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 to 9-34: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
1960.04.03 (일), 한국 전본부교회

9-12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로마서 8:12-21

[기 도]

이 시간 저희의 마음에 체휼되는 대로 아버지의 본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스스로 살필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자랑하고 싶고, 보이고 싶고, 귀하게 생각되던 나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와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가는 역사노정에서나 천지운세의 법도권내에서나 심정세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보이고 싶은 내가 되었으며, 자랑하고 싶은 내가 되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고 싶은 내가 되어 있는가를 이 시간 스스로 더듬어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걸어온 인생 행로는 자리를 잡지 못한 인생 행로인 것을 저희들은 뼈살에 사무치도록 느꼈습니다. 이 한 시간 깊은 심정으로도 머물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한 자신을 붙들고 안식의 한 날을 꿈꾸는 자는 인생 행로에서 패자(敗者)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저희는 이미 느꼈사옵니다. 서러워하는 ‘나’는 살기를 고대하여 서러워하는 것이옵고, 애달파하는 ‘나’는 갈 길을 몰라 애달파하는 것이오며, 방황하는 ‘나’는 목적하는 한 곳을 가기 위해서 방황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손은 사망의 권세를 쳐부수고 이겨낼 수 있는 아무런 무엇도 잡지 못하였사옵고, 저희의 마음은 하늘 땅이 깨져 나가는 한이 있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을 세우지 못하였사옵니다.

천상천하의 만물만상은 천리의 법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철칙이온데, 저희들은 엄연히 존재하시는 하늘에 소속되지 못한 한스러운 모습들이오니, 이러한 자신을 바라보며 탄식이라도 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세워 자랑하고 싶어하는 ‘나’는 허황된 존재이옵고, 무엇과 비교하여 판단하는 그 ‘나’는 천적인 위치에서 볼 때에 심판받을 자리에 가까이 있는 존재임을 느낄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는, 자기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자기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갈 방향을 알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인생들의 서글픔을 해원해주셔야 할 책임이 있기에, 만민이 머물러야 할 안식의 동산, 만천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가치있는 곳, 이 곳이 곧 내가 찾던 목적의 곳이요, 영원한 생명의 곳이라고 만인간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곳을 찾으시기 위하여 오늘도 수고하고 계신 것을 이 소자는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뵈오리이까. 무엇으로 아버지를 모시리이까. 무엇으로 아버지를 고대하오리이까. 무엇으로 아버지의 말씀 듣기를 원하오리이까. 그것을 모르는 저희들이옵니다.

타락으로 인해 흙덩이만도 못한 천한 모습이 된 저희들이오니, 자기의 존재의식을 생각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주관이나 자신의 어떠한 의식도 허락치 않은 이 시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관념을 초월하고 자기의 의식을 초월하여 당신의 장중(掌中)에 쥐어진 흙과 같이 되어, 당신의 마음대로 빚어질 수 있고 당신의 뜻대로 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아버지의 주관권내에 속하여 생명의 맥박이 뛸 수 있도록 재창조의 손길을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했사오니, 죽었던 몸들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다시 소생시키시어서 환희에 취해 천지만상 앞에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심정적인 해방이 이 시간에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속 깊이깊이에 아버지의 기쁨과 영광이 폭발되어 환희에 찬 자유의 모습을 이 시간 저희의 몸 마음으로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요구치 않사오니 오로지 이 한 뜻, 이 한 사정, 이 한 일만이 저희의 심정에 사무쳐 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지, 말씀을 하고자 나타났사온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지난날에도 많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말씀을 해야 할 때가 많았던 것을 당신은 아시오니, 이 시간은 그런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으로 흠모하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당신의 애달픔이 저희의 애달픔이 되고, 당신의 사정이 저희의 사정이 되고, 당신의 슬픔이 저희의 슬픔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자리에 뛰어 나갈 수 있는 이 시간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제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로 화하게 하시어 자아의 모든 의식을 초월하고 시간적인 관념을 초월하여 친히 움직이시는 아버지의 그 움직임을 저희들이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깊은 아버님의 심정의 그늘에 자기도 모르게 우거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런 체험을 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축복의 은사를 바라는 수많은 인류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나 외로운 싸움터에서 싸우다 지친 몸을 끌고 아버지의 존전에 나와 무릎을 꿇고 때와 시기를 고대하며 호소하고 있는 당신의 숨은 아들딸들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같은 은사의 뜻을 세우시려는 아버지시오니, 이 시간 같은 승리의 모습으로서 영광의 은사를 대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9-15
말 씀
이 시간 여러분 앞에 드리려 하는 제목은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입니다.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누구의 자녀인가’ 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9-15
선악의 근거지인 나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인연으로 인하여 인간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또 우리의 몸은 음침한 이 사망의 환경을 개척하여 광명하고 선한 그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위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나 하나를 걸어 놓고 선과 악이 대립되어 우로 혹은 좌로 방황하게 하는 그 환경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이끄는 선한 그 무엇과 악한 곳으로 이끄는 악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세계(無形世界)가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인간을 걸어 놓고 선한 하나님과 악한 악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도 선과 악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 한 개체를 걸어 놓고 서로 끌고 끌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이 존재를 세워 놓고 천상에서도 좌로 우로, 지상에서도 좌로 우로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어떠한 자리에 태어났느냐? 위로는 하늘을 대할 수 있고 아래로는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자리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나는 지금 어떠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확실히는 모르나 선과 악의 두 화살이 내 심중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활에서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내 몸은 작은 모습이로되 여기에는 위로는 하늘을 중심삼고 선과 악의 근거지가 되어 있고, 아래로는 이 땅을 중심삼고 선과 악의 근거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위치에 태어났으며,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또한 누구의 아들딸인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다면 그 자식도 선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선하지 못하고 악한 위치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선조가 악한 위치에서 우리를 낳은 연고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그런 위치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런 나 자신을 해명하는 것도 중대한 문제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나는 누구의 아들딸인가’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9-16
3대 부모와 타락인간
그런 나의 근원은 어디서부터냐? 나는 나 자신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 부모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거기서 더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선조와 선조들을 거쳐 최후에는 누가 나오게 되느뇨? 여기에서 인류의 시조가 나온다면 그를 붙들고 그 시조와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의 아들 딸인고? 인간들은 3대 부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양육해 주는 것은 땅입니다. 우리 몸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해주는 땅, 이 땅이 우리의 부모입니다. 그런데 이 땅이 인간의 부모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를 낳아 준 부모가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적인 부모는 땅이요, 마음적인 부모는 우리를 낳아 준 부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 두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모를 넘어 이념적인 가치의 모습, 절대적이요 영원무궁하신 한 분의 부모가 있나니, 그 부모를 인정하지 않고 해명하지 못한다 할진대, 인간은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인류는 흘러가는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부모를 해명하는 어느 한 순간, 한 때, 한 시기를 갖지 않는 한 안식의 동산을 차지할 수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우리에게는 심정적인 부모가 있나니 그 부모는 땅과 더불어 망해가는 부모가 아니라 땅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어 지배하고도 남을 수 있는 부모입니다. 그 부모가 바로 천상의 부모, 즉 우리를 창조하신 부모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3대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기를 낳아 준 부모만이 부모인 줄 알고 있으나 아닙니다. 여러분 몸뚱이의 원천은 흙덩이예요. 여러분은 낳아 준 부모의 아들딸로 태어났지만 낳아 준 부모만을 닮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그 부모를 넘어 새롭고 더 큰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동기와 인연이 없이는 천적인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철칙이라 할진대, 절대적인 가치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한 부모가 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어떠한 인간일 것이냐? 땅을 대하여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가 땅이라 할진대, 인류는 그 부모와 함께 심정적으로 위하여 살 줄 아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을 알고 천상의 부모의 뜻을 염려하며 그 뜻이 바라는 선의 목적지를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싸워 나가는 사람, 그 어떠한 절대적인 인연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참다운 인생행로를 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남아질 수 있는 민족,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이냐?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을 대하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민족은 나라가 적에게 침범을 받게 될 때 적을 대하여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자기 자신보다 민족을 붙들고 인류를 붙들고 사랑할 줄 아는 민족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싸움은 땅 빼앗기 싸움이요, 어떠한 주의를 세워 인간을 포섭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인들이 해야 할 남은 한 분야가 있거늘 그것이 무엇이뇨? 하늘이 동조할 수 있는 기대(基臺)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을 사랑치 않고는 못 사는 민족, 그러한 주의 혹은 사상이 땅 위에 나타난다면 천지의 운세는 그들을 위하여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지상천국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은 어떠한 인간이뇨? 하늘을 자기의 부모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인류를 자기의 부모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땅을 자기의 부모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생활과 생애의 이념으로 세워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깊이 인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대하는 순간 무언가 느껴지고 자기를 회상하며 깊은 심정의 경지에 잠기게 되는 것도 본래의 인연이 재인식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던들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사랑하는 애인이나 사랑하는 친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창조주가 그 풀을 지으실 때 즐거워하시던 그 묘미를 체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었다 할진대, 타락하고 낙망하고 슬퍼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9-18
인간의 욕망과 타락
지금까지 예술은 인생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개척하고 개척하여 무엇을 제시하고자 했던고? 내적인 세계의 미를 상대적으로 느껴 그 본연의 가치를 백퍼센트 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술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여지는 자연을 품고 기뻐한 적이 있었습니까? 산수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인간이여, 이것을 보소서. 하늘이여, 당신의 창조의 묘미가 놀랍소이다’라고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할진대 여러분은 절망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탄식이 생겼는데, 그 탄식은 인간에게서 그친 것이 아니라 천상과 지상의 온 피조만물에게 미쳐졌다고.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많지만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자연심입니다. 욕심이 아니라 자연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정적인 지역에 갇혀 있으니 이것을 터치고 나아가자는 것은 자연적인 발로입니다.

인생의 욕망은 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덩이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 인간과 더불어 화합하고 전체의 가치를 의논하며 주체되는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와 더불어 상대적인 가치를 노래하고 그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마음은 달립니다. 우리의 심정과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온 천주를 품고 싶은 욕망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본궤도에서 이탈하였기에 그것을 대하지 못하고 취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근본원칙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한때가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여 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에서는 두 갈래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행복을 느꼈다 할지라도 그 행복을 내일도 모래도 생애 내내 지속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붙들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중심삼고 영원히 행복을 노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가치적인 그 무엇도 존재세계 앞에 영원히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인 것을 여러분이 시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있어야 할 자리를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싸움의 환경에 떨어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누가 저끄러 놓았는지도 모르고, 누가 엉클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환경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기 위해서 인륜도덕이니, 도의 길이니 하는 것들이 나왔고, 이것을 넘고 넘어 나중에는 이 땅위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하늘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갈래야 갈 수 없는 환경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이, 우리가 태어나 살아오면서 형성된 생활적인 관념이나 인식이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알 수 없는 어떤 죄악상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딸이뇨? 여러분이 악한 세계의 아들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악한 세계의 아들딸이예요. 선을 그리는 마음은 있으되 선한입장에 처하지 못하고 악한 입장에서 탄식하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악한세계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를 결론지어 말하기를 타락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 타락이라는 두 글자에 걸린 인생이니, 타락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죄악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9-20
참된 아들딸이 가야 할 인생행로
여기에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을 정비하고 가야만합니다. 어떻게? 몸이 반대하면 몸을 치고 가야 됩니다. 마음이 반대하면 마음을 치고 가야 됩니다. 심정이 그 길을 가로막으면 이 심정을 쳐부수고라도 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길은 버리고 가는 길, 박차고 가는 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수천년 동안 찾으면서 가야 된다고 하였지만 간 자가 없고 승리했다는 자가 없으니 어이할 것인고.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탄식의 혈통을 벗어나려고, 죄악된 자녀의 이름을 끊고 선한자녀의 이름을 가지려고 뛰쳐 나왔지만, 아직까지 다 갔다 하는 승리의 모습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할진대 그 천국과 지옥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중사(重死)와 중생(重生)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 우리를 중심삼고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종말시대에 찾아오는 세계적인 공포에 떨고 있지만, 참다운 인생을 그리워하고 참다운 본향의 목적지를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 할진대, 외적으로 나타난 그 공포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심중에서 선악이 싸우고 있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패자가 되면 영원히 악한 부모의 혈육을 벗어나지 못하니 사망세계의 자식이 되는 것이요, 승리하여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부모의 혈육을 받은 자녀의 입장에 서게 되면 땅의 역사를 초월한 천적인 가치의 세계에 남아질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을 붙들고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상대적인 어떠한 존재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중에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온 우주와 더불어 그 부모를 노래할 수 있는 생활이 생애 내내 계속되지 않는다 할진대, 그는 끊김받은 자요 막혀지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야 할 우리입니다. 내가 싫어도 역사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고 내가 안 가려 해도 이 세계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민족 이세계의 운세를 배반하면 그 민족을 쳐서라도 하늘은 내몰 것입니다. 어떠한 개인이 그 운세의 방향을 가로막고 안 가겠다고 하면 그를 쳐갈겨서라도 대우주의 목적지를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가야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어떠한 국제경기에 나가게 될 때 그를 가리켜 대한의 아들딸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 내의 어떠한 단체를 대표하고 어떠한 종족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그 단체나 종족의 아들딸이라고 합니다. 또한 가정에 들어가면 그 부모의 아들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들딸이란 명사는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다운 아들딸이 가야 할 인생행로는 어떠한 행로일 것인가? 우리는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아들딸의 기준도 이 땅 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안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확언할 수 있어요. 하늘이 공인하는 국가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 기준이 있어요? 없습니다. 천지가 생겨난 이후 하늘이 공인하는 일가, 종족, 민족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계율도 무엇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까? 못되었습니다. 하늘을 배반하기 일쑤였고 시대 시대에 있어서 하늘 앞에 역적의 행로를 걷기를 일삼던 그 민족, 보내신 메시아를 잡아죽인 그 민족은 하늘의 아들딸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냐, 너희는 세계를 대표한 내 아들딸이다’하시며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도 못하였고, 선민으로 국가를 세워 그 국가를 대신한 하늘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도 못했습니다. 종족을 대신한 하늘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정을 중심삼고도 하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하늘은 불쌍한 하늘입니다. 하늘이 심정으로 소원하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 타락하지않은 우리의 선조를 세계적인 아들딸로 세우는 것이었을 겁니다. 세계를 통치할 수 있고, 국가의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로 세우기를 꿈꾸었을 것이 틀림없고, 종족이나 어떠한 가정의 아들딸로 세우기를 꿈꾸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세우려던 그 기준이 다 끊김으로 말미암아 인생은 허덕이게 되었고 고통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석같은 악마의 철창을 박차고 해방의 한날을 맞이하여 하늘이 인정하실 수 있는 부모를 찾아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기가 막히다면 이 이상 기가 막힌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하셨고 말할 수 없는 희생의 제단을 엮어오셨는데, 그러한 기준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계시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통탄하여야 할 우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9-22
몰림받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우리는 모여들었습니다. 핍박의 길을 개의치 않고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찾아왔습니다. 슬픔의 골짜기를 개의치 않고 찾아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악한 세상의 아들딸을 벗어나 참다운 선의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역사노정에 왔다 간 우리의 선조들이 환경을 정리하고 목적지를 향하여 나선 것은 ‘가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행동이요 실천이었더란 말입니다.

보십시오. 노아 할아버지는 어떠하였습니까? 환경적으로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120년 동안 온갖 정열과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성심성의를 다하여 일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120년 후에 물로 심판받을 것을 외쳤던 것입니다. 120년 동안 외쳤지만 한 사람의 동지도 찾지 못한 노아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청청한 하늘을 바라보며 비웃고, 길거리에서 탄식하는 노아를 바라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비웃음을 당하고 몰리던 노아였습니다. 세상만사의 모든 인연을 다 끊어 놓고 하늘이 허락하시는 새나라의 가족으로, 새나라의 부모로, 새나라의 혈족으로 등장하기를 원하였던 노아였습니다. 이것이 하늘이 바라는 충절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믿고 천당이나 가겠다고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 황무지인 광야로 가라고 하는 하늘의 음성 앞에 주저치 않고 행복하게 살던 정든 고향산천과 가장집물(家藏什物) 일체를 다 버리고 나섰습니다. 그런 걸음을 걸으신 분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60만 대중을 끌고 황무지로 내몰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도 역시 몰림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선을 주장해 나온 성현 현철들은 일단 세상에서 내몰렸습니다. 몰리고 나서야만이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몰리고 몰려야 됩니다. 그리하여 찾아가야 할 목적지, 하나님을 위주로 한 부모의 위치까지 나가야 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니 천당 가고 교회에 다니니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자위하고 자신하는 무리들이 있으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종말까지의 하나님의 심정이 내 뼛골에 녹아들어 하나님께 슬픔이 있다면 생명으로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기쁨이 있다면 생명으로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즉 하나님의 모든 감정을 통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되는 것이지, 그러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양자가 되는 데도 아버지라 부르기만 해 가지고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아들딸이 되려면 하늘의 혈통을 받아 심정적으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의 여러분은 종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부모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혈통이 다르니 양자예요. ‘이것이 우리의 부모인 줄 알았더니 원수로구나!’ 하는 자각을 주어 혈통이 다른 이 원수와 인연을 끊고 나가도록 하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역사는 몰리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 나오고 주의나 사상을 제창해 나온 사람들은 모두 몰림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이 종족에게 몰리면서 새로운 무엇을 느끼고 천지의 대부모의 심정을 따라나가기 위해 허덕인 것이 역사노정입니다.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 즉 사가(史家)가 있다 할진대, 그런 관점에서 역사를 관찰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륜의 심정을 기반으로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를진대, 이는 세계적인 사가(史家)가 못 됩니다. 역사는 보이지 않는 심정적인 그 무엇, 즉 대천주를 창조한 심정적인 이념 밑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뚜렷한 목적 아래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씨족으로부터 부족을 거쳐 민족, 국가, 나아가서 동맹국을 거쳐 연합국을 형성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가까왔습니다. 세계적인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때가 점점 점점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떠한 기준이 나와야 될 것이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니, 그의 아들이요 딸의 위치에 서서 이 세계는 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황태자가 등단해야 합니다. 이것을 천지는 바라고 있습니다.

9-24
도의 길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무엇을 잃어버렸느뇨?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땅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땅은 이 민족 저 민족의 주의와 사조에 휩쓸려 이리 짓밟히고 저리 짓밟히는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6천년 동안 피로 물들었던 땅아, 밟힘 받던 인류야, 이 땅과 인류로 말미암아 탄식하던 하늘이여’ 하며 울게 될 때, 천상이 울고 인류가 울고 땅이 울 수 있는 심정적인 세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기필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되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리워 찾아 나선 걸음이니 그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지나갑니다. 몇 세기 동안 어떠한 민족을 택해 품고 나오다가도 놓아 버립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민주와 공산 2대 진영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후의 부모의 역할을 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싸우고 있는 이들은 진짜 부모일 수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심정을 중심삼고는 두 주인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노래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점령할 수 있는 용자가 땅 위에 어디 있습니까? 어떤 대왕, 권세 잡은 대마왕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하여 ‘너희는 내 아들딸이다’ 할 수 있고, 여러분은 그분을 대하여 ‘당신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할 수 있는 심정적인 세계가 반드시 종말시대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심정적으로, 그리고 생활적으로 그런 기준에 접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들을 점령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가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들? 타락한 부모는 갖고 있으되 타락하지 않은 부모는 갖지 못한 인간입니다. 아무리 우쭐대고, 아무리 잘나고 뭐 어떻고 어떻다고 했댔자 타락한 조상의 후손입니다. 타락의 종족이란 말입니다. 그 악의 요소가 깊이 뿌리박혀서 선조로부터 흘러나와 여러분 일신에까지 배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몸이 하자는 대로, 좋다는 대로 다 해서 기쁨을 얻는 것이 하늘이 바라는 일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부정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부정, 듣는 것도 부정, 먹는 것도 부정, 자는 것도 부정해야 합니다. 도의 길은 그런 길입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유관념을 일체 용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의 아들딸이라는 관념까지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도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아니니 끊어야 됩니다. 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말하기를,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못 된다’고 했습니다. 도는 여기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천 번 만 번 부정해야 합니다. 이놈의 눈, 이놈의 귀, 이놈의 배통, 이놈의 심정을 모조리 부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저를 때려서라도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하소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인의 생활입니다. 때리고 나서 칠 것이 없을 때에 일으켜 옮겨 놓기 위한 것이 심판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혈통적으로 엮어져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것이 하늘의 고충 중에서 최대의 고충일 것입니다. 사정은 쉽게 해결할 수 있으되 심정은 생사를 걸어 놓고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정은 상대적인 가치의 조건을 세워서 해결지을 수 있으되 심정문제는 절대적인 내 생명을 걸어 놓고야 해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의 길은 죽음을 걸어 놓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9-26
우리가 찾아야 할 부모
우리는 출발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애달픈 심정으로 인류를 찾아오신 아버지, 황공만극하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 이란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자식을 찾기 위해 허덕이시며 종종걸음치신 하나님, 애달픈 심정을 갖고 통곡하시며 인류의 뒤를 따라 나오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셨는데 아직까지 당신의 품에 품고 영원무궁토록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다니 이 어이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마음에 느껴집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오냐, 나를 대접해라. 오냐, 네 집에서 잠을 자겠다’ 하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못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깃들 수 있는 사람을 가지지 못하셨고 집도 지니지 못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있잖아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성전은 곧 집을 말합니다. 집을 찾는 하나님입니다. 교단이라는 것은 집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집은 무얼 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들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집을 찾아야 아들딸을 찾겠기에 집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들딸을 찾자는 것입니다.

나는 한때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대우주의 운세가 살아있을진대, 그 깊은 당신의 부모의 정을 제가 알만하오니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아들딸로, 한 가정에서 당신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아들로 딸로 삼아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를 해봤습니까? 6천년 동안 아들딸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께서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시며 그 순간 위신을 잊어버리고 울어야 좋을지 기뻐해야 좋을지를 몰라 몸부림치며 붙안고 즐거워하시는 그 아버지를 여러분은 모셔 보았습니까? 못 모셔봤지요?

우리에게는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가정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는 동시에 종족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민족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나라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부모를 찾고 하늘땅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민족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고 나선 충신은 자기의 부모를 부정하고 자기의 처자를 부정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금의 때는 국가주의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가주의시대를 넘어 세계를 중심삼은 새 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지금 때는 세계주의시대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부모를 넘어 세계적인 부모를 모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에는 어떠한 부모를 모셔야 될 것이뇨? 세계의 부모를 넘어 하늘땅을 창조한 창조주를 부모로 모셔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 길은 한의 노정입니다. 허덕이며 넘어야 할 한스러운 고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하는데 있어서 먼저 세계의 부모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부모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부모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종교의 부모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한 개인의 부모의 위치로부터 출발시키셨습니다. 한 집을 단위로 하여 출발시키셨습니다. 한 집을 단위로 하여 깃들기 위한 안식의 보금자리를 하나님은 찾으셨던 것입니다.

9-28
세계적인 부모로 오시는 구주
그렇게 찾아나온 것이 아벨의 제단이요, 노아의 가정이었으나, 그것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1600년 동안의 수고의 흔적이 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400년을 수고한 후에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삼고 다시 찾으려 하셨으나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하여 또 깨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을 거쳐 3대째인 야곱 때에 이르러서야 가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섭리해 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똑똑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택한 민족을 위하여 야곱의 나라를 축복하고 싶으셨지만 그러지 못하고 야곱의 집을 축복하셨습니다. 거느릴 수 있는 야곱의 한 집을 찾으셨을 뿐입니다. 한스러운 역사였어요. 믿음의 조상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믿음의 뿌리란 말입니다. 야곱의 집을 중심삼고 번식시켜 민족을 만들고 국가를 세우려 하였던 것인데 끝내 그 뜻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가정의 축복을 받았던 야곱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애급에서 고역받던 무리를 모세가 이끌고 나올 때에 광야에서 쓰러질 줄을 어찌 알았던고? 모세는 민족의 부모의 입장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모세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 내 아버지 가는 것이 내 어이 안 갈소냐’ 하는 심정으로 행동을 같이했던들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족의 부모를 넘어 민족의 부모로 세워진 모세의 기반은 간곳없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종족적인 부모의 혈통을 계승하여 세워진 자들이 수많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기반 위에 부모가 오시거늘 어떤 부모가 오시느냐? 국가의 부모를 넘어 세계의 부모요, 더 나아가 하늘 땅의 부모로 오십니다. 이것이 구주사상, 메시아사상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돼요. 그러면 메시아가 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냐? 악의 국가와 그 주권을 깨뜨려버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장중에 넣어 통치할 수 있는 선의 주권을 세워가지고 참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어 놓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는 만인간 앞에 왔다 갔습니다. 무엇으로? 가정적인 부모형(型)으로 야곱을 세우고, 민족적인 부모형으로 모세를 세우고, 그 위에 예수를 세계적인 부모형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부모가 되려면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란에 있는 라반의 가정에 가서 싸웠습니다. 모세도 원수세계인 바로 궁중에 들어가 싸웠습니다. 싸워서 승리해야 부모로서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이 땅에 와서 모세 때의 애급 땅과 같은 이 세상에서 싸워 가지고 세계적인 부모의 기준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죽어 버렸습니다. 실패하고 간 것입니다. 실패하고 갔기 때문에 다시 와야 된다는 거예요. 세계적인 부모를 세우려 했던 것이 실패하게 되었으니 가정적인 부모, 민족적인 부모도 다 깨졌습니다.

4천년 공사(功事)와 천지의 법도를 세워 찾아 나오던 부모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영적으로 그 부모를 연결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신랑 신부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성신이 무엇인 줄 알아요? 어머니신이예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성신, 성신 하는데 성신은 어머니 신입니다. 예수는 아들 신이고 하나님은 아버지 신입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딸이 참부모가 못 되고 타락하였으니, 예수는 참부모로와서 여러분을 다시 낳아 주려 했던 것입니다.

중생(重生)이 무엇입니까? 다시 나는 것입니다. 다시 나는 것은 죽었기 때문에 다시 나는 것 아닙니까? 성신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시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아버지로 모시고 성신을 어머니로 모셔서 이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어머니 뱃속에 다시 잉태되어 태어나는 역사가 구원역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영육을 통해 지상에서 완결지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재림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거짓말 같으면 기도해 보란 말입니다.

세계 27억 인류는 찾아 나왔습니다. 찾고 찾아왔습니다. 허덕이고 허덕여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잃어버린 세계의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이것이 심정적인 안식처를 찾아 들어가는 최후의 문입니다. 세계적인 부모가 되라고 축복해 주었던 아담 해와가 세계적인 부모가 못되고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니, 참다운 세계적인 부모가 생겨나는 그날에는 하나님을 상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봉하는 그때에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심판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9-30
최후의 목적지
그러면 하늘이 우리를 세워 놓고 오라 하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천지의 대주재가 소망하시는 귀결점은 무엇이뇨? 참부모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부모와 한번 혈연적인 인연을 맺으면 하나님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실존세계를 꿈에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 생활에 아버지가 계시는 권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심정적인 그 세계로 옮겨 주는 부모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늘이 우리를 오라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도(道)니, 하나님의 섭리니 해도 최후의 목적은 부모를 모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 가지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부모를 잃은 인간, 고아와 같은 인간, 과부와 같은 인간이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인생의 최후의 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차피 넘어야 할 삼팔선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넘어야 할 입장에 처해 있거든 넘자! 가야 되겠다. 가자!’ 할 수 있는 무리가 이 땅위에 나와야 합니다. ‘넘자! 세계를 위해서 나선 걸음이니 가정이 반대해도 넘자! 사회와 국가가 반대해도 넘자! 이 세계의 주의가 반대해도 넘자!’ 할 수 있는 그 기준이 되어 있습니까? 못 되어 있다면 패잔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이념에 젖어 있습니까? 아직까지 ‘내 아들딸, 내 아들딸’ 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은 다 지나갑니다. 모든 인류가 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처자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다 끊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운세는 몰아칩니다. 인간적인 정을 전부 다 믿을 수 없게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늘은 깨뜨려 버리기 위해 내모는 것이 아니라 깨뜨리지 않으면 수습이 안 되겠기에 내모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민주주의가 제국주의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보십시오. 악당들이 주권을 갖고 있으면 온 세상이 악당의 세계가 되겠으니,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깨뜨려서 민주주의를 세우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대통령으로 세워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이뇨? 여러분, 이러한 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하늘이 찾아 세우고자 하는 부모의 존재, 충신의 존재, 열녀의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각오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늘이 세워 주시는 세계의 부모 앞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온 이념이 통일이념입니다. 사정으로 통일하지 말고 심정으로 통일하자, 부모의 심정을 본받아 너도 나도 형제가 되어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따라갈 수 있는 표본의 인격은 어떠한 것이뇨? 누구를 터전삼아 부모의 그 심정을 증거할 것이뇨? 여기에서 예수님을 봅시다. 그는 이 땅을 소유하고 주관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배반당했습니다. 선민으로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사랑하는 열두 제자, 나중에는 세 제자까지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땅 위의 소망은 다 끊겼습니다. 땅에 와서 이루려 했던 소원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가지 붙들고 간 것은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찾아 세우려는 세계적인 부모의 심정만은 제가 붙들고 가겠나이다. 몸이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이 찾으시는 부모의 절개만은 제가 갖고 가겠습니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 예수였기에 사망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일지라도 복을 빌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적인 부모의 위치를 세우고 가신 예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예수님의 영적인 자녀입니다. 예수는 육신은 때려잡히고 영적으로만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육신까지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몸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부모의 피살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연이 찾아질 때까지 한스런 노정에서 탄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그립기 때문에 그 부모가 올 날을 위해 세계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주인공, 하나의 부모,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열매며 바라시는 목표물입니다. 여기에 그 부모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심정적인 후계자가 나와야 됩니다. 심정적인 후계자. 말만 하는 후계자 말고, 모양만 같은 후계자 말고, 좋아만 하는 후계자 말고 부모의 슬픔과 고통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 아버지 대신 고통하고 아버지 대신 슬퍼하면서 심정적으로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려고 허덕이는 후계자 말입니다. 그런 무리만이 하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9-32
우리가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성경에 아무리 능통하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수십 년 믿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싶어하는 절대적인 심정의 기반 위에서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음을 어느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자식? 자식이 문제가 안 됩니다. 처자? 처자도 문제가 안 됩니다. 자기의 형제 부모도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떠한 영광이나 권세도 문제가 안 됩니다. 일편단심으로 ‘제가 소유할 것은 당신뿐이며, 제 인식과 관념의 전체는 당신의 인식과 관념이옵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그런 심정적인 자녀를 찾아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이만큼 들었으면 ‘옳지, 세계는 그런 뜻을 이루기 위해 나가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되돌아와서 여러분 자신을 놓고 논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늘은 끊기를 바라는데 나는 붙들고 울고 있다면 그건 욕심입니다. 하늘은 내몰고 있는데 나는 안 가겠다고 하면 망합니다. 망해요. 망한다 말입니다. 두고 봐요, 안 망하나. 피압박 민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민족, 불쌍한 처지에 있는 우리 한국 백성이 살길은 단 하나 심정적인 주인과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부모, 처자도 잃어버렸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파탄되었습니다. 인연과 관계가 다 깨져 나갔습니다. 자식이 누구인지 부모가 누구인지 형제친척이 누구인지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왕지사 우리는 이런 환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청산하여 새로운 면으로 인계시키는 천적인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진대, 먹을 것이 없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모습이 초라하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단 한 가지 살길이 있나니 그것은 심정이 불타 올라서 하늘이 세우신 부모의 인연을 찾아 나가는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무리가 된다 할진대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심정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위로하며 한스러운 자기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이시여, 이러한 자리에 선 것도 감사하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불쌍한 자리에 있는 나를 이런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은 목적하는 세계와 인연맺도록 하기 위한 뜻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할진대, 그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적으로 볼 때 불쌍한 민족입니다. 두 사조의 틈에 끼여서 몰리고 찢기고 유린당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이 무심하게 불쌍한 자리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역사를 엮어 나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주의도 비참한 환경을 무대로 해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처참한 환경을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풍습과 제도와 권위로 천적인 심정을 잃어버리고 퇴폐한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형식화된 교단을 발판으로 해서 예수의 새로운 심정의 역사는 폭발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할진대, 부모가 없다고 탄식하지말고 내 환경에 무엇이 없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대신 새로운 이념의 부모를 내 부모로 삼고, 심정적인 이념을 내 소유로 하고 내 이념으로 삼도록 합시다. 그러한 기독교도들이 생겨난다 할진대, 그런 무리들로 말미암아 세계는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천적인 위신과 천적인 체면을 상실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에 배치되는 모든 것을 우리가 밟고 쳐갈기면서 행진의 일로를 걸어가 주기를 하늘은 바라실 것입니다.

9-34
기 도
변치 않는 사랑의 부모라는 이름이 어찌하여 이 땅의 인간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까? 한에 한을 품고 유린당하던 고비 고비의 역사적인 모든 슬픔이 지긋지긋하오이다.

당신도 그런 고비에서 눈물지으시면서 ‘오늘 이런 고비를 넘었구나. 내일은 저런 고비를 넘어야 되겠다. 이 해는 이런 고비를 넘고 이후에는 저런 고비를 넘어야 되겠다’고 하시며, 생애노정의 전부를 갈라 놓고, 때와 시기의 고비고비를 넘으시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30년 준비노정은 요셉 가정에서 목수로 대패질을 하고 까뀌질을 하시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사기가 충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선 때도 있었사옵고, 사망의 그늘 아래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유대 교단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시며 날카로운 저주의 말을 퍼부었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전부가 우연지사가 아니라 땅의 인연을 벗어나기 위한 필연적인 생애의 규칙에 의하여 행하신 것임을 알았사옵니다. 땅 위에 오셔서 세계적인 부모의 위치를 결정짓지 못하고 품을 수 있는 하나의 참다운 자녀를 세워 놓지 못하고 가신 그 한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될 때에 참다운 효자 효녀가 동행해야 할 것인데, 오른편 강도가 웬 말이며 왼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효자효녀를 갖지 못한 예수의 생애가 처량하였음도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신 하나님은 그 앞에 하나의 아들, 효자를 세워주고 싶었사온데 예수를 부모로 모셔야 할 이 땅위의 인간들은 예수 앞에 효자효녀가 못된 것이 탄식임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한맺힌 역사적인 슬픔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도 오늘 들어서 알았사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사망의 그늘에서 죄악의 자손으로서 살아 나왔습니다. 이곳이 저희가 머물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지음받던 그 자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나타난 그날부터 본연의 부모의 자격을 갖추고 살아야 했던 그 자리가 저희들이 머물 위치임을 알았사옵니다. 그 부모의 자리까지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가정을 거치고, 민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최후의 종말시대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천상천하의 승리적인 한 부모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 모든 원수의 무리를 부모의 심정적인 기준으로 심판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한날을 위하여 저희들의 마음을 반성하고 정비하여 승리의 나팔을 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 앞에, 잠들어 있는 이 인류 앞에, 탄식하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 앞에 새로운 경종을 울려 각성시켜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사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참다운 부모의 심정과 혈육적인 정에 화하여 형제의 인연을 노래하고, 가정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민족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그 기대(基臺) 위에서 세계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천적인 인연을 노래하여 최후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부모의 인연을 세웠노라 할 수 있는 천지가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야만 이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을 저희들이 배워서 알았사오니, 그 목적을 위하여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고, 이 시간부터 과거를 부정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운 자아를 세워서 내일의 생활을 가치있게 하기 위하여 나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을 듣고 마는 자들이 되지 말고, 느끼고 마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을 살려준 이 말씀이 심판날에 참소의 조건이 될 줄 알고 있사오니, 그 조건에 걸리지 않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나타날 영광의 한 때를 위하여 준비하는 저희들이옵고 각오한 몸들이오니, 심정으로 나타내어 아버지를 높일 수 있고 한 중심에 화하여 생활을 개척하고 빛낼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 한 자리에서 사탄 앞에 주인의 행세를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찾으시려는 심정의 동산을 복귀하여 세계 인류가 하나의 대가족을 이룬 형제로서 아버지를 부모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자유천지에서 하늘이 기뻐하고 만민이 기뻐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로부터 시작하여 부모, 민족, 세계, 천주의 기준까지 나아가야 할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이제부터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총진군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