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6 to 9-156: 행복한 무리들

행복한 무리들
1960.05.01 (일), 한국 전본부교회

9-126
행복한 무리들
전도서 7:23-29

[기 도]

허락하신 이 시간 위에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 땅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이때이니, 아버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고,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고, 몸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고, 생활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천륜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니다. 아버님, 이와 같이 한스러운 자신들인 것을 이 시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살기 위해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무엇을 쥐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그것도 잃어버려야 할 것이요, 자기 개체의 권한을 노래하고 영광을 자랑하고 있으나 그것도 잃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마음으로는 자기의 가치가 무한히 크다는 것을 수긍하지만 자기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자리에서 그 가치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처참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저희인 것을 아버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아버님도 수고하셨사옵고, 저희들도 수고하였습니다. 잃어버린 말씀이 그리워서 허덕여 나왔사오나 저희들은 그말씀을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허덕였사오나 그 사람을 찾지 못하였사옵고,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하여 허덕였사오나 그 사람을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심정의 기준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고로 당신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을 찾지 못하였사옵고, 그런 가정을 찾지 못한 연고로 그런 사회와 국가와 세계는 간 곳이 없고, 당신의 서러움을 재촉하기만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님, 어찌 이것을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아버님, 얼마나 서러우셨습니까? 나의 아버님, 얼마나 슬프셨습니까? 나의 아버님, 얼마나 통탄스러우셨습니까? 불초한 저희들, 당신의 염려의 일편(一片)을 제하고, 슬픔을 제하고 기쁨을 보태 드리기 위하여 모여야 할 것이온데, 이 날도 오히려 아버님께 슬픔을 가해 드리는 처참한 자리에 있사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사랑이요 영광과 인내의 표상이라 하였사옵니다. 땅 위의 좋은 명사, 나쁜 명사를 다 짊어진 당신임을 알기에 저희는 슬퍼도 당신이요, 좋아도 당신이요, 어려워도 당신이요, 기뻐도 당신이었사옵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 친구가 되고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할 아버님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그 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효자가 없사옵고, 참다운 효녀가 없사옵니다.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더 슬픈 일이 없는 것을 깨닫고, 통탄할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더 통탄할 사실이 없는 것을 깨달은 저희들, 이제 당신의 슬픔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모였사옵고, 당신의 외로운 심정을 붙들고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이 고통을 당하기 위해 모였사오니, 이 시간 찾아 주시옵소서.

누구를 바라보고 모였사옵니까? 아버지! 어떠한 사람을 바라보고 모인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누가 그리워서 모인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서 찾아온 걸음이었사옵고, 당신과 친하고 싶은 마음, 하늘 보좌 앞에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단지 그 마음 하나를 가지고 왔사옵고, 그리움의 터전이기에 이 자리에 발걸음을 옮기었사오니, 여기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이날이때까지 많은 말씀을 하였사옵나이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제가 져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때가 가까와 오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이 땅 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진정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더불어 살고, 말씀과 더불어 실천하고, 말씀과 더불어 화하여 전체적인 생명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들이 모인 것은 세상의 그 무엇을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지의 영광의 나라를 가깝게 하기 위하여 있는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려고 모였사옵고, 슬픔의 고개를 넘어오신 아버지께 위로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사오니, 이 시간 다시 빚지는 자녀의 입장에 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하여 기쁨의 얼굴로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마음과 몸을 합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것만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이것만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이 은사의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만나 슬픔의 눈물을 거두고 기쁨에 넘쳐 감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분부하신 말씀을 대신하고 천지만물을 대신하여 맹세의 실체로 나설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을 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주시는 은사와 허락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앞에 가까이 가려는 간절한 마음만이 이 시간 각자의 심중에 소생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릴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128
말 씀
오늘은 ‘행복한 무리들’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땅 위에서 말하는 ‘행복한 자’는 보통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기쁨을 가진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하늘 땅의 어떠한 존재나 피조물 앞에 자랑하고 싶은 그 무엇을 가진 자’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찾아온 것도 지금 살고 있는 이상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생활적인 행복을 넘어서 마음과 심정의 세계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찾아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오늘보다도 내일, 내일보다도 모레, 올해보다도 내년, 한 생애를 넘어 영원히 행복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가는 우리 인간의 욕구입니다.

9-129
불행한 인간들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피조물이 어떠하길 바라셨을 것인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 지음받은 것들도 같이 있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면 그 지음받은 것도 역시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지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연인지 알지 못하나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종교의 명사를 빌어 말하면, ‘지음받은 우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피조물이라면 이를 창조하신 절대자가 있어야 할 것이니, 그를 일컬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오늘날의 인간들이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불완전하게 우리를 지으신 것인가, 아니면 지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곡절이 현 인간들에게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고지선’이라는 말을 하려면 거기에 우리 생애의 이상적인 모든 요소가 다 내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지정의(知情意)의 감정을 충만히 충당시킬 수 있는 내용이 갖추어져 있어야 된다고 우리는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절대적인 주체자요, 절대목적의 중심으로 계실 수 있고 나아가서는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지고지선의 존재, 최고의 절대의 기준에 계신 존재와 인연되지 못하는 어떤 조건이 개재되었는데 그 조건을 악이라고 하고, 그 조건이 생긴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 중에 목적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미물(微物)인 세균 하나라도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생을 영위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난 그 시간부터 자신은 모른다 할지라도 나를 살려 주고 나를 가르쳐 온 대천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존재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식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한 재료, 이 재료와 어떠한 목적의 실체와 하나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백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할 것이고,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자기의 요구조건과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그런 때가 와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마음을 헤쳐 놓고, 심정을 헤쳐 놓고 생활의 어떠한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볼 때, 행복이란 명사는 있을망정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했을 뿐더러 남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귀한 그 무엇도 갖지 못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우주의 목적을 세우시고 피조만물을 지으셨을 텐데, 지음받은 인간이 그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슬픔이 다시 연속된다면 나는 그런 창조 싫습니다. 고통이 개재되는 창조목적 달성이라면 모두 싫어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후에 비록 슬픈 일과 고통스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슬픔과 고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재료가 되고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을 지배하고 행복한 기쁨을 유린하는 요소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불행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세워진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이 무엇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있으되 자신을 자랑할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있다 하여도 그 생명이 대우주의 이념, 혹은 대우주의 행복세계 앞에 어떤 재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춘 인격과 내가 갖춘 이념과 내가 자랑할 그 무엇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대우주의 이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9-131
인간이 잃어버린 것들
우리들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천지간에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우리의 소망의 끝은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선(善)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선은 없습니다. 사랑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사랑은 없습니다. 참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참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최고의 참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곳 어떤 환경에 머물더라도 우리를 환영하고 우리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선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으되 선의 본체가 되어 있지 못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으되 진정으로 행복한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볼 때 다 잃어버렸느냐? 영원한 최고의 행복을 중심삼고 볼 때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창조주, 즉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응당히 알아야 할 피조물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지정의를 부여받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그 창조주와 정을 통하고, 뜻을 통하고, 마음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습니까? 이 고깃덩이? 아닙니다. 만일에 이 고깃덩이가 행복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다면 이 고깃덩이는 만족스러워해야 할 것인데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만족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정도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알맹이를 다 잃어버리고 빈 껍데기를 갖고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써온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요, 성현 현철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무엇일 잃어버렸느뇨? 맨 처음에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 천지를 찾아오신 주인이 있는데 인간이 그 주인을 잃어버렸다면 인간은 그 시간부터 그 주인 앞에 역적이 됩니다. 인간은 심정 깊은 인연될 수 있는 본연의 주인을 모셔야 할텐데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모시지 못하는 것은 천륜 앞에 용납받지 못할 역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세포, 여러분의 감정 어디엔가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관념적으로는 인식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여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내재(內在)하신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리에 여러분은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슬픈 일 중에서도 무엇이 제일 슬픈 일이냐?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무엇이 제일 괴로운 일이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를 맞고 천대를 받는 것이 제일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 분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것이 괴로움인 것입니다. 슬픔도 그것이요, 고통도 그것이요, 억울함도 그것입니다. 만날 수 있는 인연 가운데 있는데 못 만나는 것 이상 더 원통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생애노정에서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인간들이 슬펐다, 고통을 받았다, 억울한 역사노정을 걸어왔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슬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억울함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본체를 잃어버리고,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상속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과 슬픔의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인 유래말고 원리적인 유래는 어디 있는고?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잘 모르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인연되어 있습니다. 그 인연이 내 육체를 넘고, 환경을 넘어서 어떤 전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우리를 수습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분열되었는데, 이제는 점점 점점 마음이 기쁠 수 있는 한 곳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도 하나의 이념세계로 수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이념세계가 올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마음이 자리를 잡는 동시에 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외치는 소리가 여러분 속에서 폭발되어 올라와 이 만천하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아무리 철창에 갇히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고통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역사노정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고통을 즐겨 받으라고 말합니다. 어느 종교나 그렇습니다. 슬픔을 달게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세계를 들고 나옵니다.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세계에 굴복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수습하고 수습하여 본연의 마음세계를 향하여 정면으로 돌진해야 하는 때가 끝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둘이 합하여 하나되어야 하는 때가 끝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느뇨?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그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그곳을 향해 달음질쳐 가야 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또 무엇을 잃어버렸느뇨? 하나님의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 거기에 만물의 주재(主宰)로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는데, 인간이 이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인간이 이 축복(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날에는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아버지가 되고, 아담 해와는 그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 이것은 가공적(架空的)인 명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가공적인 명사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9-134
아담 해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말로 주관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사랑으로서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해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해와를 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또 해와가 아담을 오빠로만 여기는 철모르는 누이로서 아담을 섬기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이는 신랑 중의 신랑이요 아버지를 대신한 몸 중의 몸이라고 하며 아담을 심정적으로 모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한 때를 바라시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담은 나의 영원한 남편이요, 해와는 나의 영원한 신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나이다’ 할 수 있는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아버지 어머니로서 이 대자연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만물도 그렇게 주관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탄식이 생겼고, 인간의 탄식이 생겼고, 만물의 탄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사람 때문에……. 모든 만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가 된 아담 해와의 손길에 의해 주관받기를 소망하게끔 지어졌는데,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한 사람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 당신의 심정이 이렇지 않사옵니까? 당신의 소원하신 심정이 이러이러하시지요?’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참다운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참다운 인류의 조상을 못 만나봤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을 못 만나봤습니다. 없어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명사적인 아버지,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들에게 당신의 위치를 밝히는 동시에 당신의 가치와 인간과의 관계를 밝혀 나오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인간이 당신과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시키기 위하여 싸워오신 것이 6천년 역사라는 것입니다. 딴 것 아닙니다.

여러분, 의의 면류관이니 무슨 면류관이니 하는데, 나는 그거 원치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시던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하고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인생이 바랄 최고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역사노정을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 66권을 암만 뒤져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니 그럴 게 아니예요? 여러분,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은 어디 갔는고? 타락 이전의 높은 위치에서 하나님과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의 세계는 어디 갔는고? 이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이 명령에 순응하는 자리, 만천하를 주관하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한테 끌려다니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아들의 위치와 아들의 권한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사탄이 무엇이뇨?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쥐어져 있기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놈의 세상을 밟아치우고, 이놈의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사탄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에게 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께서 찾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중심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면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요? 구원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9-136
영육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백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이 땅 위에서 결판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도의 길, 신앙의 길을 지켜간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서 살던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인생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즉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생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하고 여러분을 낳아준 아버지하고.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나를 지으신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생애의 아버지, 땅 위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땅 위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다 갖고 있는데 저 사람이 무슨 아버지를 잃어버렸다고 큰소리 치느냐’ 하겠지만 보세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는 누구뇨. 인류의 참조상입니다. 참아버지 참어머니입니다. 몸을 쓴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가 사탄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집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들은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를 믿지 않고도 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종교도 필요없습니다. 왜 필요없느냐? 본연의 아버지와의 심정적인 인연에 의해 태어난 아들딸은 땅 위의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된 참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아들딸, 심정으로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아들딸을 대해서는 사탄의 사랑을 물론 그 무슨 사랑을 가지고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충신의 마음을 무엇으로 돌리소냐? 효자 효녀의 마음을 무엇으로 돌리소냐? 열녀의 마음을 무엇으로 돌릴소냐? 이와 같이 그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야만 천륜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하나님의 심정의 통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선남 선녀로서 성례식을 치르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만물은 아담 해와와 화동하면서 즐거이 그 가정에 필요한 물건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해와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가 되고, 인류의 표본적인 참부부가 되고, 하나님 앞에는 참다운 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도 하나요 사랑의 주인도 하나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한때 “아버지여, 내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를 해 보았습니까? 본래는 그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행복의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천국이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이런 역사적인 곡절이 그 옛날 우리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요, 하나님과의 부자의 인연을 잃어버린 자들인 동시에 자신에게는 참다운 육신을 갖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부모가 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다운 영과 육을 가진 부모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9-138
중생해야 할 인간
예수가 누구인지 아세요? 그는 후아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세요. 예수를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텐데 후해와는 누구입니까? 기독교에선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성신이 바로 어머니신입니다.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신인 성신을 보내신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 졌으면 뚫어진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다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인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딤전 2:15). 이것은 오늘날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을 낳았을 텐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의 이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이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못 믿겠거든 담판기도를 해보십시오.

부활이 무엇이뇨?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하는 거예요. 중생은 무엇이뇨?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아버지요 신랑이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요 신부입니다. 인간들이 신부의 인연을 받아 가지고 신랑되신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 없이는 못살고 성신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와 성신이 영적인 면에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다시 인간에게 주입되게 되면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 아들딸 낳는 법이 천지의 이치 가운데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멍이 생겼으면 땜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아담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키 위해 실체를 쓰고 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구주이신 동시에 인간의 아버지이십니다. 실체의 참아버지입니다. 인간들이 잃어버린 그 참아버지를 다시 세워 놓아야만 천지 이치의 원칙적인 궤도를 타고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늘은 절대적인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법도를 세우고 그 법도를 통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만 모든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땅 위에서 살고 있으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참부모가 없단 말입니다. 보세요, 성경에도 고아와 과부같은 너희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없습니까? 부모가 없습니까? 신랑이 없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뇨.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볼 때 참부모와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고아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고아지요. 왜 과부입니까? 참다운 신랑되신 예수님과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과부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수습하려면 그 원인에서부터 수습해야 됩니다. 세상일도 그래요. 끄트머리에서 암만 해봐야 수습이 안 됩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을 밝히려면 맨 꼭대기, 아담 해와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종교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신학은 망합니다. 하늘의 역적이 됩니다. 그 신학은 하늘의 역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늘 앞에 심판 받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아담 해와의 곡절부터 풀어야 됩니다. 타락전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애달팠는가 하는 심정의 관문을 여러분이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측으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어떤 병이 났으면 그 병의 근원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근원을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것은 자연히 수습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근원되는 중심존재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해요. 그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9-140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성경의 중심은 예수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이후의 기록이예요. 예수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중심이 아닙니다. 아담이 중심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니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아느니 모르느니 무신론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논란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못나고 미흡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피조물을 대해 ‘야!’ 하면 그 피조물이 ‘예!’ 할 수 있게끔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종교는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 사회관과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만 아들딸입니까? 내 가정만 가정입니까? 내 나라만 나라입니까? 그렇다고 해보세요, 어떻게 되는가.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보세요.

여러분, 때는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 이 때는 내 생활 감정을 넘어서고, 내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넘어서 천주관(天宙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 입니다. 아무리 효자라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게 되면 그 부모가 좋아하겠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충성된 자리에 들어가서, 심정적인 기준을 통과한 후 ‘아버지!’ 해야 하나님께서 ‘오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인간으로서 이 땅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어떠한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버지라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는 이때, 참다운 행복을 바라고 나가는 이때에 우리는 오늘의 것을 향하여 나갈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을 넘어 내일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시에 내일의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심중 깊이 뿌리박힌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내어 명령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그 무엇을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되겠습니다. 자랑할 것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찾을 것을 찾았습니까? 가질 것을 가졌습니까? 자랑할 것을 가졌습니까? 못 가졌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이예요.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행복의 터전을 꿈꾸어 보세요. ‘아이고 나 살려주오’ 할 때가 옵니다. 보따리 싸가지고 죽자 살자 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요즈음 여러분 잘 보잖아요?

하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개의 국가나 민족권내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사람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道)가 있지만, 심정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도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도가 기필코 나타나야 됩니다. 만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 주는 도도 있고, 무한한 영계를 가르쳐 주는 도도 있지만, 윤리도덕과 무형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의 심정의 골자 위에 올려 놓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종교를 찾아보니 기독교더란 말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는데,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참부모가 깨어지니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부부가 안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부부를 이뤄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부부예요? 천만부당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부들이 주님 오실 때에는 다 갈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대번에 압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미있게 살던 부부일지라도 남편 갈 곳이 따로 있고 부인 갈 곳이 따로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이념이라면 항의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축복받은 참다운 부부로서 땅에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영원히 당신을 모셔주기를 바라고 계신데,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공인받은 부부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어놓으시고 이렇게 살라고 했겠어요?

오늘날 도의 기준은 독신생활입니다. 왜 독신생활인지 알아요? 아직까지 원칙적인 기준에 도달한 주인공이 나타나 참부모로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에 의한 참부모가 아직까지 새워지지 않았는데 그 후손될 자들이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9-143
인간은 먼저 참자녀가 되어야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에는 섰지만 천지만물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는 못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대신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의 참다운 주인공을 세우시어 그를 중심삼고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 하셨습니다. 일남 일녀가 성숙하여 그들이 만물과 화동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스러운 역사가 계속된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명사를 거쳐 자라고 또 자라서 참된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靈)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肉)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하나님은 영원한 내 아버지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는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자녀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다가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심정적인 모든 것을 전부 싸매 가지고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참부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참자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이 인간이 바랄 것은 무엇이뇨? 먼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시 낳음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다시 낳음을 받았습니까? 다시 낳음을 못 받은 자는 전부가 의붓자식입니다. 여러분은 중생의 체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와 성신을 잃고는 못산다, 내 몸과 피살이 그의 일부분이다’ 하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맺어 양육받고, 성신의 감동과 더불어 성신의 도움을 받아서 성신이 신랑되신 예수를 대해서 사모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앞으로 주님이 오실 한때를 바라보면서 처녀와 같은 몸으로 단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귀합니까? 무슨 보물입니까? 둘이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기쁜 것이 못 됩니다. 행복하다고 할 수 없어요. 둘이 소유하고 있는 그 자리에 행복이라는 명사는 없습니다. 천지간에 제일 귀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뇨?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제일 귀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이뇨? 모든 존재물 전부가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귀한 것을 여러분은 가져 보았습니까? 여러분, 금은 보화가 귀해요?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싶어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가치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아들딸 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천상천하에 어떤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음받은 상대적 존재로되 하나님만은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내 것 삼을 수 있다는 이 한 사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하나님이 내 것이야, 내 것.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분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대하여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이 왔다 갔지만 너만은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는 최대의 성공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라는, 아들이라는 명분을 받았습니다.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면 그는 참다운 효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부터 어떻게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고, 오늘의 자기를 대하여 어떠한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자기를 세워 어떠한 축복을 해주시고자 하는가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구주이십니다. 무슨 구주?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주는 구주, 참부모를 찾아 주는 구주, 참부부를 찾아 주는 구주, 참자녀를 찾아 주는 구주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예수를 생명만 구원해 주시는 주구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예수는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 가지고 오신 분이요, 잃어버린 참부모로 오신 분이요, 참부부의 신랑으로 오신 분이요,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로 오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는 그런 분이예요.

그 예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참부모를 사랑하는 자요, 참부부가 될 수 있는 자요, 참자녀가 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문제가 그렇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9-145
가장 귀한 것을 준비해 놓고 다른 모든 것을 버리라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만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울부짖을 때가 올 것입니다. 바라고 의지하는 주권도 믿을 수 없고, 믿고 있는 종교도 믿을 수 없고, 어떠한 학문이나 철학도 믿을 수 없다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 심정으로 시작된 인간이요,심정을 거쳐서 심정으로 종결되는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기원은 말이 아닙니다. 심정을 기원으로 한 인간이니 심정의 인연을 거쳐 심정으로 종결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물로부터 ‘오! 할렐루야’ 하는 송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송영의 가치를 백퍼센트 구비하려면 심정의 인연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처리의 역사입니다. 어떠한 국가, 어떠한 주권을 본으로 세워서 나가다가 그 국가나 주권이 떨어지면 처리하여 그보다 더 본이 되고 좋은 새로운 국가를 세워 나옵니다. 그렇게 국가나 주권은 처리할 수 있지만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생활과 사정은 처리할 수 있어도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정은 처리할 수 있으되 심정은 처리할 수 없어요. 이 심정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인류의 역사 노정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이 세계에 평화의 때는 오지않습니다. 행복의 세계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심정의 세계를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천적인 심정의 세계가 오는 날에는 인간적인 모든 윤리 도덕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깨어집니다. 헌 것이 깨져야 새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혼란해집니다. 윤리 도덕관이 깨져 나갑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 칼질을 합니다. 다 깨집니다.

이같이 깨뜨리는 일로 천지가 종결된다 할진대 여러분은 미리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자살 구멍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기도합니다. ‘아버지, 자살 구멍을 찾아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보내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역사적인 종말을 예감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좋다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구나. 아무리 행동은 즐거워도 마음은 안식하지 못하는구나!’ 이런 느낌이 있는 사람은 선각자입니다. 심정의 세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환경을 수습해 나가는 선각자입니다.

안식의 터전은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자리가 아니요, 사정과 형편으로 하여금 일시 휴식하게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심정이 영원무궁토록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입니다. ‘욕을 먹어도 좋고 매를 맞아도 좋고 그 무엇이 내 생애를 빼앗아가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천적인 심정의 인연을 끊은 인간이 생명이 있는 인간일소냐! 이것을 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원은 심정의 원입니다. ‘심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찾고 있습니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때 기필코 해결지어야 할 문제를 앞에 놓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냐? 밥 잘 먹는 일이 아니요, 주권을 잘 세워서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고 즐거워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피부의 빛깔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 이 땅 위에 벌어질 수 있는 이념이 나온다 할진대, 평화와 행복의 세계, 천국은 자연히 올 것입니다. 그런 일을 영영 못한다면 하나님도 인류의 역적입니다. 왜? 무엇을 하지 말라, 무엇을 버리라고만 하셨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대의 선물을 준비했기에 네가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이나 받고자 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운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고맙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노정에서 사도들이 수고해 왔지만, 수고하여 무엇을 얻으면 또 잃어버리고 눈물지어야 할 것을 아시기에 다 버리고 한때만을 소망하여 참고 고대해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9-147
주님을 중심한 참형제
여러분은 이제 이 문밖을 나가면 가정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나의 어머니, 영원히 당신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죽어도 영원히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습니다. 천국이 딴 곳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할 수 있는 부모를 가졌습니까? 딴 데가 천국이 아닙니다. 남편이 있는 곳에 그 아내가 있고 싶고, 그 남편이 지옥에 가 있다 할지라도 그 남편을 바라보고 아내가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 이것 생각해 보았어요?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굶고 앉아 있어도 좋고 뺨을 맞아도 좋은 곳입니다. 너와 나와의 인연은 누구도 끊을 수 없어. 네가 가면 내가 가고, 내가 오면 네가 오는 곳, 그런 인연에서 서로가 같이 있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 형제를 여러분 가져 봤어요?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내용과 재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계에 가보니까 그래요. 한번 주님을 따라가보면 여러분들도 ‘나 땅에 안 가겠습니다. 아이고, 지긋지긋해요’라고 할 것입니다. 부모고 무엇이고 다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 것이 귀하기에 땅의 것을 버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공의란 절차가 올바른 것을 말합니다. 그렇잖아요? 한 곳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온 천하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만인간이 주님을 좋아하여, 그 하나님과 주님을 놓고 나도 좋아하는 동시에 여러분도 좋아해야 합니다. ‘너도 그 좋으신 주님의 아들, 나도 그 좋으신 주님의 아들이다’ 할 때에는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을 만나야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는 원수가 다 녹아져 버립니다. 주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는 형제 아닌 사람이 형제 이상 단결할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는 식구 아닌 사람이 식구 이상 단결할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그러한 느낌을 갖지 못하는 자들, 그러한 내적인 체휼을 하지 못하는 자들은 새나라의 행복한 시대에 못 들어갑니다.

9-148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여러분은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학문을 터득하는 것이 행복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땅 위의 어떤 보물을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어떤 권세를 가지 것이 행복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갖고도 천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뇨? 만우주의 대주재이시며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있겠어요?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 할진대 이 천지가 그의 것이 됩니다. 간들 마음속 깊이 그런 인연이 남아 있기에, 네가 제일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이 세계를 자기 땅과 같이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타락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아버지의 것은 아들딸인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위대한 선물, 그러한 심정적인 선물을 내리려고 하늘은 6천년 동안 수고하시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여러분은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야,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으시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나는 몰라’ 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불쌍하게 되어야지, 하나님이 불쌍해져도 된다는 말입니까?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시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시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띄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하러 몰려왔습니까? 구원받기 위하여? 아닙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려면 기성교회에 가십시오. 피의 곡절이 여기서부터 벌어졌으니, 우리는 그 자리를 통과하여 본연의 인연된 아들딸,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한의 심정을 풀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거꾸로 제쳐 버리고, 아버지의 알파와 오메가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아들딸이 나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았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라는 것을. 그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녀를 어머니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인 동시에 시대적으로 보면 신랑격입니다. 또 하나님 대신 죄악의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입장에 서 있다고 보면 아들격입니다. 그분은 역사상의 모든 존재가 소망하던 분이요 섭리적인 전체의 목적을 이룰 소망의 중심입니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비통한 역사를 걸어왔고, 지금까지 왔다간 수많은 우리의 선조와 성도들도 전부 그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런 귀한 분, 한 분밖에 없는 분을 여러분이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그 귀한 분이 여러분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이뤄진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몸뚱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삼천리 반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땅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귀한 것을 여러분이 알았습니까? 모르거든 알아야 됩니다.

귀한 것을 알려면 귀한 그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귀하기 때문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귀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끝날에는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참 것이 거짓 것 같고 거짓 것이 참 것 같습니다. 서로가 다 잘났다고 하고 서로가 다 옳다고 하니, 어떤 것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과 담판해야 됩니다. 오늘 이 끝날에 있어서 우리들은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골통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문제를 걸고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판국입니까?’ 하고 담판하여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지으려면 천신만고의 고통의 길을 걸어야 될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인간들이 잘 믿기 위해 고생하던 그 죽음의 고비도 늠름히 걸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서는 슬픔의 곡절도 많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당하고 당하여도 내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는 각오 밑에서 천신만고 끝에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될 때에 그 가치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귀한 것을 찾기 위하여 무엇을 해보았습니까? 생명을 한번 걸어봤습니까?

옛날의 사도들은 귀한 것을 다리놓기 위하여 목베임을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귀한 것을 친히 찾아 가져야 할 끝날의 성도인 여러분은 무엇을 해봤습니까? 무엇을 해봤습니까, 무엇을? 어느 누가 때리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안 맞으려 하고, 그저 싸우려고만 하고, 한마디 억울한 말만 들어도 잠을 못자고 보복하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늘은 천 번 맞고도 돌아서서 염려해 주십니다. 만 번 배척받고, 만사에 비운의 곡절이 깃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고통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창조 당시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바라보시던 소망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오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으로 한이 생겨났지만 이 한을 잊어버리고, 본연의 아들딸로 축복해 주어 내일의 행복의 동산에서 즐거워하시겠다는 심정을 잊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야 피를 흘리시건 말건 땀을 흘리시건 말건 불쌍한 자리에 계시건 말건 나만 편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나는 그런 기도 안 합니다. 안 해요. ‘아버지, 이 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도 안 해요. ‘아버지, 역사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도 그 죄인 중의 하나요 이 나라 이 민족의 일원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 이 민족의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십시오’이렇게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옳은 기도예요. 어른을 알아봐야 사리에 맞지 않습니까? 전통을 인정해야 사리에 맞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라 하셨으니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무거운 짐보따리 다 짊어지시고 나를 천국 보내 주십시오’ 하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9-151
‘나를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 하신 데에는 복잡하고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걸어 놓고 우주를 걸어 놓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명 천만개 이상의 가치로써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과거에는 나를 살려 주는 예수로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세계를 살려 주기 위한 분이요, 하늘 땅을 해방시키기 위한 분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그런 예수를 믿고, 그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 예수의 백성이 되고, 그 예수의 아들딸이 되고, 그 예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찾아오셨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돌아가신 그날부터 예수의 이름을 세울 수 없는 환경에서 방황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사도와 성도들 개개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개인을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치고, 가정을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치고, 사회를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치고, 교회를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쳐서, 이제 기독교사상을 위주한 하나의 국가를 찾아오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가 민주라는 이름을 걸고 기독정신, 기독교 이념권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예수께서 세계를 찾아오시는 시대, 세계적인 구주시대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는, 자기 개인만의 구원을 받으려고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맞이할 수 있는가 보세요. 예수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통치하려 오시는 것입니다. 끝날에 오시는 예수는 천주적인 예수입니다. 끝날은 하늘과 땅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가 오시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잘 믿다가 죽어 낙원에 가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가서 ‘하나님, 이들은 땅 위에서 잘 믿어 낙원까지 온 아들딸이니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못한다는 것입니다. 낙원권내에서는 자랑할지 몰라도 하늘보좌를 중심삼은 전체적인 천주이념권내에서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오시는 예수의 시대에는 예수가 친히 하늘보좌에 가서, ‘아버지시여, 당신이 자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오니 온 천주와 하늘 땅을 대해서 대승리자라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가 소망하는 목표요,하나님이 소망하는 목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목사가 되면 제일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목사이상의 국가적인 주님을 대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한 교회나 사회단체를 움직이려면 국가적인 예수의 심정을 체득해야 됩니다.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려면 세계적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를 맞아야 됩니다. 그렇지 못하고 옛날 그 방식 그대로 하니 기독교는 깨져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이 오신다면 그는 하늘과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공인 동시에 하나님의 심정을 주관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늘땅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까지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자가 다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그런 주인공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그래야만 하나님이 마음 놓고 ‘그래 이 세상 모든 만사를 네가 맡아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럴 게 아니예요? 땅 위에서 안식할 수 있는 기준을 종결짓지 못한다면, 역사의 최종적인 안식의 터전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머어마한 말입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은 거 이단자의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예수를 왜 해방시켜 드려야 되느냐? 예수는 낙원에서 아직도 기도하고 계시니 그 기도를 그치게 해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왜 해방시켜 드려야 되느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이 되었으니 해방시켜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딸을 못 찾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들딸을 못 찾았기 때문에…….

무엇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창조이념을 품고, 전체의 이상을 세워 놓고 아들딸을 축복해 주셨는데, 우리의 참다운 조상들을 중심삼고 안식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종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천륜의 축이 놓여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이러한 축이 놓여지는 날에는 세상은 혼돈하면 혼돈할수록 더 빨리 선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싸움이 벌어지고 복잡하여 뭐가 안 되는 것 같지만 여기에 세계가 동원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내부로는 깨지는 것 같지만 세계가 찾아들어옵니다. 더 단결된다는 거예요. 뜻이 있는 사람은 이때 생각을 잘 해야 됩니다.

천운이 어디로 흐르느냐? 천운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이다 죽은 자는 충신이 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천운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인자는 역적 안 된 자가 없습니다.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신은 공의(公義)와 전체를 위해서 죽는 자요, 역적은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전체를 위해 죽어야 됩니다.

사람은 귀한 것을 가졌으면 갖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해야 됩니다. 주신 분과 더불어 기뻐해야 됩니다. 그래야 주신 분도 기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더 있으면 더 주고 싶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뻐해야 됩니다. 이건 몇 억 원짜리를 주었는데 몇 십만 원짜리만큼만 기뻐한다면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 귀한 것을 받았으면 그만큼 기뻐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넘쳐 흐르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이 기쁨은 순간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 그런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랑하고도 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야! 참 좋구나, 야! 참 귀하구나’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진정 귀하다는 것까지 잃으면서도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 귀한 것을 받게 될 때 이런 마음이 넘쳐흘러 ‘야,이제 고통도 문제없구나. 이 기쁨을 누가 빼앗아 갈소냐?’ 하며 기뻐한다면 그 기쁨은 개인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만민의 것입니다. 자랑하고 싶고, 주고 싶고, 받는 것을 볼 때 자기가 갖고 있을 때보다 더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원칙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귀한 것이 있으면 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것이니 누구도 노터치(no touch)다’ 라고 하는 사람은 천륜의 배반자입니다. 천지의 운세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자를 치게 됩니다.

9-154
귀한 것을 가진 자의 책임
그러기에 선하라고 했습니다. 선은 무한히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을 가졌으면 기뻐해야 하고 그 다음엔 기쁜 마음으로 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잃으시고도 더 주겠다고 하시고, 자기의 어려움을 잊어버리면서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해야 할 여러분, 행복의 내용과 요소를 갖추려면 ‘이런 귀한 것을 내가 가졌구나’ 하고 기뻐해야 하고, ‘온천주가 찾고 그러한 것을 내가 가졌구나. 그분을 내 것으로 삼았구나!’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내 것으로 삼았으나 빼앗길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것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소유했다면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왜? 내 몸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본체(本體)요 나는 지체(肢體)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한 나무이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는 한 나도 살아 있고, 그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그가 영원히 주고 싶으면 나도 영원히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되, 빼앗길 공포의 자리에 있는 한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하셨고,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철통 같은 심정의 유대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같은 심정의 주머니를 쓰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이 뛰쳐나오려고 하면 다 뛰쳐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못 빼앗아 갑니다.

9-155
새시대의 주인공
역사노정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구약시대는 물질을 제물로 드리는 시대요, 신약시대는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 분이요 마음을 대신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상상대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신이 은혜를 준다고 알았지요? 성신은 몸 제물을 드리는 분입니다. 이 몸 제물이 완결되면 신랑되신 예수가 마음 제물을 겸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한 자리에서 심정문제가 나옵니다. 그렇지요? 과거에는 물질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성신과 예수를 중심삼고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이렇게 뜻의 성사는 상대적입니다. 그렇잖아요?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되느냐. 물질의 제물시대, 몸과 마음이 제물시대가 가고 최후에는 심정의 제물시대가 옵니다. 주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 하는 시대입니다. 주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가 죽는 자리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됩니다. 심정의 제물시대를 통과해야만 됩니다. 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배반하여 마음과 몸을 잃어버리고 세상만사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다 한 몸에 지녀서 탕감복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노정을 거쳐나오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잃어버린 최후의 행복의 요소를 찾는 데 있어서는 그분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심정이 하나가 되면, 역사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니요, 시대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니요, 평면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갈지라도 항상 그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정적으로 하늘과 내가 한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지고, 하늘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질 수 있는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동참자가 되는 동시에 천국 가면 거기서도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의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괴로워하면 나도 괴로워하는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거쳐 가지고 나중에는 무한히 주고 싶고, 무한히 자랑하고 싶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중심삼고 만물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만물과 정을 통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하늘과 관계됩니다.

하늘과 마음, 마음과 몸, 몸과 만물, 즉 삼대상(三對象)을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땅 위에서 사탄을 지배하고 천리원칙을 통과한 승리의 아들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자라야 하나님의 분체(分體)입니다. 남자라면 참아버지의 분체요, 여자라면 참어머니의 분체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누가 끊을소냐? 억천만 사탄이 와도 못 끊습니다. 어느 누가 ‘너는 아무개 아들이야. 그 사람은 네 어머니가 아니야’ 하며 아무리 때리고 찌르고 죽여도 그 인연은 안 끊어집니다.

그 이상의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과 일체적인 관계,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 확실하고 실증적인 내용, 체험적인 사실을 갖춘 자만이 끝날 새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공의의 심판과정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며,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156
기 도
아버님, 불초한 이 자식이 당신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외로이 눈물을 지을 적마다 품어 주시며 권고하시던 그 심정을 무엇으로 소개해야 될는지 표현할 말이 없음을 애달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심정을 잃어버렸던 불쌍한 자녀들이 그 심정을 찾아 헤매게 되고, 그것을 찾기 위하여 눈물지을 수 있다 할진대, 모르는 자들보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알았사오니 부디 그와 같은 자리에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몸이 저의 것이 아님을 알았사옵고, 이 몸은 자신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심정이 머물러 있는 땅인 것을 알았사옵고, 심정이 머물러 있는 인류인 것을 알았사옵고, 심정이 머물러있는 천륜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심정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가 심정권내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오늘 불쌍한 삼천만 민중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해골곳과 같은 이 삼천리반도 골짝 골짝에서 울부짖는 아들딸의 음성이 들릴 적마다 땅은 망해 가는 것 같사오나, 새로운 소망은 봄빛을 받아 자라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던 소망이었고 이것을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외쳤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잃어버렸던 인간이었습니다. 불쌍하고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자랑하다 보니 내 자신이 고아인 것을 알았사옵고, 자랑하다 보니 내 자신이 과부인 것을 알아사옵고, 자랑하다 보니 적군에게 포로가 된 것 같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을 알아사옵니다. 좋아한 것도 탄식할 일이었고, 춤춘 것도 탄식할 일이었고, 기뻐한 것도 탄식할 일이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께서 그리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사옵고, 참자녀를 참자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사옵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역사노정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인류를 찾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도 그 모습을 체(體)로 삼아 만우주의 영원한 아버지로 세울 날을 고대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창조의 이념이 그 한 때를 계기로 하여 종결될 것을 알았사오니, 무지했던 과거를 용납하여 주시옵고, 비참하고도 처량하였던 선조들의 한을 이 시대의 저희를 보시고 해원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한맺힌 울부짖음 소리를 듣고도 통곡할 줄 모르고,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당신의 아들딸이요 신부라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도 하늘이 슬퍼할 때 춤을 추는 자들이 많았사옵고, 하늘이 통곡할 때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았사옵니다. 아버지의 맺힌 한을 저희들을 통하여 푸시옵고, 탄식의 원한을 저희들을 통하여 푸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민족의 운명도 끝날에 당도하였사옵고, 세계의 운명도 새로운 무엇을 향하여 뛰어넘어야 할 최종시기에 당도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은 잠들어 있사옵고 세계의 청년남녀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사오니, 이들에게 무엇인가 남길 수 있는 것을 가진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그냥 지내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시옵고, 애달픈 심정을 붙안고 영원한 세계를 위하여 이날을 지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고, 친구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위로하여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수많은 교단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혈육을 물려받은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운 입장이요 아버지의 재물을 같이 나누어야 할 운명인 것을 저희들 알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위하여 매를 맞고, 복을 빌어 주고, 그들에게 하늘의 위로의 손길을 가하게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여기에 있다 할진대 세워 주시옵소서. 뭇 생명을 대신하여 매를 맞고 가신 예수인 것을 알았사옵고, 이스라엘의 반대를 받아 홀로 민족의 반역자요, 교단의 이단자로서 갈보리산상에서 피 흘리시던 예수의 외로움을 알았사옵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서글픈 눈물을 흘리시던 그 심정을 알았사옵니다.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되고 ‘그 대신 내가 싸워 나가리니, 주여, 그것을 내게 맡기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제자를 만나지 못한 예수가 얼마나 분통하고 통분하였겠습니까?

저희들은 예수의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고, 그의 아픔을 위로하지 못한 타락한 혈족이옵니다. 그의 피 흘리는 손길을 보고 통쾌해 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하늘땅의 복을 빌며 눈물 흘리시던 그를 대하여 손가락질하던 선조를 가진 저희들, 그들의 후손이 된 것이 억울하고 분통하오니 저희들은 그런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륜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에게 그저 온유하고 겸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지하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이 역사적인 범죄의 탕감과정을 거쳐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승리의 길도 그런자들이 닦았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내놓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을 아옵니다. 그런 무리가 이 삼천만 민중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세계 30억 인류 앞에 나타나는 날에는 하늘이 그들에게 행운을 약속하실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느낀 모든 심정이 하늘과 일체가 된다면 제가 지닌 바를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억천만 천사들도, 억천만 사탄세계의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요, 아버지의 분함이 저희의 분함으로 여겨 아버지의 동하고 정하심에 따라 저희들도 동하고 정할 줄 아는, 일체 이상 심정을 통과한 당신의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며 이 시간 말씀드렸사오니, 행복된 아들딸 되기를 저는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귀한 것을 찾았습니까? 무한히 자랑하고 무한히 기뻐하면서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승리의 은사와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시간의 약속과 더불어 영원히 하늘땅 앞에 세움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