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50 to 10-181: 참된 터전을 찾아서

참된 터전을 찾아서
1960.09.25 (일), 한국 전본부교회

10-150
참된 터전을 찾아서
마태복음 7:7

[기 도]

하늘이 맡기신 위업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쳐 떨어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피를 토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명을 다한 후에 쓰러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일을 위하여 이 시간도 외롭고 험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싸우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산지사방에 널려 있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그 자리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은 무심치 않으신 것을 아옵니다. 외로울 때 붙들어 주셨사옵고, 뜻을 품고 처량한 자리에서 호소하는 자들을 강하게 해주셨사옵고, 그들의 심정을 위로해 주신 줄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도 같은 심정으로 같은 역사로 같은 능력으로 움직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최후의 장벽을 점령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끝까지 싸우고, 끝까지 이 인류를 위하여 책임을 지고 나갈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삼천리 강산뿐만이 아니라 먼 해외에서도 수 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시간 이곳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비록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활환경도 다르지만 뜻을 대해서는 한 핏줄로 인연된 형제이오니, 그들이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은사의 불길로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거리는 떨어져 있을망정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중심삼고 영원한 인연을 노래할 수 있고 생명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이 민족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 민족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옵고, 희망의 동산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늘 앞에 감사드릴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흑암세계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생명이 약동하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날이 어서 속히 이 민족 앞에 임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 앞에 무슨 말을 전하오리까? 아버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고, 심정으로 심정을 전하고, 애달픈 사정으로 사정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둘을 세워 놓고 사탄은 싸움을 붙이려고 하고 하늘은 이 싸움을 제거시키려고 하는, 즉 사탄은 분열의 역사를 하고, 하늘은 총합의 역사를 하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당신의 모습을 닮은 하나의 형상을 갖추어 같은 몸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는 이 시간이 되고, 하늘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당신 앞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0-151
말 씀
이 시간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참된 발판을 찾아서’,`참된 터전을 찾아서’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데에는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어떠한 터전을 기준으로 하셨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인간도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지으셨고, 모든 만물도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 밑에서 지음받은 우리라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나 몸에 있어서나, 혹은 생활에 있어서나 이념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철두철미한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0-152
참된 발판이 되어야 할 사람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신을 헤아려 볼 때 내 생활, 내 몸, 내 마음, 더 나아가서 내 심정이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불변의 터전 위에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히 변치 않는 발판을 갖지 못한 신세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떠한 목적관을 중심삼고 피조물을 지으셨다 할진대 지음받은 그 존재도 그러한 목적 밑에서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발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타락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목적,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그 천적인 발판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어긋나 버렸습니다. 이것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인간들을 사랑하신다 할진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을 갖춘 자가 있느냐? 또 하나님은 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참되신 하나님 앞에 참된 발판을 갖춘 존재가 어디에 있느냐?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요 불변의 이념이라 할진대, 그 생명과 이념을 계승할 수 있는 발판을 갖춘 자가 이 땅 위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제아무리 잘나고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슴을 헤쳐 놓고 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절대적인 가치, 혹은 선, 혹은 생명, 혹은 사정 앞에 불변의 발판이 될 수 있는 대상자라고 하면서 자신있게 나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 참된 사랑, 참된 선의 본체가 되시는 창조주가 계시다 할진대 그분은 그러한 발판을 갖추지 못한 환경을 파괴해 버리고 어떤 형태로든 참된 터전, 혹은 참된 발판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역사해 나오는 것이 구원섭리요,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종교가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온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즐길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은 누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지음받은 만상 가운데서도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을 중심삼고 볼 때도 그러하거니와,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영원한 발판이 되어야 할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것이 탄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생명, 절대적인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불변의 발판이 되었다면 불행이란 있을 수 없고, 사망도 있을 수 없고, 고통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생명,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이념, 절대적인 선 등 절대적인 제 조건을 갖춘 존재는 어느 누구도 굴복시킬래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153
참된 발판이 될 수 있는 조건
절대적인 사랑을 갖고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선을 갖고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생명과 절대적인 이념을 갖고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요, 지으신 모든 만물 앞에 절대적인 가치로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 절대적이라는 명사를 쓸 수 없는 입장에 계시게 되었으니 그 고충이 얼마나 크시겠으며, 탄식과 슬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대하여 섭리하신다 할진대 인간들이 이념적인 제 조건들을 모두 갖추어서 완전한 발판이 될 때까지 채찍을 들어 치든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목적하시는 곳으로 몰아내는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망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났으면 잘난 사람일수록 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영웅열사들이 자기의 위세를 당당하게 자랑하였지만 다 꺾였습니다. 자기가 바라던 욕망대로 다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는 시대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갈라지면서도 뚜렷한 하나의 목적 밑에서 움직여 나오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와 발판이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치 못한 자리에서 자랑하는 자는 반드시 탄식하며 굴복당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양심, 참다운 이념을 찾아 나가는 이들은 마음 깊이 자기를 살피고, 마음 깊이 자기의 모습을 측량하고, 마음 깊이 자기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를 중심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흘러갔고, 그 문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영원한 천도(天道)가 있어 그 천도 앞에 불변의 발판으로 설 자신을 가졌느냐고 반문할 때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를 재검토하고 재분석하여 새로운 불변의 발판으로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무대를 살펴봅시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를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의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하고, 자기의 가치를 높이 드러내고 싶어하고, 자기의 그 무엇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원하는 모든 것이 평면적인 시대상으로는 나타날는지 모르지만, 종적으로 연면히 흘러나오는 역사와 더불어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역사적인 문제가 개재되고, 역사를 거쳐 나온 인륜도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볼 때 양심은 그 기준을 통할 수 있는 어떠한 목적, 즉 대상을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고 양심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고 양심기준을 세우지 않는 한 시대는 변해 갑니다. 세계는 혁명과정을 거쳐 변천해 갑니다.

한 인간이 생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마음에 의해 몸이 움직일 수 있고, 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목적의식에 의해 생활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자체가 되지 않는 한 완전한 터전 위에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개 국가면 국가, 일개 민족이면 민족을 보게 될 때도 그들이 바라보는 목표가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두가 달라서는 안 됩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이 각각 다를지라도 그 목표만은 하나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0-155
하나의 목표를 향해야 할 인간
사람에게는 희노애락을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이것이 목적의식을 통하여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라면 이 땅 위에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 있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피부색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다 할지라도 소망하는 목표, 고대하는 목적만은 민족을 넘고 역사를 넘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민족 민족이 다르매 그 목적도 각각 다르고 생활형태도 다릅니다. 천태만상으로 다르게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섭리하신다 할진대 반드시 이들을 한 방향으로 수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수습하는 데는 생활을 수습해야 됩니다. 생활을 수습하는 동시에 느끼는 감정까지도 수습해야 합니다. 생활에서부터 감정까지 전체의 분야를 수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온 만물이 다 관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아래서 새로운 불변의 터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불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노정이라 할진대, 우리들은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 국가가 주장하고 있는 이념, 혹은 세계적인 이념,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민족이나 어떠한 국가가 바라고 소망하는 목표도 과정적인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도 목적과 전면적으로 화할 수 있고, 부딪칠 수 있는 결과적인 내용을 갖추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과정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과정적인 한 단계가 남아 있으니 이 과정을 지나 목적지에 가야 합니다.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뒤넘어치는 곡절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변해 오는 역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할진대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를 행복한 곳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위치에서 만족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은 아직까지 목적이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요, 불변의 터전으로 결정난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과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만큼 복잡한 내용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학문을 중심삼고 일체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할진대, 그는 시대적인 행복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인 행복을 즐기면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불변의 터전에 남길 수 있는 영원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에서 만족하는 위치는 불변의 위치가 못 되고 변합니다.

오늘날 국가 정세도 그렇고, 종교도 역시 그렇고, 사회 제도나 모든 것이 그런 과정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거쳐 나가야만 완전한 터전, 완전한 발판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세우신 그 목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역사가 곡절의 과정을 거쳐간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양심의 중심이 되고, 모든 사람의 소망의 목표가 되는 하나님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10-156
심판과 관계없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신앙자
인간은 동기로부터 결과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곡절을 거치며 흘러가는 역사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길을 가야 되느냐? 결과적인 방향을 찾아 나가든가 아니면 반대로 원인적인 방향을 찾아 나가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다가는 망합니다. 목적의 세계를 찾아 나가든가 아니면 원인의 세계를 찾아 들어가든가 둘 중의 한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것입니다.

여기서 원인적인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철학과 종교요, 결과적인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자연과학입니다.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방면에서 목적의식을 느낄 수 있으며, 절대자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으며, 절대자의 불변의 발판으로 섰노라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타락한 인간 앞에 제시된 불변의 명제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처해 있느뇨? 내 자신은 어떠한 위치에 있느뇨? 아무리 과정의 생활을 즐긴들 목적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하등의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생활이 목적과 관계가 없다 할진대 그 과정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고충이 많으면 많을수록 목적의 때에 이르러서는 고통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저의 조건, 갈 길을 가로막는 조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기에 인생 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철저하게 한가지만 알고 나오라고 주장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서 인간을 이끌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고 사람들의 지능이 발달됨에 따라 그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현상을 볼 때에도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세기말적인 끝날에는 신앙자들이 세파에 몰리지 않을 수 없고,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과정적인 노정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거늘 지나가는 과정에서 비판받는다고 낙망하지 말자는 겁니다. 지나가는 역사를 밟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을 가지십시오. 어차피 지나갈 이 복잡한 환경을, 이 과정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신앙만 가지라는 겁니다.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변치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무조건 믿는 것도 좋습니다. 무조건 믿는 데는 알파와 오메가적인 하나님,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이라고 결정해 놓고 믿어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과정을 초월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신앙관을 세우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두 글자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불변의 발판 위에 서게 한다면 복잡하게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을 세우셨다 할진대, 그 본연의 심정에 일치하는 신앙관념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리 끝날이 오고, 말세에 심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심판은 나와 관계 없다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이 땅 위에 벌어지는 모든 죄, 혹은 죄상과 연관된 만사는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나 어디 그래요? 회개하고는 또 죄 짓고 또 회개하고 그럽니다. 죄와 관계없다고 하는 신앙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의 시대가 왔으니 이러한 동기로부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목적의 세계로 간다’ 하는 것을 해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아무리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을 못하는 날에는 반드시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해결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까지의 남아진 과정이 짧으면 짧을수록 한꺼번에 몰아치는 사조를 밟고 넘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갖든가 그것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내용을 갖든가 둘 중의 하나를 갖추지 않으면 망합니다.

10-158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적인 신앙자를 해명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신앙자는 그 누구였으며, 이 시대적인 신앙자는 그 누구인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맞나 안 맞나. 역사적인 신앙자가 누구뇨? 하나님께서 시대를 대신하여 세운 민족의 대표자로서 민족을 이끌고 나갈 불변의 발판으로 설 수 있는 신앙자가 누구인고? 가정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누구인고? 개인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누구인고? 또 세계를 대신하여 나설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그 누구인고? 끝날에 오시는 주님 앞에 신부로 나타날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그 누구인고?

그러기에 역사를 생각해야 됩니다. 역사적인 충신, 역사적인 성현들을 추궁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울러 현재 어떠한 새로운 이념을 따라 나가면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날뛰다가는 어느 구덩이에 빠질지 모릅니다. 대우주를 세우시고 대목적관을 세워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분이 바라보시는 역사적인 본연의 발판은 어디인가? 종교적인 불변의 발판은 어디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를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수백만의 군중을 한꺼번에 규합하고 해체시키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쓸데없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에는 혁명이 있었습니다. 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의 지위를 내놓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돌아가야 할 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쌍한 자리에 들어간 자들이 불쌍하지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세계를 바라보면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것이 결과이고 어느 것이 원인인지 해명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저끄르면, 그 일을 저끄르기 전의 상태로 회복해 놓고야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불쌍하고 처참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이 인류들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이뇨? 새로운 관점을 세워 다시 한번 헤아릴 수 있는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가를 해명하여 원인을 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결과를 통할 수 있는 곳으로라도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망해 버린단 말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도 결과적인 것을 해명하지 못하고 원인적인 것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도 원인과 결과를 해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것을 해명할 것이냐? 여기에 등장해야 할 것이 종교입니다. 어떠한 종교가 나와서 `너희는 어떤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결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대다수가 공인할 수 있는 해명기준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 해명기준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로 끝나야 합니다.

보십시오. 1차 대전까지는 국가를 중심삼은 투쟁인 동시에 경제적인,즉 세계 시장화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외적인 환경, 즉 땅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다 2차 대전에 들어와서는 사람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면 땅을 빼앗고 사람을 빼앗은 후에는 무엇을 빼앗을 것인가?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은 아닙니다. 올바른 양심을 가져야만 사람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양심의 기준은 무엇이냐? 역사를 밟고 올라설 수 있고, 시대를 밟고 올라설 수 있으며, 미래의 목표를 지향시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가 무엇을 주장하여 주위의 수많은 사람을 포섭하였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 가치가 천상에 드러난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못 만들어 놓는 한 지나가고 맙니다.

사람을 빼앗고, 사람을 포섭하는 시대 후에는 어떤 시대가 오느냐? 개개인의 마음을 포섭하는 시대가 옵니다. 그 시대가 마음주의시대입니다. 선을 대하는 방향에 있어서 사람의 마음은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옳다고 할진대는 너도 나도 그곳을 향해 마음이 달음질쳐 가야 되는 것입니다. 달음질치는데는 하루쯤 달려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끊어져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포섭하는 동시에 마음이 영원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충격을 일으키는 주의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10-160
변치 않는 심정의 터전을 찾아가는 복귀노정
마음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발동하면 생명의 고개를 넘고 그 시대의 모든 것도 다 넘어 어떤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끝까지 달음질치겠다는 신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는 주의가 나와야 됩니다. 나아가서 그런 마음을 더 크게 하려면 심정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위하는 마음은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세력가, 어떠한 권력가도 막을 수 없고, 제재할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자연원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의 마음은 평면적이지만, 이 마음 안에 하나님도 좋다고 들어오실 수 있고, 인류도 좋다고 뛰어들어올 수 있고, 하늘땅의 온 만물도 좋다고 뛰어들어올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간절히 사랑하는 그 사랑의 본의는 내 자식만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천심과 통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가 형제요 자녀로 보입니다. 그 심정을 통한 자리에서는 만민이 형제요 만민이 내 지체인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만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불변의 동력이 우리의 이념과 더불어 하나의 존재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 불변의 터전으로 세워지지 않는 한 세상일은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해결지어 완전한 불변의 발판으로 설 자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부입니다. 오실 주님을 모실 신부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간시간 변하는 것들을 신부로 맞겠습니까? 안 맞습니다. 절대로 안 맞을 거예요.

내게서 물질을 빼앗아가고, 몸뚱이를 빼앗아 가고, 마음을 빼앗아 가도 나의 이 사랑만은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동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요 이 심정만은 하나님의 것이요 땅의 것이요 인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면 그로 말미암아 세상만사가 다 풀릴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식혁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의식혁명은 문제가 아니예요.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종교가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세계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물론 약간은 있겠지만 진정 하늘이 세운 종교로서의 사명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지쳐 버린 그 때에, 다시 한번 마음을 수습해서 천륜을 향한 대행군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바라보며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신천신지의 이념을 품고 그때를 소망으로 바라보며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욥’ 같은 사람을 보세요. 자기의 재산, 자기의 자녀, 자기의 모든 것 다 빼앗아 가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물질을 다 빼앗아 가고, 사랑하는 자녀를 빼앗아 가고, 그에 속한 일체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어떠한 환경의 공포에도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굴복당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불변의 한 터전을 찾기 위하여 인간도 복귀노정을 헤매어 나오고 있고, 하나님도 복귀노정에 있는 인간들을 붙들고 그 터전을 개척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땅을 빼앗는 싸움, 사람을 빼앗는 싸움을 해 왔습니다. 유물론은 사람의 몸뚱이를 끌어가려는 이론입니다. 거기에는 마음과 영원한 이념과 천륜의 대목적과 더불어 동행할 수 있는 심적인 이념이 없습니다. 그런 이념을 세우는 것이 종교의 사명입니다. 그런 이념을 확대시켜 우리가 세계적으로 혹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는 한 때, 한 시대, 혹은 한 세기를 바라며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10-162
재확인해야 할 자신의 생활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밥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입증할 수 있습니까? 아들딸을 대해 네가 내 아들딸이 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혹은 어떤 지도자로서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이렇게 해야만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저 말로만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는 필요없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것이 결과인 동시에 근본이다. 인간은 어차피 그 자리를 통과해야 된다’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이념도 필요없습니다. 과정적인 현상에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생활을 재감정하고 재분석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갈 때에 한 발을 내놓고 `이놈의 발아, 너는 천륜의 대이념세계와 더불어 보조를 같이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향하고 있느냐’하고 물어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량한 인간입니다. 뭐 잘났다고 꺼떡거리고 나불대도 처량한 인간이예요. 생활이 그러하니 사회가 그러하고, 사회가 그러하니 국가가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하니 현실세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동에서 불면 서쪽으로, 남에서 불면 북쪽으로 밀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리 덤벙 저리 덤벙 합니다. 행동 일체를 천륜 앞에 세울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나가다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뇨. 결국에는 깨져서 하나님의 서러움과 인류의 서러움으로 종결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불변의 발판이여, 참의 발판이여 나타날지어다! 참의 터전이여, 내 마음문을 개방하고 내 몸과 생활문을 개방하여 나를 찾아 줄지어다!’ 세계적인 공포와 위협에 휩쓸리는 절박한 이 시대에 있어서 참된 양심을 가지고 외칠 것이 있다 할진대 이것밖에 없습니다. `참다운 발판이여, 이 민족 앞에 나타날지어다! 참다운 터전이여, 이 민족 앞에 개방될지어다’ 하게 될 때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참다운 국토요, 참다운 주권이요, 참다운 백성이요, 참다운 기관이요, 참다운 개인이요, 참다운 문화가 됩니다. 허수아비처럼 춤을 추고 있는 현실의 자아를 무자비하게 비판하여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하도록 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 있어야 됩니다.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동기도 잃어버린 현실을 넘어야겠다는 충격을 일으킬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핍박받는 무리들이여, 낙망하지 말지어다. 쫓김받는 무리들이여, 절망하지 말지어다. 몰리고 쫓김받는 무리를 통하여 역사는 혁명되어 나왔으니,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걸어나온 빛나는 역사의 터전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할진대 낙망하지 말지어다. 과거를 지나 현실을 넘어 내일과 인연맺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졌다 할진대 힘있게 싸울지어다’ 하고 외치면서 참고 연단하여, 끝날 세계적으로 몰리고 쫓기는 현상이 벌어질 때에 역사의 전기를 마련하는 동기나 결과는 되지 못할지언정 망하는 인류로 하여금 일어서서 넘어가게 하거나 돌아서게 하는 무리라도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좁은 문을 찾아왔습니다. 사방으로부터 맞고 비판받는 통일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사명은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원인이 되든가 결과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는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원인을 향한 행군나팔이나 결과를 향한 행군나팔이라도 불 수 있는 사도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 중 하나의 사명이라도 담당할 수 있는 종교, 기관, 민족, 주권이 있다 할진대 이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10-164
동기와 목적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역사
보십시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목적 없이 창조하셨겠어요? 반드시 창조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목적이란 개체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즐거워하는 동시에 개인이 전체의 가치를 노래하여 전체가 그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전체는 하나를 빛내기 위한 것이요, 하나는 전체를 빛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어떠한 주의, 사상을 가지고 지배하고 있는 선전국가들이 전체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지극히 작은 국가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책임을 하지 못하면 망합니다. 앞으로 미국 같은 나라는 자기들의 보따리를 전부 풀어 저 미개한 민족과 더불어 생활하고 더불어 즐거워하고 같이 울 수 있어야 됩니다. 너희들의 행복은 우리들의 행복이요, 너희들의 고충은 우리들의 고충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서 침질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나왔습니다. 안 나오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방편상으로도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지극히 적절한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 물결같이 휩쓸려 다니는 청년 남녀들, 혹은 배운다는 사람들, 그들의 가슴을 한번 헤쳐 보십시오.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남아 있는지 보란 말입니다. 이들이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지 못합니다. 안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종교인을 대하여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원인인 동시에 결과입니다. 그의 가치를 어느 정도까지 압니까?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생활,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몸,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마음,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심정이 되어 있느냐? 여러분은 그 가치를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교회에서만 하나님이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종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하나님이다, 어느 교파는 이단이다, 하는 따위의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 두라는 거예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오래 가나 두고 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앞으로만 나갈 줄 알지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모릅니다. 만일 앞서 가는 사람이 계속 나아가지 못하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그 앞 사람을 밟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행군해야 할 운명의 노정에서 처참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관념으로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신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통일교회는 한 교파로 나와 가지고 갖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개인의 어떠한 주관적인 관념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동기와도 멀고 목적과도 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동기와 목적을 중심삼고 가자고 외칠 수 있는 무엇이 나온다면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곳입니다. 동기와 목적을 갖고 세계를 넘어 가지고 외칠 수 있는 움직임이 나온다면 그것을 통하여 세계는 수습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이요, 복귀노정에서 맺힌 한을 푸는 것입니다.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어차피 풀어 놓아야 할 인류의 운명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도 동기는 하나님입니다. 목적도 역시 하나님에게 귀결됩니다. 그러면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누구냐? 사람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예요.

원인과 목적을 전부 붙들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이뇨? 인류역사도 아니요 사회적인 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원인과 동기를 통할 수 있는 사람을 해명하고 입증하여 그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한 피어린 행로입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마음대로 역사를 몰고 변경시킬 수 있느냐? 천만에요, 왜? 여러분은 자신의 동기를 돌릴 수 없고 결과적인 현상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신의 동기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창조주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마음의 동기를 시간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돌이킬 수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여러분은 동기가 아닙니다. 또, 여러분들은 어떠한 결과적인 현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피할 수 있어요? 그렇게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기에 큰소리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166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최후의 발판
여러분은 동기와 결과를 돌이킬 수 없는 인간입니다. 낙인이 찍힌 타락한 종족밖에 안 됩니다. 아무리 큰소리해보았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동기의 주체요, 결과의 주체입니다. 동기와 결과는 서로 주고 받아야 됩니다.

내가 하나의 중심이 되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또 나의 마음을 만물 앞에 돌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면 동기와 결과에 대한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마음은 동기적인 하나님과 왕래하고, 몸은 결과적인 세계와 왕래하면 나중에는 오른손에 동기의 하나님, 왼손에 결과의 하나님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왈,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하나님을 중심삼은 동기적인 주체와 결과적인 환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중심삼고 결과적인 환경과 동기를 결속하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갖고? 인륜도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 식구의 인연, 즉 가정적인 인연을 가지고 결속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최후의 발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면 자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자녀들을 여러분의 영원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위로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 또한 영원불변의 발판이 못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인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러한 환경을 청산하여 새것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사랑으로 아들딸을 세워서 종족을 만들고, 민족을 만들고, 백성을 만들어서 무엇을 할 것이뇨?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체가 되시고 당신의 아들딸로 하여금 종족, 민족, 백성, 그리고 하늘과 땅과 온 피조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아들딸로 하여금 참의 재료, 참의 발판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있다 할진대는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나갈 것임에 틀림없거늘, 이런 하나님을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되겠느뇨? 하나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신앙은 그만두십시오. 개인을 주장하는 자는 친구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제일주의로 나가는 사람은 씨족을 잃어버립니다. 종족을 잃어버려요. 민족을 위주해 나가다가는 국가를 잃어버립니다. 국가를 위주해 나가다가는 세계를 잃어버립니다. 세계를 위주해 나가다가는 하늘땅을 잃어 버립니다.하늘땅을 위주해 나가다가는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밟고서 가정을 붙들고, 가정을 밟고서 사회를 붙들고, 사회를 밟고서 국가를 붙들고, 국가를 밟고서 세계를 붙들고, 세계를 밟고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천륜이 움직여 나오는 공식입니다.

10-167
신앙의 근본목적
내가 믿고 천당 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믿어서 가정을 구원시키겠다는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믿어서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고 하나님을 해방시키겠다는 신앙, 이것이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반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을 위하여 나는 싸울 것입니다.

통일신도 여러분,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천국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의 끝을 지나야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 혼자 천당 가겠다는 신앙을 하다 보니, 전부 내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교회도 잡아먹고,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삼켜 버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앙노정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재료가 되는 위치를 떠나, 나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체를 배반한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6천년 복귀섭리 역사노정에서 천륜의 대역사를 위한 재료로 쓰여야 할 인간이 이 재료를 내것으로만 삼으려 했던 것, 이것이 사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관념을 타파해야 되겠습니다. 현실세계에 이러한 신앙사조가 흐르고 있거늘, 이것을 깨뜨려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목표아래 나가는 것이 통일신도입니다. 일요일 아침 9시만 되면 사방에서 교회 종소리가 울립니다. 들려오는 그 종소리는 처량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개인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목표는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세계의 구원입니다. 믿는 식구를 붙들고 사랑할 줄 모르고, 믿는 형제를 붙들고 사랑할 줄 모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본질이 틀렸으니 혁신해야 됩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주장이 아닙니다. 천도가 그래요. 천륜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일개 국가의 충신 중에 사랑하는 처자가 가는 길을 막는다고 해서 `그래, 네 말이 옳다’ 하고 발걸음을 멈춘 사람 있어요? 그들을 밟아 치우고 갔습니다. 그래도 정 말을 듣지 않으면 칼로 그들의 목을 치고 나라를 위해 나갔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선이 향하는 목표는 나 하나를 발판으로 하여 둘로 연결짓고, 이 둘을 발판으로 하여 넷으로 연결지어 세계적으로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전세계까지 퍼진 다음에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몸뚱이가 아니라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하나님은 무형의 하나님이시고, 몸의 하나님은 앞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근본목적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놀음이요, 잃어버린 주인을 찾는 놀음입니다. 자기를 찾는 놀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자기를 찾으려고 헤매던 모든 유대교인과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찾으려 하다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단 말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일개 교회만을 위해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될 거 아녜요? 자기만 위주한 신앙은 눈 먼 신앙입니다.

10-169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인 심정의 세계
결과와 동기의 환경을 뚫고 넘어가야 할 시대가 종말시대입니다. 이 종말시대에 세계적인 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민주와 공산의 두 사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둘은 하나에 제일 가깝습니다. 둘이 합하여 들어가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유엔기구를 보십시오. 그렇게 되나 안 되나. 하나의 세계는 필시 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목적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그 목적 밑에서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여 나오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민족주의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세계의 어떠한 사조와 주의를 중심삼고 부르짖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주의가 남아 있다 할진대, 만민의 양심을 공통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심정과 접속시킬 수 있는 심정주의 밖에 안 남아 있습니다. 만일에 이 심정주의가 우리 인간에게 스며든다면 역사적인 모든 것을 일시에 혁명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지요.

하나님의 심정과 백퍼센트 인연되어 `당신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불변의 발판 위에 선 사람에게는 세상의 정이니 뭐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시에 그림자도 없이 백퍼센트 혁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 땅 위의 인간들 가슴에 부딪쳐 와야만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구원섭리를 하신다 할진대 어떻게 하실 것이뇨?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실 것이냐?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몸을 편안하게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붙들면 영원히 계속 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와 결속해야 됩니다. 이 심정의 세계는 한번 사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붙들어도 붙들어도 영원토록 붙들고 싶은 세계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이념은 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상은 사랑의 요소를 떠나서는 완결지을 수 없습니다. 논리나 어떠한 조직적인 형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심적 기반을 움직이고 심정적인 기반 위에서 안식시킬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인정을 초월한 천정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 땅위의 만민을 일시에 움직여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의 새로운 문이 개방된다 할진대 세계의 구원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빨강인가 노랑인가만 구별시켜 주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이란 것만 가르쳐 주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심정의 세계는 설명을 초월하고 견해를 초월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거기에는 무슨 관이 없습니다. 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조건이 있을 때, 즉 원인과 결과가 상대적인 위치에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세계에서의 원인이 되는 주체는 영원한 주체요, 결과가 되는 대상은 영원한 대상으로서 둘인 동시에 하나이니 관이 있을 수 없지요. 심정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런 심정의 세계가 이 땅 위에 벌어지는 날에는 천지가 되살아날 것입니다.

10-170
인류 앞에 남아 있는 최후의 혁명
하나님이 이상적인 창조주요, 인간을 대해서 만우주와 결탁한 영원불변의 발판을 만들고자 하신 창조목적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무엇을 중심삼은 목적일 것이뇨? 심정입니다. 보고 또 보고 영원히 봐도 좋은, 싫다는 말을 생각할 수도 없는, 눈 하나를 보고도 영원히 좋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인간을 지었어야 멋진 하나님 아닙니까? 이러한 심정으로 충만된 세계가 천국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알아요? 하나의 존재를 대하여 천년을 감상해도 다 감상할 수 없는 곳입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동산에서 본연의 주인을 맞이하여 본연의 심정을 통하고 천정과 인정으로 결속하였더라면 세계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도 사랑 때문에 죽고 살고 야단인데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으면 어떻겠습니까?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원칙과 기준을 잃어버린 인류는 허덕이게 되고 통곡하게 되며 방황하고 유린당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망하면 하늘 원망, 땅 원망, 역사 원망, 시대 원망…… 만사를 원망으로 시작하여 원망으로 끝맺게 됩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천륜이 남아 있고 우리가 모르는 깊은 심정의 기반위에 천도를 세워 나가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접촉할 수 있는 그 면이 동에 있느냐 서에 있느냐 남에 있느냐 북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차이, 혹은 거리가 멀어서 지금 당장은 접할 수 없지만 세계적인 끝날에는 만민이 공동으로 찬양할 수 있고 공동으로 접할 수 있는 한 때가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전부 불심판으로 죽여 버린다고요? 죽여 버리려면 벌써 죽였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 둘만 있을 때 죽여 버렸으면 오죽 좋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시대적인 각성을 하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각성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가만히 보면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과학도 다 끝까지 왔습니다. 이제 인류 앞에 최후의 혁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혁명일 것이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인간의 양심혁명, 심정혁명입니다. 이것을 제시할 수 있는 천지운세가 반드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행차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영계에 있는 천사장을 시키고, 아들을 시키고, 성신을 시켜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심정을 접속시키는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천사를 시켜서 역사하셨고, 신약시대는 아들을 세워서 역사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는 천적으로 볼 때에 백성을 수습하기 위한 시대요, 신약시대는 자녀를 수습하기 위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낙원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끝날에는 새로운 것을 통하여 구약과 신약,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심정적으로 접붙일 수 있는 한 때가 나와야 합니다. 이 때에 주님이 오십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주님은 신랑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오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천사장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천사장의 마음 바탕도 가르쳐 주고, 아들의 심정도 가르쳐 주고 아들의 마음 바탕도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접붙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영원한 세계와 관계를 맺지 못한 타락한 인간들 앞에, 불을 내려 심판해야 마땅한 무리들 앞에 진정한 당신의 종들을 보내시어 그 종의 심정을 본받게 함으로써 종의 신분이 되게 하시고, 아들을 보내시어 아들의 심정을 통하게 함으로써 아들의 신분이 되게 하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때가 말세입니다. `내 아버지’ 할 수 있고 `오!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세계는 완결됩니다.

10-172
사랑으로 인간을 품으려 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동기가 하나님이요, 영원한 결과는 아들이요, 영원한 과정적인 인연은 피조만물이거늘, 아버지와 아들딸이 사랑으로 붙안는 그 시간에 천지도 안기지 않겠습니까? 원인도 나로 인하여 해결되고, 결과도 나로 인하여 해결되고, 과정도 나로 인하여 해결되면 과정의 투쟁역사 속에서 세계적인 이념을 찾아 나오던 이 세계도 내 품에 안길 것이고, 만사는 해결될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발판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요, 만왕의 대주재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를 세워 만우주에 사랑하는 혈족을 만들고 만민을 백성으로 삼아 만국통치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성했습니다. 그런 기독교를 세운 것은 기독교 일파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가야 할 기독교 이념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념을 저버림으로써 중세 봉건사회는 망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군주사회로 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들 멋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민주사회로 넘어왔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과 백성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무엇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무슨 주권자, 무슨 교회라는 것이 필요 없어요. 아버지와 내가 직접 관계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대통령이니 무엇이니하는 것은 모두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만민에게 아버지의 심정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깨뜨려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탄편의 주권을 깨뜨려서 봉건사회에 기독교의 주권을 세웠고, 다음에는 군주사회를 세웠고, 이것을 또 깨뜨려서 민주사회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주권을 잡아 `아버지!’할 수 있는 한날이 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은 무참히도 짓밟혔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마음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한 불쌍한 무리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아야 됩니다. 악한 세계의 주권을 다 때려부수고 가르고 또 갈라서 만민이 평등하고, 대주권자와도 `너자 나요, 나자 너다’ 할 수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이 군림하셔야 됩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역사는 흘러나왔으나 하나님은 그 배후에서 선지선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면서까지 종말의 이념을 세우시고, 여기에 결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 등 모든 자유와 권한을 부여하여 구속이 없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운세를 만들어 나오셨습니다.

민주주의를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아들로 품기 위한 크나큰 사랑 때문에 만들었습니다. 옛날의 주권자들은 종으로 품었고, 혹은 심부름 시키는 백성으로 품었지만 그것은 다 거짓 것이기에 하늘은 참된 종을 보내시어 악한 원수의 품에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는 무리를 품게 하셨고,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아들을 보내셔서 죽으면서라도 인간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무너뜨려 온 것입니다. 종을 보내서 품게 하실 때에는 사탄세계의 종된 입장의 모든 주권자들을 물러가게 하고, 아들을 보내어 품게 하실 때에는 사탄세계, 악한 세계의 아들적인 모든 주권자들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적인 주권시대를 향하여 몰아내고 있습니다. 이는 종족과 혈족을 초월하여 같은 양심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제도도 개재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식도 초월합니다.

10-174
이상세계를 향한 행군
사랑의 법도, 이것은 천륜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법도입니다. 만일에 벗어난다면 공포가 스며들어 파괴되어 버립니다. 오늘의 죄악된 세상에서는 죄를 지어도 그 보응이 역사성을 두고 오지만 앞으로 심정세계에서는 어떠한 잘못을 하면 시간성을 초월하여 그 보응이 즉각적으로 옵니다. 그러니 그 세계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세계가 이상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내 피살과 세포까지 통합한 심정의 기반 위에서 아버지와 아들딸이 상봉할 수 있는 날이 와야 되겠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 할진대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그 이상 복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참부모를 찾고, 참주인을 찾고, 참백성을 찾고, 참국토를 찾아 하늘에 있는 모든 영인들과 지금까지 죽어간 모든 선조들과 앞으로 수천만대 후손들까지 전부가 하늘 백성으로서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사랑의 세계, 사랑의 가치, 사랑의 윤리, 사랑의 법도 등 사랑의 모든 조건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이상세계입니다. 이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회에서 온갖 모략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습니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수십년의 생애를 이것을 위해 달음질쳤습니다. 내 생명이 끊어지면 끊어진 그 터전 위에서 다시 이 봉화를 들고 달릴 자가 있으리라고 나는 자신합니다. 죽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서 달릴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은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가 이슬같이 쓰러져 사라질 줄 알았으나 하나님께서 부활의 역사를 행하시니 도망갔던 제자들도 이 부활의 역사를 이었습니다. 원한스러운 죽음을 발판삼아 세계를 향하여 행군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 철두철미한 신념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정성으로도, 어떠한 수단 방법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만일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놀음 안 합니다. 어느 누가 욕먹기를 좋아하고, 어느 누가 억울한 자리에 있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자리에서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멱살을 잡고 달려들 것입니다. 무엇이 모자라서 이런 놀음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참고 또 참아왔습니다. 이 참음은 내 참음이 아니요, 아버지의 참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걸어오셨습니다. 인류의 불변의 터전을 닦기 위하여 아버지는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니 내 어이 그길을 즐거이 가지 않으리요. 또 아버지께서는 이 터전을 닦기 위하여 땀 흘리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한 날도 아니요, 7,80년도 아닌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한 사람도 아닌 많은 선조들을 죽이고 눈물을 흘리며 나오셨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 죽음은 예수 일신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 죽음은 그때까지 죽음의 길을 간 수많은 사람에 대한 보응이요, 승리의 열매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앞에 생명의 문을 개방하신 것입니다. 예수도 이렇게 오셨다가 가셨거늘, 오늘날 우리들이야 천만번 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매장됨으로써 민족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몸이 밟혀서 민족이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밟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밟힘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요, 밟힘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10-175
하나님이 만나고 싶어하시는 무리
여러분, 이제 우리는 천성문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여 두 주먹을 불끈쥐고 하늘 앞에 맹세하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편단심, 편편이 움직이는 세포 하나도, 뻗어 흐르는 혈관도, 말없이 움직이는 신경도, 우리의 의식적인 모든 것이 하늘 앞에 맹세한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먹는 것도 그 일 때문이고, 듣는 것도 그 일 때문이고, 보는 것도 그 일 때문이고, 말하는 것도 그 일 때문이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역사노정에서 사람을 보고 싶어하셨으나 볼 사람이 없었고, 말하고 싶었으나 할 사람이 없었고, 대하고 싶었으나 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대신 민족 앞에 말해 줄 수 있고, 하나님 대신 대해 줄 수 있고, 하나님 대신 보여줄 수 있다 할진대 우리 개체가 쓰러지고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사라지는 자리에 처한다 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인 것을 아는 우리들이라 할진대, 자녀의 명분을 찾아 책임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예시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어서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는 `내 마음속에 사탄이 우거할 수 있는 불평 불만의 요소를 모두 제거시키시옵고, 기쁨의 웃음과 더불어 오늘을 힘있게 살게 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무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이렇게 험하고 불쌍한 천지에, 소망을 둘 수 없는 이 땅 위에 한무리에게라도 소망을 남겨야 할 하나님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민족입니다. 후진국 중의 후진국으로 선진국의 원조를 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원조를 받기보다도 내적으로 하나님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원조는 받고 내적인 하늘의 원조를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이 민족을 동정하여 후원해 주는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후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그것을 아는 날 세계 만민 앞에 억천만배의 보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그런 것입니다. 사망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잉태됩니다. 파괴와 건설, 부패와 소생은 한 점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만민이 동정하고 후원해 주는 이면에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천적인 의미에서 지상을 대한 섭리적인 운세가 우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을 찾아온 이 뜻은 교단 앞에 몰리고, 가정앞에 몰리고 개인 앞에 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틀림없으니 낙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옛날의 선지선열들 중 어느 누가 이러한 길을 가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의 생애를 헤아려 보십시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민족을 품기 위하여 오셨던 그분을 민족이 배반하다니 이게 웬말이뇨.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조성한 유대교단을 품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 앞에 교단이 반기를 들다니 이것이 웬말이뇨. 국가에 몰리고, 교회에 몰리고, 가정에 몰리고, 형제에게 몰리고, 사랑하는 세 제자한테까지 몰려 나중에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영원히 죽은 줄 알았는데 재출발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원컨대 우리 통일교인은 그렇게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입장에라도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의 것을 맞이할 때가 올 것입니다.

10-177
목표에 이르지 못한 한 때문에 부활한 예수
나는 개인이 아닙니다. 내가 죽은 자리에 있을 때에는 영원히 개인이로되, 살아 있는 생명의 주권과 더불어 있을 때는 개인이 아닙니다. 몰리는 자리, 불쌍한 자리에 처하고, 쇠사슬에 묶여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그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홀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실증을 통하여, 생활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싸움터에서 쓰러져서 발길로 차이더라도 `이놈아 내가 있으니 낙망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거늘 내일도 그럴것이라는 심정적인 발판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과 인연맺은 사람이라면 옥중에 가도 무지한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 줍니다. 몰리어 처마 밑에서 잠자는 신세가 될지라도 그 부락에 양심적이고 천륜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밤잠을 안 자고 찾아 헤맬 것이요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찾아 줄 것입니다. 이렇게 전후, 좌우, 상하로 하늘과 관계되어 있는 한, 시대적인 핍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다가 거꾸러지면 일어나서 또 가고 열 번을 거꾸러져도 또 일어나 가고, 만약에 생명이 다하여 쓰러지게 되면 영적으로라도 가야 합니다. 가야 할 곳을 다 가지 못한 한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물리치지 못한 대원수 사탄부대를 우리가 연마한 칼로 쳐서 쓰러뜨리고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탄의 종족이 굴복하는 날까지 행군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눈 앞에 바라보이는 곡절과 만상을 보고 낙망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나를 안타까이 보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슬픔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개인의 생애노정을 가면 그만이지만 역사적인 섭리를 품고 나오시는 아버지께서는 내 생애를 지나 미래까지 허덕이셔야 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마음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더 간절히 나를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할진대 그 누가 어떻게 안 가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로해 드립시다. 영원한 발판이 없는 하나님을 우리들이 위로해 드립시다. 심정의 발판이 없어 애를 태우는 예수의 처참한 모습, 겟세마네동산에서 홀로 찬이슬을 맞으며 풀뿌리를 부여잡고 호소하며 눈물짓던 초초한 예수의 모습, 누가 예수를 그러한 모습으로 만들었습니까? 온 세계 인류가 공히 역사의 심판대 위에 서서 공동적으로 죄의 탕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소망하였습니다. 그는 믿어 주었습니다. 자기를 못박고 쫓아내는 그 무리들을 믿고 갔습니다. 배반하는 제자들을 믿고 갔습니다. 그렇게 믿었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배반한 자, 역적된 자를 탕감 없이는 다시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천륜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배반한 제자를 찾아갈 수 있었던고? 빌라도 법정에서도, 최후를 맞는 순간에도 베드로를 믿어 주었습니다. 배반의 자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베드로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믿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믿어 주었기 때문에 부활한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도 사탄이 반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동기가 되어 제자들을 다시 몰아 지상복귀운동의 선봉에서 깃발을 들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죽기는 매일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한스러운 역사적인 원한을 탕감하고 해원해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이것을 해결지어야 합니다. 먹어서 안 되거든 굶고라도 가야 되겠고, 입어서 안 되거든 벗고라도 가야 되겠고, 자고서 안 되거든 밤을 새워서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남의 신세를 지면 안 됩니다. 만일 신세를 졌을진대 내 피와 땀을 흘리고 내 살과 뼈를 깎아서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 앞에서 천륜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의 위신을 백 퍼센트 세울 수 있고, 하늘이 바라는 승리적인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승리의 발판, 승리의 그 발판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시는 줄 아십니까? 학교를 바라보면 학교도, 사회를 바라보면 사회도, 교회를 바라보면 교회도, 어떠한 정당, 어떠한 재단, 어떠한 기구를 보아도 승리의 발판은 다 막혀 버렸습니다.

10-179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인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일편단심 한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있는 천국백성들은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할 것이뇨? 지혜로 갈 수 없으면 땀과 눈물로, 땀과 눈물로 갈 수 없으면 피로라도 가야 합니다. 우리의 땀을 하나님의 땀으로,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로, 우리의 정력을 하나님의 정력으로 바쳐야 합니다. 피는 하나님을 위해, 눈물은 인류를 위해, 땀은 땅을 위해 흘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땅과 인류가 상봉할 수 없는 원한의 터전을 여지없이 밟아 치워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내 생활감정이 `하나님의 일이자 나의 일이요, 나의 일이자 땅의 일이요, 나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 나를 중심한 천적 가치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하늘은 하늘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땅은 땅대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하늘을 찾고 보니 인류를 잃어버린 상태였고, 인류를 찾고 보니 하늘과 땅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천적인 심정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감정을 통하여 그것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요, 땅의 일이요, 인류의 일인 동시에 나의 일이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로 종결지은 하나의 이념적인 기준, 영광된 승리의 모습을 갖추고 쌍수를 합장하여 `잃어버린 것을 찾아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들딸들을 천상에서 상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만민이 모인 호화로운 자리에서 만나기를 소망하는 것도 아니요, 행복의 동산에서 만나려는 것도 아닙니다. 피 흘린 터전위에서,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복잡한 환경에서, 싸우는 도장에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 중에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는 자는 아버지를 못 만납니다. 피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 만민이 중심을 잃어 혼란하고 혼돈된 자리에서, 생사가 뒤넘어치는 자리에서 승리의 모습으로서,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냐, 내 아들아, 너는 이제까지 천상에서 바라던 내 아들이다. 만민 앞에 세우고 싶었던 내 아들이다. 천상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내 아들이다’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말씀드린 참된 발판, 참된 인류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과 인류의 행복의 기점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일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어 걸음을 걷지 못하고 뒤넘이치면서 이것을 책임지겠다고 엎드려 호소하는 자가 있거든 그의 무릎 앞에 머리를 묻고 통회하십시오. 처참하고 절망스러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한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자리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위하여, 뜻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며 나아가는 무리가 있거든 결사적으로 그들을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 이러한 양심적인 인사가 이 민족 가운데서, 특히 이 민족의 청년 남녀들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으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원 불변의 이념적인 발판입니다. 이 모습이 비록 헐벗고 굶주리고 갖춘 것 없다 할지라도 심정에 있어서는 제가 아니면 당신의 손을 붙잡아 줄 자가 없고, 제가 아니면 당신의 옷을 매만져 줄 자가 없고, 제가 아니면 당신의 신발을 고쳐 줄 자가 없습니다. 당신의 어느 한 부분도 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무리들이 모이는 날에는 싸움을 하지 않고도 이 사탄천하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합니다. 한 목적을 위하여 가는 우리는 형제입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가 아니라, 너자 나요 나자 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싸움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형제를 보고 밤잠을 못 이루고 그 자리에 나의 피를 가하겠다고 하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도, 땀을 흘리는 자리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산 발판, 승리적인 발판이 여러분의 심정을 통하여 세워질 때까지 여러분, 낙망하지 말고 가십시오. 그러면 필시 여러분 앞에 천주적인 대승리가 올 것이라고 나는 자신합니다.

10-181
기 도
아버지, 당신은 너무도 저희를 사랑하시기에 그러한 길로 오라 하신다는 것을 안 저희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겠습니다. 슬퍼도 가고 욕을 먹어도 가고 밟혀도 가야 되겠습니다. 하도 큰 사랑이요, 하도 큰 은사이기에 이 한국은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사옵니다. 무엇으로 아버지께 보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몸을 굽혔사오니 당신의 뜻대로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많은 생명들이 참석했사옵니다.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를 명시하여 과정적인 이 세계를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신념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못한다면 현실을 넘어 미래의 일이라도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여기에 모인 이들, 생활의 일편이라도 하나님의 참된 발판, 하나님의 참된 터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 마음 심정의 일편이라도 그러한 터전을 갖추어 이 악한 세상에 보여줄 수 있고, 이 악한 세상을 수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리고 당신의 아들딸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하오니, 모든 것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