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 to 10-145: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
1960.09.18 (일), 한국 전본부교회

10-120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
요한복음 14:1-6

[기 도]

역사는 지났을망정 오늘 이 시간 저희들은 멀지 않아 십자가에 달리실 몸으로 민족 앞에 나타나신 예수의 초조한 형상을 대할 수 있고 접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얼마나 섭섭하셨으며 얼마나 분하셨으며 얼마나 외로우셨으며 얼마나 억울하셨사옵니까? 그때 택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늘을 위하고 하늘을 받든다는 사람은 많았사오나, 진정 하늘을 위하여 이슬같이 사라질 최후의 길,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그의 소매자락이라도 붙들고 눈물짓는 이가 없었다는 원통한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한스러웠던 그날, 땅 위의 무지한 수많은 인류는 물론이거니와 아버님께서 4천년 동안 피어린 역사를 엮어오시면서 피의 제단을 연하여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통곡하고 통곡하여도 풀 수 없는 원한이 그 한 시간에 맺혀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억울한 심정을 품고 가야할 길을 염려하시는 예수를 재촉하여 몰아낸 이 분한 사실을, 뼈살에 사무치는 이 원한을 오늘 저희들이 천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현실적인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분은 저들을 위하여 오셨사오나 저들은 그분을 몰아쳤고 십자가에 못 박았사옵니다. 이처럼 천륜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무리, 지옥불 중에서도 꺼지지 않는 유황불에 들어가 마땅한 무리들이오나 그래도 고난의 길을 넘고 십자가의 길을 거치고 시대와 세기의 연속된 피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면서 남아진 무리를 찾고 그러한 무리를 이뤄놓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저희는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이옵니다.

하늘을 찾아나가는 데는 자기의 모습을 들어 자랑할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려는 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았사옵니다. 여기 모인 저희들, 누구를 위해 왔사옵니까? 믿는 것도 자신을 위하여 믿는 저희들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이라는 두 글자를 앞에 놓고는 그 목적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요, 주를 위한 것이요, 민족과 하늘 땅을 위한 것임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과거에는 저희들이 일신의 구원을 위하여 믿었사오나 이제는 보다 큰 천주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한평생을 이런 심정으로 싸웠고, 한평생을 아버지와 더불어 살았고, 아버지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역사적인 종단을 향하여 급속도로 변해가는 혼란한 시대에 처해 있사오나 저희의 중심만은 아버지의 것으로 바쳐지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으로 드리기 원하오나 아버지께서 받으시기에 합당치 못한 저희가 아닌가 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날도 부족한 자신임을 아버지 앞에 직고하면서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과 사랑의 심정과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 모였사오니, 이 한 시간 땅 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아버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아버지의 뜻을 노래할 수 있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찬양할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무리가 아버지 존전에 머리를 숙였사온데, 아버님, 제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많은 말보다도 당신과의 인연을 두터이 할 수 있는 심정만이 우러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과거를 뉘우치고 오늘의 부족함을 깨달아 아버지께서 찾고자 하시고 세우고자 하시는 본성의 한 모습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나설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세상의 그 무엇을 갖고 이 자리에 임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분부하시는 아버지의 은사 앞에 동하여 뼈와 살이 다시 빚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남한 각지에서 서글픈 심정을 아버지 앞에 털어 놓고자 많이 모인 것을 당신은 아실 줄 믿사오니, 이 시간 그들에게 같은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또 멀리 바다 건너에서도 수많은 형제들이 핍박받고 시련당하는 환경 가운데서 이 시간 뜻을 위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아실 줄 믿사오니,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표준으로 하여 싸우는 저희들, 그 표준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 앞에 승리자가 될 때까지 한 심정, 한 사정, 한 식구로 단결하여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체를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전체를 아버지 것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10-122
말 씀
여러분들에게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입니다.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0-122
이 땅에 참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섭리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되신 연고로 그의 손을 거쳐 지음받은 모든 것은 참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이기에 이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도 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존재 세계를 창조하신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앞에 모든 피조물은 참된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는 참된 분으로 남아 있으되 창조함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참의 가치를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참에서 시작하였으니 영원히 그 참의 가치를 노래하는 천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지가 되었던들, 오늘날 우리 인생의 어느 일면을 들춰 보아도 참과 인연맺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그러하지 못하니 이 이상 슬픈 일이 없고 이 이상 근심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참의 주체 앞에 참의 가치를 중심삼고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기 존재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전체와 개체라고 하는 차이는 있을망정 그 가치에 있어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가 되었던들, 오늘날 모든 존재물은 행복한 자리에 머물지 않을래야 머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참되신 분, 지극히 참되신 주인이 계신 그 세상은 우리의 소망으로서만 남아 있으니, 다시 그러한 세상을 찾아 나아가 지극히 참되신 그분 앞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입니다.

그러면 참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참이란 시작한 그날부터 끝이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참이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영원무궁토록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그 가치가 빛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지닌 참을 만나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면, 인간이 생활환경에서 참의 가치와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참된 선의 세계로 다시 돌려놓기 위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왈 구원섭리요, 구주를 보내 이 억조창생을 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이란 존재 자체가 참된 동시에 그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나 작용까지도 참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존재의식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부정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 존재의식까지도 참된 인간이 되었던들 우리는 탄식할래야 탄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탄식이라는 것이 생겨나느뇨? 최고의 목적을 바라고 최고의 가치를 바라고 있는데 생활환경에서 그 소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슬픔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참의 기준, 어떠한 고통도 밀어낼 수 있는 참의 기준을 완전히 세워 놓은 자리에서 우리의 인생이 출발하였던들, 고통이라는 두 글자는 하등의 위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천리 원칙의 가치를 엄연히 세운 존재 앞에서는 고통이 어떠한 위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참을 찾고 있으되 참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까닭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자신들이 사회 환경에서 참을 찾는다 할진대 어떠한 참을 찾고 있느뇨? 몸의 참을 찾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마음세계의 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 큰 우주적인 이념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참된 인연을 찾고 있습니다. 참된 환경과 참된 우주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참되기 전에는 참된 것을 감정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참된 가치를 지니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참될 수 있는 조그만 본질이라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세워 인륜과 도덕의 방향과 일치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내 마음이 참을 헤아릴 수 있는 참된 입장에 서고 내 몸이 생활환경에서 참을 중심삼고 살 때, 거기에서부터 참은 나와 내 몸이 인연을 맺고, 나를 통하여 환경과 인연을 맺고, 환경을 거쳐 이 땅과 천상까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124
만물과 실체를 통하여 참을 찾아가는 길
여러분이 자신을 돌아보면 여러분의 몸이 참되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마음이 참되지 못한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뇨? 몸을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그 무엇과 마음을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자체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참의 기준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 몸의 참을 해명할 수 없고, 내 마음의 참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자체내에서 참을 해명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참되신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의 원칙적인 기준을 통하여 참을 해명하고 참된 인간의 위치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역사노정을 거치고 시대 시대를 지나오면서 무엇을 찾아 나왔느뇨? 참된 나, 참된 나라, 참된 세계, 참된 하늘땅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참된 '나'라는 기준을 어디서 찾을 것인고? 철학에서냐? 과학에서냐? 종교에서냐? 아닙니다. 마음의 근본을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거치지 않고는 참의 인연을 증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어 참되지 못한 입장에 떨어진 인간들을 참의 이념세계로 이끌기 위한 구원섭리를 하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우리 앞에 참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셔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생활감정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분과 인연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타락세계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참의 모습으로 찾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 혹은 신앙노정에 있어서 선지선열들은 어떠한 입장에서 왔다 가신 분들이뇨? 참된 `나’를 찾아 나아가는 노정 속에서 하늘의 참된 몸의 입장으로 하늘의 참된 마음의 입장으로 왔다 가신 분들입니다. 이와 같은 참된 몸과 마음을 가진 분이 생활적으로 마음적으로 심정적으로 우리 인간을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참된 인연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참된 물건을 통하여 인간을 찾아 주셨습니다. 성별된 참된 물건을 제물로 하여 우리 인간을 찾아 주셨던 것입니다. 참된 물건은 어떤 것입니까? 이 물건은 타락한 세계의 것이지만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그 참된 물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어 나오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만물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편으로 성별된 동물, 식물, 광물 등 모든 물건을 통하여, 즉 제물이라는 조건을 통하여 인간과 인연맺으려 하셨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참된 제물과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가 왈, 구약시대입니다. 참된 가치의 인연을 찾아나아가야 할 타락의 운명을 진 인간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참된 물건을 통하여 참된 가치의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만물을 주관해야 합니다. 만물, 곧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연맺게 되는 입장에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물질을 통하여 인연맺을 수 있는 구약시대를 지나 실체로서 인연맺을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하여 한 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에게 있어서의 메시아 사상.

이 메시아는 어떠한 분이뇨? 타락한 인간, 죽어 마땅한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타락하지 아니한 참된 부모의 인연을 갖고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고마운 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구주는 막연한 구주가 아닙니다.

10-126
영원 불변한 최고의 선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은 참부모의 혈통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이렇듯 참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못한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앞에 제일 귀한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이 불쌍한 인간 앞에 부모를 보내주는 것 이상 귀한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선물을 고대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구주를 세워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참부모를 잃어버린 족속입니다.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니 참자녀가 되지 못한 무리들입니다. 창조 당시 최대의 선의 이념으로 세우려 한 참부모와 참자녀가 다 깨져 나갔으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인 수고의 노정, 수많은 역경과 수많은 고통의 노정을 거쳐서라도 다시 참다운 부모의 인연을 세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세우고, 참다운 부부, 참다운 형제,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 참다운 인류, 참다운 천주의 인연을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타락한 인간의 마음가운데 들어와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 상대적 입장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만물을 연결시키고 참다운 아들과 연결시킨 후 나중에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와 심정의 아버지가 되겠다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의 최후의 종착점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잘나고 훌륭하다고 자인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찾고 계시고, 이 천지의 대 이념으로 세우고자 하는 절대적인 참의 원칙과 관계를 못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을 공인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부모 잃은 불쌍한 고아와 같고 남편 잃은 과부와 같은 타락한 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인연을 갖고 나타나셨느뇨? 사정의 인연이 아니라 심정의 인연을 갖고 나타나셨습니다. 소망의 인연이 아니라 생활적인 심정의 인연을 갖고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모습을 세운 후 그를 통해서 만물과 인간의 몸과 마음과 심정까지 관계맺으려 하십니다. 그러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의 완전구원이란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신앙의 목적은 무엇이뇨? 선한 몸과 마음과 심정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 더 나아가 선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천주적인 무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역사적인 위인과 선열들을 숭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그들을 본받고 그들과 인연을 맺자는 것입니다. 생활에서 인연을 맺고 몸과 마음이 인연을 맺고 그들의 이념과 인연을 맺자는 것입니다. 인연을 맺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하나되어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어떠한 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며, 어떠한 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현실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 볼 때 어떠한 입장에 처하여 있느뇨?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로 하여금 만물과 인연을 맺게 해주셨고, 당신의 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자신은 그러한 관계를 맺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절대적인 기준이 자신의 생활을 휩쓸고 있고 자신의 마음을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 할진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돼요. 죄인 중에서도 이 이상 더 큰 죄인이 없습니다.

역사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까지 벌어져 있는데 어디서 종결될 것이뇨. 절대자, 즉 최고 선의 본체가 있다 할진대, 인류가 절대자, 즉 그 본체와 더불어 영원 불변한 인연을 맺을 때까지 움직일 것입니다. 최고의 선은 영원 불변한 것입니다. 그 이상의 발전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생활감정이 다르던 민족들이 점점 생활감정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또 이념을 달리하던 수많은 도(道)들이 이념을 같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근본은 하나입니다. 이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를 향하여 역사는 총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에 나타난 가치는 창조주의 목적관을 통할 수 있는 원칙에 의하여 나타난 상대적인 가치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0-128
참되신 아버지와 참된 자녀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라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여기서 참되신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며, 참된 자녀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참되신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며 참된 자녀는 어떠한 존재이뇨? 참되신 아버지는 참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역사노정에서 무한히 고생하신 분입니다. 수천년 역사노정에서 선을 위하여 목베임당하고 죽임당한 그 어떠한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시대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역사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슬픔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역사적인 고통과 역사적인 억울함을 품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고통과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 분의 구세주를 보내서 인간과 천적인 모든 인연을 맺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상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죽어 갔다는 말입니다. 죽어간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뇨? 우리가 영원히 인연맺어야 할 참아버지로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셨을망정 타락한 세상의 여러분을 다시 찾아오실 때에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노라’하는 마음을 갖고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불쌍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참되신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뇨? 억천만 년이 지나도 풀래야 풀 수 없는 십자가의 한이 사무쳐 있으되, 우리를 위하여 고생을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억울한 자리에 계셨으되, 우리가 불쌍한 자리에서 눈물짓는 것을 보실 때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눈물지으시고 우리보다 앞서 고통의 길을 가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심판을 하신다 하더라도 이 땅 위의 인간을 위하여 매를 맞고 핍박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곡절의 한을 걸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과거에 수고한 내용을 갖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보다도 더 큰 사랑의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하고, 억울함과 슬픔을 느끼는 마음보다도 더 큰 사랑의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벼락을 내려서 다 죽여요? 천만에요.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은 필요없습니다. 여러분, 이걸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참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뇨? 자식된 인간에게 천번 만번 맞고서는 그것을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심정의 주인공이시기에 6천년 죄악사의 종족으로 태어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면 참다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뇨? 참다운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참다운 도인입니다. 천국은 어떠한 곳이뇨? `죄’라는 명사를 기억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죄 있는 사람은 그곳에 가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형제간에, 부부간에, 부자간에 있어서도 상대를 위해 조그만 일을 해주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 해주어야 되지 않겠느냐’하면서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담을 무너뜨려야 되겠습니다.

이 현실세계에서 천국문을 개방하고 천적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자녀의 명분을 갖추고자 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천만번 맞고도 사랑이 솟구쳐 오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인연을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어려움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선의 세계일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는 어떠한 곳이뇨? 한 가지 수고를 하고도 열 가지를 요구하는 곳입니다. 그러다가는 망합니다. 남을 한번 도와주고, 남을 위해 피 한 방울 흘려주고 억천만 년 우려 먹으려 하는 무리들이 사는 곳이 악의 세계입니다. 여기에 선의 세계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6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곡절을 거쳐셨으나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우리가 헐벗고 굶주려 떨고 있을 때, 천만번 하늘을 배반한 종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본래의 인간에게 주신 인연만을 기억하시면서 발길을 멈추고 눈물을 지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자식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온갖 흉악한 짓을 다하고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그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안타까워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부모라 할진대 그 자식에게 주먹을 들이대기 전에 그를 붙들고 목놓아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 부모라면 기필코 그 자식을 회개시킵니다. 그런 심정에 사무쳐 자식을 대하는 부모는 아무리 무지몽매하고 목석같은 자식이라도 기필코 선한 자식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세상에서 선한 아들딸을 찾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철칙이 그렇기 때문이예요. 억천만 가지의 죄가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죄를 기억하시지 않는 분을 아버지로 모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으로서 그런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10-130
참다운 부모와 상봉하는 길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악당이었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권고했습니까? 이렇게 권고해도 안 듣고 저렇게 권고해야 안 들었어요. 나중에는 그 족속을 권고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채찍을 드는 것은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채찍을 드는 목적은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쳐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때뇨? 이 시대는 만물과 더불어 인연을 맺고, 환경과 더불어 인연을 맺어야 할 끝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주님을 신랑이라 하고 성도를 신부라고 합니다. 신부 되기를 바라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생활을 해야 될 것이뇨? 신부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심정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끝날에 오실 주님을 고대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2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시면서 하루하루를 끝날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러한 때가 이르려니와 지금도 그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끝날에 주님 앞에 신부로 서 가지고 영광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신부를 만날 소망을, 신부를 대한 간곡한 심적 기준을 어느 한 순간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수십년 동안 예수를 믿었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십년 동안 진정으로 예수를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그리고 오실 예수를 모시기 위해 얼마나 준비했습니까?

끝날이 온다 할진대 그 끝날에는 반드시 영원한 최고의 선을 중심삼고 가치를 세워야 합니다. 그 가치는 천주적인 가치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가치로 나타나는 때는 언제이냐? 참아버지와 참자녀가 만나는 때입니다. 딴 것이 아닙니다. 참아버지의 참아들딸이 만나는 때입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참아버지와 참아들딸은 가만히 있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역사를 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하나의 세계로 귀결짓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목적의 세계를 이루려는 핵심이 하나님이라 할진대, 이 하나님과 천지 전체가 합하여 영원이라는 명사 아래 동일한 가치로서 생활감정을 통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목적의 세계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뇨?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을 가지고 부르고 계시니 우리는 그 말씀대로 가야 합니다.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자녀가 상봉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뇨? 참다운 말씀을 통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모르고서는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절대적이요 참다운 말씀이라 할진대, 똑같은 말씀을 천년 만년 들어도 싫증이 안 납니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씀을 찾아 나아가야 됩니다. 그 말씀은 어떠한 논리적인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원칙이면서 듣고 듣고 또 듣고 영원히 들어도 생명이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초월합니다. 시대를 초월합니다. 주의를 초월합니다. 사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씀 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밤에 들어도 낮에 들어도, 밤에 보아도 낮에 보아도 여러분의 마음에 무한히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그 말씀이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다운 아버지께서 참다운 자식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왜 그랬느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원수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타락하여 형편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20세기에 와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자식이로되 자식인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아버지로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을 한마디도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도 못하셨다는 거예요.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눈짓으로 하거나 세상의 것을 빙자해서 하셨습니다.

10-132
부모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자녀
참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영원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고 우리의 생활환경을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악한 생활환경이 참다운 말씀을 삼켜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다운 말씀이라면 악한 세상의 무엇으로도 그 말씀을 제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악한 환경을 넘고 또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을 유발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혼란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오시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여 진정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 것인고? 어디엔가 그러한 곳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곳을 찾아야 됩니다. 만일에 그러한 자리를 찾아서 말씀을 듣는다면 어떨 것인고? 천번 들어도 새로울 것입니다. 참다운 선의 가치로써 영원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말씀을 찾지 못한다면 참다운 자녀가 못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거기에 사랑이라는 명사를 하나 더 붙여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자가 없다 하였으니, 말씀을 통하여 문제되는 것은 말씀의 본체입니다. 말씀하시는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누구뇨? 참아버지입니다. 이 참아버지 앞에 참자녀의 입장으로 서려면 참말씀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참부모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참부모의 말씀, 영원한 가치와 인연맺게 해주는 참다운 말씀의 가치를 느껴 보았습니까? 못 느껴 보았다 할진대, 참다운 가치의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가 오셔도 모릅니다. 이러한 참다운 말씀의 가치를 밝히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참아버지의 말씀을 찾아나가야 됩니다. 참아버지의 말씀, 참말씀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 말씀은 예수의 심정이 동하는 말씀이요, 또한 6천년 동안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동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이 땅 위에 나오게 되면 6천년 곡절의 역사를 밝혀줄 것이요, 하나님의 분함과 하나님의 억울함과 하나님의 원통함을 밝혀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정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자식이 부모를 감동시키려면 자기의 요구와 소원가지고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아 가지고 부모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부모의 수고가 내 수고라고 느끼면서 부모의 역사를 말해야 합니다. 이런 자식이 되어야 부모를 감동시킵니다. 이러한 자식을 대하는 부모는 가슴이 터져 나갑니다. `오냐, 내 아들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속 깊이 묻혀 있는 한을 속속들이 폭발시켜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찾기 위해 수고하신 것을 낱낱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찾기 위해 이러이러하게 수고하신 아버지!’하면 그 한 마디에 하나님은 `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고 울고 십자가를 붙들고 우는 자는 많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붙안고 우는 자는 없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 신자가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십자가를 붙안고 울 것이 아니라, 십자가까지 넘아가면서 참고 사랑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고 울어야 합니다. 그런 자는 천국 갑니다. 십자가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구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0-134
부모의 심정을 알아드리는 자녀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되느냐? 심정적으로 봐야 됩니다. 우리가 은혜에 깊이 사무쳐 기도할 때, 하늘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하고 애달픈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여! 사무친 한이 무엇입니까? 성경 역사를 엮어 내려오시는 당신의 한이 무엇입니까?’하며 통곡해야 됩니다.

한이 무엇이뇨? 아담 해와가 타락하게 될 때 기뻐하신 하나님인 줄 아십니까?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멱살을 잡고 싸울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야?’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한이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못할 곡절과 한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허덕이시며 찾아나오신 하나님은 어떤 신세뇨? 슬픈 신세입니다. 이 땅 위에 어떤 거지도 하나님보다는 낫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천지 만물을 호령해서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된다면 왜 6천년 동안 죄악의 인류를 끌고 나오셨겠습니까? 제일 불쌍한 분입니다.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주인 노릇을 못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노릇을 못하셨습니다. 이처럼 분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으신 것이로되 당신 마음대로 못하셨고, 당신의 아들딸이로되 아들딸이라 하지 못하셨습니다. 이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섭리해 나오신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6천년 동안 한을 품고 오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딸 앞에 나타나실 때의 모습은 어떠하겠느뇨? 상처 입은 모습이요, 말할 수 없이 남루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으로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 앞에 몇 백번 몇 천만번 오셨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우리 자신들 앞에 그런 모습으로 그러한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으되, 우리는 꿈도 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으니, 그 얼마나 억울하시겠느냐 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어떠한 이상주의나 이상론이 아닙니다. 호화찬란한 환경을 이루어 거기에서 춤추며 살도록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이어야 하느냐? 먼저 하나님의 곡절이 심정을 드러내어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하신 아버지!’ 라고 부를 때, 아버지께서 `오냐, 내 아들아!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갔으되, 아무도 나의 심정을 모르더니 너는 알아주는구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들을 찾으십니다.

호화로운 자리에서 수많은 대중으로부터 영광받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루하고 불쌍하고 추한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애통스러운 사정이 이렇잖습니까?’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냐! 네 말이 옳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거쳐 지금까지 6천년 역사노정에서의 내 심정의 깊은 한의 곡절을 네가 아는구나’하십니다. 이런 아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당은 어떠한 사람이 가는 곳이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아들딸들이 가는 곳입니다. 여기서의 역사는 곡절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곡절은 평안하거나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믿고 천당가겠다고, 예수 믿고 복받겠다고 합니다. 천만 부당한 일입니다. 예수 믿고 복받겠다는 무리는 다 망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하나님 믿고 복받겠다고 하다가다 망했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10-136
찾아야 할 새말씀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이뇨? 하나님을 위로해야 합니다. `당신은 저의 역사적인 아버지로소이다. 시대적인 아버지로소이다. 또 영원한 아버지로소이다’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아들딸이 그런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너는 나와 더불어 역사노정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의 역사적인 심정을 아니 내 아들딸이다. 네가 이 시대적인 섭리의 뜻 앞에 서진 않았지만, 이 시대적인 섭리의 뜻 앞에 설 수 있는 내 아들딸이며, 미래의 섭리의 뜻 앞에도 설 수 있는 내 아들딸이다’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두운 골짜기, 깊은 골짜기에 가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 중의 최고의 십자가에 나아가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선을 찾아 헤매다가 눈물의 골짜기 끝에까지 몰려나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왕이요 억울함과 분함의 왕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악과 반대되는 입장에 계시는 분이요, 몰림받는 자의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길을 거쳐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느뇨? 물론 평탄한 길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습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어 천국을 건설해야 사망세계까지도 주관할 수 있습니다. 사망세계를 삼켜 버리고 천국을 건설하는 길, 이 길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왜 그러뇨? 타락한 이 땅에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슬픔과 고통과 억측과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는 길을 돌이켜서 하나님이 당하신 그 곡절을 찾아 나서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제일 빠른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중으로부터 반대받고 쫓김받아 찾아가신 감람산 기슭이 어떤 자리인 줄 알아요? 그 자리는 눈물 흘리는 자리요 통곡하는 자리요 가슴을 치는 자리였습니다. 또한 그 자리는 고통 가운데 사무친 예수의 눈물이 하나님의 눈물로, 예수의 분함이 하나님의 분함으로 뒤넘이치는 자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참말씀을 찾고 있습니다. 참말씀. 그 말씀을 접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사정을 다 털어놓고 `오냐! 아는구나. 너는 내 아들딸이다’하시는 자리까지 여러분은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인 것을 알고 역사적인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시대적인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미래적인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곡절의 역사를 책임지신 아버지를 대신하지는 못할망정, 아버지의 슬픈 심정을 알아서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제일 슬픈 것을……. 천국에 대한 내용이나 묵시록 같은 것은 빼놓더라도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가까운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의 제일 슬픈 사정을 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여러분이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런 말씀이 이 땅 위에 나타나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게 될 때 는 뱃속에서부터 한없는 설움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뱃속에서부터 통곡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열흘, 백날, 천날 울어도 한없이 울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씀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하나님의 복장을 들춰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겉만 빤질빤질하고 호화찬란한 말보다도 마음이 뒤넘어치고, 뼛골이 녹아 들어가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이 말씀이다. 오너라 형제여!’할 때 그 형제도 `이 말씀이다’ 할 수 있는 말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고 느낄 수 있는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혈족을 넘고 동족을 넘고 민족을 넘어서 세계의 모든 참다운 마음을 가진 자, 참다운 몸을 가진 자가 전부 공명할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10-138
수없이 반복해도 싫증나지 않는 세계
하나님이 우시니 천지가 안 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대성 통곡을 하시는데 천지가 통곡 안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어서 속히 하나님의 역사적인 슬픔의 곡절을 해원할 수 있는 말씀이 나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실체가 나와야 됩니다. 실체가 나와야 돼요. 지금까지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찾아 헤맸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참목자와 거짓 목자를 무엇으로 분별할 것이뇨? 참것과 거짓 것을 무엇으로 분별할 것이뇨? 우리들은 참목자를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데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첫인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찾아가는 노정에 있어서 뜻이 있고 필요한 인연이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이로되 본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지만 자기 오빠보다도, 자기 주위의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심의 작용을 평면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소질을 가진 자라야 진짜 목자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느 한 때에 가서 여러분을 등쳐 먹습니다.

우리가 끝날에 주님을 만나 그 주님의 눈 하나만 들여다보아도 영원히 싫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눈 하나에도 천국을 본 이상으로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주님을 만나 보았습니까? 천년 만년 이마를 맞대고 있어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을 찾아가는 길을 천년을 걸어도, 몇 억만번을 왔다 갔다 해도 싫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 가는 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은혜가 떠난 것입니다. 목자가 그런 내용의 움직임과 풍김이 없으면 가짜 목자입니다. 왜? 천국에는 모든 것이 영원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보는 감정까지 영원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하면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천국은 입체적인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손수건을 보면 평면밖에 안 보입니다. 그 이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 이면을 보면 무궁무진 합니다. 평화로운 감정으로 보면 평화의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평화로운 감촉을 전해 준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다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요? 물리적 현상이 그렇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생기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완전한 존재 앞에 그 상대는 자연히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주(天宙)를 통할 수 있는 평화의 심정을 갖고 천지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꽃입니다. 천지가 꽃이예요. 그 아름다움은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심정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 이상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영계에 가게 되면 처음 만나는 사람도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생명적인 인연을 갖춘 것, 이상적이라든가 이념적인 요소를 갖춘 것은 같은 것이로되 싫지 않습니다. 같은 모양이 반복되어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밥먹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반복한다고 해서 싫어지면 그 일은 참된 일이 아닙니다. 선한 세계의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천년 만년 반복하여도 좋고 좋고 또 좋다는 것입니다. `뭐 그런 망상적인 일이 어디 있어?’ 할지 모르지만 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주님을, 실체를 대하는 날에는 만사가 해결됩니다. 그분을 대하면 고통스러운 마음이 다 잊혀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즉 그 영광의 실체를 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생활 감정을 통하거나 이상적인 감정을 통하더라도 싫어하는 부분이 없는 내용을 갖춘 분이 참주인공입니다. 선의 가치라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이란 무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노정에서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고통이 다 사라져가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말로만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눈, 내 감정, 내 생활, 내 모든 존재가치가 영원 절대적인 실체와 관계를 맺는 그날부터 행복은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아직 실체와 영원한 관계를 못 맺었습니다.

10-140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 땀을 흘리는 효도의 길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 먼저 실체를 지으셨습니다. 몸뚱이를 먼저 지으셨어요. 그러니 우선 실체와 인연맺어야 합니다. 그분이 죽으면 죽고, 그분이 가는대로 가야 합니다. 그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에 필요합니다. 검둥이와 흰둥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노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분이 나온다면 세계는 하나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그런 조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체와 상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실체를 만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그분을 위해서 모든것을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하고, 나의 피를 다 빼 드려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의 풍성함을 느껴야 됩니다. 심정의 양이 무한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분을 위해서 희생하고 내 모든 피살을 다 바치더라도 더 주고 싶어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러한 분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아버지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힘든 일을 했다 해서 아버지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를 요구한다면 불효자입니다. 여러분은 무한한 수고를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부족하여 더 바치고 싶은 사무친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의 표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돈 몇 만원을 빌려 주고도 이자까지 안 주나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주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경지에서는 자신의 몸이 죽어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넘어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땅이 고통과 죄로 말미암아 구속되고 깨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어떠한 무서운 것도, 악을 대표하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감촉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심정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내용을 갖춘 사람을 만들어 놓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천지가 영원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내용을 알고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한번 울리면 모든 존재물은 지극히 엄숙해집니다. 이것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한 마디는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없는 영원히 귀한 말씀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인식하게 되면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대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는 길이 있다면 한 시간에 천만번 뒤넘어치는 일이 있더라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는 세계, 그런 작용으로 인연된 세계가 아버지께서 계신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땅 위에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을 듣는다면,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것 등 모든 욕심을 초월할 수 있고, 자기 자신까지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사명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자나깨나 그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드려도 부족하다는 심정에 사무칠 것입니다. 그때에야 여기서 말하는 천국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상 천하의 모든 만물을 상속받기에 보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그것입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떠한 모습으로 지으려 하셨겠습니까? 속에 집어넣고 집어넣어도 부족하고, 영원히 사랑해도 부족한 모습이 되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으셨습니다. 여러분 중 아주머니들은 알 것입니다. 자기가 낳은 아기가 예뻐서 안아 주고 야단하지요? 그저 안고 안고 또 안고 영원히 계속 안아도 싫지 않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본체가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그분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러한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천년 동안 반복해 들어도 고기가 물을 먹는 것 같이 마냥 맛이 있는 거예요. 같은 말씀이라도 슬플 때 들으면 위로가 되고 기쁠 때 들으면 축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상태, 생활 감정이 다름에 따라 거기에 해당하는 멋진 대상의 가치로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진리의 말씀은 같은 내용을 120번 이상 들어도 싫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체험해야 됩니다. 같은 말씀을 백번 이상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진리의 말씀을 가진 교회에 나가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천국 갑니다. 또 백번 보고 천번 보아도 또 보고 싶은 교회 지도자를 만났으면 떨어지지 마십시오. 한 손을 자르면 나머지 한 손을 가지고라도 그를 붙드십시오. 그런 지도자를 만나면 틀림없이 천국에 갑니다.

10-142
하나님이 아들 한 사람을 등장시키기 위한 6천년 역사
그런 인연을 거쳐야 비로소 타락의 한을 벗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타락의 한을 갖지 않으신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에게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거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타락의 감정을 잊어버리실 수 없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너희는 아담 해와로부터 타락의 혈통을 받은 자식들이야. 나를 배반하고 지금까지 별의별 추악한 행동을 해온 종족이야’ 하는 감정을 잊어버리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슴을 들추어내고, 하나님께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아버지께서 역사적인 한을 잊어버리고 창조 이상세계의 본연의 심정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기준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참다운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아버지의 마음과 참다운 아버지의 사정과 참다운 아버지의 소원과 참다운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가지고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딸을 못 만나는 한, 하나님은 영원히 참다운 아버지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많이는 못 나오더라도 남자 한 사람, 여자 한 사람은 나와야 됩니다. 앞으로 그런 분이 오신다면 그분이 인류의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이런 심정을 가진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이 아들 한 사람 등장시키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담 한 사람 찾는 역사였습니다. 본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을 모두 달성했을 것인데, 타락하여 다 꺾여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재창조의 역사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을 재창조하여 잃어버렸던 인류의 참아버지의 입장에 다시 세워서 하나님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너는 내가 창조이념으로 지었던 아담으로서 나의 사정과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아들이다’하고 축복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지고 이 땅위에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완성한 인류의 조상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서 해와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지로 갈빗대를 뽑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 한다고 뭐 저 청년이 성경을 여지없이 어떻게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진짜 갈빗대를 뽑은 것이 아니라 골격을 본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책을 읽고 무엇을 빼냈다고 그러지요? 무엇을 빼냈다고 합니까? 그책의 골자를 빼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해와도 아담의 골격을 본떠서 만든겁니다.

그러니까 아담만 나오는 날에는 해와는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나오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저절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실체로서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참다운 아담의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못되었기에 예수는 돌아가신 것입니다.

10-143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길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는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민주주의를 세우는데 6천년이 걸렸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목이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시대에 예수가 오시면 핍박은 받을지라도 반드시 잃어버린 참 아들과 참 딸을 찾아 세울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거꿀잡이로 찾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역사를 벌어 놓았습니다. 두 가지 형태로 벌여 놓았습니다. 하나는 플러스요 하나는 마이너스인데, 이것이 합해져야 됩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참부모에서 출발해야 할 역사인데 인간이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거짓 부모의 자식이 되었으니, 참부모를 복귀하여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될 때, 평화의 동산이 개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심정적인 인연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됩니다. 돈이나 세상의 지위, 권세, 내 아들딸, 이런 것들이 뜻을 이루는 조건이 되는 줄 아세요? 아무 조건도 안됩니다. 조건이 된다면 그것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러나 그리로 가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됩니다.

앞으로 이 민족, 이 세계 앞에 새로운 이념을 갖고 나오는 교회가 나타난다 할진대, 전세계가 반대하여 몰아때릴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몰아내야 분별됩니다. 그 교회는 세상이 아무리 몰아내고 밟고 두드려도 퍼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맞는 자리에서 생성되어 번식하고, 맞는 자리에서 뿌리를 박고, 맞는 자리에서 희망을 갖고, 맞는 자리에서 산 모습이 되어 나아가는 곳이 있거든 그곳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곳을 찾았다 할진대, 여러분은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격동시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무한히 뻗어 나가 최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경지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아버지라는 그 한 마디면 됩니다. 딴 것 필요없습니다. 많은 기도도 필요없습니다. `아버지!’라는 한 마디는 슬픈 때는 위로가 되고, 여러분의 감정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감정으로 대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명사는 모든 것을 종결하고 심판하고 해결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천국 백성으로 피조만물 앞에, 혹은 저나라의 수많은 영인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천적인 자녀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10-145
기 도
아버지, 인간들에게 슬픔을 더욱더 북돋우고 복잡함과 곡절을 북돋우고 있는 이 시대의 현상을 저희들이 목도하고 있사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심정의 세계에 슬픔이 점점 더 가해 들어가는 것을 저희들이 감히 헤아릴 수 있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저희들의 마음을 넓히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몸은 지금까지 갖고 있는 의식과 주의, 주장, 관념 등의 일체를 재분석하여 영원한 가치의 선과 인연맺어야 할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처하여 있사옵고, 저희의 마음은 영원한 아버지의 심정세계와 인연맺어야 할 심판의 시대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저희들로 하여금 당신이 무한한 사랑의 아버지이신 것을 체득하게 하여 주시옵고, 십자가의 고통을 넘고 죽음의 고통을 잊은 채 사랑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 것도 아닌 저희들, 천만번 죽고 쫓김을 당하더라도 부족한 저희들을 위하여 귀하고 존엄하신 당신께서 억울한 노정을 걸으시고, 억울한 사정에 처하신 것을 무엇으로 해원해 드리겠습니까? 저희는 천만번 죽어도, 피살을 다 뿌리고 눈물과 피땀을 다 바쳐도 부족한 것을 아옵니다. 욕을 먹어도 부족하고 반대를 받아도 부족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원수의 심장을 녹여 내리는 본연의 참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모습을 찾아 나오셨거늘, 저희들이 그런 모습이 되어야겠사옵니다. 형제에게 핍박받게 될 때 분해하는 자는 하늘에 가지 못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또한 형제에게 쫓김받게 될 때 그를 대하여 원수라는 마음을 갖는 자는 본연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교회 생활에 지쳐 있는 자들이옵니다. 하오나 참다운 목자를 붙들고 참다운 말씀에 잠겨 영원한 생명의 동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노정에서 절망을 느끼는 저희들이었습니다. 절망하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들보다 몇 배의 수고를 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다시 일으킬 수 없는 것을 아옵니다. 역사적인 원한으로 엮어진 모든 교파의 처참상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통일이란 명사 밑에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옵니다. 어떤 교회를 위하여 믿는 것도 아니옵니다. 자기의 가치를 믿고 자기의 마음과 몸으로 자기의 가치를 노래하며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려는 신앙생활이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단체가 통일교회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의 주인은 당신이옵고 땅의 주인은 저희들이옵니다. 당신과 합해지기를 갈망하는 저희들의 마음을 당신이 아시오니, 당신과 저희가 합해지는 날을 위하여 있는 지성을 다하고도 부족하여 눈물짓고, 매를 맞고도 감사할 줄 아는 무리로 양육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역사적인 한을 품으시고 눈물지으시면서 저희들을 찾아오셨사옵니다. 하오니, 이제 당신께서 `아들딸아!’하고 부르실 때, 저희들이 `아버지’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땅 위에 한스러운 당신의 심정을 아는 자가 없사옵고, 억울하고 분통한 역사적인 설움을 대신 책임질 자가 없사옵니다. 삼천만 민중을 깨우쳐 주시옵고, 잠들어 있는 청년들을 모아 주시옵소서. 죽음의 축대를 쌓고 있는 이 민족, 이 민족의 앞 길을 염려하는 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산 피와 살을 가진 자가 아직 남아 있을 줄 아오니 그들에게 갈 길을 열어 주시옵고, 당신께서 그들과 깊은 인연을 친히 맺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을 만나는 것이 처음일지라도 대하는 심정만은 영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참석한 이들이 그 무엇을 알았습니까? 아버지를 부르고 아들딸을 부르는 그 음성이 천지에 울려퍼지고, 악은 물러가고 선만이 싹트며 선만이 활동할 수 있는 인연이 이들의 몸 마음에 맺어지기를 바라옵나이다.

이 길을 가라고 분부하시기 전에 당신은 이미 우셨사옵고, 저희에게 어려움이 있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자처하여 어려움을 당하셨고, 당신께서는 저희가 슬플 때 권고하여 일으켜 주셨사옵니다. 개척해야 할 선구자의 입장에서 저희가 슬플 때 아버지께서 같이 슬퍼해 주셨고, 저희가 어려울 때 아버지께서 같이 염려해 주셨사옵니다. 황공 망극하옵니다.

이제 영광이 있다 할진대 당신이 받으시옵고, 자랑할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당신만을 자랑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눈물을 뿌리고도 더 슬퍼하는 마음이 저희들 마음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고, 땀을 흘리고 나서도 더 많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 편치 않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내 피살을 뿌리고 이 몸을 살라서라도 하늘의 의의 제단을 쌓게 하여 주시옵고, 아벨의 피살이 선을 호소했듯이, 저희의 피살도 이 땅 위에 그러한 조건을 남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지방에 널려 핍박을 받으며 한스러운 심정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있사오니 일일이 지켜 주시옵소서. 이 길이 하늘을 향한 길이 아니라 할진대 망해야 될 줄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을 막는 자 많사오나 당신께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시면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이 나아가는 길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당신 앞에 호소하오니, 이들이 눈물지을 때 같이 눈물짓고, 이들이 통곡할 때 같이 통곡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적인 자녀의 인연을 맺은 새로운 핏줄기로서 삼천만 민중 앞에 천상을 노래하고 하늘을 위하여 싸워 나가는 새로운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천지를 아버지의 동산으로 연결하는 중보적인 사명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 이후에 되어지는 전체 위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소원을 성취하는 노정에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저희의 마음과 몸, 또는 저희의 사회적인 생활 환경에 있어서 오직 당신만이 주인 되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에는 아버지와 자녀의 인연을 이루어 `할렐루야’ 찬양하며 사탄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