. 사람이야 잘났든 못났든 괜찮다는 겁니다. 알든 모르든, 유무식(有無識)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효자 효녀가 누구일 것이며, 하나님을 모셔 줄 가정이 어디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모셔 줄 민족이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구는 넓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많아도 처참한 유랑객이 되신 아버지를 붙들고 눈물지어 주는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만들려면 내가 네 아버지이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수고했다고 다 가르쳐 주어야 하니 참으로 원통한 사실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만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요, 무한한 사랑으로 자식 앞에 나타나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슬프고 처량한 모습으로 허덕이는 아버지가 되셨으니, 얼마나 불쌍하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보신 말씀과 같이 지극히 작은 고아 하나가 불쌍한 모습으로 자기 앞을 지나갈 때, ‘저기 아버지가 가시는구나’ 하며 그를 붙들고 눈물짓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또 남루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걸인이 있을 때, 자기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로 알고 ‘저와 같이 아버지도 가시는구나’ 하며 눈물짓는 자도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지나가던 행인을 대접하는 것이 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9-206
진정한 효자 효녀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효자가 되느뇨.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해야 됩니다. 지난날 아버지께서 겪으신 사정을 다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한 아버지입니까? 사랑하는 아들딸이 사형장에 나가면 교수대 앞에서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보다 먼저 눈물을 지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지극히 선한 아버지시로되, 이 땅 위의 불행한 사람이 가는 자리에 동참하지 않은 적이 없는 아버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가시는 이유는 인간과 부자의 인연을 가진 연고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편안한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실제의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예수께서 민족 앞에 몰리고 배반당하는 입장에 설 때에, 고요한 산곡을 찾아 들어가서 무슨 기도를 한 줄 아십니까? ‘아버지여, 나에게 복을 주시어서 편안히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몰리고 쫓길 적마다 ‘아버지, 원통하옵니다. 당신은 역사노정에서 얼마나 이런 길을 가셨습니까?’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가 흘리는 이 눈물은 아버지를 대신한 눈물이로구나!’ 하는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 진정한 아들딸이라 할진대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남루하고 자기의 몸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자기의 모습과 자기의 상처를 잊고 그 이상 처량한 길을 가신 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엉클어져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자라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자라면 말없는 산봉우리를 보고서도 울 줄 알아야 됩니다. 왜? 저 산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의 흔적을 남기시지 않은 피조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좋은 풍경을 대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아버지께서는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내시면서 아들딸한테 몰림받고 우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손이 여러분 자신의 몸의 일부분일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린 채 그 손을 붙들고 울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왼손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이요, 바른손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이다’ 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가 자기의 손을 붙들어 주면서 ‘아버지!’ 아들아!’ 하는 경지에서 몸부림을 치는 자 외에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는 그러한 경지까지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보았습니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몇 시간씩 울다 보면 하늘이 그렇게 우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경지를 넘어가서 ‘아버지!’ 하면 실감이 납니다.

아버지란 명사는 많습니다. 내 아버지도 있고, 남의 아버지도 있고, 나쁜 아버지도 있고, 좋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있고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대하여 우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9-207
마음에 모시고 위로해 드려야 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오시면서도 이 인간들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사망세계에서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헤치고 그 마음에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심정을, 자기의 모든 전부를 옮겨 주고, 그 다음에 축복을 해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역사과정을 거쳐 나오신 아버지를 기필코 모셔야 할 터인데 어떠한 자리에 모시겠습니까? 여러분, 모실 장소를 준비했습니까? 그 곳이 어디입니까? 모실 장소를 준비하라고 예비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있는고? 하나님을 모실 곳이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집입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까? 아니예요. 왜? 이 땅 어디도 믿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식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 마음을 중심삼고 내가 영원불변의 모습이 되어 내 마음깊이 아버지를 모셔야 되겠습니다. 먼저 마음의 중심에 아버지를 모신 후에 그 아버지를 중심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의 사회, 아버지의 가정, 아버지의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이 땅에서 하늘을 잘 믿는다는 어떤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어디에 모실 것이뇨? 각자의 마음 깊은 곳입니다. 만일에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셨다 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위로해 드리는 데는 어떠한 마음을 갖고 위로해 드려야 되느뇨? 수고하신 아버지이심을 알고, 나를 만나기 위해 6천년 동안 찾아오셨던 아버지이심을 알고 위로해 드려야 됩니다. 세상의 어떤 비극 영화의 주인공보다도 더 비극적인 분으로 찾아오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셔야 됩니다.

보십시오. 아담가정에서부터 찾아오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버지께서는 가인과 아벨을 세워 놓고 천륜의 대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셨으나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아벨이 죽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이는 곧 하나님이 맞으신 것입니다. 노아 때는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랬고, 모세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랬고, 예수 때도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9-208
나는 아버지를 죽인 죄인
타락 이후 지금까지 인류는 비극의 역사를 엮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극입니다. 희극이 없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비극의 프로가 연속되어 온 역사, 비극의 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극의 장면에서 누가 쓰러지고 누가 통곡했는가? 하나님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고,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모두 누구 때문인고, ‘나’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영화를 본다 할진대 통곡 안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만민의 아버지로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를 잡아죽였습니다. 우리는 살인강도보다 더한 악당들의 후손인 것입니다. 예수는 후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첫아담이 타락했으니 다시 완성한 아담격으로,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첫아담이 거짓아버지가 되었으니 후아담이 참아버지로 오셔서 만민을 다시 낳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살려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으로 오신 예수를 잡아죽였으니 우리는 살인강도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 아버지 저에게는 양심적으로 가책될 일이 없습니다’ 하는 수작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강도란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아버지를 죽인 것을 알면 그 순간에는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만 죽인 것이 아니라 아들도, 종도, 하나님의 모든 사람을 때려잡은 황마적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것을 느끼고 회개해야 됩니다. 저는 옥중에 있을 때 사형수들과 여러 번같이 있어 보았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고통을 벗어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합니다. 자기가 살길이라면 천 사람 만 사람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어요. 그런 것을 바라볼 적마다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역사적으로 헤아려 볼 때 응당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를 범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들을 구하겠다고 교수대에 나가신 하나님의 황태자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존귀한 분을 반역자로 몰아 잡아 죽였으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심정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인 중에 내가 제일가는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는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의 심정, 예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자들입니다. 찾아오신 아버지를 환영하지 못하고 박대하였습니다. 창을 들고 옆구리를 찔렀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어요. 알고 보니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를 죽인 죄를 뉘우치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가 이 땅 위에 왔다가 죽임당한 일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분합니까? 우리는 그 분함을 잊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 분함을 잊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심정뿐입니다.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심정 외에는 없어요.

‘너 하나를 찾기 위하여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았으니, 너 하나가 찾아지는 날에는 천만사의 고통도 잊을 수 있다. 너 하나를 찾아온 길이니 너 하나를 찾는 날에는 몇 번의 고비, 몇 번의 억울한 고비도 잊을 수 있다’ 하시는 아버지, 얼마나 사무친 심정이기에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하시겠습니까?

이에 여러분은 황공하여 눈물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시기에 잊을 수 없는 범죄의 사실을 잊어 주겠다 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는 것이 하늘의 소망입니다. 그런 아들딸을 찾아 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9-210
아버지의 짐을 대신 지는 아들딸
이제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할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한 마디의 말을 하면서도 몸 둘 곳을 몰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짓고는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늘 앞에 무수한 죄의 역사를 가진 우리들에 있어서랴. 이제 여러분은 심정 하나를 붙들고 ‘당신의 슬픔은 저의 슬픔이요 당신의 기쁨이 저의 기쁨이오니, 당신이 슬퍼하면 저도 슬퍼하고 당신이 웃으시면 저도 웃겠소이다. 당신이 동하면 저도 동하고 당신이 정하면 저도 정하겠소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다 할지라도 안 됩니다. 사무친 그 심정, 그 하나의 마음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던 발걸음을 어느 한 곳에 멈추고 6천년간 유랑하신 보따리를 풀어놓으실 수 없습니다. 집이야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앉으실 자리야 바위덩이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이 맺어지는데, 그 인연을 맺어주시기 위해 아버지는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도가 땅 위에 있지만 그 가운데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몰리고 몰리고 또 몰리고, 허덕이고 허덕이고 또 허덕이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이 이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뇨? 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보는 것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라면 눈물이 앞서고 우중이라도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행랑보따리를 말없이 벗겨서 대신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왔더라도 서슴없이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라는 것입니다.

9-211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아들딸
그런 아들딸이라면 주가 이 땅 위에 와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리어 만민을 통치할 수 있는 만왕의 왕좌에 올라가게 될 때에 결코 모른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자리에서 천국의 심정을 갖고 그분을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악한 사람이나 선한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선하다고 해서 얼마나 더 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27억 인류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무도 원망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의 원수라 하더라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만난 후 그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고, 그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같이 해야 됩니다. 이런 아들딸이 되어 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났으니 이젠 보따리를 다 풀어놓게 해야 합니다. 이젠 죄수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고 ‘어디로 가시겠나이까. 아버지, 제가 앞장서리이다’ 하며 그 길을 먼저 걷겠다고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을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이 천지간에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들이 있는 곳에 축복을 다 퍼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모인 집단이 있다 할진대 세계의 모든 교단 위에 내렸던 은혜를 다 끌어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날에는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다가 있는 자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못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누구를 세워서 심판할 것이뇨? 당신의 아들을 세워서 심판하십니다. 내 아들은 이러이러했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아버지가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세계 인류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들딸을 기준해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주먹구구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영광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세워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처참한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쳤으니, 아버지를 배반했으니, 아버지를 모른다 했으니 그 아버지도 응당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겪고 난 다음에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공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겪어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는 하나님이요, 인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자기가 처한 자리에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위안 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아버지를 모신 기쁨을 심정적으로, 또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갖지 않으면 땅 위에 주님이 오실 때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기준까지 여러분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주를 모셔 보았습니까? 거지같은 자리에서도 모셔 보았습니까? 그런 자리에서도 ‘아이구, 아버지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다니 황공하옵니다’ 하며 몸 둘 곳을 모르고, 얼굴을 못 들며, 추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 민망스러워 거동을 못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시며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 보았습니까?

통일교회는 영광스러운 자리, 좋은 자리에서 은혜받으려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은혜받으려는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어디를 향하여 가야 되느뇨? 모진 광풍이 몰아치는 곳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고생을 하며 오셔야 하니, 우리가 그 곳을 개척하기 위해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모진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일지라도 우리가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야 하니 우리가 죽고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곳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보금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리로 찾아오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실 줄 아는 아들딸, 그 아버지의 고통의 짐을 전부 짊어지고 그 아버지의 고난의 길을 전부 다 책임지고 나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는 지극히 적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리를 통하여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외면하실래야 외면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 가운데 그 분야에 자신있다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을 지배할 것이요, 천군천사까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의 선물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오신다니 황공한 일입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동서를 초월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많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천지는 하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지난 날 동서의 모든 사조는 이민족과 하등의 관계가 없었지만, 점점 이 민족의 일로 부각돼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번의 정상회담을 통해서도 여러분은 잘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민족이지만 그들이 가슴을 떨면 우리도 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향하여 세계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계는 나 대신 심판의 제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9-214
심정의 주인공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권세의 주인공이 아니라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눈물이 많고 누구보다도 동정심이 많은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최후로 바라는 것은 도(道)가 아닙니다. 도를 원하고 있지만 도가 궁극적인 대상은 아닙니다. 어떤 주권도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행복을 제일로 원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전인류가 어떠한 주의를 내세우고, 세계가 모두 그 주의권내(主義圈內)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과연 전부 편안하고 행복스럽겠습니까? 자유를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싸운다고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무리는 자유스럽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개념으로 보면 가상적인 것들입니다.

심정, 생명의 원천인 심정, 이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으며, 하나님이 동하면 내가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나도 정하고 하나님과 같이 바라보고 듣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이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다 할진대, 그들은 최대의 행복자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난 가운데에서 수고하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허덕여 왔으나 이제부터는 ‘영광 가운데 오시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모시는 효자가 되겠나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행복의 동산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창조주의 권한을 가지고 천지만상 앞에 나타나시게 될 때에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 세계에서도 효자효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효자 효녀는 오늘날 이 시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 때뿐만이 아니라 기쁠 때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영광의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춤을 춤으로써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얼마든지 춤을 추어서 위로해 드리겠다. 내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아버지께서 즐거워하신다면 얼마든지 노래를 불러서 즐겁게 해드리겠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이라도 그렇게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자리로 내몰아야, 그런 길을 걸어가게 해야 빠르겠기에 그런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한 고개를 넘고 난후에는 아버지께서 천하만상 온 피조만물 앞에 ‘이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기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기상을 갖추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의 충절을 다하고 나서, 모든 피조세계가 머리 숙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밉게 볼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사탄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교만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뒤에 두고 자기만 올라가겠다고 하니 다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아버지부터 모셔 가지고 영광의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고난의 아버지를 모셨다고 해서 아버지를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내가 말없이 슬픔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 해도 그것은 아버지를 눈물짓게 하는 하나의 계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에서만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아들의 자격을 모두 갖추어 영광의 자리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우리는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고생의 자리에서부터 영광의 자리까지 동참할 수 있는 아들 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전세계에 우리 한민족과 같이 불쌍한 민족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대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정이 두텁다면 그 심정의 터로 해서 이 어려운 환경을 참고 넘어 이 자리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위안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상에 갔을 때에 제일 영광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제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상이야 뒤끓든 사회야 변하든 천심을 향한 일편단심만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내 몸이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그 약속만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내가 영광의 때,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면 아버지를 이렇게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기백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내가 영광을 받고 모심을 받겠다는 것보다도 ‘그때에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작은 무엇이라도 있어야 6천년의 한을 제거시킬 수 있고 자랑스러운 소망의 한 자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아십시오.

오시는 아버지를 잘 모시어 영광의 아버지로 높여 드리고 아버지 대신 사탄을 향하여 ‘야! 이놈아’ 하면 사탄이 도망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9-216
기 도
아버지, 저희들의 어려움 때문에 무한히 눈물을 흘렸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어려울 때는 이를 갈며 가슴을 쥐어뜯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버님 앞에 얼마나 용납받을 수 없는 처신이었던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런 일은 하늘의 슬픔을 잊은 배반자에게나 있을 법한 일로 하늘의 슬픔을 아는 무리에게는 꿈에도 당치않은 일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슬퍼도 기뻐하고, 어려워도 기뻐하고, 죽더라도 감사하는 것만이 아버지 앞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책임을 하는 것이며,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형상 앞에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저희들이 어느 한때에 찾아오신 아버지를 맞이하였고, 굶주린 아버지를 잡숫게 하였으며, 목마른 아버지를 마시게 하였으며, 헐벗은 아버지를 입게 하였으며, 어려우신 아버지를 찾아보았으며, 병든 아버지를 방문하였습니까? 그런 자리가 언제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리라 하셨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당신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당신께 행한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아버님, 저희 자신만으로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 개체 외에도 전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전체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대(大)를 위하여 소(小)를 희생하는 것이 역사적이 철칙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더우기나 천적인 섭리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을 알았사오니,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슬픔을 더 염려하며, 자신의 걱정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걱정을 더 염려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더 염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딸이 된다 할진대, 하늘의 심정이 같이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고통이 있을 때 당신을 저버리던 저희였고, 자신의 슬픔이 있을 때 당신 앞에 아뢰던 저희였고, 자신의 억울함이 있을 때 이 억울함을 맡아 달라고 당신 앞에 호소하던 저희였습니다. 이것은 효자의 도리가 아니고 충신 열녀의 도리가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슬픈 자리, 죽음의 자리에 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이 억울함을 당하고 계신다면 그 억울함을 짊어지려고 하는 모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인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땅 위에서 서기 힘든 어려운 자리에 서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런 자리에 계시다면 그 자리에 계시지 않게 해드려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이제 더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 시간, 마음으로 당신을 대신하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좋겠사옵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이제까지 외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사오리까?

아버지! 이들의 마음문을 여시어서 당신이 임하시옵고, 복귀노정에서 맺힌 당신의 한을 푸시옵고, 저희들이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시는 기쁨과 영광이 이 세계 온 천지의 만물에게까지 미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을 아버지께서 무한히 고대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도 그날을 위하여 싸우고 또 싸우며, 울고 또 울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모시는 영광의 제단까지 ‘나는 이렇게 아버지 앞에 충성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기준을 세워 달려나갈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말씀을 아버지의 것으로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생명을 당신 것으로 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