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 to 7-99: 인간은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

인간은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
1959.07.19 (일), 한국 전본부교회

7-73
인간은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
요한복음 10:1-18

[기 도]

허락하신 말씀을 저희들이 봉독하였사옵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사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체를 내세워 우주 앞에 자랑하기에 분망하고 있는 실상을 저희들은 보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과연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가, 자기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가. 심정을 더듬어 묵묵히 헤아려 볼 때 거짓된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들인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무엇을 그리고 있사오며, 무엇을 향하여 높이려 하고 있사옵니까? 이제 내 마음이 내 것 되지 못하고 내 몸이 내 것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이옵고, 자기 자체를 세워 자랑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가 되었사옵니다.

나의 마음과 몸의 가치에 대한 최후의 결정은 내가 지을 수 없고, 나타난 현상의 과정을 거쳐 목적지까지 나 자신을 이끌어갈 수 없는 비참한 자아임을 이 시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생명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저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옵고, 어떤 이념이 있어서 저희 마음을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할진대, 그도 역시 저희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날은 자신들을 세워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모습을 멸시할 수 있는 마음을 찾아야 할 때이옵니다. 자기 자체를 드러내어 높이고자 하던 자만심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릴 줄 알고, 자아를 정복할 줄 아는 하나의 승리자가, 하늘 땅과 세계와 인류와 사회와 내 가정 내 자신이 찾고 있는 모습인 것을 저희들이 이 시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사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고,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사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알게 될 때, 타락의 선조를 가지고 있고 타락역사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개체, 이 개체는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저희의 생애노정은 처참한 노정이요, 생활환경은 복잡하여 저희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돈상태에서 살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땅에 하나의 생명의 길을 개척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은 애썼사옵고, 인류 앞에 하나의 참다운 사람의 모습과 참다운 이념과 천주의 참 모습을 소개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들이 이 땅 위에 왔다 갔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중에서도 만민의 메시아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나 십자가상에서 초개같이 사라지면서도 만민을 위하여 복을 빌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존엄하신 그 형상과 그로부터 흘러나온 그 심정, 사무친 그의 이념을 그리워해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자신을 멸시하여야 할 이 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여 만물 만상을 멸시하고, 자신을 세워 하늘을 멸시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참다운 마음, 참다운 선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한다면 하늘 땅 앞에 빚진 자이고, 인류 역사노정에서 말할 수 없이 험상스런 상처를 입은 죄악의 종족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는 아버지를 찾아 헤맬 수 있는 마음, 본연의 자아를 찾아 헤맬 수 있는 충절, 그것만이 필요하오니, 아버지, 그것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살아나온 생애 노정이 처참한 눈물의 길이었음을 저희들은 부인할 수 없사오며, 지내온 역사의 모든 페이지 페이지도 피어린 혈투전으로 엮어졌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자신을 세워 역사적인 그 무엇을 해명하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한 우주사적인 낙오자의 입장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지도자, 참다운 생명과 참다운 심정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여, 하늘이 인간 앞에 보내신 분이 구주요 메시아라고 저희들은 믿고있습니다.

하오나 저희들이 메시아인 그 분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그에 합당한 지조와 충절과 심정을 지녔는가, 이 시간 스스로 더듬어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최고의 정열과 최고의 충성과 최고의 성심을 다 기울일 것을 고대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사탄과 짝하지 않는 최고의 지성과 붉은 심정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그런 자리에 나가 있지 못하더라도 그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무릎을 꿇고 속죄의 은사를 바랄 수 있는 겸손한 어린 아들 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허락하신 말씀을 무엇으로 대하오리까?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지금까지 많은 말씀도 들었사옵고, 많은 걸음도 걸었사옵고, 갖가지 형편에 처하여 움직여도 보았사오나, 아직까지 아버지 앞에 드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채 빈손 들고 아버지 앞에 나타난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 쫓아내지 마시옵고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 전체를 비워서, 아버님만이 주관할 수 있고, 아버님 은사만으로 채울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 심정들이 하나로 화하여 아버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으며 아버님의 은사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75
말 씀
이 시대는 여러분이 아다시피 문명시대이고, 또 어떠한 사상 관념이나 주의도 그 무엇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될 최종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가? 뚜렷하게 자랑할 그 무엇도 갖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어떠한 것을 세워 만민에게 가라고 권고할 뚜렷한 무엇 한가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그렇기에 과거에도 그러했을 것이고, 지금이 그렇기에 미래에도 그럴까봐 염려해야 되는 여러분들인 것을 인식해 주기 바랍니다.

7-76
참을 찾아나온 인간
인간은 타락이라는 명사를 남긴 이후, 알 수 없는 곡절의 노정을 거쳐 왔습니다. 시대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곡절의 역사과정을 피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이끌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인간들이 해결하려 하고 찾고 있는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념과 심정까지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로구나’ 할 수 있는 그 하나의 기점은 아직까지 찾지 못한 채 살아 나왔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도 그렇게 나왔고, 오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도 참된 그 무엇을 찾고 있는데, 그 참이 무엇인지 해명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기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피눈물의 길도 개의치 않고, 죽음의 고개도 개의치 않고, 추방당하고 몰리는 불쌍한 자리도 개의치 않고 허덕이며 나왔으나, 자신들이 바라보는 목적지, 심중으로 찾던 안식처는 아직까지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 그리고 지상을 섭리하시는 천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인간은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심정이 있다 할진대 과거에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 심정이 사무치게 바라는 것은 참의 주체가 되는 실존체가 해명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라는 명사를 빌어 말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내가 그 하나님을 모시고 내 몸과 내 생활, 내 생명, 혹은 내 심정에 인연되어 있는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 그중에서도 종교인들이 바라는 최고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죽더라도 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 할 때에도 참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 역사에 왔다 갔던 사람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움직였고,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고, 미래의 사람들도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움직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주인공을 대하여 노래할 수 있고, 그 주인공과 더불어 즐거워하면서 살 수 있으며, 그와 더불어 화락하면서 심정에 취해서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 한날이 온다 할진대, 같은 마음, 같은 심정, 같은 생명의 움직임을 갖고 있는 그 자체나 그 실체에 대해서 `나는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입장에 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민족과 주의와 사조를 넘어서서 어느 누가 참에 귀의하여 이 참과 더불어 살며, 이 참과 더불어 행하며, 이 참과 더불어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는 자신을 가졌다 할진대, 그 사람이야말로 인류역사가 바라던 참의 근원적인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참된 실체를 찾아 인류는 헤매 나왔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27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그 참의 실체를 찾아 그와 더불어 산 사람, 그와 더불어 싸운 사람, 그와 더불어 즐긴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있는 것 같지만 그 대답은 막연합니다. 어떠한 철학 논리를 들추어 봐도, 어떠한 종교의 경서를 들추어 봐도 명확한 해답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내 몸을 통하고, 마음을 통하고, 심정을 통하고, 모든 이념을 다 동원해 보아도 나를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참을 찾아서 거기에 화하였다고 자인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다 공론이냐 혹은 망상이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인류가 해명해야 할 최후의 문제인 것입니다. 해명되어야 할 참과 해명해 나아가야 할 내 자체와의 관계는 `그가 나요 내가 그다’ 할 수 있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이 하늘이라 할진대, 그 하늘은 나와 같이, 나는 하늘과 같이 화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가 참이라 할진대 그 예수와 나, 나와 예수는 하나로 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감정적인 모든 것, 인식적인 모든 것까지도 같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참의 감촉이라 할까 촉감이라 할까, 그런 것이 내개체에서부터 창조적인 존재세계, 즉 만물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의 인간에게까지 느껴져, 같이 움직이고 감촉하면 온 우주와 더불어 노래할 수 있는 자체, 그러한 자체가 천국에 살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혹은 하늘이 찾고 있는 참다운 아들 딸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78
타락인간과 예수
타락의 한을 가진 인류, 타락된 혈통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타락한 선조의 후예인 내 자체요 우리요 인류임을 공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이 무엇이냐? 떨어진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바라는 이념의 요소와 대치되는 경지에 머무르는 것이 타락입니다.

싫은 것을 피하고 좋은 것, 슬픈 것을 피하고 기쁜 것, 어려운 것을 피하고 행복스러운 것을 바라는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역사와 더불어 엉클어지고 엉클어지고 엉클어져 오늘의 나까지 얽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한스러운 처지에 있는 나와 여러분에게 참다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제2의 나의 모습이 있다 할진대, 그 모습을 불러세워 나를 냉정히 비판해야 할 한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이 역사와 그 실체에 대하여, 미래의 역사에 대하여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넓게 가져라, 네 마음의 바른 목적인 선을 지향하여라, 본성의 마음에 응할수 있는 몸을 가지는 동시에 그런 행동을 하여라 하고 권고해 왔습니다.

또 예수는 말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늘의 심정을 통해라, 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라, 그리하면 천국의 중심을 대신한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들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부딪치게 될 때에 뚜렷한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없었음을, 천륜과 천정에 동하여 나는 물론 인간의 모든 심정을 주관할 수 있는 용자가 없었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하였습니다. 천국을 가려면 `먼저 나 예수를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갖고 있는 것을 다 버리라’ 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하였습니다. `갖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갖는다’ 하였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내용을 가지고 오셨던 구주는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과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마음된 자리에서 있지 못하고, 몸이 몸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내 심정이 심정된 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런 일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땅에 와서 양심의 기준을 세워 이 몸, 즉 육신(肉身)을 정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 어느누구 한 사람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완전히 정복하였다는 그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한스러움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천정에 사무친 심정을 통해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나설 수 있는 확고한 중심을 갖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천륜의 심정을 가진 하늘이 있다 할진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여 영원히 하늘의 심정 앞에 둘 것이냐? 이것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신부가 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은 인습에 젖은 땅 위의 양심기준도 아니요 시대 변천에 따라 변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땅 위의 인륜 도덕에 화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또 땅 위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랑이라 하는 이 한 분의 용자 앞에 신부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신랑의 심정을 사모하고 체휼한 자는 영원한 양심기준을 세울 수 있고, 영원한 몸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방향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는 인류의 참다운 신랑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7-80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와 인간의 양상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류문화는 발전해 왔고 발전해 나온 그 문화는 20세기의 이 문화세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문제, 우리의 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내적 외적으로 복잡한 환경과 복잡한 조직형태가 나타났으나,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고 심정을 통할 수 있어서, 하나에 전체가 응함과 동시에 전체가 거기에 화할 수 있으며, 하늘 땅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심적 기준이 되지 못하고 하늘 땅이 한데 얼크러질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 심정이 찾고 있는 방향과는 판이한 방향으로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내 한 자체는 이제 외적으로는 끝에 도달하였고 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공허한데, 나를 세울 수 있는 중심은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을 찾아 오늘날의 인류는 허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과 이념이 상통할 수 있는 심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마음을 주관할 수 있는 심정과 외적인 생활을 주관할 수 있는 육(肉)과 실제 생활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 한 인류는 어느 시대에나 허덕이는 입장을 피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하나님이 목표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이러한 문화의 세계가 아니요, 문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문명을 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는 마음의 기준, 심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하늘이 원하는 중심되는 뜻이요, 우리 선조들이 후대 만민 앞에 세우고자 했던 기준의 세계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환경이 복잡할 적마다 환경에 뛰어들어가 수습하려 하지 않고 이런 환경을 피하여 갔습니다. 피하여 가는 데에 부딪치는 모든 것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깊은 수림 속을, 혹은 깊은 산골짝을 더듬어 들어가는 이런 생활을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81
예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섰던 탐험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보이는 세계의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싸우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좋은 것을 보이는 세계에 옮겨놓기 위하여 싸우신 용자인 것을 그 시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자리는 세상의 어느누구도 찾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만민이 생각지 않는 순간에 기도하고 호소하셨습니다. 그가 더듬어 들어가는 노정은 온 인류가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노정인 동시에 하늘과 사탄, 선과 악이 접선되어 부딪치는 접경지대를 찾아 들어가는 노정이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던 그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니요 하나님과 사탄이 접선할 수 있는 접경지대였으며, 그런 자리에서 기도하던 순간은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의 경지를 밟고 넘어서기 위하여 그 경계선을 찾아 들어가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경지를 찾아가는 예수에게는 하나의 심정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천상과 지상의 어떠한 것이 그의 모든 것을 휩쓴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 통하고 있는 이 심정만은 불가침이다’ 하는 기준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섭리적인 조건을 중심삼고 싸우는 과정에서 사탄을 쳐부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예요. 천상을 대한 사무친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상에서 벌어지는 사탄과의 싸움에 있어서도 그의 사무친 심정 앞에는 사탄도 손을 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었기에 만인류가 흠모하는 심정의 주인공, 신랑의 자격을 갖춘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알기를, 예수는 땅 위의 어떤 것을 찾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어차피 한 고개를 넘어서야 할 세상이요, 어느 한 때에 해결지어야 할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지어 버려야 할 시대와 세계, 그 자체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해결지을수 있는 그 세계, 그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해결해 버린 심정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심정이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내용을 아시고 그러한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오셨던 분입니다. 해결지어야 할 이념의 세계에서 인간을 대표하여 혈혈단신 탐험의 용자로서 나타나셨던 분이 예수였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예수께서 성경에 말씀하지 못한 것, 그의 심정 깊이 뿌리박혀 있는, 스스로 만민의 구주라 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을 걸어 넣고 사탄과의 싸움노정에서 해결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사탄세계에서 어떤 하나의 승리의 중심을 세울 수 없었고, 또 하늘이 사탄세계에 승리의 뜻을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 모험가요 탐험가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의 어떠한 사정과 이념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세계를 찾아서 모험의 자리에 뛰어든 분이었습니다.

7-82
예수님이 모험의 표적으로 세워 놓은 최고의 기준
세상에는 남이 탐승(探勝)하지 못한 어떠한 명승지가 있어 그 지역을 탐험하기 위하여 나선 모험가는 많지만,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모험의 표적으로 세워 놓은 최고의 기준은 무엇인가? 심정문제입니다, 심정문제, 심정문제라는 거예요.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적인 움직임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죽음의 고개를 넘은 순교의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참이 있다면 생명을 걸어놓고 사무친 심정으로 그것을 붙들고 나설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이들을 이끌고 심정적인 목적의 세계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었기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갈보리산상에서 초초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겠어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찾아 헤매야 할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일생을 바쳐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모험의 함정이 있다 할지라도 내 몸을 던지면서라도 찾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역사를 연결시켜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원리를 배워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싸움을 해결하고 `하나님!’ 하고 부르는 본연의 아들은 어디 있는가. 심정에 사무쳐 `내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그 세계를 인간은 보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타나서 `나는 독생자’라 말씀하셨고, 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신랑으로 모시라 했고, 너희는 나의 신부라고, 또 나의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7-83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것
천상에서 인간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참의 역사만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 것인가? 성경책이 아닙니다. 이 성경책이야 종국에는 구원섭리가 완결되면 타락한 세상과 더불어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걸 넘어서서 하나님을 대한 붉은 심정이 타올라,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를 알고, 이 시대에 수고하시는 아버지를 알며, 앞으로도 수고하셔야 할 아버지를 알아서, 그 아버지를 부르는 하나의 아들이 이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딸이 이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바라보시고 기뻐하시지는 못할망정,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표적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예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는 참을 찾고 있습니다. 참을 찾고 있는 나, 참을 찾고 있는 우리, 참을 찾고 있는 가정, 참을 찾고 있는 사회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가 찾고 있는 궁극적인 참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의 내용은 무엇이냐?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부모,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부부,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자녀,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형제,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 참다운 하늘 땅, 참다운 온 천주가 하나님이 찾고 있는 참의 내용일 거예요. 그럴 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땅을 대해 섭리하시는데 무엇을 바라시는 것이뇨. 참다운 만물이 되기를, 온 세계 인류가 참다운 백성이 되기를 바라실 거예요. 더 나아가서는 그 백성이 참다운 충신이 되기를 바라시고, 참다운 부부와 참다운 부모가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참된 만물, 참된 백성, 참된 충신, 참된 효자 효녀, 참된 부부, 참된 부모가 나타난 후에야 하나님은 땅에 실체로 나타나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참의 실체가 하나님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참을 바라고 있는 인간과 어느 한 때 인연을 맺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머리 숙여 `옳소이다. 영원히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몸으로도 바라고 마음으로도 바라고 심정으로도 바라는 그 실체를 상봉하는 날이, 선을 찾아 참을 찾아 헤매던 인류역사가 종결되는 날이요, 참을 찾아 헤매고 참을 찾아 세우기 위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인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날을, 그러한 곳을, 그러한 한 때를 찾아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악된 이 땅, 죄악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 죄악된 지상에 살고 있는 가정, 사회, 국가, 이 모두가 역시 그러한 한 날, 한 곳을 찾아나오고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염원과 인류의 소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 할진대,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있는 우주적인 선의 이념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못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하고 한탄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참의 말씀을 갖고 온 참의 실체로서 참의 행동을 해야 할 예수님이었지만, 그 당대에 참의 실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참의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참의 행동을 다 하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것은 성경 상에 나타난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참된 개인은 이러하고 참의 가정은 이러한 것이며, 참의 사회, 참의 국가는 이러한 것이고, 하나님과 상봉하는 세계는 이러한 것이며, 그 복지는 이러한 곳이라고 해명해 주고 우리를 그런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실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심중 깊이 사모하던 참을 해명해 주어야 할 것이 인류를 찾아오신 구세주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의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십자가 고개를 넘어가신 예수를 안 사람이 누구인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모두 낙원에 가 있습니다. 낙원은 천국 가는 대합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까지 참을 찾아 나아가는 노정은 6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해결나지 않았습니다. 6천년을 걸려서도 끝이 나지 않았으니 오늘 내가 느끼고 깨달은 심정을 가지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생활노정에서도 끝이 나지 않겠느냐? 끝날 가능성이 없거든 분한 마음, 아버지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꿈도 안 꾸는데 어찌 하늘의 백성이 되겠습니까? 어찌 하늘의 충신 열녀가 되며 어떻게 하늘의 효자 효녀가 되겠습니까?

7-85
복귀섭리의 방법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복귀섭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복귀섭리는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놀음입니다. 지었던 사람이 깨져 나갔으니 말씀을 통해 재창조하는 놀음입니다.

재창조되어야 할 인간입니다. 몸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렸고,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렸고, 심정과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곧 진리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원칙인 동시에 천륜의 근본입니다. 그러기에 세계는 지금까지 진리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참된 말씀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참된 말씀이 없으니 참된 생명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실체가 없으니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다운 사랑이 실체가 없으니 참다운 우주, 참다운 하늘 땅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때립니다, 때려요. 이놈들 다 못쓰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세상을 정복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개인을 정복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하늘은 하나의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애쓰셨습니다. 민족을 정복하고, 국가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지금도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노아 할아버지는 자기 일신을 정복하고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 싸웠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120년 후에 이 지상을 심판하겠다는 명령을 받은 그날부터 120년 동안을 매일 매일 싸웠습니다. 일년이 아닙니다. 119년 뒤에 심판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큰 뜻을 품고 대하려는 사람에게 하늘은 한번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하늘의 명령을 받으면 그에 대해 충절의 심정을 변치 아니하고, 가정의 핍박, 사회의 핍박, 혹은 개인의 육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정욕, 모든 욕망, 즉 식욕, 수면욕 등의 욕망을 정복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모른다 하십니다.

하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개인을 정복하고, 가정을 정복하고, 사회, 국가, 세계를 정복해 나왔습니다. 정복은 무엇이냐? 때려 치는 것입니다. 이러니 역사가 전쟁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6천년 역사의 종말시기입니다. 이때 하늘은 모든 것을 하늘 앞에 세워 놓고, 하늘 앞에 귀일시켜 놓고, 자기로부터 전체를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갖춘 승리자를 찾고 있습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 일신을 정복하기 위한 모험을 하였고, 어떠한 어려운 길, 어떠한 개척자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27억 인류가 살고 있는 20세기의 이 땅은 옛날 선조들이 살던 환경과는 다릅니다. 그 시대는 개인을 대한 섭리시대요, 가정을 대한 섭리시대요, 민족을 대한 섭리시대요, 국가를 대한 섭리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세계를 넘어 천주를 대하여 섭리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모험이 있다 할진대,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나 이상 모험할 자가 없다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가정을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가정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사회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국가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국가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세계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세계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천주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개인이로되 세계를 끌어들일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인정권을 해명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인 실체를 갖추겠다고 장담하고 나서고, 그런 신념을 갖고 실천하는 것은 모험이예요. 모험. 여러분이 조금 더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보면, 그 세계는 모험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서 한 단계 넓은 단계로 가려면 반드시 모험을 해야 됩니다. 목을 내어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해야 합니다.

7-87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을 중심한 하늘의 섭리
보십시오. 노아는 가정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몸을 쳤습니다. 몸을 정복하기 위하여 치기를 120년 동안 했습니다. 비난과 조소, 별의별 억울한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그럴 때마다 노아는 자신을 향해 `참자, 하늘이 약속하여 나를 이끌고 있는데, 하늘이 세워 주신 심적 기준을 대해 내가 변할소냐’ 하며 자신의 몸을 쳐서 모든 어려움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노아 가정이 세상적인 모든 조건을 쳐 버리고 민족을 흠모하여 나왔던들 하나님의 뜻은 그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노아 가정이 가정적인 모든 곡절을 쳐 버리고 노아의 심적 기준을 붙들고 민족을 바라보고 나갔던들,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 가정은 가정적인 뜻을 세우지 못하고 깨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기 위한 섭리는 계속 진행되어 나왔습니다. 개인이 깨졌다고 개인을 붙들고 있을 수 없는 천륜의 때입니다. 가정이 깨졌다고 해서, 가정이 세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천륜이 움직여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깨져도 천륜은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깨져 나갔어도 가정의 때가 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는 섭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에다 가정까지 섭리하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그 가정이 깨어진다고 해서 섭리의 때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 섭리의 때는 사회를 복귀하기 위해 움직여 나아가고, 나아가 환경을 넓혀 민족적인 범위로 넓혀 나왔습니다.

노아 개인과 그 가정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4백년이 지난 후에 다시 아브라함을 세워 역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세워서 노아가 겪은 그 이상의 환경적인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통해 이방 사람까지 끌어넣는 섭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까지도 잃어버린 하늘은, 4백년 후에 다시 모세를 세워 역사하셨습니다. 민족적인 시대가 다가오매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 몰아 넣고는 연단했습니다. 연단은 때리는 것입니다. 때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합치기 위한 작전입니다. 하나 만들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너희들이 살고 있는 땅은 원수의 땅이요, 너희들이 대하고 있는 바로 궁중은 원수의 궁중이요, 애급 사람은 철천지원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야 할 곳은 전부가 `옳소이다’할 수 있는 한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하늘은 그 한곳에 들어갈 수 있는 한때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민족적인 입장에서 섭리해야 할 때였기에 민족을 대표한 모세를 모험의 선봉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 모험의 선봉자 모세는 미지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탐험가 중에 최고의 탐험가요 정탐가 중에 최고의 정탐가였습니다. 탐험가 중에 최고의 탐험의 용자로 타나났던 모세였습니다.

그렇게 나타난 모세가 바로 궁중의 방해를 박차고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가로막혀도 `막힐테면 막혀라. 하나님이 선조때부터 약속한 땅 가나안을 찾기 위해 품은 이 마음이 변할소냐’ 하는 철석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바로의 땅에서 살고 있으되 가나안 땅에서의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심정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백절불굴 하나의 심정을 갖고 전진의 일로를 개척해 나간 모세였습니다.

그리하여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으나 광야 40년 노정에서 그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같이 모험을 할 줄 알았던들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활에서 느껴지는 인식이나 감정보다 더 강했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고 배가 고프구나, 아이고 우리는 죽는구나’ 하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위인이나 선각자들은 세상을 즐거움이나 세상의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이념을 향하여, 약속된 한곳을 목적지로 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서는 탐험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홍해가 웬 말이며, 광야에서 아말렉족속의 공격이 웬 말입니까? 40년을 유리고객하는 동안에 바로의 속박에서 풀려나온 장정들은 중도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해서 12지파를 대신한 12사람을 정탐하러 보냈더니 그들이 돌아와 보고할 때 10인은 `우리는 그들을 당치 못하겠습니다’하고 말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시대에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더 똑똑한 사람이예요. 미욱한 고집장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 모험기질이 왕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바로의 마술을 물리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우리를 가로막고 넘실대던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해 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광야에서 굶주리고 허덕일 때 메추리와 만나를 내려 먹이고 보호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며, 반기를 든 민족 앞에 당당히 나서서 맞선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의 노정을 찾아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이 전부 다 이런 노정입니다. 이리하여 민족시대를 거친 이스라엘에게는 국가시대가 왔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이미 국가적인 시대이기에 국가를 걸어놓고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국가를 걸어놓고 싸워야 할 그때에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하셨겠는가. 국가의 형태도 갖추어야 되고, 가정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개인의 형태도 갖추어야 했습니다. 국가의 형태도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하늘이 바라는 완전 승리의 발판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이런 곡절을 품고 역사해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허덕이셨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 허덕이셨으나 개인을 잃어 버렸고, 가정을 찾기 위해 허덕여 오셨으나 하나님은 가정도 잃어버렸습니다. 축복한 유대국가도 이스라엘 민족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세계적인 패배자의 왕자인 양 오셨던 예수는 세계적인 복귀의 원한을 맡기 위한 대표자였습니다. 그런고로 그가 나타난 곳은 이스라엘 땅이었고 움직인 지역은 갈릴리 해변가와 예루살렘성 근처 몇몇 도성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언행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길을 허덕이다 가신 예수 이후 2천년 역사를 경과한 오늘날은 지상에서 승리적인 하나의 중심을 세워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뜻의 세계적인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나온 것이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곧 성신의 2천년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끝날입니다, 끝날. 그 끝날은 하늘이 바라시는 개인을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가정을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민족을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국가를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세계를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나아가서는 천주를 완성시켜야 할 끝날입니다. 이러한 대사업을 끌어나오신 하늘의 심정을 오늘날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7-91
끝날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것
하늘이 6천년을 허덕이시며 찾아나와 역사의 종말시대에 인류를 하나의 이념권내로 몰아내어 주관할 수 있는 형식은 갖추어져 있으나, 실질적이요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이 인류가 하늘이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있으니,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이 시대를 향하여 외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늘이 찾으시는 역사적인 개인이 어디 있느뇨? 하늘이 찾으시는 노아가정을 대신한 가정은 어디 있느뇨? 하늘이 품고 사랑한 민족, 애급에서 고역받던 그 민족을 대신한 민족은 어디 있느뇨?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독생자의 품에서 사랑받고자 하던 그 백성은 어디 갔느뇨? 살아생전 손에 손을 붙들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심정으로 노래할 수 있는 그 하나의 기준이 없어지고 사라졌으니, 한스럽다면 이 이상 한스러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찾을 것입니다. 참의 하나님이요, 참의 내용을 지니신 분이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은 무엇을 찾을 것인가. 참의 실체, 참의 가정, 참의 사회, 참의 국가, 참의 세계를 찾으실 것입니다. 참의 주권을 통하여 천상과 지상이 하나의 심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 세계를 찾으실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일을 벌여 놓았으니 하늘은 어차피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세계 전체, 즉 지금까지의 인류의 어떤 민족적인 혈통의 인연이나 국민적 전통이나 주의 주장 혹은 사상 전체를 끊어버리고 하나의 이념, 하나의 심정세계를 이루실 거예요. 이런 견지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그 세계는 참의 세계, 참의 부모가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혈통의 부모는 가졌으나, 하나님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본연의 참부모는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잘났다고 자랑하고 큰소리치더라도 여러분은 타락한 부모의 종족입니다. 거짓의 낙인이 찍힌 종족이예요.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참다운 부모라고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지어진 만상이 노래할 수 있는 본연의 부모는 어디 갔는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초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이 한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부모, 그 부모는 어떠한 분인가?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나님과 `아버지!’ 하고 부르면 `오냐 아들딸아’ 하고 문답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 살 수 있는 그 참부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인류는 참부모를 찾아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우리가 이상하던 땅이 아니요, 우리가 사는 이 환경에는 하늘의 이념과 인연지어질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통일의 심정을 갖춘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간판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요, 또 내용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자체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참을 찾아 헤매는 양심의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참에 호소하는 표어를 이런 관점에서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내용은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참의 부모, 참의 부부, 참의 자녀, 참의 충신, 참의 백성, 참의 만물, 참의 주권, 참의 우주가 참이신 하나님이 동하시면 동하고 정하시면 정 할 수 있는 그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결산지어 맞추는 그날이 타락세계의 끝날입니다.

여러분이 재림날을 기다리는데 재림때에 뭐 천변지이가 생기고 큰 변화가 생겨서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줄 압니까? 그런 망상, 허무맹랑한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나도 과거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러한 사람들과는 싸워야 해요.

그때는 어떠한 때인가? 엉클어진 곡절을 풀고 비운의 역사를 탕감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가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개인을 세워서 종적으로 인연맺어 나오던 것을 횡적으로 인연맺는 때입니다. 그래서 본연의 개체가 되어서 본연의 가정을 이루고, 본연의 사회, 국가,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본연의 세계에서 살수 있는 `나’ 그 `나’를 찾는 것이 인류가 참을 찾아나온 목표라는 것입니다.

7-93
재림때는 어떤 때이며 지금은 어떤 때인가
그러면 그 `나’는 어떠한 `나’냐? 눈을 뜨면 하나님과 상봉하는 것이요, 눈을 뜨면 참부모와 상봉하게 되고, 참자녀, 참백성, 참충신과 상봉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나’ 앞에는 참하늘땅, 즉, 신천신지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프로를 한날을 계기로 하여 일시에 맞춰 종결지으려는 것이 하늘의 경륜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주의와 사상의 외적인 형은 그럴듯하지만 내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참을 찾아오고 또 찾아왔는데, 참다운 개인의 입장에서 싸우던 분들은 지나가고, 참다운 가정,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주의도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 지나가 버렸어요. 그러니 오늘 끝날에 서 있는 우리가 그것들을 다시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다시 맞아야 할 운명에 있는 지금은 어떠한 때인가? 눈을 뜨고 보면 개인과 가정이 통하고, 가정과 사회가 통하고, 사회와 국가가 통하고, 국가와 세계가 통하고, 하늘과 땅이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름 뿐인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경지, 그곳이 선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적지라 할진대, 여러분들 그곳에 이르렀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현실을 바라보면 심각합니다. 6천년 종말시대는 당도하였으나 나의 처지는 6천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섭리를 대하고 있는 모양은 갖추었으나 내용에 들어가서는 6천년을 돌고도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시일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의 가슴은 점점 답답해질 것입니다. `허전해서 못 살겠다, 허전해서 못 살겠어’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돈이 많고 갖춘 것이 많아도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개체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마음은 6천년 전으로 뛰어가려 하고 몸은 6천년이 지난 지금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성경에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환경이 새로와지는 오늘날, 우리는 심정에 사무쳐 들어오는 이 싸움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의 주장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비약하는 새로운 세계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때는 어떠한 때인가? 개인을 혁명하고, 가정을 혁명하고, 사회를 혁명하고, 국가를 혁명하고, 세계를 혁명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어떠한 모진 화살이 날아와도, 죽음의 십자가가 덮쳐 와도 늠름히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는 부자관계(父子之關係)로 얽혀진 사무친 심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해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 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도 사탄도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심정이 없었다면 메시아로서의 자격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부가 되려면 그러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모험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바쁜 때입니다. 모험을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끝날에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7-94
끝날의 성도들이 지녀야 할 신앙자세
이제 여러분이 가정적인 차원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거기에만 만족해 보십시오. 그 가정과 국가와 그 제도는 전부 다 깨져 나갑니다. 그렇지 않아요. 왜정(倭政)때 다 겪어봤지요.

오늘날 복귀섭리시대에 살고 있는 전세계 인류는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탐험가가 되어야 해요.

마음으로 기도하고 모든 면에서 계율을 세워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기도는 어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도하는 사람들, 같은 기도를 몇 십년 했댔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심정을 갖고 약속할 수 있는 자리에서 기도 드려야 합니다. 한번 기도하고 삼사 십년 기다릴 수있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삼사십년 지나서도 잊어버리지 않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기다려 보십시오. 이루어집니다. 많은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는 남이 못하는 것을 하기 위해 찾아 해야 됩니다.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것을 찾는 데는 과학 서적과 같이 모든 내용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전문가가 없습니다. 여기에 관해 성경에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남이 개척하지 못한 세계를 개척하였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모험적인 경지에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갈 수 있는 노정의 내용은 없습니다. 노정기(路程記)는 없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진리를 지향해야 합니다. 생명이 움직이고, 생명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이 사무쳐 뜻을 붙안고 우는 자가 있다 할진대 지금까지 믿던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믿던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즐기던 생명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느끼던 심정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바라던 이념을 부정할 수 있는 더 큰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무엇이 있기는 있는데, 틀림없이 있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찾으려면 평상시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자랑하는 신사양반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리를 버리고 맨 끝, 낮은 자리에 가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이 찾아온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천상의 모든 주권과 지상의 모든 주권을 찾기 위해 생명과 부활의 권한을 갖고 땅에 나타나셨으나, 악의 세상에서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길부터 걸으셨던 것입니다. 반대의 길부터. 예수님은 죽어가는 생명을 볼 때에 그 죽은 실체를 놓고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을 보고 염려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바라볼 때에 그 민족의 처참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반대예요, 반대.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천국을 가겠다고? 천국 가겠으면 가봐요.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말에 따라 다니는 사람은 천당 못갑니다. 공짜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몸이 성전이라고 했어요. 성전 됐어요? 예수님은 개체 성전, 환경 성전, 만물 성전까지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 몸에 하늘이 임재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온 만물에까지 하늘이 임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했습니까? 하늘의 보좌에 앉으실 분이 죄인의 친구가 됐습니다. 죄인의 친구였어요, 죄인의 친구.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먹기를 즐기고 마시기를 즐기고 무엇을 탐하고 뭐 어떻고 하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랬겠어요.

오늘날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이 따르는 일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끌어들여 `아버지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늠름히 넘고 죽음의 고통을 늠름히 넘어서 불쌍한 만민을 위하여 복빌 수 있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문제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심정적인 개척자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심정에 사무쳐서 앞질러 나아가는 사람, 사망권의 공포를 제압하고 남을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 교회가 갈라지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목사는 목사의 위신을, 신자들은 자기들의 위신을 세워 권한을 행사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도리는 봉사의 도리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어려운 모험의 길이란 바로 그 길입니다. 어떤 태산을 정복하는 자는 세상의 모험가일지 몰라도 심령세계의 모험가는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 고통이 사무치게 될 때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모험가가 하늘이 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7-97
예수님의 대신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늘의 왕자로서 땅 위에 죄인된 몸으로 나타나는 것 이상의 모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주가 만류하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은 다 가기를 꺼리는 길이었지만 그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참다운 진리가 있다 할진대,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심정을 중심삼고 있어야 할 이 한 몸이, 지금까지 역사적인 것에 고착되어 있었다면 이것을 끊고 마음과 더불어 그 진리에 끌려 들어갈 수 있는 말씀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한계성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에서 느껴 들어오는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땅 위의 어떠한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공포까지도 제압하고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의 길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나 욕망의 일체를 거부하고 당당히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길에서 승리한 자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했듯이 가정에 대해서 그러하고 민족, 혹은 국가, 세계를 대해서 그러하다 할진대, 이는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승리한 자입니다.

하늘이 예수를 세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길은 개척하는 길이었습니다. 개척하는 데는 어려운 길부터 하는 것입니다. 좋고 기쁜 데서부터 아니고 어려운 데서부터입니다. 거꾸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참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을 대하여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거쳐 오시면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형을 찾아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 끝날, 말단의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죄인들을 붙들고 싸울 수 있는 용사가 돼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기 위신과 체면을 다 버리고 하늘 앞에 늠름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동시에 잃어버린 개인을 찾아 주는 예수님의 대신자일 것입니다. 또 그런 심정을 품고 가정을 붙들고 싸우는 자라야 예수님의 대신자일 것이요, 나아가 사회, 민족, 국가, 세계를 위해 싸우는 자라야 예수님의 대신자일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나와 같은 자리에 옮겨 주기 위한 것이다’ 하며 높은 자리를 양보하고 내려서서 그들을 우러러 모실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모험적인 기질이 있어야만 대천지변혁이 찾아오는 이 때에 어느 한 조건이라도 붙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면 눈은 높아가지고 하늘 땅을 다 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기’는 찾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소망의 가정이면 가정,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의 내용과 목적에 부합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면 알아줄 수 있지만, 목적과 이념만 컸지 실제 내용이 없다면 알아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대해 아브라함이 `옳소이다’, 노아가 `옳소이다’, 모세가 `옳소이다’, 예수가 `옳소이다’ 하나님께서 `옳다’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가치를 찾는 생활방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자기를 죽여야 됩니다. 먼저 자기를 때려 잡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때려잡는 백정꾼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이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워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참아들딸을 찾기 위해 나선 걸음이기에 그 아들딸을 만나기 전에는 위신도 세우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오랫동안 수고하셨으나 찾아야 할 신부를 찾기 전에는 죄인을 대해서도 머리 숙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오른편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더불어 낙원에 간다’고 하신 것은 그것의 한 예입니다.

이제 우리는 최후의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참을 찾아나선 모든 탐험가들 앞에 승리자의 인을 받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슬픔과 고충도 달게 받고, 시대적인 슬픔과 고충도 달게 받고, 하나님, 참부모, 참부부, 참자녀, 참형제, 참백성, 참나라, 참하늘땅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무친 심정이 무너지지 않아야만 그 나라의 백성으로 남아질 수 있고, 그 나라의 충신, 열녀, 혹은 효자 효녀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99
모험 중의 모험
그러면 모험 중의 모험은 어떤 것인가?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하늘을 대신하여 불쌍한 사람을 위해 울어주는 것입니다. 태평함을 바라던 마음이 복잡하고 어려운 사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다 하겠다는 각오와, 전체가 반대하더라도 하늘이 지향하는 기준을 향해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서겠다는 사무친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상만사는 모험을 통하여 개척해 왔지만 하나님의 심정세계에서 모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 했으면 그렇게 살아 보십시오. 예수가 이렇게 하라 했으면 한번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 말이 거짓말인가 사실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뚫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정문제를 걸어놓은 모험보다 더 큰 모험이 없습니다. 이 모험을 통하여 하늘과 인연맺는 것, 이 이상 새롭고 기쁜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심정세계에 있어서의 탐험가들이 되기 바랍니다.

7-99
기 도
예수는 삼십년 동안 늘 갈릴리 해변가를 거닐면서 불쌍한 어부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얼마나 동정하였사옵니까. 불쌍한 촌락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동정하였사옵니까. 혹은 유대교회와 즐비한 교단들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염려하였사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쫓겨난 이후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다 나중에는 바닷가까지 가서 심정적인 하나의 참제자를 찾기 위하여 헤매던 불쌍한 예수였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험 중에 큰 모험이 무슨 모험인가 했더니, 자기 앞에 놓인 목적물, 대상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정복하는 것, 나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 나를 굴복시키는 것이요, 그 이상 큰 모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정세계를 찾아들어가 하나를 굴복시키는 날에는 온 천주가 찾아온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배척받는 길도 감사히 가셨고, 못박히는 자리도 개의치 않으셨사옵니다. 조롱해도 감사하며 민족을 위로하셨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몸은 아프고 그 마음은 통분하지만, 섭리하여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민족에게 미쳐 있는 것을 바라보시고 아버지를 높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심정에 사무치셨으니, 4천년 인연의 심정을 무시하고 그 터전을 밟을까봐 염려하는 마음으로 복을 빌던 예수의 심중을 가히 알만하옵니다.

인간들은 외계의 모든 것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모험의 노정과 정탐의 노정도 개의치 않고 탐험 행로에서 허덕이고는 있사오나, 내적인 심정을 걸어 놓고 나 하나를 정복하기 위한 탐험은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 탐험의 고개 고개는 땅 위의 어떠한 험악한 산악보다도, 저 대양보다도, 맹수들이 사는 곳보다도 더 험하고 더 크고 더 무서운 경지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남아 있을 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로부터 승리한 역사적인 주인이 됨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갖게 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잃어버려야 할 이 세계, 잃어버려야 할 나, 잃어버려야 할 원한의 역사 노정이오니, 내 몸을 붙들고 싸울 수 있고 내 마음을 붙들고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의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에게 어엿이 복을 빌어줄 수 있는 승리자의 모습이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적인 소망이요, 시대적인 소망이요, 미래적인 요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도 아니며 바로 자신인 것을 알고 또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이 땅, 온 존재세계 전체의 참 중심인 것을 헤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참을 찾는 일도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이 땅에서 30여년의 생애를 살다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다시 살아 부활의 기쁨을 느꼈사오니, 저희도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기쁨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은 후에 부활한 기쁨을 체득하지 않는다 할진대, 찾아오는 복락의 동산은 나와 인연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땅과 더불어 사는 자신을 매장하여 버리고 다시 하늘과 더불어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는 혁명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야 되겠사옵니다. 모험이 필요하옵고 탐정적인 기질이 필요하옵니다. 아버님! 자기를 생각하는 자는 이 대열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요, 지금까지의 환경적인 조건을 붙들고 매달리는 자는 그 환경을 개척하지 못할 것이요, 지금까지의 주의와 사상에 얽매인 자는 이 세계의 이념에 가담하여 하늘이 기뻐하는 세계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못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개체로부터 가정을 거쳐 천주에 이르기까지 이념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 어떠한 분야에 보내도 감사하고, 어떠한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감사하며, 어떤 모험도 각오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모험의 왕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체를 책임질 수 있고 하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사랑하는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