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9 to 10-82: 답답하고 민망하신 예수

답답하고 민망하신 예수
1960.07.03 (일), 한국 전본부교회

10-49
답답하고 민망하신 예수
마태복음 21:12-22, 26:36-46 누가복음 12:49-53

[기 도]

아버지, 저희들은 남은 생애 동안 어떠한 환경이라도 아버지와 같이 갈 것을 마음으로 맹세한 무리이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 살피시사 장중에 쥐신 바에는 한 생명도 놓지 마시옵고, 허락하신 그 곳, 축복하신 그 자리까지 한 생명도 떨어지지 않고 각오하고 맹세한 바를 다 이루어 하늘 앞에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단에 섰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배우고 닮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옵니다. 성경 말씀을 보니 말씀과 더불어 이 땅 위에 사시던 예수께서는 과연 불쌍한 생애 노정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 인류가 의지해야 할 천적인 인연을 갖고 오신, 이 땅을 책임진 분이었기에 그가 단 하나 이 땅 위에 세우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의 심정뿐이었음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가 눈물지으신 것도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한 것이었고, 그가 굶주리는 자리에 처한 것도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생애 최후의 한 시간을 바라보면서 비장한 각오와 더불어 불타오르는 심정을 갖고 나선 예수님의 발걸음이 겟세마네 동산에 머물게 될 때, 천지는 서러움에 잠기고 하찮은 미물까지도 예수의 심정을 헤아리는 비장한 자리에 있었으나, 책임을 다하여 만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인간들은 예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해 같이 서러워하지 못한 사실을 아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왔던 메시아를 그 같이 대접하여 천적인 인연을 끊어 버린 억울한 사실을 저희들, 이 시간 다시 한번 상기하여 2천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던 제자들의 모습을 회상하는 동시에 저희들 자신이 그와 같은 자리에 선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들이 되겠는가를 생각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 은사가 저희들의 심정 깊이깊이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든지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심정 심정이 통하고 마음 마음이 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과정적인 입장에 있는 저희들이 하나의 인연과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심정을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말씀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심정 앞에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시고 아버님의 뜻으로만 움직이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외로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과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일률적인 축복의 손길을 그들에게도 펼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이시간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10-50
말 씀
오늘은 `답답하고 민망하신 예수’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0-50
불행으로 출발한 인류역사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누구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온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인류 전체의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어떠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아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류와, 더 나아가서는 나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계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지금까지 항상 기쁨의 자리에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정에는 아무런 고통도, 근심도, 슬픔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하여 한을 품고 계십니다. 진정한 사랑의 심정을 가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창조이념과 그 이념을 통하여 바라보고 경륜하셨던 그 원칙과 이념을 포기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대하여 한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인류역사가 행복으로 시작하였느냐 불행으로 시작하였느냐 할 때에 행복으로 시작하였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더우기나 우리들 개체에 육체적인 고충과 정신적인 고충이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인간 조상이 행복의 길을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불행의 길을 출발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기쁜 모습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어 있느냐 할 때에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만물이 인간의 주관을 받게 될 때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 것인가? 즉, 만물은 어떠한 주인공을 맞고 싶어할 것인가? 무한히 행복스럽고 무한히 자유스럽고 무한히 영광스런 모습을 갖춘 주인공을 맞고 싶을 것입니다. 만물은 인간이 자기들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애당초부터 행복이라는 명사나 자유나 평화라는 명사가 아닌 불행이라는 명사를 중심삼고 출발한 인간들입니다. 그런 연고로 제아무리 호언장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물 앞에 나타날 때에는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자증(自證)해야 할 한스러운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을 대표하여 우리를 내세우려 하셨던 천륜앞에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자들이요, 나아가서는 심정적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어서 온 피조만물 앞에 내세워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이 있음에 틀림없거늘, 그 아버지의 심정적인 인연 앞에도 설수 없는 부끄러운 자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0-52
자신의 한스러움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하나님
불행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불행으로 종결되어야 할 인간이지만, 이러한 인간을 붙들고 행복의 곳으로 이끄셔야 할 하나님은 행복할 리가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천년 동안 인류를 이와 같은 불행한 자리에서 이끌어 내지 못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무한한 고통을 느끼시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느끼는 불행, 혹은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인 불행이요, 개인적인 슬픔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하나님은 오랜 역사를 통해 행복의 동산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지 않는 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책임을 지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시는 분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고통과 슬픔을 뼈저리게 당하시는 분이며 그 사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도의 길을 찾아나오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나온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고통이 있을 적마다 `하나님, 이 고통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습니다. 슬픔이 있을 적마다 하늘 앞에 `이 슬픔을 당신이 맡아 주관하시고 나를 평안한 자리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종교인들이 이렇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참으로 불쌍하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사정과 불쌍한 심정과 불쌍한 마음을 갖고 계시되, 타락한 인간 앞에 자신의 불쌍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요, 타락한 인간들 앞에 당신의 한스러움을 나타내고 싶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 이 세상을 사탄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탄 앞에 당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사탄의 주권내에 있는 수많은 인류 앞에 당신의 고통과 처참한 사정을 나타내지 않으신 채 섭리해 오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간곡한 소망이 있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알아야 할것은, 이같이 고통스럽고 처참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소원이 있어서 뜻을 따라나가게 될 때에도 이러한 하늘 앞에서 자신이 뜻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만일 과거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 중에 이러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짊어진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무감에 불타서 민족을 향하여 외친 자가 있었다 할진대, 그는 민족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을 모함한다 하더라도 하늘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왔다 갔던 선지자들은 때와 시기를 잊어 버리고 하늘을 배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동기와 원인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은 언제나 기쁜 자리에 계시고, 우리의 소원을 전부 이루어 주어야 할 자리에 계신다고 생각한 데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선지자들이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 길을 역행(逆行)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이 자신보다 더 불쌍하고, 자신보다 더 억울하고, 자신보다 더 외롭고,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생활의 분위기를 잡고 생활적인 감정을 주관해 나왔던들, 배반이나 배척이란 단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왔다 갔던 선지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항상 행복과 평안의 근원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적인 오점을 남긴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정을 말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여 왔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떻고, 하나님의 사정이 어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고, 하나님의 사정을 몰랐던 선조들 앞에 항의해야 할 때는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난 우리들은 하나님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땅 위의 인류 앞에 새로운 봉화를 들고 나서야겠다는 의무감에 불타야 하겠습니다.

10-54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이제 역사적인 전체의 노정을 책임지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한번 회상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어찌하여 유대나라의 왕실이나 대제사장의 집에 보내지 않으셨는가? 뜻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러한 자리에 세우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환경 가운데 세우시지 않았던고?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 위에 세워야 할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슬픔을 인간들에게 소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로움과 곡절을 품고 이 땅에 오셔서 4천년 동안 인간들에게 통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외로움과 곡절을 만민 앞에 통고해 주기 위해 오셨던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메시아를 보내마고 약속을 하시고 메시아를 보내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준비하게 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오실 때 그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기 위함이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살 때에 같은 심정으로 의논하고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무리들을 찾아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사정을 통하고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무리가 있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을 들이는 제사장이 있었습니까?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습니까?

천적인 심정을 그 마음에 품으면 품을수록, 세상의 모든 사리를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천륜을 자기 일신에 지니고 있다는 책임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예수님의 시선과 감촉 속에는 하나님을 대신해야 한다는 심정에 사무쳤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당신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통고하지 못하신 하나님께서 4천년 만에 당신의 심정을 통고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를 보냈셨으니,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고대하신 이스라엘 민족은 그 예수님 앞에 가서 `예수님이여, 당신께서 마음 깊이 체휼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며 거족적으로 호소하고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기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10-55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과 비장했던 예수님의 생애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고, 믿을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믿어 주려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민족이었고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믿을 만한 민족이 되지 못하셨습니다. 이 한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미친 것을 우리는 절통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품고 오신 예수님이었지만, 그는 태어난 그날부터 하늘의 심정과 사정을 말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붙안고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당신의 사정과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만천하 앞에 인간을 내세워 축복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은 어느 한때에 자유스럽게 그 민족 앞에 나타나시어 행사해 본 적이 없고, 자유스럽게 하늘의 모든 비밀을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무수한 곡절이 있었으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의 모든 곡절을 말하지 못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4천년 동안 구원섭리를 해오신 하나님의 슬픔을, 모든 역사적인 서러움을 해원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을 저버렸던 모든 슬픔의 곡절을 예수님 한 분을 통해 풀고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민족 앞에 하늘의 사정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에 섰었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유리(流離)하는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홀로 천적인 전체의 인연을 품고 땅 위에 오셔서 하나의 관계를 맺어놓아야 했던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는 비장한 생애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비장하였습니다. 하늘을 향한 그의 심정은 때와 시기가 지날수록 두터워졌고,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한순간도 하나님의 심정을 잊어버릴 수 없었고, 한순간도 아버지의 사정과 뜻을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자유롭게 행동한 적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요셉의 가정에서도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못 하였습니다. 행복한 생활을 못 하였습니다.

기쁨의 생활을 못 하였습니다. 환경이 그러하고, 대하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국가적인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마음으로는 무한히 자유스럽고 싶고, 무한한 영광과 은사의 자리에서 만민을 거느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참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었지만 그도 인간인 연고로 슬픔을 알았고, 외로움을 알았고, 고통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빼놓으면 예수님에게도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을 모신 그날부터 자기의 뜻과 자기의 느낌, 그리고 자기의 모든 환경을 개의치 않고, 세상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든 자신이 짊어진 책임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일생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셨겠습니까? 무한히 불쌍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님은 민족 앞에 나타날 때 비장한 각오를 했습니다. 이미 일단 출발한 후에는 일보의 후퇴도 없다는, 죽음의 길이 가로막히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물러설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10-57
예수님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
오늘 본 성경 말씀 가운데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굶주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요, 4천년 동안 선민이 바라던 소원의 실체요, 천적인 사정과 천적인 심정을 품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기뻐하지 않는 한 땅 위의 어떠한 존재도 기뻐할 수 없고, 그분이 행복하지 않는 한 땅 위의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분이 영광을 받기 전에는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영광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분이 기뻐하기 전에 기쁘기를 원했고 그분이 영광을 받기 전에 영광의 자리에서 즐기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권세를 갖고 호령하기 전에 시대를 움직여 나오던 주권자들이 그분 앞에서 호령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참다운 자유의 한 날을 찾기 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참다운 한사람을 세워 자랑하기 위해 나오고 있습니다. 참다운 한 분을 세워 역사가 생긴 이후 제일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참다운 한 분을 세워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예요?

그분이 주권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행사하는 자는 전부 역적입니다. 그분이 기뻐하기 전에 먼저 영광의 자리에 서는 자는 하늘로부터 어느 때든지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화와 행복과 이상은 하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심정으로 그리워하고 소원한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무엇일것인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자유를 그리워하고 소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행복, 하나님을 중심삼은 평화,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권의 세계를 소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런데 역사가 시작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수천년 역사는 경과하였으나, 하나님이 보시고 ‘오냐, 너는 자유의 왕임에 틀림없다. 너는 내 자유의 이념을 갖고 살기에 합당한 자요, 행복과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살기에 합당한 자요, 온천주가 기뻐할 수 있는 자다.’하시며 기쁘게 내세울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 있었어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하나님의 사정의 있다면 그 하나님의 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하나님의 심정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천지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간들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으면 설령 행복하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행복이 아니요, 이 땅이 평화스러운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것을 알았느뇨?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알았느냐? 아닙니다. 메시아를 맞기 위해 준비하던 대제사장도 몰랐고 유대인들을 지도해 나오던 교법사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분은 오직 예수님, 예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오직 메시아뿐이었어요. 메시아.

그러면 우리가 느껴야 할 본연의 자유와 소망과 사정과 심정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 보아야 됩니다. 이것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의 인격관과 예수님이 생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던 소망과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던 심정은 어디로 갔는고. 오늘날 기독교는 수많은 성도가 있다고 자랑하지만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이제 알아야 할 것은, 아직까지 이 땅은 평화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 되지 못했고, 한 분을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리 주의나 사상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과정에서 지팡이의 사명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께도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도 인간 이상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인류를 이끌고 나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 하나님도 당신이 자유로울수 있는 한 날을 틀림없이 고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행복의 동산에서 만민을 거느리고 싶으실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유의 동산을 그리워하심이 틀림없거늘,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10-59
불쌍한 메시아였던 예수
하나님은 땅을 찾아 내려오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갑니다. 이것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하늘을 대신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구주예요, 구주.

만일 역사노정에 그러한 분이 나오시지 않았다면 복귀역사는 아직 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때와 시기는 지나갔을망정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 위의 인간을 대표한 아들로서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분의 가슴에는 평화의 세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자유의 이념이 싹터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만인간의 사정을 전부 풀 수 있는 내용과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인연적인 무엇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유를 구가하는 기쁨의 노래 소리를 들어 보았어요? 예수님이 기뻐서 춤췄다는 말을 들어 보았어요? 예수님이 `하늘이여, 땅이여, 만물이여, 나와 더불어 기뻐하옵소서’ 해보셨습니까? 옛날 다윗왕이나 솔로몬왕과 같은 분들은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시를 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시정(詩情)이 없었던 것도 아니요, 감정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노래를 부른다면 슬픈 노래를 불러야 했고, 말을 한다면 슬픈 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메시아였습니까? 안 그래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나선 걸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상을 뒤집어 엎으신 예수님입니다. 좋아서 그랬겠어요?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그리하여 예수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자유의 이념을 개방시켰더라면 오늘날 이 땅이 이렇게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최고의 이념주의자였던 것입니다.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하는 것을 다 합해도 예수님의 주의와 사상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기뻐했더라면 그 주의와 사상을 통하는 자 전부가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슬픈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남루하였다니 웬 말입니까? 예수님께 이스라엘 민족의 어느 누가 먹는 음식보다 더 좋은 최고의 음식을 드렸던들, 4천년 동안 영광과 영화를 누리고 간 수많은 국왕들보다 더 한 영광을 누리게 했던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벌을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이념을 갖고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심정과 사정을 갖고 오셨습니다. 인간의 사정과 인간의 심정과 인간의 이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까지 갖고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홀로 외로운 자리를 찾아들어가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외로울 때 찾아가신 곳은 고요한 산중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더라면 그날부터 예수님은 하고 싶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계획과 실천 방법까지 다 갖고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여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장중(掌中)에 넣고, 민족을 앞장세워 세계 개척을 위하여 새로운 행군을 해야 할 하늘이 보내신 메시아가 그렇게도 불쌍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죽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아니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말하고, 민족의 운명을 말하고, 민족의 갈 길을 지도하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 전부가 배척하였습니다.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전부 배척했던 것입니다. 이 고을에 가도 배척당했고, 저 마을에 가도 배척당했습니다. 만민을 위해 오신 구주의 모습이 이러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옷을 입는 데도 여러분 이상 입지 못했고 먹는 데도 우리 이상 먹지 못했다는 거예요.

3년 공생애의 길을 나서는 예수님은 비장한 각오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한한 영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보내졌으나 영광과는 반대의 자리로 가야 할 것을 느낀 예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광의 심정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려 하셨으나,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이념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 품에 안겨 주려 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나섰으나 민족이 배척하니 반대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평지로 가야 할 예수님이 길도 없는 험한 태산준령을 넘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이 닦아 놓은 길, 이스라엘이 닦아 놓은 길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내모니 예수님은 어디로 갔어요? 어디로 갔어요? 가면 몰리고 가면 쫓기니 죽음을 각오하고 겟세마네 동산을 넘어 갈보리 산정으로 가야 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유와 평화의 심정을 갖고 통치하여야 할 예수님이 몰리고 쫓기는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되니 그런 이념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할 수 없었습니다.

10-61
하나님께 효성하며 민족을 사랑한 예수님
메시아가 모든 사람들이 정성어린 마음으로 드리는 음식을 먹고 살아도 하늘은 부족하다고 느끼실텐데 메시아에게 배고픔이 웬 말입니까? 배고팠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됩니다. 복음의 깃발을 들고 나선 예수님께도 우리처럼 먹고 싶은 마음, 입고 싶은 마음, 평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40일 금식쯤이야 문제없었겠지’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메시아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느냐? 여러분은 타락한 후손이니 금식을 아무렇게나 해도 섭리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위신이 있기에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습니다. 4천년 인류역사를 대신한 만왕의 왕, 하늘의 황태자, 하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위신이 있었다는 거예요.

자신이 아무리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도 `아버지 참으시옵소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길을 가셨거늘 내 어찌 안 걸으리오’ 하셨다는 거예요. 배가 고플 적마다 `아버님, 당신이 이와 같은 길을 걸으시면서 선조들을 지도하신 것을 아옵니다. 아들된 제가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이길을 가오니 참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저주받을 것을 모면하였던 것입니다.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만민을 모아 놓고 기쁨 가운데에 잔치를 베풀고 즐기셔야 할 예수님이 처량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저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볼 때 만왕의 왕임에 틀림없고, 만천하에 하나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어느 누구 보다도 영광의 자리에서 떨어지게 될 때에도 낙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의 책임감을 느꼈고,하늘 앞에 민망해 하셨습니다. 민망해하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낼 때는 영광의 한 날을 바라보고 보내셨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4천년 동안이나 수고해 나오신 목적도 메시아를 보내서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의 환경을 개척하여 만민으로 하여금 당신께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를 불러드리게 해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보내셨음에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입장은 떨어지고 자기의 형편은 떨어졌을망정,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시고 하늘 앞에 민망해하셨습니다. `아버지 면목없습니다, 아버지 면목없습니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자리에서도 자신을 놓고는 슬퍼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0-63
답답하고 민망해 하신 예수
4천년 동안 민족을 붙안고 싸워나오신 하나님의 수고를 생각할 때, 아버지의 심정에 사무친 한을 생각할 때 자기가 핍박받아 쓰러진다 해서 민족을 한꺼번에 쳐버려야겠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뼛골의 인연을 맺으며 세워 놓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쓰러지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는 예수님은 처량했습니다. 민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자유의 한 날을 찾기 위해 보냈던 것이요, 뜻의 해원을 위해 보냈던 것이요, 심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 보냈던 것이 틀림없거늘, 민족 앞에 배척을 받고 몰리어 외로운 산중에 들어가 기도하는 예수님은 민망한 예수님이었다는 거예요. 그럴 게 아니예요?

예수님이 뜻을 이루었으면 하나님은 자유의 한 날을 맞이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이 뜻을 성취하셨으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심정의 인연이 맺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천적인 위신이 땅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에 선 예수님을 사탄 앞에 세우시고 `야, 이 사탄아 예수의 인격과 예수의 위신과 예수의 위엄을 바라보라’고 자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할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한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 앞에 배척하는 그날부터 예수님은 각오하셨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사경(死境)에 놓인 것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민족이 굶주리는 것을 느껴 굶주림의 길을 자진하여 가셨고, 민족이 헐벗는 것을 느껴 헐벗음의 길을 자진하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갈 것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정하셨습니다. 물론 3년 공생애 노정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지만 최후의 결정은 거기에서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답답하였습니다. 민망하였습니다. 답답한 예수님이었습니다. 민망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는 민망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는 답답한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왔으되 만왕의 왕으로서의 기쁨을 한순간도 느껴 보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예수님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체면을 세우지 못하였고, 자유의 한 날을 맞지 못하였고, 영광의 한 시간을 갖지 못하였으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전부 다 그런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굶주린 예수님을 본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그분의 답답한 사정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하늘 앞에 민망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자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10-64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자세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이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그것이 하늘 대한 민망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을 대한 민망한 마음이 자기의 모든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 앞에 설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땅을 대할 때는 답답해 해야 됩니다. 땅을 대해서는 답답함을 갖고 하늘을 대해서는 민망함을 갖고 생애를 사는 사람이라 할진대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욕먹는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이 답답하고 민망한 마음을 풀 수 있는 길이 있다 할진대 죽음의 길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러한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보세요. 사람들은 크나큰 욕망을 품고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크나큰 욕망을 품은 몸뚱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으되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몸뚱이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많으나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그래요? 이 몸뚱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안 됩니다. 몸뚱이 하나를 갖고 생애를 영위하기에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삶도 이렇거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런 몸과 마음과 심정은 하나였습니다. 그의 몸은 그의 마음 앞에 사로잡히고 그의 마음은 그의 심정 앞에 사로잡혀, 죽으나 사나 일편단심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한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품고 출발하려는데 세상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행사하려니 몸이 제한을 받습니다. 마음과 몸과 심정이 하나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류에게 연결해 주는 주체로 살아야 했었는데, 마음 따로 몸 따로 하나님의 심정 따로인 세 갈래의 길을 가야했던 예수의 입장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10-65
예수님이 수습하려 했던 것들
그런 사정에 처한 예수님은 무엇을 수습해야 했는고? 몸을 수습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가까이 찾아오실 수 있는 이념을 수습해야 되고 심정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이것들을 수습해 가지고는 어떻게 해야 되었느냐? 땅 위에 세워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되었느냐? 다시 마음에 몰아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답답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늘을 보며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민망해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몸을 중심삼고 살고 있느냐, 마음을 중심삼고 살고 있느냐, 혹은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심정을 중심삼고 살고 있느냐? 하고 물을 때에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몸 하나를 붙들고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있지만, 마음을 위주로 해서 살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몇 배는 큰 고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심정과 역사적인 사정과 역사적인 소원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원뿐만 아니라 미래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원까지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은 인간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고, 하나님과 사정이 하나 되어서 심정을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중심삼고 무엇을 수습하기 위한 경서(經書)냐 하면,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수습하기 위한 경서입니다. 그래서 몸을 쳐라, 몸을 쳐라 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몸을 수습하고 마음을 수습하고 심정을 수습하여야 됩니다. 오늘날까지의 윤리와 도덕은 몸을 다스리는 제도입니다. 양심을 다스리는 제도가 아닙니다. 몸의 행동을 제한하여 양심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인격을 조성하기 위한 중간적 사명을 다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도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땅에 와서 무엇부터 수습하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과 몸은 예수님이 오기 전에 수습되어 하나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로서의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몸 따로 마음 따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마음과 심정은 하늘을 대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표자가 천지를 움직여 나가는 데는 그의 몸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으로 움직여 나갔습니다. 인간들도 인정을 통하여 사회적인 인연을 두텁게 하는데, 하물며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 천정(天情)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시간의 한계권내에서 변하는 일시적인 인정(人情)이 아니라 천지의 운세와 더불어 변하지 않는 인정(人情)과 하늘의 이념적인 원칙과 통할 수 있는 천정(天情)을 가진 인격을 완성한 하나의 최고의 모범형으로 나타내고자 원하셨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심정을 걸어 놓고 지극히 사랑하셨던 한 사람을 보았습니까? 못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스승의 죽음에 대해 한을 품고 어둠 속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방황하던-는 영광 가운데 부활하여 자기 앞에 홀연히 나타나신 그리웠던 예수님을 붙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한스러운 말씀입니다.

10-67
심정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오늘날 믿는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땅 위의 수십 억 인류를 대표한, 예수님이 진정코 사랑할 수 있는 그 한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은 복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함으로써 예수님이 백 퍼센트의 심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이 마음으로 어떤 이념적인 세계를 고대하고, 어떤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섬으로써 예수님이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심정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을 못 본 것은 물론이로되 몸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보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다 가셨어요? 몰림뱅이. 눈물장이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살아 생전 하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이 한을 남기고 가신 것을 알았사오니 당신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을 이 땅에 보내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백 퍼센트 지니고 하나님과 만물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습으로 만민앞에 세워지기를 바라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신이 되지 못하면 그러한 사람을 보고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겠다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됩니다. 그런 마음도 갖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한과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비록 몸은 작으나 마음은 천주(天宙)를 넘고 넘어서 천성(天城)의 길을 꿰뚫어 하나님의 마음과 연락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몸으로 안 되면 마음으로 심정의 예수님을 모신 후에 다시 몸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는 앞으로 주님이 오시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에 최후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하고 하셨습니다. 하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아버지의 것이요, 내 마음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심정까지도 아버지의 것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몸으로 쓰러져 간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몸에만 못이 박힌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못이 박혔습니다. 몸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애석하게 우는 것보다 마음에 못이 박혀 마음으로 피를 흘리는 예수님을 더 애달프게 여겨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인류와 더불어 살기 원했던 사랑의 심정이 아팠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스러워했던 예수님, 답답해했던 예수님, 민망스러워했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십자가를 붙들 줄도 알고, 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애석해하며 울 줄은 알되, 그렇게 피가 흘러 넘칠 때까지 져야 했던 심정의 십자가는 모르고 있습니다. 사정의 십자가는 모르고 있습니다. 소원의 십자가는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못박힐 때에 몸과 더불어 마음에도 못이 박혔거늘, 그 마음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심정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기에 2천년의 역사가 지나가도록 당신의 마음의 십자가를 인류 앞에 가르쳐 줄 수 없었으며, 당신의 심정의 십자가를 인류 앞에 가르쳐 줄 수 없었습니까?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12:49-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굶주려서 답답한 거예요? 그렇다면 40일 금식이 웬 말이며, 고난과 핍박이 웬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하나님이 겪고 계시다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보다 큰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영광의 주를 고대하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부활의 이념을 가지고 지상에는 7년 대환란이요, 공중에서는 어린양 혼인잔치라는 관념 속에서 지금까지 `예수님,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하고만 했습니다. 그런 신자는 강도입니다, 강도. 주님의 마음과 다른 자는 전부 원수입니다.

10-69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려면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고난 길을 넘고도 남을 수 있는 마음, 그 이상의 길이라도 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갈 길을 염려하면서도 하나님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기 전부터 민망함을 느끼고 기도하시고 나서도 민망함을 느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무리를 보고 욕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던 예수님은 얼마나 민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보낸 사명적인 면으로 보면 자기 일신(一身)이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책임을 못 다하고 가는 입장이기에 응당 채찍을 맞아야 한다고 느끼신 예수님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영광의 주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가 오시면 행복의 문이 열리고, 주가 오시면 평화의 동산이 건설되어서 주와 더불어 억천만년 행복스럽게 살 수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자가 되려면 몸의 십자가를 통과하고, 마음의 십자가를 통과하고, 심정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몸의 십자가를 남기고 가신 예수님, 몸의 십자가의 절개를 따르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마음의 십자가의 절개를 가르쳐 주고, 심정의 십자가의 절개를 가르쳐 주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영광을 받고 복을 받고 살 것을 생각합니까? 천만 부당한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인가, 참말인가.

만일 오시는 주님을 영광 가운데에서 만나고 싶거든, 주님이 보시기에 지극히 사랑스런 모습이 되고 싶거든, 주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여러분 자신이 몸의 십자가를 거쳐서 마음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심정의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주님이 소원하시는 앞길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보세요. 우리의 몸은 땅을 상징하고, 우리의 마음은 공중을 상징하고, 우리의 심정과 영(靈)은 하늘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구름이 끼면 눈물이 나는 것같이 공중에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립니다. 천지의 모든 형태의 축소형으로 지어진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 땅의 축소형이라면 인간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소우주적(小宇宙的)인 실체(實體)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天)과 인연을 맺고 있고, 우리의 몸은 땅(地)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을 중심삼고 세계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야 합니다. 사상과 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발판에 무엇을 세웠느뇨? 예수주의를 세웠습니다. 예수주의. 이 예수주의로 마음세계의 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이 마음세계의 문을 개방하고 난 후에는 심정세계의 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신랑신부로서 사랑의 동산을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문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주를 믿는 사람은 핍박받는 것을 보고는 잠을 못 자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이 못먹고 못 입고 핍박받는 것을 보면 피가 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살다가 떨꺼덕하고 죽으면 그 영(靈)은 하늘 나라로 넘어갑니다. 죽는 순간 그 영(靈)이 한 고개를 넘어가게 될 때, 천상(天上)의 수많은 성도들이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군천사가 옹위하는 가운데 오는 그 영(靈)을 축하하면서 맞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응당 죽어야 할 타락의 후손이지만 한 사람이 땅에서 구원을 받아 천상(天上)의 문을 열고 생명의 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당신의 주위를 옹위하고 있던 천천만 성도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그 한 사람을 환영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예요. 여러분도 탕자의 비유를 알지요?

죽을 때에는 반드시 하늘의 천사가 옵니다. 동시에 사탄도 옵니다. 이건 막연한 말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지에 들어가면 항상 느끼는 거예요. 천사가 하나님의 특사로서의 사명을 갖고 선한 조건을 찾아내어 사탄과 싸워서 하나님 편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사탄은 검사와 마찬가지이고 천사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인데, 사탄에게 끌려가게 되면 하늘에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알았던 것입니다.

10-71
예수께서 민망해하신 이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예수님이 어찌하여 민망해하셨는가?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이 땅 위에 와서 메시아 한 분을 맞기 위하여 무한한 고통과 무한한 희생으로 터를 닦은 것을 알고, 자신은 그런 터 위에 하늘이 보낸 메시아로서 이 땅에 왔는데 만민의 한을 풀어 주지 못하고 가게 되니 얼마나 민망했겠어요? 민망했겠나 안 했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 가면서도 얼굴을 못든 예수님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낙원에 가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늘보좌에 앉혀 놓는다 해도 예수님은 민망해서 못 견딘다는 거예요. 참으로 메시아의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 영계(靈界)의 수많은 영인(靈人)들이 지금 춤추며 놀고 있는 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땅을 위하여 협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땅위에서 영인들에게 심부름을 많이 시키면 시킬수록 거기에 대한 보응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실 때 만왕의 왕으로서, 하늘에는 12진주문과 24장로를 중심삼고 천천만 성도들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을 갖추어 놓았는데, 땅에도 그런 조직을 만들어 놓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갖고 왔던 예수님인데 그렇게 해 놓고 갔어요?

12제자? 여러분,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基礎石)에 제자의 이름이 써 있다고 했지요(계 21:14)? 그들이 다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요?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예요. 12제자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이었기에 저나라에 갈 때 하늘 앞에 민망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제 여러분은 그렇게 가신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가신 주님이 끝날이 되었으니,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몸을 밟히어 이 땅 위에 수많은 기독신자를 세워 놓았으니 이제는 밟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오셔야 됩니다. 이제 다시는 인간들에게 밟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오셔야 됩니다. 이제 다시는 인간들에게 밟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은 말입니다. 여러분들 모르지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떤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아요? 예수님은 아셨지만 우리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는 30여 년의 생애를 마치고 십자가를 지실 때 몸은 물론 마음과 심정도 못박혔기에, 이제 심정의 십자가를 해방시키고, 마음의 십자가를 해방시키고 몸의 십자가까지 해방시키기 위하여 다시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마음의 십자가를, 몸의 십자가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지 못하고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의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서 풀기 위해서입니다. 땅 위의 인간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그들에게 말하려면 그냥 그대로 되겠어요? 그것을 풀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풀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기 전에 천적인 세계에서 하늘과 해결지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위에 몸의 구주요, 마음의 구주요, 심정의 구주로 오셔야 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행복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가르쳐 주고 가셨더라도 인간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풀어 드릴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끝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실것입니다. 오시는 데 영광 중에 홀연히 나타나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안 옵니다. 그렇게 안 와요.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 다음 영계(靈界)에 가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이런 말 못 들었다고 안 하겠지요? 그렇게는 안 옵니다. 천번 만번 알아 봐도 그렇게는 안 옵니다.

오시는 주님은 어떻게 오실 것이냐? 몸의 십자가를 남기고 가신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실 때는 마음의 십자가를 다시 품고 오십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다시 가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 있는 배반한 자들의 후손들을 붙들고 `옛날에 너희의 선조들은 몸의 십자가를 지고 허덕였지만 마음의 십자가는 몰랐다. 심정의 십자가는 몰랐다. 몰랐으니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실 것입니다.

10-73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들
이제 오시는 주님은 마음과 심정과 사정을 갖고 오시는데, 여러분이 심정에 사무쳐 `오, 주여!’할 때,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붙들려할 때처럼 만지지 말라 하시지 않고 `오냐! 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몸으로 하늘을 그리워하고 고대했지만, 그 중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전권적(全權的)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땅 위에 주님이 오신다면, 이제까지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사정,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속 깊이 묻혀 있던 답답함과 민망함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타락한 후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잘못 둔 부모의 입장에 선 예수가 되었으니 자식이 잘못한 죄를 부모로서 대신 탕감하고 간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몸으로 고생한 것은 알았지만 그 마음은 몰랐습니다.

주를 대하여 천만 번 변했던 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주를 사랑하면서도 천만 번 변했던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 예수님이 찾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대하여 예수님을 대하여 한번 결심했으면 억천만의 고통이 휘몰아치더라도 변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 기준이 잡혀져야 됩니다. 사조에 따라 변하지 않고 주의 사상에 따라 변하지 않는 마음의 기준이 잡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하고,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정신을 차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것도 달게 받던 것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답답함과 민망함을 이 시대에 느끼는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답답함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민족을 자기 품에 넣으려 했고, 세계를 자기 품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예수님은 돈 많은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권세를 가진 예수님도 아니었습니다. 혈혈 단신 눈물의 길을 가신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복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예수님은 먼저 땅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리워한 것이 많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엇을 그리워한 줄 알아요? 그 마음으로 무엇을 그리워한 줄 알아요? 참다운 사람을 그리워했습니다. 참다운 사람! 몸과 마음과 심정을 쪼개고 쪼개어도 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찾고자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10-74
참사람과 하늘 나라를 처절히 그리워하신 예수
예수님은 사람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어떤 사람? 마음의 사람, 심정의 사람을 그리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그리워했느냐? 나라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라! 또, 무엇을 그리워했느냐? 세계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또 무엇을 그리워했느냐?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그리워했어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워했고 아버지의 세계를 그리워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런 사람을 찾기 위해 거리를 다녀 보았습니까? 내가 요구하는 나라는 이러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워 보았습니까? 우리들이 소원하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하며 그런 세계를 찾기 위해 싸워 보았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늘이 공인하고 예수님이 공인하고 내 심정의 근본으로부터 공인할 수 있는 그러한 소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 소원의 대상이 되는 나라, 소원의 대상이 되는 세계를 찾기 위하여 싸워본 사람은 없습니다. 일개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일개 주의를 위하여 싸우고, 일개의 어떤 사상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있었지만, 하늘땅이 안식할 수 있는 기쁨의 보금자리인 하늘의 심정의 세계, 하늘의 마음의 세계, 하늘의 몸의 세계, 모든 존재들이 다 인연 맺기를 원하고 그리워하는 곳을 찾기 위하여 싸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요.

예수님은 30여 년 동안 싸웠습니다. 말없이, 무언으로 싸우다 가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그 말을 해 보아야 거두지 못할 것을 아셨기에 아예 입을 다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운 사람을 찾기 위해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여, 희노애락을 같이하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먼저 먹여 주고, 입을 것이 있으면 먼저 입혀 주고,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자기가 쉴 자리를 넘겨 주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3년 공생애노정 끝에 배반자가 된 제자들, 예수님께서 그리워한 사람이 그런 배반자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12:15-17)”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던 예수님, 얼마나 처량합니까? 배반한 자를 찾아가서 다시 인연 맺자고 하신 예수님이었으니, 얼마나 원통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분히 여기는, 베드로보다 잘 나고 베드로 이상 열렬한 사람들이 그 시대에 있었던들 예수님은 한을 풀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교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패배자의 길을 가신, 처량한 심정을 품고 왔다 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워 하는 인격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런 인격을 갖춘 인간들이 주관하는 국가가 어떻다는 것도 말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 국가의 이념을 통하여 복귀된 세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가 어떻다는 것도 말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원통합니다. 원통해요.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요.

먼 산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에는 억천만 인류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천상에서 수고하는 천천만 성도들이 자기를 주시하는 것이 보이니, 그들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예수님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개를 들 수 없는 예수님이었고, 시일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배척을 받으면 받을수록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죽는 길이 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종결을 짓고 간 것이 아니라 ‘다시 오마’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데 무엇을 찾기 위해 오시는가? 30여 년의 생애노정에서 마음으로 그리던 사람을 찾기 위해 오십니다. 30여 년의 생애노정에서 마음으로 그리던 나라을 찾기 위하여 오십니다. 30여 년의 생애 동안 마음으로 그리던 그 세계를 찾기 위하여 오십니다. 마음으로 그리던 그 나라의 백성을 찾기 위하여,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그립습니까? 그리운 마음이 있습니까?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어디에 있사옵니까?’하며 몸부림치면서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입는 것을 잊어 버리고, 자기 일신(一身)이 망하는지 자기의 처지가 몰락되는지도 모르고 그런 아들딸을 찾는 성도가 이 땅 위에 있습니까? 이 민족 가운데 그러한 성도가 없다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이 세계에 그런 무리가 없다면 이 세계는 망합니다.

10-76
참사람을 그리워하고 찾아야 할 우리
오늘날 우리는 통일교인으로서 배척받고 몰림받고 지극히 외로운 자리에 선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도 없고 세력도 없습니다. 그것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몸의 일체를 밟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몸을 쓰러뜨리면서 품고 가신 예수님의 그 심정, 그 마음, 그 사정을 아는 우리입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붙안고 가신 예수님의 사정을 내몸은 모를지라도 내 마음은 알고 내 심정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을 위하여 마음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심정의 사람을 그리워하며, 먹을 것을 보고도 그들을 생각하고 입는 것이 남루하더라도 그들을 생각하는, 마치 탕자를 둔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품고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도 원망하지 않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민망한 심정을 품고 가야 했던 예수님의 운명도 알았습니다. 귀하신 몸이 굶주림도 참아야 했고, 귀하신 몸이 남루한 옷을 걸쳐야 했으며, 나중에는 홍포를 입으시고 눈물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탄식하는 부녀자들을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몸을 가다듬어 마음의 사람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사람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나라를 그리는 우리는 단결하여 굶주림의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야 되겠고, 억울하게 배척받는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나중에는 쓰러져 죽는 죽음의 길을 넘어서라도 남기고 싶어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통하여 그의 민망함과 답답함을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일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십자가 산정, 골고다 산정, 겟세마네 산정에서, 따르던 무리들로부터도 배신당하며 피눈물을 뿌리시던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승리적인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배반자, 베드로의 길을 넘어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울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고,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죽음 길을 자처해 나갈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각지에서 오신 청년 남녀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이 큽니다. 오늘 여기서 외치는 이 한 젊은이의 외침은 개인의 사정을 걸어 놓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을 위하여 굶주릴 때, 남들이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지으며 `아버지’ 하는 그 음성은 수십일 금식기도보다 귀한 것입니다. 참다운 선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을 찾지 못해 눈물지으며 `아버지’하는 그 한 마디의 음성은 하나님의 간장을 녹이는 음성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보호자가 되기 위하여 허덕이는,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갖고 심정에 굶주려 이리 허덕이고 저리 허덕이며 심정을 따라나가는 발걸음은 인간들로부터 배신자라는 평판을 듣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파가 배반자라고 해도 괜찮고, 어느 민족이 배반자라고 해도 괜찮고, 어떠한 스승이 배반자라고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렇게 몰림을 받으면서도 하늘을 향한 심정에 있어서만은 배반자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외치면서 일편단심 심정의 복지를 찾아 헤매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그들의 발걸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10-78
오시는 주님을 모셔야 할 삼천리 반도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알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알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 몸은 쓰러지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이 몸 속의 산 피가 고동치고 이 생명의 맥박이 뛰는 한, 아버지의 생명의 깃발을 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쓰러져야겠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부모나 처자도 없고, 국가나 세상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일편단심으로 가졌던 주의와 사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심정뿐이었고, 아버지의 마음뿐이었고, 아버지가 소원하시는 하나의 참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볼 때마다 그가 품은 것은 답답함뿐이요, 그가 가진것은 민망함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악된 세계에서 그렇게 살다 가셨거늘, 그 답답함을 풀어드릴 수 있고 그 민망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결심합시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삼천리 반도를 향하여 최후의 정열까지 다 쏟아야 되겠습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후손이 지녀야 할 승리적인 조건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답답한 예수님의 심정, 민망한 예수님의 심정이 제 일신에서 풀어지이다’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민족적으로 배반을 받고 갔습니다. 12사도 앞에 배척을 받고 갔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척을 받고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오시는 주님은 12제자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고, 제 2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고, 27억 인류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는데, 환영받을 수 있는 사정이 못 되어 있거든 우리는 싸우다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하여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피와 살을 뿌리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정열을 쏟을 수 있는 각오와 신념에 찬 무리를 우리는 이 삼천리 반도에서 찾아모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를 찾기 위해 잠들어 있는 27억 인류와 잠자고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한 끼의 밥도 자신만을 위하여 먹지 말고, 한 벌의 옷도 자신만을 위하여 입지 말고, 하루의 생활도 자신만을 위하여 하지 맙시다. 그런 무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10-79
우리가 고생해야 할 이유
우리는 예수님보다 많은 물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편안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잘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신 길이 그러했고 또 불쌍하게 보냈거든, 그의 제자가 되고 자녀가 되어야 할 우리는 밥을 먹어도 그 이상 먹을 수 없다는 마음, 옷을 입어도 그 이상 좋은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마음, 잠을 자도 그 이상 잘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형편과 사정이 어려운 자리에 있거든 눈물을 갖고 먹고 눈물을 갖고 입고, 눈물을 갖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무리가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바라볼 때 우리는 분개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피가 아직까지 식지 않았고 우리의 심정이 아직까지 식지 않았거든, 이러한 무리가 없이 안타까워하시는 하늘 앞에 그러한 무리가 되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가 갖춘 자식이 없고, 내가 가진 무엇이 없다 하더라도 일편단심의 심정과 마음만은 이 민족 앞에 보여 주겠다’고 하는 무리를 하늘은 찾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때가 가까와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계가 최후의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가신 예수님, 이념의 세계를 남기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통고하고 계십니다.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이제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생활을 정비하여야 되겠습니다. 주위 환경을 수습하여야 되겠습니다. 재수습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습니까? 주님이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내로 만드십시오. 사랑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부디 주님이 무릎에 앉히고 품에 품으시고자 `아무개야 이리 오너라’하실 수 있는 자녀로 만드십시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의 자리가 그러한 자리입니까? 아닙니다.

가신 주님이 그렇게 가셨으니 오시는 주님도 십자가로 오실 것이어늘, 오늘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마음과 심정을 무장하고 몸이 맞는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몸이 답답하고 민망한 자리에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농촌으로 전도하러 가는 자는 곡괭이를 먼저 메어야 되겠습니다. 노동판으로 전도하러 가는 자는 짐짝을 먼저 멜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고하는 자들 앞에 나가는 자는 그들 앞에 서서 그들보다 더 수고해야 되겠습니다. 학자들 앞에 나가는 자는 그들 이상의 힘을 들여 배워서 그들을 지도해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져야 하늘의 답답함이 풀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늘의 민망함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몸이 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책임지고 지도하는 저도 여러분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은 저의 본의(本意)가 아닙니다.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철석 같은 기초를 닦아 놓아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멀지 않아 우리들은 뜻을 위해 나아가야 되는데, 모든 것을 저버리고 가야만 되겠습니다. 피난민 이상의 처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만 되겠습니다.

10-81
최대의 실적을 쌓는 해가 되게 하라
나는 이 해의 벽두에 여러분 앞에 선언하였습니다. 이 한 해에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제일 큰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수중(手中)에 지금 돈이 있습니까? 수십억 수천만원의 돈을 쥐어 보았습니까? 여러분의 생애노정에 여러분의 일신을 위하여 일신의 행복을 위하여 돈을 벌려고 싸운 적이 있습니까? 한탄하십시오. 그러한 돈이 있거든 생명을 위하여, 하늘 나라를 위하여 써야 합니다. 호화스러운 거처를 붙들고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까? 하늘 백성을 안식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것을 잊어버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과거에 잘 먹었던 일이 있으면 이제 후회해야 되겠습니다. 잘 입었던 일이 있으면 후회해야 되겠습니다. 왜? 주님보다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류가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면 평화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 왕자는 그러한 길을 가는 자입니다. 평화를 건설할 수 있는 자는 그러한 자입니다.

이제 삼천만 민족이 울부짖는 곳을 향햐여 나아가게 될 때, 피땀을 흘리는 곳이 있다면 내가 가겠다, 욕먹는 곳이 있거든 내가 가겠다고 이를 악무는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짖는 인연을 남기라고 나는 여러분 앞에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그런 길을 걸어 왔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이상 사무친 마음이 있습니다. 하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무한히 아낍니다. 여러분을 마음껏 축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하여 어떠한 고난의 자리라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기에 이리도 못 하고 저리도 못 하는 곡절과 사정이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의 발걸음은 산중에서 토굴을 파고 기도하는 무리는 물론이요, 화전(火田)을 일구어 감자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까지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는 그러한 자들에게까지 심정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가야 되겠습니다. 어떤 기념할 날이 있다고 그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는 것보다, 그것은 못 할망정 남아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울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위신을 무한히 변명하고 싶은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식구는 선생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으니 명령만 해 달라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명령하지 못한 나이기에 그들 앞에 명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복이 있으면 여러분에게 주고 싶고, 하늘의 인연이 있다면 여러분 앞에 세워주고 싶은 것이 이 민족의 피를 받고 태어난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세계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6.25동란 때 수십 개국이 이민족을 위하여 피땀을 흘렸는데, 이 민족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쓰러진 그들의 은혜를 피로 갚고 땀으로 갚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무한히 답답하고 무한히 민망한 심정으로 염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원컨대 그토록 슬프시던 주님이 활개를 펴시고 자유의 환경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그런 주님을 모실 수 있다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싶었던 그분을 사랑하고 죽는다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무수한 고통을 당하신 주님께서 편안한 자리에서 하늘 앞에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를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한다면 무슨 한이 있겠어요?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모두가 그것을 위해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 각자 각자가 비장한 결심을 하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10-82
기 도
때로는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을 한탄한 적도 있었사옵니다. 불쌍하고 외로운 이 민족을 대신하여 배반자라고 핍박받는 자리에 서야 할것을 알면서도, 민족을 바라보고 원망하고 싶을 때도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볼 적마다 맞고 또 당하고라도 가야 할 길임을 알기에 오늘 이날까지 왔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와 국내 정세는 복잡하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좌우의 판결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세계적인 운세와 천적인 운세는 천적인 한생명을 저울로 삼고, 나를 추로 삼아 저울추와 같이 움직여 들어오게 하는 것을 알고 있사온데, 저희가 어떠한 자리에 놓여져야 하겠사옵니까? 모조리 하늘편으로 기울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답답하셨던 예수님의 심정과 민망스러웠던 예수님의 사정을 오늘 저희들은 짐작하였사오니, 예수님의 그 답답한 심정과 민망한 사정을 이 민족을 대신하여 풀어 드리고, 세계인류를 대신하여 풀어 드리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고, 오늘 느낀 바의 심정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맹세를 하고, 각자 아버지 앞에 약속을 하게 해주시고, `내일의 나는 불변의 모습, 철석 같은 모습입니다. 저를 산 제물로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