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 to 7-70: 아버지와 나

아버지와 나
1959.07.12 (일), 한국 전본부교회

7-44
아버지와 나
요한복음 14:1-19

[기 도]

아버님! 30여년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의 선민됨을 자랑하는 유대백성을 대해야 했던 예수의 마음에는 그 민족에게 평화와 자유를 실현시켜 주려 했던 심정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을 저희들이 어렴풋이나마 회상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4천년 동안 한 아들을 보내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의 고역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이루어 나왔옵고, 흘리신 피땀의 흔적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스며 있사옵니다. 그렇게 고역을 당하시고 피땀을 흘리셨건만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것이 무한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날 저희들은 과거 역사상에 왔다 갔던 예수님은 알고 믿고 있사오나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리고 쫓기시던 처참한 예수, 이 마을에서 쫓기면 저 마을로, 이 고을에서 쫓기면 저 고을로 방황하던 그 예수와 그의 심정을 알고 믿는 자는 없사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아는 자는 역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사옵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맞이할 소망을 품고 수천년 동안 참으시면서 싸워 나왔고, 메시아가 어느 때에 오실 것인가 하며 고대해 나왔었으나 정작 그 소망의 표적이 나타났을 때에는 자기들의 사정과 자기들이 처한 환경에 치우친 나머지 하늘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을 저희들은 상기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러한 한탄스러웠던 역사가 있었던 것을 상기하여 오늘 저희들에게 아버님의 마음속에 사무쳐 있는 원한을 풀어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할진대, 오신 예수님을 몰라봤던 이스라엘의 죄상을 저희들이 대신 감당하여 풀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를 슬프게 하였던 이스라엘의 실수를 책임지고 대신 회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슬픈 30여년의 생애를 보냈사옵니다. 더우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3년 공생애가 있었으나 누가 그의 심정을 알았사오며, 누가 그의 사정을 알았사옵니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외로울 때 같이 외로워하며 스승이라고 모시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갈 것을 염려하여 간곡한 심정으로 하늘을 붙들고 호소해야 할 제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고 반문하는 처지에 있었으니, 3년 공사(功事)가 허사였음을 느끼신 예수님의 심정, 슬픔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으며, 복통할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복통할 일이 어디 있었겠사옵니까.

권능을 행하신 예수님을 숭상하고 모실 줄 아는 크리스챤은 없사옵니다. 아버님, 불쌍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붙들고 나설 수 있는 아들딸들이 이만민 가운데 많이 나오기를 저희들은 피눈물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살아 계시어 역사의 배후를 조정하시는 아버지, 저희에게 은은히 갈바를 가르쳐 주심을 아옵니다. 아버지시여, 과거의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시대적인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허덕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아버지 앞으로 가야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동정하고 그 심정 앞에 머리 숙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소원하시던 그 무엇이 있사올진대, 그것이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2천년 전 인류의 생명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에 사무칠 수 있고, 그의 심정과 관계맺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세계에서 외로운 심정을 품고 허덕이다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이제 앉은 그 자리에서 뉘우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위에 아버지께서 생명의 채찍을 가해 주시어서 과거의 모든 그릇된 것을 부정하고 하늘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옵니까? 인간을 찾아 놓고 기뻐하시기를 얼마나 바라셨사옵니까? 이 한 시간 마음 문을 열고 몸의 모든 감촉을 새롭게 하여, 아버지의 세계의 모든 사실을 체휼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동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의 뜻에 잠기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말씀으로 다시 빚어지고 재창조함을 받을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한 시간이 헛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하고자 하오니 말씀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간격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슬픈 심정을 느낄 때 같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황공한 심정을 느낄 때에도 같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모인 사람은 여럿이오나 이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제단, 하나의 산 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인류를 대신하여 모이는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처지에서 간곡히 호소하는 당신의 숨은 아들 딸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의 깊은 심정의 의논자가 되시옵고, 은사의 인연을 그들과 더불어 맺으시어 그들을 생명의 해결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시간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사탄이 틈타는 시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7-46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아버지와 나’입니다. 이것을 더 크게 말하면 `아버지와 우리’ `하나님과 인간’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나’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슬픈 일이 있다면 자식이 사랑하는 부모를 잃어버린 이상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이상 더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7-47
타락인간의 문제점
기독교에서 인간은 타락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사회를 보거나 추궁하여 해명해 볼 때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떤 죄악된 근원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과 같은 결과의 사회를 이루어 놓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곡절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오늘의 결과적인 사회가 되었고, 그 결과적인 역사노정 위에 내가 서 있으며, 그 결과적인 내 자체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민 중에 제일 큰 고민은 무엇이겠는가.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부모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는 고민,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서 하는 고민, 이 이상 더 큰 고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응당 가져야 할 부모를 갖지 못한 자리에서 하게 되는 고민, 응당 자녀를 가져야 할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을 갖지 못하는 고민, 그 이상 큰 고민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락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과 하늘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어떠한 이념과 일치되지 못한 내가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들어가게 될 때, 타락은 상대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선하지 못한 것을 느끼면 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요, 또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더 높아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하나에서부터 전체까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사정에 의해 엉클어진 사건은 많을 수 있으되 심정에 엉클어져 있는 문제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부모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부모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자녀를 잃어버림으로 끊겨진 인연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인연을 다시 맺고, 잃어버렸던 기쁨을 다시 찾고,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면 죄악된 역사임을 인정하는 우리, 죄악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우리, 자기의 마음과 몸의 싸움으로 고민하고 있는 우리, 이 모든 것을 무엇으로 해결될 것인가? 그것은 훌륭한 체계를 갖춘 어떤 철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어떠한 이념이나 혹은 관념적인 신앙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 심정을 걸어놓고 해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심정의 세계는 전과 후가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시작이자 끝이요 끝이자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심정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슬픔이 무엇입니까? 타락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참된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요, 천지만물을 지으신 그 이념과 더불어, 그 지으신 심정과 더불어, 그 지으신 생명력과 더불어 화하여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행복을 생활권에 끌어들여 생활할 수 있는 그 인연을 잃어버리 것이 슬픔입니다.

7-48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몸 마음의 주인임은 물론이요, 우리의 이념이나 우리의 감정세계의 주체격, 주인격에 설 수 있는 분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심정의 주인이요 주체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이나 인정에 의해서 관념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비단 주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어떤 격위(格位)에 계시는가 하면, 인간의 아버지로 계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놓고 주인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계십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내 아들 딸이라 하는 인연을 해명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행복을 노래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활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딸의 모습으로 서야 할 인간이 타락하여 불쌍한 신세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아들딸이라 부르고자 하시는 그 아버지는 어떠한 처지이며, 아들로 서야 할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느냐.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환경과 처지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불러도 `오냐 아들아’ 할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도 `예 아버지’ 하고 대답할 수 없는 곡절의 권내에 떨어져 있는 이것이 타락입니다. 이 한스러운 명사를 걷어치우기 위해 내려온 것이 역사노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한스러운 명사를 밟아치우고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싸워 나오는 것이 그분의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쉽지만 실체적인 아버지로서 체휼하기는 어려우며, 인식적으로는 그 아버지를 감촉할 수 있으되 실체적으로 나를 대하고 계신 아버지를 모시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어인 연고이뇨. 타락한 연고입니다. 타락하였기에 이러한 입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요, 이러한 자리에서 그래도 죽지 않고 살겠다고 싸우고 있는 나인 것을 시인하게 될 때 나와 그 아버지와의 간격이 어찌나 먼지 모르겠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리를 메꾸어 줄 수 있는 어떠한 지도자가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리를 메꾸어 평탄한 길을 닦아 줄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 지도자는 내 몸의 지도자만이 아니요, 내 마음의 지도자만이 아니요, 내심정의 지도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시기에 따라 변하는 지도자가 아니요 혁명적인 내용만을 내포한 지도자가 아닌 영원 절대적인 지도자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지도자를 생각도 해 보지 못하였다 할진대, 오늘 이시간, 자기를 반성하고 관념에만 사로잡힌 자아를 비판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머물러 있는 위치를 알아서 다시 자아의 가치를 평해야 되겠고, 천지의 대운세 앞에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섰는가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고마운 일이 있다 할진대 잃어버린 아버지를 소개해 주는 것 이상 고마운 일이 없을 것이요, 하늘에게 기쁜 일이 있다 할진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것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다시 맺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왔다면 이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수고를 풀어드릴 수 있는 한 분일 것입니다.

7-50
타락한 인간이 고대해야 할 것
인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살 길을 찾아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하늘이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온다 할진대, 하늘이 바라고 인류가 바라는 부자(父子)의 인연을 회복해 줄 수 있는 주인공이 기필코 나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헤아려 볼 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타락세계에서 허덕이는 우리는 죄악된 자체를 비판하고 이를 분히 여기야 하며, 타락 당시의 일을 분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대 할것이 무엇이냐? 잃어버린 본연의 부모입니다. 잃어버린 본연의 주인공, 잃어버린 본연의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사무친 사람에게는 회생의 외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자가, 그런 무리가, 그런 움직임이 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 자식을 찾아 헤매는 하늘은 그런 무리를 통하여 움직여 나갈 것이며,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 애쓰시는 하늘은 그런 자를 붙들고 사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그 누가 그렇다’ 하는 사실을 만민으로부터 듣지 못하였다 할진대 만민을 원망해야 될 것이요, 역사노정에서 성현들이 이런 사실을 소개해 주지 못하였다 할진대 역사상의 성현들을 원망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나선 성인의 말씀 가운데서 그러한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할진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 안에 거하시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고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를 대하여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너희는 나의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가는 것은 내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의 나라다. 내가 찾는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의 사람이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내 가정이 아니고 아버지의 가정이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의 나라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라 하셨고, 인류를 대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이런 고마운 명제가 천륜 가운데 남아져 있어야만 하늘이 계시다는 것을 긍정하겠고, 그런 내용을 갖춘 그 무엇이 있어야 그 길을 찾아갈 수 있겠기에 종교를 세워 인간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부자의 인연을 소개하고 부부의 인연을 소개하고 형제의 인연을 소개하는 내용을 갖춘 종교가 최후의 종교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기독교의 원칙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황공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상에 성현들이 아무리 많이 왔다 갔어도 그들은 하늘을 관념적이고 막연하게 소개하였을 뿐 하늘을 실존적으로 체휼할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민족이 비웃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셨고, 또 핍박이 가중해 들어와도 그 핍박을 이겨내며 하늘을 염려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일찌기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하였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아를 갖고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하던 우주관과 인생관을 해명하는 자리에 엄연하게 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정적인 내용으로서 해명한 것이 아니라 심정적인 내용으로 해명했습니다. 또 그 자신이 그것을 해명한 실체의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그는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늘이 보내시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해도 메시아로 인정해야 될 것이예요. 천륜의 역사는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는 오셔서 죄악 밑에서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죄악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모든 원한을 해원할 수있을 때까지, 아버지의 심정이 남아 있는 곳에서부터 그 심정의 움직임이 끝난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해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서 땅 위에 오셨기에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하늘과의 사랑을 땅 위에 연결해 놓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신랑이라 하셨고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자녀의 명분을 갖추고, 신랑 신부의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나중에는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던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7-52
다시 찾아 세워야 할 아버지와 나의 관계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신랑이라 부르고 있고 자신들은 그 앞에 당당히 나타날 수 있는 신부라고 자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편단심의 심정을 지녀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심정은 자기 자신의 심정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던 그 역사적인 심정과 이 현실을 거쳐 미래까지 거쳐나갈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지닌 신부가 되어 하늘을 위하여 움직이고 주체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오! 신랑되신 주여!’ 하여야만 거기에 하늘이 응해 주시리라 봅니다.

우리는 남기신 말씀은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신 말씀은 귀중히 여기고 있으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은 귀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속되었던, 바라고 있던 메시아는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았으되 말씀의 실체로 나타나신 그분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이 역사적인 서러움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그럴듯한데 인간을 보면 보통 사람하고 같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곡절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 자체들의 한스러운 입장을 해명하고 찾아 세워야 할 부자의 인연을 해명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니, 무슨 천국이니, 무슨 이상세계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혈통을 받은 우리, 죄악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죄악권내에 속하여 생활하면서 그 환경을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이러한 우리인데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이것은 우리가 노력한다 해도 할 수 없기에 심정을 걸어 놓고 믿으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입니다. 무슨 조건을 걸어놓고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심정을 통해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능통하는 것보다도 66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던 아버지의 심정, 타락으로 말미암은 원한을 해명하려는 내용 보다도 타락시키지 않고 살고자 하셨던 아버지의 심정, 아버지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이루려하시는 그 심정, 타락된 인류를 구하여 그렇지 않은 입장에 세우고자 하시는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하고 자신은 그 아들딸이 되고 싶다 할진대 이 거리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죽도록 성경 말씀만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죽도록 내 말씀만 들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3년 공생애노정 동안 많은 말씀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붙들고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실체를 붙들고 염려해 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심정의 세계에는 차이가 없기에 지극히 선하고 높으신 하나님이지만 그분을 대하여 감히 아버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예요. 부자의 인연에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붙들게 될 때에 그 아버지가 `네 손은 딴손이다. 네 몸은 딴 몸이다. 네 마음은 딴 마음이다’ 하실 수 없다는 거예요. 심정적으로 일체의 입장에 들어간다 할진대 우리는 아버지의 연장체입니다. 연장체요 아버지의 분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내용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내용의 귀일점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 그 내용이 같은가 다른가가 문제가 아니라 심정의 귀일점을 이루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하신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공간을 초월합니다. 여기에는 혁명이라는 명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전에 가신 예수님을 오늘의 예수님으로 모실 수 있고 오늘의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연을 무엇으로 맺을 수 있느냐. 말씀만으로 안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관념적인 인식을 갖고는 안 됩니다. 심정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7-54
예수님의 심정세계
이러한 견지에서 헤아리게 될 때, 땅의 인간을 위해 왔던 예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오셨던 예수는 무한히 슬픈 분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인간의 슬픔을 대신한 눈물이요, 그의 서러움은 하늘의 서러움을 대신한 서러움이었음을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의 3년공생애노정에서 겪은 고난은 인간을 위한 고난이요, 하늘을 위한 고난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대신한 죽음이요, 하늘의 심정에 남겨진 피어린 자국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실 때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정을 초월하신 기도였습니다. 인간 속세의 일체를 초월한 자리에서 하신 기도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는 내것이오매, 내 서러움이 아버지의 서러움이라 생각하신 예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더 수고하시고 더 아파하시고 더 억울해 하신다는 일체적인 감정을 느끼셨고, 하늘에게는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간을 붙들고 만민을 구하여야 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 길을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온 인류를 찾기 위한 뜻을 중심삼고 예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이 통하였기에 그 뜻을 세우려고 예수님께서는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기는 쉽지만 그 내용에 들어가 심정을 통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지 않는다 할진대 참다운 사랑이라는 것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라 부르시던 예수의 음성, 불쌍한 자녀들을 대하여 외치셨던 예수의 말씀, 그 말씀의 전부가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서 예수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어늘,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볼 때에 눈 앞에 계신 듯이, `주님!’ 하고 그를 붙들고 싶은 심정을 느껴 봤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몸도 아버지 것이요, 마음도 아버지 것이요, 내 사무친 심정도 아버지 것입니다. 아버지 것 외에 제 것이라고는 일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못 통해 봤으면 자녀의 입장에 서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잠을 잊고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에도 아버지가 같이하심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30여년의 생애를 거쳐나가는 동안 그 생활 속에 핍박이 몰려오고 어려운 십자가가 가로놓이는 자리에 설지라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심정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머물 수 없습니다. 사정의 세계에는 많은 수가 움직일 수 있으되 심정의 세계에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4천년 역사의 심정을 받들어 나가는 자리에는 부자의 인연 외에는 일체 내놓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어떤 다른 논거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요구는 아버지의 요구로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7-55
예수님의 제일 귀중한 것
오늘날 여러분들이 교회엘 나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수십년의 신앙생활을 하여 신앙적인 인격을 갖추었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도 말씀은 모를지라도 심정이 통하고 하늘 땅 앞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저나라에 가면 도리어 더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저는 느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가는 길은 다 잃어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세상의 일체를 잃어버리고 가는 거예요. 죄악된 세상도, 죄악된 내 몸도, 그 무엇도 다 버려야 합니다. 단지 남길 것이 무엇이뇨? 하늘 대하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심정입니다. 그 심정을 지녀야 신랑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주(天宙)를 감돌고도 남을 수 있는 우주관입니다. 오늘날 무슨 주의를 중심삼은 무슨 관이니 하는 것은 다 필요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심정을 가진 분이셨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옷이라고는 몸에 걸치고 다니는 단벌뿐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있었다면 지팡이가 고작이었을 것이예요. 그러나 가진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무엇이 제일 귀중했겠느뇨?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전체 가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56
인류의 보금자리는 어디인가
바울은 말씀도 다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역사의 고비 고비를 거쳐오면서 슬픔과 억울한 상처를 입고 나온 인간을 사랑해 오신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 좌우에서 몰려오는 핍박이 심하고 원수들의 화살이 자기를 노리는 이러한 환경이 중첩하면 중첩할수록 바울은 그것을 극복하기를 간곡히 바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함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고 했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의 모든 것을 유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갖고 계셨던 예수님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었기에 죽은 예수를 부활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인연도 그러한 고비에서 새로이 사회를 혁명해 나왔거늘 천륜의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에 물든 한스러운 역사를 삼킬 수 있는 것은 심정만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념권내로 굽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현세의 역사를 넘어서 이상적인 새로운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대하여 신랑이요 형님이라 할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셨고 형제라고 말씀하셨거늘,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에 인류 앞에 주어질 선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딴 것이 아닙니다. 27억 온 인류가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의 역사적인 인격을 심정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그 감촉을 느껴 자기 자체를 해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이 인류는 새로운 세계를 맞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심정은 다 하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을 갖고 나타나서 너희들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이런 모순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고마운 말씀입니다. 한스러운 복귀노정을 걸어가야 할 인간 앞에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하시고 또 우리를 신부라 하셨으니 이러면 일이 다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이러한 심정을 갖고 살았고, 이러한 심정으로 말씀하셨고, 이러한 심정을 갖고 수십년 동안 사탄과 대결하셨던 것입니다.

7-57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인류의 보금자리는 사정이 통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심정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국경도 초월하여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 `오냐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그러한 심정세계의 느낌을 가지고 역사적인 사정을 초월하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의 통일이념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헛수고가 됩니다, 헛수고. 신부니 아버지니 하는 것도 전부 다 공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사무치게 될 때는 민족이 문제가 아니요, 지상의 어떤 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것을 넘고 넘고 또 넘고,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도 기뻐할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그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한한 천국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 그것은 천국이 내심정에서부터 연락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심정의 연결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우리가 자식이라 할진대는 그 몸과 내 몸은 한 몸입니다. 아버지의 피살과 내 피살은 일체예요, 일체.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부모가 왜 자식을 사랑합니까. 자기 몸의 연장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 하려면 핏줄이 같아야 됩니다. 핏줄이 연결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심정면에서 하나님과 예수와는 일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동맥이 움직일 때 예수의 동맥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맥박이 뛸 때 예수의 맥박도 뛰고, 정할때 정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대해서 제가 부모를 사랑하고 사모합니다.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피가 통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어떠한 논리적인 조건을 해탈한 세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양자라고 했습니다, 양자. 여러분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타락한 인간은 양자라고 하였습니다, 양자.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양자의 혈통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심정으로부터 연유된 혈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서 그 심정을 이어받은 아들,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아들을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수 있고, 사모한다고 말하지 않고도 아버지를 사모할 수 있고, 내가 아버지를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심정이 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정이 동하지 않는 것이 타락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달랐습니다. `아버지!’ 하면 슬픔에 잠긴 아버지도 `오냐’ 하셨던 거예요. `아버지!’ 하는 그 한마디에 아버지께서는 수억천만인의 기도의 세계를 넘어선 심정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오냐’ 하는 이것은 슬픈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삼은 자연적인 인연입니다. 그 무엇이 어떻게 할래야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고, 어떤 조건으로도 이것을 막아낼래야 막아낼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 봤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세포까지 동하게 됩니다. 저 젊은 사람이 정신없는 소리한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좋습니다. 사랑의 심정, 사랑의 감촉은 온 실존세계의 본질이고 전체를 종합한 맛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여러분이 들어가서 기도한다 할진대 밤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잠을 잤는지 그런 인식을 초월하게 됩니다. 인간이 육신을 쓰고 인식하는 것보다 몇 천만배 능가하는 내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예수님이 핍박받다가 피곤한 다리를 끌고 감람산에 들어가 하늘 대해 고요히 기도하시던 그 시간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그 순간은 자기 일신의 전부가 심정세계에 동화되어 들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잊어버릴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었기에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화하여, 그런 심정에 동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들이라고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이 세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오셨으나 심정세계의 생활내용을 해명해 주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 사정은 소개하였지만 심정의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기에 다시 와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심정의 귀일점을 찾아 들어가려면 내 몸이 아버지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내 피가 아버지의 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여러분은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이 되면 그 마음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원이 자기가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아버지에게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체는 여러분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입니다.

여러분의 피살이 아버지의 피살을 대신한 심정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늘이 슬퍼하실 때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들, 그런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하겠지만 있단 말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모든 실존의 가치를 몇 천만배 능가한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될 때는 인식을 초월하게 됩니다.

7-60
아버지의 친아들딸이 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려면 먼저 혈통적으로 같아야 합니다. 자신의 피살이 아버지의 피살과 같다고 느껴져야 됩니다. 아버지의 친아들 딸이 되었다 할진대 그다음에는 뜻을 같이해야 됩니다, 뜻. 그 뜻이 무엇이냐? 타락한 세계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죄악사를 청산한 본연의 실체, 선한 실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살 수 있는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아버지의 피살을 이어받아야 되고,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려는 뜻을 품어야 됩니다. 또 생활에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아들로 설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아버지가 슬퍼하면 자식도 슬퍼하고, 아버지가 괴로워하면 자식도 괴로워해야 하고, 부모가 어려운 생활을 하면 자식도 어려운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참다운 효자라 할진대 부모의 뜻을 받들어서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피살을 통한 인연을 가져야 되겠고, 뜻을 통한 인연을 가져야 되겠고, 거기에 생활을 연한 심정을 갖추고 나야 하늘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내용을 인간에게 접붙이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은 이러한 인연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인간들이 생각지도 않는 가운데 많은 수고를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양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을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친아들딸의 자리까지 끌어 올리기 위하여 하늘은 무한히 애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억울함과는 비교할 수 없고, 우리에게 슬픔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분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분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입은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은 우리 이상 역사적인 억울함을 체휼해 나오셨고, 우리 이상 슬픈 심정을 지니고 역사와 더불어 슬퍼해 나오셨으며, 우리 분함의 몇 천만배 더한 분함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또한 우리보다 더한 상처를 입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
예수님을 대해 사탄이 참소할 수 없었던 이유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셨는데 그 아버지를 어떤 아버지로 알았느냐.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보다 몇 천만배 고통스런 가시면류관을 쓰고 계심을 느꼈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도 하나님이 자신보다 몇 천만배 고통을 당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심장에 창이 들어오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상 고통스런 자리에서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는 아버지이신 줄 알았기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한을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며 갈지라도 인류 앞에 한을 남기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셨습니다. 원수를 대해 말할 수 없는 통분과 원한을 가질 수 있는 자리로되 하늘의 참으심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스러운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예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과 고통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여야만 구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이었기에 생명을 잃더라도, 모든 욕망을 다 포기하고서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는 그런 입장에 들어갔기에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생명의 구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원망의 마음을 갖지 않은 예수, 분하다는 마음을 갖지 않은 예수, 역사적인 한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은 예수였기에 사탄이 참소할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어떤 존재냐? 역사적인 한을 제시하여 참소하는 존재요 사정적인 것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 못 간다 하고 막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을 참소하지 못한 것은 이 타락한 세계의 원한, 천주의 원한까지도 그에게는 걸릴 수 있는 조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을 갖고 하나님께 항의하던 사탄도 쌍수를 들고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죽어 사라지는 것보다도 인류가 영원한 죽음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며 눈물짓는 사람을 참소한다면, 사탄은 그 본체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권내는 사탄이 얼마든지 참소할 수 있으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일편단심의 간곡한 마음권내는 사탄이 손톱만큼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모든 인연을 넘어선 세계가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은 사탄과 인연이 없는 세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부르던 그 아버지를 오늘 우리는 그의 공로에 의지하여 `아버지여’ `주여’ 하면서 부르고 있습니다. 황공한 일입니다. 오늘도 죄악권내에서 허덕이고 한스러운 생활의 일편을 붙들고 눈물짓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사회와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흘러가는 사조는 역사적인 한을 품고 뒤넘이치고 있고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내 감정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공포입니다. 내 생활을 휩쓸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말할 수 없이 파탄된 의리입니다. 더욱 하늘은 새로운 세계를 세우고 싶고 참된 의를 세우고 싶은데, 그것들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오늘도 변함없이 그러한 사람을 찾아 헤매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7-62
섭리로 본 한민족의 입장과 그 살 길
삼천만 민족은 하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의 역사와 같이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의의 심정을 품고 충신의 의리를 세우기 위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하늘이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충신이 있었다 할진대 하늘은 그의 발자취와 그의 심정 또는 그 민족 위에 왕래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나는 빚진 사람입니다. 이 민족은 빚진 민족중의 빚진 민족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구하려는 하늘이요, 타락한 자식을 붙들고 통곡하시는 부모의 심정을 가진 하늘이라 할진대, 잘 사는 민족보다도 못사는 민족을 바라볼 때 더욱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 앞에 자랑할 무엇이 없습니다. 가질 것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다 빼앗겨 버렸고 다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다 할진대, 나는 원합니다. 피끓는 청년남녀들이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마음에 예수께서 하늘 대하여 아버지라 부르던 불타는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소서라고. 이들이 그렇게 된다면 이 민족을 다른 어느 민족이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쌍히 보는 아버지의 심정, 불쌍히 느끼는 아버지의 그 심정 앞에 `아버지! 나는 이랬습니다’ 하고 나서는 아들 딸이 많다 할진대 버림받아야할 이 세계와 파탄될 수밖에 없는 주의와 사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청년남녀, 그러한 클럽, 그러한 민족이 있다면,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유대민족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압정하에서 신앙적인 사조가 혼란되고 민족의 정기가 다 파탄 되었으며 거기에 딸린 모든 것이 흔들렸습니다. 하늘은 그렇게 슬픔이 사무친 때에 예수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원망스럽고 한스러운 사실은, 어찌하여 민주와 공산 2대진영이 대결하는 초점으로, 제물로 한국이 등장했느냐는 것입니다. 슬픈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민주와 공산진영이 모두 우리 민족을 제물 삼아 대치하고 있습니다. 복된 나라를 건설해야 할 이 민족이 슬픔의 민족으로 위험과 모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은 이 환경을 이루어 나오고 민족을 뒷받침해 나온 천륜이 있다 할진대, 그 천륜과 합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하늘과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 무엇이 나온다 할진대 이 민족은 살아납니다.

외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정의 세계와 소망의 세계를 소개하고 오늘날 세계를 예수주의권내로 몰아넣고 있거늘, 천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어떠한 것이 나타났다 할진대, 마음과 심정세계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이 아니 굴할래야 아니 굴할 수 없고 아니 접할래야 아니 접할 수 없는 최고의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될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민족은 신앙적인 혼란기에 있습니다. 인격을 자랑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고, 생활 속에서는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모든 사조가 휩쓸려 우리 민족을 송두리째 밀어내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안식할 수 있겠습니까?

7-64
한민족의 나아갈 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으나 처참한 30여년의 생애와 슬픔과 고난의 3년 공생애노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제거시키고도 남을 수 있었던 늠름한 기세, 불타오르는 심정에 사무쳐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몽땅 복귀한다 해도 부족타 할 수 있었던 그런 기세의 용자였습니다. 그런 용자가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그 민족이 예수를 곤경에 몰아넣을 적마다 내모는 그들과 싸우는 것보다 도리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여유의 인격, 존경할만 합니다.

예수님도 그 국가와 민족의 핍박에 부딪히게 될 때는 홀로 고요한 곳을 찾아 천상을 향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호소하여 그런 고개를 넘으셨으니, 이 민족의 살 길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모든 조건도 다 무시해 버리고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딸’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 딸이 있다면 민족이 밟히고 모든 것이 제물이 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하늘 앞에 가까운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나쁘게 대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부모라도 심정을 갖고 대해 주는 자식,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하는 심정을 갖고 움직이는 자식 앞에서는 오금을 못쓰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거든 하나님이야 말할 것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그런 것입니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 민족이 살길을 찾아,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아버지여,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유로운 처지에서 하늘을 원망하는 민족과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늘을 대하여 `감사합니다’ 하며 눈물짓는 민족과는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들은 부자지간, 오늘 우리들이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어렵다 하여도 어떤 핍박을 당하고 어떤 어려운 환경이 나를 막더라도 6천년 동안 그런 것을 겪어오신 아버지의 성상과는 비할 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뜻을 위해 일을 하다가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며 우는 자가 되지 말고 나보다 더한 상처를 입고 계신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겠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잊으시고 상처입은 나를 찾아오셔서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입니다. 황공하고 망극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무언가 해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의 민족정신이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민족은 천륜 앞에 무엇을 내놓을 것인고? 오늘 이 세계, 이 시대에 제시할 아무런 내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 건드리지 못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심정의 세계를 깊숙히 느낄 자는 어떤 자뇨. 어려운 자리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참으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입니다. 역사적인 슬픔을 안고 오신 아버지를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조건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민족은 서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이 안 계시다면 한스러울 것으로되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한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6천년 역사노정에서 가장 불쌍한 이 민족이로되 그 마음으로는 하늘을 생각하였다 할진대, 어느 민족보다도 아버지에게 뼈에 사무치는 자극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 민족에게 부자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는 전개될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앞에 그런 길을 철석같이 약속해 놓으셨고, 예수도 그 내용을 우리에게 훈계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 할진대, 우리 민족을 무시하고 어디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런 신념을 갖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7-66
우주보다 더 큰 한 생명
하나님은 미국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영국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민주진영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주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요, 내 하나님입니다.

하늘은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세계에 동참하여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신도, 그런 신부들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런 자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땅을 주고도 살 수 없고 하늘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런 한 생명은 우주보다도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고맙고 황공하게도 하늘은 부자의 인연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는데, 나는 어느 정도까지 아버지를 모셨느냐, 어느 정도의 효자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효자로, 국가와 민족적으로는 충신의 기개를 갖고 하늘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동양의 삼강오륜같은 것이 다 일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대한 충효도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자는 하늘 앞에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라에 대한 충신의 절개를 갖지 못한 자는 도저히 하늘 앞에 충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도 이 세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의 세계도 내용이 달랐다 뿐이지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인 여러분! 우리들은 교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간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성전이나 집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심정을 품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세계에 27억의 인간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심정을 끄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천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고 대우주와 피조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첫째는 무엇이뇨? 많은 사람보다도 자기의 심정을 다 주고 나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들 수 있는 그런 한 사람을 바라십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많은 사람보다도 그런 한 사람, 그런 한 사람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4천년만에 보내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이제 6천년 역사를 경과하여 그 예수를 대신한 사람을 보내기 위한 것이 재림이상입니다.

찾고 헤매시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는 아들딸은 어디 갔는고. 그런 아들딸을 찾는 날이 소원의 날이요 해원의 날입니다. 그 날을 종교의 명사를 빌려 말한다면 어린양잔칫날이라고 합니다.

7-67
끝날의 참다운 기독신자
그러면 참다운 기독신자는 어떠한 자이냐? 즐거워서 춤을 추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염려하여 기도하는 자일 것입니다. 자기를 염려하여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염려하여 기도하는 자입니다. 내가 신부 되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자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못하실까봐 염려하는 자입니다. `나를 천당에 보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천상에서 내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죽어도 아버지의 가치가 지상에서 인정되게 하시옵소서’ 하는 자입니다.

오늘, 믿고 있는 신앙관을 뒤집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천당가겠다고? 천당가서 뭘 할 거야? 도둑질 또 할거야? 그것은 하늘의 본질을 잃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고자 하는 것이 본질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이 그러한 것임을 타락한 속성도 느낄줄 압니다. 받기 위하여 허덕이는 무리에게는 사망의 구덩이가 기다리고 있고, 주기 위하여 애쓰시다가 최후에는 자기의 몸까지 주고 가신 예수였습니다. 주기 위하여, 잃기 위하여 허덕이던 왕자가 메시아였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 오늘의 생활에서 아버지의 한을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얼마나 제물되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국이나 지옥의 관념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옥 간들 어떠며 천국 간들 어떠리’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늘이 부활시키게 될 때 사탄도 `옳소이다’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생명의 기준이 세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성도들인 여러분이 슬픔에 사무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면, 성경말씀도 필요합니다. 스승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어떤 스승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스승을 중보삼아 아버지의 심정과 연결지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족을 위하여 기도한다 할진대 심정적으로 호소하는 여러분들이 되고, 하늘의 심정을 소개하기 위해 애쓰고, 제물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된다면, 하늘은 여러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생각해 볼 때, 하늘은 만물의 주인공이로되 그 주인공의 행사를 한 번 해 보셨습니까? 사랑의 주체로되 인간을 대하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해 보셨습니까. 못 해 보셨습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입장에서도 인간을 대하여 너는 내 것이라 하며 마음대로 취해 보지 못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땅 위에 인류가 많이 살고 있으되, 혹은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이 있었으되 그들을 한 번도 당신의 아들 딸, 혹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용자로 세워보지 못하셨습니다.

오늘날 민주진영에 예수를 믿고 있는 기독신도들이 많지만 하늘은 그들을 사탄 대한 총진격 명령을 할 수 있는 총사령관으로 세워보지 못하셨고, 예수를 세워 천사세계를 명령하게 하여 지상과의 관계를 맺으려 하셨으나 그러지 못하신 것입니다. 땅 위에 인간들에게 신부의 이념을 주고 신부를 찾아 헤매었으나 신부라고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은 너무나 죄송합니다.

세상에서 통일교회의 아무개는 이단자의 괴수라고 하고 있는데, 좋습니다. 원컨대 이단자를 해명하여 그대들이 복받으소서 하는 마음뿐입니다. 변명도 해명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을 갖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내가 살기에 바쁜 때요, 내가 아버지 앞에 인정을 받는 단계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급급한 때입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똑같이 불쌍한 자들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아버지를 부르며 맹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눈물 지으면서 아버지를 부르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을 대신하여 이런 입장에 서야 했고, 한스러운 때도 있었을 망정, 아버지께서 남기신 길이니 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서글픔을 느낀다면 고맙고 황공한 것입니다. 선조들의 피눈물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그 서글픈 골짜기를 편답하는 데에 동참한다는 것은 황공한 일입니다. 이 몸이 찢기든 처참하든 어디 가서 쓰러지듯 한스러울 것이 없는 우리입니다. 이런 심정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할 끝날의 기독 신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단이란 말을 들어도 좋고 어떤 누명을 써도 좋습니다. 그것이 천국이념을 해명하는 나에게 아무런 장애의 요소가 못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심정을 나누고, 심정에 동화되어 무릎을 꿇고, 심정으로 말씀하며 심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모임이 있다면, 하늘은 기필코 역사와 더불어 그 모임의 무리를 이끌고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7-69
예수님을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
한갖 창녀에 지나지 않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가 책망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를 옹호하였습니다. 사리를 통하는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죽어야 할 예수님의 심정을 염려하였고, 애석하고 통분한 하나님의 심정의 일편이 마리아에게 나타났기에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이름이 남아질 것을 예시하셨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붙들려 했으나 부활한 자체를 오손(汚損)시킬까봐 염려하여 막으셨던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아버지를 맞이하여 기뻐하고, 자신을 대하여 기뻐하기 전에 아버지를 대하여 기뻐하고, 인류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놓고 기뻐하고 난 후에 자신을 대해 기뻐하고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의 가졌기에 그녀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억울한 심정을 품고 왔다 갔던 초초한 예수가 오늘날 우리들이 믿는 예수인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서글픈 일이예요.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역사가 높여준 예수의 명사를 부르며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 말고, 역사에 밝히고 역사에 밀려나가면서도 예수를 자랑할 수 있는, 갈보리산정에서 그를 찾아 헤매던 여인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다 하고 제 갈 길을 찾아서 돌아섰던 열 두 제자보다 오히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7-70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아들딸이 되려면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울려본 사실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울려본 때가 있었습니까? `오냐, 내가 갔던 길을 네가 오기에 얼마나 허덕였느냐’ `오냐, 서러운 나를 찾아오기에 네가 얼마나 허덕였느냐, 아무개야’ 하고 붙드시며 통곡하시던 아버지를 붙들고 몸부림치고, `아무개야’ 하고 우시던 예수님의 손길을 붙든 적이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대 큰소리 말라구요. 큰소리치지 말란 말입니다.

도리어 조롱받고 배척받던 사람들이 천국세계의 왕자가 될 것입니다. 천국세계의 공주들이 될 것이예요. 다 잃어버리더라도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그리며 생활을 해명하고 교회를 해명하고 사회를 해명하는 여러분이 된다 할진대, 아무리 여러분이 지옥엘 가겠다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끌어갑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아버지와 나’라고 했으나 감히 아버지라는 명사를 부르는 것조차 황공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말조차 하는 것이 황공스러운 한때가 있어야 됩니다. `아버지, 감히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된단 말입니다. 딴말이 필요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하여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님’ 하게 될 때 거기에서 우주의 소유권이 결정되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통일신도들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젊은 스승의 뒤를 따르는 것도 좋으나 다 지나갈 것입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고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한테 남겨주고 싶은 것은, 민족을 넘고 인류를 넘고 세계를 넘어서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모습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고대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천주와 지옥권까지 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은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아버지? 역사적인 수고를 하신 아버지, 이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시대를 붙들고 싸우시던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을 고대했고 싸워야 했던 아버지를 소개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주는데 심정을 발판으로 하지 않으면 망상과 망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역사적인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시대적인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미래적인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저의 뜻입니다. 핏줄을 잊지 못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그 아버지는 저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늘은 6천년 동안 나와 더불어 살기를 고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원수 사탄이 웬 말이냐? `이놈 사탄아 너는 이 천지간에 발붙일 곳이 없다’ 하고 호령할 수 있는 심정의 주인공, `사탄아, 악의 세력아!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라’ 하며 호령할 때에 사탄이 머리를 숙이고 `옳소이다. 영원무궁토록 그대가 말하는 것이 옳소이다’ 하고 인정받을 수 있고 하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주인공, 하늘은 그런 신부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녜요?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을 당했으되 심정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사탄의 침범을 받았으되 심정의 세계는 침범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신부라는 명사를 주시고 심정세계의 충절을 갖춘 신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신부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주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대 선지자들이 이러한 뜻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였고, 직계의 아들 딸로 세우기 위해서,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하늘 땅이 수고하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선조들 앞에, 수많은 영인들 앞에, 사탄 앞에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 딸로부터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아들 딸이 있다 할진대, 그런 아들 딸을 대해서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개야 너는 내 아들 딸이다’ 하면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어느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말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 아들 딸이요 내 나라 백성이야. 한국 백성이니 미국 백성이니 하는 말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늘나라의 이념을 품고 계신 아버지 앞에는 가소로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나와 더불어, 가정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국가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살지 못한 그 아버지께서 이제는 거꿀잡이로 세계로부터 오늘의 나까지 찾아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겠는가. 찾아오셔서는 나를 데리고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찾아오시기에도 힘들거니와 끌고 가시기에도 힘드십니다. 주님은 역사적인 종말까지 몰아넣어 가지고 데려 가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똑똑히 알고, 나는 이 나라의 내가 아니요, 내 가정은 이 나라의 가정이 아니요, 이 사회와 나라, 피조세계는 타락세계의 것이 아님을 표방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설 수 있는 신랑 신부, 하나님을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