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9 to 7-284: 하나님의 가정에서 살 식구들

하나님의 가정에서 살 식구들
1959.09.27 (일), 한국 전본부교회

7-259
하나님의 가정에서 살 식구들
마태복음 12:46-50

[기 도]

아버님, 저희들은 여러 곳에서 모여 왔습니다. 여러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고로 원인과 근거가 여러가지요 갖가지 사정으로 엉클어져 오늘날의 저희 자체들이 빚어졌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몸의 모양은 천태만상이요 각양각색이오나, 참을 그리고 최대의 선을 바라며,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본연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저희들이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외모의 형태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중 깊이 스며있는 본연의 자체를 일깨워 아버지를 흠모하는 마음을 찾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심중으로 느끼고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인정하고 실증하지 못할진대, 오늘 여기에 참석한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과 시대적으로 복잡한 싸움의 노정을 거쳐 오시면서 바라시는 소망의 모습을 찾고자 수고하신 아버님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내가 나 홀로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가 이 땅 위에 태어날 때는 상하 전후 좌우의 인연을 중심삼고 태어났습니다. 이 인연들은 무엇인지 모르게 완전무결한 하나의 목적의 가치 혹은 전체적인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도록 저희들 재촉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아의 모습을 중심삼고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선의 역사가 천륜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앞에는 소망의 세계와 좌우에는 우리의 동지와 민족과 동포가 있음을 느껴 본연의 심정을 붙들고 이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상하 전후 좌우와 인연맺고자 허덕이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이것이 그리워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들이 시대적으로는 용납되지 못하고 생활적으로 반대받는 노정을 걸었다 할지라도 끝날에는 기필코 천상 앞에 세워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그런 길을 소망하며 그런 길을 찾아 헤매다가 이 자리에 왔사오니, 아버지, 이제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마음으로 아버님의 심정을 고대하고 흠모하오니, 아버님, 속상한 일이 있으시면 저희에게 체휼시켜 주시옵고, 처참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으시면 저희의 몸을 통하여 실증시켜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으로 실증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실존을 느끼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여 감사드릴 수 있는 소망의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악하고 죄의 쇠사슬에 매어 있을지라도 하늘은 가엾이 여겨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체휼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면 갈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알면 알수록 탕감할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무거운 짐을 진 자 중의 무거운 짐을 진 자임을 어떤 주의 주장이나 자기의 인식을 청산하지 않고는 천성에 들어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이미 왔사오니 온 걸음이 헛걸음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연이 되어 만났사오니 이 만남이 무의미한 만남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인연이 인간적인 인연이 되지 말고 본성적인 인연, 심정적인 인연, 생명적인 인연으로 연결지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내 무슨 말을 하오리까. 아버님의 심정만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아버님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사오며, 아버지의 성상을 실제로 느낄 수 있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너, 나, 우리들은 형제인 것을 느끼고 아버지를 대신한 식구들이 아버지 앞에 하나의 제단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삼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모인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27억 인류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린 수많은 당신의 아들 딸들을 축복하여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악과 대결하여 싸워 나왔으나 싸움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싸움을 감당해야 할 것을 알고 하늘을 대신한 용사로서 내적 장비와 외적 장비를 완전하게 갖추어, 인류 앞에 민족 앞에 나설 수 있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는 봉독한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의 서글픔을 보았사옵니다. 예수님은 요셉가정에서 태어나 부모 형제와 친척, 그리고 동족을 가졌지만 부모 형제가 없는, 친척과 동족이 없는 불쌍한 행로를 걸으셨사옵니다. 아버지시여! 그러한 예수님의 슬픈 사정을 저희 자신과 관계를 지어 주시옵고, 기필코 밝혀야 할 천적인 내용들을 이 시간 밝혀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나이다.

이 몸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드리기를 원하오며, 전체를 아버지 것으로 귀일시키기를 원하옵니다. 아버님, 친히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261
말 씀
우리에게는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처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하여도 머무를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좋으나 나쁘나 식구가 있고 자기가 머무를 수 있는 가정이 있습니다.

7-261
이상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마음
여러분은 이 가정과 더불어 살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가정을 중심삼고 식구와 같이 희로애락 하는 생애노정을 지금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가정이 자신과 영원히 인연되는 가정인 줄 알고 있지만 어느한 때에 가서는, 그 가정 그 식구도 여러분과 인연이 끊기게 됩니다. 여기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영원한 세계에까지 그러한 인연을 갖고 간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가정을 중심삼고 소망 혹은 행복을 꿈꾸고 있으나 그 소망과 꿈은 내가 살다가 운명하는 그 순간 그치고 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연결되어 또 다른 어떠한 행복과 소망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것인가 암담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래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인간이 지향해 나가야 할 크나큰 선의 목적세계를 향하여 나가도록 이 시간도 우리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역사와 더불어 움직여 나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마음의 움직임을 볼 때에 이 마음은 선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기필코 역사노정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사람 저사람이 그 마음을 통하여 이구동성으로 지금은 끝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끝날은 오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세계 인류는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행복하다기보다는 불행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불행의 세계가 끝나는 때가 끝날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그리워합니까? 행복, 혹은 소망적이고 자유로우며 평등한 이상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에서는 그 세계를 그리며 오늘 이 시간까지 생애를 걸어온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참된 마음으로 고대하고 참된 마음으로 바라는 모든 것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안 된다면 하늘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못하였고 또 몸을 자극 시키는 행복한 생활환경에서 산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식구, 내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바라보는 부모, 형제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행복의 보금자리가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종교적인 명사를 빌리면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여 이루어진 세상이요 타락하여 이루어진 종족, 가정, 식구가 어찌 본연의 심정이 추구하는 행복의 이념과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 시대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솔직한 말입니다. 어떤 남녀, 그 누구도 이 시대는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거예요. 거짓된 사회가 지나가고 거짓된 부모가 지나가고 거짓된 형제가 지나가고 거짓된 부부가 지나가고 거짓된 자녀가 지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깊이깊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몰라보고, 부모는 부모끼리, 자녀는 자녀끼리, 형제는 형제끼리, 동무들 혹은 민족이 끼리 끼리 좋다고 하는 모든 것은 산산이 부셔져 나가고 맙니다. 그렇게 될 거예요.

여러분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사실들을 보고 듣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전통적인 이념은 날이 갈수록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심정으로 바라는 목적지는 천륜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천륜은 목적지로 향하여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는 연고로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역사를 거쳐 최후에는 정적인 혁명시대까지 나갑니다. 의식의 혁명시대는 지나고 정의 혁명시대가 옵니다. 인간들 서로의 감정까지도 믿을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을 꿈꾸는 자는 한날 슬픔을 당할 것이요, 여기에서 안식처를 찾는 자는 어느 한날 슬픔에 봉착하게 될것입니다. 이런 결론은 자연적으로 나옵니다.

7-263
인류를 식구로 맞이하시려는 하나님
한의 세계에 있는 여러분, 이 원한의 때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이것 아닌 새로운 그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발걸음을 돌이켜, 여러분의 마음을 돌이켜, 느끼던 감정을 돌이켜 그 무엇이 나와 인연되기를 고대하는지, 그 무엇이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믿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 심중을 기울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나와 직접적으로 인연맺게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 기준을 나의 생활면에 연결해 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만일 이런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음은 자극적인 현실의 고통스런 환경을 피하고 이상을 향하여 나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라도 이 현실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을 지향하고 고대하고 재촉하는 이 마음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마음의 명령에 따라 해야 합니다. 역대의 수많은 선지들도 그 마음에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 마음에 응하여야지 누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항거할 수 없는, 스스로 응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자신들임을 명심하고 인정한다 할진대,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상세계가 아니며, 여러분이 꿈꾸고 소망하는 이상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건 왜?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느낌과 소망과 인연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가 점점 가까와오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공포가 점점 가중되어 들어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세상이요,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노정을 수십년 동안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에게 새로운 그 무엇을 주입시켜 인간들을 새로운 역사로 내모는 천륜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심적인 현상을 보아서 하늘이 있고 천륜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하나님이 이땅을 창조하실 때에는 어떠한 목적과 이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던고? 그것은 선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선한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자유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자유동산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지만 이러한 사람, 즉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족, 하나님의 식구라는 인연을 맺고 간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고?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살 수있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류는 타락했을망정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그 가정의 아버지로서 또는 인류의 아버지로서, 인간이 그 가정의 식구로서 살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시고, 나는 그 가정의 식구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있다면, 소망의 자체요 이념의 자체요 생활의 자체요 행복의 자체인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완결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기 위하여 지으셨다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온 신경을 인간에게 기울이고 6천년 기나긴 시련의 세월을 거쳐오면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직접적인 하늘의 가족, 즉 식구의 인연,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무수한 수고의 고비를 넘고 넘어, 오늘도 이 길을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가정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의 식구로서 등장하여 그 식구의 위신과 가치를 아버지 앞에 나타내는 그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날이요 재림의 날일 것입니다.

7-26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
우리 인류는 타락한 연고로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타락한 부모는 있으나 본연의 부모를 못 가졌습니다. 그러니 뭐 선하고 어떻고 해도, 갖출 바를 다 갖추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인격자라 해도, 그 역시 타락한 부모의 혈족입니다. 큰소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가졌다 해도 헤치고 보면 여전히 불안과 불만이 그 심정에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탄식은 무엇이며 온 피조만물의 탄식은 무엇이뇨. 인간들이 하늘가정의 식구로서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주의 탄식이예요.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는 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해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자녀로서 인류전체가 형제가 되어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한날을 맞기 위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그렇고 우리 인간의 마음속의 목적이 그렇다 할진대, 그 목적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필코 그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할진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하늘과는 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는 한 하나님이 우리의 심정을 보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인연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하늘의 한이 지상에서 풀어질 것이고 천상에는 지상의 원성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순간 하늘 땅을 하나로 연결지을 수 있는 가정적인 이상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막연하나마 하늘의 말씀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참형제를 잃어버리고 참부부와 참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이를 찾기 위하여 나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참부모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타락된 우리가 참부모를 찾아나아가는 복귀노정에서 어떠한 책임을 져야되며, 어떠한 각오와 신념을 갖고 나가야 되겠느냐? 우리는 마음으로 본연의 부모의 말씀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본연의 부모의 모습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 부모가 어떻게 생겼냐는 거예요. 또 더 나아가서는 본연의 부모의 마음이 어떠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본연의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았습니까?

이러한 하늘 가정의 한 식구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달음질쳐 나가는 우리 앞에, 하늘은 무엇을 갖고 찾아오시느뇨?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말씀을 갖고 찾아오십니다. 인간은 소원은 무엇이뇨. 몸과 마음으로 참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여 몸과 마음이 행동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붙들고 그 아버지가 어떻다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아버지의 이념을 알고 싶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겁니다. 또 그 아버지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통해 시대 시대 혹은 세기 세기마다 새로운 말씀을 들려 주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하고 앞으로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뒤넘이치는 혁명과정을 거쳐서 세계형으로 벌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타락한 우리 인간은 먼 거리에 있는 연고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직접적인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들을 세워서 중간 연락 혹은 대신 역사를 하면서 지금까지 하나님과 인간들을 접선시켜 나왔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천사를 심부름시켰고, 신약시대에는 아들을 심부름시켰고, 이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시대를 향하여 역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갖고 합니다. 그러려면 이 말씀에는 심정이 개재되어 있어야 되고 이 말씀을 통한 실체가 있어야 되는것입니다.

7-267
하늘 가정의 중심인 구세주
타락한 인간들은 말씀을 그리워하는 때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하늘은 역사와 더불어 이 말씀을 중심삼고 말씀을 실천할 줄 알며,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여 살고 싶어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재촉하여 나왔습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천적인 실체인 하늘이 보내신 아들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갖고 오셨던 분이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어떠한 존재이신가? 타락으로 잃어버린 인류의 참아버지가 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말씀의 실천적 기반 위에 세워진 말씀의 실체로서, 아버지 대신 존재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도의 중심이요 마음의 중심이요 심정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예수가 아버지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만민의 구세주이며 하늘 땅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모습을, 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더듬어 나가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무한한 이상을 품고 오셨습니다. 그가 바라던 소원이 있었다 할진대,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창조이상,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소원을 품고 개인의 입장으로 나타나실 당시의 환경은 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뜻 앞에 서지 못한 환경은 예수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는 거기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심중에 품은 지조만은 땅 위에 남기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나의 자녀라는 인연을 강조하셨습니다. 부모는 참아버지와 참어머니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격으로 오신 분이 성신입니다.

이 땅 위에서 영육을 합한 실체로서 아들 딸을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한날을 갖지 못하고 간 것이 예수의 슬픔입니다. 해야 할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천국 가정의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간 것이 예수의 한입니다. 천국 가정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천국 가정의 식구를 세울 수 없었고, 식구를 중심삼은 종족, 종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국가적 기반을 갖추어야 했던 유대나라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끊겨버리고, 예수는 유대교단으로부터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늘도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반역자로 몰리신 예수였습니다. 나중에는 12사도들에게까지도 배반받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땅 위에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혈족도 인연맺지 못하고 가신 것이 예수의 서러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하시던 하나님의 가정을 건설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민족도 세울 수 없고, 민족을 세우기 전에는 나라도 세계도 세울 수 없는 연고로, 가정을 찾기 위하여 싸우던 예수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실 때에, 인류 앞에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명제를 남기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가정이 하나님나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7-268
말씀을 통해 실체를 깨닫는 신앙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린양잔치는 무엇이뇨? 그것은 6천년 전에 하나님이 세워야 했던 참부모의 모습을 끝날에 다시 세워 가지고, 여기에 다시 한번 형제의 인연과 자녀의 인연을 갖추어 놓자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소망이요 우리를 이끌기 위해 6천년 동안 역사와 더불어 고생해 나오신 하나님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았을진대 우리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붙들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유대교단은 예수를 모실 수 있는 시대적인 헤택권내에 있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예수를 모시어 만왕의 왕으로 군림시킬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에 있었으되, 유대백성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유대교단도 예수를 배척하고, 택함받았다고 하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자처하던 모든 사람들도 예수를 배반한 연고로, 예수님이 소망하시던 상대적인 기준은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끊어지니 유대나라의 역사도 끊어지고 유대나라에 내려오던 구약의 말씀도 다 끊어졌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울고 불고,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들의 한이요 슬픔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서러움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요? 이런 식으로 어떤 명사에 얽매어 사는 자신이 불쌍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가 와야 합니다. 그날이 소망의 날입니다.

여러분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예수께서 실천하신 행동을 스스로 찾아내어 행하고, 말씀을 붙들고 예수의 모습이 이런 것이로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재발견해야 돼요. 예수의 모습, 십자가 상에서 원수들에게 못박혀 피 흘리는 처참한 자리에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모습, 그의 심중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찾아나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는가. 기독교가 예수의 말씀만으로 완결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망합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말씀하기 위하여 애쓰시던 예수 그 자체와 애달피 말씀하시던 예수의 심정을 붙들고 그와 인연을 지어 세상 것을 청산한 후에라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타락한 우리들은 참부모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의 참뜻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씀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을 2천년 동안 연구했지만 모릅니다. 몰라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씀을 통하여 행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행함과 하등의 관계를 갖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말씀의 목적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나온 기독교라면 이 기독교가 왜 오늘날처럼 되었겠는가.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의 목표와 말씀을 들은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끝날에는 성령을 붙들고 밤을 새워 기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찾아오는 데는 어떻게 찾아올 것이뇨. 말씀을 하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중에 실체를 갖고 찾아오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와 본연의 말씀이 주장하고 바라는 목표와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떨어져 있을수록, 그 거리만큼 예수님께서는 다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을 신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천적인 혁명의 힘이 나를 격동시키고 죽음의 골짜기도 늠름히 넘어가게 할 수 있는 내적인 충격의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행동적인 주체로 설 수 있느냐를 스스로 판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이제는 그리워해야 됩니다. 2천년 동안이나 말씀을 그리워하였으니 이제는 말씀을 그리워는 동시에 그 말씀에 부합된 행동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이렇게 갔으니 나는 이렇게 이렇게 가야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누구뇨. 우리의 참부모입니다, 참부모. 그분이 말씀을 하시고 친히 행동하셨으니 하신 그 행동을 그리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리워하고 행동을 그리워하고 그 다음엔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부모 이상 그리워서 못견디겠다 해야 합니다. 밥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 모양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 얼굴을 보고 싶어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7-270
그리움에 사무쳐 우는 자리에 나타나시는 아버지
상봉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말씀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워하는 자리, 오직 그리워하는 자리에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의 손발은 어떻게 생겼을 것이뇨? 그의 눈과 코의 모습은 이러할 것이어늘, 그 모습을 만지고 싶고 그 모습을 더듬고 싶은 마음, 이것이 최후의 여러분에게 있어서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를 결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말씀을 전해 주던 예수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없어요. 만나는 데는 예수의 이름 불러서 되는 구원이 아니예요. 예수구원입니다, 예수구원. 실체적인 예수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이렇게 보고 싶어 허덕여도 볼 수 없는 예수, 다시 오마 하신 그 예수는 왜 안 오시느뇨. 사도들 앞에 나타나마 하신 그 예수는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으시느뇨. 이게 무슨 곡절이뇨. 수많은 사도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는데 못 나타나는 곡절이 무엇이뇨. 해가 가고 세월이 지나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의 모습이 그리워서 허덕이는 자가 있다 할진대 기필코 그를 상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고아입니다. 땅 위에서 아무리 잘 사는 가정환경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를 하나님이 볼 때는 고아입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잃어버린 자요, 참형제를 잃어버린 자요, 참부부, 참자녀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고아와 같은 우리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이니 편할 리가 있어요? 우리의 마음은 재촉합니다. 무엇을 재촉하느뇨. 내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처자를 찾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을 돌고 또 돌아도 이것을 찾을지 말지 하다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니, 어디 가서 찾는단 말예요?

그러니 이제 해결점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사무쳐 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찾아주고 주님이 찾아줄 수 있는 길이 있다 할진대,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험산준령도 개의치 않고 나는 가겠노라는 마음이 사무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겟세마네동산과 골고다의 길을 찾아가셨습니다. 찾으시다가 안 되니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본연의 부모를 상봉하는 한날을 고대하는 우리들, 그 모습을 붙들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모습을 붙들고 주라고 할 수 있는 그 한날이 그리워서 여러분은 몇 시간이나 울어 보았습니까?

이제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딸보다도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그분이 그리워 못살겠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고, 그분의 손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매 나와 인연이 맺어져 있는 그분을 만나 몸 마음을 다 드리고 그의 품에 안기어 지난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위로받을 수 있는 그 한시간을 맞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찾아나가는 최고의 소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행동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그 한 자체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 자체를 그리워하고 난 후에는 그 마음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 마음을 그리워해야 돼요.

옛날 유대교 신자들은 예수 그 자체는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그립고 또 그립고, 보고 또 보고 싶은 부모와 같이 그를 대한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땅 위에 만민의 아버지, 만왕의 왕으로서 보내실 때, 그렇게 천대받기 하기 위해서 보내셨겠어요? 역사 이래 하나의 중심존재로서, 만민의 아버지로서, 만백성이 그분을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고,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운 존재로 맞아 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분한 일 중의 분한 일입니다. 자식을 위해 피 살을 뿌리며 찾아오셨으나 자식들이 총칼로 대했으니, 이 어이 하늘의 기쁨으로 남아지겠습니까? 하늘의 슬픔이 있다면, 예수의 죽음 이상 슬픈 일이 없습니다.

7-272
말씀보다 더 중요한 실체
예수님은 하늘의 아들로서 유언을 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을 붙들고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도들이 예수의 친아들딸이 되었던들, 말씀을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가시면서도 유언을 하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마음에 사무친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가신 예수였어요.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불효중에 이 이상 불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저끄러진 죄상을 벗기기 위하여 회개해야 됩니다. 만민은 부모를 죽인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는 무엇하는 것입니까? 아버지 죽인 죄를 뉘우치고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자식이라도 진정한 선의 그 아버지를 내가 죽였다는 느낌이 들 때 눈물로써 회개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알든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과 예수는 그렇다는 거예요.

본연의 가정이 그리워, 그 자녀와 그 형제와 그 식구가 그리워 6천년 동안 뜬눈으로 일을 하시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걸어오신 하늘의 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30여년의 생애 동안 어떠한 역경에 부딪쳐도, 외로운 겟세마네 기슭에서 밤을 세워 기도하면서도 그 심중에 생각한 것은 본연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본연의 자식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눅23:34)”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러 온 부모의 입장에 있는 몸이니, 이런 길도 응당 가야지’ 하고 생각하셨던 예수였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가히 알 만합니다.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수를 훌륭하다고 알고 하나님의 아들로 모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쌍하고 측은한 예수였습니다. 역적의 괴수요, 배반자의 괴수요, 이단자의 괴수로 취급된 예수였습니다. 역사에 알려진 예수는 훌륭하였으나 실제로는 측은하고 불쌍한 예수였던 것을 알아요? 우리는 역사상에 나타난 훌륭한 이름의 예수 말고 실체로 나타난 그 예수를 찾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끝날 성도의 책임입니다.

불타는 부모의 심정으로 모든 사정을 넘고 모든 곡절을 넘어서 아들 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던 예수였습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수고하신 예수님과 그 부모의 고생을 염려하고 그 모습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아들딸이 상봉하는 날은 하나님이 입회하여 축복할 수 있는 날이예요.

이제 남아진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도 실체보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신랑이 신부 앞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말씀의 주체되시는 실체가 나타날 때 편지라는 문서를 가지고 의논하겠습니까? 지금 때는 말씀을 중심삼은 행동을 완결지어야 할 때입니다. 사탄들을 정복하여 세계를 하나님의 품에 돌려드리는 행동을 해야 할 때예요. 그래야 실체가 나타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딴 것이 없습니다. 예수 앞에 나가는 데 있어서는 내 아들딸이 방해되고 내 종족이 방해되고 딸린 것이 방해됩니다. 이리 걸리고 저리 걸리는 것들을 끊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혈족을 끊고 나가게 될 때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복을 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이 땅 위에 육적인 혈족을 끊기 위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싫다는 자는 예수 못 만납니다. 절대 못 만납니다.

7-274
아버지와 상봉하는 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 다시 오마 하셨기에 그 고개를 넘고 난 후에 그 심정의 동반자가 되었고, 그와 같이 죽을 수 있고 어려울 때 같이 어려워한 사도들이었기 때문에, 12사도를 위주로 하여 70문도 120문도는 예수앞에 설 수 있었고 죽음의 담을 문제없이 넘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의 학정하에서 갖은 학살을 당하였으나 그것을 넘어섰기에 그 로마를 정복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기독교는 세계를 위하여 무조건 희생의 제물이 되어 나왔기에, 명실공히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사탄세계를 대하여 하늘의 주권을 세울 수 있는 때입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실체를 대신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총행군해야 할 때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처럼 말씀시대가 지나고 실천시대가 지난 후에 상봉의 한날이 벌어지거늘, 상봉의 한날이 벌어진 후에야 천국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상봉하여 그의 모습이 내 모습이요, 그의 어려움이 내 어려움이요, 그의 상처가 내 상처라고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그의 마음이자 내 마음이요 그의 심정이자 내 심정이라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천국 가정이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서 종결되어야 천국 가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에 계시고 자녀의 입장에 있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름만입니다. 이름만, 양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연고로 여러분들은 이제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예수를 만나야 되겠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못 만나면 산중에라도, 산중에 없으면 죽음 가운데라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산중에도 없고 기도 가운데서도 못 만나면 죽음 가운데라도 있을 것이니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예수께서도 거치셨습니다. 밀실의 노정을 거쳤고 산중의 기도시간도 거쳤으며,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서라도 아들을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각오 밑에서 찾아나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고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분을 상봉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이뇨? 그분을 대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 것인고? 죄를 지은 우리 인간들이 주님을 만나고 참부모님을 만나는 그 시간에는 아버지를 부르고 주님을 부르면서 `나는 이러이렇게 싸워나왔고 이러이러한 예물을 가졌왔나이다. 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 하며 위로해 드려야 됩니다. 위로해 드려야 돼요. 여러분은 뭐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시면 나를 중심삼고 천국이 이루어져서 세상이 전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없어져야 됩니다. 내 소원, 내 기대, 내 소망은 다 버려야 됩니다. 만난 그날부터 그의 마음을 모르니 그가 명하는 대로, 그가 분부하는 대로 나설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내가 이 길을 찾아나오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들었거늘,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자녀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는 뼈 살에 사무친 마음을 갖고 그를 위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6천년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신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그 마음을 이자식은 아나이다. 이 자식은 아나이다’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먼저 칭찬 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찾아갈 때는 묵묵해야 합니다. 부활 직후에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 앞에 나타날 때 묵묵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그는 막았습니다. 인간이 청산해야 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뇨. 역사적인 허물입니다. 그것을 청산해야 했던 것입니다. 역사를 걸어 가지고 `아담가정은 이러이러했고, 노아가정은 이러이러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가정은 이러이러했고, 모세를 거쳐 역대 선지선열들을 이러이러했고, 예수님은 이렇게 가셨사오니, 이게 다 저의 죄이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사죄를 해야 됩니다.

7-276
과거와 현재를 청산한 후에 세움받는 미래의 주인공
만나는 그날에 역사적인 허물을 다시 한번 알아야 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시니 그 은사 황공 망극하옵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내 아들아’ 할 수있고, 아버지와 아들은 상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가 선의 가정을 향하여, 천국 가정을 향하여 가는 길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만일 상봉하게 된다면 그 순간에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예수님 혹은 하나님에게는 역대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 슬픔을 샅샅이 드러내어, 6천년 동안 마음에 거리를 두고 혹은 심정에 거리를 두고 투쟁하며 혈투전을 거쳐 나오던 역사의 피어린 자국 자국을 더듬어 `이것은 나 때문이요, 우리 민족 때문이요, 내 식구때문이요, 내 형제 때문이요, 내 처와 자녀 때문이오니, 아버지, 황공하옵니다’ 하고 이럴 줄 알아야만 됩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어떻게 하셨고, 타락은 어떻게 되었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 중 아벨의 제물은 왜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왜 안 받으셨으며, 무엇 때문에 노아의 여덟 식구를 택하셨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은 왜 나왔으며, 야곱은 어찌하여 간교한 행동으로 에서의 장자기업을 빼앗았으며, 왜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택한 후 70식구를 만들어 애급으로 보냈으며, 왜 애급에서 400년 동안 고생하면서 60만 대중을 만들어 놓고 모세를 세웠으며, 왜 가나안 복귀를 위해 싸웠으며, 왜 이스라엘 선민권을 세우기 위하여, 그 주권을 세우기 위하여 싸웠으며, 왜 예수는 오셔서 죽으셨고 왜 다시 오셔야 되느냐,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될 게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 뜻을 알고 그 뜻 앞에 인간이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 시대적인 범죄, 미래적인 범죄상을 낱낱이 직고해야 됩니다. 끝날은 직고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 하나 직고하는 것인 줄 알아요? 천만예요. 자기 죄만을 직고해서는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으로서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역사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시대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미래의 죄상을 직고하면서 이것과 싸울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청산한 연후에는 미래의 새 나라의 새 주인공으로 천주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을 찾아나온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식구의 일원으로서 인정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 내가 믿고 있는 아버지는 이렇고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신데, 그 아버지는 이렇다 하는 것을 만민이 마음으로 옳소이다. 그 심정으로 옳소이다, 그 몸으로 옳소이다, 말씀을 통해 봐도 옳소이다, 그 말씀을 통하여 행동해 봐도 옳소이다 할 수 있는 내용을 변증해야만 되는 겁니다.

7-277
이상세계를 향한 마음의 추구
심판날은 무엇을 갖고 심판하느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의 기반으로 한 탕감복귀의 조건을 가지고 심판합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을 몰랐기에 예수는 붙들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막연하게 믿는다고 해서 천국 가요? 생각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와는 상관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접하여 암만 실천해도 안 돼요. 아무리 행동하여도 실체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어요. 왜?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잘못된 것을 청산해야 되겠습니다. 회개는 무슨 회개? 아담가정으로부터 6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하늘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그 시대 시대에 하나님이 바라신 섭리가 있었거늘, 그 섭리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그 모든 죄상을 오늘 내가 책임지고 회개하는 회개의 주인공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적인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인 죄상을 청산하시려는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인 줄 알고 그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자신의 죄상을 청산지어야 되는 거예요.

또 시대적인 하나님이니, 이 시대의 죄상을 청산지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죄를 모두 청산해 놓고, 미래의 새로운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그곳이,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살 수 있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아들딸을 중심삼고 역사상의 죄악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하늘 가정을 형성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하늘 가정의 아들딸로서 인정되어 영원무궁토록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믿을 필요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필요없습니다. 기독교 필요없습니다. 신앙이 필요 없어요. 그냥 살다 가면 천국이예요.

하나님은 소망의 때가 되고 나면, 6천년 묵은 역사를 다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서글픈 역사의 페이지 페이지를 뒤적뒤적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일대에 내 몸과 마음과 심정으로 해결 지을 수 있는 틀림없는 기준이로다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후에는, 과거에 다 청산한 누더기를 가지고 뒤적거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시대는 골동품 찾는 시대입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것을 찾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래오래 전, 6천년 전에 인간 조상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그 맨 처음의 골동품과 같은 것을 찾아 넘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는 골동품시대를 끊어버리고 또 허덕이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시대로 들어가야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새것이 나오면 때려 잡아먹고 삼켜 버리니 망할 세상입니다. 소망의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이상하는 그 세계는 새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새것을 추구하니, 그러한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은 가다가 가는 길을 자꾸 막습니다. 돌아서라, 옛 것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 마음 깊은 데로 돌아가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참선하라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나를, 본연의 마음을 찾아 들어가는 그 놀음을 해야 하는 것은 서러운 이 땅 위의 생활이요, 오늘날 이 땅 위의 현실이지만 옛것으로 돌아가서, 이것을 청산할 후에는 꿈에라도 과거를 생각한다는 일은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씨알맹이도 없이 비벼 버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새로운 이상세계와 새로운 소망에 취하여 살아야 합니다. 어떤 민족의 과거가 그래요. 로마문명은 희랍문명의 재판(再版)이었습니다. 고대문명을 연구하여 고대정신을 다시 끌어냄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현실과 부합시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소망의 기준이 못 됩니다. 지금까지는 옛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고 하늘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으니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새것입니다.

7-279
죄악사와 인연된 묵은 것을 버리고 들어가는 하늘 가정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은 옛것을 무자비하게 청산해 버리고 오늘날 새로운 왕자로 태어난 늠름한 모습을 자랑하고, 새로운 세계의 새것을 위하여 노래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됩니다.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탄세계에서 진을 치고 있던 누더기 보따리를 그냥 하나님 가정에 가지고 가서 쑤석쑤석하는 걸 좋아하겠어요?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겁니다. 그럴 거 아녜요? 그러니 대심판입니다, 대심판. 그런 종자도 보기 싫고 그런 이념도 보기 싫고 그런 무슨 주권, 그런 역사, 전부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대심판입니다. 새로운 소망에 불타 영광의 아버님을 추앙하면서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을 찾아 헤매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를 붙드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는 이상적인 모든 뜻을 파괴시키고 맙니다. 예수를 죽였습니다. 여러분들, 이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사조에 따라 민주와 공산의 이념을 붙들고 있는 것도 좋지만, 이것만을 붙들고 있다가는 또 새것을 망하게 합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신앙도 좋고 교회도 좋지만 그것을 붙들고 있다가는 또 새로운 것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잘 가늠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현실을 청산하고 미래의 보따리를 싸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의 하나님의 가정에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탄세계의 아들딸쯤으로 아실 겁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인 예수를 세워놓고 동생들이 형님이라 하는 말도 듣기 싫다는 겁니다. 왜 요셉의 아들이 예수 보고 형님이라 하느냐 말예요. 신앙노정을 거친 후에야,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심정과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몸과 예수의 행동과 예수의 말을 통한 후에야 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아들이라고 하는 말도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다 통한 후에라야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타락한 혈족의 모든 것을 생각만 하여도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독생자에게 재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이 지극히 사랑하는 어떠한 세계 일등 신부가 천성 앞에 불림을 받았을 때는 저 애가 아무개 딸, 아무개 조카, 아무개 누나, 아무개 무엇 하는 것 듣기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딸로 인정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딸이지 네 딸 될 게 뭐냐’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것만을 존중하는 견지에서는 이런 과정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그래요.

지긋지긋한 6천년, 피의 혈투전의 계속되어 내려온 비참한 역사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연장시켜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보기도 싫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내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목을 잡고, 하나님 앞에 가서 나는 지상의 아무개 아버지요 아무개 어머니라고 말도 말라는 겁니다. 나는 세상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았다고 말도 말라는 거예요. 죄악사와 더불어 인연맺은 것은 말도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연맺은 그것만 요구한다는 거예요.

7-281
하늘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자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이예요. 슬픈 하나님을 알아모시지 못하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 할진대,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고통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을 맡아서 지금까지 찾아나온 것만도 황송하고 고마운데,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고통까지 다 나타내는 자들은 전부 다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슬픔의 하나님께 차마 자기의 고통을 기도할 수 없어 혼자 우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아 주실 것입니다. `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크십니까?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수고를 제게 맡겨 주시옵소서’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그저 복 달라는 기도하는 사람들,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은사가 많은 하나님 사랑권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예요. 천상에 가보면 그래요. 여러분,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허언망언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 사람은 그렇게 알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저나라는 그렇게 안 돼 있어요. 천적인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높여 주겠다 해도 `황공하옵니다. 못 가겠습니다’하고 세 번 네 번 거절하는 세계입니다. 추켜달라고 하기 전에 `나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는 그런 세계예요.

오늘날 주인처럼 나와 가지고 권력 다툼하고 세력 다툼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역자, 그런 교단은 망합니다. 이제는 돌아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높아져도 도망가려고 하고, 위해 주려 해도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 통일 신도들, 외부의 핍박을 많이 받고 몰림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만 서러워 마십시오. 주 가신 길이 그렇고 아버지 걸으신 길이 그렇거늘, 하물며 불충한 죄인이야 당연지사입니다. `이 몸에 고통이 가해져서 이 민족의 고통을 제할 수 있고, 이 몸에 서러움이 가해져서 이세계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을 감할 수 있다면 고맙습니다’하는 마음이 앞서는 자는 사탄이 못 물어 갑니다. 하늘은 배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늘의 종족, 하늘 가정의 식구가 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세계는 잠들어 있습니다. 천국, 말하자면 하나님의 가정을 동경하면서, 하늘 가정의 식구를 동경하면서, 그 식구의 인연을 동경하면서 나를 잊어버릴 수 있고, 하늘 부모를 흠모할 수 있고, 그 흠모하는 부모가 나타나지 않거든 형제가 그리워서 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무리를 하늘은 고대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여든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땅 위에 그러한 무리가 있다 할진대, 아무리 핍박이 가중한다 할지라도 어떤 비참한 일이 뒤넘이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무리는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늘 땅을 붙들고 피눈물로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죄에 대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삼천만 민중을 위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그러한 청년남녀, 그러한 하늘의 식구, 그러한 하늘의 일원, 그러한 하늘의 종족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이민족 앞에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망해버립니다.

7-282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려야 할 기독교
여러분, 이제 친구를 사랑하고 그리워해도 그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가정도 친구도 다 지나갑니다. `그립고 그리운 천적인 친구가 어디 있느뇨, 천적인 식구가 어디 있느뇨’ 하는 느낌이 여러분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올바른 길을 가는 거예요. 내가 못 먹어도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 식구를 찾고, 내가 억울해도 억울함을 이기고 미래의 후손까지 염려하면서 하늘 앞에 호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국제정세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1959년, 1960년을 역사적인 중대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전환시기가 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와 절망과 탄식의 분기점이 목적에 당도하고 생활권내에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이념적으로도 그런 분열상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신앙세계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더우기나 한국실정을 바라볼 때, 한국같이 불쌍한 나라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곳에 안식의 기준을 세웠습니까? 세계도 지나갑니다. 사회와 국가, 민족도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가진 것이 없고 찾을래야 찾을 거리가 없는 민족입니다. 이제는 뒤로 돌아서서 역사의 죄상을 탄식하고, 시대적인 과오를 탄식하고, 쌍수를 들어 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는 이 하나의 움직임만 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어떠한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될 것이냐.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교회가 과거의 것을 새것으로 갈아 놓을 수 있는 역사적인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한, 기독교인들은 당회에 교회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때가 온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목사 장로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참답게 잘 믿는 아들 딸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목사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겨서 그 모양이 되었으니,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모두 단결하여 우리 교회로 만들고 내 교회로서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늘은 이것을 일으킬 것입니다.

뜻있는 청년 남녀들이여! 이런 시기가 기필코 옵니다. 보십시오! 해방 전에는 아무개 목사 아무개 목사하고 야단했습니다. 그 목사시대는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아무개 장로 아무개 장로하며 장로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다음은 집사바람이 불었어요. 이젠 평신도 바람이 불때입니다. 기필코 그런 형태가 벌어집니다. 이제 이 교회를 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에 불타서 이러한 움직임을 제창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지금은 비록 욕을 먹고 있을망정 두고 보십시오. 기필코 역사는 방향을 바꿀 것입니다. 역사가 방향을 바꿀 적마다 시대 시대에 변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때마다 피끊는 청년 남녀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끝날에 새로운 천적인 이념세계가 찾아 들어오는 것을 다시 한번 배반하여 천추에 한을 남기는 불쌍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염려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 불타 하나님의 한과 역사적인 예수와 성신의 한, 우리 선조들의 한, 그 모든 것을 내 어깨에, 이 시대의 전체의 책임을 내 어깨에 질 수 있는 아들 딸,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늘 가족의 위신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아들 딸의 위신과 그 이름을 가진 아들딸로서, 만우주를 대하여 늠름히 호령할 수 있는 그 모습을 하나님도 찾고 계시고 인류도 소망의 빛으로 고대하고 있을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7-284
기 도
아버님, 말씀을 전하였사옵니다.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던 아버지,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던 아버지, 그 분이 뉘신 줄 몰랐던 배은망덕한 저희의 조상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찾고팠던 아들딸들을 이 땅 위에서 찾지 못하신 아버지의 서러움을 깨닫고 울 줄 하는 저희들이 되어야 할 것이오나, 내 만족을 찾아 헤매는 불쌍한 자리에 처하여 있던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도 이러한 경지에 있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을 바라보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요 나의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본연의 부모를 갖지 못한 저희, 본연의 형제를 갖지 못한 저희, 본연의 자녀를 갖지 못한 저희, 본연의 부부가 되지 못한 저희이옵니다. 이제 그리고 고대해야 할 것은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자녀, 본연의 부부이오니, 본연의 부모가 그리워, 본연의 형제가 그리워, 본연의 자녀가 그리워, 자기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찾아 헤매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을 모셔 놓고 친히 천국 가정의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움직임이 천지에 벌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이념에 화하여 즐기면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고 아니 응할래야 아니 응할 수 없는 심적인 혁명, 정적인 혁명이 천지간에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 딸들, 마음에 느낀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생의 지침으로 삼아 일생의 전환점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셨사오매 감사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