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5 to 7-308: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1959.10.11 (일), 한국 전본부교회

7-285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요한복음 3:11-21 전도서 7:28-29

[기 도]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사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또 심정에 느끼는 신앙의 정도도 각각 다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원하옵건대 저희의 사정이 다르고 저희의 마음 바탕이 다를지라도 이것은 다 세상을 중심삼은 사정이요, 마음 바탕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저희들을 대하여 이 시간 같은 사정이 되기를 고대하시고, 같은 마음 바탕이 되기를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저희의 사정이 인간을 통하는 사정이 아니오라 천성을 통할 수 있는 사정이 되기를 바라시고, 저희의 마음 바탕은 인정을 통하는 마음 바탕이 아니오라 천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이 되기를 고대하고 계신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나’라는 한 존재는 두 세계의 첨단에 서 있습니다. 좌를 바라보면 세상의 인연이 나를 얽매고 있사옵고, 우를 바라보면 무한한 선의 움직임이 나를 이끄는 입장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이러한 찰나의 세계에서 뒤넘이치며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인 것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하여 있는 자들을 세워 하늘은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러한 자들을 불러 하늘의 사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원컨대, 이제 저희의 사정이 한 곳으로 기울어지고 저희의 마음 바탕이 한 곳으로 기울어져, 그 사정 그 마음에 그리고 느끼고 체휼되는 모든 사실은 세상적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하는 하늘의 내용으로서 기울어질 수 있고, 움직여질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자기의 심중을 샅샅이 털어놓고 아버지의 훈계와 새로운 비전으로 다시 한 번 나를 찾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내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내 자신의 역량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이념에 속하여 어떠한 가치와 어떠한 기준을 위해 허덕여 왔었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나는 이러하였고, 오늘의 나는 이러하니, 미래의 나는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사람을 중심삼은 인연과 사정은 날이 가면 갈수록 많은 인연과 조건으로 갈라질 것이오나, 하늘을 중심삼은 모든 인연과 사정은 많으면 많을수록 있으면 있을수록 통일된 형체를 갖추어, 하나의 뚜렷하고 색다른 그 무엇을 이루어 놓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다시 하나로 화한 색다른 그 모습을 고대하면서 엎드렸사오니, 이 시간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능의 권한으로 저희를 좌우하시고, 하늘 것 아닌 일체의 것을 용납하지 마시옵고, 본연의 심정과 본연의 심성으로 이 시간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를 움직이시어 아버지 것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전체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마음과 마음에 다리를 놓으시고 심정과 심정을 연결시키어서 아버님의 사정을 통과시킬 수 있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노정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사오나 하늘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사옵고 하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갔사옵니다. 끝날이 되어오면 되어올수록 의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늘의 사정이요, 하늘의 심정인 것을 저희가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고, 저희들 스스로 각오하고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하늘 앞에 부복하는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만 아버지의 은사에 잠기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염려하며 숨은 제단을 쌓고 외로이 눈물 뿌리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많을 줄 알고 있사오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같은 은사로써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맡겼사오니, 처음부터 끝시간까지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전체를 당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사올지라도 저희 자신들이 그 준비에 대응하여 마음과 몸에 준비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마음속에 지금까지의 그 무엇을 남기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린애의 심정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은은하신 그 심정의 감촉의 통하여 다시 한 번 하늘과 인연맺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의 명령하시는 은사에 잠기어 하늘과 더불어 화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저희들과 더불어 새로운 약속을 세울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말씀이 필요치 않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말씀보다도 저희의 마음으로 체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마음문을 열어 주시옵고 사정 사정을 살펴 주시옵소서. 당신과 인연 맺었던 본연의 성상이 예수이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아버지를 향하여 마음을 다 모아 좌정하였사오니, 아버지의 본성과 깊게 깊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한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 앞에 다시 한 번 각오와 맹세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과거의 모든 것을 뉘우쳐 아버지 앞에 성별된 한 기준을 세워놓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심정에 통하고 하나의 은사에 화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억만 사탄이 이 간격을 노려 사망의 그늘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을 저희들이 두려워하면서, 자기의 모든 사정과 지금까지의 어떠한 주의 주장과 관념이나 인식을 다 버리고, 어린애의 심정이 되어 마음을 터놓고 이 한 시간 아버지의 분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아버지의 심정과 인연맺을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288
말 씀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7-288
모든 존재물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
하늘이나 땅의 어떠한 존재물을 막론하고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하늘에서도 하나의 사랑이 중요한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도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예수의 사랑이요, 천상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아는 바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을 통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인데, 그 사랑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 시조가 사랑의 동산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의 영원한 사랑을 생활이념으로, 생의 이념으로 삼고 사는 것이 창조본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과 사랑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피조만물의 생명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요 가치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인정할진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생명을 체휼하지 못한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논위하고 아무리 생명을 논위하고 아무리 이념을 논위한다 해도, 하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두어야 되겠습니다. 인류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이뇨?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이념을 잃어버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슬픔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슬픔에 반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소생의 가망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끊어진 이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할진대, 먼저 어떠한 섭리를 하실 것인가? 참다운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사랑에 굶주림을 느끼는 마음을, 이념의 결핍을 느끼는 마음을 움직여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이념을 심중으로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없다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충격이 마음으로부터 폭발되지 않는다 할진대,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와 관계를 맺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끝날이 가까와오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이 다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을 붙들고, 당신만이 내 심정의 고갈을 채워 줄 수 있고 당신만이 내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당신이 내 심정으로 그리고 흠모하던 분이요, 당신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념 분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필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 할진대 이 역사의 종말시대에 있어서는, 참다운 사랑의 사람, 참다운 생명의 사람, 참다운 이념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7-290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정도
그러면 우리가 도의 길을 찾아나가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을 지니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도 찾으시고 예수님도 찾고 계십니다. 그것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도 예수도 축복할 수 있는 자, 인정할 수 있는 자가 나와야만, 이 세상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생명과 참다운 이념이 세워질 것입니다.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찾아나오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느냐? 여러분의 관념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다 할진대, 부모는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개의치 않으며, 죽음도 어떤 행동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일망정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밖에 안 될 것인가? 어떠한 역경과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고, 희생을 개의치 않고 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 본연의 인간을 사랑하시려던 그 사랑은 타락한 세상에서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죽던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던가할 때에 슬퍼하며 고통을 느낍니다. 또 의식까지 잃어버리거나 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고 미치고 죽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어떠할 것인가?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7-291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아담 해와를 지으셨고, 또한 사랑의 동기 되시며 사랑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을 몽땅 쏟기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조만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늘로부터 천지에 흐르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자로서 아담 해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는 선조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념을 세우시고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어서 창조할 아담 해와를 생각하면서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자라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무한히 즐거워하시고 무한히 행복해 하며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그런 아담 해와였어요.

창조주의 위신까지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신까지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실존성까지도 잊어버리고, 그런 심정으로 아담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자식일망정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또다른 사랑의 대상을 놓고도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아 이 땅 위에 악의 자손이 아닌 선의 자손을 번식하였다면, 여러분은 자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바라보시던 그 느낌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7-292
인간 타락 직후의 하나님의 슬픔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사랑의 심정으로 이 땅 위의 아들 딸을 사랑한 사람이 역사이래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과 그러한 감촉에 화하여 사랑하는 부부가 없다는 거예요.

매일 죄나 짓고 야단법석 대는 이것은 타락한 이후에 벌어진 천사장급 이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천사장급 이하의 사랑. 그러기에 인간들을 이념적인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념 자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는 것을 그저 막연히 듣고 있습니다. 내용이 희미하고 들은 것이 희미합니다. 거기에 대한 아무런 심정의 반응도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심정은 터질 듯 찢어질 듯 미칠 듯하였습니다. 자기의 처신을 잊어버릴 만큼 혼돈된 아버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는 뼛골이 녹아짐을 느끼며, 자기가 대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거늘, 타락의 길을 밟아 사망선으로 넘어가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 마음을 알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체득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 사람에게는 인간 세상의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어떠한 최고의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위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감복귀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인간이 타락된 후에 하나님 속에 맺혀진 원한의 심정,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해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난 오늘 이시간까지도 하나님은 쉬임없이 허덕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셨고,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던 거예요.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형장으로 내보냈고,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류가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293
참된 기쁨을 가지려면
그러면 땅 위에 기쁨의 한날이 온다 할진대 어떠한 날이 기쁜 날이뇨.

타락 직후부터 하나님의 심정에 맺혀졌던 한을 풀어 드리는 날이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원한이 풀어지지 않은 채 천주는 슬픔에 싸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슬픔의 역사노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고통의 역사노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쁨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슬픔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예요. 명예가 없어 슬픈 것이 아니예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슬프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무엇이뇨? 내가 어떠한 입장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고통이 아니예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 이상의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어떤 것이뇨? 억만장자가 된다고 기쁜 것이 아니예요. 만우주를 내 것으로 만든다고 기쁜 것이 아니예요. 사랑을 찾아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기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타락한 우리는 생활하는 데 고통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선의 이념을 기나긴 6천년 동안 그리워해 왔으나 아직까지 선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타나지 않을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 사조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선의 이상동산을 건설 한다고는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계를 부정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여 있는 우리, 이것이 타락의 한입니다. 이 한의 고개를 넘고 넘어야 할 우리의 생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의 고개를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에 입은 상처를 알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소망의 그 한때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이 타락한 인간과 다리를 놓기 위하여 제물이라는 조건을 세우게 했습니다. 인간 앞에 만물을 내세워 찾아오셨습니다. 제물을 놓고 찾아오시던 그 때에도 선조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셔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역사노정의 수많은 선지들은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제물을 유린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만물 앞에 내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나오셨습니다. 개인을 찾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게 하고, 이것을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벌여 나오셨습니다. 그 민족의 터전 위에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인연의 대표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7-294
타락 인간을 복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은 개인으로부터 민족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하나의 실체를 세워 해원성사하여야 하는 목적이 있는 연고로, 그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이 천 만 번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를 위한 일이라면 수고도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아니 하셨습니다. 개인 앞에 배반당하고, 민족 앞에 배반당하고, 유대국가 앞에 배반당하시면서도 반역한 그들을 저버리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자식이 죄를 짓고 허랑방탕한다고 부모가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직계 아들 딸로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인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을 저버릴지라도 이 인연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을 저버리지 못하시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은 만천하에 불효의 팻말을 붙여 천대를 받아 마땅한 후손입니다. 우리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렇습니다. 국가적으로 보게 된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군왕이십니다. 하늘을 군왕과 같이 모시고 하늘 앞에 충신 중의 충신이 되어야 할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니, 역적의 종족이라는 팻말을 붙여 만천하에 공개해도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종족입니다.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이런 사정이 있다면 원수 중의 원수일 것인데, 그 원수 중의 원수와 같은 입장을 넘어설 수 있는 심정을 갖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느뇨. 사람을 대하여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들 딸이라는 심정이 하나님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해 있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배척당하고 내일도 배척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배척당하고 저곳에서 배척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참다운 자식을 찾아 나온 걸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울어본 적도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인간들아! 네 자식이 그리워 울기 전에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울어라. 그 무엇이 원통하다고 땅을 치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치며 가슴을 쳐라. 땅의 그 무엇에 미치는 자가 있거든, 이 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하여 미치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기도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십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추상적이 아니예요. 슬픈 그 가슴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것이며, 고통과 억울함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이뇨? 그럴 수 있는 이가 세상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 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을 붙들고 울고,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울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 딸, 이것이 우리들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이라 하겠습니다.

그 분은 어떤 분인가? 어떤 주관자도 아니요 여러분이 그 인연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6천년 동안 미치는 것 이상의 심정을 지니고 땅을 대하여 허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아버지를 향해 저주에 저주, 배반에 배반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제라도 하늘을 향하여 미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7-296
하나님의 소원과 인간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쓰러지게 될 때에 그 부모가 미치는 일이 있거든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뇨? 부모의 사랑에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가한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여러분이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이 사모하기 전에, 여러분이 그리워하기 전에, 여러분이 찾아 허덕이기 전에 하늘은 이날 이때까지 그리워하며 허덕이고 미칠 듯한 입장에서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거기에 사탄이 조롱합니다. `자식을 품고 품고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이여! 자식을 두고 한숨은 웬말이여 탄식은 웬말이요?’라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어떤 궁전 가운데 편안히 앉아 계신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역사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6천년이란 역사를 허덕이며 찾아오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조들이 맞기 전에 맞으며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기 전에 몰리며 찾아오셨고, 죽음의 고개를 넘으시며 찾아오셨습니다. 선열들이 순교의 고비고비를 넘을 때마다, 하늘도 그러한 고충을 느끼셨습니다.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움직이는 아들 딸과 함께 고충을 당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그렇게 찾아오시던 것을 포기하실 것이냐?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심판을 받아 사라져야 마땅한 이 땅 위의 인간을 찾아오시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설 것이냐? 돌아설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 자식이 아무리 악하고 죄를 범하고 부모 앞에 불효한다 할지라도 그 부모는 자식을 향한 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지선열을 붙들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27억 인류를 대하여 허덕이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7-297
하나님을 위로할 방법
그러면 나를 찾아오시던 하나님은 이러했거든,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이뇨. 나를 찾아오신 이 하나님의 모습을 위로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고, 인간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퍼하시며 찾아오셨던 하나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갖고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하고 위로하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겠어요 안 바라시겠어요?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얼마나 쓰러지셨으며, 얼마나 허덕이셨나이까’ 할 수 있는 아들, 천만 번 수고하고 천만 번 모욕을 당하고 천만 번 어려움을 당하시면서도 슬펐던 가슴을 헤쳐 놓고, 억울했던 가슴을 헤쳐놓고, 분했던 가슴을 헤쳐놓고 통정할 수 있는 아들 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요, 우리가 모셔야 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뒤넘어치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아들 딸을 이 땅 어디에 있는고? 그 아들 딸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 딸을 중심삼고 화할 수 있는 하나의 무리,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이 찾아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요, 그러한 세계가 창조이상세계라는 것을 여러분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불행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 위에 불행이라는 명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 외에는 그런 명사를 붙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 불행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선의 동산을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사랑하고 천지만물이 화답하는 가운데서 즐거워하기 위하여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어디 그랬다는 곳이 있어요?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심정, 그것은 외아들을 잃어버린 서러운 심정이예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어버린 서러움이었다는 거예요.

7-298
독생자의 사명
예수님을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독생자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홀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보내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걸고는 처음 낳은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라는 거예요.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무엇을 했어야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생활이 어떻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사회가 어떻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까? 못 보여주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은 이렇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국가는 이렇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는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까? 못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의 자리에 나아갔다면, 하나님은 쌍수를 들어 `오 사랑하는 내 아들 딸아, 너희는 내 유업을 받아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주관하면서 영원히 영원히 나와 더불어 살자’고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이래 하늘땅을 걸어 놓고 아담 해와와 같은 두사람을 축복할 한날을 고대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천신만고 역사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치고 거쳐오면서, 민족이 지쳐 떨어지면 붙들고 또 붙들면서 4천년 역사가 지난 후에 예수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를 세워 하나님의 4천년의 슬픔을 털어놓고 4천년의 고충을 털어놓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대우주의 창조이념을 복귀 완성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책임자로 보내신 분이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창조이념을 완성시킬 대표자로 보냈던 분이 예수였다는 거예요.

7-299
예수의 형편
예수는 태어나서 이 땅 위의 고난의 길을 다 거쳐야 됩니다. 최악의 고난의 길까지도 죽지 않고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굿간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 땅 위에 아무리 불쌍하고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역사이래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섭리는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하의 자리에서 태어난 예수는 자랄 때도 사랑받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의 30여년의 생애에는 무한한 슬픔이 사무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요셉 가정에 태어났지만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란 말입니다, 의붓자식. 요셉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 딸을 기르게 될 때, 예수를 등한시했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의붓자식으로 자란 예수였습니다. 동생들한테도 천대를 받고 자란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정적으로도 의지할 부모가 없었고 가정적으로도 안식할 수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늘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서 자랐습니다. 또 심정적으로는 미래의 소망의 심정을 갖고 있는 예수였던 연고로, 그러한 환경에서도 민족과 국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운명에 처한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자리를 원망할래야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은 무슨 연고인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모시는 아버지는 4천년 동안 이런 억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고, 불효의 역사를 거듭해 나온 선조의 잘못까지도 대신 책임지고 탕감복귀해야할 사명을 지닌 자신을 것을 알았기에, 그는 반대하는 무리를 대하여 원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대등한 심정을 가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반대하는 민족을 축복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를 죽으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만 바라보니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의 예수, 죽기 전 예수의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는 예수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어떠한 사람을 사랑합니까?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몰라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은 어떠하겠느냐(눅 12:49-50)”고 누구한테 말씀하셨습니까?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의 상대가 없었던 예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4복음서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의 상대를 찾지 못한 예수였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천당가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신다고? 천만 부당하다는 사실, 말씀은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심정과 실체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슬픔을 내적으로 주고받아 가지고 이 슬픔을 위로해 준 예수 앞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 딸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땅 위에 나타났는데, 그 예수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 딸은 어디 갔는고, 생각해 봤어요?

7-301
예수를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 있었던고. 그들만 잘 먹고 재미있게 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의 후손들까지, 그 가정 그 민족 그 세계 전체를 대신하여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뇨.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셨으니, 그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 딸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이 아들 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인 예수였기에, 예수와 같은 아들 딸을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였기에 멸망을 예고하여야 할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상에 쓰러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심적 동기가 하늘에서부터 출발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도들은 예수의 제자만 되어선 안 됩니다. 예수의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품고 하나님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것을 유업으로 맡기고 안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예수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정할 수 있고, 모든 이념을 맡기고 축복할 수 있는 예수의 심정에 사무친 아들 딸은 어디 있느뇨? 이러한 아들 딸이 이 땅위에 나타났다면 재림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2천년이나 걸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아들 딸 봤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믿고 죽어간 사람은 있었으나, 예수의 심정을 알고 예수의 실체를 믿고 죽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했는데 무얼 믿으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세상과 같이 사랑하는 독생자,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 세상,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믿으면 천국은 문제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다 보아도 그 내용입니다.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고 독생자를 세상 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것, 영원히 영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악된 이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줄 아는 자, 또 독생자를 세상과 같이 사랑하는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강도입니다, 강도.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자기의 몸보다도 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으니, 자신을 주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는 알았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이니, 세상 앞에 서야 할 자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자기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세우기 위한 3년 공생애였어요. 3년 동안 세 제자를 아들 딸 같이 만들기 위하여, 12사도를 참다운 직계의 아들 딸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에서 탕감복귀역사를 배워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노아 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 하나님,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3대를 세워서 섭리 하신 것과 같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이 3수를 찾아 나오는 천적인 복귀의 원칙에 따라 믿음의 세 아들을 세워야 할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다 버리고 가더라도 이 세 제자는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동산까지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고, 골고다 산정까지 같이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슬픈 역사는 여기서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7-303
세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자 했던들
만일 세 제자가 예수와 같이 죽고자 했던들, 예수는 승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이룹니다. 성신이 오고 믿음의 아들 딸이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신이 땅 위에서 영적으로라도 기반을 잡고 뜻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없는 말을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좋아요.

땅을 구하러 오신 예수가 왜 승천하고, 어머니신인 성신이 무엇하러 예수 대신 땅 위에 오시는가? 배반한 땅. 이 땅은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해와 곧 어머니 때문에 타락했으니, 이 타락한 땅의 죄를 씻는 일은 어머니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신인 성신과 오늘 믿는 신자들은 뒤넘이치면서 사선을 넘어 하늘에 계시는 예수를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역사 위에 사랑할 수 있는 예수를 보냈으나, 그를 붙안고 깊이 사랑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또 사랑하는 예수를 인간이 맞았으나 인간이 예수를 붙들고 사랑해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붙들려고 할 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막았느뇨. 이것이 서러움입니다. 하나님이 원통하시면 예수도 원통했습니다. 여기에 천지의 곡절이 맺혀 있으므로, 그것을 풀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천륜입니다. 그것이 맺혀 있는 것을 해결해 놓고 대하고 보아야 할 하늘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의 대신 존재를 찾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예수를 후아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담을 생명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잃어버린 생명나무 대신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랑하는 그 예수를 세워놓고 믿는 사람 앞에서 자랑 한 번 해봤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 분을 찾고 있는 가정 앞에 가서 한 번 자랑해 봤어요? 오늘날 2천년 역사가 지났지만 어느 민족 앞에, 어느 세계 앞에 자랑해 봤느냐 말이예요, 못해 봤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쫓아내야만 했던 그 때도 하나님은 분하셨지만, 예수를 이 땅 위에 보내고서 죽이고 또 다시 보내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은 더 분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들의 사명자로 보냈지만 그 사명을 완결 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이 기뻐할 수 있는 한날을 예수 당시에 못 가졌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한 시간, 6천년 원한의 심정을 터놓고 하나님과 혹은 앞으로 오시는 주님과 아들 딸의 인연을 맺는 날,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7-304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여러분,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만일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예수가 독생자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 앞에 독생녀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8절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2천년 역사는 신부 찾는 역사입니다. 신부 찾는 역사예요. 그걸 부인하겠어요? 신부 찾는 역사입니다.

예수는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참다운 딸의 모습이 없으니 하나님의 뜻을 못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역사는 딸 찾는 역사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앞으로 싸우게 되는 것도 이 문제 때문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딸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해원의 그날은 어떠한 날일 것인가? 어린양잔칫날이라 하였습니다. 일천 남자 중에 택한 한 남자로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의 한신부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성신이 와서 2천년 동안 이 지상에 해야 할 것은 신부를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축복해 주신 것은 아담 해와만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후손까지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후손이 있어요? 예수가 사랑할 수 있는 아들 딸이 있었습니까? 만일 예수가 `이는 영원무궁토록 사랑할 나의 아들 딸이요, 나의 직계로다’할 수 있는 아들 딸이 있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죽어 가신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 뜻을 계승하여 땅 위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실 때 지상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예수가 하나님 앞에 아들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오시는 주님 앞에 참다운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예요?

7-305
세 가지 해원해야 될 것
땅 위에서 효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무릇 효자가 되려면 부모를 잘 봉양함은 물론이요 자식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하고, 아무리 훌륭한 무엇이라 하더라도, 부모 앞에 모든 것을 갖추어 드렸더라도 부모가 바라는 자식을 갖지 못하면 효자가 못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앞에 역사적인 효자로 탄생하셨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갖추고 다 이루었다 하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자녀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예수님이 왜 수고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하여 미칠 듯이 수고하시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도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미칠 듯한 심정을 갖고 30여년의 생애를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 가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2천년 동안 미칠 듯이, 미칠 듯이, 사탄만 없으면 벌써 미쳤을지 모릅니다. 미칠 듯이 이 땅 위의 인간을 고대하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성경 말씀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예수의 그 심정만 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다 능통했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못 간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일 슬픈 것, 제일 분하고 억울한 것, 제일 기뻐하시는 것, 이 세 가지를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14만 4천 무리에 들어가겠다고, 혹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를 해원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제일 슬펐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분하고 억울했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기뻤던 고비가 어디뇨? 슬프고 분한 고비는 나와 있지만 기뻤던 고비는 찾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친구가 되고 누구보다 가까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 가지고 그것을 붙들고 위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의 친구가 되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하고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다면,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나도 그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4천년 동안의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못하고 가셨습니다. 내가 세상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슬펐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기쁨을 아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또한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고 계시는 수고의 역사노정 위에도 가담되어 있으니, 우리도 거기에 가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이뇨? 아들 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요, 아들 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것이 고통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릴 만한 사랑의 심정으로 아들 딸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서부터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위하여 미쳐야 됩니다. 미쳐야 돼. 어느 정도까지? 세상의 그 어떤 부부가 사랑하는 이상 미쳐야 됩니다. 내 뼛골이, 내 생명이 여지없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위한 충절의 심정의 변할소냐, 그대를 위한 흠모의 심정이 변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밥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예수를 위해서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럴 게 아녜요? 예수 믿는다는 사람 중에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애달픔과 굽이치는 서러움이 서려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구경하러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직계의 자식은 못되는 것입니다. 직계의 자녀는 못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허덕여 나오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의 역사를 거듭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307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려면
여러분, 진정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코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코 땅 위의 어느누구의 위로로도 막을 수 없는 서러움이 여러분의 가슴에 움직이고 있습니까? 어떠한 위로, 어떠한 사랑으로도 막을 수 없는 슬픔이 여러분의 마음 몸에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러한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무엇을 갖다 준다 하더라도 아들 딸이 안 됩니다. 아버님만 생각하면서 살고, 살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달음질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활 속에서 생애노정에서 사라지지 않아야만, 여러분이 그분의 아들 딸이 될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로잡혀서 하나의 막대기를 붙잡고도 눈물이 앞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물이 그런 해원의 한날을 고대하면서 탄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 숙여 무지한 인간이라 몰랐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추상적이 아닙니다. 혹시나 그러한 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동지를 바라보면 그를 붙들고 `너도 우리의 형제로구나’하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야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외롭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산천을 바라보면 산천에도 하나님의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흐르는 물을 보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눈물이 어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누운 자리도 하나님의 눈물바다요 골고다의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마음을 갖고 `골고다 산상에서 주님께 십자가를 지게 하셔야 했던 아버지시여!’ 하며 눈물 짖는 아들 딸, `예수는 죽어 땅 위에 한을 남기고 가셨지만, 나는 죽지 않고 실체로서 이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할 수 있는 아들 딸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6천년 역사는 사랑하는 아들 딸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에게 빚을 진자요, 6천년의 하나님의 눈물의 결정체요, 골고다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산 나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시대적인 죄를 탕감하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벌리고 들어갈 때, 아버지께서 친히 붙들고 `오,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시며 아버지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기쁨과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라야만이 아들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요 그러한 예수였다는 것을 아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 딸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아들 딸들을 하나님은 너희가 고대하던 주인이요, 내가 찾던 아들 딸이라며, 사탄세계 앞에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 앞에 늠름히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들 딸들이 나타나야만 하나님은 비로소 6천년 수고를 잊어버리고 하늘땅을 맡기고 안식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슬픔의 역사를 붙들고 예수가 울었고 예수가 죽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아버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있다 할진대 고이고이 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바랍니다.

7-308
기 도
아버님! 황공 망극하옵나이다. 알고 보니 이 길은 가기에 어마어마한 길이요, 느끼면 느낄수록 가슴을 쥐어뜯어도 그칠 수 없는 슬픈 길임을 알았습니다.

하루도 아니요 몇 년도 아닌,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이것들을 찾아 오시던 아버지시여! 이들은 아버님을 얼마나 미칠 자리에 놓아 두었으며, 아버님을 얼마나 분한 자리에 머물게 했으며, 또 저희들은 얼마나 불효의 자리에 머물렀는가를 깨닫는 이 시간에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인연을 맺기 전에는, 세상의 것을 가지고 울고 불고한 저희들, 죄인 중의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다 몰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요, 우리가 모셔야 할 예수는 이러한 예수요, 우리는 그런 아들 딸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만이라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찾아온 저희들의 소망이 무엇이옵니까? 옷 잘 입은 자를 찾아온 것도 아니요, 권세 있는 자를 찾아온 것도 아니요, 욕망을 위하여 온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아버님의 사랑이 그리워, 아버님의 정이 그리워, 아버님의 인연이 그리워 왔사오니, 아버님, 아버님의 눈물이 있다 할진대 저희도 그 눈물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고통이 있다 할진대 저희도 그 고통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쁜 역사를 찾아 헤매는 왕자가 되지 말고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대신 책임지고 탕감하는 왕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자리에서 승리한 아들 딸, 하늘 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딸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은 사랑하는 아들 딸들을 세우기 위한 목적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 앞에 맡겨진 책임을 다하고 맡겨진 의무를 감당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효자 중의 효자, 효녀 중의 효녀, 충신 중의 충신이 될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어, 우주 전체를 동원하여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는 기쁨의 한날이 올 때까지, 아버지, 이들을 품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