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8 to 8-309: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1960.02.14 (일), 한국 전본부교회

8-288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마태복음 22:34-40

[기 도]

아버님, 이 시간 저희들 아버지 존전에 섰사옵니다. 영광스런 당신 앞에 저희 자신을 드러내었사오니 미비한 것을 폭로시키시어 당신의 빛 가운데 사로잡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당신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런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부르는 아버지 가운데는 여러가지 형태의 아버지가 있겠사오나, 저희들은 심혈이 동하는 마음과 심정에 어리어 ‘아버지 !’ 하고 부를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어떤 이름을 부르기보다도 앞서 심정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그런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생겨나고 땅이 생겨나고 인간이 생겨난 이래 그 하늘과 땅과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싶으신 진정한 아들 딸이 없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본연의 만물과 즐기고 화동하여 화할 수 있는 주인공이었던 아담 해와는 본연의 참사람이요, 인류의 참부모였사옵니다. 그런 아들 딸이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어 주고 얼굴을 만져 주는 한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니까.

아버님게서는 저희의 손을 지극히 거룩하게 지으셨사옵고, 저희의 몸을 지극히 선하게 지으셨사오나, 한스러운 타락의 근성이 저희를 사로잡은 그날부터 저희의 손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사옵나이다. 역사적인 선조들의 부족함 때문에 온 몸에 한스러운 상처를 입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러한 것들을 품으시고 본연의 참사랑을 그리시는 아버지 앞에 비록 보여드릴 수 없는 불충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저희를 그리워하며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애달픈 심정을 염려하고 대성통곡할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상처를 입지 않았던 본연의 손을 그리워하고 상처를 입지 않았던 본연의 몸을 그리워하고 죄에 물들지 않았던 본래의 마음을 그리워하며, 사탄과 인연되지 않았던 본연의 심정을 그리워할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참다운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사옵니다. 아버님, 얼마나 원통하시옵니까? 상처입은 저희들을 보시고 서러워하시는 아버님 앞에 몸 둘 곳을 몰라 하는 자식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심정으로 우러나는 본연의 사람을 보기 위하여 나왔사옵고, 심정 가운데 피어오르는 당신의 심정이 그리워서 왔사오니, 그러한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황공하옵나이다. 어린것들을 세우시고 염려하시며 외로운 길을 개척하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아버지, 이 날도 이와 같은 일을 계속하시는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통곡치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것이 항공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이 과거에 충성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 앞에 설 수 없는 흠이 많은 자신임을 통탄하고 이 한 시간 새로운 심정으로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그리워하시는 소원의 한 모습으로 설 수 없는 자신임을 마음으로라도 슬퍼할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성호(聖號)를 찬송하고 있사오며, 당신의 아들딸들이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을 뿌리며 외로운 형제를 생각하고 염려하며 호소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제가 무슨 말씀을 전하오리까? 이미 말씀도 많이 하였사옵니다.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아는 것을 지나 화(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일체의 정(情)에 잠기어서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지으신 만물을 품고 영원히 송영드릴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은 간격이 있는 자리에서 운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일체의 주의 주장과, 알고 있는 지식의 일체를 아버지 앞에 다 내어 놓고 본연의 심정으로 돌아가, 하늘의 움직임에 화하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움직여서, 본연의 성체(聖體)를 기준삼아 다시 빚어질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장중(掌中)에 쥐시옵고 사탄이 틈타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성삼위신이 승리의 방패로서 영광의 터전을 갖추어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8-290
말 씀
오늘은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8-290
천국과 타락인간
천국이라는 곳은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전체를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나라요, 본성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어떠한 사정을 가지고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깊이 스며드는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야만 소유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사정을 통하는 교회가 아니요 심정을 통하는 교회입니다. 사정의 인연을 넘어서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에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사정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 딸을 대할 수 있는 심정은 갖고 있으되 그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그 사람들을 찾아 세우는 역사를 하시는데, 그것이 구원역사요, 그 사람들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보내심을 입은 자가 구주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바라야 되겠고, 또 하나님의 심정을 바라기 전에 내 한 자신은 어떻게 살아나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먼저 모시는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높고 귀한 것을 대하여는 머리를 숙이고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했을망정 높고 귀한 하늘의 심정을 대하여 모시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지음받은 인간의 본연의 심정입니다. 그런고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모심의 생활을 해보지 못한 자는 천국과 하등의 인연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모시기 위해서는 모실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의 과정을 거친 후에는 모시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모시기 위한 준비의 과정을 거치고 모심의 생활을 거친 후에야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심정으로 모셨던 자가 가는 곳이 천국이예요. 모실 수 있는 준비와 모시는 생활을 찬양하며 높이 드러내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타락의 혈통을 받고 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전세계 인류가 심정을 다하여 하늘을 모셨던 한날이 있는가.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 아담 해와는 창조이념을 통하여 자랐으되, 심정의 인연을 세워 놓고 하나님을 모셔본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이 무엇인가.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모셔야 할 인간이 모실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것이요, 심정을 중심삼고 모심을 받아야 할 하나님께서 모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없는 것이 한이 아니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는 것이 한이 아닙니다.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한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아 나아가고 있느뇨? 하늘을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친 기쁨을 느끼어 이곳이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이요, 내 심정이 영원히 머물 수 있는 땅이요, 나의 생활 무대라고 자랑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을 찾은 사람이 역사노정에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8-292
어린양 잔치를 통해 본 하나님과 인류의 소망
우리가 믿고 있는 구세주 예수도 이 땅 위에 오셔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모셔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심정의 기쁨을 느끼며 화하여 들어가는 자리에서 주인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갖추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런 자리에서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이 땅 위에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도 심정의 터전을 갖추어 놓고 하늘을 모시는 생활을 해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신랑이요 우리를 대해서는 신부라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라 하였습니다. 심정의 인연의 터전은 무엇인가. 부자의 인연이요 부부의 인연입니다. 또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맺어지는 형제의 인연, 동포의 인연입니다. 이렇게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세계 인류는 어떠한 존재를 내세워야 될 것인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어떠한 사람을 세워야 될 것인가.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 횡적으로는 세계를 통하고 종적으로는 하나님을 통할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실을 통하고 종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통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이루어 놓고 그 가운데 참다운 아들 딸, 참다운 신랑 신부를 세워야 됩니다. 그런고로 하늘은 심정이 연결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의 아들 딸, 하나의 가정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끝날이 기쁜 날인 동시에 슬픈 날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심정이 통하는 사람은 기쁨의 선물을 받는 날이요, 심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의 선물을 받아야 할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오시는데 신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잔치는 신랑 신부가 상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한날을 위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섭리의 뜻을 따르는 신도들 또한 이 한날을 바라보고 싸워나오고 있습니다. 섭리의 목적, 섭리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단 하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랑 신부의 인연이 이루어지는 그 한때, 하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만물 사이에 끊어졌던 인연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할 수 있는 아들 딸을 중심삼고 다시 맺어지는 그 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함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모시기를 바라느뇨. 오시는 주를 모시고, 나아가 그 주가 모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의 소망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이 기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8-293
신랑을 모시기 위한 준비와 그 예물
그러기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주님을 모시게 될 그 한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역사였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도 모실 수 있는 내용을 알기 위한 준비요, 그리워하시는 하늘의 뜻을 알아 드리고 그 분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한 준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준비하여 나왔습니다. 신부로서 모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준비를 하되 어떠한 준비를 해야 되느뇨. 말씀의 준비도 아니요 믿음의 준비도 아니요 생활의 준비도 아닙니다.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부를 그리워하며 2천년 동안 찾아오시는 신랑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를 신부로 맞이하시기 위한 하늘의 그리움, 나 하나를 세워 신부로 만들기 위한 하늘의 수고와 사무침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러분, 느껴 보았습니까? 겉보기에는 초췌하고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하늘은 사모하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형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떠한 방식이 아닌 진정한 심정을 가지시고 우리를 그리워하시며 나오신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오늘날까지 섭리역사노정은 그리움의 심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랑을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기 전에 하늘은 몇천번 몇만번 그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준비하기 전에 먼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랑을 맞이하고자 하는 여러분은 사무치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자신인지를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운 주님, 심정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그 한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우리의 태도,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하늘을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심정이 가해 오면 가해 올수록, 여러분은 앞을 바라보고 오시는 주를 맞이하기 위해 소망하기보다는, 뒤를 돌아보고 오시기 위하여 싸우시고 우리를 준비시켜 나오시는 주를 위하여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 하나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고 허덕여 나오시기를 6천년, 사탄과 싸우시기를 6천년, 흠 없고 선하신 하늘이 흉악한 사탄의 참소를 받기를 6천년, 흠 없고 선하신 그 몸에 사탄의 화살을 맞기를 6천년, 어느 시대 어느 세기에도 하늘이 슬픔을 당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의 심정을 품고 품어 나오시면서도, 하늘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심정에 화할 수 있는 모심의 용사로 세우시기 위하여 찾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늘 앞에 나서기 위해 여러분이 준비한 예물이 무엇입니까? 6천년 동안 섭리해 가지고 남아진 기독교 신자들이 준비한 예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갖추었습니까? 하늘은 고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어떤 값진 금은보화나 진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정, 심정, 심정에 어리어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며 하늘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심정에 어리어 준비하는 자신이 되었다 할진대, 여러분의 눈과 귀와 입과 몸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심정을 통하여 보고, 심정을 통하여 듣고, 심정을 통하여 말하고, 심정을 통하여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심정을 통한 인연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주님과 더불어 보면서 모실 수 있는 그 한때,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주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 한때, 심정을 통하여 말하고 심정을 통하여 행동하면서 살 수 있는 그 한때를 그리워하며 하늘은 6천년 동안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귀와 여러분의 입과 여러분의 몸이 하늘과 심정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까? 이 눈은 보되 심정으로 인연되어서 만물을 보아야 되고, 이 귀는 듣되 심정에 인연되어서 부르짖는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되고, 이 입은 심정이 통할 수 있는 말을 해야 되고, 이 몸은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될 터인데, 아직까지 모심의 자리로 넘어 가기 전 준비과정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갖춘 심정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은 원하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손길에 만물이 어루만져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자녀로 말미암아 모든 아들 딸이 안겨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신부들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수 있는 아들 딸들 앞에 이 세계가 주관되어지기를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어마어마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이 내 일신만이 아니라 세계와 천주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주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 심정도 아버지의 것이요, 나의 의식과 직관과 감각기관 일체까지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가 느끼고 의식하는 전체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관(觀)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하늘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 우리는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찾아 헤매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전력을 다하여 하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의 길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강렬한 심정을 앞놓아 나가며 신념을 갖고 극복해 나갈 줄 아는 자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8-296
예수의 사정과 심정과 한
예수님이 사망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고, 그 힘의 중심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단 하나 심정뿐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심정의 역사를 인계받은 예수는 30여 년의 생애 동안 ‘한많은 4천년 역사야 가거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소망의 한날이여 오라’고 심중으로 심중으로 부르짖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찾아 헤매었습니다. 4천년 동안 심정을 다하여 준비한 신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을 택해 세우신 하늘의 슬픔은 무엇이었던가. 교단이 없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교인과 사두개교인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녹음 중단) 불쌍한 예수를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한 신부는 어디 갔는가? 없었습니다. 없었어요. 인류의 역사적인 슬픔은 여기에서 비롯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신부가 없었어요. 땀을 흘려도 그 땀을 닦을 손수건 하나 만들어 줄 신부가 없어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고, 입는 옷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탄세계의 사람들이 지은 옷을 입었으며, 밥을 먹되 사탄세계의 성별되지 않은 부인들이 지어 준 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거처할 곳도 없었어요. 원통한 일입니다. 분한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을 세워 준비시켰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고. 메시아, 즉 신랑되시는 예수가 오시게 될 때, 신부로 세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의 손수건도 한술의 밥도 한 벌의 옷도 한 간의 방도 한 그릇의 물도 모두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 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러한 자리에 한 시간도 있어 보지 못한 채이 땅 위에서 죽어가셨습니다. 서럽다 할진대 이 이상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으며, 통분한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통분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4천년 역사가 저끄러진 기준이 어디에서부터인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예수의 참다운 신부가 없는 데서부터 저끄러진 역사가 벌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한때 이런 기도를 해 봤습니다. ‘저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에 그 분을 제가 모시고 사탄세계의 어느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걷고 싶습니다’ 하는 기도를 했어요. 사탄세계의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것 말고 심정이 어리어서 씨를 뿌리고 거두어서 만든 옷가지, 심정의 준비를 갖추어서 만든 한벌의 옷을 이 땅 위의 어느 누가 해주었습니까? 못해주었어요. 그래 가지고 복받겠어요?

예수가 주라 할진대, 4천년 준비시킨 주라 할진대, 유대나라의 성전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성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성전은 예수의 것이요, 그 민족 또한 예수의 것이요, 그 백성도 예수의 것입니다. 교회의 무슨 제사장 서기관 할 것 없이 다 예수의 것이예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원통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예수의 행로에 이러한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셨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심정의 상대를 그리워하며 한을 남긴 채 하늘 땅의 인연을 붙들고 죽어가면서도 기도하던 예수의 마음을 누가 알았던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억울한 곡절을 품은 채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 부활하였으나 그 곡절을 알아주는 자 없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풀겠어요. 풀래야 풀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대하여 맺혀진 곡절을 인간이 알아주지 못하니 풀래야 풀 수 없었어요. 그런 심정을 갖고 부활하셨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 앞에 나타나서 ‘주여 ! ‘하며 붙들려 할 때에 만지지 말라 하시며 막으셨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가신 뒤 2천년이 경과한 오늘까지 그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누구이며, 변화산상에서의 그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참목자와 거짓목자를 무엇으로 판별하겠습니까? 심정이 사무쳐 하늘의 심정을 꿰뚫고, 심정이 사무쳐 천륜의 심정을 꿰뚫을 수 있는 내용을 갖지 않은 자는 참목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분산되어 싸우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가? 심정이 희미해진 연고입니다. 사람이 못나고 시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났든 못났든 유식하고 무식하고를 막론하고 갖추어야 할 바의 심정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주님은 심정의 행로를 걸어가셨고 이제 오실 때에도 심정의 행로를 따라 걸어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8-298
하늘이 찾고자 하시는 것과 신부의 길
그러면 오시는 주를 모시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6천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무슨 길을 닦아야 되는가. 아무리 억천만금을 쌓아 놓아도 하늘은 그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호화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대로 취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 들이 어떤 금력을 갖추어서 ‘그것이 하늘 것이다’ 해도 하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엇부터 갖고자 하시는가. 하늘은 어떠한 물건부터 가지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이 갖고자 하시는 것은 심정입니다. 심정이 주도적인 권한이요, 심판의 기준이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하늘은 무엇을 찾기 위하여 찾아 헤매시고 허덕여 나오시는가. 돈을 찾기 위하여? 사람을 찾기 위하여? 천만의 말씀입니다. 준비된 심정의 소유자를 찾기 위하여, 심정을 통하여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자를 찾기 위하여 하늘은 6천년 동안 허덕여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부가 뭐예요? 신부는 신랑을 위하여, 신랑이 생각하는 일체를 구비한 하나의 완전한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신부는 실체로서의 몸과 마음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응하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신부는 자기에게 속한 것도 자기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이로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노정에 있는 기독교의 사상은 신랑 신부의 사상을 말해 줍니다. 신랑을 모시기 위해 준비하는 처녀와 같이, 있는 정성을 다하고 또 그 몸에 사무친 정열이 피와 더불어 끓어오를 때에 비로소 그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첫번째요 마지막 것으로서 품어질 수 있는 자리를 찾아나아가는 것이 신부가 가는 길입니다.

그 심정 앞에는 신부의 모든 것이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을 내놓고 나아가는 데는 자기의 소유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존중히 여기고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만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 때, 한 시간이라도 그 분을 모시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은 각성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시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는 신부들로서 유대교인들은 무엇을 준비했던고. 만일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러한 심정을 알아 준비한 자가 있었다면, 예수를 말구유에 누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구세주가 30평생의 목수 생활이 웬말입니까? 하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던 동방박사는 어디 가고, 세례 요한 가정은 어디 갔으며, 안나는 어디 가고, 마리아와 요셉은 어디 갔기에, 하늘의 아들 예수가 거지 중의 왕거지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한분을 위하여, 그 한분의 안식처를 위하여, 그 한분의 평화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자리에 나가는 한이 있다 해도 그것을 책임지도록 그들을 택해 세워놓고 아들을 보내셨으나 어느누구도 그러한 하늘의 뜻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증거는 해 놓고 다 자기 멋대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만일에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모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귀한 몸이니 당신의 생활적인 것 일체를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땅 위의 슬픈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돈이 없어 염려되면 그것을 내가 책임지겠고 입을 것이 없어 염려되면 그것도 내가 책임지겠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나이다’라고 한 사람이 있었어요?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를 의심했고 예수의 동생들도 비웃었습니다. 형님을 보고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라고 하며 동생들까지 비웃었던 것입니다(요 7:3–5). 이게 웬말입니까?

여기에 모인 여러분, 우리는 예수시대를 생각하며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니 예수를 땅에 보내기 전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면서도 그 고통을 참으시던 하나님,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고 안타까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느라 수고하시던 시대로부터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 4천년 동안 슬픈 고비고비, 예수님의 30여 평생의 슬픈 고비고비, 예수님 이후 성신이 강림하여 가야 했던 2천년 간의 슬픈 고비고비를 대신하여 눈물지으면서 ‘선조들의 불충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선조들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선조들의 죄악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모습, ‘우리 선조들은 오신 분을 그렇게 대접하였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대접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으면서 자기 일신의 어떠한 손해와 피해를 개의치 않고 허덕이는 하나의 모습, 하나의 무리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예수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성신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삼위신(三位神)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왔다 갔던 역대의 선지선열들도 그를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눈물로 증거받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눈물로써 증거할 수 있는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모습을 갖춘 자가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가, 혹은 성신이 심정의 준비를 갖춘 자라고 눈물로써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역사적인 선조들이 ‘우리들도 하지 못한 일을 그대들이 해 주었다’하며 눈물지을 만큼 준비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할진대 망해야 됩니다. 망해야 돼요. 기필코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어떠한 문화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상도 아닙니다. 사상을 움직이시는 하늘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서지 않는 한, 역사는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최후에 인류 앞에 남아질 것은 어떠한 문명도 아니요, 어떤 형식적인 종교단체도 아니요, 자기의 주관적인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심정이란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에 앞서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격의 주인공이 이 땅 위에 나와야 이 땅은 수습될 것입니다. 그런 사명자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8-301
최후에 인류 앞에 남아질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어느 한때 눈물어린 심정으로 손수건 하나라도 만들어 봤습니까? 여기 있는 부인들, 만들어 보았어요? 바늘을 잡고는 ‘이 바늘이 진정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성도의 손길을 거쳤으면 좋겠구나. 원통하다’하며 ‘아버지여, 저에게 바늘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저의 손으로 정성어린 바늘을 만들어서 손수것을 지었으면 좋겠사오나 그렇지 못하오니, 만들어진 바늘로 심정을 다하여 손수건을 만들겠사옵니다. 받아 주시옵소서’하고 그 바늘 귀에 실을 꿰어서 한폭의 천에 한땀 한땀 떠갈 때, 심정이 어린 가운데 ‘이 바늘의 움직임에 역사적인 부인들의 원한이 풀어지게 해 주시옵고, 신랑 되신 예수의 그리움이 해원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해보셨어요? 세상에서 백년도 같이 못사는 자기 신랑을 위해서는 별 일을 다했을 것입니다. 별의별 일 다 해봤을 거예요. 사랑하니 뭐 어쩌니 하면서 말입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부로서 준비하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은 비록 제한된 환경이요 그 몸은 비록 한 개체라 할지라도, 그가 머물러 있는 환경은 세계가 연하여 있고 하늘 땅이 연하여 있으며, 그가 서 있는 곳은 하나님을 대신한 자리이며 예수를 대신한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에 어리어 ‘주가 오실 때에 저는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가진 물질이 없사옵니다. 준비한 아무 것도 없는 이 불초한 몸은 심정에 어린 이 한 조각의 손수건이라도 주 되신 신랑 앞에 드리고 싶사옵니다’ 라고 한다면, 하늘은 하늘 땅의 좋다는 것을 다 갖다 주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늘은 찾고 계십니다.

신부는 어떠한 신부여야 하는가? 호화찬란한 주의 영광을 바라는 신부가 아니요, 주로 말미암아 천국 가겠다는 신부도 아니요, ‘내가 지옥에서 선의 발판이 될 터이니 나를 발판삼아 이 땅에서 천국의 심정을 갖고 사시옵소서’ 하는 신부, 그리한 신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지옥 가야 됩니다. 천당은 무슨 천당, 지옥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우리는 예물을 바쳐야 되겠습니다.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처참한 예수 앞에도 점장이었던 동방박사 세 사람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거늘, 여러분은 오시는 신랑 앞에 드릴 무슨 예물을 갖추었습니까? ‘아버지여 !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바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하오니 제가 먹는 한술의 밥이라도 제가 먹기 전에 먼저 드시옵소서. 한 벌의 초라한 옷이라도 제가 입기 전에 먼저 입으시옵소서. 움막집일망정 제가 거하기 전에 먼저 거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심정만을 하늘은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물질은 억천만금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으로 그리워하는 세계는 본연의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으로 그리워할 때 주님은 그 자리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예수를 믿었으니 남들이 다 지옥 가도 나는 응당히 천당 가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러기 전에 그는 먼저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을 모른 것을 슬퍼해야 됩니다. 심정을 통하여야만 모실 수 있는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신다 해도 그 주님이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갖추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됩니다. 주님 앞에 드릴 하나의 물질을 갖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됩니다. 보이는 만상 전체가 슬픔의 상징물이 되어 바라보고 슬퍼하지 않을 물건이 없는 것이로되, 우리는 그런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염려하는 마음이 앞놓아간다 할진대, 주는 그것을 바라보시고 그 심정 앞에 세계를 잃어버리고 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너만은 잃을 수 없다고 하시며 찾아 주신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뒤집어진다 할지라도 너만은 사탄세계에 둘 수 없다 하시며 찾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이 2천년이나 연장된 것은 역사노정에 그런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 우리는 마음으로 울어야 되겠습니다. 심정으로 울어야 되겠습니다. 뒤를 돌아보아도 눈물이요, 앞을 보아도 눈물이요, 좌우를 바라보아도 눈물이요, 상하를 바라보아도 눈물입니다. 죄된 자신을 위하여 수고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자기의 존재의식을 잊어버린 자리에서 먹는 것을 잊고, 입는 것도 잊고, 위신과 처지를 잊어버리고 하늘 앞에 황공히 엎드려 통곡하는 시간이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의 노정에 들어서는 첫단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에 사무치고 그러한 심정에 어우러져 신앙의 충격을 받지 못하는 자는 오시는 주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8-303
주님 앞에 신부된 자의 생활 태도
우리는 돌아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이 땅의 구주요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 만왕의 왕되시는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신부의 터전은 어디 갔던고. 신부와 더불어 행복의 노래를 부르며 만우주를 화동(和動)시켜 하늘의 영광을 노래하여야 할 예수가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던 하늘의 억울함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그 길을 가면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였으며, 의붓자식으로서 형제로부터도 경칭을 받지 못하고, 이웃 친척에게까지도 손가락 질을 받았습니다. 감정이 같았고 좋은 생활환경을 그리워하는 심정은 같았기 때문에 그의 슬픔은 누구보다 컸고 고통 또한 누구보다 많이 느꼈습니다. 교회로부터 몰리고 제사장들로부터 몰림을 받은 예수가 감람산 기슭을 거닐 적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초초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30평생의 생애노정을 걸으시던 예수의 초초한 모습에 비하면 여러분의 환경은 너무나 훌륭 합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것이 갖추어져 있어요. 여러분은 억울하면 그 억울함을 표시할 수 있고 기쁘면 그 기쁨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식과 외식을 모르던 예수는 분한 일이 있어도 그 분함을 토로하지 못하고 억울한 사정을 한번도 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슬픔 중의 슬픔이었습니다. 어느 한 때 기쁜 표정을 해 보았느냐. 못해 봤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밥을 먹을 때도 신랑 대신 먹어야 됩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타지(他地)에 보내 놓고 한술의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한술의 밥을 놓고도 ‘주여, 이러한 식탁을 대해 보셨습니까? 할 수 있고, 한벌의 옷을 입을 때에도 ‘주여, 이런 옷을 입어 보셨습니까?’할 수 있으며, 어떤 즐거운 자리를 갖게 될 때에도 ‘주여, 이런 자리를 가져 보셨습니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시려는 신랑은 그런 환경을 가져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의 생활적인 감정에 화하여 두터운 심정의 인연을 가질 각오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없습니다. 어떠한 목자가 필요없습니다. 성경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편지예요. 심정적인 인격자를 기르기 위하여 남겨 놓은 편지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심정이 기울어지는 자리에서 한 가지 물건을 보고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어릴 수 있는 마음을 갖고, 그 물건을 쥐기 전에 ‘주여’ 밥을 먹기 전에도 ‘주여 !’, 옷을 입기 전에도 ‘주여 !’ 자리에 눕기 전에도 ‘주여 !’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부가 있다 할진대 신랑은 그 신부를 찾아 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준비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곳이요, 모시는 생활을 한 것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 천국은 어떠한 자가 가는 곳인가. 주를 믿고 복받기 위하여 복을 앞세워 나가는 자가 가는 곳이냐? 아니예요. 천국은 모시기 위하여 심정적으로 준비하는 생활을 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준비하는 기간에 죽는다 해도 모심의 생활을 남기고 기쁘게 갈 수 있는 자가 가는 곳이예요. 거기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한 후에는 모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준비하는 목적은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 모심의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모심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 환경을 더듬어 살펴보십시오. 생활의 내막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활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제 우리들이 모시는 생활 가운데 생각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주를 대할 때는 이렇게 대해야겠다 하는 준비를 해야 됩니다. 주를 모시는 준비의 생활을 해야 돼요. 모시는 데는 저 천상에 가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모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 모셔 보았어요? 주님의 얼굴은 어떠하며, 주님의 몸은 어떠하며, 주님의 코는 어떠하며, 주님의 웃으시는 눈은 어떠하며, 주님의 음성은 어떠하며, 말씀하시는 주님의 입은 어떠하며, 주님의 손과 모든 태도는 어떠한지 아세요?

8-305
심정의 세계
심정이 앞놓아 가는 곳에는 사람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조화의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심정은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여 자식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인데 초자연적으로 일어나요. 심정에 사무치면 그렇게 돼요. 그러한 심정은 우주를 포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는 예수도 끌어올 수 있어요. 그런 심정에 사무치게 되면 관계가 없는 주님같지만 관계되어 있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연이 없는 것 같은 주님이 인연을 갖추고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를 만나게 될 때에 주가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준비하고 갖추어서 모심의 생활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랑이 신부를 찾아나오기 위한 편지체로 쓰여진 성경의 말씀에는 암호가 많습니다. 왜 암호로 말씀했는가? 심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누구나 다 풀지 못합니다. 못 풀어요. 신랑 신부만이 풀 수 있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한 자만이 풀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풀게 돼 있어요. 여기에 있는 암호의 정체가 무엇이뇨? 신랑이 올 수 있는 문을 여는 비결인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어린아기를 품고 젖을 먹일 때나 그 자식의 머리가 세어서 백발이 되었을 때나 같습니다. 그 심정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성경에 숨어 있는 모든 심정의 근원을 헤쳐내야 되겠습니다.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데는 학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암만 해석해도 학설은 지나가고 지나갑니다. 심정은 논리로써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론으로도 체휼할 수 없어요. 체계로써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심정은 천륜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심정의 흐름과 느낌을 갖고 해석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학박사가 주장하는 현대의 신학사조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심정의 세계는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왈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합니다.

심정에는 지나갈 수 있는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있는 곳은 주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성신도 지나갈 수 없어요. 역사적인 철인(哲人)도 지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 인연을 갖춘 민족일수록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거예요. 민족정신이 나라를 위하는 심정의 선(線)에 가까이 스며들어갈수록 그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분립되고 분산되는 때에는 천륜이 지나가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편단심의 동기가 되는 것은 심정입니다. 일편단심, 그것은 결과입니다. 일편단심이란 명사를 세우기 전에 심정, 이 심정을 지닌 자라 할진대 그는 하늘과 떨어진 지상에 있을망정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자리에 처하여 있을망정 행복한 자리에 있는 것임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갖추어가는 과정에 있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아브라함 앞에 나타날 때 ‘아브라함아, 너는 이러이러했구나’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인은 저나라의 아브라함에게 직접 명령도 합니다. 모세에게 명령도 합니다. 12사도에게 명령도 합니다. 심정세계에서 반응된다 할진대 지금부터 4천년 전의 아브라함을 그 심정세계에 몰아넣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들은 심부름꾼입니다. 사도를 대하여 신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와 신부, 누가 더 높은가. 신부가 높습니다. 사도가 신부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8-307
천국은 심정으로 모심의 생활을 하는 자가 가는 곳
역사상의 사도 바울! 물론 훌륭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사도 바울에게까지도 ‘오냐!’ 할 수 있는 신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가 나와야 됩니다. 땅 위에서 과거에 왔다갔던 사람들을 대하여 명령할 수 있고, 땅 위에서 심정의 인연을 가진 자를 지배할 수 있고, 미래에 심정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자격자라면 당당코 신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이러한 크리스찬,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 딸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을 말하면 아브라함의 심정을 느낄 수 있고, 모세의 심정을 말하면 모세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예수의 심정을 말하면 예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말하면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하여 느낄 줄 아는 하나의 모습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주님의 재림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해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지상에 천국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어떠한 곳인가? 모시기 위한 준비에 합격한 자와 모시는 생활에 합격한 자가 가는 곳이거늘, 모심을 위한 준비와 모심의 생활을 만우주에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천국 가서는 무엇을 하는지 알아요? 그저 놀고 다니는 곳인 줄 알아요. 천만에요. 놀고 다니려면 놀고 다닐 수 있는 과거의 준비적 조건과 생활적인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건 뭐 아무것도 안 하고 복 달라고 기도만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가다가 힘들어하는 주된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7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복달라고 하는 게 참된 신앙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이 땅위에 있는 27억 인류는 6천년 동안 내려온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이 27억의 인류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의 기준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세계와 절대 인연지을 수 없습니다. 불쌍한 거지를 보고 가슴이 아파 견디지 못하고,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을 보면 자기가 잘 입고는 못 견디고, 못 먹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못먹고, 자기 일신은 어떤 편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마음을 여러분은 가져야 합니다.

8-308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우리
현재 인류의 심정은 6천년 역사의 반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인 의분을 품고 마음을 앞놓아 통곡하는 생활과정을 거친 자만이 역사적인 심정을 대할 수 있는 동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안 나타나 있지만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 그 중에서도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세계만민까지 불쌍히 여기신 예수였습니다. 하늘은 그런 자를 세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도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사탄권내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원수 앞에 맞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편들어 애급인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급을 미워하는 마음보다 앞선 기준에서 쳤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어떤 행동을 한다 할진대 하늘은 그것을 죄로 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죽였다 해도 심정을 앞세웠다면 그것은 천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참소할 수 없어요.

애급에서 가나안 복지로의 복귀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유리고 객하다가 남아진 무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7족을 다 죽이라 하셨습니다. 소탕하라 하셨어요. 그런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을 막고 반대하는 무리를 들이 쳤으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할 수 있는 자격자는 그러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고대하십니다.

끝날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을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 심판할 수 있는 무리는 어떤 무리이뇨. 당연히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하늘의 원수요, 6천년 우리의 선조들을 유린해 온 사탄, 그들을 대해 하나님은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억울하셨겠습니까? 복받쳐 오르는 사무친 심정을 중심삼고, ‘용서할 수 없다’ 하며 칠 때에 사탄도 ‘옳소이다’ 합니다. 그런 심정을 갖지 못한 자는 공의의 법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몰림의 자리에서도 붙들고 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에서 핍박을 받고, 형제에게 몰림을 당하고, 나라에서 쫓김을 받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하나는 심정입니다. 역사가 몰라봤던 심정, 시대가 몰라봤던 심정, 땅이 몰라봤던 심정이 하늘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 심정이 세워 지는 날, 하늘과 세상은 갈라질 것입니다. 그 심정을 붙들고 기뻐하는 날 세상에 슬픔과 고통은 끝날 것입니다. 그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여 !’ ‘아들아!’ 할 수 있는 날, 그 심정을 붙들고 ‘신랑이여 !’ ‘신부여 !’ 할수 있는 그날엔 세상에 천국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영생복락의 세계가 건설된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심정을 통하여 모시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요, 심정을 중심삼은 모심의 생활을 통하여 사탄을 치고 넘어서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8-309
기 도
말씀을 듣고 나니 눈이 물커지도록 울 수 있는 마음이 그립사옵니다. 하늘은 자기의 의식과 감정을 잊어버리고, 또 바울처럼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른 채 자기의 위치를 잊어버린 자리에서 역사를 붙들고 시대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애절한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3천만 민족을 지배할 자는 호화찬란한 고래등 같은 집에서 향락하는 사람, 자기의 명망과 권세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는 자의 눈물의 친구, 억울한 자의 눈물의 친구, 원통한 자의 눈물의 친구, 형형색색의 환경에서 눈물로 품어 줄 수 있는 친구라야 함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그러한 분을 통하여 천지운세나 인류역사는 전환되고 새로운 역사는 인계되어 내려와 하나의 기준에 연결된다는 것을, 아버님, 이 시간 저희들이 새로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어느 한 때 민족을 원하여 울어봤습니까? 어느 한때 형제를 붙들고 통곡하여 봤으며, 더우기 어느 한 때 아버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통곡하여 봤습니까? 그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세상은 불쌍한 세상이요, 괴로운 세상, 눈물어린 세상이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거늘 이 땅 위에 사는 저희가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사오며, 하나님이 눈물의 길을 가고 계시온데 성도가 어찌 안일한 생활을 하겠나이까 ?

눈물 흘리는 성도, 눈물어린 가슴을 조이며 사는 성도, 그들의 모습에는 무궁한 아버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심정과 연결하여 하늘의 무리가 되고 하늘을 위하여 투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무리가 예루살렘 성전 외로운 다락방에 있었다 할진대, 예수는 죽지 않았을 것이요, 그러한 사람이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예수는 만민 앞에 몰리지 않고 개인적인 환경에서부터 남모르게 가정적인 기준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몰림을 받던 예수가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몰리고 형제들에게 몰림을 받던 예수께서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고 하시던 심정을 감히 알만 하옵나이다.

심정이 상속되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저희들, 이제는 주와 더불어 생활하며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한날을 그리워하오니, 약속의 하늘이시여! 사랑의 하늘이시여 ! 기쁨의 하늘이시여 ! 이끌어 주시옵소서. 과거에 그러하셨으니 오늘도 그러하실 것을 저희가 아옵나이다.

외로운 길을 걷는 무리들을 그러한 자리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인 것을 저도 알고 이들도 알고 있사오니, 하늘을 아는 저희들이 아버님을 모시고 하늘을 높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성을 다하는 마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도 부족한 마음, 아버님을 사랑하고 사랑해도 부족한 마음으로 몸으로 머리 숙일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 딸을 하늘은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또 그러한 인연을 가져야 할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 딸들, 오늘부터 과거의 못된 것을 탄식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갖출 바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보충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남아 있으니 그 길을 통하여 천상을 소유할 수 있으며, 주를 모실 수 있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아버지의 위업을 상속받는 늠름한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허락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마음을 획득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만은 갖고 나가지 않으면 최후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의 모든 것을 아버지, 받아 주시옵소서. 천국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심정으로 모셨던 자의 것임을 말씀을 듣고 알았사오니, 역사는 피어려 있고 시대는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 잠든 시대를 깨우고 역사의 사실을 가려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일으킬 수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심을 감사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