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3 to 7-202: 인생길을 가는 우리

인생길을 가는 우리
1959.09.06 (일), 한국 전본부교회

7-173
인생길을 가는 우리
베드로전서 1:21-25

[기 도(Ⅰ)]

아버님께서는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어떠한 수고도 개의치 않으시고 저희의 선조들을 이끌어 나오셨사오나, 저희의 선조들은 아버지를 배반하기를 일삼았사옵고, 어느 한날 아버지편에 서서 승리와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는 범죄자의 후손임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하늘은 부족한 저희들이라도 다시 붙들어야 할 입장에 계시옵고, 부족한 저희들은 아버지를 다시 찾아야 할 입장에 있사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시기에 부족한 저희들을 찾아오시며 바라보고 계심을 생각하올 때,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심정으로 저희들을 그리워하시며 오늘도 찾으시는 아버지 앞에 자신들의 부족함을 뉘우치는 마음 갖고 모였사옵니다.

찾아오셔서 훈계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하오나 말씀을 하실래야 하실 수 없고, 사정을 통할래야 통할 수 없는 저희가 된 것이 하늘의 무한한 서러움인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의 미급함을 슬퍼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생명의 권한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야 할 끝날이 저희의 목전에 다가오는데, 저희들은 생명의 고갈을 느끼면서도 생명을 흠모하는 마음이 부족하였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이러한 저희를 격려하시옵고 격동시켜 주시어서 생명의 전권자이신 아버지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강한 힘과 강한 심정을 갖고 원수들 앞에 나설 줄 아는 아들 딸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지의 손길에 붙들리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옵고, 아버지의 모습을 닮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옵니다. 이 한 시간만이라도 사탄에 의하여 더럽혀진 모든 흔적을 일소하여 아버지의 내적 성상을 닮고, 외적인 형상을 갖추어 본연의 미를 나타내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본연의 심정을 갖추어 창조 이념의 실체가 된 저희와 더불어 즐기실 수 있으며 저희와 더불어 의논하실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물결이 눈 앞에서 저희를 노리고 있사옵고, 사탄은 생명의 권한을 밀어내기 위하여 갖은 흉계를 다 하고 있는 순간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는 마음의 터전을 바로잡게 하여 주시옵고, 다음에는 저희의 몸을 정하게 하여 아버지를 향하여 뚜렷이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하나의 목표에 귀착되어 `아버지 것이오니 받으시옵소서’ 하는 간곡한 마음을 가지고 부복하는 모습이 되지 않으면 억만 사탄들이 여지없이 유린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마음과 몸에서 저희의 주관적인 관념이나 지난날의 의식적인 주의 일체를 제거시키시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음성으로 하늘을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 간곡한 그리움이 이 한 시간 샘솟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새로운 심정을 일으키며, 새로운 생명의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싸움의 장벽이 저희 앞에 가로막혀 있사옵니다. 이 장벽을 뚫을 수있는 하늘의 정병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결전 단계에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의 권한을 가진 자들을 대하여 늠름히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용장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원수의 진지를 향하여 진격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승리의 푯대를 향하여 말없이 뛸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머리 숙인 모양은 각각 다를지라도 목표만은 같게 하여 주시옵고, 사정은 다를지라도 심정만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처하여 있는 입장이 다르고 느끼는 마음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만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친히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은 외로운 자리에서 싸우고 싸워나온 자들이옵니다. 이들은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모든 화살을 받아가면서도 하늘을 부르며 한 줄기 생명의 빛을 따라 나왔사옵니다. 이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일이오니 승리의 영광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때까지한 생명이라도 지쳐서 쓰러지는 자가 없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하여 기쁨으로 출발하였사오니 기쁨의 열매를 맺어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을 넓힐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삼천만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생명의 등불이 하늘에 있음을 알고 있사옵고, 복귀의 길을 가야 할 운명도 하늘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의 사정을 잘 아시는 아버지, 한국 교단의 실정을 잘 아시는 아버지, 심정과 심정으로 연할 수 있으며,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자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산 아들 딸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숨은 제단을 붙들고 호소하는 아들 딸들이 있사옵거든, 그들을 모으시어서 적은 무리로 하여금 많은 무리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을 이루시옵소서.

아버지!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7천여 무리가 간교한 악의 요소를 막아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간교함을 막아낼 수 있는 7천여 선의 무리가 이 땅 위에 허락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슬퍼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하고 생각할 수 있는 숨은 아들 딸들을 어서 아버지의 가정에 모으시옵고, 아버지의 식구로 연결시켜서 소원하시는 영광의 동산을 어서 속히 복귀하여 해원성사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 오로지 당신 앞에 맡기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만이 운행하여 주시옵고, 사심(邪心)이 우거하는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표준 앞에 하늘과 땅 전체가 순응할 수 있으며 화하게 할 수 있는 저희들의 경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7-176
기 도(Ⅱ)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다가 생명의 길을 찾아서 아버지 앞에 엎드린 저희들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에 세워주신 은사와, 저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한한 수고를 개의치 않으시고 저희들을 보호하시고 분별시키어서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신 은사 앞에 무엇으로 보답 하오리까. 보답할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였사옵나이다. 몸을 드려도 그 은사를 갚을 수 없고, 마음 모두를 드릴지라도 아버지의 수고의 공적 앞에 머리 둘 수 없는 부족한 것들임을 이 시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아버님께 저희를 살려야 할 책임도 있거니와 저희를 통하여 영광의 한날을 보셔야 할 아버지의 사정이 있고, 소원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이러한 저희들을 보시고 위안받으려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생각하올 때, 부족한 저희에게 소망을 두시고 역사노정의 고비 고비를 참아 나오신 아버지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의 피 살이 아버지의 심정을 동정할 줄 알고, 저희의 뼈가 하나의 인격을 구성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었다 할진대, 그 자체가 아버지의 불변의 모습을 증거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성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포 하나 하나까지도 아버지께 속하여 영광 돌릴 수 있는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실체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역사노정에 있어서 저희의 선조들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을 따라가다가 때로는 원망도 하였사옵고, 때로는 저버리기도 하였사옵고, 선민권을 자랑하다가 그것을 포기해 버리기도 한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러한 한스러운 혈통을 받은 저희들이기에, 오늘은 하늘을 자신있게 믿는다고 하지만 내일은 하늘을 배반할 수도 있는 악한 세계와 가까운 입장에 있는 모습들이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붙들어 주시옵고, 새 생명에 약동하는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까지 땅 위에 왔다간 사람도 많사옵고, 지금도 오고 가는 사람이 많사오되, 아버지의 사정을 붙들고,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하는 사람은 없사오니, 오늘날 저희들이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땅을 원망하고, 인류를 원망하고, 역사를 원망하고, 타락한 선조를 원망할 줄 알고, 아버지를 내가 모시겠다는, 아버지를 위하겠다는 마음에 사무친 아들 딸들이 땅 위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누구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겠사옵니까? 어떤 옷 잘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옵고, 어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옵니다. 추한 흔적을 지니고 상처를 입은 몸들이 존엄하신 아버지의 성상을 닮기 위하여 나왔사오니,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 저희의 마음이 의지할 곳 없어 외로운 줄을 아버지께서 아시오니, 이시간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런 심정을 갖고 현현하시어서 영원한 생명의 주체로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고, 저희의 몸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내려 주시옵고, 아버지의 은사를 감사하며 경배드릴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말씀을 갖고 대하고자 하오니, 아버님,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사이에 간격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사탄의 행로가 되는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그 곳이 사탄이 노리고 있는 사망권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어, 아버지의 심정에 연하여 동하고 정할 수 있는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려 외로이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 어려움에 시달리는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사오니, 참음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높이고 아버지의 모습을 이 민족 앞에 실체로서 증거하고 남음이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나이다. 모이는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인류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178
말 씀
이 시간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는 제목은 `인생길을 가는 나’ 다시 말하면 `인생길을 가는 우리’ 입니다. `인생길을 가는 우리’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7-178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인생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왔다가 간다고 합니다. 자고이래로 아무리 훌륭한 성현군자도 왔다가 갔습니다. 이런 역사의 움직임, 이런 천륜의 움직임은 이 순간 나에게도 연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왔다가 가야 할 우리 자신들입니다. 무슨 인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이 땅에 와서 이 만상과 혹은 어떠한 이념적인 형태 속에서 뒤넘이치다 가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왔으며 무슨 목적을 위하여 가는가? 이것을 수많은 철인들, 혹은 수많은 종교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해결지으려 하였으나 해결짓지 못한 채, 인류역사는 그로 인한 서러움과 더불어 지금까지 움직여 나왔습니다. 또 지금도 계속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있는 우리입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갈 수 없는 인생 행로를 걷고 있는 우리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나고 보니 생각지도 않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살다가 보면 뇌쇠하여서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꽃다운 청춘시절이 지나가 버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요, 자기 모습이 노쇠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하되 방비할 수가 없는 서글픈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깝고, 생각하면 클클하고, 생각하면 무엇인지 모르게 사방을 휘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몇번씩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왔으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느냐. 태어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기는 했으되 무슨 동기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나를 낳게 한 동기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기는 났으되 내가 나고자 해서 난것이 아니요, 살기는 살되 내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죽기는 죽되 내가 죽고자 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들어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자기 자신이 나고 싶어 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갖고 살지도 못하고, 죽음길을 피할 수도 없는 자신을 갖고 무엇을 자랑해 보아야 처량할 뿐입니다. 났으니 살아야할 운명이요, 또 그렇게 살다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다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기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으니 목적도 나만의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사는 데 있어서 행복한 자리를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렇지만 또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고, 마음대로 남아지고 싶은 나입니다. 이런 심정의 교차점을 지닌 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연유하여 나지 않은 내가 보다 큰 무엇을 요구하고, 보다 더 잘살기를 바라고, 더 큰 목적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나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상대적인 목적 때문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들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손을 들어 나 때문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혈육을 받고 태어날 때 스스로 나고 싶어서 났어요? 부모가 나를 낳기는 했어도 나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이끌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 누가 갖고 있는가? 그 권한의 소유자를 해명하는 날, 자기를 중심삼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 기준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우리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더 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일생을 통해 사망의 권한을 밀고 나가 실제로 더 큰 놀라운 생명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정적인 사랑의 심정이 있어 인간의 정적인 세계를 넘어 영원불변의 정적인 세계와 접하고자 합니다. 해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으되 그런 느낌에 내가 수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 모순된 세상을 저버리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을 양심이 맑으면 맑을수록 느낄 것입니다.

7-180
악을 피하고 선을 찾아가는 인생행로
그런 연고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고 보니 선한 종자가 아니라 악한 종자입니다. 나고 보니 재창조의 이념 앞에 설 수 있는, 어떤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이 불초한 모습, 미비한 모습, 불완전한 모습, 부족한 모습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인간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본심은 타락세계에서 즐기면서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6천년 동안 이 길을 피하고 피해 나왔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피했다 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지향하면서 그 무슨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왈 인생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죽어서라도 악을 제거시키고 선을 붙들어야 할 목적 밑에서 악의 환경을 피해 나가는 노정이 인생행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마음의 본향을 향하여 움직일 때는 그렇지 않지만, 악에 치우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악사, 혹은 사망의 권한, 흑암권세를 향하여 본심을 피해 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도피노정에 있습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이 도피자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고. 악을 도피해 가야 할 세계 인류를 어떻게 지도하실 것인고. 하늘이 계시다면 그 지도방법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의 노정은 어떠한 노정이냐. 이 땅 위에는 하나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누구의 사정을 봐주고 누구를 붙들고 내 사정을 말할 입장이 못됩니다. 수많은 인류가 왔다 갔으나 인류는 지금까지 도피해야 할 운명에 걸려 있습니다. 자기 갈 길 가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도피자의 운명이 그런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범죄사가 철창에 갇히었다가 도피한다 할진대, 그 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살 길, 자유의 세계, 자기가 그리는 어떠한 세계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자유의 세계와 자기가 그리워하는 세계에 대한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처한 환경에서 도피하여 달음질칠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도피자의 운명에 있으면서도 갈구하는 동산이 어디인지, 자기가 소망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역사는 돌고 돌고 또 돌고 있습니다. 목적도 방향도 처지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위하면서 살아온 인간이었음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하늘 앞에 범죄했으므로 공의의 신과 불의의 신이 대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나라는 존재는 불의한 사탄의 구속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니, 이 세계의 도주병입니다. 도피자예요. 구원성이 어디뇨. 천국이 어디뇨. 이 세상은 도피해야 할 성입니다.

도피하는 데는 개인적으로 멋지게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자기 혼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으니 가정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민족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세계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천주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제시하여 가르쳐 주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을 대해 사랑이니 창조주니 무슨 이념의 절대자니 하고 말할 수 없을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인간을 대하여 도피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지시할 수 있는 표준은 어디 있느뇨. 어떠한 학설이 아닙니다. 천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7-182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
마음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무한히 움직이고 자 합니다. 그것은 자석이 남과 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방향을 잃고 선을 피해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어요. 인간의 마음도 역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합니다. 생명을 향하여 움직이는 마음,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마음,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 전체와 화합하고 싶은 마음, 전체의 어떤 이념에 화하여 살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도피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 천성을 향하게 하는 이 마음을 지켜 나가려면 싸워야 됩니다. 싸움을 해야 돼요. 이 싸움을 거쳐 도피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구원을 얻느냐 못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달려야 하느냐.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싸움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데는 하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서, 하늘이 바라시는 작전법으로, 하늘이 바라시는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주체자의 프로에 응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러분들,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떤가를. 어떠한 목적세계에서 움직이고 있고, 또 그 세계에 사로잡혀 오늘도 살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그 자신의 모습이 인생 도피행로에 있어서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원수들이 앞 길을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 데도 눈도 뜰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꿈이나 꾸고 있어요. 자기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은 달음질쳐야 할 행로에서 피로하여 쓰러진 자도 있습니다. 그 모양은 천태만상입니다. 천태만상.

여러분은 자신을 되찾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어떠한 처지에서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는지 마음의 기준을 잡아서 자신을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은 자꾸 재촉하는데 무엇인지 모르게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공포의 위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으로도 느껴져 들어올 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모든 물상을 통해서도 작용되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만일 어쩌다가 여러분이 영의 눈이 열려서 보게 되면, 수천년 전에 왔다 갔던 수많은 도인들이 만인 앞에 외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옆에는 많은 영인들이 달음질쳐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 같이 가자, 원수가 온다’고 하며 깨우쳐 주려 하고 있으나, 여러분의 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눈은 볼 줄 모르며, 몸은 감각할 줄 모르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탄식하자면 이 이상 탄식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일신만의 탄식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존재의 가치를 전체의 이념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천륜 앞에 용납할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7-183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할 운명
사람이 도의 길을 가는데는 달음질만 쳐서 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비조건과 목적하는 내용을 성사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갖추어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달음질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잃어버렸고, 마음의 본향을 잃어버렸고, 생명의 본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네 가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하는 자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뇨. 본향에 가는 것입니다, 본향. 그 나라에 등록할 수 있는 국민이 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될 것이뇨?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사탄이 갖고 있는 악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아야 되고, 타락한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달음질쳐야 됩니다. 오늘날의 사탄 주권을 하늘 주권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표 밑에서 인간은 진리의 본향, 양심의 본향, 생명의 본향, 사랑의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그 곳을 향하여 달려야 할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6천년은 진리를 찾는 노정이었습니다. 달음질치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진리를 찾고 해명하지 않으면 아무리 달음질쳐 봤댔자 소용없습니다. 내가 진리에 입각한 목적관을 가지고 나타날 때는 모든 가치를 타진할 것이며, 진리가 해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는 거예요. 그런고로 인류는 지금 마음의 방향과 더불어 진리의 방향을 더듬는 단계에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는 진리의 왕이요, 진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 세계 인류는 사조나 주의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이요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나의 진리와 만인류가 화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륜 도덕, 혹은 사회질서를 세워 나오면서 제시된 것이 무엇이뇨? 양심기준에 응할 수 있는 진리의 표준을 찾아 나왔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 지을 수 있으리라고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해결했다 할지라도 자기 앞에 다가오는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생명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뇨. 인간의 마음은 무한의 세계와 인연맺으려 하는데, 이 심적 작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목적관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우주만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목적을 중심한 가치적 인연을 벗어나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기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내외적으로 침범해 오는 모든 악의 조건을 방비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에는 반드시 그 목적지가 있을 것이며, 그 목적지에서는 어떤 인연적인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전체목적은 모를지라도 생활적인 가치의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붙들고 본향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습니까? 보십시오. 역사는 발전해 나왔으며 문화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문화에 따라, 혹은 인지(人智)에 따라 모든 외적인 환경도 어느 정도까지 변화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에는 혁명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냥 그대로 영원이요 불변인 것입니다. 마음에 어떤 목적관이 있어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면 무한대로 달려 나갑니다. 남과 북을 향하는 지남철이 방향만 잡히면 그 당기는 힘 이상의 힘이 없는 한 방향은 돌이킬 수 없듯이 양심세계는 어떠한 외래적인 힘으로 움직여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움직여낼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절대적인 이념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뚜렷한 목적관이 해명되면 모든 세포나 감정까지도 휩쓸려 들어가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양심작용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합니다. 이해하겠어요? 자기가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해요. 물론 주체적인 입장에 있지만 몇 천 만 배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육신을 수습해야 할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도 차이가 벌어집니다.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 양심은 무엇인지 모르게 본질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하여 관(觀)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생관이니 우주관이니 하는 것, 또 무슨 주의 주장이나 진리의 표상이 나옵니다. 상대성을 지닌 완전체라는 거예요.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으면 완전한 플러스(+)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성립될 수 있어요. 이것은 자연현상입니다. 따라서 천상에 영원 불변한 완전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 완전한 주체를 본받아 그 주체 앞에 상대기준을 조성하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노력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턱대고 인간의 마음기준을 옮겨 놓을래야 옮겨놓을 수 없습니다. 몸과 박자를 맞추어서 옮겨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몸을 다스려서 그 몸을 어떤 환경에 몰아넣은 다음 그 심정의 방향을 자연적인 법도와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의 진리의 법도가 세워지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만약에 세계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원칙과 부합될 수 있는 진리가 나온다 할진대, 이 양심은 무한대로 뻗어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들은 진리를 찾아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문명세계에서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 솟구쳐서 찾고자 하는 무한대의 절대자 앞에 자연적인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재촉할 수 있는 진리는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은 타락의 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모양으로 가르쳐 주고 저 모양으로 뒤넘이쳐 나오시면서 하나의 목적에 연결시키기 위한 서글픈 역사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날 내가 인생행로를 걸고 진리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도피행로에 있어서 하나님은 얼마나 수고하셨겠습니까? 오늘날까지의 인간 역사의 모든 서글픈 심정과 인간 역사의 비참한 사정을 논위하게 될 때, 여러분은 무시무시한 역사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진행시켜 나오는 주체자측에게는 더 무시무시한 투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투쟁이 없다면, 여러분이 편히 눈을 감고 자고 쉴 수 없는 비참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마음은 시작과 끝이요 영혼과 실존적인 본체와 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런 슬픔을 영원히 벗어나 해결지을 때까지 그것과 똑같은 자극적인 슬픔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슬픔을 재촉한 것이 인간이요 그런 슬픔을 연결시키고 연장시켜 나온 것이 인간이니, 이러한 인간을 대해 심판하는 것은 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7-186
우리의 갈 길
이제 인간은 진리를 갖추어 가지고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생명을 찾아야 됩니다. 내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뇨. 영원불변의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뇨.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였고 예수도 사랑이라 하였는데, 그 사랑의 주체는 어디 있느뇨. 이와 상봉하여 `내가 갖고 있는 진리의 가치는 이것이외다. 내가 갖고 있는 양심의 기준이 이것이외다. 내가 갖춘 사랑의 기준이 이것이외다’ 하면서 그 가치적인 결정을 받아서 가는 곳이 영계입니다. 영계는 지극히 선한 천상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되는 사탄세계, 악한 지옥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이제 우리는 찾아야만 되겠습니다. 마음의 현상을 보아 내 마음이 이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마음을 무한히 솟구치게 하는 본체 앞에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음적인 마이너스 입장, 혹은 양적인 주체 앞에 대상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진리가 필요합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주의를 찾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 진리를 찾아 헤매던 선조들을 비웃을 수 있는 위대한 용자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역대의 성현 현철들을 대하여 대관절 무얼 했느냐고, 수많은 도를 세운 도주들을 대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항의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고대합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그것이 도피하는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요 구비해야 할 절대적인 조건임에 틀림없다면, 오늘날 인간은, 그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 이런 환경에 나고 싶어서 태어난 인간이 아니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원인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입장에서 가치적인 관계는 갖고 싶어 하되 가치적인 인연을 맺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기의 가치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꺾여 넘어가나 안 꺾여 넘어가나. 되지 않은 꼴을 해 가지고 으시대면 그 주위환경의 만물까지도 `이 녀석’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양심을 가진 사람의 본연의 현상입니다. 돼먹지도 않은 자가 꺼떡거리면 여러분 어때요? `어! 너 잘한다’고 추켜주고 싶어요? 아닙니다. `이 녀석’ 하고 한대 치고 싶단 말입니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본연의 현상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여러분들, 이것을 똑똑히 명심하여 자기의 가치를 주장하고 나서는 자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무슨 주의? 무슨 관? 양심 세계는 주의도 없고 관도 없습니다. 이것 똑똑히 알아야 돼요. 양심세계는 주의도 없고 관도 없어요. 따로 떨어져나가 가지고 해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의 가치는 얼마나 자랑할 수 있느냐? `나는 무슨 주의를 갖고 있으며, 나는 어떠한 존재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놀음일 뿐입니다. 관의 내용을 중심한 진리 앞에, 천리적인 내용을 내포한 어떠한 마음 혹은 생명 앞에, 사랑의 심정 앞에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 여러분 판별해 보십시오. 거기서부터 자기를 찾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7-188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것
우리는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으니,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가 없습니다. 필연적이요 절대적입니다. 진리의 본향에서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마음, 진리와 마음이 합하여서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진리와 마음과 생명이 접하여 천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 이것이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엄연히 사지백체를 갖고 있고 감정을 갖고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시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사지는 무엇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걸릴 것입니다.

손아, 너는 진리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였느냐. 몸아, 너는 진리를 향하여, 본체를 향하여 수시로 달리고 있는 마음 앞에 얼마나 협조했느냐 하고 반문해 봐야 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될대로 되라, 한술 먹었으니 그만, 한잠 잤으니 그만, 이렇게 그만 그만 하다 보면, 인생은 다 지나가고 사망의 절벽에 코를 쥐어박고 가야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무질서하고 무목적적인 입장에서 살라고 대우주의 주인이 우리의 생명을 땅위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원인과 목적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현상세계를 통하여 변함없이 그 목적을 추진시키려는 어떠한 인연이 있는 것을 무시 못할진대, 그 인연을 종합하여 관계와 가치를 논해야 할 인간이 그렇게 시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인간이 아니예요. 여기에 똑똑한 사람이 왔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 인테리인데’ 하면서 어디 가도 도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번 이방면을 노크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마음의 세계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땅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만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아야 되겠어요. 하늘을 높이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세계는 땅의 생명으로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땅의 어떤 목적과 이 세계의 양심작용은 거기에서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어떠한 만족에 취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거나 내 심정이 무한대로 뻗어갈 수 있는 영원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하지 못할진대, 역사의 종말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진리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마음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생명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사랑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7-189
메시아 앞에 완전한 신부가 되는 길
만일 이 땅에 어떠한 메시아 구세주가 나왔다 할진대, 그는 그러한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목적관과 실천적인 가치의 내용을 갖고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생활과정에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는 메시아도 아니요 구세주도 아닙니다.

인류역사가 출발한 이래 지금까지 만민 앞에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방향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게 공헌해 나오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종교입니다.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가 세계의 문화 창조에 위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의 내용이 무엇이냐. 그 내용은 예수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 예수를 구세주라 말하고 있습니다. 구세주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되느냐? 그는 진리의 본체요, 마음의 본체요, 생명의 본체요, 사랑의 본체여야 합니다. 마음의 본체가 못된다면, 그는 절대자의 본체 앞에 상대적인 상대체라도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리가 하늘의 섭리를 돌이켜 보면 역사노정에서 예수처럼 통쾌한 말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하신 이 한 마디만 봐도 멋지고 사나이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명사를 빼놓고도 사나이답다는 거예요. 역사이래 이렇게 통쾌하고 멋진 표현을 한 사람 봤어요? 가상적이라도 좋아요. 내용은 없다 하더라도 이런 멋진 말을 들어봤느냐 말예요.

또 `너희들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정적인 마음을 가진 호남자가 있다 할지라도 이 이상 통쾌한 말을 들어봤어요? 남자로서 최고의 감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안그래요?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목적하는 주체 앞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논리 밑에서 예수의 말씀이 해명되고 모든 조건에 부합되니, 나는 그를 메시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인류를 죄의 굴레에서 도피시켜 주기 위한 왕자로서 우리의 인생행로를 개척하러 오신 선봉자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천상천하에 홀로 나타난 도피의 왕자였다는 말입니다. 후대에 남아 있는 전인류도 죄의 굴레에서 도피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왕자로서 이 땅위에 오신 분이 예수였다는 거예요.

이러한 예수라는 것을 느낀다면 역사적인 진리를 해명받아야 됩니다. 이 예수를 붙들 때 본연의 양심기준이 뚜렷하게 서야 됩니다. 예수님을 볼 때 생명의 영원성이 뚜렷하게 박혀야 됩니다. 이 예수를 볼 때 절대적인 사랑의 감정이 들어야 돼요. 그렇지 못하면 완전한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말이 쉽지, 예수는 억천만상을 다 지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황태자입니다. 하늘 왕국에 영원무궁토록 계실 독생자 황태자이십니다. 이런 목적을 바라보고 세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날이 그 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재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아직까지 절대적이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은 못맺었습니다. 암만 예수 잘 믿어도 언젠가는 떨어져요. 암만 예수가 내 신랑이요 무엇이라 해도, 또 배반할 수 있고 또 떨어져 나갑니다. 진리니 뭐니 주장하는 기독교가 있지만, 인간이 나아갈 마음 방향도 완전히 잡아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는 다시 오셔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개척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를 잘 믿는 것보다도 성경에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야 됩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비운의 곡절을 일으킨 역사적인 모든 내용이, 어떻게 해서 현실과 미래의 세계와 연결되느냐를 알기 위해, 안팎의 검은 장벽을 헤치고 들어가야 되겠고 또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격자들이 나와야만 비로소 진리의 세계가 개척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노정에서 선에 가까이 있고 혹은 진리에 가까이 있던 그 시대의 선봉자들은 어디를 찾아 헤매었느뇨? 광명의 새 아침을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으로는 영광스러운 느낌을 가졌지만 생활면에서는 지옥의 뒷골목을 헤매었습니다.

7-191
진리의 뿌리가 박히는 곳
진리는 거기에서 연락됩니다. 진리의 터전은 거기에서 뿌리박습니다. 진리는 호화찬란한 최고의 문화수준에서 뿌리 박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문화의 뒷골목에서부터 진리의 뿌리가 박혀야 됩니다. 진리의 뿌리는 천상에 박을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 땅에 박아야 됩니다. 진리의 뿌리는 천국에 둘 것이 아니라 지옥의 밑창에 두어야 돼요. 거기에 진리의 뿌리가 박히는 날, 천상과 연락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가 나타나게 될 때, 하늘의 새로운 생명의 기준은 세워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리를 이상적인 단면으로서, 소망의 표적으로 세웠지마는 그것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는 그 뒷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생명의 표상을 바라보며 생명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고, 마음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고, 사랑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도를 찾아나가는 기준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본체적인 기준에서 즐거워하는 것 같지만, 도의 뒷골목에서 허덕이면서 그것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량한 도의생활입니다.

어떤 민족의 문화를 보더라도 그 민족이 혁신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동기와 원천은 어디서 나오느뇨? 불쌍한 자를 붙들고 울 수 있는 마음을 폭발시키면 새로운 소망의 불길은 타오르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불길은 타오를 거예요. 이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이 나라가 소망이 있는 나라가 되려면, 숨김이 없는 경건한 마음으로 불쌍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붙들고 그들을 위하여 울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나라는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예수의 땅 위에서의 처지는 어떠했던고. 가공적인 이상세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허황된 입장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가치를 노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그렇되 생활 면에서는 지옥의 왕자였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생활면에서는 지옥의 황태자였어요. 진리를 주장하고 진리를 개척하는 데 누구보다도 노심초사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를 알면 열 가지를 근심하신 예수였습니다. 자기 일대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고통을 느끼지만, 예수는 하나를 알고 하나의 진리를 해명해 주는데 천만사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 지옥의 왕자의 생활을 하신 예수였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였기 때문에 지옥에 가도 당당히 지옥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놀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체험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은 사실로 징계하고 징벌하고 형벌 한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어떤 주권자가 법적인 조건에 걸린 자를 처벌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느낄 수 있는 심각한 입장에서 형법적인 조건을 세워 놓는다면 이 나라는 살 가망성이 있습니다. `너는 그래도 나는 관계없어’ 하는 입장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심적인 느낌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권한을 갖고 오셔서 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어찌하여 사랑하라 하셨느냐. 거기에는 `순간적인 입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네 모습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보다 더 좋은 데서 사랑하시리라’ 하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타난 모습은 처량하였으나 180도 반대 방향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 아십시오. 과연 자신이 늠름한 내용을 갖춘 모습이 아니고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193
진리는 사탄을 무찌르는 무기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와 나의 인연이 어떠한 관계로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여러분과 여러분이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어떠한 곡절이 맺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가신 예수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실체적인 예수를 논위할 수 있는 영광의 가치를 가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예수를 믿어왔고 그를 역사적인 구주로 존칭하여 왔으되, 하나님의 섭리 앞에 메시아의 실체 가치를 대하여 논위할 수 있는 완성의 기준을 갖고 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이 땅의 역사적인 한 실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면 그는 진리의 왕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리(요16:12)” 하셨고,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가진 그는 진리의 실체만이 아니었고 양심의 본원이요, 생명의 본원이요, 사랑의 본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 앞에 `이것은 이렇지 않습니까, 이러이러해야 되지 않습니까? ‘ 하며 타진할수 있는 멋진 사나이가 있다 할진대, 우리가 쌍수를 들어 그를 환영하고 모시며 예수보다 더 높인다 해도 예수께서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메시아의 기준을 알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를 알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으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도 하셨습니다. 전부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예수를 성경 가운데 재현시켜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천고의 의무입니다. 그 예수를 이 성경 가운데 재현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으매, 그 예수를 내 마음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마음이 지향하는 그 기준에 안 맞으면 전부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내 심중에 재현하고, 내 생명이 약동하는데 재현하고, 내 심정이 움직이는 데 재현할 수 있는 자라야 오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나는 가공적인 주님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한 주님은 필요없습니다.

도피의 노정에 있는 인간에게 적의 공격이 있을 것이요, 적의 방비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무찌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무엇이냐? 진리입니다.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해명하고 하나님을 배신한 사탄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예수를 내세워 결국에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내용을 갖출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사탄이 무엇과 같으냐. 검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호사입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입니다. 우리는 죄수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피의 노정에서는 우리가 검사의 입장에서 예수를 변호사로 하나님을 심판자로 모시고, 사탄을 범죄자로 처벌해야 합니다. 사탄의 근원부터 모든 것을 해명하여 `이러이러한 죄상이 있으니 천상의 처벌이 있기를 바라오’ 하면 `오냐’ 하고 대하시는 예수와 거기에 판단을 내리시는 아버지를 모실 수 있다면 무서울 것이 무엇이겠어요. 그런 승리의 기준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와 인연을 가졌다 할진대, 그 마음의 세계는 무사통과입니다. 그 마음에 공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공포의 현상은 악에 의한 흑운의 날개를 펴고 천지간에 움직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것을 해명지어 그 주체를 몰아낼 수 있는 입장에만 선다면 세상천지를 무너뜨리는 어떤 무엇도 그런 사람의 생명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194
하늘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귀빈
여러분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이에 진리의 물결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양심세계의 흐름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감촉을 접하고 있습니다. 심정의 인연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들을 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황공하옵니다.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반겨 맞은 때가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대 천상과 지상의 범죄자일 것입니다.

`진리의 물결이여, 내 마음을 치소서. 하나님의 심정의 움직임이여, 내마음에 임재하소서. 하나님의 생명의 감촉이여, 내 마음에 임재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이여, 내 심정을 주관하소서’ 하면서 눈물짓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학박사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늘이 환영하고 초대할 수 있는 귀빈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그런 자리에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민족의 죄악상을 바라보고 `이 민족들아! 너희들은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4천년 진리의 흐름이 있는 것을 모르는구나. 너희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심성이 솟구치고 있는 것을 모르는구나. 너희들의 몸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고, 오늘 이 시간도 애달픈 심정과 서글픈 심정으로 곡절과 비애와 절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모르는구나’ 하시면서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갔습니다. 예수는 왔으되 할 일을 못다 하고 가고 말았으니, 남기신 그 일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 배워 두어야 할 그 진리를 누가 인계 맡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냐. 개척해야 할 마음밭을 누가 개척할 것이냐. 세워야 할 생명의 기준을 누가 세울 것이냐. 화하여 영원히 영원히 인연맺어야 할 사랑을 누가 인연맺어 줄 것이냐. 예수는 한탄, 한탄, 한탄하면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해야 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가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런 심정에 잠기어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거기에 예수의 눈물이, 피 살이 묻어 있는 것을 알고, 천지를 바라볼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중에 점점 스며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님! 예수님!’ 하면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밤에도 쉬지 않고, 낮에도 쉬지 않고 천륜과 함께 달음질친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러한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그러한 청년 남녀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들이 호화찬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는 그 시간에도 가슴을 붙안고 `하늘이여! 땅이여! 이 운명의 서글픔을 나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 이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만상의 뒷골목에 뿌리를 박은 생명의 이념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여 망합니다. 높은 자리에 가기 전에 낮은 자리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피를 뿌리고 쓰러지면서 `이 민족아, 이 나라의 운명아’ 하여 염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런 염려의 음성을 듣고 그곳을 찾아갈 줄 아는 위정자들이 있다면 그 나라는 흥합니다. 하늘의 역사는 그러한 역사였습니다.

이 땅에 온 어떤 선지, 혹은 하늘이 택한 어떤 훌륭한 자 가운데 피뿌리는 노정을 가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며, 피 땀 흘리는 노정을 가지 않은 자가 어디 있어요? 인생행로의 뒷골목에서 허덕이고 밟히고 차이고 밀리고 쓰러짐을 당하여도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서러움 속에 있는 사람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뒷골목에 생명의 뿌리를 박기 위하여 허덕이고 몰리고 있습니다. 이 민족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와 생명의 흐름과 진리의 흐름과 심정의 흐름과 사랑의 흐름과 인연맺어 그 터를 넓혀 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도 무시 못합니다. 무시 못해요.

인류의 뒷골목에서 인류 전체를 책임지겠다고 하신 예수는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고통의 메시아였습니다. 슬픔의 메시아였습니다. 죽음의 메시아였습니다. 지극히 억울한 뒷골목에서 인류를 책임지고 도매금에 팔리운 예수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성큼 뛰어 나가서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구 죽겠구나. 너도 가라’ 하고 울면서 덥석 붙드는 놀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부정하겠어요?

이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라는 것이 무엇이냐? 사탄세계의 권한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의 권한, 자기를 중심삼은 비판의 기준, 자기를 중심삼고 느끼는 세계는 세상의 왕사탄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끊어버리고 외로이 눈물지으면서, 암담하고 캄캄한 인생행로의 뒷골목에서 허덕이는 데 있어 거름이 되고 거기에 한 원소 원소로서 흡수되어 생명이 뿌리박을 터전을 닦는 사람들이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7-197
새말씀을 가지고 재현하는 주인공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활을 해야 됩니다. 호화찬란한 문화의 첨단에서 새시대의 꿈을 노래하며 거기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역사로부터 규탄받을 것이며, 이 세상 말단의 심판대 위에 밀어 넣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너희들은 다 가라. 내가 이 곳을 지켜 주마’ 하면서, 사망의 구렁텅이를 자신의 몸으로 피눈물로 메워서 평지로 만들고자 하는 모임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그 모임을 통하여 운행하실 것입니다.

역사는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모양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좋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들, 이것은 다 배워서 알지요.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은사가 많다는 거예요.

이제 가야 할 우리는 마음을 헤치고서 `하나님이여! 예수는 오셨다 가셨으되, 나의 마음이 무한히 솟구쳐 절대자 앞에 늠름히 나설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심적인 기준을 갖지 못하였으니, 저는 어이합니까? ‘ 하고 항의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붙들고 항의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붙들고 항의해야 되겠습니다. 남의 말만 믿다가는 망합니다. 망해요. 한국백성은 남의 말을 듣다가 예속국가가 되는 비운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 못하는 입장에서 인류를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남의 말을 무조건 100퍼센트 믿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틀린 형태가 있기에 가라지와 곡식을 비유했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터전과 진리의 터전이 내 심정에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고 말은 했지만, 그 말한 내용이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땐 항의를 해야 됩니다. 항의를 하려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변증을 해야 됩니다. 변증을. `아버지, 이러이러한 내용은 이러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할텐테, 왜 그렇게 안 되었습니까? ‘ 하면 하나님은 대번에 `오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봤어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주님이 재림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미륵불이 이 땅에 오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이 땅에 나타날 것을 말합니다. 각 종교가 주님의 재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분은 성경의 말씀을 재현하는 주인공, 어떠한 도의 말씀을 재차 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고차적인 내용의 새말씀을 가지고 재현하는 주인공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하늘이 있다할진대, 하늘 앞에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항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 봤어요. `예수님이 진짜 그래? 하나님이 진짜 그래?’ 하며 항의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될 것입니다.

오늘날 도를 믿는 도인들이 도주를 숭상하고 역사적인 어떠한 방향성을 갖추어 나왔으나 그 생활적인 면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도주의 상투 끝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예요? 그들의 경서에 나타난 것으로는 모든 것이 해명되지 않으니, 그 꼭대기를 밟고 올라가서 하나님께 항의를 해야 됩니다. 도주를 대하여 항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뭐예요? 믿고 뭐 할 것입니까? 신부가 되겠다고요. 신부가 되어서는 뭘 할 것이냐? 잘 살아. 살면 뭘 할 것이냐. 주고 받고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그렇게 안 됐으면 항의도 해야 될 게 아니예요?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를 만나자는 것인데, 예수의 사랑을 받아 보았어요? 난 그렇게 안 믿습니다. 예수야 사랑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고 상관할 것 없이 나는 예수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습니다. 예수는 조건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신부 명사권내에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도 신부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이 천상의 대 위업을 인계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을 갖추기 위해서 마음문을 열고 진리의 물결이 파도치는 감촉을 느껴 보았습니까? 지극히 맑은 양심을 재촉해 봤습니까? 혹은 양심에 속삭여 들어오는 생명의 흔적을 붙들고 노래해 봤습니까? 무한한 세계와 인연을 맺어 생명의 폭발력으로 나타나는 심정적인 그 무엇을 느껴 봤습니까? 못 느껴 봤습니까?

7-199
인간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피조물이지만 자가창조의 진리적인 면, 자가창조의 심정적인 감성, 자가창조의 생명적인 감성, 자가창조의 사랑적인 감성을 자기 분량만큼 느끼게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받을 것이 아닙니까? 죽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진리적인 모양이든가, 심정적인 모양이든가, 마음의 모양이든가, 생명적인 모양이든가, 사랑의 모양이든가 자기의 본성을 근거로 한 자동적인 발동력을 가질 수 있는 자극을 느낀 자라야만 하나님이 `오냐 내 아들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겠어요?

까딱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본성적으로 부여된 기반 위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진리, 자기의 자신의 마음의 힘, 자기 자신의 생명의 충격 등 자가자칭할 수 있는 원천적인 내용, 동기적인 내용을 갖추어야 절대자 앞에 상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면 그저 까먹고 세워 주면 쓰러지고 하는 자들은 안 됩니다.

오늘날 도피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나의 모습은 어떤가. 하늘은 무엇을 바라고 계신가. 우리 인간이 말씀하신 진리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실체가 되기를 고대하시며 6천년 동안 하나님은 허덕이셨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들어가게 될 때 그리스도가 그런 것처럼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적인 느낌을 가지고 이 사망의 길을 멋지게 가려는 도피의 왕자는 붙들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는 진리와 더불어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세계와 화하고 생명원칙과 인연을 맺어 무한히 운동하고, 심정세계와 더불어 무한한 창조의 묘미를 나타내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이 절대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자기의 가치를 논위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논위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만일 어떤 책을 써서 `거기에 아무개 아무개는 이렇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이 `야 이놈아! 너 기분 나쁘게 왜 그러느냐’ 할 것 같애요? 어때요?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의 마음이 이렇지 않습니까’ 하며 좋은 곡조로 노래를 불러주면 어떻겠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떨 것 같애요?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자기의 심성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자극적인 감성을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어 가지고 그 가치를 보고 기뻐하시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없어지고 망합니다. 자기의 가치를 100퍼센트 노래한 자들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효자, 열녀, 혹은 일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충신들도 그 국가가 세계 사조에 휩쓸리고 융합되고 망하게 될 때에는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도피성을 향해 달리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개인적인 것과 자기 중심적인 감정은 모두 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6천년 역사 이래 그런 사람이 나왔다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그런 사람이 안 나와서 한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에 한국에 그러한 청년이 나온다면 하나님을 이 한국에 모셔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언이 아닙니다. 전파를 캐치(catch)하는 수신기가 강력히 끌어들일 수 있는 내용을 갖출 때는, 모든 힘을 받아 가지고 다시 발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원동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붙들고 자탄하였고, 나 하나에 국한된 가치를 논위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처량합니다. 일개 가정, 일개 국가, 세계의 주의 사상에 자기의 목을 걸고 허덕이는 인간들의 무가치한 모습을 바라보고, `야 이놈들아, 비켜!’ 하고 소리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오시는 용자가 메시아입니다.

7-201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관계의 세계
관념적인 역사관은 쉬 지나갑니다. 인식적으로 이 우주를 해명하지 못하면 역사는 이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모든 기준과 기반을 닦아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명해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역사의 흐름과 내적으로는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에 박자를 맞추어 가며 멋지게 뒤넘이칠 수 있는 회전지점에서 하늘 앞에 선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승리의 왕자다’ 하고 인쳐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사람은 그렇게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진리보다도, 천만 배 훌륭한 스승의 말보다도 내 마음의 말을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그 마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무엇이 나옵니다. 그것이 창조의 내용입니다.

어떤 위대한 과학자가 어떤 고분자 공식을 풀어 들어갈 때, 거기에 비례될 수 있는 상대적인 기분을 못 잡아서 허덕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대적인 기준만 딱 잡으면 그 모든 것이 해명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 기준을 잡기 위해서는 잠을 잊어버리고, 먹을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생활적인 감정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자기의 오관으로 느끼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허덕일 때 어떠한 내적인 체계로부터 외적이요 실증적인 공식이 문화의 궤도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작용을 하는 중간 기관밖에 못 됩니다. 그러한 인간인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원인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목적의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의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관계의 세계. 그런데 이 관계의 세계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에 어떤 공식에 갖가지 수를 대입시켜서 답이 나오면 그 답 외에 나머지 것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관계의 세계가 비참하였으니 이 관계 세계의 비참사를 해명하여 내정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반드시 영생합니다. 역사와 더불어 심판받지 않습니다. 끝날과 더불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밤잠을 개의치 않고 기도하신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인생길이 바빠서였습니다. 자신의 길도 해결해야 했고, 민족의 길도 해결해야 했고, 세계의 길도 해결해야 했기에 몇백배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그리하여 인생행로를 가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인가 각자가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행로의 낙오자가 되지 말고, 이 도중의 인생행로를 달리는 이 활주로에서 떨어지는 추락자가 되지 말고, 멋지게 대공을 날으는 제트기처럼 날아갈 수 있는 용자의 모습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7-202
기 도
아버님! 오고간 사람들은 많사오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생명의 인연을 맺어 준 분은 없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그 한 분을 인류는 역사와 더불어 고대하였사옵고, 오늘도 하늘을 향하여 서글픈 호소를 하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엎드린 당신의 아들 딸들, 말씀을 듣고 보니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사옵니다. 어떠한 대상적인 존재의 관이 문제가 아니고 나를 중심삼고 결정지을 수 있는 실체적인 내용이 문제였사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서 아버지라 부르는 그 한 모습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러한 아들 딸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는 마음이 무한히 아버지 앞에 화하고, 몸도 아버지 앞에 화하여 영원한 아버지의 생명과 사랑 앞에, 내 스스로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증거한 것이 하나요, 해명한 것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불변의 실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들었사오니 오늘 저희가 그런 느낌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어떠한 자리에 있는지, 졸고 있는지, 혹은 곁길에서 허덕이고 있는지, 쉬고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스스로 싸움도 해야 되겠고, 마음의 싸움도 해야 되겠고, 생명의 싸움도 해야 되겠고, 심정의 싸움도 해야 되는 개척적인 노정이 저희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저희들이 목적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오늘 이 목적을 향하여 가는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격려하여 주시옵고, 본향에 가까이 갈 수 있게끔 생명의 말씀이 저희의 뼈와 살 깊이에 영원히 남아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