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 to 8-116: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
1959.11.22 (일), 한국 전본부교회

8-89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
마태복음 22:34-40 고린도전서 13:1-13

[기 도]

이 시간 저희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리가 되어지기를 바라옵나이다. 아무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자칭 아들딸이라 하여도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되지 않는다 할진대,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없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아버님, 기나긴 세월 동안 진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 아들 딸이 얼마나 있었사오며, 당신이 진정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하실 수 있는 아들 딸이 얼마나 있었사옵니까? 억울하신 아버지, 외로우신 아버지를 부르는 저희들의 마음도 슬프고 의롭게 하여 주시옵고, 한없는 서글픔에 잠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의 사정으로 느끼고, 아버지의 처지를 저희의 처지로 알며, 아버지의 슬픔을 저희의 슬픔으로, 아버지의 분함과 고통을 저희의 분함과 고통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하늘의 크신 은사를 수없이 받았사옵니다. 하늘은 슬픈 자리에서도 저희에게 은사를 주셨사오나 저희들은 그 은사를 받고 기뻐하기만 하였사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영광을 바랐던 과거의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저희에게 은사를 주심은 하늘의 슬픔을 나눠 주시기 위함이옵고 하늘의 고난을 대신 맡기시기 위함이오며, 하늘의 슬픔을 품고 십자가를 지고 하늘 대신 싸우라 하심이온데, 이 땅 위의 저희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가 있다 할진대, 그가 축복받기 전에 혈투전을 치르는 고난의 역사가 있었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이 축복받기 전에 하늘의 슬픔과 더불어 고통과 억울함과 통탄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개인과 가정이 그러하거니와 민족과 국가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이날 이 삼천리 강산의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이 되어 있사옵니까? 축복받은 민족이라 한다면 하늘이 겪으신 고난과 슬픔과 역경의 노정을 거친 당신의 숨은 아들 딸들이 많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위하여 싸워 나간 자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혈통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 해도 선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는 부모요, 형제요, 식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한많은 6천년 복귀역사노정 가운데 뜻을 품고 왔다간 선지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하늘의 귀한 뜻을 품고 갔던 선지선열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도 자신의 슬픔보다 하늘의 슬픔을 크게 느낄 줄 아는 선한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생명을 내놓고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치며, 죽음의 고개를 거듭하며 넘어간 뭇사람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패악한 이 민족 가운데 의지할 바 없는 당신의 아들 딸들을 통해 안식의 한날을 세우고자 하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누구를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누구를 위하여 이념을 갖고 있사옵니까? 하늘을 위한 것도 아니요, 민족을 위한 것도 아니요,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이 불신하는 것은 저희 자신들이 불신한 연고이옵고, 불신하는 환경이 된 것도 저희 자신들이 불신한 연고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책임질 바의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때이오니, 어렵고 힘든 일도 스스로 책임질 줄 알며 스스로 청산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들이 여기에 모였사오니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하늘의 은사를 바라고 지성소에 분향을 하던 대제사장들의 심정을 저희들이 느껴서, 아버지의 염려의 심정을 알고 분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고이 따르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타내시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 때는 늦은 가을이옵니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세계를 바라보니 6천년의 종말시기, 즉 추수시기를 지나 겨울 절기가 가까운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시기에 아버지, 저희의 마음이 낙엽처럼 떨어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이 쓸쓸하지 말게, 얼어붙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추우면 추울수록, 때가 변하면 변할수록 저희는 승리의 모습이 되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어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봄날을 노래할 수 있는 자격자, 새로운 봄동산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오니, 아버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이 시간 저희들을 대하여 주시옵고 저희를 믿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허락하신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지금까지 저희에게 주신 말씀은 너무도 많사온데, 그 말씀을 전한 자는 전하고 나서 빚을 지게 되고, 받은 자들은 받고 나서 빚을 지게 된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서로가 하늘 앞에 면목이 없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살아야 할 인간이기에 새로운 말씀을 요구치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역사하여 주시옵고, 심정으로 느낄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은 저희와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아버지시옵고, 여기에 모인 이들은 서로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하늘의 식구임을 느낄 수 있고, 그 심정을 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외로운 자리에서 간곡한 심정으로 호소하는 수많은 아들 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같은 은사로써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8-92
말 씀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입니다.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8-92
하나님이 소망하고 그리워하시는 것
우리는 마음이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한 곳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 한 곳을 간곡하게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도 이렇거늘 세계와 인간을 지으시고 뜻을 세워 경륜하시는 하나님도 그리워하시고 소망하시는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역사를 섭리해 오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신 후 심중으로 그 무엇을 소망하시고 그리워하셨다 할진대, 누구를 그리워하고 소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도 아니요, 땅 위의 어떠한 물건도 아니요, 오로지 인간을 그리워하고 소망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 시간 다시 한번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때문에 슬퍼하시고, 인간 때문에 고통당하시고, 인간에게 배반당하시면서도 인간을 붙들고 나오시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워해야 할 인간이요, 소망해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노정에서 슬픈 고비고비에 부딪치시고 싸움의 역사를 엮어 나오셨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워하시고 우리를 대하여 소망을 갖고 싸워 나오시게 되었는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인간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입장에 서서 역사를 통해 싸워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는고?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 때문이예요.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워하는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 대한 소망을 이루어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하나님은 인류를 대하여 그리움을 품고 소망을 품고 지금까지 싸워 나오시는 것입니다. 소망하고 그리워하는 인류인 연고로 개인을 거쳐, 가정을 거쳐,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지금까지 싸워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지극히 그리워하고 가정을 그리워하고 민족,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 전체를 그리워하신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에 대한 그리움과 소망을 가지시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슬픔이 있을 때마다 그 슬픔을 당신께서 책임지시고 그들에게 슬픔 대신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만일 땅 위에 그러한 친구가 있다 할진대 그 이상 귀한 친구가 없을 것이요, 그러한 부모나 형제, 그러한 누가 있다 할진대 그 이상 높여 주어야 할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와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생애노정의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기에 느껴 ‘나를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여, 우리의 가정을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시여, 우리의 사회, 국가, 민족을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시여,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시여’하며 하늘을 위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슬픔과 그리움의 심정을 품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알아 드린 사람이 역사노정에 얼마나 있었습니까? 그러한 가정은 얼마나 있었으며, 그러한 민족 국가는 얼마나 있었습니까? 없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8-93
하나님의 소망을 이뤄드리지 못한 인간
하나님의 그리운 마음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소망의 인격자가 되기를 지극히 그리워하셨는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타락 전부터 품어오신 그리운 심정, 타락 전부터 품어오신 소망의 심정을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가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는 슬픔이 사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움과 소망의 심정을 갖고 인류를 찾아올 적마다 우리의 선조들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환영하지 못하고 배반했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 가정에 대해 하나님은 슬픔의 심정, 분함의 심정을 억제하며 그리운 마음을 다시 찾기 위하여 가인과 아벨을 세우셨으니, 그 소망을 이루어 주지 못하고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께 슬픔만 가한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 후 1,600년이란 세월을 지나 다시 노아를 세우셨으니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또 400년을 지나 아브라함을 세우셨으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워하던 한 사람을 만나 심정을 나누고자 하셨으나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이 품으신 그리움의 심정을 온전히 반겨주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3대를 거치면서 수천년 동안 품어오신 그리움의 심정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야곱 가정을 세우셨으나 그 가정을 놓고도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으시고도 이러한 그리움의 심정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고 가르칠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그들의 뒤를 따라오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워하시던 하나의 민족의 형태를 땅 위에 세워 놓으시고 그 민족이 도탄에 빠질 때마다 하늘은 그리워하는 마음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고충을 느끼시고 슬퍼하셨으며 어려움을 다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끌어 나온 민족,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움의 심정을 알지 못하게 될 때에 광야에서 그 민족을 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개인에서부터 가정을 거쳐 민족을 찾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그리움의 심정은 때가 가까와옴에 따라 커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아브라함 시대보다 하늘과 더 가까와야 할 가정적인 야곱 시대는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가정을 지나 민족적인 모세 시대에는 가정적인 시대보다 하늘 앞에 더 가까이 갔어야 될 터인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가정적인 시대가 하늘과 더 가까왔고, 가정적인 시대보다는 개인적인 시대가 더 하늘과 가까왔습니다. 종말에 가까와질수록 세계에 널려 있는 인류는 하나님의 그리워하시는 심정기준에 가까이 가야 할 것인데 반비례로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하늘의 슬픔이 우리들에 의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더듬어 보면, 어느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다 간 사람은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선의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그리움의 심정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주고 역사에 심어주고 세계에 심어주기 위하여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하는 물건 하나에도 하나님의 그리움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대하는 식구에게도 역사적인 하나님의 그리움이 스며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세계에도 하나님의 그리움이 스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으신 만상을 바라볼 때, 그 만상이 하늘의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만물도 그러하거니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비록 악한 모습이지만 하늘은 반드시 한 기준을 놓고 그리워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때, 하늘 앞에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됩니다.

8-95
하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곳에 계시고 싶어하시는가. 하늘은 어떠한 곳에 계시고자 하시는가. 그리운 자가 사는 곳에 계시고 싶어하십니다. 하늘은 이 땅을 중심삼고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 계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이 땅 위에 살아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고 싶어하시는 이 땅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실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실 수 있는 가정과 나라와 세계가 못 되어 있어요. 세계도 그만두고, 국가 민족도 그만두고, 가정도 그만두고 나 하나라도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자리에 처해 있느냐고 묻게 될 때 그렇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싸워 나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그리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손을 붙들고 사랑할 수 있는 한날을 맞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 것이뇨?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네 안에 있다고 하셨고, 천국을 소개하실 때도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에 있다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어디 있느뇨? 물론 세계에도 있고 나라에도 있고 민족이나 가정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서러움은 ‘나’에게 스며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거늘 하늘의 기쁨은 어디에 있어야 되겠습니까? ‘나’에게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어떤 하나의 기준이 되어 있지 못하는 한,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다’ 하실 수 있는 우리, 즉 그러한 내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무엇이뇨?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 국가, 세계를 이루어 지상에 천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기준이 하나도 잡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 전의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의 소망은 그리움의 심정을 통하여 살 수있는 개인과 가정과 더불어 민족과 세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세계가 못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 세계를 타락 전의 세계로 다시 복귀하시기 위하여 그리움의 심정을 품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노정을 허덕이시며 인류를 붙들고 뒤넘이쳐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 즉 ‘나’를 그리워하신다는 사실을 압니까? 그리움의 고개를 넘어 ‘나’를 붙들고 사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요? 이것을 모르면 안 될 것입니다. ‘내가 하늘을 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 ‘내가 성신을 안다’하는 것보다 하늘이, 예수님이, 성신이 내가 너를 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땅 위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하신 뜻은 그런 사람을 세우기 위한 것이요, 그런 사람이 사는 가정,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그런 사람들이 통치하는 국가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중심삼고 온 세계가 하늘 앞에 송영드려 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도 그러한 백성도 그러한 가정도 그러한 개인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8-97
메시아를 보내시는 목적
그리운 백성, 그리운 민족, 그리운 가정을 찾고 그 다음에는 하늘 땅을 움직여 나가는데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주인공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 주인공은 어떠한 존재일 것인고? 하나님의 그리움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오시는 분이요, 그 분은 이 땅과 하늘 전체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 할진대, 그런 분이 계시는 곳일 것입니다. 그곳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곳입니다. 어떠한 곡절도 넘고 죽음까지도 넘어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누가 계시느뇨? 부모가 계십니다. ‘나’를 책임지고, ‘나’를 그리워하며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를 찾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부모가 계시는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음으로 그리운 곳은 어디뇨?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머무는 곳입니다. 다음은 자녀가 있는 곳이며 그 다음에는 형제가 있는 곳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리워하는 곳은 부모를 중심삼고 부부, 자녀, 형제가 있는 곳, 즉 식구가 있는 곳입니다.

고향 산천을 왜 그리워하느뇨? 어느 때나 자기의 심정을 풀어 놓고 쉬게 해 줄 수 있는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입장에 있는 자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이란 지역과 거리를 초월하는 것이어서 자식이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부모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부부끼리도 마찬가지이며 형제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워하는 곳은 어디뇨? 마음의 그리움을 노래할 수 있으며 서로를 간절히 생각할 수 있는 곳, 그리운 식구들이 있는 곳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런 곳을 그리워하거늘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곳은 어떤 곳인고. 하늘의 주권이 세워져서 그 주권을 중심삼고 나라를 이루고 거기에 하늘을 대표할 수 있는 백성과 가정과 개인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이 같이 사실 수 있는 하늘 식구가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심정을 중심삼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높여주는 곳에 있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있고 싶어하는 그곳은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닮아난 인간, 하나님의 모양대로 생겨난 인간이거늘,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이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신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 그는 어떠한 존재일 것이뇨?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이 하늘 가정이기에 가정을 대표하고 가정을 수습할 수 있는 주인공이십니다. 그러한 책임을 짊어지기 위하여 오셨던 분이 예수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수많은 성현현철들이 왔다 갔고 수많은 인류가 왔다 갔으나, 하나님의 그리움의 심정, 그리움의 마음을 갖고 나타난 사랑의 아들이 없었더랬는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실 수 있는 존재다’하는 자부심을 갖고 말씀하셨던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하나의 하늘 가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중심하지 않고는 하늘의 식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철칙이예요. 하늘 가정은 예수님 한분을 중심삼고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보다 더한 하나님의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식구. 예수님이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한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신부를 택해 세워가지고 하늘 가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을 중심삼은 민족, 그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그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를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존재였느뇨? 그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워하던 실체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가 마굿간에서 탄생하던 그날, 하늘의 천군천사도 그를 환영하며 송영을 드렸습니다. 이방의 동방박사들도 그에게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으며 양치는 목자도 그에게 경배했습니다. 이는 왜? 예수께서 누우신 자리가 비록 말구유였지만 4천년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이었기에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8-99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처지와 결심
어린 아기 예수를 그들이 그 같이 대해 주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기쁘셨으나 자라는 예수를 대하는 요셉 가정을 바라볼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던 동방박사와 같은 정성으로 마리아와 요셉 가정도 예수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이루어질 그 한날을 고대하시면서 예수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을 더 그리워하시고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그때에는 하늘도, 땅 위의 사람도 예수를 환영하였지만 자랄 때는 그러한 자리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4천년 동안 그리워하시다가 비로소 보내신 아들을 어려운 자리에 눕게 하고, 외로운 자리에 눕게 하셔야 했던 하늘의 심정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지요. 그래서 요셉의 아들인 동생들까지도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또 요셉도 마리아도 예수님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잉태할 때는 천사의 명령을 받들어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였지만, 예수를 낳아 놓고는 품에 품고 젖을 먹일 때와 자랄 때 대하는 것이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 위에 온 예수는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을 느꼈고 자기 하나를 처참한 자리에 놓아 두고 그리워하시는 하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민망함을 느꼈다는 거예요.

4천년 동안 택해서 이끌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또 주님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워해야 할 예수를 그리워할 줄 모르는 민족이 된 것이 무엇보다도 하늘의 무한한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예수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 백성이 반대하고 나설 때에 하나님의 억울함은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은 수심과 곡절에 싸여 자랐습니다. 왜? 남들과는 생활 감정이 다르고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옮겨 놓는 발걸음, 세계를 보는 척도가 달랐어요. 요셉 가정에서 사는 그는 어느 한날 큰 웃음 웃으며 기뻐해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는 세계나 부모, 그리고 가정이란 것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요셉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은 하늘 가정임을 아신 예수, 그러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왔던 예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사명을 감당하고 가겠다는 철석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모가 배반해도, 민족이 배반해도, 세워 놓은 유대교가 배반해도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워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움의 심정을 갖고 가야 할 입장이었기에 예수는 환경이 변하고 가는 길이 막혀도 죽음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30여 년을 살다가 원치 않는 생애의 종말을 짓는 그 시간에도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보고 싶은 그 아버지,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에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라 세워 놓으시고 그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자신을 세워 놓으신 목적이 하늘 가정을 찾기 위함이요, 하늘 민족과 하늘 국가와 하늘 세계를 이루기 위함임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고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원수지만 자신을 세워 놓고 하늘이 소망하시는 것은 이 세계요 이 인류임을 아셨고, 그리워하고 다시 그리워해야 할 이 땅인 것을 아셨기에, 자기가 죽은 후 다시 하늘이 그리워해야 할 이 세계인 것을 아셨고, 예수는 하늘을 붙안고 ‘아버지시여, 저들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8-101
하나님께서 그리워하시는 가정
하나님이 땅에 예수를 보내신 목적은 땅에서 예수를 중심삼고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예수 자신을 배척하고 죽음의 자리에 내모니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지 못하고 가는 예수는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기독교는 그 언약을 믿으며 오늘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누구를 모시고 오실 것이뇨? 혼자 오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하였거늘, 혼자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만으로서 오실 수 없어요. 아버지를 모시고 와야 할 주님이 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신랑이고 너희는 신부라’ 하였거늘, 우리는 하늘 부모를 모시고 신랑 신부를 이루어야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사랑으로 끝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위함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축복하시기를 ‘내가 거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이 계시고 싶고 예수께서 계시고 싶은 곳은 하늘 보좌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곳은 안식의 자리, 보금자리가 아니예요. 기도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청산해야 할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러한 기도를 받아 주셔야 할 입장입니다. 왜? 아직까지 하나님의 그리움의 심정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움을 풀기 위하여 땅 위에 보내신 예수가 사명을 다 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실체를 땅 위에 세우지 못한 연고로, 그것을 해결지을 때까지 하늘은 기도를 받아 주셔야 하고 예수는 기도를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하나님은 그만두고 예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예수님은 그만두고 성신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성신은 그만두고 이 땅 위의 잘 믿는 성도들이 있고 싶어하는 곳이라도 여러분은 마련해 놓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곳에 계시기 위하여 6천년 동안 그 한 곳을 그리워하시고 소망하시며 싸워 나오셨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려면 누구보다도 세계적인 이념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어떤 국가를 지배하는 참다운 주인공이 되려면 어떠한 민족보다도, 어떠한 백성보다도 더 그리워하고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구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가족의 전부가 딸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어찌하여 하나님에게 매달리느뇨?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리워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리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움은 어디에서 생겼느뇨? 인간이 타락한데서 생겼습니다. 이 그리움이 풀리기 위해서는 그리움의 내용을 청산지을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이 땅 위에 세워져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기준을 세우시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 재림주께서 오시는 때가 재림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그리워하시던 아들 딸을 찾아 놓고 ‘너희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구나. 이제 내가 너희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겠다’ 하실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땅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곳에 가 보았습니까? 못 가 보았으니 그런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곳은 타락한 세상의 가정이 아니라 우주적인 이념과 가치를 가진 가정입니다. 우주적인 가정, 그 가정은 우주적인 참부모가 사시는 가정입니다. 우주적인 신랑 신부가 사는 가정이요, 우주적인 아들 딸이 사는 가정입니다. 우주적인 형제가 사는 가정이예요.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고 주를 모시고 살 수 있는 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나도 그러하거니와 예수님도 그러하고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역사노정에서 인간을 붙들고 허덕여 나오신 하나님도 우리와 같습니다. 같은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하나님적인 우주관을 중심삼고 생을 개척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목적과 복음의 말씀을 내 놓으신 목적은 무엇이뇨? 하늘 식구들이 삼위신을 모시고 즐겁게 살 수있는 하늘 가정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입니다. 구주. 무슨 구주냐?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구주라는 거예요.

8-103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가정
나를 낳아 준 부모는 나만 사랑할 줄 알지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부부도 자기들끼리만 서로 품고 좋아하지 만민 앞에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그 영광을 돌려 드릴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또 자기 자식만 사랑합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사랑하되 온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우리 부모를 사랑한다는 관(觀)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부모를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되 하늘 땅에 있는 모든 남성과 여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해야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일대(一代)의 인연을 넓혀서 우주적으로,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런 사랑의 관(觀)을 망각해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주적인 심정을 품고 인류를 사랑해 오셨기 때문에 구주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식구를 찾아 나섰을 때,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오자 ‘내 모친과 내 형제는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모친을 대하여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응당히 그럴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하나의 가정도 이루지 못한 인간들, 하늘의 뜻도 이루지 못한 인간들, 하나님의 자식이 되고 하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도인들은 독신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가정을 찾지 못했는데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높은 기준을 가진 도(道)는 독신 생활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 천륜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한 자체가 하늘 앞에 역사적으로 저끄린 죄상만 해도 용납받을 수 없는데, 그런 내가 하늘이 소망하시는 가정 형태를 이룬다고 하니 하늘은 이를 용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순서가 거꾸로 된 때문입니다.

하늘이 진정으로 그리워하시는 가정을 이루어야 할 사명을 책임지고 오셨던 예수가 그 사명을 완전히 종결지어 가정을 이룬 후에 우리는 그의 아들 딸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가정은 어떤 가정일 것인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런 가정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예요. 알아 보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하늘 앞에 갈 때는 동서 사방으로 다 갈라집니다. 죽어서 갈 때에 ‘이 사람은 내 아내인데, 아버지, 데리고 왔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 ‘저기 우리 아들 딸이 있는데, 제가 천당가면 같이 보내 주십시오’ 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당당코 ‘아버지여, 혈통적인 인연이 있는 이들을 하늘을 대신하여 사랑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는 아들 딸, 혹은 남자나 여자를 하늘은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늘 가정을 찾아 헤매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하신 것입니다. 그를 아무리 편안하고 좋은 곳에 모신다 해도 그곳은 하늘이 그리워하시는 곳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입니다. 거리에 누워 잠을 잘지라도 거기에 하늘이 함께 하신다면, 예수님에게는 그곳이 보금자리였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께서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이 같이하실 수 있는 가정을 이루게 될 때 그 가정을 중심삼고 단결하였으면 틀림없이 제사장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늘의 혈족으로서, 하늘의 가정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으니 하늘의 혈족이 끊기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최후에 남긴 것은 신랑 신부라는 명사입니다. 신랑 신부, 참부부. 참부부인 동시에 참부모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최초의 아담 해와에게 허락하신 본연의 기준을 4천년만에 다시 세워서 이루어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종결짓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8-105
천륜의 귀착점
인륜은 부모를 사랑하고 부부끼리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부모를 사랑해야 하는가 생각해 봤어요? 누구 때문에 부부끼리 사랑해야 하며 누구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어요?

사랑하는 것을 책임져 주시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최후에 남아질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워하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사랑합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 죽어 보십시오. 어디로 가는지.

여러분이 자식을 낳아서 젖을 먹이며 귀엽다고 하지만, 누구 때문에 귀여워합니까? 그것은 하늘 땅을 대신하여 귀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세계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귀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따른 천륜의 운세는 세계를 넘어 천지를 포용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을 통해 태어난 아들 딸을 나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용납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아주머니들, 하늘 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을 품는다는 사무친 심정으로 자기 아들 딸을 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에덴에서 살 수 있는 아들 딸은 우주성을 갖춘 아들 딸이어야 됩니다. 만물을 주관하라 하셨으니 주관자로서의 자격을 가진 존재라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자기 아들 딸을 낳아 가르치는 목적을 자기 가정이 잘 되는 데 두었습니다. 거꾸로 됐어요. 오늘날은 거꿀잡이 시대예요. 하늘이 좋고, 세계가 좋고, 나라가 좋고, 사회가 좋고 난 후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원칙인데 타락해서 거꾸로 되었어요. ‘나부터 좋고 다음에 우리 집이 좋고 그 다음에 우리 사회가 좋도록 하자’는 주장입니다. 거꾸로 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늘은 그런 관점으로 이 땅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을 들이쳐 가지고 거꿀잡이 시대를 종결지어 나가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치는 길이다. 네 몸뚱아리를 쳐라’ 하십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도의 길을 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핍박을 당하고, 가정적으로 핍박당하고, 민족적으로 핍박당하고, 세계적으로 핍박을 당하는 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인륜을 세워 자기의 일가를 중심삼고 부모 앞에 효도하며 부부끼리 위하고 자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륜은 그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인륜은 자기를 중심삼고 가르치지만 천륜은 하늘을 중심삼고 가르칩니다. 사랑을 하되 하나님같이 사랑하라 합니다. ‘내(하늘)가 그리움의 주인공이요, 내가 그리워하는 이 땅이요, 이 세계이니 이 모두를 품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을 갖고 사랑하라’ 합니다. 그것이 천륜이예요. 천륜의 귀착점은 그곳입니다. 인륜의 귀착점은 일개 가정이지만 천륜의 귀착점은 끝날에 나타날 우주적인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을 기필코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에서 높여 주는 인격자는 개인적인 인격자가 아닙니다. 하늘이 높여 줄 수 있는 인격자예요. 그런 날이 와야만 천지의 한이 풀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비극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며 살고 있는 그 가정이 역사적인 비극을 낳은 터전입니다. 가정은 역사를 망칠 수도 있는 터전인 반면 역사를 거울삼아 뜻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흥망이 여러분의 가정의 정적인 기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정은 두 갈래로 갈라져 왔습니다. 인륜 앞에 선한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으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도(道)는 이 중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도는 아직까지 이 땅에 완전히 발을 딛지 못한 채 나오고 있습니다. 남의 집 곁방살이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도 마음대로 주관 못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0여 년을 사셨지만 곁방살이 하다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한(恨)을 알아 가지고 그 한을 풀어 드리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백성의 죄를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8-107
하늘 가정을 이루어야 할 우리의 책임
천륜이 품고자 하는 정(情)의 발판은 어떠한 곳이뇨? 천적인 가정입니다. 인륜이 품고자 하는 정의 발판은 인간적인 가정입니다. 인륜은 천륜에 의해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정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가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자녀를 기르되 그 자녀들이 내 가정을 중심삼고 나를 사랑해 주는 아들 딸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통일교회 식구라면,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에도 그 아기가 하늘과 땅을 위하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 딸의 인연을 캐들어가 보면 타락 전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자 계획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낳은 아들 딸들은 역사적인 재창조를 대신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아들 딸들을 품고 그저 내 아들이요 내 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왜 아들 딸을 중요시하는지 알아요? 자기의 정력을 다 기울이고 죽음의 길을 넘으면서도 왜 그토록 사랑하고 싶은지 알아요? 그만큼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땅을 대신하여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이예요. 이렇게 볼 때 과연 하늘이 살고 싶어하시는 곳, 하늘이 그리워하시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하늘은 바로 이러한 아들 딸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정을 그리워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사탄과의 혈투전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소망의 나라, 이러한 소망의 주인공, 이러한 소망의 곳을 그리워하는 우리라 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이제는 민족을 중심한 시대가 지나고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대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붙안고 즐기실 수 있는 발판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나는 너와 더불어 살겠다’하실 수 있는 사람이 땅 위에 기필코 나와야만 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늘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아들 딸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 딸이 되어야 하는데, 내 아들 딸 내 어머니 내 아버지 하다 가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없다는 거예요. 아직까지 내 아버지 어머니, 내 아들 딸 하는 혈족의 기준을 넘어설 수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소망하고 이루려 하시는 하늘 가정과는 인연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그런 가정 환경에서 살다가 천당 갈 줄 알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모두 천당 보내줘야 되게요? 지금은 우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있을망정, 싸우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을망정 당 한가지 품어야 할 절개가 있으니,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싶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아들 딸로서 갖출 바의 절개입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자식을 기를 때도 그 자식을 높여줄 줄 알아야 됩니다. 부모라고 해서 ‘이놈의 자식 뭐 어떻구 어떻구’ 하게 안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다 할진대, 그 소망은 그들을 통하여 계승되는 거예요. 자식을 통하든가, 부부를 통하든가, 부모를 통하든가 어떠한 길을 통해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소망이 하늘이 세워 줄 소망이라 할진대 그것은 천륜(天倫)의 길을 통해서만 연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같지 않은 자들과는 의논도 하고 싶지 않고 무슨 일도 같이 하고 싶지 않지요? 영원한 생활적인 이념, 영원한 이상적인 사상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경륜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그저 ‘예수만 믿으면 가겠지’ 하고 살면 들어갈 것 같애요? 절대 안 됩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이제 한이 있다 할진대 하늘 앞에 충성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남편이나 아내, 즉 부부는 어떠한 존재냐? 하늘 땅을 대신한 제물입니다. 종적으로 하늘과 땅을 접선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존재요, 횡적으로는 역사가 생긴 이후 지금까지의 여성을 대표한 존재요, 남성을 대표한 존재입니다. 이런 것 느껴 봤어요? 하늘과 땅이 접하고 전인류가 화합할 수 있는 제단입니다. 언젠가 선생님이 여성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가정의 사랑은 창조 전부터 영원무궁토록 전체가 지켜야 할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으로 번식된 아들 딸이 이 땅위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 기준에서 하나님이 ‘오냐, 너는 진정한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하고 인정한 사람이 있어요? 없다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찾아야 됩니다. 부모가 있다 할진대 그 부모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부모를 대신한 부모입니다. 그 부모는 자기 자식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가정을 넘어 세계에 있는 남의 자식도 한꺼번에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8-109
타락한 인간이 거쳐 나가야 할 길
도의 생활은 무엇이뇨?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질 수 있는, 하늘 가정에서 살 수 있는 자격자는 어떤 사람일 것이뇨? 우주적인 인격자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심정문제에 들어가서 심정으로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늘 땅을 대신한 참부모를 모셔 봤어요? 우리의 부모는 하늘이 공인하고 땅이 공인하고 천정이 공인하는 참부모입니다. 하나님도 천사들도 이 땅의 피조만물도 ‘옳소이다’하는 참부모입니다. 지금은 참부모로서 공인을 받고 나타나신 분을 모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예수님이었습니다. 또한 오시는 주님입니다. 오시는 주님.

그러면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거짓 부모가 되어 거짓 자손을 낳았으니, 이를 다시 복귀하기 위한 참부모로 오셨던 분입니다. 아담 해와는 참부모가 못 된 동시에 참부부도 못 되었고 참부부가 못 되었으니 참자녀도 못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예수와 하나가 되면 참자녀 복귀, 참부부 복귀, 참부모 복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해라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걸 알아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제 거쳐나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가? 이 한스러운 역사를 박차고 ‘할렐루야, 아멘’ 하며 승리의 용자로서 나타나 천적인 부모를 모시는 자리를 거쳐 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천주적인 신랑 신부의 기준을 노래하는 자리를 거치고, 그 다음에는 천주적인 자녀를 사랑하는 자리를 거쳐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거쳐가야 할 3대의 길입니다. 국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동서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 할진대 그런 부모 앞에 전부 머리 숙이고, 그런 부부를 대하여 전부가 축복하고, 그런 자녀 앞에 전체가 머리 숙이고 위해 줄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와야 됩니다. 그런 곳이 어떤 곳이냐. 앞으로 오실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갈 곳이 앞으로의 하늘 보좌입니다. 14만 4천 무리가 무엇인지 알아요? 그러한 무리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기독교 신도들을 한번 해부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기 부모 이상으로 남의 부모를 사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아들 딸 이상으로 남의 아들 딸을 사랑할 줄 알아야 돼요. 왜?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만 사랑하는 분이예요?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위하여 모인 식구라 할진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는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그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그의 어려움을 내 어려움으로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감정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에게 솟구쳐야 합니다. 자기의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고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감정이 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솟구치지 않는 한평화의 동산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런 평화의 동산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실패한 분이예요. 나아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까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땅 위의 인간도 그리워하는 것을 찾아 헤메거늘, 사랑의 하나님이야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 무한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인간을 놓지 못하시는 하늘의 곡절은 무엇이뇨? 그토록 인간을 그리워하시는 원인은 무엇이뇨? 같이 살기 위함입니다. 같이 살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이뇨?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면 자식을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령한 자리에 들어가면 무엇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을 준엄하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에요. 여러분이 자식을 대할 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지요? 그 마음이 누가 준 마음인지 알아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한 후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하나님이 같이 살 수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자식을 사랑해 봤지요? 가정을 중심삼고 살아 봤지요? 그러나 그 가정은 타락한 가정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뭐라 해도 심판대 앞에서는 축복해 줄 수 없는 가정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야 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못 되었으니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그러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고, 그러한 사회를,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자기 교파 자기 교회만 찾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될 것 같아요?

8-11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기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사람, 어떠한 민족도 품고 형제 아닌 형제를 형제로 여기고 부모 아닌 부모를 땅 위의 어떤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존재가 되지 않는 한,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마 22:37)”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기준은 어떤 기준입니까? 세상의 인간들이 하는 찌꺼기 사랑을 하늘이 원하시겠습니까? 하늘이 그런 자리에 들어올 것 같아요? 천만부당합니다. 다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 27억 인류를 품고 그들에게 있는 것을 전부 다 나눠주고도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요만큼 했으니 다했다’ 할 수 없어요. 몸뚱이로는 그럴 수 없으니 심정으로 전체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정은 하늘 땅을 대신할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심정 하나를 내놓으면 아버지도 우리에게 다했다는 인정을 해주십니다.

그러면 그 심정기준은 어느 정도만큼이어야 하느냐? 자기 아들 딸을 사랑하는 그 기준 이하, 부부끼리 사랑하는 그 기준 이하,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기준 이하, 땅 위의 어떤 존재에게 흐르는 정적인 심정기준 이하의 기준을 가지고는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기준 이상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그런 기준을 가지고 하늘 앞에 섰다면 벌써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사람을 사랑하는 심정기준 이하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땅 위의 누구를 사랑하는 이상의 심정기준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도(道)를 위하여 자식을 버리고, 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중에는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면서도 ‘황공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의 심정기준을 가져야 돼요.

예수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욕먹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핍박받고 몰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가 느낀 세계가 민족보다 더 중요하고, 피박받으면서도 가야 할 세계였기 때문에 예수는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품고 나가는 예수에게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었어요. 수많은 성현들이 왔다 갔지만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심정세계와 인연을 맺은 책임자로 나타났기 때문에 예수는 심정을 중심삼고 보아도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셨습니다. 다했습니다. 보십시오. 천만번 죽어 마땅할 죄악의 무리 앞에 하늘은 수많은 선지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 하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죽는 그들보다 몇 천만 배의 고통을 느끼시고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과 함께 통곡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처참한 역사의 해골곳이 역사노정을 더럽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선한 무리가 쓰러질 때마다 하나님은 눈물의 고개를 넘으셔야 했던 것, 또한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정도로 남아지게 된 것이 이 땅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있어서가 아니예요. 절대 아닙니다. 오늘날 이 국가가 이만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아요?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 앞에 비료가 되어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꼴이나마 남아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다하는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할 바를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다하셨다는 거예요.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와하셨나. 모세를 세워 놓고 섭리해 나오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와하셨습니까? 돼먹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나오시기에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인사도 없이 배반해 버렸습니다. 보고도 없이 배반해 버렸어요. 의논도 없이 배반해 버린 선조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인간과 의논할 수도 없고 인간의 보고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하늘은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인간을 놓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입장이요, 인간을 지으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신 수고 앞에 여러분이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여러분의 몸을 제물삼아 불사른다 해도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섭리노정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제물이 되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볼 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심정을 품은 어떠한 존재가 필히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절박하게 느껴야 됩니다. 그러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나님은 인간 앞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나오셨는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머리 숙여 아버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심정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심정을 가진 자가 되어야만 그리워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자기의 아들 딸이 죽어가면 정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지요. 하늘이 그런 과정을 지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그리워서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을 향해 나갈 수 있고, 하늘이 그리워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망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8-114
하나님의 소원은 에덴의 참가정을 찾는 것
그러나 지금은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는 때입니다. 왜? 약속의 날이 오기 전에 심판날이 올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날을 고대하시면서 인류를 붙들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와 같이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해 오셨으나 아직까지 그리워하시는 인간을 붙들고 생활에 보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 딸이고 또 저희에게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항상 같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지만 천만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이래 그리워하는 아들 딸을 모아놓고 살아 보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에 곡절을 품으시고도 아들 딸을 찾아 가지고 그 아들 딸을 중심삼고 천지 만물이 기뻐 움직일 수 있는 그 한 때를 바라보시면서 참고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6천년 섭리역사라는 것입니다. 6천년 섭리역사.

여러분,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버지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슬픔과 통곡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넘어 아버지를 생각만 해도 춤이 나올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직 그렇게 못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그리워해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 있고, 시대적인 조건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소망의 조건을 갖지 못한 여러분은 이제 하늘과 나 사이의 그리움의 조건을 청산지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하늘의 식구로서 입적될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리워하는 데는 여러분 한 사람만 그리워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전세계 인류가 그리워해야 합니다. 전세계 인류가 그리워해야 합니다. 전세계 인류가.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여러분 자신이 귀한 이상 다른 사람도 귀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서로 만나게 된 거예요. 그 인연은 자기를 중심삼은 인연이 아닙니다. 어떤 인연에 의해 만난 우리들은 오늘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인연을 넓히고 넓혀 세계까지 연결시켜서 하나님께서 그리워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기준까지 연결시켜야 됩니다. 그러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살면 안 됩니다. 지금은 세계를 위하여 살 때요, 하나님을 위하여 살 때인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 때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은 잃어버린 에덴의 참가정입니다. 그 참가정에 세워질 수 있는 참부모, 참부모 앞에 세움받을 수 있는 참부부, 참부부가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가 있는 가정이 하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하늘 가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가정이 나타나면, 그때에는 예수도 형제와 같이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곳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는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하늘의 심정을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느냐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하늘은 그러셨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이상,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 하늘을 위하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말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느끼신 감정을 2차적으로 인간이 실체적인 자극을 받아 ‘오! 지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하고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주적인 사랑을 위하여 태어났지 개인적인 사랑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개입시키고, 좋아하는 것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계를 개입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출세를 하려 하는 것도 자기에게 세계를 개입시키기 위함이요, 자기에게 하나님을 개입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의 가정에 세계를 개입시키고 하나님이 좋다 하실 수 있으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같이 살겠다’ 하신다면 최대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면 천주(天宙)가다 내 것이 되는 거지 별것 있어요? 그것이 인간의 최고 욕망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심정적인 세계의 인연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 안 돼요.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 아래 6천년 동안 인류를 바라보시며 ‘언제나 참인간이 될 것인고, 언제에나 하늘의 식구가 될 것인고, 언제나 하늘 민족이 되고 언제나 하늘 세계를 이룰 것인고’ 하시며 그리워해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여 온 인류와 더불어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신 것이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목적이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해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8-116
기 도
길가에 쓰러진 한 거지의 사체(死體)를 보고 그 거지에게도 과거에는 그를 낳아 사랑하던 부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어떠한 인연 가운데서 누구의 사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자녀의 입장에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그를 바라볼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는 곳곳마다, 머무는 곳곳마다, 대하는 곳곳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움직인다 할진대 그러한 심정으로 엉클어진 세계가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곳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중심삼고 안다 하는 입장에 서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늘과의 인연을 중심삼고 안다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아들 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은 심정으로 얽히어서 형제 아닌 형제를 형제 이상으로 사랑하는 곳이요, 부모 아닌 부모를 모셔놓고 부모 이상의 효성을 하는 곳이요, 책임자 아닌 책임자를 모셔놓고 어느 누구보다도 존중하는 곳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그러한 표준 밑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며 그런 이념에 불타 목적지를 향하여 개척의 용자로서, 싸움의 대표자로서 오늘도 내일도 쉬임없이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하늘의 성삼위신과 그 이하 천천만 성도, 천군천사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그들과 더불어 응할 수 있고 화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들을 아버지께서는 심히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들이 마음으로 느낀 것이 있사올진대 그런 표준 밑에서 하늘과 인연맺게 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에 그런 승리의 한 발판을 세우기 위하여 모든 것을 심각하게 분석하여 나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모든 것을 맡아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