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1 to 8-216: 가야 할 우리들

가야 할 우리들
1959.12.20 (일), 한국 전본부교회

8-191
가야 할 우리들
요한복음 17:4-15

[기 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기필코 가야 할 골고다의 심정을 심중에 생각하면서 남겨진 제자들을 염려하시던 예수님이었음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셔서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을 가셔야 했던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30여 평생 어느 누가 그의 마음의 친구가 되었으며, 어느 누가 심정을 나누었으며, 어느 누가 그의 손길을 붙들고 통사정할 수 있었습니까? 한 사람도 없었사옵니다. 과연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악한 권내에 사로잡혀 허덕이고 있는 땅 위의 만민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던 구주의 길이 서글픈 길이었다는 것을 여기 모인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죽기 위해 오셨던 주님이 아니었음을 알았사옵고, 그 분을 모시지 못한 것이 한임을, 아버지,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한분을 세워서 영광의 터전을 넓히시기 위하여 하늘은 4천년을 수고하셨사옵니다. 수많은 선지들이 이 노정에서 피땀을 흘리고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천대의 길을 거쳐오면서도 한날을 소망하였던 것은, 메시아를 모시기 위해서였사옵고, 그와 더불어 사탄 앞에 승리적인 하늘의 권세를 갖추고 만민을 굴복 시켜 아버지의 아들 딸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었사옵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는 이 땅에 오셨다 가셨지만, 인류는 아직까지 그런 한날을 맞아 보지 못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다시 와야 할 사명을 남기고 가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무한히 슬펐음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가진 것이 없고 친구가 없을지라도 그의 심정을 소유하게 허락하여 주시고 그의 친구로서 걸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이 이상 저희가 요구할 것이 없고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을 아버님은 아시고 계실 줄 아옵니다.

아버님 !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이제 자신이 누구의 제자였으며, 누구의 자녀였으며, 어느 나라의 백성인가 하는 것을 자문자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성을 위하여 수고하신 예수의 성상을 바라보면서 그가 남기신 말씀을 통하여, 심정을 통하여, 생명의 움직임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비판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둠의 세력이 가해져 흐르는 역사를 붙안고 안타까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피살이 저희의 마음 몸에 접하여 있는 것을 몰랐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당신의 그 심정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수고의 발자취가 연하여 내려오는 역사적인 심정에 저희들이 접하여 붙들고 통회라도 하고, 붙들고 사정이라도 하고, 역사적인 모든 죄상을 폭로시키어 사죄할 줄 아는 속죄의 대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이 부족한 것을 알았사옵고, 지극히 충성스럽게 아버지 앞에 드려야 할 제물이 되지 못한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부족한 것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아버지 앞에서 완전한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타락한 연고로 부족한 인간인 것을 아시는 아버님, 저희는 부족한 그대로 나왔습니다. 저희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심중 심중, 사정 사정이 다르고 심정 심정이 다르니만큼, 자기의 형편과 자기의 사정에 얽매이고 자기의 관념과 주의에 이끌리어 하늘 앞에 닿을 수 없는 저희들임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전체를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

저희들이 아버지의 심정 앞에 머리 숙여 아버지께로 귀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이제 있는 그대로 나왔사오니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이 권고하시면 어디든지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인간이옵니다. 필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누구를 믿고 갈 길도 아니고 누구의 말을 듣고 움직일 것도 아니옵니다. 내 마음과 내 심정의 흐름에 따라 홀로 본향을 향하여 가야 될 끝날 성도들의 길이요, 역사노정에서 선지들이 간 길임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 오니, 내 심정을 중심삼고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에 어리어 그 심정을 그리워하고 그 마음을 본받게 하여 주시옵고, 그 행동을 나의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싸움의 노정에서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기신 싸움에서 승리의 표적을 세우시려는 섭리의 유업을 인계받아 부디부디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버님, 말씀을 대하고자 하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도 사람의 말은 많이 들었사옵고 사람의 모든 사정은 알고 있사오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타난 말씀과 하나님의 간곡한 사정은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 몸이 다시 한번 재창조의 영광을 받아야 하겠사옵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하루 하루의 표적인 것을 아오니 저희의 마음 몸이 저희의 것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말에 의하여 움직이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말보다는 심정이 저희의 마음에 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이 이 청중의 마음 몸 위에 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 앞에 머리 숙여야 할 인간이고 피조만물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이 좌정 (坐定)하시는 이 시간이라 할진대, 존엄하신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에 저희의 생명이 인연맺게 해 주시옵소서. 천상과 지상의 모든 만상을 총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자랑하고 만민 앞에 증거할 수 있는 승리의 사실을 전개시킬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친히 운행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고, 나타나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탄은 간격을 노리고 있사오니, 받는 자의 마음이나 전하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어떠한 관념, 어떠한 주의, 어떠한 비판적인 조건을 갖고는 하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가 아버지의 심정과 사정에 화하고 엉켜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정이 저희의 사정이 되고 아버지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 되고, 아버지의 동정맥과 더불어 저희의 맥박이 움직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이는 곳곳마다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나 남한 각지에 널려 허덕이는 외로운 식구들, 이 시간 같은 은사의 손길로 주관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8-194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려 하는 제목은 ‘가야 할 우리들’ 입니다. ‘가야 할 우리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8-194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알든 모르든 어느 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시간에도 가고 있는 것이요, 쉬고 있는 시간에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나뿐이 아니고 이 민족, 혹은 이 세계, 더 나아가 하늘과 땅까지도 어떠한 곳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일생을 거친 후에 나는 어떠한 곳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도 역사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원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도 이런 운세에 사로잡혀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야 할 내 자신이라 할진대,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또 이 생명은 어디를 향하여 기울어지고 있으며, 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내 소원 혹은 소망과 이념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차피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죽는 날 이 몸은 흙에 묻힘으로써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묻히는 그날이 마음도, 이 생명도, 이 심정도, 이 이념도, 혹은 소원까지도 같이 묻혀 버리고 말 것인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인가? 여기에 확실한 내용과 확실한 해결점과 확실한 목적관을 세워 놓지 않는 한,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걸음을 붙잡아 놓고, 움직이는 마음과 기울어지는 심정을 막아 놓고 ‘너는 어디로 가느냐?’ 이것을 물어 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싸워 나오는 사람들이 성현 현철이요, 혹은 수많은 도주(道主)들 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왔지만 이날까지 ‘내 몸은 이러한 곳으로 갔으며 내 마음과 내 심정, 내 생명과 내 이념은 이런 곳을 향하여 달렸노라. 그러니 온 천하에 있는 모든 만민, 혹은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은 이곳으로 가라’고 자신있게 명령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봉독한 본문 내용은 예수님이 가시면서 자신은 이러한 곳을 가거니와 남아 있는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와야 할 것을 염려하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을 너희도 와야 되고 또 너희들이 있는 이 세상을 내가 버릴 수 없다는 인연의 심정을 품고 가시는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 빚어졌던 사실들은, 어차피 가야 할 우리의 인생노정에 있어서 큰 문제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낳아준 부모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있습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에 엉클어져 있는 부모나 처자를 중심삼고 볼 때에 심정으로 고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잘 되었으면, 우리 남편이 잘 되었으면, 우리 아내가 잘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고대하는 소원으로 돼 있습니다. 좀더 선하고, 좀더 가치 있고, 좀더 높고, 좀더 크고, 좀더 영광스럽기를 나를 중심삼고 심정으로 엉클어져 있는 무리들은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생이 끝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할진대, 나를 위해주던 그분들의 마음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슬픈 요소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위도 그렇거니와 내 자신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게 될 때, 내 마음도 좀더 높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좀더 선하기를 원하고 있고, 좀더 넓기를 바라고 있고, 좀더 가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실의 사람, 여러분이나 나나 누구를 막론하고 좀더 높은 선과 인연맺기를 바랍니다. 높게는 하늘과, 넓게는 세계와, 그 자체는 만민과 더불어 인연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개인만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도 그러하 였고 미래의 사람도 그러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오늘 어차피 가야 할 인생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 생명은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인고? 높고 넓은 이 천지를 상대로 하여 내 마음과 몸은 움직이고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라 할진대, 역사를 막론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느낌을 안 느끼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8-196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달리고 있는가
그러면 우리 인간이 쓰러짐으로 마지막이요, 이 생명이 끊어짐으로 마지막인 줄 알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여기에서 인간이 최후의 막을 내린다면, 내 마음이 높아지기 원하고 하늘과 땅과 인연맺고자 하는 모든 것, 내 스스로 가진 관념에서가 아니라 생각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의해 천지의 자연적인 현상과 같이 내 마음 속에 스며 드는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바램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내 몸을 감돌고 있거든, 이러한 느낌과 감정과 심정이 있다는 것은 기필코 가야 할 목적의 세계가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대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대목적을 향하여 오늘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학설이나 무슨 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인생은 내 개체로 시작하여 내 개체로 끝나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개체를 세운 것은 전체를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높고, 내 마음이 행복되고, 내 마음이 하늘 땅 앞에 인연맺기를 바라는 건은 개체에서 시작하여 개체에서 종결짓기 위한 것이 아니요, 나로부터 시작하여 높게는 하늘, 넓게는 땅과 같이, 그 자체는 만민과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행복하고 더불어 살기 위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인지 모르고, 전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시작과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지만, 이 대우주 이념은 시작과 끝이 있어서 그것은 공동목적을 위하여 역사를 몰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권내(圈內)에서 일생을 걸어 놓고 허덕이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면 땅과 사람만을 위하여 달리는 나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떠한 권세를 가지고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이 땅을 상하 좌우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의 심중에는 더 높고, 더 큰 이념적인 감정이 스며들지 않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를 보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소련의 후루시초프에 의해 좌우되고 있습니다. 전 인류가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 둘 중한 사람이 없어지고 어떠한 한 주의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가 되어서 그 주의를 가진 책임자가 그 시대를 움직이고 27억의 인류를 움직이고, 이땅 덩어리를 좌우하는 입장에 섰다 할지라도, 그 역시 더 높은 것을 바라는 이념적인 감정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상적인, 혹은 이념적인 마음의 문제가 이 인류와 땅만으로 해결될 것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와 이 땅을 기반으로 하여 여기에 무엇이 들어와야 하느냐? 하늘입니다. 하늘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이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만일에 이 역사를 지배하는 하늘이 있다 할진대, 그 하늘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느뇨?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인류역사를 지나고 지나고 지나가지고, 싸움의 역사를 거쳐 가지고 인류를 하나의 움직임으로 몰아 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은 몰아낸 그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늘과 관계를 맺는다면,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이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고맙고 감사한 심정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런 한 때가 오기 전에는 평화니 뭣이니 없습니다.

하늘이 있고 인간과 하늘 사이에 인연이 있는 한, 인간은 자기 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하늘과 인연을 맺지 않고 자기 멋대로 걸어나온 것 같지만 어떤 힘이 마음을 재촉하여 하나의 목적세계를 향하도록 하여 나오고 있음을 부정한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증되는 사실입니다.

하늘은 여기에 어떤 작전을 세워 나왔느냐. 하늘과 접선할 수 있는, 하늘과 연락지을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을 지상에 전개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역사와 더불어 싸워 나왔고 역사와 더불어 몰려 나왔으나 역사 위에 서지는 못했습니다. 주의 위에도 못 섰습니다. 그러면 종교가 오직 취급해 나온 분야는 무엇인가? 우리의 양심 이상의 분야를 취급해 나왔습니다.

8-198
종교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노정에서 종교가 이 땅과 더불어 싸워 나왔지만 승리의 때는 가져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필코 하늘과 땅에 어떠한 인연이 성립되는 시간이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시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재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하늘과 땅과 인연맺을 수 있는 중간 존재들로서 세계를 대하여 하늘과 땅을 대하여 사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날이 기독교 신도들이 바라는 재림의 날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는 이러한 감정은 대우주의 어떤 목적을 가진 이념을 중심삼고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수 없는 자극적인 충격을 내 양심은 받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다 할진대 인간을 지으시고 역사를 지배해 나오시는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을 찾아 올라가야 되고 하늘은 인간을 찾아 내려와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늘을 찾아가는 것이요, 하늘 또한 우리 인간을 찾아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고 오는 이 길에서 상봉하는 그 순간이 역사적인 종말시기요, 천적인 출발시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창조주의 창조이념이 인간세계에 이루어지는 시간일 것이고, 인간이 찾아 나오던 이상적인 그러한 시간이 시작되는 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이념의 주체요, 신의 주체요, 최고의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내 모든 전체의 주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거하고 싶어하는 곳은 어디인가? 주체되는 하늘과 상대되는 인간이 인연을 맺고 땅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하늘이 알아주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하늘이 알아주고, 혹은 이 땅에서 움직이는 내 생명과 내 심정, 내 이념 전부를 무한한 하늘이 알아 주면서 같이 움직여 주는 한날이 온다 할진대, 인간은 거기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역사적인 위인이나 현철(賢哲)들은 그 시대에 핍박을 받고 몰리다 사라져 버리는 자리에 처하면서도 그 길을 갔습니다.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갔습니다. 가는 데는 혼자 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통하여 스며드는 대우주의 이념과 더불어 갔다는 것입니다 불쌍하게 사라졌던 선한 존재들은 홀로 간 것이 아닙니다. 이 인간 세상에서 보면 홀로 가는 것 같지만, 대우주의 운세와 더불어 이 대우주를 경영하는 천적인 이념과 더불어 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생애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필히 어느 한 때에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8-199
예수님의 생활과 끝날의 종교인의 책임
그러면 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앞으로 천적인 소망의 시대가 올 때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는 어떠한 무리일 것이냐? 그 이념과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몸은 비록 땅에 있을 망정 그 마음과 그 이념은 무한한 목적세계를 향하고 땅 위에서 실적을 남기고 가는 사람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살지만 땅의 역사관을 벗어나 목적하는 이념세계와 인연을 맺는 자리에서 쓰러지는 사람은, 역사가 점점 발전하여 그 목적의 때가 오면 세계적인 존재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외 분들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한분을 붙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렸습니다. 또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렸습니다. 그 사회로부터 광란자(狂亂者)로 몰렸습니다. 여지없이 몰려 버렸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그런 예수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몰리고 쫓기던 예수, 핍박받고 억울한 자리에서 참고 있던 예수, 더 나아가서는 십자가의 사선(死線)까지 나아가던 그 예수는 그 시대에서는 처량한 예수요, 불쌍한 예수요,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할 예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주체이신 하늘과 더불어 갔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를 역사노정에서 유린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 느낌을 가져야 되느냐. 역사적인 무리들의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망세계에서 죽음으로 종결을 짓고 마땅히 쓰러져야 할 무리들의 친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배척을 받고 민족과 국가의 배척을 받았을망정 역사를 경영하는 천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오던 그런 무리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조를 숭배하고 선한 사람을 숭배하고 혹은 충신 열녀를 숭배하는 원인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씨족사회였으나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혹은 국가로, 세계로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와 더불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넓혀 나온다는 겁니다. 민족을 책임지고 싸웠던 선한 사람은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요, 국가를 책임지고 싸운 선한 사람은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것을 지나서 세계를 위하여 싸울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일개 국가에 치우쳐 싸울 때가 아니라 지금 때는 주의와 사상을 중심삼고 싸울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우리의 모든 싸움이 종결될 것이냐? 아니올시다. 이제 하나의 싸움이 남아 있나니 전세계에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과 비종교인의 싸움입니다. 이들이 격렬하게 싸울 때가 기필코 옵니다. 역사노정에서 아무리 국가나 어떠한 무엇이 종교를 탄압하고 압박했을망정 그 종교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직선으로 나왔습니다. 기독교의 가는 길을 막았지만 기독교는 이것을 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냐? 땅이 소망의 전부가 아닙니다. 땅 위의 인간들이 바라고 있는 현실의 무대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멋지게 박차고 내일의 한날을 소망하여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어차피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우리, 이 사조의 흐름을 따라가야 할 우리는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되겠느냐. 내 마음과 내 심정, 내 몸과 내 생명이 이 현실의 무대를 박차고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오를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종교인, 그런 사람은 기필코 새시대에 남아지는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전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종교인들은 어떤 하나의 교단과 단합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이 그리워하는 방향을 찾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에서 종교는 위대한 공헌을 해 나왔습니다. 어떤 민족이 종교를 붙들고 거족적으로 단결하고 그것을 위하여 나간다 할 때 어떤 권세있는 자가 그 민족을 집어 삼킨다 해도 소화를 못 시킵니다. 절대 못 시킵니다.

여러분, 유태인을 보십시오. 세계를 유리고객하였을망정 어떤 주의나 사상도 그들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소망의 한날을 고대하고 있고, 내일의 희망의 한날을 품고 선민권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 같은 나라도 영국이 3백여년 동안 그 민족을 지배했으나 그 민족에 흐르고 있는 종교의 혼은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한 때를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널려 있고 인류의 3분의 2에 가까운 사람이 종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본래부터 하늘 땅에 이렇게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게 되어 있느냐? 하늘이 이렇게 소망도 없고 무용지물 같고 약자 중의 약자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할 때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종교인들은 너나할것없이 절대의 이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이념과 접할 수 있는 한 때를 찾아나가는 운명에 처해 있는 연고로 어떠한 주권, 어떠한 국가이념을 아직까지 세워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주권과 국가이념을 종교인들이 가졌다면 깨집니다. 아직은 그런 것을 하늘이 부여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올 끝날은 어떠한 때냐? 절대의 이념을 동경해 나오면서 역사노정에서 밟혀나오던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기필코 그런 시대가 오고야 맙니다.

그러면 이구동성으로 말세라고 하는 이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땅의 것으로써 세계가 해결될 것인가. 도저히 안 됩니다. 여기에 하늘이 개입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을 개입시키는 사명을 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 종교인들입니다.

8-202
인생의 최고 목적
그러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사선(死線)을 넘어서라도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을 찾아 그 하나님을 모셔 놓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날, 내 마음 세계에서 ‘이 이상의 소원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때를 맞이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들은 어려움을 참고 억울함을 참고 분함을 참으면서 이 세계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넘어갈 자신이 못 되어 있는 한, 세계와 더불어 사라질 것입니다.

이때가 역사적인 종말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이제 이 세계는 어떠한 세력을 가지고, 혹은 국력을 가지고, 혹은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하겠다 해도 마음이 달음질쳐 버린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본받은 상대인 연고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 인류 앞에 계속 움직이는 한, 우리의 마음도 그 목적과 연결짓는 순간까지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분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어디냐?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대한민국도 아닙니다. 이 자유세계도 아닙니다. 이 민족과 이 나라, 혹은 이 자유세계를 발판으로 하여 한 걸음 더 올라서야 합니다. 딛고 올라서는 그 순간 하나님이 소망하고 역사가 지향해 오던 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이 세계와 내 일신이 인연맺게 되는 그 순간에는 우리의 심적 작용도 그곳에 정착할 것입니다.

목적 없이 작용하고 목적 없이 이루어지는 현상이 없습니다. 동기와 결과의 과정에서 반드시 보여지는 것이 작용과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느낌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은 나를 목적체와 인연 맺게 하기 위한 동기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전체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중심삼고 그 목적이 종결되는 그날은 하늘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이요, 인간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종교인들은 가야 합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한 곳, 이 땅을 버리고라도 넘어서야 할 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나는 하나님의 몸과 같은 입장, 둘이 아닌 하나로 접하는 그 순간은 우리 인생의 최고 목적을 성취하는 때입니다.

하늘은 생명의 주체요 이념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이며, 우리의 마음과 몸의 주체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늘과 접촉되는 순간에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며, 내 심정이 내 심정이 아닙니다. 내 이념이 내 이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대신한 몸이 되기 때문에 만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 마음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기 때문에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내 생명은 만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권한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고, 내 이념이자 아버지의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심적인 소원의 모든 목적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물론이고 우리도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 것인가. 내 몸이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소망의 심정을 품고 역사와 더불어 가야 되겠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한때가 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망을 품고 남은 시간을 채우며 넘어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가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때 전부가 반대했고 전부가 몰아냈지만, 아버지와 인연맺은 심정은 몰아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몰아낼 수 없고 그 생명을 몰아낼 수 없고 그 이념을 몰아낼 수 없었기에 역사는 거기에 굴복돼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다시 오는 때는 언제이냐?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그런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기필코 그러한 때가 올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여러분의 몸은 어디론가 달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도 달리고 있고 내 심정도 달리고 있습니다. 즉, 마음으로 소망하는 어떠한 큰 이념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고이고이 모시고 마음이 정착할 수 있는 한 곳이 어디냐고 호소해 봤습니까? 어떠한 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이 몸과 이 마음과 이 생명과 이 심정이 쉴 수 있는 한 곳이 어디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에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할진대 여러분은 인간역사와 더불어 그 주의와 더불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8-204
최후의 문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의 심정을 아는 것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주의나 사상에 지배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느냐? 심정의 지배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심정이 있는 곳에서 안식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나왔다 할지라도 안식할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한 불안과 공포는 더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심정을 움직일 수 있고 ‘영원히 영원히 내가 여기에 머물고 싶소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인류 앞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을 중심삼고 세계는 해결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어떠한 곳으로 오실 것이냐? 기필코 인류가 바라고 있는 심정의 터전 위에 나타나 가지고 인연맺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 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심정이 안식할 수 있는 동산,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본향의 동산입니다.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는 행복하다’고 주장 한다 할지라도 그건 관념적인 행복일 뿐입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행복입니다. 그 무슨 제도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외적으로 좀 낫게 해준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에 굴복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어떠한 제도에 붙들려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문제는 무엇이냐? 심정과 이념이 통할 수 있는 그 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최상의 분과 동등한 자리에서 온 만상을 바라보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의 마음과 심정에서 작용해오던 모든 요구조건이 정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을 통한 안식의 동산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심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안식의 동산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하고 사랑해요? 인식을 넘어서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알기 이전, 인식보다 먼저 있는 것이 심정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가 아니라 심정의 안식을 얻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죄악의 역사는 비로소 스톱합니다. 하나님도 여기에서 비로소 쉬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심정 밑에 이념적인 초석을 놓고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놓여지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요동할 것입니다.

끝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때, 우리 신앙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 딸이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되었다 할진대, 아무리 폭풍우가 불어오고 세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 심정의 보금자리를 농락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세계 인류가 그런 자리에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도 가고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런 이념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이념을 세워서 우리의 심정과 더불어 인연맺으려는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맺어진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이 이 역사노정에 한번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대우주에 정착하여 더불어 살 수 있는 발판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사탄의 제물이 되었고, 심정의 주인공을 맞지 못한 인류는 지금까지 비원리적인 심정 앞에 유린당하여 왔습니다. 이제 한분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과 나의 심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0여년의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말씀과 주의를 우리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러이러한 것을 지켜라 했지만’ 영원히 안착(安着)할 수 있는 심정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66권에 외적인 안식, 환경적인 안식의 터전은 이러이러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지만 심정적인 기반은 이러이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는 귀절이 어디 있느뇨? 성경을 많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려면, 성경에 슬픈 귀절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는 제일 슬픈 것이 무엇이냐를 찾아야 됩니다. 성경 66권을 무불통지 (無不通知)했다 해도 뽐내지 마십시오. 통달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 66권 가운데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귀절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 그런 귀절은 많지 않습니다. 단 한 두 귀절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랑하는 심정을 보여줄 때 수많은 말로 이러구 저러구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심정을 다 나타낼 수 있느냐?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맛을 못 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사람 있어요? 이럴 것이다 하는 정도 밖에는 모르는 거예요. 예수의 사랑을 완전히 맛본 사람이 없고, 성신의 사랑을 완전히 맛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으려 했지만 붙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격자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붙들고자 하는 자는 심정의 맛을 본 자,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 땅을 대신한 아버지의 마음을 통한 자라야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2천년 동안 예수를 믿고 성경을 붙들고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었습니까? 예수의 심정을 붙들었으며, 성신의 심정을 붙들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붙들 수 있고 예수의 모양은 볼 수 있고 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품은 심정은 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싸움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이 세계의 싸움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싸움입니다. 우주적인 어떠한 감정이 나를 격동시키게 될 때 격동을 당하는 이 심정이 영원히 정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 !’하면 ‘오냐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간 인간을 외적으로 수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는 종의 마음을, 신약시대는 아들의 마음을, 앞으로 재림시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거꿀잡이로 찾아들어옵니다. 세계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우고, 만물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우고, 인류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워 심판을 합니다.

왜 심판을 하느냐? 심정이 통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8-207
구약 신약 성약시대의 섭리
거꾸로 올라갑니다. ‘종의 마음을 닮아라, 종과 같은 입장이 되어라’ 하는 것이 구약시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종들을 세워서 역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대표적인 사명을 짊어진 사람과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더라도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보낸 그 대표자가 죽기 전에 백성이 먼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는 거예요. 맞는 데는 몸뚱이가 먼저 맞지 마음이 먼저 맞습니까? 백성을 대표하여 나타나는 책임자는 뼈요, 백성은 살과 같습니다. 살이 먼저 맞아야 할 역사노정에 뼈가 먼저 맞았으니 꺾여졌다는 것입니다.

종의 마음, 종의 심정을 통하는 구약시대를 거쳐서 다리 놓아가지고 신약시대를 맞이하게 했고 그 다음 신약시대에는 아들 딸을 보내가지고 그 아들 딸의 마음을 닮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접붙여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이 누구예요?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 아들 딸을 기반으로 하여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심정을 접붙여야 됩니다. 그래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아들의 마음을 접붙인 예수라 할지라도 사탄이 그에게 항거합니다. 2천년 동안 사탄은 성신을 대하여도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느냐?’ ‘모릅니다’ 예수도 모른다 그랬죠? 끝날에 어떻게 될 것을 천사도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르는 입장에 있으니 시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싸워온 것은 하나님의 참 심정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체를 상속받아야만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속받아야 하느냐? 6천년 동안 숨겨졌던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아야만 근본적으로 사탄이 머리를 숙이는 겁니다. 그러한 때가 기필코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성신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지만 아닙니다. 아들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이요 성신의 마음은 성신의 마음입니다. 아들의 심정은 아들의 심정이기에 아버지 심정과 아들 심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끝날 우리들이 총진격하는 목표, 억만 사탄을 무찌르고 행군하는 이 목표는 예수와 성신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성신은 지금까지 만나 왔습니다. 예수와 성신을 만난 그것을 터로 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는 그때까지 역사는 흘러나갑니다. 그런 한 기준이 지상에 정착해야만 만민은 비로소 영원한 안식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스러운 무리들입니다. 한스러운 인류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의 백성도 되어 봤습니다. 어떠한 가정의 부모도 되어 봤습니다. 자녀도 되어 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되려고는 하였지만 정작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직계의 아들 딸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하늘의 가정이 없는 이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대하여 뼛골에서 흘러나 오는 사랑의 심정을 기울여 가지고 ‘내 아들아, 내 딸아’하며 붙안고 사랑 한번 못해 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해 보았다고 생각해요? 심정의 타격을 받고 심정의 찢김을 받고 나오는 그 하나님이 여러분이 찾아야 할 아버지 입니다.

탄식하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 세상은 무한히 비웃고 무한히 미워해야 할 세상입니다. 왜?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박고 피눈물을 짜내게 했던 이 땅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늘은 이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6천년 동안 수고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야만 되겠습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의 동산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인류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의 동산을 통과하여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기반으로 하는 부자지인연 (父子之因錄)을 맺어 가지고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천적인 가정을 못가져 봤습니다. 그런 천적인 사회를 못가져 봤습니다. 천적인 국가를 못가져 봤습니다. 천적인 왕으로서의 영광을 이 땅 위에서 못가져 봤습니다. 그렇잖아요? 타락 이후 6천년 동안 인간이 살아 나온 지상의 이 나라는 원래의 인간이 살아야 할 나라가 아닙니다. 이는 어차피 한번 뒤넘이쳐서 지나가야 할 나라입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어떠한 주의도 다 지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지나가야 할 것을 붙들고 생명을 걸어 나온 우리의 선조였으며 과거의 우리였던 것이 사실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서 되어졌습니다. 선조들은 세상의 그 나라를 위하여 걸인도 되었고, 그 나라를 위하여 봉사도 하였습니다. 또 그 나라를 위하여 선지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8-209
예수님과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아야 할 우리
역사노정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 즉 세상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미래의 것을 위하여 어떠한 상대적인 조것을 세울래야 세울 수 없는 때에 죽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 중 뒤에 말한 사람들은 도를 위하여, 종교를 위하여 죽어갔지, 어떠한 주권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그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불쌍한 우리 선조들입니다. 죽어갔으되 자기 나라를 갖지 못한 백성으로서 간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의 나라를 지배하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묻힐 수 있는 자기의 나라에서 죽었다면 한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사탄 나라에 잡혀 와서 죽는 예수는 슬펐다는 겁니다. 사탄 나라에서 쓰러지던 사도들도 슬펐다는 겁니다. 사탄 나라에서 싸우다가 쓰러진 우리의 선조들도 슬펐다는 겁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나라가 없고 국적이 없으면서도 죽어갔고 유리고객했던 것은 이 기독교를 세우기 위함이요, 각 종교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싸워 나온 선조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하다면 이 이상 불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왕의 군왕으로 오셨던 예수가 자기 땅을 한 조각도 갖지 못했고, 하나의 군대를 갖지 못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제자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한인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혹은 도를 따르던 역대의 수많은 무리들은 억울한 죄인들로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한을 푸는 그날이 심판날입니다. 공의의 하늘이 있다 할진대, 기필코 세계적인 구원의 한때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때가 안 온다 할진대 하늘은 없는 것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우리들은 일해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에 적을 두고, 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이 나라를 위하여 피 땀을 흘리며 우리는 살고 있으되, 예수가 바라고 성신이 바라고 하늘이 동경하는 나라는 이 천지간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단 백원치 세금이라도 바쳤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봉사를 했으면 한이 없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한스럽습니다. 망할 이 나라를 위하고 망할 이 땅을 위해 나온 인류, 실속도 없는 생활을 붙들고 허덕이고 있는 인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폭로시켜 인류의 가는 길을 막고 ‘너희의 모든 정성을 하늘 것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나서야 하는 것이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를 섬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 딸을 만들기 위해서, 그 아들 딸이 사는 곳을 하나님의 땅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 민족을 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 땅은 영원히 내 땅이니 사탄은 오지 못한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싸워나온 것이었는데 다 유린당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 혹은 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선의 주권이 악의 주권을 제거시키는 한날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새날 새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장비를 갖추어 하늘 땅을 책임지고 6천년의 인류의 원수들을 향하여 싸움의 봉기를 들고 나서는 하늘의 정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어떤 훌륭한 장군도 지배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혹은 심정적으로나 사탄이 운운(云云)할 수 없는 병기로 무장된 천적인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싸움의 용사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싸우는 데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뼈살을 제물로 하여 싸워야 합니다. 실탄으로 하여 싸워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포탄을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 창조주가 만든 이 실탄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가는 곳곳마다 그 실탄은 터지곤 하였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이 굴복당하였고 오늘날 전세계가 예수의 이름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내 아버지의 심정에 끌려 뼈살이 녹아져 들어가 나는 아버지의 소유요, 아버지의 것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가로막혀 있으니 책임지고 싸워 이를 정복할 수 있는 하늘 군대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이런 면에서 어떠한 정치가도 나와야 됩니다.

만일에 지금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싸워 민주주의가 승리한다면 공산주의는 어디로 갈 것이냐? 이들은 반드시 아랍진영으로 들어갑니다. 회회교권으로 들어갑니다. 절대 기독교로 안 넘어옵니다. 왜? 자기들의 주의를 정복한 민주진영이 기독교사상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필코 아랍진영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원수는 사탄이요, 사탄의 원수는 종교요, 종교의 원수는 사탄입니다. 전세계 종교인들은 동원해라, 모든 종교의 원수는 무슨 주의다 하는 것이 나와야만 됩니다. 그렇지 앉으면 싸움이 앞으로 어느 기간까지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인은 어떠한 교파를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가는 데는 천적인 인연을 기반으로 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망해버릴 이 역사를 넘고, 싸워서 깨뜨려야 할 이 사조를 넘어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심정의 동산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하늘 앞에 효자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신학박사가 아닙니다. 성경의 문자를 다 외웠다고 해서 그것으로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심정을 가지고 심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들이 기필코 찾아 나가야 할 것이 무어냐? 심정입니다. ‘야! 이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이로구나!’하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이념이나 주의 혹은 사상이 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영광, 세상의 어떤 권세, 세상의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이 심정 앞에서는 꼼짝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찾아가야 됩니다.

8-212
보여지지 않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이름으로서의 예수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보이던 예수, 말씀하시던 예수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예수를 알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예수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는 2천년 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여졌던 예수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좀 낫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6천년 동안 한번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한번도 그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 보여지지 않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예수를 보낸 것은 예수만 잘 살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곡절을 풀기 위하여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내 뜻과 아버지 뜻은 다릅니다. 예수는 이 땅을 사랑해야 할 심정이요, 우리들은 예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야! 이겨라, 너희들이 합하여 내 앞에 심정을 돌려라’ 하는 심정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종말에 있어서 심정의 인연을 갈래갈래 다 찢어 놓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부부끼리도 믿지 못하게 해 놓았습니다. 전부 다 믿지 못하도록 휘저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붙들고 안식하던 인간들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물질도 아니요 권세도 아니요 어떠한 주의도 아니요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단 하나 심정입니다. 그 하나입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은 가야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배척받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이단자의 괴수로 몰리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예수도 갔습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 수 있는 그곳을 향하여 갔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몰아냈다간 최고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발하였거늘, 하나님이 깃들 수 있는 심정의 동산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그 심정을 붙들고 외치며 그 심정을 통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향하여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 할진대, 그러한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여, 이 심정으로 대할 수 있는 가정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심정으로 대할 수 있는 민족을 주시옵소서, 이런 심정으로 대할 수 있는 국가를 주시옵소서, 이런 백성과 아들 딸이 합하여 아버님을 모실 수 있고 아버님이 천주의 대주재가 되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소원입니다. 우리의 갈 곳은 이곳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길이라 할진대, 백 번 천번을 죽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닙니다. 6천년 동안 하나님은 그런 한날을 고대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선한 사람은 밟히고 찢기고 억울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단 말입니까? 오늘날 이 세상은 사탄이 권세를 잡고 있으니 응당히 천대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싸움을 해 나왔습니다. 역사노정에서 맞는 사람이 승리했습니다. 1차대전도 맞는 쪽이 승리했고, 2차대전도 그랬고 3차대전도 그럴 것입니다. 때린 쪽이 패망합니다. 뜻을 품고 맞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분한 마음이 사무쳤으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 서’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입는 옷 한가지도 하나님의 통치권내에 있는 옷이 아닙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도 하나님의 지배권내에서 자란,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나라, 기쁨의 심정이 통하는 그 땅에서 자란 곡식이 아닙니다. 여기에 한을 품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걷는 이 한 길도 한스럽다, 버려진 나뭇가지 하나를 대해도 한스럽구나’하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에도, 한 조각의 땅에도, 하나의 민족에도, 이 세계에도 하나님의 6천년 한스런 심정이 어려 있다는 것입니다.

8-214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갈 것이냐? 만물도 아버지 것으로서 가지고 가야 되며 만인류도 아버지 것으로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만천 하의 모든것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여 !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 딸을 하나님은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주권도 아버지의 주권으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의 사조가 세계를 어떻게 한다 해도 안 됩니다. 다른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몸은 무한히 높고 넓어 하나님까지도 내 것, 땅도 내 것, 인류도 내 형제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여러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역사상의 어떠한 사람도 세계를 제패하려 했습니다. 이 땅과 이 세계를 내 주의와 내 손아귀에 넣자는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이런 심정의 움직임에 따라 역사적인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운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높고 높은 마음과 높고 높은 그 심정 앞에 ‘아무렇게 살던 내 자신이 황공망극하옵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심정을 아는 날에는 ‘이 심정은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나이다. 내 몸이 억천만 번 제물되더라도 바꿀 수 없나이다. 이 심정은 27억 인류를 전부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나이다’ 하고 감사하고 나서 사는 곳이 지상천국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를 평면적으로 갈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심정을 통하여 가야 됩니다. 땅에는 없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갈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됩니다. 어느 교파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파를 세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합니다. 시대를 통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합니다. 미래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됩니다.

8-215
우리의 갈 길
이미 말했거니와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시대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미래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 심정의 목적이 무엇이냐? 전부다 아버지의 것으로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끝날입니다. 모든 권세를 아버지 앞에 드리는 그날이 끝날입니다. 드리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드리는 데는 먼저 나부터 드려야 됩니다. 이 몸은 어디로 갈 것이냐? 이 마음은 어디로 갈 것이냐? 내 심정과 소원은 어디로 갈 것이냐? 내 몸뚱이도 아버지의 것, 내 마음도 아버지의 것, 내 심정도 아버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먹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 먹고, 눕는 데도 아버지 땅이니 깨끗하게 하고 눕고, 움직이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일평생을 내가 동(東)으로 가면 아버지도 동으로 가고, 서(西)로 가면 아버지도 서로 갈 수 있는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땅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생을 같이 해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어려웁기 전에 먼저 어려움을 당하고 슬프기 전에 먼저 슬픔을 당하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먹을 때 ‘아버지 드시옵소서’, 입을 때 ‘아버지 입으시옵소서’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아버지와 같이 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를 지옥에 못 보냅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데는 생활을 무시하고는 갈 수 없으니 우리는 생활권 내에서부터 내가 울면 아버지도 울고, 내가 억울하면 아버지도 억울하고, 내가 기뻐하면 아버지도 기뻐하고, 내가 외로워하면 아버지도 외로워할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눈물없이 볼 수 없고, 인류를 바라볼 때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의 뜻을 알고 나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 딸들이 나와 가지고, 형제가 되고 형제의 인연을 넘어서서 교회가 되고, 교회의 인연을 넘어서서 주님을 모셔야 됩니다. 형제를 찾고 교회를 이루고 민족을 세우고 국가를 이루어 세계를 정복하여야 할 것이 앞으로 도인들이 갈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목적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내 생명도 내 재산도 지금까지의 어떠한 주의 사상도 어떠한 심정도 문제가 아닙니다. 일편단심으로 끝까지 가야 하겠습니다. 내 몸에 아버지의 심정이 솟구쳐 가지고 온 우주와 바꿀 수 없는 그런 가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승리하였소이다,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내 아들 딸아’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은 가야 할 운명에 놓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8-216
기 도
아직까지 도(道)가 목적하던 세계는 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린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피어린 역사노정을 거쳐 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본연의 세계를 건설하여야 할 순간에 처해 있는 오늘날 저희들, 어디로 가야 할 내 자신인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도 귀하고 예수도 귀하지만 예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참다운 신부가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종착점이 아니라 신랑 신부로 나타나서 아버지의 심정 앞에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나에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저희의 소원의 동산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런 이념과 그런 심정을 가지고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우는 개척의 용사로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은 피와 살을 연한 형제중의 형제요, 지체 중의 지체로서 이 목적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승리의 한날이 올 때까지 참아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고, 싸워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저희들, 그곳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데 본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 목적을 향하여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고, 효자와 효녀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기쁨을 맞을 수 있는 승리자,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 땅 위의 싸움의 노정에서 승리한 자로서 아버지 앞에 자랑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는 그곳까지 달리고 또 달리며 싸우고 또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줄 아옵니다. 하오니 끝까지 이 일을 위해 싸워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심에 감사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