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0 to 7-257: 두 세계를 대하고 있는 나

두 세계를 대하고 있는 나
1959.09.20 (일), 한국 전본부교회

7-230
두 세계를 대하고 있는 나
로마서 7:15-25

[기 도]

아버님!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저희들은 응당히 걸어야 할것을 알면서도, 그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 채 거닐고 있는 자신임을 이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도 있고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닌 하늘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시간 참례한 저희들은 어느 유(類)에 속하여 있는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지극히 소중하고 만사의 즐거움과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중심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마음 속에서는 느끼고 있습니다. 아버지! 참으로 자랑할 수 있는 `나’, 만사를 비판할 수 있는 주체의 `나’, 그`나’를 저희들은 마음으로 사모하고 있사오니, 몸을 굴복시켜서라도 그`나’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나’를 회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허덕여 왔사옵고 싸워 왔사오나, 아직까지 이 싸움이 끝나지 아니하여 오늘이 시간도 또한 일생을 걸어 놓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하여 있는 자신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은은한 가운데 저희들을 찾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희들에게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음성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 당신과 동행하는 그 순간, 당신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 순간을 찾아 나가는 것이 인생의 중심이요 목적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에서 당신이 저희들 개개인과 즐길 수 있고, 우리와 즐길 수 있으며, 성도와 즐길 수 있는 한 때와 한 시대, 한 역사를 우리 조상들이 갖지 못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나’를 회복하기 위하여 무릎을 끓고 쌍수를 합장하여 천성문 앞에 엎드린 저희들, 은은한 아버지의 심정에 스며들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자신도 모르게 저희 손을 붙들고 `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아’ 하시며 권고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에서 믿고 사는 모든 것은 잠깐이로되 마음을 믿고 싸우고, 마음을 중심삼고 노래하고, 마음으로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하는 그 세계는 무한무궁임을 저희들이 느끼고 있사옵니다. `나’를 세워 자랑할 수 있는 가치의 모습을 어느 때에 종결지을 것인가고 묻게 될 때에, 자신이 없는 내자신이 된다 할진대 하늘은 얼마나 슬퍼하실 것입니까?

이 천지 만물 만상 앞에, 하늘 땅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처참한 모습들이옵니다. 지금까지 목적도 없고 느낌도 없이 살아온 과거를 청산하고,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더불어 사귈 수 있으며, 아버지의 심정과 저희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세상에서 느끼고 사는 체험은 다 있사오나 아버지를 중심삼고 느끼고 생활한 체험이 없어 이것을 바라나온 저희였사오니, 아버지의 장중에 옮기시어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이요, 사정을 알기 전에는 심정을 알 수 없는 것을 아옵니다. 하오니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말씀을 통하여 심정이 하나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고요한 가운데 아버지가 부르시는 은은한 음성을 듣고 즐거워하고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옵고, 말씀을 듣고 심정이 솟구쳐 오르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날 진정으로 하늘을 대하는 곳곳마다 아버지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더우기 지방에 널리어 아버지 앞에 경배 드리는 외로운 식구들도 있사오니,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펴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아버지께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늘이 동(動)함에 저희가 동하고 하늘이 정(靜)함에 저희가 정할 수 있는 이 시간되게 허락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232
말 씀
땅 위의 인간이 제 아무리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산다 한들 그 가운데에는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즐겁고, 마음이 행복스럽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마음이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 연고로 나를 이끌고 있는 하늘이라든가 혹은 어떠한 천륜이라든가 하는 주체적인 존재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7-232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인간
우리들 각자가 자신을 중심삼고 이 세상에서 살게 되어 있다고 알고 있으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는 목적을 추구하고 이념으로는 살고 싶은 어떠한 목적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하여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나’라는 한 존재는 다른 어떠한 목적의 세계와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 `나’는 나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딴 목적을 위하여 태어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나 하나를 놓고 볼 때, 작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요 크다면 지극히 큰 것입니다. 그런 연관성을 갖고 역사를 엮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나’가 느끼는 감정, 이 `나’가 관찰하는 세계관, 그리고 이 `나’가 생활하고 있는 모든 사회생활, 여기에는 상응적인 것과 상반적인 현상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즉, 무슨 목적을 위하여 사는 데도 상극적이며 상충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상응하며 살고 있는 면도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현상이요, 오늘날 세계적인 사조요, 천적인 어떠한 경륜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륜과 천적인 세계관을 분석하게 될 때에, 나의 관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고, 나 하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내 관념을 넘어 서 가지고 세부적으로 나를 명시해 주는 어떤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머물러 있는 이 자리는 한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자리임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바라는 세계와 몸이 바라는 세계, 이 두세계가 나에게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내 마음은 기쁨과 행복과 어떠한 이념을 바라는 욕망이 있는 반면, 내 몸을 중심삼고는 오관을 통하여 실체적으로 느껴지는 어떠한 쾌락과 감촉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7-233
천심과 인심의 입장에서 본 인간의 타락
우리는 흔히 사람은 마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천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심과 천심에 상응하고 천륜의 법도와 그 질서를 가지고 자신의 생활을 밝히는 인간이 되어야 할 터인데, 인심과 천심이 합한 생활적인 기준을 밝힐 수 있는 질서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이요 탄식입니다.

인심을 떠나고 또 여기에 하늘이나 선한 양심을 배반하는 것을 악심 혹은 물심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를 놓고 볼 때, 마음을 중심삼고는 천심이 나에게 들어오고, 또 몸을 중심삼고는 악심이 나에게 스며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고이래로 모든 성인 현철들이 이 와중에 있는 자기를 보고 탄식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마음의 법과 몸의 법이 싸우는 와중에 있었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즐기며 살아 나오고 또 살려고 하는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냐? 내 마음과 몸이 즐거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못 되어 있고 내 마음의 이념과 화할 수 있는 세상이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고민하고 허덕이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것을 헤아려 보게 될 때에, 천심이 인심을 움직여야 할 원칙이 있는데도 진정 이 천심을 오늘날까지 우리의 진정한 인심과 짝하여 생활에 나타나거나 우리 일생의 노정을 거치는 동안 즐거움으로 나타난 순간이 한번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늘이 있다 할진대 우리의 마음을 중심삼고 하루만 살고 싶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중심삼고 영원히 같이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싸우는, 이 와중에 처하고 있는 내 한 자신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중심삼고 하늘이 살 수 있느냐고 묻게 될 때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선입니다. 선은 영원이요 유일이요 불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변이요 유일이요 영원한 생활관념을 못 가졌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그 마음에 끊임없이 돌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양심을 통하여서는 작용할 수 있으되, 우리의 생활관, 생애관에는 작용하실 수 없습니다. 우주적인 이념 밑에서 우리 인간을 끌 수 없었던 연고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악의 주관 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천륜과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계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도 역시 심판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7-234
천심을 추구해 나오는 종교
인심을 넘어 천심을 추구해 나오는 움직임이 있거늘 이것이 무엇이냐? 종교입니다. 종교가 이것을 붙들고자 애써 나오는 것입니다.

인류 문화사에 있어서 종교는 위대한 공로를 세워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을 자극시켜 천심을 향하게 하는 움직임을 일으켜 새로운 혁명,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인심을 중심삼고 악심과 물심이 합하여 천심을 꺾을 때에는 이것이 추락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양심적으로 살아라’ 하는 보편적인 말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만사가 해결지어지느냐. 양심적으로 세상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온 우주가 나와 더불어 즐거이 살지 못했고,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과 더불어 즐거이 살지 않았다 할진대, 이는 다시 수정을 받아야 할 자가 자신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이 실제 양심적인 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있으되, 그 양심과 천륜의 목적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의 운명을 가진 인간은 천륜의 목적을 대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양심의 목적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 즉 양심생활의 목적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한스럽고 슬픈 일임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인류의 시조가 어떻게든지 선한 목적을 중심삼고 선한 그 곳에서 생활하고 즐길 수 있는 그 기반을 닦아 놓았던들, 우리 후손도 내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즐길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목적, 생활의 목적과 인연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떨어진 것이 타락입니다. 떨어지게 될 때에 무엇을 중심삼고 떨어졌느뇨? 몸뚱이를 중심삼고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개체에서 마음과 몸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충의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입니다. 진정한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다 할진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한 순간이라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와 인연을 맺었습니까? 혹은 한해 혹은 몇십년 혹은 생애가 그런 역사와 인연을 맺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 자신들은 천심에 반역된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천심을 끊어버리고 몸이 즐기는 방향으로 떨어져 내려가면 자연히 자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는 몸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이념을 찾아 나가는 주의,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이념을 찾아 나가는 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작으나 소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있어서 그 싸움의 현상도 세계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짓기 위한 것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인간 개체를 넘어 민족과 국가와 세계와 더불어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7-236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자
나를 걸어놓고 세계가 뒤넘어쳐 들어오는 고로, 마음과 몸이 싸우는 생활이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의 싸움에 있어서 마음을 중심삼아 승리의 개선가를 올리지 못한 자, 그는 도저히 하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야욕을 품은 자, 이 세계와 더불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의 이념을 중심삼고 이 땅을 움직이려 하는 자는 이 땅과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이념을 붙들고 그 이념을 찾고 또 찾아 나오는 자는 남아질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는 불변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마음의 세계는 유일성을 갖추고 있기에 무한한 세계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만이 천심과 연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있는 연고로, 그것을 붙안고 사는 사람은 기필코 심판의 한날을 피하여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천국은 무한입니다. 천륜 혹은 천심이 있다면, 그 천심을 내 양심 속에 끌어들여 생활의 원동력으로 삼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을 요리해 나갈 줄 아는 사람은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왕자가 될 것입니다.

하늘은 심판의 한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한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심판할 한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심판도 해내려오고 있고, 이 시간 여러분 개인에 대한 심판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끝날에 처하여 있는 성도들은 대심판의 한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뇨? 개인의 싸움에 있어서 그 싸움을 해결짓고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선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적으로도 그런 싸움이 벌어지고, 민족적으로도 그런 싸움이 벌어지고, 세계적으로도 그런 모양의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천심과 악심이 부딪쳐 해결 지을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대심판의 권한을 갖기를 바라고 나왔습니다. 원수를 대하여 늠름한 심판의 대행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정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완전히 정복해야 합니다. 다시는 마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없게끔 그러한 요소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합니다. 신앙적인 이념으로 몸을 때려잡기 전에는 심판의 대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개인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가정을 심판할 것이요, 가정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사회를 심판할 수 있고, 사회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천주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두고 볼 때 `나’라는 이 한 존재는 두 세계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천국은 마음의 윗면을 점령하고 있고 그 아래는 지옥이 점령하고 있어 이 두 세계가 내 마음에서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 마음의 평행선 위에는 하늘이요 그 아래는 지옥입니다.

여러분, 끝날에 가면 갈수록 어떤 사람은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기쁨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지극히 악한 사람만이 있는 줄 알았더니 지극히 선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악한 것이 침범할 수 없고, 지극히 악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선한 것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는 하나님도 붙들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신령한 사람도, 어떠한 하늘의 은사가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합할래야 합할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때가 오면 지극히 악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하늘과 인연을 맺지 못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영락없이 심판대에 올라갑니다. 그와 같은 실상이 여러분 마음에서 벌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가기를 원하나 몸은 저렇게 가기를 원합니다. 그 몸과 마음을 연결지을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하여 허덕이는 자는 영락없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7-238
천국과 지옥행은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행은 어디에서 결정되어지느냐? 나에게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몸의 오관을 통하여 느껴지는 조건들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생활을 하는 자는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마음이 즐길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물욕과 악심을 버리고 양심을 중심삼고 천륜을 바라보는 것이 지당한 일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기쁨의 한날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슬픔의 한날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슬픔으로 시작하였으니 슬픔으로 끝나고, 고통으로 시작하였으니 고통으로 끝나고, 절망으로 시작하였으니 절망으로 끝나는 때가 옵니다. 곡식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천심을 배반한 우리의 선조입니다. 양심의 도리와 천심의 법도를 어기고 떨어져 내려와서 무한히 슬퍼하였습니다. 이렇게 내려왔으니 이 세계는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생활을 하려면 이것을 전부 다 쳐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싸움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행동이든지 그 행동이 반드시 선이냐 악이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이 하나의 손길, 보는 것, 듣는 것, 냄새맡는 것등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전부가 선을 위주하였느냐 악을 위주하였느냐 하는 그 가치를 결정짓는 걸음걸이를 걷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내 생활인 것입니다. 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도 자신의 전체 오관의 감정세계까지 이런 관념, 이런 선악의 기준이 철저하게 서 있지 않는 한, 이것을 식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런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싸움. 악한 것이 일어나서 선한 것을 먼저 치지만 악한 것은 오래 못갑니다. 악한 것은 오래 못가고 선한 것은 오래 간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이것이 개인에서 가정으로 민족으로 국가로 세계로 천주로 점점 확대되어 세계적인 이념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가 와도 개인은 개인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조의 흐름은 범위를 넓히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심적으로 산 사람이나 오늘날에 양심적으로 산 사람이나 입장은 마찬가지로되 관계되어 있는 범위는 넓어져 나옵니다. 옛날에는 개인을 위주하는 생활형태에서 만족하였으나, 그래야 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가정을 위주해야 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사회를 위주하느냐 하면 사회도 아닙니다. 국가를 위주하여야 하느냐 하면 국가도 아닙니다. 세계를 위주하여야 하느냐 하면 세계도 아닙니다. 하늘 땅을 위주하는 생활형태라야 합니다.

역사의 조류와 형태와 그 범위는 넓어져서 흘러와도 마음의 기준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마음의 기준을 중심삼고 천륜의 방향과 딱 맞추어 나가면 이 역사의 모든 것은 천륜이 지배하고 있는 연고로 마음이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살아라, 양심적으로 살면 복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한날이 우리 앞에 막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복 받는 것은 과할 것입니다. 당장은 복 받는 것 같아도 그때에 가선 맞게 되니, 도리어 복이 못 되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한때가 올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남아진 자에게 축복의 기대가 벌어지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살면 복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7-239
끝날은 하늘 땅을 위주한 천주주의시대(天宙主義時代)
오늘날은 끝날입니다. 우리가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주의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세계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심(天心)이 있다면 천심을 중심삼은 천주주의시대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합니까? 자기를 위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정을 위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사회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일개 국가를 위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세계주의시대가 옵니다. 어떠한 이념 밑에서 세계를 위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외적으로 가는 길과 내적으로 가는 길, 이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내 한 자체는 이 두 길을 대하는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팎으로 통합하여 가는 하나의 길이 있겠거늘, 그 길이 나타나는 때가 우리가 바라는 이념시대일 것입니다.

이제는 천심이 대하고 싶어하는 개인을 찾아야 되겠고, 천심이 대하고 싶어하는 가정을 찾아야 되겠고, 천심이 대하고 싶은 민족과 국가와 세계와 천주를 찾아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않는 한, 여러분은 역사상은 위인이나 혹은 성인들의 노정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심의 방향을 천심으로 향상시켜서 나오고, 몸의 방향도 천심을 향하여, 자극적인 물질의 세계도 천심을 향하여 접근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접근해 들어오는데 이것이 안팎으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격동하며 들어오는 것입니다. 부딪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딪치는 데 무엇을 중심삼고 부딪치느뇨. 이 땅을 중심삼고 부딪칩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중심삼고 부딪칠 것이냐, 사람을 중심삼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외적인 세계이념을 제거시키고 내적인 세계이념을 창설하기 위하여 이 역사는 뒤넘어치며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 심정을 가운데 놓고 좌우로 갈라져서 뒤넘어치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여러분 자체에서도 벌어지는 것이고 세계적으로도 벌어진 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여 오셨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주의시대까지 끌어 나오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였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과 몸이 대응하여 몸이 마음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몸 앞에 굴복하는 내 자신이요 우리 선조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조들이 마음을 기반으로 하여 그 개인을 넘어 민족을 지나 국가를 지나 세계주의로까지 끌어내기 위한 하늘의 수고가 얼마나 크셨겠는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역사서적을 볼 때는 이렇게 하늘이 수고한 투쟁사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느껴 봤습니까? 하늘 앞에 `나의 이 괴로움을 맡으시고 이 괴로움을 없애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영광의 나라에 못 갈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를 중심삼고 `아버지시여 축복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때까지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세계주의가 오면 깨어질 것입니다. 세계주의는 천심을 중심한 천주주의가 오면 깨어질 것입니다.

7-241
끝날의 양상과 사탄의 최후 공격목표
큰 목적, 최종의 목적을 위하여 섭리해 나아가는 하늘이었기에 우리도 최고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한때를 바라보고 그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끝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끝날은 어떤 날이뇨. 하늘은 마음이요 땅은 몸이므로 하늘과 땅이 접하는 때, 세계주의와 사상이 접하는 때, 내 몸과 마음이 접하는 때입니다. 접하면 무엇을 노래해야 되느뇨. 마음의 생활을 노래하고,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세계를 노래해야 됩니다. 이 천주와 더불어 노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러한 세계는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가 하늘의 최고 목표인 것입니다. 인류의 최고 목표입니다. 그날에 남아질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내 몸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투쟁을 하여야 되겠고, 한번 맹세하면 그 맹세가 변하지 않아야 되겠고, 한번 결심하면 그 결심이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한 결심을 갖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물론 그것을 꺾어 바꾸기 위해서 몸이 반항하고 가정이 반대하고 사회와 국가가 반항하고 세계가 반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향해 세계적으로 전체가 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큰 이념을 알면 알수록 큰 이념에 대비되는 상대적인 반역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천성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찾아 나간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목적, 큰 이념을 향하여 가는데 거기에 대비하여 큰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큰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 원수들의 최후의 목표는 어디냐.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원수의 과녁은 내 몸뚱이예요. 내 몸에는 생활적인 위협, 사회적인 위협, 국가적인 위협, 혹은 하늘땅의 위협이 가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생활을 경험하였습니다. 동족 앞에 나타나면 동족의 원수요, 이방에 가면 이방의 원수요, 교단 앞에 나타나면 교단의 원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니 무슨 종교니 하는 세계의 어떠한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도 역시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훌훌 못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철두철미하게 나 자신을 해명해야 됩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개체를 찾기 위한 노정에 있어서도 이런 세계적인 뜻의 인연이 있는 연고로 세계적인 고충이 부딪쳐 들어오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될수록 세계적인 공포가 어떠한 일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사방으로 들어오므로, 끝날이 되면 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듣고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이요 예술적인 사람, 특히 문학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공포의 사조에 휩쓸려 들어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포증이니 무엇이니 하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내 자신을 걸어 놓았던 과거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때는 세계주의시대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모든 것을 걸어 놓고 천심과 더불어 외적인 분야를 쳐서 분립시키고 `아버지! 제자 승리하였나이다’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늘은 그러한 한 사람을 만들려 하고, 사탄은 하늘이 하려는 그 행동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하늘의 세계가 아니고 악의 주권 하에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악의 주권세계에 그러한 존재가 나타난다면 온 세계가 반기를 들고 반항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 한 존재를 쳤다가는 꺾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쳤다가 개인이 굴복하고, 가정이 반대했다가 가정이 굴복하고, 사회가 반대했다가 사회가 굴복합니다. 더 나아가 국가와 세계가 반대했다가 국가와 세계가 굴복하는 날 최후의 판결이 내려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극히 작은 개체를 전세계적으로 벌여놓은 형상적인 것이 역사의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7-243
섭리역사의 전개 방식
오늘날 인간은 출발할 당시부터 기쁨이라는 것을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땅을 중심삼고 행복이라는 것을 노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고이래로 지금까지 6천년의 기나긴 역사를 거쳐오면서 양심적인 사람이 하늘땅을 대하여 자랑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까?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못살고 천대받고 찢기고 죽고 밟히는 불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부딪히면서도 그들이 소망하였던 것은 무엇이냐. 양심을 중심삼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한날, 그 한날을 소망하였습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피의 제단을 쌓아 나왔습니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개인들이 쓰러지면 개인들을 규합하여 민족적으로 연결시켜 나왔고, 민족이 쓰러지면 민족을 규합하여 세계적으로 규합시켜 나왔습니다. 이런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역사였습니다.

보십시오. 아담이 깨어질 때에 다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아 나왔고, 가인과 아벨이 깨어질 때 다시 노아의 가정을 중심삼아 나왔고, 다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를 거쳐 가지고 야곱가정을 중심삼아 나왔습니다. 이렇게 가정을 단위로 하여 세계적인 민족을 향하여 나선 걸음이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 모세가 민족을 규합하여 그 민족을 거느리고 국가를 회복하기 위하여 원수의 애급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진격하였던 것입니다.

개인은 가정을 찾기 위하여 싸워야 되고, 가정을 찾았으면 그 가정은 민족을 찾기 위하여 싸우고, 민족을 찾았으면 그 민족은 국가를 찾기 위하여 싸우고, 국가를 찾았으면 그 국가는 세계를 찾기 위하여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자기의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비난과 고통 가운데서 승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120년 동안 오늘날 우리들이 받는 이상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개인 노아로서 찾아질 수 있기 위하여서 120년을 거쳤습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이룰 때까지 21년 동안을 고난 속에서 싸웠습니다. 싸우는 데 친구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형제도 없고 부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홀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을 찾아 나선 걸음이 애급에 들어가는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애급에서 400년, 이것은 민족이 규합되는 기간입니다. 모세가 민족의 대표자로 나왔으니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적인 기반을 닦아야 되었던 것입니다.

7-244
예수님을 중심한 섭리의 목적과 재림주의 사명
예수는 어떠한 분이뇨. 국가적인 기반을 터로 하여 세계를 찾아야 할 분이셨습니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족이 배반하니 예수는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거쳐 민족을 거쳐 국가를 거쳐 세계적인 차원에까지 나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죽어가신 예수 앞에 이스라엘은 원수입니다. 4천년 수고하여 택하였던 유대교인은 원수예요.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복귀하고 세계적인 가나안 땅을 복귀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의 발판이 쓰러지니 4천년의 역사 전부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역사를 아담 때로부터 되풀이하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예수가 그 터를 닦아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세계에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예수를 중심삼은 가정은 없습니다. 있습니까? 예수 자신도 신랑 신부의 자리를 거쳐 가정을 가진 한때를 맞이하지 못하셨습니다. 이 신랑 신부가 무엇인 줄 압니까?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가정적인 제2기준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회복하기 위한 제2의 가정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는 천국의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상에서 가장이 되었습니까? 지상에서 제일 중요한 목적은 가장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이 되어야만 자녀가 있을 수 있고, 자녀가 있어야 백성이 있을 수 있고, 백성이 있어야 민족이나 국가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각성할 때가 왔습니다. 세계 기독교인들은 어느 나라의 백성이 못 되어 있습니다. 어느 족속, 어느 지파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예수가 한 가정이 가장이 되려면 12사도들이 하나되어 예수님이 지상에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구원섭리를 종결지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예수님과 성신이 피눈물이 고비를 거쳐오셨습니다. 그 목적은 어디 있느뇨. 제1기준인 가정의 기준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야곱의 가정을 찾아 그 가정적인 기준을 민족적인 기준으로, 민족적인 기준을 국가적인 기준으로, 국가적인 기준을 세계적인 기준으로 세워 가지고, 이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천국 혁명을 일으켜 천상에 있는 지옥세계까지 해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재림주는 얼렁뚱땅하고 영광 누리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영계에 있는 지옥까지도 박멸하고 천주적(天宙的)인 천국을 이루시기 위한 사명을 갖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나야 하나님도 쉬신다는 것입니다.

7-245
마음세계와 심정세계
우리는 마음이 있어도 마음의 방향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지러운 주의사상에 얽매여 이리 가야 될지 저리 가야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활적인 편견으로 인해 움직이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니 어느 것이 참이요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의 방향이 한곳에서 출발을 했는데, 끝에 가서는 갈라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출발은 정상적으로 했어도 끝에 가서는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갈라진다는 것은 꺾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여 싸우고 있으나, 이 주의로서는 세계를 해결 짓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못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실상적인 세계도 그렇습니다. 그런 사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여러분 자신들이 마음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이뇨? 마음이 천심을 통하여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을 부어준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과 인간이 마음으로 하나되어 즐길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방향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내 마음의 터전위에 이제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이 마음에 스며드는 기쁨,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라 할래야 아니라 할 수 없는, 마음속을 통하여 느껴지는 행복감, 이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세계의 행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세계는 어떠한 관이 없습니다. 우주관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보다 더 큰 것은 심정의 세계입니다.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제재를 받습니다. 마음은 상대적인 조건 여하에 의하여 제재를 받지만 심정의 세계는 제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무엇이 제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태산같은 장벽이 앞을 막아도 꺾지 못합니다. 마음의 세계는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상대적인 입장이요, 심정의 세계의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마음은 사방성을 갖고 있는 연고로 제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심정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은 무엇일 것이뇨. 끝날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런 말을 하실 것입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천국은 네 심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느니라’고. `마음에 있느니라’ 이것만 가지고 됩니까? `심정으로부터 이루어지느니라’하고 결론맺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의 중심과 화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고충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마음으로 화하여 즐길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그는 행복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을 왜 느끼느냐.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변치 않는 심정의 중심을 못 가진 연고입니다. 원인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7-247
행복의 동산이 찾아올 수 있는 기준
여러분들, 세상 것을 붙들고 좋아하여 보십시오. 언젠가는 끝납니다. 제 아무리 마음이 좋고 심정이 좋다 한들 그것은 필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뚜렷한 중심이 없는 한 여기에는 슬픈 감정이 있고 기쁜 감정이 있습니다. 또 몸을 중심삼고도 뚜렷한 중심이 없는 한, 몸이 즐길 수 있는 감정이 있는 동시에 슬플 수 있는 감정도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슬펐던 생애노정은 거쳐갔지만 마음이 즐길 수 있는 생활노정은 거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생애노정을 찾지 못한 타락한 인간은 불쌍한 인간, 저주받아야 할 인간, 심판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길을 찾을 때가 왔습니다. 하늘의 목적이 끝날에 인간을 심판해서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할진대, 우리는 본향의 주인을, 본향의 가정을, 본향의 사회, 본향의 국가, 본향의 세계, 본향의 천주를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갖게 될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몸을 중심삼은 개인, 몸을 중심삼은 가정, 몸을 중심삼은 사회, 국가, 세계는 다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여기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라는 그 세계, 마음이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는 주인과 가정, 국가, 세계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만일에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왜 그렇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이 선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은 창조적인 어떠한 힘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힘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없으면 작용하지 못합니다. 화학적인 현상을 보아도, 물리적인 현상을 보아도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양심작용의 실상을 바라보게 될 때에, 슬픔의 한면을 제거시키고 기쁨의 한 면을 추구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기뻐할수 있는 한때가 인류의 소망의 때요, 인류의 행복의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거기에 귀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소위 민주니 공산이니 하는 것이 서로 대결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정책들을 강구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해결은 어디에서 해야 할 것이뇨. 옛날 타락 전 아담 해와의 모습, 하나님을 중심삼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즐거워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주인이요, 내 가정의 가장이요, 내 민족의 주인이요, 내 국가의 주인이요, 내 세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기준이 되었다 할진대, 이 지상에 행복의 동산은 찾아올 것입니다.

7-248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찾고자 하는 사람
우리의 마음의 세계는 즐길 수 있고, 화할 수 있고, 동할 수는 있으나 취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동하고 응할 수는 있으되 취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의 사랑이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여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 순간 그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주고 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장면은 온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소유하여서 기뻐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취할 수 있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그런것을 체험했다면 이 몸뚱이의 모든 오관을 통해서 느끼는 자극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내 마음을 중심삼고 무슨 역사를 해 왔느뇨? 우주 개발 역사를 해 오셨습니다. 우주 개척 역사를 제시하여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늘은 어떠한 목표 밑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명령하시느뇨? 우주적인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우주의 모든 것을 터전으로 해서 자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존재가 되라고 하늘은 우리의 이끌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 악한 사람을 사랑하고 선한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도 사랑하고 하늘 땅 전부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우리 인간은 이런 본질적인 이념의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마음이 즐길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즐기는 동시에 이 세포까지 즐겨야 하고 마음이 취하는 동시에 세포까지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취함의 감성을 내가 상대하는 세계까지 반응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용과 그러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6천년간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있다 할진대 마음이 그리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세계와 국가와 우주 전체가 바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바로 앞에서 말한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복되는 입장에 들어가도 무한히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무한히 희생하고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 많으면 지상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은 그런 사람입니다. 주어도 주어도, 무한히 주고도 또 주고 싶고 무한히 희생해도 또 희생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랑의 몇십 배, 몇백 배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찾고 있고 그리고 있는 그 세계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심정적인 그 세계와 지상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인연 맺어지는 그 한날이 와야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심판의 절대적인 기준이 지상에 서는 날이면 끝입니다. 그 심정을 기본으로 하여 심판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를 넘어선 심정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심정의 주인입니다. 어떠한 악당들이 있더라도 심정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랑이 물결쳐 올 때 누구나 좋아합니다. 사탄도 악마도 그 사랑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좋아하는데,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암흑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인류는 이러한 자리를 자신의 마음으로 기필코 개척해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거늘, 이것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고.

이제 여러분의 갈 길은 판명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마음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도 있을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심정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이 세상을 피해 스스로 그런 곳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연이 어느 곳에, 어느 한때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찾고 고대하고 구하는 자는 역사와 더불어 인연 맺어 나오는 하늘이 기필코 찾아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7-250
심정을 계발하려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천심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이므로, 들려오는 말한마디도 무심히 대할 수 없습니다. 원수가 칼을 들고 나를 찌르려 하는 장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 이것은……’ 하는 사람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틀린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늘이 아닙니다. 틀린 세상에 나쁜 것을 갖고 찾아오는 분이 하늘입니다. 그런 문제까지도 아량을 가지고 인연의 가치를 더듬어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돼야만 심정 계발의 첫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위에 사는 사람을 대하거나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말을 듣게 될 때, 어떠한 인연이 있어 만나게 될 때 마음이 자꾸 끌려갑니다. 어떠한 진리나 어떠한 교회, 어떤 종교가 있다 할진대 생각하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그것들에게 자꾸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마음은 자연계의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지남철의 자침이 늘 남북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있어서도 플러스의 마음이 나타나면 상대적인 마이너스의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끌려갑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 종교에 내 몸이 끌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으면 진정한 신앙자가 아닙니다. 그 도(道)에 내 몸이 끌려 들어가고, 내 마음이 끌려 들어가고, 내 심정이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할진대 도를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도를 못 믿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온 세계 인류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이념은 무엇으로 해명해야 하느냐? 진리로 해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이냐?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진리, 내 마음이 영원히 즐겨 취할 수 있는 진리는 백 번 듣고 천 번 들어도 새로운 맛을 느낍니다. 여러분, 진리 중에 제일 참된 진리는 밥맛과 같습니다. 어제 먹어도 오늘 먹어도, 7,80년 같은 밥을 먹어도 맛있으니 진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하여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했거늘, 몸을 취하게 하고 내 심정을 취하게 하는 진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면 됐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이 때는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방향이 뒤바뀌는 때가 왔습니다. 한 주체를 향하여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옆을 바라보고 옆길로 가면 지장이 있기 때문에 다 끊어 버리고 가야 합니다. 전부 다 그것을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7-251
지금은 만우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찾아야 할 때
지금 때는 방향이 까꿀잡이 되는 때입니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지는 때입니다. 바꾸어지는 때이니 내 자신도 하늘 땅의 중심적인 존재, 만우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만우주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인 자신의 권한을 대신한 만우주의 주인공으로 인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기준에 이르려면, 이제는 내 중심에서부터 해결하고 내 심중에서부터 체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내 마음에서부터, 내 심중에서부터 해결 지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한 방향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 방향을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방향을 중심삼고 사방을 봐야 됩니다. 사방을 더듬어 살펴서 사방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천성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자기의 위치를 알게 되는것입니다.

지금의 종교, 지금의 주의는 나의 마음과 심정과 이념의 완전한 기준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왜?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 지나가게 됩니다. 지금의 종교나 주의가 나의 마음과 심정과 이념의 완전한 기준이 못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그 무엇이 내 중심이 되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때는 그런 때입니다. 너나 나나 같은 입장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신 것과 같이 너나 나나 같은 입장입니다. 우주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내가 어깨동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파나 사방성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방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심을 그 중심, 심정의 중심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자는 자기의 일방적인 방향을 비판하고 사방성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언제나 싸우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마음이 몸을 몽땅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방으로 끌고 다닐 수 있는 기준이 잡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해결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보란 말입니다. 뭐가 되겠습니까? `나는 잘났어’ `나는 무슨 학자인데’ 하면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슨 학자 무슨 학자 하지만 그 중에 과학자는 좀 낫습니다. 그 이외 학자라는 사람들은 까꿀잡이 됩니다. 큰소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책임이 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가성적인 구상 밑에 인심을 결부시켜 가지고 천도 앞에 영향을 끼친 자는 저나라에 가게 되면 영원한 참소에 걸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영웅이 되고 싶지요. 타고나지 않은 영웅이 되려 하다가는 큰 벼락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훌륭하게 출세하겠다고들 하지만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출세를 했다간 망하는 것입니다. 그 후손이 망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연한 암살사건이라든가 찔러 죽이는 따위의 잔인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못돼’ 하면서…. 이것도 하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욕망을 치워 버리고 나를 찾아야 될 때입니다. 마음 몸이 더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나를 하나님은 그리워 하십니다. `야! 네 손을 만져보자’ 하시면서 손을 붙들고 기뻐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여기 오신 여러분들의 마음은 그렇게 돼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활동할 수 있게 하고, 몸의 작용을 촉구하기 위하여 실상의 세계를 지어 주셨습니다. 만물을 걸어놓고 노래하고, 만민을 걸어 놓고 노래하고, 미래의 세계를 걸어놓고 노래하고,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전부를 걸어놓고 노래하는 `나’, 그렇게 마음으로 즐기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찾아와 반길 수 있는 모습이 한번 되어 보란 말입니다. 이것은 가공도 아니고 공상도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젊은 나도 그것을 실감하고 그 느낀 사실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천지가 반대하고 하늘땅이 뒤집어지는 한이 있다 해도 이런 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무슨 시대? 끝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을 세운 인간이 없는 한 최후의 심판은 내리지 못합니다. 심판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253
끝날에 필요한 진리와 나
종교의 진리는 어떤 진리여야 합니까? 내용만을 설명하는 진리는 필요없습니다. 몸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그렇습니다’ 심정이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그것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주의, 그러한 이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주위에서 들려오거나 혹은 인연되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은 거기에 이끌려갈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가야 할 터인데 하고 몸이 요구하더라도, 그런 조건이 구비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다 부정하고, 그것을 다 버리고 그리로 가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끄는 느낌을 주는 말씀이 있다면, 여러분은 보따리를 다 정리하고, 김삿갓 모양으로 그저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그리로 따라가 보라는 말입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그런 자가 되려면 여러분은 옛날의 그 모양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은 탈바가지를 벗어 버리십시오. 종교가는 종교가의 탈을 벗어 버리십시오. 양심가는 양심의 탈을 벗어 버리십시오. 종교의 무슨 무슨간판, 다 떼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통일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저는 통일교회 간판 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간판을 내건 것은 상대적인 조건이 있기 때문에 투쟁상대가 나왔기 때문에 간판이 필요하지 떼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세계에 무슨 간판이 필요가 있어요? 심정의 세계에 무슨 간판이 필요해요? 그냥 있어도 자기 스스로 압니다. 그냥 있어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것이 해결지을 수 있는 제1기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한 생활을 해 왔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두 세계에서 허덕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은 몸이 이끄는 방향이 아니고 마음이 이끄는 방향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몸이 이끄는 방향, 외적인 조건은 만점입니다. 완전히 구비되어 있습니다. 몇 백 점으로 구비되어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 가정을 넘어 세계형태로 벌어져 있기 때문에 몇 백 점으로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끄는 방향은 그 몇 퍼센트밖에 안됩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하고 싶은 하늘입니다. 그런 하늘의 서러움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서러움을 알면서 마음이 즐거워 할 수 있는 노정을 찾아 나아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도를 믿는 사람들은 목이 떨어져도 견디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리, 여기서 말하는 말씀 앞에 자신의 몸이 굴복하려 하고, 마음이 굴복하려 하고, 심정이 숙여지거든 그것은 마지막의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뇨.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본연의 세계는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 할지라도 남편이 부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부인이 그 남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인이 하나님을 남편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서 왜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내용을 초월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몸뚱이의 영원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품, 그 동산에 있으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내 마음의 영원한 주인,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이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심정으로 그리는 세계는 어떠한 곳입니까? 요것이나 요것처럼 외계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 세계에서 빚어진 그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정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은 하나의 미립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정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 못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라고. 통념적인 감성을 가지고는 주체적이요 원형적인 이념세계를 느낄 수 없습니다.

7-255
하늘 땅의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
우리는 몸으로 노래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노래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심정으로 찬양해야 되겠습니다. 무엇을? 나의 주인된 분을.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놓고 `오! 이 분을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소냐. 세상의 그 무엇이 이 분과의 인연을 끊을소냐’ 해야 합니다. 인간이 좋다는 사랑도, 인간이 좋다는 욕망도, 인간이 좋다는 부귀영화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온 피조만물, 온 존재들이 영원히 영원히 주인 삼겠다는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점유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모모한 인사의 부인만 되어도 배를 내어밀고 야단하고, 무엇이 조금만 어떻다 해도 야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이 기쁨은 하늘 땅의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6천년의 고난의 길을 거쳐 나를 찾아 헤매던 하나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 딸들을 하늘은 찾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7-256
자기를 심판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아들을 만들기 위하여 하늘은 수세기를 거쳐오면서 수천 만 번 우리 선조들을 움직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많이 배반했습니까? 인심을 배반하고 천심을 배반한 우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천륜, 아버지의 심정을 배반한 우리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무엇이 천륜이 유린해 나왔느뇨? 이 몸이 유린하였으니 우리의 몸은 죄악된 몸뚱이입니다. 원수는 여러분 앞에 나타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이 몸뚱이를 눌러놔야 됩니다. 자기를 심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역리자(逆理者)입니다. 설법도 역설법입니다. 역설법을 주장하고 역리의 노정을 걷고 있으며 역리의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지금까지 어디에 목을 걸고 싸웠습니까? 통일교회에 나오는 분들 중에는 통일교회 이름을 중심삼고 싸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걸어 놓고 싸워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여자들이 가슴을 치고 슬퍼 울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욕하고 누구를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욕해야 합니다. 허망된 자기의 모습을 청산하고, 본연의 마음의 친구, 본연의 심정의 친구인 예수를 마음의 아버지, 심정의 아버지, 더 나아가서는 몸의 아버지, 우주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길로 나아가야만 여러분은 끝날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잊을 수 있는 기쁨의 조건을 찾는 길을 가야만 되겠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자신의 마음을 이끌어주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심정이 움직여질 수 있는 진리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그런 종교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에 따라서 참이냐 거짓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7-257
기 도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한 생명을 찾아 세우기 위해 6천년이 걸렸습니다. 아버님은 한 가정을 세우기 위하여 그 살림살이를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세계의 모든 외적인 환경도 아버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동산으로 이루어져나가고 있습니다. 주의와 주장도 두갈래길에서 판가리지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듯 이제 저희의 마음 세계에 있어서도 두 싸움을 하나로 결말지어야 되겠사옵니다. 원수들을 전복시켜 승리의 깃발을 들고 세계를 향하여 총진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천상의 원수들을 심판하는 그날, 아버지의 아들 딸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은사가 여기에 모인 아들 딸의 심중 깊이 스미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원수에게 이용당하며 살아왔사옵니다.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본연의 이상을 향하여, 본연의 세계를 향하여, 본연의 주인을 향하여 싸워나오지 못한 과거를 청산하고, 이날 이 시간부터는 천심을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세계는 그런 하나의 이념의 세계로 기필코 종결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심정과 내 심정이 하나되어 노래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요 이상동산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가정이 만천하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기 부모의 사랑에 취하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에 취하고, 자기 자녀의 사랑에 취하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에 취하여 그 사랑을 노래하고 그 사랑을 즐기며 그 사랑의 행복감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환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저희들의 소망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뜻과 소망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기뻐하시고 저희들도 기뻐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저희의 생애가 종결되기 전에 이루어야 되겠사오니, 이 시간부터 이루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미쳐지는 모든 인연과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통하여, 어떠한 물질을 통하여서든지 마음이 움직이고 심정이 움직이는 곳을 제거하지 말고 그것에 따라, 그 곳을 향하여 달음질쳐 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