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0 to 9-188: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되자
1960.05.08 (일), 한국 전본부교회

9-160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되자.
에베소서 3:1-21

[기 도]

이 삼천리 반도, 삼천만 민족 위에 당신의 축복이 충만하게 되기를 아버님은 얼마나 고대하시옵니까? 그러나 삼천리 반도가 아버지의 품안에 있지 못하고, 삼천만 민족이 아버님과 상관없는 자리에 있사오며, 그리고 교단들이 있지만 그 교단들도 아버지와 인연이 먼 자리에 있사옵니다. 이 삼천리 강산에 당신이 발붙일 곳은 어디이며, 당신을 환영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은 몇 사람이나 있사옵니까?

이런 것을 보고 이 땅이 탄식하고 있사오며, 삼천만 민족을 대해 영계의 선한 영들이 부르짖는 처량한 울분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땅이 땅답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한 연고로 탄식의 소리와 원한의 소리를 내게 된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이 탄식의 소리와 원한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늘이 이 민족을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때이오나, 이 민족이 하늘이 이끄실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몰리고 쫓김받던 무리로서 여기에 엎드렸사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서는 길에는 가시자국이 남게 되고 상처가 있게 될 줄 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의치 않고 넘어가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아시는 아버님, 저희들이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각오와 맹세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의 참다운 심정적인 관계가 이 자리에서 맺어지지 않으면 안 될것을 아오니, 아버지, 당신의 손길로 친히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고, 아버지의 양팔로 저희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얼마나 고대하시고 소원하셨던 일이었습니까? 이제 그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사옵고, 그 애달픔을 가히 짐작할 수 있사옵니다.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불초한 이 모습들, 수많은 선지들이 쌓아온 피의 제단으로 인해 속죄받을 수 있게 된 놀라운 은사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과거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면서, 실적을 갖고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할 터인데 빈손 들고 나온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그 무엇을 요구하는 아버지가 아니시기에, 간절한 마음 간절한 심정만을 아버지 앞에 드리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그립고 보고 싶어 눈물짓는 그 모습을 아버지께 드리고 싶어 나왔사옵고, 상처 입으신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눈물 뿌리고 싶고 또 그 손길이 그리워 나왔사옵니다. 그 마음과 몸의 상처가 심하심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하여 방황하시는 아버지의 수심에 잠기신 모습, 초췌한 그 모습을 붙들기 위해 저희들은 나왔사옵니다. 이런 마음에 어리어 아버지라 부르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에 모였다 할진대, 아버지께서 그러한 때 저를 불러 주시고 저를 찾아 주신 것과 같이 이들도 그러한 자리에 처하게 될 때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가라 하신 길이 서글픈 길이 아니었사옵고, 가고 보면 황공한 은사의 길이었사옵니다. 죽으라 하시며 내몰던 길도 죽이기 위해 예비한 길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그 내면의 곡절을 알게 될 때,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사옵니까. 이것이 다 저희를 위해 먼저 수고하신 아버지의 수고의 증거를 보여 주시기 위한 역사임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이 그런 느낌을 체휼하고 감격의 눈물을 지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만도 감사하옵니다.

이제, 이들이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여기에 왔사옵니까? 그 무엇을 보기 위하여 여기에 왔사오며, 그 무슨 인연을 맺기 위하여 여기에 왔사옵니까? 보여 줄 것은 눈물과 애달픈 사정밖에 없사옵고, 인연맺을 것은 안타까운 것 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도 이 인연이 아니면, 이 사정이 아니면 저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사탄의 제물로 사라져 탄식하게 될까 염려하여 나온 무리이오니, 이 시간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붙들고 눈물지으실 수 있는 자녀가 있고 ‘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여기서부터 하늘의 역사는 삼천만을 이끌 것이요, 잠들어 있는 세계 인류의 심정을 움직여 하늘앞으로 향하게 하는 기원이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젊은이의 가슴 가슴이 불타올라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아무개야 뜻을 위해 가자’ 하고 외치는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삼천만에게는 살 길이 열릴 것이요, 사망의 동산에 생명의 군대가 와서 함께 싸워줄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무리가 그리워 모였사옵고, 그러한 길을 가기 위해 싸워나왔사오며, 그런 자리에서 승리의 제단을 세워 아버지와 더불어 만우주앞에 보이기 위하여 나왔사오니, 처음 각오한 이 마음 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작정하여 드리고자 하는 이 일편단심, 이 절개를 굽히지 않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오한 그 충절을 천륜이 변하지 않는 한 변치 않고 간직하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제가 여기 섰사옵니다. 모인 무리들 앞에 무엇을 전하오리까. 이들은 사망세계에서 한스러운 환경을 타개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르겠다는 소망을 갖고 허덕이오나, 사람의 힘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오니, 당신께서 이 일을 책임져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이 저희의 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어떤 주관이나 과거의 어떤 인습적인 관념하에서 움직이지 말게 하시옵소서. 어린아이와 같이, 당신의 손길에 붙들린 진흙과 같이 빚고 싶으신 아버지의 뜻대로 빚어져, 당신이 원하시는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 몸 다 드러내 놓는 어린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미 많은 말씀을 했사옵니다. 그 말씀을 아버지 책임져 주시옵소서. 분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또 나섰사오니 이들 앞에 권고하시고 싶으신 것을 권고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말에 귀를 기울여 움직이는 저희들이 되지 말고, 하늘의 심정과 움직임에 동하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외로운 심정을 아버지 앞에 묶어 놓고 숨은 제단을 쌓으면서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천지간에 많은 줄 아오니, 그들에게도 천적인 은사와 영광의 때가 가까와 온 것을 느끼고 체휼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163
말 씀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되자’라는 제목으로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사는 자가 되자’입니다.

9-163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나온 인류역사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찾아 나아가는 길에서 죽어갔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피로 물든 역사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생명이라도 쓰러질 적마다 울부짖으며 찾는 분은 온전한 사랑을 지닌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슬픔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역사를 거쳐가는 인간들은 슬픔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고통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있는 힘을 다해 싸워도 안 될 때는 자기의 피를 뿌리면서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들딸들도 슬픔에 대해 항거했고 고통에 대해 항거했으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므로 나중에는 피를 뿌리고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항거해 나온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 목적은 어디 있느뇨.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쓰러진 그 터전 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그들은 쓰러져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골고다에서 피를 뿌리며 30여년의 생애를 마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남기기 위함이었고, 또 피를 뿌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뿌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뿌려진 하나님의 사랑이 퍼지고 퍼져, 세계가 이 땅 전체가 사랑을 중심한 승리의 터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입니다. 그러한 땅이 되지 않는 한, 또 다시 성자가 죽음을 당하고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피를 뿌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둬야 되리라고 봅니다.

본래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어떤 놀이거리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취미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이, 어떤 이념적인 내용도 없이 그저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크나큰 목적과 대우주의 이념을 두고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미물(微物)에서부터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물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이념이 깃들어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념을 두고 지으신 목적은 무엇일 것이뇨.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이념의 세계, 즉 사랑과 더불어 통하고, 사랑과 더불어 즐기고, 사랑과 더불어 살고, 사랑과 더불어 죽는 세계를 목적하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9-164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공동운명체
우리가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눈 앞에 펼쳐진 만상(萬象)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보여지는 그 만상을 통하여 무엇인지 모를 간접적인 인상을 받고 그 반응되는 감각으로 생활에서의 감각을 높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미물이라도 반드시 우리와 인연되어 있고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해도 그 미물은 그날 그날 천륜의 이념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며 인간과 더불어 인연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뇨? 지극히 작은 존재물에서부터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 목적을 중심삼고 보면,다 하나님의 대우주의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의 이념권내에 들어 있는 연고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은 대우주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큰 분야를 맡고 있는 것에 흡수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에 흡수되어 그것의 재료가 되고, 한 요소가 되어 대이념을 중심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게 됩니다. 역사는 이렇게 진전되어 나오는 것이고, 존재세계는 천륜이란 원칙의 궤도에 따라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여 나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상대적으로만 헤아릴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에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백퍼센트 활용하지 않는 신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 있다 할진대, 그것도 생의 목적을 위해 뗄래야 뗄 수 없는 공동이념권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손가락 하나도 대우주의 그 무엇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포 하나도 역시 대우주의 이념 밑에서 사명적인 일편을 지니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존재세계를 법칙적으로 헤아려 공식화하고 이것으로 지식의 일부를 이루어 놓은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피부를 만지면 체온이 있고 물론 촉감도 있지만, 그 외에 느껴지는 다른 무엇이 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주의 이념은 우리의 생활을 수습해 나가면서 우리가 반대 방향으로 가려할 때에는 우주의 목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런 충고를 받고 사는 자신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큰 물건이든지 작은 물건이든지 어떤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전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대이념권내에 있습니다. 또,그것들을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삼고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지은 대우주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최고로 희락을 느끼실 수 있는 평화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나는 행복하다’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목적을 종결짓기 위하여 이 대우주권내에 하나님의 이념이 있는 동시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지금 탄식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입니다. 그건 무엇 때문이뇨? 타락한 연고입니다. 자기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자기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가야할 방향과 가야 할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통과 슬픔,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대우주의 이념권내에 있는 자신의 위치가 그만한 어려움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 고통의 고개를 넘어갈 것입니다. 또 이만한 고통을 참지 못할 내가 아니요, 이만한 죽음의 고개와 바꿔버려야 하는 나의 생명이 아니라고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한 자입니다. ‘어떠한 핍박과 죽음의 고개가 닥쳐와도 내가 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나의 가치는 땅 위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는 자는 땅 위에 있어도 하늘의 사람입니다. 땅에서 죽더라도 그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9-166
만물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사람, 그런 위치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주창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최고의 성공자입니다. 땅 위에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곳을 향하여 인간은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한 분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 그러한 자리가 잡히지 않는 한 세계는 수습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이념과 그러한 가치와 그러한 위치와 그러한 방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사망의 권한도 그를 지배할 수 없고, 어떤 주의나 사상이 아무리 팽창하더라도 그 주의나 사상이 그를 삼켜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은 종교를 세우시고, 무슨 도니 양심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을 세워 찾아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터전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오늘날 그런 자리에 서 있느냐?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이 일을 종결짓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업이 성취되지 않거늘,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업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맡으려고 했습니까? 전체 섭리의 뜻을 완결짓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그만 분야라도 책임지려고 했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타락 인간이 어떻게 해야 이 대우주 이념권내에 잠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찾아 들어갈 것이뇨?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찾아 들어갈 것이뇨?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시인이 자연을 보고 시를 한 귀절 썼다고 할 때, 독자가 그 한 귀절의 시 속에서 시인이 바라보던 자연환경을 그릴 수 있으며, 그 시인의 감정까지도 공감할 수 있다면 그를 위대한 시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화가가 찍어 놓은 점 하나에서 그 작가의 사람됨과 심정과 감정의 세계와 그의 이념을 헤아릴 수 있다 할진대, 그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평면적으로 보이는 어떤 상(像)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상 가운데 숨겨져 복잡한 우주관이 담겨 있는 내적인 상(相)이 모든 가치의 기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천하만상을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대창조 이념세계의 존재물들은 모두 하나의 사랑을 목적으로 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온 정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조세계를 엿새 동안에 지으셨지만 그 하나 하나의 존재물, 예를 들면 첫째 날이나 둘째 날에 지음받은 존재물에도 엿새 이후에 벌어질 대우주의 창조이념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심정을 뿌리로 하여 지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옛날의 유명한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이 지니고 살던 골동품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모래알이 떨어져 있다 할 때, 그 모래알 하나에도 하나님의 심정이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어떤 귀한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보다 더 높은 창조주의 손길을 거쳐서 생긴 심정의 결실체입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존재물인 것을 알고, 모래알 하나라도 우주와 같이 귀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인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연이란 것은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체도 4백억 개나 되는 세포로 인연되어 있는 생명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창조이념세계, 즉 대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심정 밖에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느끼는 시인은 위대한 시인일 것입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천주적인 심정을 느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우주적인 시인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너무나 무시하고 무관심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도 모르게 벌어져 있는 천하만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 보면 조그만 모래 한 알에도 우주의 이치가 들어있고, 하나의 원자에도 무궁무진한 우주의 조화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복합적인 힘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분자를 지나 원자, 원자를 지나 소립자……. 이런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과 목적을 갖추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거쳐 나온 것이요, 반드시 하나님과 심정적인 관계를 맺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되겠습니다.

도인은 어떤 사람이뇨?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하나님!’ 할 수 있는 심정으로 자기의 가치와 동등하게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도인일 것입니다. 그렇게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예술가일 것입니다.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천지만상을 보고 하나님의 각양각색의 사랑과 심정의 묘미를 발견하고, 그것들과 친구가 되어서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만우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실 때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어놓고는 보기에 선한지라 하셨습니다.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것입니다. 지으신 만물에 하나님의 목적의식이 내재되어 있기에 창조된 만물을 놓고 하나님은 기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9-169
모든 소유관념을 버려야 하는 타락인간
그러면 복귀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이뇨? 한마디로 말한다면 삼라만상의 개체개체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입체적으로 갖춘 사람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하늘이 보시는 인격의 가치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 프란체스코 같은 양반이 동물을 보고, 혹은 새를 보고 설교했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닙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만 꿈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한스러운 복귀의 고개를 넘어 새로운 천지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더더욱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에게 속한 일체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의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소유관념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어떤 상대물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반응하는 개성체, 즉 어떤 주체의 재료가 되는 상대체는 될 수 있지만, 하나의 주체로서 상대체를 가져선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만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게 속한 일체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나’라고 주장하는 나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으려면 나를 부정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나를 부정하라. 왜? 타락의 존재의식이 남아 있고 타락의 소유관념이 남아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부정해야 됩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의 것이뇨. 나는 나라의 것이요, 세계의 것이며,천주(天宙)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들은 반드시 이런 관계를 완결지어야 합니다. 인간은 지음받을 때부터 그런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의 통로가 막혔습니다. 막힌 이것을 다시 개방하기 위해서는 나를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개방시키기 위한 것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씨족에서 부족, 민족, 국가를 거쳐 오늘날 민주와 공산진영을 끌고 나오시는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민족을 넘어 세계를 붙드는 민족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민주진영을 움직이고 세계를 지도하려면 자기들의 개체적인 국가이념을 가지고 움직여선 안 됩니다. 민주주의를 중심삼고 일개 국가의 차원을 넘어야 민주진영을 리드(lead)할 수 있을 것이요, 세계를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대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라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을 대우주의 이념권내로 몰아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연고로 도의 길에서는 일체 부정입니다. 부정이예요.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기 서서 말하는 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이념과 주의를 부정하고, 가정적인 환경을 부정하고 개체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마음을 부정하고 심정까지 부정하라고 가르칩니다.

왜 그러뇨? 그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것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요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일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세계로 옮기기 위해서 부정하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온 천하가 우리 것이요, 하나님도 우리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렸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 보이는 세계도 우리의 세계가 아니요, 지어진 모든 만물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면서 하나님께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거듭난 후 모든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세우려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이런 노정을 거쳐나가야 할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내 심정 기준을 어디에 세울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기뻐하는 일체가 내 것이 아니라 사탄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끌어다가 하늘권내로 옮겨 놓기 위해 타락한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허덕여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목적이요, 하늘의 섭리의 목적이요, 창조의 목적입니다.

9-171
만물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한번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회상해 봅시다. 본래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부자의 관계였습니다. 부자의 관계.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것을 모르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우시고 소망하시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감정이 스며들기를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사춘기에 접어들면 만물을 대할 때에 신비감을 느끼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도 정열이 최고조로 불타오를 때 시를 쓰면 놀라운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대우주의 심정을 지닌 인간으로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목표대로 성숙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셨습니다.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성숙하면 할수록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대할 때 각각 서로를 대우주 전체의 실체로 감각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감정세계에 하나님도 들어가고 만물도 들어갈 수 있는 정도까지 인간이 성숙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만일 그러한 자리에 들어간 부부로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화하고 만우주와 심정적으로 화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을 지음으로써 모든 소망의 목적이 완결되었다’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들, 오늘날 이 천지는 이 꼴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비스러운 경지, 도의 길을 찾아 들어가면 그런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호흡하는 공기 속에서도, 뛰는 맥박에서도 천주의 감정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의 손을 보고도 웃을 수 있고 무한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멋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그런 경지에 갔다면 만물과 하늘과 더불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겠습니까?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에 그런 사실을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도(道)의 길을 가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라, 나서서 올라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지점까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요구하는 도(道)의 표준입니다.

여러분들은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인간과 심정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습니까? ‘하나님!’ 하고 부르는 순간, 하나님과 더불어 화하여 사랑할 수 있고,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 존재가치를 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세계가 심정의 세계요, 사랑의 세계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세계는 이치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새로운 이치를 논위(論謂)하고 철학을 세워 나오지만, 심정을 가진 인간은 절대 지배하지 못합니다.

최후에는 어떤 이치로써 해명할 수 있는 심정 말고, 어떤 이치로써 해명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심정세계, 설명은 못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찾아야 됩니다. 어떤 논리로써 해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해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명을 해명할 수 있어요? 여러분의 양심을 해명할 수 있어요? 천적인 무한한 우주의 감정과 화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갔다면, 그런 인간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20세기 문명의 과학세계는 벌써 옛날에 다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몇 천년 전에 다 되었다는 거예요. 현하 20세기의 문명은 4백년 걸려 이룬 문명입니다. 문예부흥 이후의 문명이예요.

오늘날 우리들은 탄식하고 허덕이며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입니다. 그런 길을 거쳐 마땅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결국에 가서 나서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세상에 믿을 것 없고 의지할 것 없어서 가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행로의 낙오자들입니다. 사회 생활에서 낙오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이예요. 버림받은 무리. 버림받은 무리지만 버림받은 무리들에 의해 역사는 지금까지 수습되어 나왔습니다. 현 문명 또한 배척받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발전되어 나온 것입니다.

9-173
선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이것은 왜 그러뇨?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내재(內在)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기의 가치를 알고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 세계, 천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겠어요? 그러나 현재와 같은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껄렁껄렁한 아버지예요? 그런 하나님 되려고 지금까지 싸워 나왔겠어요? 여러분 좀 생각해 보란 말이예요.

부모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줄 손수건을 만든다면, 어떻게 만듭니까? 심정에 어리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손수건, 자기의 사랑을 대신하고 자기의 심정을 대신하는 이 손수건이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으로 옮겨질 때 나의 사랑과 심정도 옮겨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정성을 다해 지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딸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고 해 봐요. 그들을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지어 준 손수건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지닌 실존물로서, 당시 뿐만 아니라 후손만대에까지 영원히 당신의 심정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물로 하나님은 이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꽃을 보며 무슨 요소로 되어 있는가 하며 성분을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보다 꽃을 보며 웃고 즐기는 사람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과학은 분석하는 것이지만 예술은 무엇에 대해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느낌이예요. 그러기에 예술은 과학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산이나 들에 가서 풀 한 포기를 보았을 때, ‘아, 이것은 무슨 풀인데 무슨 씨로 생겨났고 무슨 원수가 부합되어 이렇게 되었다’ 하는 것과 ‘야, 아름답구나’ 하고 감탄하며 심정으로 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귀하겠어요? 심정을 갖고 대할 때는 1대 1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대하는 것이 됩니다. 분석적으로 대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늘을 주관할 수 있고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온 천주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것이 인간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고 저주하시겠어요? 저주하시겠느냐 말이예요. 그 이상 더 좋아하실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여러분을 대해 아버지, 혹은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웃고 즐거워하며 좋아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보고 ‘야 이 녀석아! 벼락맞을 녀석아’ 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놓인 인간이기에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결정될 수 있는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이뇨? 사랑입니다. 사랑. 인간은 이 사랑의 감정을 무한세계까지 인연지을 수 있는 중심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9-174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어 있는 만물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산다고 하였으니, 이제 여러분의 생활 목표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랑의 심정을 갖고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러한 손수건을 대해 경배해도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우상 숭배가 아니예요.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머리 숙이는데 그 무엇이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영광을 초월하여 심정으로 경배드리면 사탄이 더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심정을 통해 나가는 데는 우상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 돌로 부처님을 만들어 불공을 드린다고 비난을 하지만, 하늘 앞에 심정만 통하면 하늘도 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만 서면 불교 믿는 사람도 천국 갑니다. 아무리 우상 숭배를 한다 하지만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법도를 그리워하는 사무친 마음이 없기에 지옥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오관(五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대하는 일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세계에 들어가서는 이 시계를 보고 ‘하나님!’ 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가고, 뭐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는 것보다도 풀 한 포기를 보고도 그것을 지으신 아버지의 손길, 지으실 때 기뻐하셨을 아버지의 그 심정이 그리워서 눈물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딸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점받을 수 있는 자격자입니다.

여러분, 알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실 때 어떠한 심정으로 지으셨는지 생각해 보았어요? 바위를 보고 ‘바위야 너는 하나님의 심정과 어떤 내적 이념을 가지고 이 천지에 태어났니?’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너는 어떤 내적인 인연을 가지고 태어났니?’ 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만물을 통하여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데, 너를 보고도 이렇게 무감각하니 이런 나를 저주하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보고 이상주의자니 뭐니 하며 돌았다고 합니다. 육감을 갖고 느끼는 세계 이상의 세계를 느끼는 사람을 보고 돌았다고 합니다. 돌아도 목적을 위해서 돌면 됩니다. 여러분, 춤추는 것은 도는 것 아닙니까? 춤추는 것을 보고는 좋다 하지요. 도는 것이라면 그 이상 도는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기쁠 수 있는 환경을 중심삼고 돌면 좋다는 겁니다. 돌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쫓겨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어떠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알 만큼 알았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기준을 되찾아서 새로운 이념의 천국에 들어가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지어진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아버지의 그림자와 같이 느낄 줄 알아야 됩니다. 사실 만물은 아버지 심정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정력을 다 기울여 지으신 것이요, 아버지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것이니, 아버지의 대신자와 같이 귀하고 가치있게 여기고 사랑해 주기를 만물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탄식을 안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만물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자연을 바라보고 ‘세상의 왕, 혹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갖고 있는 훌륭하다는 물건에 비할소냐. 골동품에 비할소냐. 어떤 유명한 부인이 입고 있는 호화로운 옷에 비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연세계 앞에 자신도 모르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를 볼 때, ‘인간이 만든 어떤 물건에 비할소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훌륭하겠는가’ 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기울여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무엇보다도 귀하게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는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이 인간을 그러한 자리까지 내모는 것입니다.

9-176
풀 한 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여러분들 보십시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귀여워합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면서도 제일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귀여워할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돼요?

탄식하는 만물의 한을 해원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여러분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6천년 전 그것들을 지으실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의 손길을 체휼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길을 가다가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도 울 수 있어야 됩니다.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외로왔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그래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많이 울어 보았습니다. 바위를 붙들고도 울어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도 울어 보았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이제 말씀을 들었으니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가치있는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인연을 맺은 귀한 만물이, 오늘날 어떠한 왕궁에서 뭐 국보니 보물이니 하며 귀하게 여기는 물건만큼의 취급도 받지 못하는 서글픔을 나는 알아 줘야지, 나만은 알아 주어야지’ 하면서 나왔습니다. ‘이 땅에 사는 30억 인류가 전부 몰라 주어도 나는 알아 줘야지, 하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진다면, 이 민족은 앞으로 30억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어느 누가 만물을 놓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가문의 보물보다,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이라 하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여겨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합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께서 지으신 것을 심정적으로 알아주고 그것을 붙들고 눈물짓는 사람을 보고 ‘오냐’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겠는가 안 하시겠는가 생각해 보란 말이예요.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갈수록 그런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도통(道通)이란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해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가정에 들어가서는 그 가정을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 가정은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하고, 그 사회는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하고, 그 국가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녹음이 잠시 끊겼음).

지금은 사람이 만든 물건이 백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순수한 이 풀 한 포기를 무엇보다도 가치있게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어떠한 향기보다도 공기의 맛이 더 좋습니다. 내가 야목에 가서도 얘기했지만, 사람이 공기의 맛을 알고 햇빛의 맛을 알고 물의 맛을 알면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살면 누구나 건강체가 될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심정과 더불어 영원한 존재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밥 한술을 먹을 때도 ‘감사합니다. 황공합니다. 타락의 후손 앞에 이것이 웬일입니까?’ 해 보십시오. 그래 보란 말이예요. 뭐 ‘맛이 있다 없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 뭐 좋다 나쁘다, 지위가 높다 낮다’ 해서는 안 됩니다.

9-178
하나님의 동반자가 되는 길
하늘의 심정권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달라면 무한히 줄 수 있고, 놀자면 무한히 놀아 줄 수 있고, 가자면 무한히 가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가 왼 뺨을 때리면 바른 뺨을 내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견지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입장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잃은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하는 우주관적인 심정을 여러분이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알았으니 이제 천적인 이념세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생활환경에서 하늘과 인연 맺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들의 생활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자,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하여 사는 자가 되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활의 진리를 알면 최고의 시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도시생활 보다도 바닷가나 산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결혼을 하면 어떤 아들딸이 나오겠습니까? 그런 심정의 아들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무엇을 바라셨는가? 그들이 서로 사모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 가지고 만물을 대신한 아담 해와, 하나님을 대신한 아담 해와, 천상천하를 대신한 아담 해와로서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담 해와가 우주 전체 이상의 가치를 완성한 모습으로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나서면,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시어 결혼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오늘날까지도 도(道)의 길을 가는 사람은 독신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천리(天理)의 원칙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도의 세계는 혼자 가야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대적인 관계는 원수였습니다. 예수님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시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씀만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제 신부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해서 오실 예수를 신랑으로 맞아야 할 여러분은 어떤 신부가 지녀야 할 내적인 심정적 가치를 갖추며, 어디서부터 심정의 문제를 수습할 것인가? 기도만 하면 되느냐? 안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안 돼요. 생활에서부터 하나님의 수고하신 흔적을 더듬어 찾아가는,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있었던 역사적인 고통을 당하도록 한번 들이칩니다. 전세계에 있는 사탄이 몰려드는 자리에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탄을 대해 ‘네가 창조의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세운 나를 지배해!’ 하고 대항할 수 있으면 물러갑니다.

예수께서 왜 지금까지 사탄의 시험을 받는 줄 알아요? 예수는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사탄과 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기 위해서 사탄과 싸워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알아요? 땅 위에서 만물과 인간을 한 품에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침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새시대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더라도 풀 한 포기를 자기 부인이나 아들딸과 같이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는 생명의 요소로 충만하게 되고, 심정이 향하는 곳에 생명이 따르게 되며, 사랑이 움직이는 곳에는 자연히 생명이 뻗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비료를 안 주어도 농사가 잘 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미에 패여진 흙덩이로부터 손에 쥐어지는 곡식의 한 잎사귀까지도 눈물에 어리어 친구와 같이 대하고 귀여워하고 잘 자라거라 하는 마음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이 있어요? 앞으로 새나라 새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에 있는 모든 생명의 움직임이 왕성하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인간의 힘으로 지어진 물건은 필요없게 됩니다.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그 적절한 예로 야목의 우리 식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김을 맬 때마다 찬송을 부르는데 남은 세 번 맬 때 한 번밖에 안 맨답니다. 그런데 가을에 가 보면 풀이 수북한데도 남이 세 번 맨 이상의 수확이 나온답니다. 그 지방에서는 아주 흥미있는 얘깃거리랍니다. 그렇다는 겁니다.

한 나라에 쇠운(衰運)이 들려면 그 나라의 만물에서부터 쇠운이 듭니다. 한 집안에 쇠운이 드는가 안 드는가 하는 것은 그 집의 아들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정의 양, 심정에 어리고 느껴지는 양이 점점 작아지는 집은 얼마 안 갑니다. 아, 몇 대 못가겠구나 하는 감이 옵니다.

9-180
사탄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심정
그러면 앞으로 복받을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뇨? 심정의 인연을 생활의 감정으로 삼는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나는 이거 하나 보고 소망을 겁니다. 심정, 대우주의 이념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눈물짓는 날에는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 이제는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풀 한 포기라도 심정으로 대하고 친구삼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죄악의 후손들이지만 옛날 타락하기 전에는, 본연의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지음받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요 모양 요꼴이 되었으니 분하고 원통합니다. 이런 심정을 붙들고 우는 사람은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예수도 그런 심정을 갖고 오셨습니다. 당대에는 몰리고 쫓기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세상에 남아질 수 있는 것은 심정의 터전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만물이 불쌍하고 만민이 불쌍하고 하늘이 불쌍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만물이여!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주인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슬퍼했느냐. 인간들이여! 본연의 삶을 위한 안식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슬퍼했는가. 하늘이시여! 심정의 인연을 중심삼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지으신 아들딸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슬퍼하셨습니까? 불쌍한 하늘이시여! 불쌍한 만물이여! 불쌍한 만민이여!’하는 심정으로 호소하게 될 때 사탄은 물러가게 됩니다.

예수가 어떠한 심정으로 사탄을 굴복시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불쌍하시다, 만민도 불쌍하고 만물도 불쌍하다고 하는 심정입니다. ‘아들딸을 잃어버린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시겠으며, 주인을 잃어버린 만물이 얼마나 불쌍하겠으며, 자기의 가치와 목적과 위치를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불쌍하겠는가!’하는 폭발되는 심정이 있었기에 사탄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사탄은 무슨 말을 듣고는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수는 세번째 시험에서, ‘나에게 경배하라’고 하는 사탄에 대해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 줄 압니까.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이놈아, 나는 천륜의 심정을 배신한 배역자야. 그러나 나는 이런 심정기준에 서서 하나님께 경배한다. 심정을 다하여 드리는 이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너도 그러지 않겠느냐?’하는 뜻입니다. 그런 심정 앞에는 사탄세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9-181
천국을 찾아가는 길
우리는 찾아야 되겠습니다. 걸음을 옮겨 찾아야 되겠습니다. 이 대우주권내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심정을. 이 심정이 자리를 잡는 날에는 만물도 안식할 것이요, 하늘도 안식할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어디서부터 찾을 것이뇨?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구경을 갔다 오는 사람이 죽을 상이 되어 집에 돌아옵니까? 벙실벙실 웃으며 옵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여러분이 그런 심정을 갖고 생활한다면 아무리 피곤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붙들고 슬퍼했지만, 오냐, 나는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그리워했더냐’하면서 일을 하면 하나도 싫증이 안 납니다. 그러기에 왜 ‘음악가는 음악적으로 살다가 예술적으로 죽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그래요. 오늘은 좀 좋은 옷을 입었지만 허술한 옷을 입고도 훌륭하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잘 갑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외적인 형태는 아무리 잘 갖추었다 할지라도 속이 썩은 자는 사람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하며 막 퍼부은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움직여 낼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사람은 어디를 가도, 물가에 가거나 산에 가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활을 좀 해봤습니다마는, 찬 바위 위에 누워 잠자는 일이 생기더라도 ‘오냐!’해야 합니다. 노동판에 가서 가마니를 둘러메었다고 해서 옛날에는 어땠는데 오늘은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낙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내 심정은 아무도 못 빼앗아 간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땅 위의 악하다는 요소, 슬프다는 요소, 어떠한 사탄의 요소를 가지고도 노터치(no-touch)입니다. 건드릴 수 없어요.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백성이 됩니다. 못 되면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한테 와서 항의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심정을 찾아 헤매는 개척의 선봉자로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타락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반대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한 발자국 나가면 찌릅니다. 두 발자국 나가도 찌릅니다. 우리는 이 찔림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생행로입니다. 타락권내에 있는 한 우리는 이 심정을 중심삼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자라야만 민족 앞에 설 수 있고, 세계 앞에 설수 있고, 또 천주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서기 전에는 안 돼요. 뭐, 빨갛게 바르고 반질반질하게 해 가지고 돌아다녀도 안 돼. 좋은 것 먹고 고운 것 입어도 안 돼. 안 된다는 거예요.

자신은 먹지 못하고도 먹은 사람을 구하고 싶은 마음, 자신은 입지 못하면서도 못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신은 집이 없으면서도 고루거각(高樓巨閣)에 사는 사람을 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승리했다는 기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천국을 가려는 사람들이여! 지옥을 정복한 후에야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어다’ 원칙이 그래요. 지옥 가는 길은 어떤 길이요? 세속적인 만족을 찾아가는 길이요, 천국가는 길은 어떤 길이요? 세상이 즐기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간단합니다. 지옥 가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의 행복한 자리를 찾아가십시오. 천국 가기를 원하거든 이 세상의 불행한 자리를 찾으십시오. 역사적인 위인들은 전부 다 그 시대로 부터 배척받던 분들입니다.

9-183
심정의 인연을 통한 구원의 길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분하게 여겨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왜 타락한 아담 해와의 아들딸로 태어났습니까. 어찌하여 내가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저를 인간의 조상으로 지으셨더라면 저는 아담같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요, 해와같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여,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심정을 저에게 허락하실 수 없겠습니까? 아담 해와를 소망의 심정으로 바라보시던 내용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의 내용을 저에게 나타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땅 위에서, 타락의 후손 중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성경에도 그냥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문을 두드려야 열어 주고, 찾아야 찾아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먼저 땅을 주관하는 만왕의 왕이 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슬픈 자의 왕이 되려 하셨고, 우는 자의 왕이 되고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의 왕이 되려 하시고, 지상에서 사탄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개척의 길에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의 신랑이라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결과적인 명사입니다.

예수의 신부가 되려는 사람들은 예수의 심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는 심정의 승리자가 되신 분이요, 심정을 갖고 슬픈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우신 분이요, 고통받는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고통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정을 갖고 죽는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인 인연을 맺지 않으면 구원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천당이 다 뭡니까. 지옥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일편단심 이 대우주에 심정세계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구원역사이니, 그 구원역사의 노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재료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만물을 재료로 삼고, 인류를 재료로 삼아, 영계의 천천만 성도를 재료로 삼아야 되는데, 내가 움직이면 만물이 어느 정도 움직이고, 인류가 어느 정도 움직이고, 천상의 천천만 성도가 어느 정도까지 움직이느냐. 내가 땅 위에서 부르짖는 것이 이 우주에 어느 범위까지 심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느냐에 따라 천상에서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는 순간의 슬픔은 하늘에 반영되었고 만우주에 반영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는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입니까? 심정의 구주입니다. 심정의 구주.

이런 경지에서 여러분은 만물을 대하여, ‘면목이 없구나. 본연의 인간조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하면서 영원히 그 품에 안겨 살기를 얼마나 고대했느냐. 고대하던 일차적인 소망은 깨져버리고 한스러운 타락의 후손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탄식권내에서 다시 제2의 인간조상을 맞기 위한 역사노정을 거쳐오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쁨의 세계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픈 세계, 탄식권내에 있게 된 만물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무궁무진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라야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세계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픈 세계, 탄식권내에 있게 된 만물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무궁무진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라야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랑할 게 뭐 있어요?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는 ‘교만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셨습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곡절을 한꺼번에 탕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9-185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구원섭리가 웬말입니까? 내게 구원이라는 말이 웬말입니까? 구원이라는 말이 필요 없어야 할 것인데, 이 구원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슬픈 명사입니다. 내게 구주란 말이 웬말입니까? 구주 없던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는 어디 갔습니까? 본연의 아담 해와도 구주가 필요했습니까? 예수가 필요했느냔 말이예요.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기도니 종교니 도덕이니 수양이니 무슨 세계관이니 하는 것 다 필요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담주의가 세계주의요 하나님주의입니다.

타락하여 다 망쳐 놓은 것을 꿰매고 또 꿰매어서 하늘 앞에 내 세우려는 것이 복귀노정입니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나는 이만큼 했으면 됐지’하고 배통 내미는 사람들은 한대 갈겨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범죄자 중의 범죄자입니다. 하늘 앞에 배반자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랑을 하고 다녀요? 심정의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말할 수 없이 기가 막힙니다. 눈물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으면 그 부인은 한없이 울지 않습니까? 우는 그 순간에는 옛날 어렸을 적의 일에서부터 모든 것이 생각납니다. 사랑의 감정을 통하여 북받쳐 나오는 서러움은 어렸을 적에 어머니에게 욕먹던 생각까지 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많이 울어본 적이 있는 여인이 먼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남편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통곡하는 그 자리는 하늘편에 가까운 자리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사랑하는 아들딸을 잃어버린 후 타락한 인간들을 붙들고 6천년 동안 통곡하며 나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천년 동안을. ‘너희들은 타락하였지만 나는 영광받겠다.’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어버리고 6천년 동안 허덕이며 찾아나오신 걸음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이 아들딸이 찾아지기 전에는 천지에 만물이 꽉 들어찬다 해도 하나님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 만물은 그 아들딸을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지어 주신 만물을 수습해야 되겠고, 우리와 더불어 살아야 할 세계인류를 끌고 가야 되겠고, 우리를 지도하시는 하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인 것을 알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순간에 가슴 아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몇 십년을 통곡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그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아버지의 심정은 이러했는데 아담 해와가 그 심정을 모르고 타락할 때 마음 아파하시던 심정을 느껴야 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1600년만에 노아를 세워 120년 동안 수고하게 하셨으나, 그의 아들 함이 타락한 입장에 서는 것을 바라보셔야 했던 그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시대를 지나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체휼하는 자리에 들어가면 여러분이 형편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도외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백 번 죽어도 당연하고 천 번 망해도 당연합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은 ‘너를 대신하여 망할 자리에 들어가 주고 죽을 자리에 들어가 주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는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체면을 생각지 않고 붙들고 눈물짓는 자리입니다. 찾아오시던 아버지와 찾아가던 아들이 상봉하여 서로를 염려하면서 붙들고 우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있습니까? 회개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슨 죄 무슨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것을 회개하면 다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돈을 다 써버리고, 별의별 짓을 다하고 다니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이까짓 것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이 죄를 어떻게 용서받겠습니까?’ 하고 눈물짓는 자식이 있다면, 그 아버지는 ‘오냐 오냐’ 하며 용서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렇듯이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보다도 ‘천륜의 원칙을 파괴하고 하늘과 인간의 인연을 유린하고 인간과 만물의 인연을 파괴한 죄, 심정문제에서 지은 죄를 용납해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회개함으로써 용납받고 승리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다 할진대, 만사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회개자를 찾아 나오십니다. 알아보니까 그래요, 알아보니 그렇더란 말입니다.

심정을 통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물건이 자기 것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한 사람은 세상의 어떤 물건을 가져오고 가져가도 아버지에게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천국 세계에서는 이웃집에 가서 말없이 먹고 싶은 것 좀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정적으로 연결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심정을 유린한 죄 이상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한 죄인이요, 만물의 심정을 거부한 죄인이요, 심정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게 한 방해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고 심정을 걸어 놓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슬픔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 이제는 그만 슬퍼하시고 그만 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픈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기쁜 자리로 옮겨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서로 웃고 기뻐하며 사는 곳이 지상천국이요, 그런 아들딸이 사는 곳이 우리들의 본향이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살던 본연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 들어가려면 천주의 이념과 심정의 인연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창조 이상의 심정과 타락 직후의 심정과 복귀의 심정과 소망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싸우고, 그 심정과 더불어 회개하고, 그 심정과 더불어 죽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죽어도 산 자요 잃어버려도 얻은 자입니다. 나중에는 이 세계 전부가 그의 품에 안겨 그의 것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주기 바랍니다.

9-188
기 도
아버님, 저희들은 가치를 몰랐던 인간이요, 존재위치를 몰랐던 인간이요, 이상세계의 방향을 찾지 못하였던 인간이옵니다. 천적인 가치와 천적인 인연도 모르던 저희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타락의 보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소망하는 새나라의 새역군으로서 살아야 할 생활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할 때에,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만물을 다시 짓는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창조의 심정을 느끼는 영광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요, 그런 심정의 인연을 그 개체만이 아니라 전체 앞에 인연지어 노래할 수 있는 화동의 주체가 되는 것임을 아옵니다. 이러한 가치와 위치를 회복하는 데 있어 어떠한 방해가 있다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고 단연코 넘어설 수 있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님의 사랑이 그리웠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지어진 만물을 품고 사랑하고 싶었사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연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이제 ‘하나의 물건이 귀하도다. 하나의 존재의 가치가 영원하도다’하면서 내 생명의 요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노래할 줄 알며, 그 가치를 하늘과 땅과 만물과 더불어 심정을 통하여 느끼면서 살 줄 아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만물과 더불어 당신의 슬픈 심정을 위로해드리고 기쁨의 심정을 갖춤으로써 슬픔의 세계에서 기쁨의 세계로 옮김을 받아, 아버지께서 슬픈 과거지사를 잊어버리고 영원 무궁토록 나와 더불어 살자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생활하고,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생활하고, 하나의 물질이나 하나의 존재물에도 감사하며 자기의 본질적인 세계를 재개척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