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 to 10-48: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
1960.06.26 (일), 한국 전본부교회

10-07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
마태복음 18:1-14

[기 도]

아버님, 이 해도 절반이 지났사옵니다. 이 민족이 악의 세력에 의해 침범당하던 날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그저 염려와 수심을 품은 채, 내일을 소망으로 삼고 오늘을 근심 가운데서 지내던 불쌍한 이민족, 불쌍한 저희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늘에나 새로운 무엇을 하늘 앞에 세울 것인가 하며 하루를 보내고, 또 그러한 내일을 소망하면서 한 달을 보내고, 그러한 한 달을 소망하면서 또 한 해를 보내는, 걷잡을 수 없는, 허둥대는 걸음을 걷기에 바쁜 인간의 실상(實狀)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흐름의 와중(渦中)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이 그 처해진 자리에서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당신을 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고, 심정의 그 무엇을 당신 앞에 돌려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니다.

남이 바치지 못하는 시간을 아버지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아옵고, 남이 드리지 못하는 정성을 아버지 앞에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런 연고로 날이 가면 갈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상을 향한 마음이 아니오라 아버님의 뜻을 대한 초조한 마음과 절박한 심정을 저희들 각자가 느끼고 있음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니다.

아버님, 내일을 염려하고 오늘을 염려하며 살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차피 와야 할 날은 다가오고 있사옵고, 어차피 청산해야 할 날도 다가오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날을 대비하여 하늘은 저희의 생활권내에서 저희를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저희들은 사정을 통해서나 심정을 통해서나 체휼을 통해서나, 또는 어떠한 실증적인 사실을 통해서 저희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를 뚜렷이 알고있사옵니다.

아버님, 6천년 섭리의 서글픔도 크지만, 그보다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저희들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마음은 더욱 애달프실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기쁨을 느끼시지 못하고, 만천하에 자랑하시지 못하는 당신의 애달픈 심정을 저희들이 알았사옵고, 이 땅을 찾기 위해 수고하시던 그 사정을 털어놓고 역사적인 내용을 폭로하여 원수들에게 보복하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의 내적인 애달픈 심정도 알았사오니, 아버님, 이제 저희들 죽든지 살든지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나서는 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진 바람이 부나, 더 나아가서는 저희의 앞길에 쇠사슬과 철망이 가로놓여 있다 할지라도, 뼈가 깎이고 살이 찢기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과 맹세한 절개만은 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당신은 이것을 믿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보시기에 믿고 안심할 수 있는 모습이 되는 것이 타락한 선조의 후예로 태어난 저희의 소원이옵니다. 아버지가 믿을 수 있는 모습, 아버님께서 영원하고 천적인 고귀한 것을 맡기시며 참되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저희는 진심으로 바라옵나이다. 또, 그런 아들딸이 될것을 맹세하며 저희들은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아버지는 어떠한 교회의 아버지만도 아니옵고, 어떠한 나라의 아버지만도 아닌 것을 아옵니다. 나라의 아버지가 되고 교회의 아버지가 되려면 먼저 내 아버지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저희가 진정 당신의 사정을 알았사옵니까? 진정 당신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있사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아버지와 저희 사이에 엉클어진 이 한 사정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온데, 저희는 세상의 큰 것을 찾아 헤매었사옵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해결지어야 함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이러한 기준을 세우기를 고대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말씀을 보아서 알았습니다. 하늘 앞에 짊어진 책임을 못하면 얼굴을 들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선후를 놓고 다투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하늘 앞에 심정적으로나마 황공함을 느껴야 할 그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냐고 물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제 2천년의 역사가 지난 오늘날 저희들은 뿌리를 잃지 않는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배고플 때 배고파하고, 슬플 때 눈물지으며, 어려운 사정을 제자들과 의논하시던 그 예수님을 오늘 이 땅 위에서 저희들이 모실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바라시는 그 기준 이상으로 모실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미 그분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난 뒤인 오늘에 있어서나마 그의 심정과 사정을 안 저희들이 가신 그분을 위안해 드려야 되겠사옵니다. 땅에 오셔서 서글픈 행로를 거쳐 가신 그분을 위안해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죽음의 길도 서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나아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낮음은 당신만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을 소유한 자는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오며, 깊은 심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만이 더 높은 아들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을 잊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기에 급급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 것을 아옵니다. 당신의 깊은 심정과 더불어 살고, 당신의 깊은 심정과 더불어 사랑하고, 당신의 깊은 심정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사는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낮은 자로되 하늘땅 소유한 자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스러웠던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이 땅 위에 없었던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저희들이라도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날 남한 각지에서 외로운 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과 민족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天上) 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이 이 땅 위에서 해원의 조건을 찾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 남은 책임을 저희들이 다 감당하고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10-10
말 씀
이 시간 우리가 잠깐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 입니다.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0-10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있는 인간과 하나님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무엇을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가치를 찾는 것도 귀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자신의 생명과 자기 자신의 심정을 찾아 가지고, 그 찾아진 생명과 심정의 주인을 만나든가 아니면 자기가 즐길 수 있는 대상을 찾든가 하는 것이 더 귀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자는 학문을 통하여 자기가 목표하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노심초사 연구하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목표하던 것을 달성한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가는 자기가 구상하는 권력을 얻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데, 그 권력을 얻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범한 사람들도 다 가치적인 그 무엇을 찾고 있는데, 그것을 찾은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있는 여러분 자신들이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면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찾던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관계가 맺어져서 전개되어 나가게 되는 것을 누구나 다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찾던 그것이 내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를 맺어서 가정, 사회,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전천주(全天宙)에까지 그 가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태도요, 마음이요, 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한 개체만을 내세워서 무한한 가치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만을 중심삼고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가치의 기준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그 사람은 그 가치를 주변 환경이라든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주에까지 비준(比準)되는 가치로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가치를 전체의 가치로 세울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만민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빠른 시간내에 만민이 그 가치를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다면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 하나님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被造物)을 창조하실 때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서 지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개체로부터 대우주까지 피조세계 전체를 창조해 나아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무엇을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인간을 지으시고, 지금까지 인간과 인연을 맺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활을 통하여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 하나님께서도 그 무엇을 찾고 계십니다. 인간은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인간은 제일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 것인고? 내 개체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생명일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고, 실생활에서 그 가치를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명의 가치를 그리워하며 찾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생명의 가치 앞에 대상이 되는 가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상의 가치를 찾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상대적인 기준이 결정되면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만우주와 같이 움직이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무엇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물리적인 현상을 보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작용하고 운동하는 현상, 또 직선적인 운동보다는 원형적인 운동을 하는 현상, 또 개체보다는 전체와 관계를 맺기 위해 움직이는 물리적인 현상을 보아서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12
‘찾음’의 제1단계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고, 수많은 사람이 고대하고, 수많은 사람이 목표로 하던 그런 가치의 생명체로서 살다 간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인가?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또, 천주(天宙)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자랑할 수 있는 생명적인 기준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은 그런 기준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의 가치를 부여한 목적은 어디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찾고 있는 인간이란 것을 알았는데, 창조주 하나님도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전체적인 인연을 맺기 위해 역사노정을 걸어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헤아려 볼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야 되고, 시대적인 하나님, 즉 생활감정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연적인 조건이며 필연적인 인연이라 할진대, 이와 같이 생활감정을 통하여 생명의 가치의 중심으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간이 있느냐 하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그러한 기준 위에 서야 할 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그러한 기준 위에 우리를 세워 놓고 우리의 근본문제를 해결짓고자 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나도 인정하는 동시에 피조세계 전체도 인정할 수 있는, 즉 완전한 생명의 가치를 가진 완전한 하나의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온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그 `찾음’의 제1단계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0-13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인간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들은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주인 밑에서 자라났는지 모르고 있고, 어떠한 주인이 우리에게 꼴을 먹이고 우리를 양육시켰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주인이 자신들을 기르던 보금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또 자신들을 먹이던 초원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양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 보니 어떠한 가정의 자식이 되어 있고, 한 나라의 백성이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하나의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룬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인생이 찾아 헤매던 모든 문제를 해결지은 `찾음’의 내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러기에 내 한 개체를 중심삼고 볼 때에 내게 부모가 있으되 나의 참된 부모가 못 되며, 처자가 있으되 나의 참된 처자가 못 되며, 형제가 있으되 나의 참된 형제가 못 되며, 동포가 있으되 나의 진정한 동포가 못 되며, 세계가 있으되 내가 바라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정의 깊은 골짜기를 흡족히 채워 줄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고, 사회가 못 되어 있고, 세계가 못 되어 있고, 그런 가정, 그런 처자, 그런 부모가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다 할지라도 그 부모의 사랑에 백 퍼센트 만족하지 못하는 내 자신입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처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백 퍼센트의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내 자신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백 퍼센트 만족할 수 없는 내 자신인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부모가 자기의 부모로 찾아질 참부모가 아니요, 현재의 처자가 자기의 처자로 찾아질 참된 처자가 아니요, 현재의 형제나 동포, 세계의 인류가 자기의 것으로 찾아질 참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먼저 참된 개인을 찾아야 하고, 참된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부모는 어디 있을 것인가? 참된 부부, 참된 자녀, 참된 형제, 참된 나라, 참된 세계, 참된 천주(天宙) 는 어디 있을 것인가? 또 하나님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10-14
행복의 원천이 되어 있지 못한 우리의 가정
하나님은 이 민족과 저 민족, 이 족속과 저 족속이 서로 부딪치고 싸우는 것을 해결지어 놓지 못하는 입장에서 역사와 인류를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도의 길을 가는 어떠한 사람이 오로지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고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유스런 환경에서 자유자재로 그 앞에 나타나 가지고 그가 요구하는 것을 충당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고?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가정, 부모와 처자, 혹은 형제가 나의 안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이 이상 더 허무하고, 이 이상 더 앞이 캄캄하고, 이 이상 더 불쌍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할진대, 반드시 자신과 관계된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관계의 세계를 영원히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륜을 중심삼고 심정의 인연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인륜이 있는 한 인정이 있고, 천륜이 있는 한 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륜과 천륜이 같은 보조로 움직여 나가듯이 인정(人情)과 천정(天情)역시 같은 보조로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인륜을 따른 인정이요 천륜을 따른 천정이라 할진대, 인정과 천정이 통할 수 있는 한 때가 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중심삼고 맺어지는 인정이 천정으로 공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리에 선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는 역사가 출발한 이후 타락한 인간이 찾고 있는 최고의 그 무엇을 찾은 자라고 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인간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는 한 하나님께도 지정의가 있을 것입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것이 인간이라 할진대, 하나님도 천정, 즉 심정을 중심삼고는 어찌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래부터 인간이 이러한 관계와 인연을 갖고 태어났다면, 여러분 자신들은 그 자리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입니다. 내 생(生)의 가치는 무한한 가치와 인연되고, 생활감정은 영원한 천정과 인연되고, 내가 소원하는 어떠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원한 이념과 연결되어 있어야 할 것이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내 생활감정과, 나의 소원, 나의 모든 가치는 상실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제일 많이 가졌다가 한꺼번에 잃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그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10-15
행복의 기준
그러면 제일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의 귀한 것 전부를 영원히 가질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일시적인 것이며, 자기의 생명의 가치를 한 시대에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일시적인 것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바뀌어감에 따라 이제껏 자랑하던 것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본래부터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도록 창조되었는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음받고, 절대자의 심정을 통하여 절대자의 목적의식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치적인 존재로 지음받았다 할진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떠한 약속을 하였다면 그 약속은 일시적인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그 약속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심정적인 인연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적인 인연 역시 영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영원한 심정의 인연, 영원한 약속의 인연,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이러한 것을 주지 않기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아닙니다. 본래는 인간이 완성하면 이러한 모든 것을, 한 번 주면 더 줄 것이 없을, 그런 전체의 가치를 우리 인간에게 주려고 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가치를 주시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인간은 그런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타락과 더불어 일시에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일시에 잃어버린 인간은 어떠한 입장에 놓여지게 되었는고?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입장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입장, 즉 무한히 외롭고 무한히 서글프고 무한히 허탈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고통을 재촉하는 요소는 될 망정 행복과 만족을 재촉하는 요소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많이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알면 행복할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이뇨?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과 내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노래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는 날, 비로소 온 인류는 행복의 기준을 찾게 될 것입니다.

10-17
인간이 방황하고 있는 이유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지금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방황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 방황하게 되느뇨? 중심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며 목적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또, 내 생명의 가치와 내 생명의 관계되어 있는 어떠한 절대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가치, 우리의 삶의 중심,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목적, 이러한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기준 위에 놓여질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직까지 그런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에게 `나는 어떠한 입장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하는 반문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이 방황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에게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중심을 갖고 있느냐, 더 나아가서 목적의식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생명의 중심을 갖고, 또 거기에서 가치를 느끼고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후 만천하 앞에 나타나야 비로소 인간은 자기의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는데, 인간들은 이러한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온 세계 인류는 중심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혼돈하고 혼란된 입장에 처하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은 공포와 초조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떠한 현상인가? 곧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인의 손길을 통해 양육이 되던 양은 주인을 떠나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주인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며, 주인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며, 주인과 자기와 어떠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외로울 때, 자기가 배고플 때, 자기가 어려울 때에 주인이 어떻게 대해 주었다는 것도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양이 주인을 잃게 되면 먹을 것을 잊고 자기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을 찾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10-18
길을 잃은 양도 주인을 그리워하거늘
동물도 그렇거늘, 인간도 자신을 지어 주고 길러 준 절대적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필시 그러할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심정과 자기의 이념과 자기의 가치를 통해서 어떤 보장을 해줄 수 있는 불변의 주인이 있고, 또 그 주인과 자기와 어떠한 관계가 있고 어떠한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도 오늘날 이 타락된 세상의 불안과 초조와 공포감에 휩싸여 방황하는 자리를 박차 버리고, 자기의 처지와 환경을 잊어버리고 주인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그럴 때의 그 모습은 사랑을 받고 길리움을 받던 양이 길을 잃어버리고 주인을 찾으려고 허덕이는 그 이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양이 비록 하찮은 동물이지만 주인을 잃고 나면 환경의 제재를 받지 아니하고 주인을 그리워하며 울부짖을 것이요, 주인과 사정을 통할 수 있는 곳, 주인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갈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발이 있어 달릴 수 있는 한 달려갈 것입니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는 한 사모할 것이요, 사모하고 있는 한 자기의 감정을 통하여 주인에게 알리고 싶은 모든 것을 표시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울부짖으며 주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자의 품을 떠나 길을 잃은 외로운 양의 무리보다도 더 불쌍한 처지에 놓여진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나 이 나라, 혹은 이 세계, 더 나아가서는 수억천만 명이 살고 있는 무한한 영계(靈界)도 하나님을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필히 천정(天情)의 인연을 그리면서 목적의 세계를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마음과 몸과 생활감정은 이 시간도 그 세계를 찾아 가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그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시간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입장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인생은 지극히 불안한 인생입니다. 길을 잃은 양이 흘러가는 물을 마실지라도 그것이 그 양에게 생명의 물이 못 되고, 초원에서 풀을 먹더라도 그것이 그 양에게 생명의 양식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주인이 주는 물과 풀이 아니라 다른 주인의 물과 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결국 길을 잃은 양이 먹고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있으되, 먹고 나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마시고 나서도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입고 나서도 역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생활해 나온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0-19
주인을 찾는 비결
그러면 이 땅의 주인은 누가 되어 있느뇨? 이 땅을 창조하신 절대자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사탄이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많은 재미를 느끼며 사는 사람이라도 그 역시 최후에는 사탄으로부터 `야! 이놈아, 너에게 해준 대가를 지불해라, 보상을 해라’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운명에 놓여 있는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러기에 이것 이상 억울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인류중에는 그러한 위신과 위치, 그러한 권한을 갖추어 천상(天上)에 자랑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진 자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생활에서 안일함을 자랑하는 자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세상 권세를 갖고 행사하는 자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릴것입니다. 지나가 버릴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보상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처해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지도하고 계시는가? 주인을 잃어버린 양이 애달프게 울부짖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주인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이, 오늘날 땅 위의 인간들도 애달픈 심정으로 울부짖으며 정열을 다하여 하늘을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양은 환경이 편안하다고 해서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잠들어 있는 그 자리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항상 사자떼와 이리떼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먹고 있는 풀에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자기가 마시고 있는 물에도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처지와 환경을 개의치 말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질쳐야 합니다. 달음질칠 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하여 울부짖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인을 찾는 비결입니다. 옛날에 마시던 물을 마시고, 옛날에 먹던 풀을 먹어야 하는데, 주인이야 있건 없건 제멋대로 잠을 잔다면 그는 필시 이리나 사자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10-20
참된 도의 길은 세상을 박차고 나서야 하는 길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세례 요한은 외쳤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어린양으로 오셨느뇨? 길을 찾아 주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어린양이 아니라 주인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네가 살고 있는 가정을 버리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이 좋으니 거기에서 책임 다하고 나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나라가 좋으니, 네가 믿고 있는 교회가 좋으니 거기에서 책임을 다하고 나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땅은 원수의 땅입니다. 주인이 달라요.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던 본래의 주인은 내가 먹고 입고 자는 생명적인 모든 요소에 값을 칠 줄 모릅니다. 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에 값을 치고 나중에는 생명까지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인생이기에 하나님은 이제까지 인간을 대할 때 모순되게 또는 역설적으로, 억측적으로 대했고, 그런 입장에서 역사를 지배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조심하는 동시에 원수들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가 오는 길도 알아야 되고, 원수가 있는 곳도 알아야 됩니다. 비밀을 알면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밀을 모르면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편안히 잠자고 제멋대로 살다가는 자기의 생명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잘났건 못났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경고하셨어요. 세상을 붙들라고? 아닙니다. 세상을 박차고 나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참주인입니다. 본연의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을 보고 잘 살라고만 한다면 그건 원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도의 길은 박차고 나서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 주인의 인연을 모르는 인간이 박차고 나서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가긴 가야겠는데 가는 길을 알 수 없단 말입니다. 어떤 철학자의 학설에 내 생명을 의지해요? 어떤 주의나 사상에 내 생명을 의지해요? 여러분, 안심이 돼요? 안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어떠한 철학이나 주의 사상은 한 시대에는 알맞을 수 있었으되, 영원한 생명과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알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가 믿고 안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불쌍한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나그네는 먹고 자는데 있어서 반드시 보상을 해야 됩니다. 주인은 거처를 마음대로 옮기고 물도 밥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을 수 있으되 나그네는 그럴 수 없습니다. 보상해야 합니다. 배상해야 합니다. 먹는 밥도 마시는 물도 자는 자리도 보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참다운 생명의 주인을 맞이하여 내 생명이 즐거울 수 있는 세계, 무한한 영양소와 무한한 행복의 요소를 아무리 취하고 아무리 가져도 보상을 요구받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상을 요구받지 않는 그 세계가 진실로 행복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잃어버린 인간들의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들을 대해 세상과 짝하여 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10-22
예수께서 말씀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의 의미
이런 땅 위에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어떠한 생활을 하셨느뇨? 에수님은 고아나 거지와 같이 불쌍한 인간들, 아니 그보다 더 불쌍한 인간들, 얻어먹고도 또 보상을 받으려는 인간들 앞에 무엇을 갖고 오셨느뇨?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고. 진짜 그래요? 정말 그런가 말입니다.

그러면, 그 길은 어떠한 길이냐? 보통이 아닌 길, 하나의 길, 용서가 없는 길입니다. 모든 존재가 소원하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살다가 죽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종결짓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장하고 가신 길은 어떠한 길이냐? 죽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 가면 살고 안 가면 죽는 길입니다. 생사의 결판을 짓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모아서 잘사는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사의 결판을 지어 주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음에 그 진리는 어떠한 진리냐? 그 진리에 속한 자는 보상을 넘어설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에 속한 자는 먹고 입고 자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보상의 문제를 넘게 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안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생명은 어떠한 생명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은 하나님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생명입니다. 생명의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을 내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은 무엇을 가져야 할 것이뇨? 길을 가져야 됩니다. 진리를 가져야 됩니다. 생명을 가져야 됩니다. 길을 잃은 양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주기 위해 세워진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사상을 중심삼고 나가는 여러분은 첫째, 물질관념을 초월할 수 있는 기준에 서야 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관념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 할진대,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못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삼은 우리는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야 됩니다. 10년 후에 죽으나 50년 후에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자라면 천년 후에 죽으면 어떻고 일년 후에 죽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나는 거기에 사랑도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내가 말한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갈 길을 다 가고 난 후에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일이 잘 안 된다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자는 또, `아! 나는 도저히 못 살겠소’하면 안 됩니다. 생명의 위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사망권을 넘어설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이 역사적으로 엉클어져 내려온 것도 정적인 문제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합니다. 수십 명이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뜻 가운데 쓰러진다는 생각을 한다면 늠름히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배포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기쁘다 하는 입장, 세상의 인간들이 보고 느끼고 즐겁다 하는 행복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언제 낳을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기들의 고향을 찾아가다가 결국은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잘 살았을 것 같아요? 천만예요. 예수님은 의붓자식으로 자랐습니다. 요셉의 의붓자식으로서 말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모시고 살았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의붓자식으로 자랐습니다. 의붓자식으로…….

10-24
날 때부터 고난 길을 걸어야 했으나 묵묵하신 예수님
웬 일인지도 모르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기에 그렇게 믿었으나 안아 놓고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동방박사가 찾아와 예물을 드리고 하던 것도 지나고 나니 전부 잊어버리고 보통으로 대하는 생활을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생활에 휩쓸려 들어가 생활하셨던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증거하는 때는 한 때이나 증거가 이루어지는 소망의 때는 어떤 기간이 지나야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했던 동방박사도 다 가버리고 안나, 목자도 다 가 버렸습니다. 형뻘되는 세례 요한까지도 처음에는 증거했으나 나중에는 반대했습니다.

하늘의 이념을 가지고 오셨던 예수님을 요셉 가정은 싫어했습니다. 그의 동생들, 누이동생이나 남동생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자라실 때 싸움이나 하고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말이 없었습니다. 묵묵 했습니다. 그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싶었고, 귀는 다른 것을 듣고 싶었고, 입은 다른 말을 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도 다른 것을 느끼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서 불쌍하게 크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안 맞았습니다. 오죽하면 열 두 살 때에 집을 나가셨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혼자 올라가 제사장들과 변론을 하실 때 부모가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론 뜻적인 사명도 있었겠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도 오죽하면 열 두 살 때에 집을 버리고 나가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30여 년 생애의 모든 감정을 말할 수 있었지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소년 시절에 집을 나서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불쌍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맛있는 밥이 먹고 싶으셨다는 거예요. 고운 옷, 때때옷을 입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없으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함부로 대접했습니다. 목수인 양아버지의 시중을 들면서, 묵묵히 대패질을 하며 사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10-25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때
예수님은 오늘날 여러분이 `오! 주여’ 하며 믿고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잘 믿는 사람들이 그때에 태어났더라도 `이 사람이 너의 주님이다’라고 하면 안 믿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안 믿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가치를 세계적인 기준에 올려 놓고 믿으라고 하니 믿는 거지요.

옛날 제사장들이 여러분만 못해서 예수님을 죽였겠어요? 천만에요. 예수님은 가문으로 보든지 그 무엇으로 보든지 형편없는 입장에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성경에서 그 가문이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알 게 뭡니까. 과거를 보나 현실을 보나 무엇하나 믿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동생들까지도 예수님 대해서 흉을 보았습니다. 오순절이나 어떠한 행사 때가 되면, 형님이 무엇을 나타내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이 모이는 예루살렘에 가지 왜 이러고 있느냐고 핀잔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노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면서도 수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의 동생이 누구이며 아무개 형이 아니냐고 경시(輕視)했습니다. 형편이 없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30여 년의 생애를 준비하면서 자기 어머니를 붙들고 간절히 말씀하시고 싶은 무엇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을 붙들고도 간절히 말씀하시고 싶은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왜? 상대기준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자라는 동생들과 함께 엉클어진 심정을 끊고 나설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 것을 아신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되자 집을 박차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나오신 줄 알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와요? 예수님이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친척을 중심삼고 왜 전도를 하시지 못했습니까? 친척들이 예수님의 울타리가 되었더라면 그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을 박차고 나온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가나의 잔칫집에서 마리아가 나타나서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에게 말하였을 때에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겁니다. 당연해요. 뺨을 안 치신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그심정을 누가 알겠어요, 이렇게 사정이 엉클어지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심정에 사무치면 사무칠수록, 천륜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때가 가까와 옴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더해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갈 길을 몰라 초조해지고 불안해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지 못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10-26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바리새교인들이요, 유대교인들이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전을 세우게 해서 메시아가 오면 맞을 수 있고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베드로라니요? 분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웬 말입니까?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2천년 후인 오늘날 한국에서도 고기잡이, 어부라 하면 형편없게 생각하는데 그런 자가 예수님의 제자라니요? 무식한 어부가 예수님의 제자라니요?

만왕의 왕,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황태자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어부인 베드로를 제자로 삼다니요?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훌륭하고 잘나고 그 시대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이 명령만 하시면 죽든지 살든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해야 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부를 제자로 삼았던 말이예요? 천만에요.

그러기에 철저히 떨어진 예수님이었습니다. 불쌍한 자리로 떨어진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제사장들, 그들은 어느 한 사람도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랬나, 안 그랬나? 바리새교인 또는 제사장, 교법사의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들에게 몰린 예수님이었고, 교법사들에게 몰린 예수님이었고, 제사장들에게 몰린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어디로? 산이 좋아서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믿어 왔던 것을 다 뒤집어야 합니다. 갈 곳이 없어도 뜻은 이루어야 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변변찮은 존재라도 세워서 모양만이라도 갖추어 뜻을 땅 위에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셨고, 그런 심정에 사무치셨기에 할 수 없이 어부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야, 베드로야 모든 것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 하고 굽실거리며 따랐겠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몰리고 쫓기는 것을 다 보고 다 알았던 베드로였어요. 성경에는 `야, 베드로야’ 하고 한 번 말하니,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에 의해 베드로가 따른 것 같지요? 천만예요. 이스라엘의 모든 교법사들에게 천대받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교법사들에 대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공의의 노정을 세우기 위하여 정의의 모습으로 순수하게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보면 틀림없이 선한 사람인데 교법사들이 미워하고 몰아대니,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던 거예요. 오늘날 한국의 실정도 그렇지 않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보십시오. 3년 동안이나 무식장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오죽이나 안타까우면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겠어요. 그것이 좋아서 하셨겠어요? 아닙니다. 알고 보니 비통한 사실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3년 공생에 노정에서 희노애락을 같이하고 죽음을 맹세하던 열 두 명의 사도가 다 배척하니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의 길로 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죽으러 갈 수밖에 더 있겠어요? 그런 날이 앞으로 멀지 않아 올 것을 아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담판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글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10-28
예수 강림의 목적과 소원
그러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고? 그는 길을 잃어버린 양의 무리와 같이 황야에서 방황하는 민족과, 세계 인류 앞에 참다운 길을 소개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였으나 그가 가신 길은 처량한 길이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어떻게 살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그것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는 어떤 길을 걸었고, 어떤 슬픔을 느꼈고, 부모로부터 어떤 천대를 받았고, 또 동생과는 어떠했다는 곡절에 사무친, 심중에 사무친 한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노정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말씀을 못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아,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본을 받고, 너희는 내 어머니의 본을 받고, 너희는 내 동생의 본을 받아라’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기에 말씀을 못하셨다는 거예요.

30년 동안 요셉 가정에서 자라신 예수님의 생애는 후회의 생애였고 한숨의 생애였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시던 예수님, 몰리고 몰리시던 예수님, 맨 나중에는 믿던 제자들마저도 배척하자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했습니까? 죽지 아니하고는 만민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때가 십자가에 달리고 난 후입니까, 전입니까? 어느 때입니까? 그것은 전입니다. 다 전입니다. 4복음서에 나온 대부분의 말씀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몰리고 몰려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시지 않고 사실 때 구주로 모심받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하나님은 길을 잃은 양떼와 같이 방황하는 인생들, 목적관도 생명의 가치도 잃어버린 인생들 앞에 필시 참다운 목자를 보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다리 놓고 독생자라는 이름을, 구주라는 이름을 세워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새로운 움직임을 이루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30여 년의 생애를 거치시면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무엇이뇨? 하나님의 심중을 통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통한, 생사의 기준을 넘어선 영광된 아들딸, 승리적인 아들딸을 만들어 만천하 앞에 세워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일편단심으로 소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다 깨져 버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고 쓰여진 곳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하셨어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겨 놓고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인류 앞에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주인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땅 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시켜야 됩니다.

그러면 기도의 목적은 어디에 있느뇨?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을 개척하고 가셨으나, 그러한 길을 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독교에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실정에 놓여 있는 세계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탈을 태워 버리고, 새로운 심정을 불러일으켜서 이 시대에 대한 사명,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명을 하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 길, 그런 생명, 그런 진리, 그런 사랑의 세계가 천륜의 소망임에 틀림없거늘,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준비의 무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는 길이 우리가 필히 가야 할 길입니다. 타락의 후손임을 인정할진대, 우리는 그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요셉은 누구였습니까? 남자를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마리아는 누구였습니까? 마리아는 여자를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은 백성을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요셉,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마리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형제들이었습니다.

10-30
주님을 모시는 생활, 주님을 대신하는 생활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남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요셉이 되어야 됩니다. 여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마리아가 되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형제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백성, 인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리아 이상, 요셉 이상, 그의 형제들 이상의 기준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 입각하여 생각해 볼 때에, 과연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도망 가던 열 두 제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분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된 것은 민족의 실수요, 가정의 실수요, 요셉의 실수요, 마리아의 실수요, 형제들의 실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비통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대접하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입혀 드리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소자에게 주는 것,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소자에게 옷 한 벌이라도 주는 것은 곧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생활 가운데서 어떤 소년 혹은 소녀를 바라볼 때, 만일 그 소년 소녀가 예수님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을 보고도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거쳐 가신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위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보다 낫습니다. 저나라에 있는 베드로보다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17장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나 되기를 얼마나 기도 하셨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생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누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생활 속에서 예수님 대신 인간들을 높일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대하면서 주님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는 무리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절대로 지옥에 안 갑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모시는 동시에 예수님을 대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0-31
길 잃은 양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
우리는 길 잃은 양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청산해야 할 땅, 심판받아야 할 땅, 원수를 갚아야 할 땅에 살고 있으니 주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사무쳐야 합니다.

이제 길 잃은 양으로서의 의무가 무엇이뇨? 해야 할 일이 무엇이뇨?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가 방황하는 것을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연고요, 살면서 애달픔과 공포와 초조함을 느끼는 것도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주인을 잃어버린 양이 주인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어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느뇨?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 어떠한 충신이 있다 할진대,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수억천만의 충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 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위신이 설 게 아닙니까? 간절한 마음에 사무쳐 먹으나 입으나, 자나 깨나, 듣거나 보는 것이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일편단심 보고 싶고 모시고 싶어야만 합니다. 주인의 발끝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행복했어요. 예수님의 발에다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발을 씻겨 드렸으니 얼마나 복된 일이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여러분은 그 이상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예수님이 나를 붙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여러분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의 표준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먹는 것을 잊고 입는 것을 잊고 자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무친 심정으로 예수님께 미쳐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주인을 찾아 나서야 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소리를 지르며 찾아 다녀야 합니다. 끝날이 되었으니 찾아 다녀야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인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옵니다. 그러면 그곳으로 달음질 쳐야만 합니다. 다리가 찢어지든, 배가 째지든, 머리가 터지든, 옷이 찢겨지든 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길을 내 처자나 부모 때문에 가지 못한다면 안 됩니다.

본래 기독교의 길이 그런 길입니다. 기독교의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이 땅은 대가를 치뤄야 할 땅이지만, 우리는 일평생 살면서 사탄 앞에 한푼도 변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절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절개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이 원수들한테 변상해 왔으니 동전 한푼도 변상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그러한 사무친 심정을 갖고 주인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하나의 교단이 있다 할진대,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 교단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교단으로 안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이 제일 사무친 자를 찾아가십니다.

10-33
각성해야 할 기독교
예수님께서는 부모나 처자 혹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최고로 받들고 모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너의 처자나 부모나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요즈음에 와서 변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신식 예수장이가 많습니다. 요즈음 신식 예수장이들이 참 많아졌어요.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합니다. 뭐 조금 안다는 사람들이 더 그래요. 이런 믿음을 청산해야 되겠어요. 내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 이 세계 앞에 심정의 제단을 쌓아 나가야 할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인정을 중심삼고 화합하는 기독교가 되느냐, 천정을 중심삼고 화합하는 기독교가 되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느 편이 참입니까? 예수님이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는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이 죽는다는 소식을 듣자 도망가는 열 두 제자를 보실 때 하나님은 원통해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죽어가는 예수님의 뒷일이 두려워 도망가던 자들과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가시던 예수님, 몰림받으시던 예수님보다 먼저 죽겠다고 할 수 있는 제자가 땅 위에 있었던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는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죽은 제자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그 제자의 부활도 있었을 거예요. 제자 부활이 있었으면 하나님의 뜻은 2천년이나 연장되어 내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부활시키겠어요? 예수님만 살리겠느냐 말이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제자의 부활을 못 본 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한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사도들이 책임 못한 부활의 운명을 뚫고 나가야 할 권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승리하시어 부활의 권한을 갖고 나타나셨듯이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인간을 대표하여 사탄세계를 박차고 부활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는 모습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쌓아온 기독교는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요즈음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명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바람꾼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심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근본문제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떨어진 인간이니 몰랐던 주인, 몰랐던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즉, 나를 창조하신 본연의 주인을 알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알고 주인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와 심정의 인연을 맺은 예수님을 보내시어 만민에게 심정의 인연을 맺어 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심정적인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과 신랑 신부라는 말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각성해야 합니다. 보내신 메시아를 땅에서 죽이다니요? 메시아를 죽인 자들은 멸망해야 됩니다. 메시아를 죽인 제 1 장본인은 누구뇨? 제 1 장본인은 사탄입니다. 제 2 장본인은 누구뇨? 교법사들입니다. 제 3 장본인은 누구뇨?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 재판(再版)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의 역사는 그러한 입장에서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는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가신 주님을 모셔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끝날인 이 때에 여러분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신부 단장입니다. 신부 단장이란 무엇이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음식을 드시되 성별하고 드셨고, 입으시되 기도하고 입으셨고, 주무시되 기도하고 주무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 오셔서 드시고 입으시고 주무시는 데 있어서 참소의 조건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탄과 33년 동안 싸우며 살다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이 살다 가신 것을 분하게 여겨야 합니다.

10-35
참신부 단장을 해야 할 때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신랑되시는 주님이 오시면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7년 대환란이 벌어지고, 지상세계에는 심판이 벌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천만에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땅에서 모든 것이 풀려야 됩니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한스럽게 보냈으니 그것을 인간이 풀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오시면 주님깨서 성별하지 않고 입으실 옷 한 벌이라도 장만했습니까? 주님이 오시면 성별하지 않고 그냥 드셔도 하늘땅이 좋아할 수 있는 밥 한 그릇을 준비했습니까? 어느 방에 들어가시더라도 기도하지 않고 거하실 수 있는 방을 마련해 놓았습니까?

사탄에게 점령당한 곳이기에 성별하고 거하셔야 했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책임을 다하여 성별한 거룩한 성소와 지성소, 주님이 오셔서 기도 안 하고도 마음대로 거하실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놓았어요? 물론 외적인 환경도 준비해야 되지만 여러분의 몸뚱이가 그렇게 준비되어 있어요?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준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어떠한 양을 찾느뇨? 잠자고 있는 양을 찾지 않습니다. 그런 양은 안 쳐다봅니다. 주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자고 있는 양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목 마르다고 아무 물이나 잔뜩 먹고 자빠져 자는 그런 양은 안 쳐다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는데도 `하나님, 밥도 주고 편안한 자리에서 잘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붙안고, 그리움에 눈물이 앞서고, 애달픈 사정과 서글픈 감정을 초월하여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기에 미쳐야 합니다.

10-36
주인은 어떠한 양을 찾으시는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자식을 찾기 위해 미친 부모가 있다면 하늘은 그 부모에게 벌을 주지 못합니다. 벌을 줘요? 벌을 못 줍니다. 그런 부모가 있으면 인간들은 그 부모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그렇게 미친 부모가 있다면 국가도 그 부모 앞에 머리 숙여야 합니다. 천리(天理)의 원칙을 따라 심정적인 기준을 이루기 위해 미친 자가 있다면, 그를 국가적으로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 자식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미쳐간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 미쳤던 사람은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야 무슨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던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제사장 교법사들 가운데 간절한 마음과 최고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들, 하나님께서 동방 박사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셨겠어요?

여러분 동방 박사는 점장이입니다. 점장이란 말이예요. 예수님의 탄생이 그들에 의해 증거된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때에 대제사장들이 증거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물을 갖추어 놓고 거룩한 성물(聖物)을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야 했던 것이예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방인 종교가 됐고 제 1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오늘날 이 민족이나 우리는 다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것 다 빼앗겼어요. 남북이 갈라져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흩어져 통곡하는 삼천리 강산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것이 이 민족을 세계적인 하나의 제단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민족을 위한 천륜의 뜻이 없다 하더라도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심정적으로 단결하여 세계에 있는 어떤 교단이나 교파보다도, 어떤 교단의 교주나 책임자보다도 정성을 들이는 면에 있어서나 심정적인 면에 있어서나 진실한 면에 있어서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대표하여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 민족 가운데서 한 사람만 나오면 됩니다. 한 사람만 나와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낙망하지 맙시다. 낙망하지 맙시다. 길을 잃은 양도 살 길이 있고 갈 길이 있거늘, 우리에게 살길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심정으로 호소하는 참목자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10-37
하나님과 어떤 인연과 관계가 있는지를 몰랐던 우리
우리는 하나님과 어떠한 인연이 맺어져 있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가 맺어져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이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안식할 수 없으면 애달파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보고 나보다 몇천만 배 더 애달파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이 땅위에 하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자, 최선을 다하다 쓰러지는 자, 하늘을 위하여 눈물짓는 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충성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보다 몇 천만 배 더한 심정으로 그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그분의 모양이라도 본받겠다고 하며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받습니다. 그래야 은혜받는 것입니다. 소문내지 않고 심정적으로 들려 주는 한마디가 단에 서서 큰 소리로 설교하는 사람의 말보다도 더 뼈살을 녹이고, 공 같은 것이 터질 때처럼 전세포가 울리는 느낌을 주고, 마음으로부터 그에게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붙들고 놓지 말아야 됩니다. 붙들고 놓지 마십시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말입니다. 그러다 망하게 되면 먼저 망하고, 복을 받게 되면 먼저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 결판을 내야 하지 않아요?

우리들은 잃어버린 주인과 내가 어떠한 인연을 갖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주인에게 돌아가려면 어떠한 자극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이 시대에 있어서 예수님과 같은 사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기도하신 것처럼 생사를 넘어서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을 몇번만 접촉해 보면 그 사람이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있습니다. 열 사람 혹은 백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교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42개의 교파가 있습니다. 거기서 41개의 교파는 이단입니다. 이단이예요. 길이 둘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41개 교파는 이단입니다. 어느 때에 가든지 걸리게 됩니다. 이제 진리만 내세우는 교파는 지나갑니다. 진리라는 것은 대상적인 것입니다. 진리란 아직까지 먼 거리에 있고 하나가 못 되었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길도 진리도 과정적인 것입니다. 생명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일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또 말없는 가운데 크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심정에 사무쳐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을 준다 하더라도 이것과는 바꿀 수 없다, 어느 누가 암만 잘났다 하더라도 이것과는 바꿀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을 알아서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그에게 미쳐 떠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길을 가야만 우리들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을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을 대해 오셨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부자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요, 아버지와 딸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소원한 것이 무엇이며, 최후의 소원은 무엇이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는 언제이뇨? 잃어버린 자식을 다 찾은 때입니다. 그런 후에라야만 부모는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부모들, 그렇지 않아요? 자식을 백 명쯤 가졌다고 해 보세요. 그리고 백 명 가운데서 한명을 잃어버렸다고 해 보세요. 그 한 명을 찾지 못하면 아흔 아홉명의 자식이 암만 효성을 하여도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이예요. 안 그래요? 이게 그 말이예요. 백 마리 양 중 한 마리가 없어졌을 때 심정의 세계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수(數)를 초월하고 양(量)을 초월합니다. 질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것은 평등합니다.

10-39
주인이 안식할 수 있는 때
하나님의 한은 어디서 해원되겠느뇨? 하나님의 효자와 충신이 되는 길은 어디 있느뇨? 아버지를 위한 성전을 짓기 위해 뼈가 부러지도록 일을 하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돌을 나르고 흙짐을 지고 재목을 나르더라도 그런 것들은 때가 되면 다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는,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으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아들딸이 여기 있사오니, 아버지여, 영광받으시옵소서’하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의 무리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갈 길을 가르쳐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들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나만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민족을 넘어 세계를 넘어 천주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치적인 모든 것을 찾아 세우도록 불림받아 세워진 자들이라는 것을 느껴서 하루속히 이 삼천만 민족 앞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찾아오신 길을 대신하여 찾아 나가고, 가실 길을 대신 가고, 아버지가 수고하셔야 할 것을 대신 수고하며,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돌리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섭리의 뜻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중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앞에 피눈물이 맺히는 곡절이 있고 수많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 고개를 넘어가야 할, 싸워서 헤쳐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생명이 수백 번 재물이 된다 해도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연체(延滯)하면 그날 밤에도 쓰러지는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0-40
이 민족에 대한 우리의 중대한 사명
이제 하늘의 행군 나팔이 우리의 손에 들려졌고, 하늘의 승리의 방패도 우리에게 들려졌으니,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민족을 향하여 행군 나팔을 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것은 나를 넘어 가정이요, 가정을 넘어 사회요, 사회를 넘어 나라요, 나라를 넘어 세계요, 세계를 넘어 천주(天宙)입니다. 나보다도 더 크고 나보다도 더 높은 목적과 가치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조건삼아 전체와 인연을 맺기 위하여 재촉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록 행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천상(天上)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과 땅 위에 있는 수억의 인류를 붙안고 심정적으로 눈물을 뿌리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결단하는 순간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셨습니다. 사망과 고통의 고개를 넘어야 할 후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위하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만약 한국의 강토가 그때의 겟세마네동산과 같은 강토가 된다면 이 민족은 망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민족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려고 제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의 복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 불타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셨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세 제자마저 졸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족이 불신하고 제자가 졸아도 홀로 하늘 앞에 심혈을 기울여 민족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붙들고 눈물지으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참다운 성도의 모습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비 오는 날에도 바람 부는 날에도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도 주는 끝날에 예비한 그 수를 채우시기 위해 오늘 이 시간에도 어느 산중이나 노동판이나 빈민굴을 헤매시지는 않는고. 처참한 전쟁터나 머물 수 없는 토굴 속을 헤매시지는 않는고’ 하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염려하며, 눈물짓는 무리가 어디 있느냐 말이예요. 여러분, 삼천만 이 민족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은 교직자들이 피를 토하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한 후에 자기들의 과거를 뉘우치고 울부짖었던 것과 같이 울부짖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단합해야 됩니다. 교파가 문제 아닙니다.

심정이 통하는 하나의 기준을 세운 아들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심정에 북받쳐 올라 사회적인 모든 풍습과 형식을 넘어 `사랑하는 형제여, 사지를 넘어 생명의 곳에 같이 가자’고 권유할 수 있는 산 아들딸들이 어디 있는고……. 하나님은 필시 찾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목적은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는 것입니다.

10-41
참목자로 오셨던 예수님
주인을 잃어버린 양이 주인을 다시 만나게 될 때, 양은 그 자리에서 피곤하여 쓰러질지언정 그 주인은 그 양을 붙들고 통곡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찾은 양은 자기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자기가 실수한 행동을 잊어버리고 쓰러질지라도, 양을 찾은 주인은 그 양이 가시밭길과 돌짝밭길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면서 더 큰 눈물을 흘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자가 참목자일 것입니다.

그러한 목자가 이 땅 위에 오셨다 가셨습니다. 이 땅은 불쌍한 땅입니다. 그분은 모든 생명의 가치와 우주 전체의 가치, 천주의 가치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셨던 분입니다. 심혈을 다 기울여 벌레만도 못한 내 한 생명을 찾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비통하게 보낸 분함에 울 줄 아는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한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봐 자기의 아들딸을 붙들고 너는 나와 같이 되지 말라고 나면서부터 기도해 주고 권고해 주는 그런 부모, 그런 형제, 그런 친구, 그런 무리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은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떳떳하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참소한다는 거예요. `수천년 동안 내가 지배했던 당신의 아들딸 가운데는 나에게 충성을 하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린 아무개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천상천하에 홀로 계시고, 만우주의 주인 되시는 참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사탄이 `아무개는 하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는 조건을 세워 하늘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비웃는다는 거예요.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고 그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아들딸들이 이 땅에 나타나기 전에는 여러분이 하늘의 선한 조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을 몰아내오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려라. 입고 있는 옷을 적시고 발꿈치를 적시도록 흘려라. 그걸로 구할 수 있다면 샘물과 같이 흘려라’ 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때가 끝날입니다. 또, 눈물만이 아니라 피를 쏟으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의 고개,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 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민족을 붙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 기도는 사탄의 권한을 눌러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할 때 `네 말이 옳도다’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천적인 위신은 세우고 가겠다는 예수님이셨기에 골고다의 길을 늠름히 가셨습니다. 눈물과 피땀을 흘리면서 넘어가셨습니다.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원수가 아버지의 도성(都城)을 점령해 들어온다면, 자기 한 개체가 십자가에 죽어서라도 막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셨고, 자기 한 개체가 고임돌이 되어 하늘의 용사들이 넘어갈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 후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마음을 갖고 앞을 다투어 나갔을 때, 로마제국도 그들 앞에 굴복하였던 것입니다.

10-43
목숨이 남아 있는 한 가야 할 우리
우리들은 이 시대의 첨단에 서서 갖은 폭풍을 다 만나고 갖은 시험을 다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더라도 숨이 남아 있는 한, 죽어도 이것이요 살아도 이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세우고자 하는 이 민족의 4천년 역사에 빛날 수 있는 자랑스런 아들딸들이 되어 피의 제단이라도 남기고 가야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부여된 사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이곳 저곳, 방방곡곡에서 나와야 합니다. 황무지와 같은 이 땅 위에 하나의 생명체를 세우지 못한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후대의 인간들 앞에 어떤 표적이라든지, 어떤 전통적인 힘의 원천을 만들어 남겨 놓아야 할 사명이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눈물의 터를 박차고, 역사적인 피와 땀의 터전을 무시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내 앞에 적수(敵手)로 나타난 사탄과 최후의 결판을 짓는 자리에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쓰러지더라도 나를 대신하여 설 자가 있고 형제가 있고 아들딸이 있노라고 주장할 수 있는 참목자는 어디 있느뇨? 그 참목자를 찾아야 민족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시기적인 어떠한 차이는 있을망정, 혹은 한 때의 고통은 있을망정 심정의 원칙으로 이루어진 천정(天情)의 기준을 통한 사람이 민족을 점령했던 역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의 소원은 살아 생전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 앞에 승리의 산 제물과 예물을 드리고, 사탄 때문에 맺힌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찾고 싶으셨던 것이 이것이 아니옵니까? 이것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승리의 발판을 1대에 못 남기면 2대(二代), 3대(三代)에 걸쳐서라도 필시 남기겠다는 결심을 하고, 천상 앞에 약속이라도 세워 놓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주가 눈물을 흘리던 그곳으로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주가 피땀을 흘리던 그곳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그 영광이 우리에게 허락되어도 그것은 도리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한술의 밥을 먹을 때 가슴을 치고, 한 벌의 옷을 입을 때 몸둘바를 몰라 하는 성도, 주님을 모실 준비를 하는 무리가 하늘은 그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천하에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내 자신이 어떠한 가치적인 존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만하면 늠름하다는 겁니다. 이만하면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런 나를 아버지께서 바라고 고대하시고 계시거늘, 갖춘 바가 없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말을 잘하는 것으로만 세계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진리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슬픔과 피눈물의 골짜기에서 썩어짐을 당하더라도 그 민족의 장래에는 새로운 서광이 비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민족을 위하여 먹어야 되겠고 민족을 위하여 입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빚지고 빚진 자들입니다. 갚고 갚아도, 밑천을 다 털어서 갚아도, 자기의 뼈살을 다 살라 갚아도 1대(一代)로는 청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살인강도를 대해 그가 내 형제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한 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수천 수만인을 죽인 것과 같은 범죄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10-45
끝날에 처한 우리의 책임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못하시고 아픈 가슴을 억누르면서 세상을 위해 눈물을 흘리다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채찍을 맞아도 부족하고 탕감을 받아도 부족한 우리입니다.

여러분들은 불쌍한 한 생명을 붙들고 통곡해 보았습니까? 거리에서 짐을 지고 가는 지게꾼을 붙들고 `형제여, 그대의 생명이 어디 있느냐’고 통곡해 보았습니까? 빈민굴에서 입을 것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우리의 주, 우리의 아버지는 눈물의 왕자요 눈물의 아버지입니다. 고통의 왕자요 고통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인간이 말하는 행복의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도 못 가지신 분입니다. 왜?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개인을 위하여 울 때는 지나갔습니다. 나를 낳아 준 향토를 붙들고 울어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도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 가정을 원망하지 않고 마리아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하려 하셨습니다. 그들을 구하는데 자기가 직접 가서 구원하는 것보다도 제자들을 통해 구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이 민족을 대하여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하고픈 일을 다할 수 있을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늘의 심정에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피땀을 흘리며 최후의 고개를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찾고 있는 아들딸이 없느냐고 염려하면서 쓰러질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토굴에 가서라도 아버지를 찾고 있는 아들딸이 이 굴 가운데 없느냐고 외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어디에서 허덕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면서 아버지 대신 눈물을 짓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도 필시 그를 모른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찾아 들어온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여기서 외치는 사람도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가라지와 곡식을 한 밭에 두고도 분함을 참았듯이 나도 그렇게 참고 견디어 나왔습니다. 1년을 참고, 2년을 참고, 10년을 참고, 20년을 참았습니다. 이제 40년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한 날 사탄 앞에 제물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남겨진 사망의 길을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이 노정을 누가 개척하겠습니까? 이 민족의 운명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다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피맺힌 심정과 고동치는 심장의 맥박이 다하기 전, 이 생명이 다하기 전에 우리가 한번 해봐야 되겠습니다.

10-46
우리가 가져야 할 단 하나의 마음
지금까지 어떠한 뜻도 그 시대에 다 이룬 역사는 없었습니다.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그 시대에 영광의 자리에 섰던 것은 없었습니다. 그 주의나 사상을 주장한 사람이 죽어간 후에, 천년이나 2천년이 지난 후에 영광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갈보리 산상에서 반역의 무리들에게 몰려 십자가에 처량하게 돌아가신 분이지만, 오늘날엔 세계적인 인물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될 줄 그때 누가 알았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남기고 가신 것이 무엇이냐? 피와 땀과 그리고 심정입니다. 심정. 하나님은 심정의 동산, 평화의 동산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자유의 동산, 행복의 동산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막대한 타격을 준 불효자요, 배반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 수 있고 환영받을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심에 항상 황공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주 앞에 가면 갈수록 몸이 떨리고, 주의 사정을 체휼하면 체휼할수록 몸둘 바를 몰라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과 같은 느낌을 느껴야 됩니다. 이러한 자들이 먼저 하늘의 세움을 받아 들어가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자요,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되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가문이 있어도 모르고 부모가 있어도 모르는 자입니다. 단 하나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주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마음만 갖고, 어떠한 자리에서도 아버지로부터 끊기거나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만 갖고 나간다면 아버지의 품에 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십자가에 달리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지니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만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뜻길을 걸어왔지만, 현재 인간들의 사정과 상반된 입장과 현재 인간들의 심정과 상반된 입장에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알 때가 올것입니다.

10-47
통일용사가 가는 길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통일의 용사들입니다. 통일의 용사란 어떤사람이냐? 땅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가는 사람, 땀을 많이 흘리고 가는 사람입니다. 목적관과 우주관과 셰계관을 잃고서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철저한 정신과 철저한 의식과 철저한 가치관과 철저한 목적관을 가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 민족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민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고 피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 민족과 함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울어도 이민족과 같이 울고, 죽어도 이 민족과 같이 죽고, 살아도 이 민족과 같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천적인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어야겠습니다. 사탄과 싸워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여, 제가 사탄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천상에 가서도 사탄을 굴복시켜 심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을 갖고 가야 되겠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오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는 길은 지옥의 밑창을 뚫는 길입니다. 자기 자식이 더 사랑스러우면 자식과 잘 사십시오. 자기 처가 더 사랑스러우면 처와 잘 살아요. 자기 부모가 더 귀하다고 느껴지면 부모와 잘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상과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지만 우리에게 어떠한 배상이나 보상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신의 절개와 효자의 절개와 열녀의 절개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절개를 품고 출발하였으면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만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본연의 아버지를 찾아 나아가는 데 총진군해야 되겠습니다.

10-48
기 도
아버님, 땅 위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사옵고 많은 민족이 살고 있으되,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몰림받는 무리를 중심삼고 역사는 흘러 나왔고, 세계는 창조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저희들, 길을 잃어버린 저희들은 부모의 무릎을 찾아, 형제의 인연을 찾아, 백성의 인연을 찾아 다시 아버지와 부자의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역사의 한을 푸는 최후의 한 날까지 참고 나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오늘 허락하신 모든 은사로 말미암아 저희들에게 아버지와의 생명적인 약속과 생명적인 기약을 세워 주시옵고, 저희들이 철천지 원수 사탄 앞에 조롱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