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4 to 10-194: 우리들의 각오

우리들의 각오
1960.11.06 (일), 한국 전본부교회

10-264
우리들의 각오
마태복음 10:32-42

[기 도(Ⅰ)]

아버지! 6천년 동안, 잃어버린 본연의 아들딸을 찾으시기 위해 당신께서 겪으신 슬픔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인간을 어느 한 날 당신이 축복할 수 있는 아들딸이라고 해보시지 못하고 붙들고 사정을 나누어 보시지 못한 아버지라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쌍한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이 땅과 이 국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민족이오나 참을 따라 살고자 하는 숨은 무리들이 이 민족 가운데 있는 것을 아옵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초가삼간이나 초막에서 슬픈 심정을 품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새 나라와 새 약속을 고대해 나온 이 민족이옵니다. 벌거숭이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민족이기에 이 민족을 버릴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이 두터울 것을 아옵고, 고생하고 굶주리는 자리에서 당신을 향해 호소하는 민족이기에 같은 심정으로 호소하더라도 불쌍한 자리에서 호소하는 자들을 더 귀히 여기시는 아버지께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이 민족을 더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사옵니다. 자랑할 것도 없사옵고, 당신께 드릴 예물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오나 드릴 것이 없사옵고, 당신의 위신과 환경을 지켜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오나 그럴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희들의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민족보다도, 어떤 신자보다도 더 당신을 위하고 싶사옵고, 모시고 싶사옵고, 당신의 슬하에서 당신과 더불어 모든 싸움을 치루고 싶사옵니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러 주신 이 민족이었사옵고, 수많은 신도 가운데서 불러 주신 당신의 아들딸이오니, 이들의 마음을 미쁘게 보시어 찾아 주시옵기를 감히 바라옵나이다.

오라 하시는 당신의 명령을 저희들이 알았사옵고, 이 길을 개척하라고 몇 번이고 저희를 내모시는 뜻도 알았사옵니다. 낙망할 때 권고해 주시고 슬픈 자리에 있을 때 `내가 여기 있다’고 하시며 위로해 주시던 당신이심을 알았사옵니다.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이 시간에도 그러하오며, 내일도 그러할 줄 알고 있사옵나이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당신과 인연맺을 수 없고, 평탄한 길에서 당신을 만날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당신이 편안한 자리에 계시지 못한 연고요, 아직까지 당신이 평탄한 길을 가시지 못한 연고인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감당하려 하고 아버지의 고통의 길을 대신 걸으려 하는 자라야 당신이 친히 대할 수 있고, 자연스런 심정의 발판에서 당신의 사정을 터놓고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우고 깨닫고 체험하였사옵니다. 또한 이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을 당신이 각별히 기억해 주시옵소서. 수많은 인간들에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 가운데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수많은 교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당신의 심정을 붙들고 몰리고 있는 자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피와 땀과 눈물을 개의치 않고 하늘의 산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자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들과 함께하여 주실 것을 믿사옵고 그들과 함께 싸워 주실 것을 믿사옵니다.

외로운 길을 가시는 당신의 걸음을 따르는 자들도 외로운 자들이옵니다. 당신이 그러하시기에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을 거두시기에 밤낮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아오니, 이 시간도 같은 사정과 같은 심정과 같은 소망을 갖고 하나의 뜻을 위해 뭉쳐 있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 친히 보호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같은 은사로써 안위(安慰)의 터전으로 옮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이 한 시간을 아버지 앞에 맡기옵니다. 여기 모인 무리들을 굽어 보시옵소서. 당신이 친히 좌정(坐定)하신 가운데 저희의 몸 마음이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감동에 사무쳐 솟구쳐 나오는 본연의 심정을 붙안고 회개의 심정을 갖추어 당신만을 의지하고 받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일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 할진대 당신께서 재창조의 능력의 손길을 가하시옵소서.

회개하는 심정을 갖고 나타나는 자들을 당신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부족한 자신을 뉘우치어 간곡한 마음으로 `아버지, 굽어보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각자 각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이 허락하신 은사권내에 잠겨, 높고 귀하신 당신의 인연을 그 마음 몸에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망의 철망을 끊어 버리고 생명의 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활의 역사와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몸에 뿌리 박힌 악의 근성과 악의 쓴 뿌리를 제거시키시어서, 당신과 화(和)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이 시간 싹틀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성삼위신이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첫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맡기오니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권한만을 여기에 나타내시옵소서. 불의한 모든 것을 제거시키시옵소서. 실체적인 선(善)의 기대(基臺)를 갖추어 이 시간 산 역사를, 산 증거를 남길 수 있는 각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0-266
기 도(Ⅱ)
하늘(天)과 땅(地) 사람(人), 이 셋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일체(一體)가 되면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중심체가 됩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는 유일하고 불변하고 영원해야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하늘이 동하면 땅도 동하고, 하늘 땅이 동하면 인간도 동해야 할 것이었사옵니다. 그런데 그 본연의 창조이념은 간 곳이 없고 땅은 땅대로 움직이고 있고, 인간은 인간대로 흩어져 있으며, 하늘은 하늘대로 아직까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나를 대신하여 수많은 악과 싸우고 있는 것을 역사노정을 통하여, 현실을 통하여, 더 나아가서는 미래를 통하여 저희들은 깨달았사옵니다.

저희들에 앞서 선(善)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서 수많은 하늘의 역군들이 왔다 갔사옵고, 앞으로 저희들이 가는 길에도 하늘을 대표하여 희생의 길을 가야 할 제물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은 인간을 세워서 크나큰 목적의 세계로 가셔야 하고, 인간은 아버님을 믿고 그 목적의 세계로 가서 아버지와 아들딸과 땅이 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런고로 소망의 터전을 바라기에 앞서 먼저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늘과 땅과 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염려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몸은 땅의 요소를 받아 태어났고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요소를 받아 태어났기에, 땅은 우리의 몸을 있게 해준 부모이며 하늘은 우리의 마음을 있게 해준 부모임을 아옵니다. 하늘과 땅을 부모로 해서 태어난 저희들, 즉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육신의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난 저희의 모습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삼대(三大) 부모를 가졌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아버님! 아버님의 땅이 되지 못하고 저희들 역시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지 못하고 아버님이 온전히 주관할 수 있는 하늘이 되지 못하였사오니, 이 이상 슬픈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아버님께서는 실체를 갖춘 하나의 아들과 딸을 만나지 못해서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오라, 진정 당신의 뜻을 통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고하신 당신의 심정을 상속해 줄 심정적인 일체를 갖춘 아들딸이 없어서 탄식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워서 알았사옵니다. 슬프디 슬픈 이러한 사실을 배워서만이 알아야 하는 것 또한 지극히 슬픈 일이옵니다.

본연의 우리 아버지는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였사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인간은 배우기 전에 아버지를 느낄 수 있고 느끼기 전에 아버지와 화하여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사오나,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사옵니다.아버지께서도 주체적인 입장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개인에서부터 종족, 민족을 거쳐 국가와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과 인연맺어 나오셨사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수고의 역사가 인간시조의 실수로 말미암아 저끄러졌으니, 그 죄악상을 폭로시켜 놓고, 인류 전체를 대신하여 회개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옵니다. 이 땅에 악의 피를 뿌린 조상으로부터 수많은 인간들이 아직까지 악에 굴복하여 하늘을 배반하고 있는 죄상과, 우리의 후손이 하늘과 화할 수 없는 악의 요소 전체를 걸어 놓고, 하늘 앞에 심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무리가 이 천지간에 많이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이 땅에는 슬픔이 꽉 차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땅은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해 하나님이 친히 운행하실 수 있는 자유의 천지가 되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아직까지 슬픔으로 이 땅을 바라보시지 않을 수 없사옵고, 어려운 역사의 투쟁을 계속하시어 인간들이 가야 할 정의의 발판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러한 사명을 직접 하실 수 없는 당신께서는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을 그리워하시며 찾고 계신다는것 또한 아옵니다. 그러하오니 이 시간 모인 저희들, 당신의 어떠한 복이나 축복이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나온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배워서 알고 깨닫고 맹세하고 각오했을진대, 아버지의 전체적인 뜻과 사명과 심정을 상속받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소망의 곳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반대해 온 사탄을 대해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족한 마음들을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이 고대하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당신이 진정 찾으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당신은 늘 저희들에게 권고하시기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산 제사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피 흘리는 제물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흠없고 티없이 아버지를 반기고 아버지의 심정에 품길 수 있는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참혹한 제물의 형상을 전개시키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이 제물을 통과하고, 저희의 마음이 제물을 통과하고, 저희의 심정이 제물을 통과하여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아버지의 손길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당신이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 투쟁해 나온 목적도 이것인 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과 환경을 모두 당신 앞에 맡기고 가치적인 은사의 자리에서 심정적인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영광을 저희에게 부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를 보나 반길 수 있는 마음의 터전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저희들의 심정이 아무리 악한 자를 보아도 웃을 줄 아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닮아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난 무엇을 보고라도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모든 것을 당신 품에 맡기고 부모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운행하시고 싶은 대로 운행하시고 세우시고 싶은 당신의 아들딸이 있거든 그 아들딸들을 세우시어 축복하시옵소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봉독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복음을 들고 나선 후 가장 슬프고 가장 억울하고 가장 안타까운 심정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의 길을 개척하고 생명의 원천을 세우려 했던 그 마당은 지극히 어려운 자리였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전체를 당신이 품어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0-269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우리들의 각오’입니다. `우리의 각오’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나 몸, 혹은 행동, 혹은 생활, 혹은 지극히 작은 한마디의 말에까지도 어떠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10-270
절대자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할 우리
자기는 자신을 지극히 귀한 존재로 알고 있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습니다. 자기는 지극히 참되다고 자랑하는데 남들이 그렇게 알아주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것을 헤아려 볼 때에, 이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며 살고 있는 이러한 개체의 사실들이 전체에 공인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 때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될 것이요, 우리가 소망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성현들이 이 땅에 와서 자기들이 생활하고 실천한 것을 후대에 남기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기를 개의치 아니하고, 죽음도 개의치 아니하고 개척의 길을 걷다가 사라져 간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기고 간 생활의 터전, 말씀의 터전, 교훈적인 터전이 오늘날 우리 실체를 놓고 볼 때 산 결과를 거두었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두고 보더라도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환경적으로 시인받을 수 없고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주장한 모든 것은 가치적인 입장에서 전체 앞에 공인받을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믿어온 신앙이나 사회적으로 세워진 어떠한 주의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시간적인 거리를 넘어서서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내 마음이 동할 때 상대방의 마음도 동하고, 내가 즐거워할 때 상대방도 즐거울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어느 누구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주의는 빼놓고 종교적인 분야만 보더라도 불교신자도 그렇고,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이 그렇고, 기독교를 신앙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 현실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한 기대 위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반문하여 해결짓지 않고서는 자기가 처한 자리와 가는 방향과 살고 있는 모든 것이 가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환경에 있는 우리들은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각오가 필요할 때입니다. 그 각오는 내 일신을 통하고 환경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세계를 통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양심을 통할하는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자에게까지 공인받을 수 있는 각오라야 합니다. 그러한 새로운 각오를 통하여 가치적인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어느 때에 가서 천륜 앞에 배반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것 가지고 통할 수 있을 것이냐? 안 됩니다. 왜? 성서에는 끝날에 반드시 대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대심판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내용은 잘 모릅니다. 오늘날 사회적인 사조나 세계적인 사조를 보더라도 모든 것이 진퇴양난에 처해 있습니다. 자기자신도 수습할 수 없을 역사적인 흐름이 여러분을 휘몰아치고 있는 현실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대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대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다 할 해결점을 지어 가지고 새로운 각오의 기반을 세워 놓고 행군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목전에서 보고 있습니다.

10-271
현세는 신념과 각오를 가진 사람이 필요한 시대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믿으며 살다가 죽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오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환경을 밀고 나가 악한 무리가 있으면 쳐부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넘고 하늘까지 통과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신념과 각오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여도 그냥 그러다가는 맙니다. 아무리 큰소리친다 하더라도 그러다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한 개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할지라도 오랜 역사의 인연을 거쳐서 오늘에 머물려 있는 것입니다. 그 인연을 현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소망하는 이상세계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인 나를 해명하고, 시대적인 나를 해명하고, 미래적인 나를 해명할 수 있는 신념을 갖추어 반대하는 사람 앞에서 공인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 할진대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힘으로도 안 되고 어떠한 세력으로도 안 됩니다. 마음과 몸이 환경의 고충을 넘어서서 역사적인 모습을 무시하고 시대적인 모든 복잡한 것을 다 살라 버리고 오직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불을 밝혀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오늘날 이 시대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동기가 된 것이어야 하느뇨?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동기가 된 것은 안 됩니다. 왜?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요, 시대적인 존재요, 소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내용을 가져야 되고 시대적인 내용을 가져야 되고 미래적인 내용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연고로 그 무엇을 찾고, 찾다가 안되니 그 무엇을 믿고, 믿다가 안 되니 기도를 하고 희생을 하고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이러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환경을 타개해 줄 수 있는 내용의 원천은 무엇일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야 합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근본이 아닙니다. 인간 이상의 근본이 있나니 그것을 관념적이나마 하나의 절대적인 주체로 세워 하나님이라 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근본에서부터 해명을 지어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이시며,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셔서 인간을 지도해 나오신다 할진대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뜻을 어떤 각오 밑에서 세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한 인간의 후손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안으로써 어떠한 각오 밑에서 역사를, 시대를, 미래를 처리해 나가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안 그렇겠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각오를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맹세를 하지만 그것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을 통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절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10-273
절대자의 각오
그 절대자가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데는 반드시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절대자로서의 각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각오가 어떤 것이냐? 죄인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고 선한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온 천주를 창조이념세계로 완결지을 때까지는 어느 누구의 충고로도 변할 수 없고, 어느 누구의 사정에도 양보할 수 없는 각오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억천만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는 각오인 것입니다. 그 각오를 만인에게 제시하는 날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날입니다. 그 날은 우리 죄악된 인간들 앞에 하나님의 각오를 실제로 보여 주는 날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고 수많은 도인들이 살고 있으되, 그들은 하나님의 각오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변치 않는 각오 밑에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사람은 역사적으로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당당히 심판대에 나서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인연을 가진 인간들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르되, 인간을 대해 섭리해 오시는 하나님이 계실진대 인간은 그로부터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이 공인을 받기 위한 터전을 닦으려니 인간 세상에 종교라는 것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어떤 사조가 나왔다 할진대, 그 사조는 하나의 세계를 대 할수 있는 입장에서 공인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의와 이념, 혹은 이상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이상과 우주적인 이상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땅 위에 살고 있는 만민이 역사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전체가 역사적인 인연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공인만 받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느냐? 아닙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요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시대와 역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 해도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오는 천지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을 통한 후에는 반드시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대해 역사해 나오시는 하늘의 목적이 있거늘, 그 목적을 대할 수 있는 인정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은 이 땅을 저버리고, 이 시대를 무시해 버리고 새시대에 흡수되려고 했습니다. 섭리적인 새시대를 향하여, 섭리적인 한 때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투신해 나온 것이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민족 민족이 다름에 따라 각기 하나의 주의를 세워 가지고 자기 민족을 수습하였고, 그 수습된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종교형태를 갖추어 오늘날 세계적인 주의시대에 와서는 세계적인 종교이념을 갖출 수 있는 섭리적인 시대를 거쳐 넘어가는 것입니다. 세계와 역사가 혁명의 노정을 거쳐온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혁명의 노정을 거쳐온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사조를 보더라도 자유와 평등의 이념 밑에서 하나의 세계, 즉 하나의 주권세계와 하나의 이념세계를 바라보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세계 운동만이 아니라 그 반면 세계적인 종교운동을 제시해야 할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전체 역사 앞에 그릇됨이 없는 존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요, 역사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요, 이상시대입니다.

10-275
종교의 목적
그러면 그것으로써 모든 것이 종결되느냐? 아닙니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섭리적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를 이루어 그 시대와 합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섭리는 종교의 이념을 통하여 방향을 취해 나가고 있는데, 이것이 어느 기준까지 이르게 되면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하고 종교가 더듬어 온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사람을 끌어올려서 하나님과 사람을 합하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종교의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나와서 타락한 인간, 악에 처한 인간, 도저히 하늘과 관계맺을 수 없는 인간을 끌어올려 왔습니다. `하나님이여! 내려오소서’ `인간들이여! 올라오소서’ 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합하여 하나의 심정으로 맺어 놓겠다는 것이 종교의 목적입니다.

절대자이신 창조주는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는 인간을 찾아 나오시기 위해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홀로 수고하셨어요. 또 인간은 창조주를 찾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찾아가는 인간, 하늘은 선의 기점을 찾기 위해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고 인간은 하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면 언젠가는 상봉할 때가 올 것이거늘, 그 때가 끝날입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발판입니다. 발판이예요. 우리는 변치 않는 역사적인 발판이 된 자리에서, 변치 않는 신념을 갖추어 몸과 마음이 하나 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구주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바라시면서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최후에 가서는 전역사적인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전섭리적인 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떠한 종파가 문제가 아니요, 어떠한 민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민이 공히 느낄 수 있고, 지금까지의 전통이나 시대적인 환경이 막을 수 없고, 그걸 넘어서 누구든지 공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체의 인정, 섭리적인 전체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하나의 운동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종교도 하나의 이념을 갖추어서 움직이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10-276
심정의 공인을 받아야 할 인간
그 다음에는 무슨 공인을 받아야 되느냐?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적인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러뇨?

어떤 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너는 죽을 때도 내 아들이요, 어려울 때도 내 아들이요, 누구로부터 핍박받을 때도 내 아들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어느 누구도 그 인연을 꺾을 수 없고 뗄 수 없는 완전한 부자(父子)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모범적인 부자, 여기에는 무슨 불만이 있어도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 할진대 땅 위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심정의 공인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그러려면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네가 살면 나도 산다’할 수 있고, `네 것이자 내 것이요, 내 것이자 네 것이다’ 할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개를 해놓고 하는 놀음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예수가 와서 다리를 놓고 하는 일이 아니예요. 직접 하는 것입니다. 심정의 공인을 받는 시대는 직접적인 시대입니다. 심정의 공인을 간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요? 믿을 수 있는 제자를 통하여 심정이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한다 해서 심정이 통해요? 직접 해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이 목적하시는 심정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이 땅의 수많은 민족을 수습하고, 수많은 주의와 사조를 수습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몰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의 세계에 제일 가까운 두 주의가 남아 있으니 끝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는 서로 부딪치고 깨지고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니 종교도 역시 부딪쳐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는 해결지을 수 없습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책임자는 책임자끼리 부딪치고, 교인들은 교인들끼리 부딪쳐야 합니다. 이러한 혼란을 거쳐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예요.

우리는 이렇게 복잡한 환경에서 낙망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우리에게 새로운 각오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낙망하고 뒤를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고 포기상태에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할 때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어떠한 주권자도 역사노정에서 사라졌습니다. 일대에 어떤 주의를 제창한 사람도 세계적인 이념시대가 오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떠한 종파를 주장하던 자도 새로운 이념시대를 향하여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아담으로부터 4천년, 아브라함으로부터 2천년이라는 역사노정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선민권을 찾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과 더불어 눈물 흘리고 그 민족과 더불어 피를 흘리시며 싸우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담 이후 4천년, 아브라함 이후 2천년의 종말시대에 국가적인 위신도 허물어지고, 사회적 환경도 흐려지고, 종교적인 이념도 사라질 무렵 예수님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인 사명을 완결지어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오셨느뇨? 인간을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인연맺어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정적인 해결점을 찾아 주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최후에는 죄짓고 타락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다 곁가지입니다. 심정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그런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은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피와 살을 다 짜내어서 뼈에 사무친 하나님의 심정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섭리노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10-278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목적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뜻을 따라 역사적인 환경을 수습하고 섭리적인 대표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심정적인 공판대 앞에 승리자로 설 수 있었던들, 예수 이후 2천년의 섭리는 연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심정으로 결정짓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해결짓는 것은 어느 누구도 주관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사탄도 꺾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받은 사람은 사탄이 먼저 압니다.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통하고 심정적으로 체휼해야 합니다. 심정적인 체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아버지 앞에 못 갑니다. 그런데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눈물로 세우고, 하나님의 피로 세우고, 하나님의 땀으로 세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눈물이 남아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피가 남아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땀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모두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민족 앞에 예수님은 재무장하여 나타나셨나니 그분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 시대 사람들을 끌어다가 천국 보내는 것이요?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눈물, 역사적인 하나님의 피와 땀을 해원해 드리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종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인 민족이 필요합니다. 세계 인류를 대신해서 하나의 이념국가를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의 기반 위에 예수님이 그들이 모르는 가운데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과 피와 땀이 그들의 몸 가운데 어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실제로 보여 주어서 그 민족과 하나 되었던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소망인 재림사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무엇을 목적으로 오셨느뇨? 택한 민족이 역사적인 내용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오셨고, 그 다음에는 섭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형(無形)의 신(神)으로서 눈물 흘리고 무형의 신으로서 피와 땀을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으나, 그것을 인간 앞에 실체로 보여 주지는 못하셨습니다. 그것을 실체(實體)로서 인간 앞에 보여 주고 실체로서 인간을 품어 주기 위해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늘이 어떠한 절대적인 각오 밑에서 민족을 지도하는 한, 하늘을 따른다는 이스라엘 민족도 절대적인 각오 밑에서 단결하여 메시아를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던들, 그들은 오늘날처럼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상에는 아직까지 유대교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죽인 선봉자들이요, 핍박자들이요, 사탄의 이용물로서 하늘을 배반한 그 유대교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은 아직까지 원수를 못 갚았습니다. 원수를 못 갚았어요.

10-279
죽음의 자리에서도 원수를 위해 복을 빌 수 있었던 예수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본연의 심정은 어디 있었던고? 하나님이 어떤 각오 밑에서 인류를 완전복귀하기 위하여, 선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하여, 악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아셨습니다. 자신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악을 대하여 싸워야 할 싸움의 터전이 남아 있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저주의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고생한 자신의 생애가 문제가 아니라 민족 전체를 책임지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억울함을 해원해야 할 자신임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의 괴로움이나 피 흘리는 고통보다도 역사노정에서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오시기에 자신이 죽는 것의 몇 배가 되는 고생을 하신 하나님인 것을 아셨기에 입을 벌려 저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그랬다구요?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런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로부터 아브라함, 모세는 모르는 가운데서 막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각오와 결심을 하고, 피를 뿌리면서 생명을 던져 나왔지만, 무지한 인간들을 깨우치고 수습시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눈물과 하나님의 억울함, 하나님의 수고를 아신 예수님은 자기 하나쯤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예수의 심정을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낼 수 있는 소망의 민족을 세우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셨는데, 이들마저 쓰러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예수님은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여 `멸망받을지어다’ 하고 저주하였다면 그날로 그들은 전부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축복받았다는 그 무리들은 전부 심판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번 자신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10-280
예수님이 피와 땀과 눈물의 길을 가신 이유
이렇게 30여 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뼈와 살에 사무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슬픔에 사무쳐 살았어요. 죄악의 가득 찬 이 땅 위에는 안일한 가운데 즐거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광 중의 영광 가운데 살아야 할 예수님은 눈물로 살았습니다. 눈물뿐만 아니라 땀까지 흘렸습니다. 최후에는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땅을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는 것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피까지 흘렸습니다.

그 피는 어떤 것이뇨? 아브라함으로부터 2천년, 아담으로부터 4천년 동안 하나님이 흘리신 눈물을, 민족은 망할지라도 그 민족을 대신하여 상속받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 눈물을 상속받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망할 때에 하나님의 섭리도 끊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상속받아야 할 예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배반할망정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고 나오시며 수고하신 하나님의 땀을 상속받아야 할 예수였습니다. 역사를 대신하여 나타나신 예수는 눈물을 상속받아야 할 자이니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끌고 나와 예수를 맞게 하기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을 희생시키고 피 흘리며 죽게 했는데, 만일 예수가 거기서 이스라엘 민족을 끊어 놓으면 하나님이 수고하신 눈물의 역사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피의 역사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피의 역사의 전통, 그 험난한 역사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하여 피 흘리는 길, 죽음의 길을 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떨어져 나갔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대해 섭리해 나온 4천년사,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엉클어진 심정적인 4천년사는 예수로 말미암아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인계되어 제 2 이스라엘을 창조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그들을 저주하고 원수를 원수로 갚았더라면 자기 일신의 욕망은 충족시켰을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인연은 끊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인연을 끊어져 나갔을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과 피의 역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의(本意)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벨의 피가 호소하는 제단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의 거룩한 모습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을 배반한 배역의 무리가 되었으나 그들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의 슬픈 역사는 인계된 것입니다. 이 눈물의 역사, 이 땀의 역사, 이 피의 역사를 상속받은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자는 망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것을 몰라서 망했습니다. 여러분도 그저 성경과 찬송가만 들고 교회에 출입할 것이 아니라 피 흘리는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를 알고, 눈물 흘리는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를 알고, 땀 흘리는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희생과 죽음으로써 세계를 점령해 나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전통적인 노정입니다. 무슨 교파니 정통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교훈적인 것만 볼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예수와 동참할 수 있게 예수가 땀 흘리던 골짜기로 나를 몰아내 주시옵소서. 예수가 피 흘리던 골고다로 나를 몰아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전통 중의 전통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10-282
기독교의 본질
이것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다면 최후의 심판을 걸어 놓고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가 이 끝날에 나와야 합니다.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서 역사적으로 엉킨 하나님의 원한과 예수와 성신의 한을 풀어 드리고 승리자가 되어 `아버지’ 하면 아버지께서 `오냐’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시고 하나님은 섭리해 나오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러하고 이론적으로 따져 봐도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다 이단입니다, 이단.

오늘날 제아무리 잘 믿는 신앙자라 해도 옛날 유대교 신앙자들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철저했습니다. 밤낮으로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결여되었던고? 그들은 역사적인 눈물을 밟고 올라섰습니다. 역사적인 피와 땀을 무시하고 자기를 중심한 입장에 섰습니다. 그러니 망해야지. 망해야 됩니다.

하늘은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내놓으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아무려면 교법사 제사장들을 제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4천년 동안 메시아가 오기를 정성들여 고대하던 그들 중의 몇 명만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들 유대교 전체는 하나님의 뜻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영광의 뜻을 대신하는 각오를 갖고 오셨으나 고난의 뜻을 대신하는 새로운 각오를 세우고 가셔야 했던 예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각오를 십자가로 종결지었던 것입니다. 영광의 심정을 대신하는 그 영광의 뜻은, 그 영광의 각오는 아직까지 우리의 신앙노정에 나타나지 않고 소망의 한 날인 신랑 신부가 만나는 어린양 잔치를 보시지 못한 것입니다.

10-283
이 시대는 예수 재현 운동을 할 때
여러분은 성경을 보는 목적, 예수를 믿는 목적이 고난받기 위해서입니까, 영광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이 둘 중에 어떤 입장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으되 어떠한 심정의 동기에서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면 천당 갑니다. 간단해요. 오늘 여기서 말하는 이 젊은 사람도 그냥 믿고 천당 가려면 이런 놀음 안 해요. 가다 보니 아니 가면 안될 길이기에 이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 2천년이 지나고, 아담 이후 6천년이 지난 오늘날을 역사의 종말시대, 최후의 판결을 지어야 할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재폭발시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정신을 재폭발시켜야 합니다.

이제 이 시대에 있어서 역사적인 인연을 수습하고 새로운 미래의 발판을 세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무슨 운동을 해야 할 것이뇨? 예수 재현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예수 재현 운동을….

예수 재현 운동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뿌렸으니 눈물로 거두어야 합니다. 땀을 뿌렸으니 땀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피를 뿌렸으니 피로 거두어야 합니다. 결론은 그것입니다. 거두는 데는 뿌리시던 그 심정을 갖추어 가지고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2천년 전의 심정을 갖춘 재현자(再現者)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와 눈물과 땀의 역사입니다. 피는 하늘을 위하여 바쳤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흘렸고, 땀은 죄악의 땅을 위하여 흘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때는 누구한테 물어 볼 때가 아닙니다. 어떤 스승을 따라 자기 생애의 운명을 해결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의 부모를 따라서 무슨 일을 판결지을 때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들은 전부 다 개인주의적 입장에 있습니다.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습니다. 땅 위의 모든 존재는 자기의 가치를 갖추어서 결실의 미(美)를 하늘 앞에 드려야 할 때입니다. 콩으로 된 자는 콩으로 맺어야 하고, 팥으로 된 자는 팥으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가 열 명이라도 그 열사람 전부 다 다르듯이 각자의 모양대로 결실을 맺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믿고 따르고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민족 혹은 국가의 이념도 생명을 걸어 놓고 믿을 것이 못 되고, 세계적인 사조도 생명을 걸어 놓고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이 되었더라면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막연히 믿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있지만 사실인지 분석해 봐야 합니다. 분석해 보고 비교해 보고 가치를 찾아 내어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용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스승도 믿지 말아요. 돈보따리에 팔려 다니는 스승들을 믿지 말아요. 달콤한 말로 일생을 몰락시키는 그런 스승들을 믿지 말란 말입니다.

10-284
자는 양심을 일깨워 전진시키자
자고 있는 것을 깨워만 놓으면 하늘땅의 영원한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마음입니다. 양심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자고 있습니다. 자고 있는 그 자리가 죽은 자리인지 살 자리인지, 산인지 바닷가인지 우물가인지 모르고 자고 있습니다. 자고 있는 이것을 깨워 양심의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역사의 종말시기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류는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어떠한 사조나 주의에 휩쓸려 언제 고난 가운데 빠질지 모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당당한 하나의 인격자인데 내 양심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양심은 자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자고 있어요. 틀림없이 자고 있습니다. 양심은 누구의 제재나 지배받기를 원치않습니다. 양심은 쉬지 않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중에도, 환한 곳에서나 호화찬란한 곳에서도 잘못되게 내버려 두지 않아요. 조금만 잘못하면, `야, 이놈아!’ 하면서 몸을 치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러한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의 양심이 자고 있다고 말하는 이 젊은 사람의 말이 사실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양심을 깨웁시다.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민족의 양심을 깨웁시다.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세계 인류의 양심을 깨웁시다. 하늘땅을 품고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종말세계를 향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처한 인간들의 양심을 깨워 줍시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세계 인류 전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고 잠자고 있는 양심을 깨울 수 있는 종교가 되어 있습니까? 그런 내용을 갖춘 주의나 이념이 있습니까? 양심이 깨어 거기에 들어오는 그 충격, 그 결의, 그 각오는 세상만사를 일시에 밟아 치울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칼이 무서워? 죽음이 무서워? 내 양심에서 일어나는 이것을 어느 누가 막을소냐? 못 막습니다.

이런 충격을 받아 각오한 주의와 이념을 여러분의 가슴에 품고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내가 잠든 사이에도 양심이 `왜 자니, 또 가야지’ 하고 재촉하는 소리를, 그 힘의 원천을 여러분은 느껴 보았습니까? 못 느껴 봤으면 회개하십시오. 이런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의와 각오가 있다 할진대 그 각오와 결의의 목적은 무엇일 것이뇨? 인간들의 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깨우기 위해 지금까지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고 저렇게 가르쳐 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계적인 섭리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보아서 `오! 그것이 맞구나’ 할 수 있을 시대까지 참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수많은 민족을 복잡한 환경에 처하게 하여 일깨워 가지고 `하늘의 섭리가 이랬었구나. 알고보니 그렇구나’ 할 때까지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복잡한 환경을 거쳐 세계적인 무대에서 전체 역사를 종결짓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양심을 일깨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방향성을 갖추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의 키를 잡고 하늘땅을 움직여낼 수 있는 힘있는 용자가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그리워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대해 심판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각오를 인간에게 실현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마지막 실현무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10-286
심판은 어떻게 하시는가
여러분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천주(天宙)의 운세에 휩쓸려 들어가는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클클합니다.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망에 넘치고 풍부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쭈그러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 갈수록 희망찬 모습은 흔적없이 사라져 가고 신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여러분은 하루도 편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안팎을 수습할 수 없고 좌우도 분별할 수 없는 이런 때에 하나님의 외침이 나와 가지고 우리의 힘을 폭발시켜 세상의 모든 것을 일시에 심판할 수 있는 승리의 인격자를 세우는 운동이 하늘로부터 인간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무자비한 심판주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무슨 사랑의 하나님? 반드시 그런 운동이 일어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깨우치고 나서야, 옳고 그른 것을 다 가르쳐 주고 나서야 심판하시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을 어떻게 심판하겠어요? 전(前)은 이렇고 후(後)는 이렇다는 것을, 네 마음의 도(道)는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 가지고, `옳소이다’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제시한 후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예수도 성신도, 지금까지의 모든 선조들도 전부 여러분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천국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천국도 잡아넣을 수 있는 것이요, 슬픈 하나님의 심정도 녹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거 아니예요?

6천년 동안 통곡하신 하나님, 피 흘리고 땀 흘리고 죽음의 길을 개척해 나오신 그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할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죽음의 고통도, 눈물도 모두 잊어버리고 `오냐, 지금까지 섭리해 온 목적이 너 때문이었다’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재출현시키고, 근본 양심을 재소생시키기 위한 것이 끝날을 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섭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 있다는 켸켸묵은 전통이나 자랑하는 그런 교파에 몸을 매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통일교회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마십시오. 그건 자유입니다.

10-287
심판은 무엇 가지고 하느냐
이 끝날에 잠자고 있는 자기의 양심을 깨우지 못한 자들 앞에 경고할 것은 무엇이뇨? 잠자고 있는 자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심판의 조건이 됩니다. 제일 좋다는 것이 심판에 걸리게 하는 중심조건이라는 말입니다. 아들을 좋아하면 그 아들이 심판의 중심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 때문에 심판받아요. 그것 때문에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인격자이고 권세가 당당하다고 해도 어차피 심판의 문을 거쳐 새로운 무엇으로 소생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안다 할진대, 자기가 온 심정을 다 기울이고 몸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자기의 의식과 인식 전체를 기울여 꼼짝달싹 못하고 좋아하는 그것이 자신을 잡아먹는 함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나는 양심적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 그 양심이 하나님을 압니까?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이 그 양심을 알아줍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대해서는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릅니다. 왜?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깨워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각오가 그러하고 예수와 역대 선조들도 그러하였거늘,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도 각성해야 됩니다. 깬 모습이 되어 새로운 이념적인 무엇을 자극시켜서 현실을 타개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처한 우리는 하늘땅을 준다 해도 세상의 어떤 부귀 영화를 준다 해도 그것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이 깨어 하늘을 새로 알고 인류를 새로 알고 이 땅을 새로 아는 운동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여러분은 심판을 면치 못하고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10-288
우리들이 해야 할 각오
오늘 말씀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무슨 각오를 해야 할 것이뇨? 세계를 정복하려는 각오보다도, 훗날 자기가 잘되기 위한 각오보다도 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그러기 전에는 다 허사입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아무리 각오를 했댔자 허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호화찬란한 영광의 세계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 하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하여도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기성관념, 어떤 신앙, 사상, 주의 등을 일소해 버리고 우리의 마음밭을 계발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무엇을 갖고? 인정(人情)을 떠나 천정(天情)으로 우리의 심전(心田)을 계발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천정이 무엇인지 알아요? 천정을 중심삼고 우리의 마음밭, 즉 심전을 계발해야 되겠습니다. 일으켜서 안 일어나면 들이쳐서라도 깨워서 알려 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제일 서러운 것이 그것입니다. 서럽다는 거예요. 꽃다운 청춘시대, 혈기 왕성한 그 시절을 다 지내고, 정의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에 목을 걸고 피를 토하며 쓰러질 수 있는 시절을 다 보내고 지칠 대로 지쳐서 들어온 것이 서럽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낙망할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못하면 여러분의 아들딸이 있고, 여러분의 몫을 해줄 청년들이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그들의 심부름꾼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심부름꾼이라도 되어야 해요. 그리하여 천정을 대신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마음밭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인류를 아는,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더 나아가서 영계(靈界)까지, 또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밭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마지막 각오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왔다가 그냥 돌아가지 마십시오. 오늘날 이 시대는 절박한 때입니다. 보십시오. 금년 다르고 명년이 다릅니다. 더우기나 한국은 더합니다. 갈피를 못 잡고 헤맵니다. 얼크러져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3년은 세계적 전환기입니다. 늦으면 7년까지 갑니다. 전환기예요, 전환기.

이제 여러분은 마음의 본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의 무릎이 그리워 찾아가 보았자 허사입니다. 마음의 본향, 마음의 주인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회적인 선(善)을 2천년 동안 찾아왔으나 안 되었으니 마음의 선(善)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내 마음이 얼마나 선한가 돌이켜 보고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존귀하며, 내가 얼마만큼 귀한 가치의 모습으로 늠름하게 살 기력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어 있다 할진대 그것을 계발시킬 수 있는 협조자, 한마디 말로써 내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교리나 이념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야말로 마지막이요,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기준에 서서 천지를 품고 대우주를 품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잠을 자고 깨어나야 새나라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승리자가 되어 다시 깨어나야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누구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보면 지금 이때는 점점 클클해져 가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친구의 의리는 간 곳 없고 가는 곳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뿐입니다. 믿고 있던 사회적인 기반은 자기에게 자극을 줍니다. 가정에 들어가도 그렇고, 사회에 나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10-290
심전(心田)을 계발해야 할 인류
끝날에 접어든 이 시대에 있어서 여러분은 양심의 잠꼬대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잠꼬대를 박차고 때와 시대를 분별하여 자기의 마음밭을 계발할 수 있는 하나의 곳, 하나의 둥지, 하나의 이념적인 터전을 여러분의 생애에서 갖추지 않는다면 여러분이나 이 민족은 불쌍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삼천만 민족이 이런 혼란된 세상에서 그러한 이념을 갖추게 된다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문화, 세계의 역사, 세계의 모든 주권은 없어질망정 새로운 문화시대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민족만 된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이상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그 민족을 동기로 하지 않으면 안 될 민족이 된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주권도 문제없고 큰소리치고 이들도 지배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하는 때가 되면 그때가 끝날입니다.

이제 끝날이 왔으니, 여러분은 심전을 계발하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새로운 각오를 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뇨? 눈물의 길이든 죽음의 길이든 자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나가겠다는 결의를 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맨 처음 복음을 선포하러 나설 때 비장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깨워야 할 예수의 심정은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잠을 깨우려하지 않았습니다. 자고 있는 그들을 깨우려 한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집을 헐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주의입니다. 살고 있는 집이고 성전이고 다 헐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자꾸 자고 있으니 집부터 헐어 버려야 되겠다는거예요.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은 심정입니다. 사랑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부부끼리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하는 것들을 뒤엎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잠든 양심을 깨우치기 위해 심정혁명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4천년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수많은 주의를 외쳤지만 어느 누가 부모나 형제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심정혁명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땅 위에 엉클어져 있는 것, 사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심정의 힘으로 혁명하려니 반대를 받았지요.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하셨지요? 당연합니다. 그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예수님을 숭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혁명을 주장하고 나선 예수의 첫 선포입니다.

10-291
하나님 앞에 제일 가까이 설 수 있는 조건
말씀을 놓고 주저하고 방황하는 무리는 최후의 심판을 못 넘어갑니다. 예수께서는 심전(心田)을 계발하기 위하여 잠들어 있는 인간들을 깨우치려고 하였습니다. 이불을 벗겨 버리고 궁둥이가 불이 나게 때려서 지옥으로 떨어뜨려 거기서부터 일어나겠다는 민족을 만들어 가지고 다시금 깨우치는 길을 개척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제일 불쌍한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한국 같은 나라는 축복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많이 갖춘 나라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조건을 갖춘 민족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서 부모는 이북에서 자식은 이남에서, 남편은 이남에서 아내는 이북에서 심정적으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심정을 분리한 것입니다. 어렵게 어렵게 피난민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믿지 못해 다투고 싸우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장로도 그렇고 목사도 그렇습니다. 원칙을 두고 볼 때 이러한 것들은 나쁜 현상이 아닙니다.

예수가 주장한 이념적인 세계가 반드시 온다면 이런 민족을 통하여 가까운 데서부터 갈라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나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며 시대적인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하늘 앞에 제일 가까이 설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여기 나이 많은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이를 품고 안고 젖을 먹이며 귀여워하는 마음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았습니까? 못 해보았다면 절대 안 됩니다. 다음에 그 아이가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호소할 것입니다. 자기 남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까? 이 다음에 심판대에서 그 남편이 호소할 것입니다.

10-292
도(道)의 길
도의 길은 버리는 길입니다. 버리는 길.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원칙이 그렇습니다. 사랑스러운 자식도 버리고 가야 합니다. 그 자식이 억울하고 분한 자리에 있어도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놀음을 다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이 땅에 보내시어 억울하게 천대받게 했습니다. 택한 선조들을 억울하게 맞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사랑하지만 땅을 대신한 제물이 되어 사랑의 피, 선의 피를 뿌려야 했기 때문에 그러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을 제물로 하여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제물로 하여 민족을 세우고, 그 민족을 제물로 하여 세계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제물로 하여 세계를 세우려 하셨던 것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피로써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민족을 망하게 해가지고는 세계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제 세계를 그런 자리에 처하게 해 가지고 무엇을 찾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그런 도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전을 계발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어 120년 동안 믿으라 하시고는 배척하는 길, 핍박받는 길로 내몰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한다고 해 놓고는, `너희의 자손들이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고 축복해 주시고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도중 돌베개를 베고 자는데 나타나시어 축복하시고는 하란으로 보내어 21년 동안 고역살이를 시켰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뜻 앞에 서야 할 민족임을 알고, 그의 형제, 즉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애급 사람을 돌로 때려죽이는 모세의 불타오르는 민족정기를 보고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고생하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 땅의 구세주로 보낸 하늘의 황태자요,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천한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맙게 여겼습니다. 이래도 고맙고 저래도 고맙다는 것입니다. 적수(赤手)로 왔으니 적수로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에서 왔으니 가는 것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인생목표였습니다.

부모의 피와 살을 받고 사랑의 씨를 받아 태어났으니, 그것을 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뿌려졌으니 그것을 붙안고 가지 않으면 천상세계에 가서 입적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30여 년을 사는 동안 배척만 받다가 가셨습니다. 부모한테 배척받았습니다. 민족한테 몰렸습니다. 친구한테 몰렸습니다. 교단한테 몰렸습니다. 나중에는 그를 따르던 12사도한테까지 배반당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세 제자에게마저도 배반당했습니다. 최후에는 하나님까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 버리는 자리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이 나를 버릴지언정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의 중심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하셨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는 하나님이 떠나가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심정의 중심으로서 비로소 만민을 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런 이념과 뜻을 알고 마음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심정혁명까지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의식혁명을 떠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양심혁명을 제시하여 양심을 깨우치고 심정혁명까지 일으켜야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이 천지에 나타나는 날에 사탄세계는 무너집니다. 악의 터전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마음을 붙들고 마음을 깨우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스스로를 정비하여 비장한 각오와 결의 밑에서 자신의 마음밭을 가꾸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타락하기 이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여 하늘땅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심정의 주인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10-294
기 도
아버지! 어려운 길을 헤매다가 더 어려운 길을 찾아 나왔습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평탄하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험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 가고 나면 끝인 줄 알았더니 또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사옵니다. 6천년 동안 저끄러 놓은 역사의 모든 것을 저희들의 사정으로 풀려면 억천만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낼 수 있는 심정의 폭발을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붙안고 노래할 수 있는 날이 그립사옵니다. 이것을 혁명하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제 이러한 이념을 갖고 그 기준을 개척하지 않으면 세계를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자신의 마음밭을 개척하고, 잠들어 있는 마음을 깨우쳐 본연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쌍수를 합장하여, 몸 마음을 위시한 세포와 피살과 뼛골이 전부 다 움직이는 가운데서, 아버지를 부르며 감사와 황공함의 눈물을 흘리며 몸둘 바를 몰라 머리 숙일 수 있는 감격스런 자리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고 죽는 한이 있어도 배반할 수 없는 하나의 길,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최후의 이념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옵니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운동이 반드시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알았기에 오늘 저희들은 통일의 명색을 갖추고 나타났사옵니다. 민족으로부터 몰리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사회 환경으로부터 핍박받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이 역사적인 한의 줄기 줄기를 끊고 역사적인 슬픔의 장벽을 허는 데 재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기뻐하는 그 세계를 향하여, 마음이 품고자 하는 인류를 향하여, 마음이 머물고자 하는 새로운 땅을 향하여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릴 각오를 하고 나섰사오니, 지켜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그와 같은 환경에서 피와 살을 개의치 않고 싸우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있사옵니다. 그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민족을 깨우치기 이전에 먼저 내가 깨어서 민족이 어떻게 자고 있는지 알고, 세계 인류가 어떻게 자고 있는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알아 가지고 깨우쳐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과 깬 자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땅의 인류를 형제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네가 바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다’ 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각오, 새로운 마음을 다시 한번 일으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제일 큰 것임을 이들이 절절히 느끼고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