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 to 8-62: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1959.11.01 (일), 한국 전본부교회

8-38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마태복음 6:16-34

[기 도]

아버님, 아버지를 흠모하는 저희들이 아버지를 뵈옵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할 수 있기를 고대하여 부족함을 무릅쓰고 모였사오니, 버려두지 마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희의 마음과 더불어 화하시옵고 저희의 몸과 더불어 인연을 맺으시옵소서. 아버님의 간곡한 심정의 흐름이 아버님의 것으로만 머물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실존하시는 그 자체의 생명의 흐름이 저희들 마음속 깊이 스며들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천만 성도를 지휘하시는 아버지의 성상을 바라보면서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리움에 잠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연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있음을 하늘 앞에 감사드릴 수 있고 스스로 머리 숙인 그 마음과 몸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는 싸움의 노정에서 저희를 불러 주시고 염려하시며 찾아 주시는 아버지이시기 전에 고요한 가운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고 아니 생각할래야 아니 생각할 수 없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께서 저희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으며 저희 또한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연이 저희의 생애에서 기필코 맺어져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저희들 어느 한날 은밀한 가운데 아버지와 의논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어느 한날 아버지의 은은하신 음성과 아버지의 영광에 취하여 저희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고 머리를 숙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린 때가 있었습니까? 신앙노정에는 그러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 그러한 시간을 저희에게 부여하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오늘까지 수고하신 것도 알았사오니, 이제 이 몸과 마음이 자연의 아버지를 즐겨 모실 수 있고, 본성의 아버지를 즐겨 모실 수 있고, 본질의 아버지를 즐겨 모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조건을 걸어 놓고 대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마음의 흐름에 따라 같이 흐르고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시는 아버지이시기에, 본연의 느낌, 본연의 감정에 화하고 동하는 것만이 저희가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 동안 가져야 할 소망이요 이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보이지 않는 데에서 모든 것을 경영하시며 실적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애쓰시는 아버지시요, 없는 듯하나 실존하시는 아버지시요, 저희와 관계가 없는 듯하나 저희의 마음을 주관하고 계시는 아버지시요, 무한한 세계를 관할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나이다.

그 관할권내, 그 주관권내의 움직임에 화(和)하고 정(靜)하고 동(動)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을 그리워하오니, 아버지시여, 저희를 버려두지 마시옵소서. 마음의 문이 닫힌 자가 있사옵거든 그 문을 열어 주시옵고, 사망의 그늘에 사로잡혀서 심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사옵거든 그들도 역시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인연을 찾아 인연을 존중하여 여기에 모였사오니, 이 한 시간이 헛된 시간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를 위하여,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발걸음을 움직여 오늘 이 자리에 왔사옵니까? 아버지, 버려두지 마시옵고 실존하시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진정한 마음이 없다고 할진대, 천상의 아버지가 되시고 실존의 아버지가 되시는 당신 앞에 부끄러운 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은사권내에 스며들고, 아버지의 은사에 사로잡힐 수 있는 시간이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에게 절대 필요하오니, 아버님, 긍휼의 역사로 나타나시옵고, 능(能)의 권한으로 저희들을 충족시켜 주시사, 아버님께서 남기신 복귀의 한을 품은 저희의 심정을 해원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권한을 비웃을 수 있고, 그를 대해 자랑할 네 권한이 무엇이냐고 자신있게 주장하고 나설 수 있으며, 모든 사람 앞에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할 수 있고, 하늘을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모습,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늠름한 아들 딸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매 이와 더불어 인간이 존재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고, 사망의 물결이 휩쓸어 들어오고 공포의 물결이 휩쓸어 들어오더라도 하늘 땅은 영원히 남아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공포의 세계를 넘어서서 기쁨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그 이념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선봉자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각각 다를지라도, 사정 사정이 각각 다를지라도, 처해 있는 환경과 내적인 관습, 혹은 심중에 갖고 있는 주관(主觀)과 주의 관념이 각각 다를지라도, 본연의 심정세계에 화하려는 마음만은 같아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거기에 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오니, 이 시간 그럴 수 있게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털어 놓고 무아(無我)의 심정으로 본연의 심정을 찾아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다시 새롭게 빚어낼 수 있는 은사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두운 악의 조건들이 간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저희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고 아버지의 움직임에 화하여 평화의 심정, 사랑의 심정, 고귀한 이념의 심정에 사로잡힐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생명을 일으킬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8-41
말 씀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목적이 있습니다. 땅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그 땅과 하늘을 대표하는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알지 못하나 하늘은 큰 목적을 갖고 있을 것이고, 땅도 역시 큰 목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 하늘과 땅이 처한 위치와 입장은 다를망정 그 목적은 같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늘은 주체요 땅은 대상이며, 하늘은 창조주요 땅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인 연고입니다. 이렇듯 이 땅이 절대자에 의해 생겨난 피조물인 한, 하늘과 땅은 절대자의 목적권내에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8-41
같은 운명에 처한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
하늘과 땅이 그러하거든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나타난 인간은 어떠할 것이냐. 인간이 하늘도 부정할 수 없고 땅도 부정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할진대, 하늘이나 땅도 인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과 땅이 인간과 함께 어떤 크나큰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고 몸은 땅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몸은 땅의 것을 찾으려 하고 마음은 하늘 것을 찾으려 합니다. ‘나’라는 자체는 마음만도 아니요 몸만도 아닙니다. 마음과 몸을 합하여야만 ‘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나’는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비록 미비하고 불비하고 미완성 단계에 있다고 할망정 마음과 몸이 합하여 이루어진 여러분 개체는 어떠한 목적권내(目的圈內)에 머물러야 될 것인가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을 주체로 모시고 나는 그의 상대가 되어,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실존체로서 그 분과 더불어 존속(存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가지고 하늘 땅을 품고 움직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때, 그럴 수 있는 곳을 이루는 것이 인간 최고의 목적일 것입니다. 기필코 그렇게 돼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인간을 내세우는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일해 오셨는가? 하늘 때문이 아닙니다. 땅 때문도 아닙니다. 인간 때문입니다. 오직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즉 여러분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을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연유도 모르는 가운데에서 살고 있지만, 내 한 자체가 사는데는 하늘의 뭇 영인들이 동원되고 땅이 동원되고 하나님까지 동원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 할지라도 이 우주를 대표하여 나가는 생의 노정에 있어서는 하늘의 뭇 영인들이 나를 위하여 움직이고, 땅이 나를 위하여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속된 우리 인간은 머리 숙여 ‘황공하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그런 길을 걸어나온 것이 역사노정에 왔다갔던 종교인들의 걸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비롯하여 피조세계의 모든 것은, 오늘의 내 일신이 어떤 목적을 이루어 승리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총동원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이 천지간에 살아야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8-42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나 자신을 문제로 삼아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고 반성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땅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하늘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지상에서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전히 살았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된 연고이냐. 종교적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선하게 살 수 있는 본연의 이념 동산을 떠나게 되었고, 전체를 위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되 몸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이 처한 형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하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 고차적인 이념의 세계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지만, 그런 자리에서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존귀해야 할 인간은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잘 살고 싶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좀더 잘 살고 싶고, 좀더 크고, 좀더 넓고, 좀더 높고, 좀더 무한한 가치를 느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으되 정작 그렇게 살 수 있는 생활적인 내용, 생애의 이념이라든가 그런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산다고는 하지만, 여러분이 당당하게 자신을 가지고 ‘하늘이여, 땅이여, 하나님이여, 협조하시옵소서’ 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여러분이 못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은 창조본연의 삶의 내용을 모르고, 하늘의 뭇 영인과 땅의 피조만물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는 못 되어 있지만 하늘의 뭇 영인은 이 시가도 여러분을 위하여, 땅도 역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런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채 그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허덕이는 방황의 역사 노정을 걸어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여기에 나온 청년 남녀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고?’ 할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나는 가정을 위하여 살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았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살았다. 나는 주의를 위하여 살았다. 나는 학문을 위하여 살았다’하고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자기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누구를 위하여 있을 것인고? 그 나라 자체만을 위하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대우주의 목적권내에 들어가 있는 국가요 민족이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8-44
내가 가진 목적관(目的觀)은 올바른가
본래 이것들은 본연의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존재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의 관념은 자신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위주한 가정과 국가와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을 종결짓고자 하는 그 관념은 틀려먹었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산다 해도 가정을 위해 사는 것만이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는 것, 좋습니다. 위하여 사는 것, 또한 좋습니다. 그러나 위하고 있는 그 환경 자체가 위함을 받을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를 넘어 더 높은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천륜은 이와 같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러분을 격려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가라고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의 마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있는 지성을 다하여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겠습니까? 내 일신(一身)의 사지백체(四肢百體)는 내 한 몸이 동기가 되어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깊이깊이 캐고 들어가면 역대의 선조로부터 나왔고, 더 들어가면 그 선조들의 기원이 되는 어떤 주인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역사적인 감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이런 소망 역시 역사적인 소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슨 주의를 논위(論謂)하고 있지만, 그 주의는 이 시대에 비로소 나타난 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알지 못하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본연의 심정세계, 즉 오늘의 세계 이상 가는 세계를 그리워 해왔습니다.

이제 역사와 더불어 소망하던 그 심정세계의 이념이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정력을 기울이는데 있어서는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나 중심하고 위하는 것은 참된 목적이 될 수 없어요. 그것을 위하여 나의 전체를 투입하고 생명을 기울여서 희생할 만한 가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헤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심코 옮겨놓는 발걸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가고 있고,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고, 또 내가 위하는 그것은 어디 가서 가치를 나타낼 것인고. 그 움직임에서 내 한 자체가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사명을 종결지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정신을 가다듬지 못할 정도로 내 마음을 기울이고 나의 모든 심혈을 기울여 그것을 위하여 움직인다 할지라도 내 자체가 그 움직임의 주동자는 못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위하여 움직인다고 할 때, 그 마음을 창조하는 참된 주체가 자신인 것 같아 보입니까? 그 주체적인 마음은 나에게 있는 것 같지만 나를 지나가고, 나에게 없는 것 같지만 나에게 통하여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여러분을 매개로 하여 인연될 수 있는 환경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신이 그 주체자가 못 되고, 그 어떤 내용을 종결지을 입장도 못 된다는 것을 생활환경에서 느낄 것입니다.

8-45
몸과 마음과 심정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
인간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 땅으로부터 몸의 요소가 되는 물질을 공급받아 체(體)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몸과 마음을 불변한 심정의 기대 위에 세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요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좋고 편하다 할지라도 그 마음은 심정의 집에 들어가 쉬지를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도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실의 자신을 놓고 볼 때,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 마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 심정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는 필시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장소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생애노정을 가게 되었고, 출발한 자체를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누구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 삶의 참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남아진 생(生)을 살아나감에 있어서도 한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봇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와 같이, 생애노정에서 갈 곳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 채 허덕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도 자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런 처지에 서는 내가 아무리 누구를 위하여 산다 할지라도, 그 위함은 천륜의 목적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 됩니다.

역사는 혁명의 연속입니다. 개인을 존중시하는 때, 가정을 존중시하는 때, 씨족을 존중시하는 때, 민족을 존중시하는 때, 국가를 존중시하는 때, 세계를 존중시하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혁명의 과정을 거쳐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의가 나왔고, 수많은 종족들이 자기 종족을 위주한 주의 또는 자기 씨족을 중심삼고 주장한 이념도 많았지만, 그것들은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2대 사조입니다. 목적은 하나인데 이념이 둘이라는 것은 하나에 가까와 왔다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오늘날을 끝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목적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환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목적의 때가 오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부딪쳐야 됩니다. 부딪쳐서 깨지든지 합하든지 해야 됩니다. 여기서 깨지는 존재들을 모아서 처치하는 곳이 지옥이요, 깨지지 않는 존재들을 모아 놓는 곳이 천국입니다. 목적관에 의해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8-47
역사의 흐름과 목적관(目的觀)의 문제
여러분, 오늘날 역사의 흐름이나 시대의 사조를 보더라도 숨가쁜 시대에 당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살 것이며,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가정을 위하여 사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선진국가를 보십시오. 전부 갈라집니다. 개인주의예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처자가 어디 있습니까? 믿고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 사조에 흔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환경에서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가정을 위하여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세계 사조는 가정에서 안락을 누리고 행복을 노래하며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이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하고 이 세계가 그러합니다.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나오는 역사이기에 세계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각기 그 자체를 위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목적관, 혹은 대목적(大目的)에 자신이 화할 수 있는 하나의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내 아들딸밖에 모르고, 내 것밖에 모르고 살다가 대우주의 목적이 달성 되는 그 날 거기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산 것은 자기의 안락과 자기의 환경과 자기의 가정을 위하여 산 것이지 대 목적을 위해 산 것은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대하여 ‘너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느냐’고 할 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노라’고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했다면 분하고 억울해 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오늘 이 시간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것을 중심삼고 이러 이러하게 산다’고 자랑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대우주의 목적을 향하여 흐르는 양심의 세계를 자기의 생활 속에 잡아넣어 가지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 가지고는 무한한 세계에 못 가요.

즐기며 살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여러분이 때와 시간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잊어버림이 없이 그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식구와 종족과 세계와 하늘 땅을 품을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오늘날 무슨 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지만, 그 주의권내(主義圈內)에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주의가 있느냐. 천륜을 품을 수 있는 주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8-48
여러분의 마음은 얼마만한 포용력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는가
여러분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은 무엇을 품으려 하는가. 세계를 품고, 하늘 땅을 품고, 나중에는 하나님까지 품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마음이 가진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더 나아가서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고, 아버지도 네 안에 있고 너도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념이나 여러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속에 이웃 사람을 얼마나 동참시킬 수 있으며, 이 민족을 얼마나 잡아넣을 수 있으며, 이 세계를 얼마만큼 잡아넣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마음 속에 자기 몸 하나를 잡아넣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은 그 속에 하늘 땅을 품고 하나님까지도 품어 가지고 안식시켜 드리려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 마음을 중심삼고 자기의 몸 하나를 정복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 어떻구 어떻구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참다운 예술가 혹은 참다운 종교인들이 노래를 부른다면 어떤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마음세계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늘 땅을 동참시킨 가운데 인류를 잡아넣고 품을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늘이 벌을 주겠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없습니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살았느냐?’하는 절대자의 물음에 ‘나는 이러이러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오냐 그것이 내가 바라던 최고의 목적이다’하는 칭찬을 받은 사람이 역사 이래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는 사람도 사조에 이끌림을 당하고, 아무리 정성들인 가정이라 해도 사조가 한번 휩쓸어 버리면 깨져 나갑니다. 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랑하는 가정도 혁명의 불길에 부딪치면 깨져 나가요. 내가 원하던 사회도 깨져 나갑니다. 내가 온 정성을 들이고 충성을 한 국가도 깨져 나갑니다. 이 어이된 일입니까?

위하여 사는 생활 속에서도 즐거울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위하는 그것은 목적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향해 나가는 과정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전부로 알고 가다가는 막힙니다. 가다가 대사조(大思潮) 앞에 항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륜은 살아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살아 있습니다. 내 의식을 초월하여 살아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살아 있는 이 천륜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 그런 정신만 들어오면 나를 인도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살아 있는 이 천륜을 얼마나 배반하였습니까? 여러분은 배반자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무엇이 어떻고 어떻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배반하는 입장에 처해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8-49
인생 행로에 있어서 성공자가 되려면
‘나’라는 일신을 두고 볼 때,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심정이 있습니다. 몸은 이 땅을 대신하고 마음은 하늘을 대신한다고 하는데, 심정은 무엇을 대신할 것인가. 천륜을 대신합니다. 그런 고로 이 심정은 이념을 지배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창조주요 절대자라 할지라도 심정적으로 ‘아버지!’하고 부르면 ‘오냐’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렇게 주고 받고 화하고 즐기며 살아야 우리 인생의 최후의 목적이 달성될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그 시대에는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혹은 천주적인 면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느 한 때에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자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는가를 해명하여야 됩니다. 역사적인 위인들은 당시의 가정을 새로운 분야에서 해명하고, 그 사회를 새로운 분야에서 해명하고, 그 시대를 새로운 분야에서 해명한 사람들입니다.

해명하는데 있어서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사업을 하든가 어떠한 공부를 하든가 혹은 무슨 일을 하든가간에 전력을 기울여서 마음이 무한히 솟구치는 자리에서 일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연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그 마음 앞에 몸이 자연히 기울어지고 거기에 심정이 자연히 기울어져서 일을 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역대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인생 행로에서 완전히 성공하였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중도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몸이 기울어질 수 있고 마음이 기울어질 수 있고 심정이 기울어질 수 있는 상대는 어디 있으며, 가정은 어디 있으며, 사회는 어디 있으며, 국가는 어디 있으며, 그런 세계와 하늘 땅과 하나님은 어디 있느뇨? 이런 문제들을 아직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는 인생행로에서 어떻게 찾아 나갈 것인가. 정신이 있고 생각이 있는 청년 남녀라면 밤잠을 못 잘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예요. 심각한 문제. 그런 연고로 나를 들어 자랑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갈 길이 바쁜 것입니다. 넘어야 할 태산준령이 있거늘 그것을 못 넘는 무리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청년남녀가 있다 할진대,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것들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계시다 하였거늘, 인간을 위하여 움직이는 사실이 어찌하여 우리의 환경에서 감촉되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명지어야 하고 인간을 위하여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미래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런 하늘을 발견하고, 그런 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왕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소망하시던 당신의 아들이옵니다’ 할 수 있고, 하늘 땅 앞에 주인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아버지를 붙들고 심정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하늘이 바라는 날이요 인간이 바라는 날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종교에서 재림이니 재현이니 하는 명사를 부르짖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자신의 일생이라는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한 번 지나고 나면 다시 태어나 수습하고 보충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생애노정은 보충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난날의 생을 다시 수습하고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한번 보내면 그만입니다. 한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 생애를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살았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자신을 위한 것은 위함이 아닙니다. 내 자신은 그 권내에서 살고 있는 몸입니다.

8-51
하나님께서 세우려 하시는 인간상
어떠한 존재물도 목적이 없이 움직이면 지옥행입니다. 동기를 잃어버리고는 도저히 목적지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동기와 목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활권내에서 목적도 잃어버리고 동기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목적도 잃어버리고 동기도 잃어버린 채 과정적인 생활에서 뒤넘이치는 인간은 어디에 머무를 것인고.

이러한 인간이니, 아무리 잘나고 잘산다 해도 휩쓸려 버릴 것입니다. 목적과 동기를 가진 어떤 개인 혹은 어떠한 종교인이 나타났다면, 그는 아무리 자기가 잘났다 하는 자라 할지라도 무자비하게 휩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는 개인을 휩쓸 수 있고 종족도 휩쓸 수 있고 민족도 세계도 휩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니 휩쓸어 버려도 천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더듬어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동기와 목적을 붙들고 나왔던들 다른 민족이 침범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축복의 기준을 잃어버렸으니 선민은 무슨 선민이예요. 그렇게 되니 그것을 조건으로 다른 민족들이 삼켜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도 그렇거늘, 인간을 움직여 나오시는 하나님 대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하늘과 사탄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목적관이 뚜렷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고하지 못한 터전에서는 사탄이 공격하면 하나님은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간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나 종교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를 탐지해야 될 것입니다. 또한 목적을 탐지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이나 종교는 사조와 더불어 재창하고 주창하다가 사조와 더불어 망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대와 더불어 주장하고 주의와 더불어 주장하다가는 다 망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시대에 와서는 두 주의가 남아 있는데, 이것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때가 끝날이라 하였습니다. 그 목적의 때가 가까와옴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해명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동기도 목적도 없이 방황하고 허덕이는 데서 입는 피해는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옛날에는 가정적인 피해요 사회적인 피해요 일개 국가적인 피해에 그쳤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적인 피해는 여러분 일신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무엇을 위한다 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주장하고 살았으나 세계적인 현상은 여러분 일신을 겨누어 들어옵니다.

과거에는 미국이나 영국 혹은 서양의 여러 국가들이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들의 생활 감정이 우리의 주위에까지 미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충이 우리의 고충이요, 그들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보고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 내 한 일신을 걸고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환경에서 청년남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동기와 목적을 한 손에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할 것이 소위 세계적인 종교의 사명입니다.

마음의 동기와 목적, 심정의 동기와 목적이 내 일신에서 뒤넘이치고 있지만, 역사의 모든 슬픔을 잊어버리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환희의 모습으로 대우주를 지으신 절대자 앞에 나타나서 ‘얼마나 고충당하시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한 늠름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8-53
제1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뜻
여러분들, 우리 한민족은 불쌍합니다. 우리는 여기도 믿을 수 없고 저기도 믿을 수 없는 불쌍한 민족입니다.

오늘날의 여러분이 과거에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데, 위해 주던 그것이 오히려 나를 배반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으로부터 이미 배반을 당한 우리입니다. 그러나 ‘오냐 그럴 줄 알았다’할 수 있는 배포라도 가져야겠습니다.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을 볼 때 붙들고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이녀석아, 너는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느냐? 하늘 땅을 위하여 움직여야할 몸을 가지고, 창조주의 전체 목적을 위하여 애써야 할 실체를 가지고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느냐?’고. 그런 인간들은 몇 푼에 놀아나는 싸구려 인생들입니다. 뜻이 있는 우리는 그와 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한국 실정을 보면 다 갈라져 버렸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때려 죽이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중상모략하여 죽음의 자리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허무감에 부딪치게 됩니다. 외적인 생활마저도 구비되어 있지 않고, 어디를 가도 한숨짓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허덕이면서도 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무슨 건더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이 임박하여 일생을 돌아볼 때에 무슨 건더기가 있겠느뇨? ‘아, 내가 태어나서 산 것은 이것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거늘, 미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땅에 오지 않았던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젊은 여러분일수록 이러한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제1목적이 아니라 제2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역사가 바라는 제1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만 있으면 될 줄 알지만 아닙니다. 마음은 자신을 선도해 주는 책임은 질 수 있으나 자신을 지도할 수는 없습니다. 내적인 책임은 질 수 있으되 지도적인 책임은 못 져요. 마음이 여러분을 잡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보호적이기 때문에 주도적인 지도는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입니다. 그 이념은 이상주의입니다. 이 주의가 실현된 이상세계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고, 하늘 땅이 기뻐서 춤을 출 수 있고, 본심을 가진 인간이 환희의 춤을 무한히 출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본 때가 있었고, 땅을 바라본 때가 있었고, 인류를 바라본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으면 지금까지 선을 지향해 나오는 천륜 앞에, 모든 공신(功臣)들 앞에 죄인입니다.

8-54
목적관이 확실했던 예수의 삶
예수님은 원인과 동기와 목적관이 확실한 분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랐다는 거예요. 예수는 오직 하나님을 붙들고, 하늘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뒤넘이치다 가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가지는 것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가지는 것은 전부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원인과 동기의 세계를 소유하였고 목적의 세계를 소유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권한을 가지고 움직이던 사람들에 의해 그는 억울하게 죽었으나 그의 세계관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그의 이념은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마는 그것은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정이 어디 있었어요. 예수님은 가정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 사회 역시 최후의 목적지가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단을 향하여 예수님이 나서게 될 때 ‘야, 이 녀석아, 가지 말라’고 하는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아니다. 너희들이 반대해도 나는 가야 되겠다’ 하셨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이 동원하여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내며 가지말라 하여도 ‘아니다. 나는 가야 되겠다’ 하셨던 예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생명을 걸고 가지 말라 하여도 ‘땅에 있는 생명들을 위하여 나는 가겠다’ 하시며 죽으신 목적이 어디 있느뇨? 동기와 목적을 세워야 했기에 예수께서는 과정적인 세계의 모든 것을 박차고 늠름히 넘어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주입니다. 그는 땅 위의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늘의 이념과 함께 했고 밥을 먹어도 이념과 더불어 먹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버지! 하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행복의 이념세계가 이루어질 날이 언제이겠습니까?’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 있을지라도 ‘아버지! 역사적인 이념을 인간 앞에 부여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저희를 아버지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천주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홀로 책임지시고 애쓰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마음으로라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하신 예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동기와 목적을 잃어버린채 허덕이는 인간들이 아니라 동기와 목적을 소유한 사람이 나오기를 하늘은 얼마나 기다리시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모르는 인간에게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셔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하늘은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늘은 어찌하여 사망의 환경에서 사탄의 제물이 되어 나가는 인류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시는고. 하늘의 그 애달픈 심정을 아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치열한 마음의 투쟁을 한 사람이며, 외적으로도 역사이래 최대의 투쟁을 한 사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약자같이 쓰러지셨으나 그 마음의 세계는 역사가 시작된 이후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가까왔고, 자기를 반대하던 세계, 즉, 원수 사탄을 대하여 누구보다도 치열한 투쟁을 하다가 쓰러지셨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라고.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동기와 목적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그 동기와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셨을망정 그의 이념과 목적은 남아진 것입니다. 인간이 천륜 앞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이상 필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슬픔을 당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 나라와 그 의를 높이기 위하여 산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8-56
복음 중의 복음
여러분은 어떠한 환경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십니까? 자기를 위하는 시대는 지나갑니다. 어떤 주권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 주권도 세계 사조 앞에는 압도당할 것입니다. 그 세계 사조 또한 목적의 주체인 하늘이 나타날 때에는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운명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행로가 그런 행로였기 때문에 하늘은 인간들 앞에 제창하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살라’고. 이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소식 중의 가장 귀한 소식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도 천상을 지배하는 주체는 남아질 것을 아시는 하늘, 실존의 그 자체는 영원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을 아시는 하늘은 그 주체적인 내용을 표방하여 믿으라 했고 모시라고 했습니다. 제단에 올라 허덕이고 있는 무리가 양심세계에서 안락을 취하지 못하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역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했으나 양심적인 사람이나 종교인들은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때가 옵니다. 어떠한 정치가나 침략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세계적인 종교를 한꺼번에 몰아 넣고 지배할 수 있는 배포가 없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인도를 보십시오. 영국이 정치적으로 수백년 동안 지배하였지만 그 민족의 종교적 뿌리는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어느 때에 가서 해명될 것인가. 하나의 대목적이 이루어지는 그날입니다. 역사는 그날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종교가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역사를 볼 때 하늘의 정치를 무시하고 하늘의 정책을 무시하면서 개인을 존중한 자들은 깨져 나갔습니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역사노정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숭배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나라가 있다 할진대 그 나라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가, 그 세계는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계사조가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는 한, 우리는 그 목적의 세계와 우리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에 비례하여 천륜 앞에 반역자적인 것도 비례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고이래로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기도 믿지 못하고 저기도 믿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안주하지 못한 채민족의 천대를 받고 밟히면서도 연명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도인들을 버린다면 하늘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한 때 해결되기를 고대하시면서 하늘은 인간 앞에 ‘하늘을 믿으라, 하늘을 섬기라’ 하셨습니다. 하늘을 믿는 마음, 하늘을 섬기는 마음은 어떠한 혁명적인 주의도 점령하지 못합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였지만 기독교는 남아 있습니다. 왜?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점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세계는 지배할 수 있지만 마음세계는 지배할 수 없고, 더구나 마음세계를 넘어선 심정세계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마음세계와 심정세계는 환경을 초월해서 존속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념을 갖고 나온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뜻을 품은 우리들은 역사노정에 어떠한 위인이나 어떠한 사람보다도 혁명적인 사람들입니다. 마음세계와 심정의 세계는 죄악이 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최고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지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도 알고 여러분도 압니다. 통일교회 신도 여러분, 나는 심각합니다. 역사노정에서 밟히고 또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과 심정의 세계를 어느 누구에게도 유린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는 그 한 사람을 붙들고 가겠습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천의 군종에게 빵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나 혹은 십자가를 지실 때는 세 제자마저도 제 갈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제자는 제자대로 갈라진 그것이 한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더불어 비참한 자리를 늠름히 넘어가지 못하고 사탄에게 마음이 지배당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대하던 예수의 한스러운 사정이고 분한 일입니다.

8-58
다시 오실 구세주의 목표와 성도의 책임
여러분! 우리들은 새로운 이념을 갖고 나섰습니다.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행군하는 대열에 섰습니다. 여러분이 그 길을 가는데 있어서는 역사적인 충돌도 있을 것이요, 시대적인 사정에 엉클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길을 거쳐 나가는 과정에서 이탈되거나 심정의 세계를 유린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필시 승리의 한날은 올 것이요, 해방의 한날은 올 것입니다. 마음으로 그리고 심정으로 고대하는 그 해방의 날은 인류가 공(共)히 바라는 소망의 날입니다. 몸이 즐길 수 있고 마음이 즐길 수 있으며 심정이 안식할 수 있는 행복의 동산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우리가 소망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를 주체로 모셔 놓고 환희하며 그 분과 화하여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내 기쁨이 그의 기쁨이요 하늘 땅의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날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어떠한 무엇도 그를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부모가 배반해도, 피살을 에이는 듯한 심정으로 기다리던 민족 전부가 반대해도,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해 준 유대교단이 반대해도, 굶주릴까봐 자신의 피살을 떼어 먹인 제자들까지 배반하는 자리에서도, 그들을 배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늘을 대하시던 예수께서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 휩쓸고 세계를 잃더라도 심정세계만은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 심정의 세계를 점령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몸으로는 하늘을 시봉하는 왕자가 못 되었지만 심정의 세계에서는 하늘을 시봉하는 왕자로서 책임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한이 무엇인가. 하늘을 위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이 한을 풀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의 마음과 심정으로는 즐거워하고 하늘을 대하여 감사했으나, 그를 중심삼은 실체적인 가정, 실체적인 교회, 실체적인 국가, 실체적인 세계가 없었으니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찾는 것이 구세주의 목표라 할진대, 다시 오시는 구세주를 맞이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뇨. 마음과 심정으로는 그런 이념을 찾았으되 몸으로는 그런 생활을 못하였으니, 끝날의 성도들은 몸까지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노정을 거쳐 오면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언론의 자유를 허락해 나왔던 것입니다.

하늘은 심정적인 모든 사실을 마음대로 말할 수 없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서러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죄를 만들어 놓은 인간들을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내모셨습니다. 이 싸움을 수습할 수 있는 하늘의 새로운 이념과 대책을 갖고 오시는 분이 끝날에 오실 재림주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해 있는 여러분들은 심정의 목적이 실체의 목적으로 화하여 심정의 아버지요, 마음의 아버지요, 몸의 아버지이신 그 아버지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하늘이 동원되고 땅이 동원되고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희생하며 나오신 것도 그런 한 분을 찾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이 끝날이라는 것을 아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고 여러분의 심정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여러분의 몸은 어디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과거는 어떠하였으며 오늘은 어떻고 앞으로는 어떠할 것입니까? ‘이것은 이렇다’고 확실하게 해명을 지어서 천상과 지상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는 한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한스러운 타락 이후 역사는 슬픔이 연속되는 지긋지긋한 투쟁역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에서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쓰러지면서도 하늘을 부르고, 몰리면서도 하늘을 부르고,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증거한 선조들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이었느뇨.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해원성사의 날을 고대하면서 죽어간 선조들이 많기에 우리의 몸에는 하늘을 위하여 투쟁한 역사적인 선지선열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피가 여러분의 마음에 물들어 있고 심정에 물들어 있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거기에 보답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까지도 보답해 드릴 수 잇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8-60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살자
그런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40일 금식 후 사탄이 나타나서 떡을 주마 세계를 주마 하여도 싫다 하셨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무엇을 준다 해도 싫다하고 나선 걸음이었기에 사탄이 지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메시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주어도 다 싫다 하신 예수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 한 분을 위하여 있다고 하신 예수님, 사나이다운 기백과 소망에 불타오르는 정열을 지니신 예수님이었기에, 하늘이 ‘안 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신도라고 자처하는 여러분들, 용맹스러운 기백을 갖고 하늘을 위하여 멋지게 싸우겠다는 각오를 했다면 그것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이 좋다 하는 무엇을 준다 해도 ‘아니야’, 어떠한 주권을 준다 해도 ‘아니야’, 죽이더라도 ‘아니야’ 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만 ‘오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에서 끝이 안 나면 열까지, 열에서 끝이 안 나면 천까지 가서라도 사탄의 아성을 뚫어야 할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와 욕망은 들어온 그날부터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욕망이나 요구는 다 매장해 버린 후에 이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고, 수많은 선지들이 원수들의 창에 피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거늘, 여러분은 그 분들의 그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 원한을 푸시옵소서’ 하던 그 분들의 결심이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쳐야 됩니다.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께서 이 땅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진 그 사실이 행복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민이 환희의 음성으로 노래하고 천지가 동원되어 그의 영광을 높여 드려야 할 것이었는데, 그것을 저끄렸고 하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황공하옵니다’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비운을 넘어서 우리가 소망의 한날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하늘과 예수님이 계심을 알고 자신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계심을 믿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살고 하늘을 위하여 죽겠다는 마음에 사무쳐야 하겠습니다. 불타는 그 마음이 민족관념을 깨뜨리고, 사조를 깨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젊습니다마는 한 때를 소망하는 사무친 이 심정은 어떠한 적의 손으로도, 어떠한 곡절로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불쌍한 무리입니다. 그러나 흑암권세하에서 하늘의 슬픈 심정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고, 그 마음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을 황공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소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는데 무엇과 바꿀소냐. 새로운 이념을 돕는 이 일을 무엇과 바꿀 소냐’하며 나선 것이 우리들이 가는 걸음입니다.

이 노정에는 지칠 일도 많을 것입니다. 낙망할 일도 많을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불변의 신념을 가지고 하늘 땅 앞에 맹세해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위해 주는 사람이 약하게 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야 되는 인간이기에 예수께서도 이 길을 가면서 하늘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밤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직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몸의 세계에 혼란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마음의 세계, 심정의 세계는 강철같은 표준을 갖고 하늘의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세계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알고 심정세계의 생활감정을 가진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누구를 위할 줄 모르고 사는 이 세상을 수습할 수 있고, 저끄러진 역사를 수습할 수 있고, 어떠한 소망도 없는 미래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봅시다. 하늘은 땅을 위하여 땅은 하늘을 위하여, 하늘 땅은 사람을 위하여, 하늘 땅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어야 합니다. 사위일체(四位一體)된 심정의 세계에서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그런 곳을 찾아가는 우리의 걸음이 돼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8-62
기 도
아버지여! 청춘시대가 지나가는 것이 서글프다 하오나 아버지를 향하여 타오르는 우주사적인 정열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피살의 인연이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있고, 미래에도 연결되어 나가는 어마어마한 순간에 제물로 나타난 저희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사옵니까? 과거나 현재는 어떠하였으며 미래는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이들이 오늘 말씀을 들어 알았을 줄 아옵니다.

목적을 찾아가야 할 인간이요 목적을 이루어야 할 이때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목적을 성취하여 인간을 사랑하셔야 할 아버지이시지, 저희만을 위하여야 할 아버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나 저희가 슬픔을 당하면 같이 슬퍼하시고, 저희가 통분해하면 같이 통분해하시고, 몇 천년의 역사적인 슬픔에 시대적인 슬픔을 가하여 느끼시며 미래의 슬픔도 감당하셔야 할 입장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아옵니다.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고 얼마나 참으셨사오며 얼마나 지치셨사옵나이까? 자신이 비록 상처를 입고 험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아버님의 수고 앞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 흘려야 할 인간이온데, 타락한 인간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들을 그런 자리까지 어떻게 끌어올려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옵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저희의 마음이 기울어지고 몸도 허덕이며 가고 싶어하는, 심정이 머물고 싶어하는 그 곳을 갈 때가 올 것입니다. 그 곳을 저희의 마음이 갈래야 갈 수 없고 몸이 갈래야 갈 수 없고 심정이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은 아버지를 모르는 연고이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심을 아는 자가 있다 할진대, 몸이 천만번 찢긴들 어이 안 가겠사오며, 마음에 억천만번 슬픔을 당한들 어이 안 가겠사옵니까? 이러한 것을 느낄 줄 아는 참다운 효자 효녀의 정열을 가진 아들 딸들을 아버지께서 고대하신다는 것을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교단, 이 교회를 따르는 이들은 슬픈 자리에 있사옵니다. 외로운 자의 길을 따르는 이들은 외로운 행로, 처참한 행로를 가야 하고, 눈물을 지어야 할 처지와 환경에 있음을 아옵니다. 이때는 기쁘게 살 수 있는 때가 아니고, 희희낙락 춤추며 살 때가 아닌 것을 아오니, 저희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기쁨과 행복이 잘려버릴지라도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부둥켜 안고 몸부림칠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던 예수와 같은 고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가야 할 길은 멀고 끝날은 가까와오니, 바쁜 마음 금할 바 없사옵니다. 무지한 인간들은 알지 못해도 하늘은 가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사망세계를 개척해야 할 사명이 저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을 뼈살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목적을 위하여 사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시옵고, 비참한 사망세계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류를 깨우치시옵고, 방황하는 이들을 위하여 천상에 있는 억천만 영인들이 동원되어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하늘을 품고 땅을 품고 아버지의 심정을 품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하나의 왕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부족하나마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을 받들고 모실 수 있는 한 사람을 내세워서 그러한 형태라도 갖추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일을 위하여 동원된 저희이오니, 하늘을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로써 하늘을 높이 찬양하는 자리에서 쓰러지고, 하늘을 위한 비료가 되고, 재료가 되고, 하늘의 도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생애와 전체 소망을 아버지께 위탁하고 아버지를 따라 나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