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4: 최후의 문제는 ‘아버지와 나’

최후의 문제는 ‘아버지와 나’
1959.10.29 (목), 한국 서울 제3지구

8-34
최후의 문제는 ‘아버지와 나’
우리는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땅이나 만민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대하시는 것처럼 아담 해와도 그 심정 앞에 고마워 할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은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더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중단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늘까지 6천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나오신 것입니다. 비극의 실마리가 자녀들 때문이라기보다 사탄 때문이라고 간주하시어, 억울하고 슬픈 조건은 사탄에게 돌리고 기쁜 조건만을 가지고 자녀를 대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마음이 소망하는 것을 실체적으로 이루어 나오십니다.

우리는 죽고 죽고 또 죽어서라도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뜻을 성사시켜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슬픔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여러분을 이 기준까지 끌어 올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불리움받았고 또 태어났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우리 시조가 천사장과 가까웠고 아버지와 가깝지 못했던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습니다.

복귀를 하는 것도 어떤 민족이나 인류를 위해서라기 보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난경(難境)에서도 감사하면서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은 되지 못해도 국가의 충신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과 분함과 억울함에 부딪치더라도 아버지의 역사를 회상하여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실 것입니다. 섭리의 뜻 앞에는 무한한 고통, 무한한 슬픔, 무한한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에 몸둘 바 몰라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부디 앞으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은 되지 맙시다. 우리는 사탄의 반기(反旗)를 피하거나 그 앞에 지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문제는 ‘아버지와 나’입니다. 아버지의 해원성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안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전도해야만 참다운 아들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해원성사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도 그 무엇도 다 떠나서 ‘어떠한 일도, 전도도 제가 하겠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십자가를 저에게 맡겨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고개를 넘으시기 위해서는 부모에 대한 사랑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만이 소망의 전체요 가치의 전체라는 것을 알고 받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다니’하고 황공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버지께서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슬픔과 상처를 입으셨는데, 내가 수고하고 상처를 입고 슬픔을 당한들 어찌 아버지의 그것에 비할 수 있겠는가’하는 심정을 갖고 있으면 사탄이 끌어낼 수 없습니다.

자식을 잃고 슬퍼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불쌍한 인류를 붙잡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하며 역사적인 슬픔을 당해 오신 하나님을 붙잡고 통곡할 줄 알아야 됩니다. 비록 나 개인은 전체 인구의 27억 분의 1에 해당되지만 하나님의 뜻에 동참한다는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 받을 것이 아니라 부모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어디에선가 수고하고 계십니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 자기의 입장에서 대하지 말고 그에게도 그를 끔찍이 사랑하는 부인 혹은 남편, 부모와 자녀, 또는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입장에서 대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십자가가 있다면 심정적인 십자가 이상의 십자가가 없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딱한 사정을 가진 마을 사람을 볼 때, 또는 민족이 딱한 형편에 직면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염려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하는 심정으로 살아 간다면, 그는 하늘의 친구요 형제요 아들 딸일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심정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제물된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노아보다 모세보다 예수님보다 더 수고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개인, 어느 민족, 또는 선생님보다 더 수고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에 제물의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니 나도 제물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앞에 서는 길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 어느 기관을 대하더라도 ‘이것은 아버지의 것이니 곧 내것이다. 거기서 수고하는 이는 아버지 일을 하는 것이니 곧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일터에서 수고하는 농부를 보면 주머니 돈이라도 털어주며 위로할 줄 알아야 되고, 또 ‘내 아들 딸이 저기서 일하고 있구나’하며 그들에게 복 빌어 줄 수 있어야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될 수 있습니다.

풀 한 포기를 보아도 아버지를 위해서 자랐구나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3이스라엘 사람은 그러한 심정으로 움직이고 어디를 가나 ‘내 땅이요 내 일이다’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지향하는 것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아버지 대신 주인 노릇할 수 있는 여러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땅의 청년 남녀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이니, 다른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소유한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거든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높고 크게 바라보시는 아버지, 또한 선생님도 여러분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십자가와 제물의 입장을 감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전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은 망할 수 없습니다. 맨 밑창의 제물되기를 자처하십시오. 제물은 곡절이 있을 때 기도드립니다. 그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제물의 입장에 서면 좋다 나쁘다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은 죽여도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머리 숙인 제물은 산 권한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걸어오셨고, 선생님이, 그리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걸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의 길과 제물되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는 동안은 전도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제물의 길을 3년 이상 6년까지 가게 되면 누구든지 그 앞에 굴복 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부잣집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모든 일에 대처하십시오. 그러한 심정으로 복귀의 고개를 넘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