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6 to 7-147: 하나님의 경주장에 선 인간들

하나님의 경주장에 선 인간들
1959.08.09 (일), 한국 전본부교회

7-126
하나님의 경주장에 선 인간들
고린도전서 9:14-27

[기 도]

아버지, 이 날은 수많은 당신의 아들 딸들이 양의 무리를 모아 놓고 남기신 섭리의 뜻을 받들어 분부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의 마음 몸 위에 같은 은사로 움직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도 그 중의 한 모습으로 아버지 존전에 모였사오니, 아버지, 서 있는 모습을 긍휼히 보시옵고 앉은 모습을 측은히 보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 나를 중심삼은 어떠한 주의 주장이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의식적인 관념이 있다 할진대, 이 모두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다시 창조함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저희들이옵고, 복귀의 한을 벗지 못한 저희들이옵기에 당당하게 하늘 앞에 주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버지 앞에 아무런 이념적 조건도 대상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아무리 하늘 앞에 자기를 변명하며 자기의 어려움을 내세운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과 수고 앞에는 비교할 수 없는 처량하고 불쌍한 모습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제 나는 스스로 내가 된 것이 아니옵고 내가 나 아님을 알았사올진대, 내가 나 될 수 있게 한 본연의 그 자체를 그리워하며 본연의 마음속에 내가 스며들고, 본연의 그 주인공 앞에 머리 숙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우주의 절대적인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마음은 알고 있사옵니다. 또 그것이 저희의 행동 일체를 제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이것은 무목적적 인연 가운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목적에 의해 제한된 환경의 노정을 거쳐 나가야 할 운명에 처한 자체들인 것을 마음으로 느낄줄 아는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마음으로 그리며 아버지의 무릎 앞에 모였사온데, 이들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며, 이들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는지 모르고 있사오니, 아버지, 원컨대 본연의 내 자신이 하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부끄러운 얼굴과 부끄러운 시선일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이 그리워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도 민망하여 `아버지!’ 하고 부족한 손길이라도 내밀면 그 손길을 아버지께서 붙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한 시간이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경배를 하더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경배하고 싶사옵고, 아버님과 인연을 맺고 싶사오며, 그 이외 일체의 것은 원치 아니하옵니다. 하늘나라의 금은보화와 같은 찬란하고 영광스런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원치 아니하옵고, 오로지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님과 동거할 수 있는 그 하나의 약속, 그 하나의 생활적인 사실만을 원하옵니다. 그러한 것들이 영원히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영광의 표적이 되기를 바라면서 저희들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이날 저희들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세우고자 하시는 심정을 세우시어서 아버님과 저희와 끊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부르고는 있사오나,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저희는 그런 아들 딸들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옵니다. 아들 가운데는 아들 같은 이도 있고 양자도 있고 참아들도 있다 하였사오매, 저희들은 아들 같은 이도 원치 아니하옵고 양자도 원치 아니하옵니다. 아버지 심중에서 영원히 영원히 사라질 수 없고, 그 뼈 살이 아버지와 영원히 인연 맺어진 사실을 거부할 수 없고, 아버지와 영원히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직계혈통인 친아들딸, 피 살을 이어받은 친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그러한 아들 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당한 고통이 저희들이 고생이요, 아버지의 슬픔이 저희들의 슬픔이요, 아버님의 억울함이 저희들의 억울함이요, 아버님이 쌓아 올려야 할 책임을 저희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 느껴야 될 줄 아오니, 그러한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섰사온대 무슨 말을 전하오리까? 아버님의 아들 딸이 되고자 하지만, 이 시간 아버지께서 당신의 심정을 체휼케 하시고 저희와 인연 맺고자 하시는 사실을 저희들이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아무리 말씀이 놀랍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저희와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연할 수 있고, 아버지의 마음을 통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몸을 붙들 수 있는 체휼적인 한 시간이 되게 이 시간을 맡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전하는 자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어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듣는 자의 마음이 아버지의 심정에 반응되어, 주고받는 영광의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체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빚어 만들어질 수 있고, 본성의 자체를 찾아 아버지의 취하심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본연의 성상을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율적인 역사가 이 시간 벌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모진 핍박의 화살을 받아가면서도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길로 몰아내심도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이며, 이 길은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의 길인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각오한 결심과 저희들이 움직이는 모든 행동이 승리의 조건이 되고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약속권내에서 살 수 있는 아들 딸들로 빚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이 시간 사탄이 틈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128
말 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은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경주장에 선 인간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겠습니다.

7-129
인간은 복귀섭리의 경주장에 나선 경주자
수많은 역대 선지자들도 그랬거니와 현재 살고 있는 인간들도 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떠한 목표를 향하여 인생행로를 달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떠한 목표, 막연하나마 어떠한 목표를 앞에 놓고 그생활하는 형태도 여러 모양으로 전개되어 나왔고, 또 민족이나 역사의 형태도 여러 모양으로 전개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연도 없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어떠한 인연 밑에서 현실에 부합되어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인연과 그런 목적을 중심삼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는 그 존재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인연을 맺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목적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그 인연권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선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사탄과 악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악의 인연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을 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찾으려 하십니다. 다시 찾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인류 역사노정을 붙들고 뒤넘이쳐 내려오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역사의 방향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한때를 향하여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양심기준을 중심삼고 그 목적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 한 경주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왔다 갔던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경주장에 섰던 인간이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된 인류를 놓고 여러 모양으로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민족이 다르면 민족이 다른 대로, 주의 사상이 다르면 주의 사상이 다른 대로, 전통이 다르면 다른 대로 하늘은 역사의 배후에서 여러 가지로 조정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정하신 하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 어떠한 경기를 한다면 그 경기의 막이 내려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 인간과 더불어 악을 멸하기 위해 싸워 나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경주자의 입장에 선 자체인 것을 자인할진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것입니다. 하늘이 수고하시어 세워진 내 자신인 것을 알고, 이런 경주 마당에 서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할진대,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어떠한 훈련을 시켜 이 경주장에서 달리게 할 것이며, 나는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노정을 거쳐서 그 목적지까지 달려갈 것인가. 이것이 너나없이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선지선열 가운데는 그 경기 프로의 한 부분을 맡아서 어떤 표준을 세우고 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선지선열들은 최후의 막이 내려지는 그 순간까지의 경기 전체, 즉 하늘의 전체 섭리를 다 거쳐간 것이 아니라 어떤 한 부분 부분을 맡아서 종결지었고, 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복귀의 경주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에 들어선 우리들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생애노정을 거쳐 달리고 있는 내 자신, 달려야 할 내 자신, 달리지 않으면 안 될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보면 주의 사상도 많거니와, 종교 세계를 바라보면 종파도 많고 교파도 많습니다. 민족이 다름에 따라 그 민족에 의한 주의, 혹은 그 민족을 위하여 나온 종교 등 여러 모양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주의나 그런 종교는 하나님의 섭리 프로 권내의 전체 내용을 갖춘 주의가 되어야 했고 종교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못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한 민족에 해당하는 주의, 어느 한 민족에 해당하는 종교, 또는 어느 한 시대에 해당하는 주의, 어느 한 시대에 해당하는 종교 형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주장에서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어떤 한 부분의 사명을 담당한 주의와 종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131
경주의 형태와 상급 주는 날
우리가 경주장에 가 보면 100미터 경기도 있고 200미터, 혹은 5,000미터, 10,000미터 경기도 있고, 최후에는 마라톤 경기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경기장에 나선 몸인데, 어떠한 경기를 책임지고 행하여 이 우주사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각자의 가치, 혹은 각자의 인격이 차이가 있을지라도 어떤 분야를 정하여 그 경기 종목에 있어서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늘이 원하는 기준을 세워 주기를 하늘은 고대하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경기장에 나선 몸이니 생명을 다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 생애노정을 가는 동안 나는 어떠한 경기에서 무엇이 되어 하늘 앞에 서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섭리를 해 나왔지만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아직까지 하나님의 모든 경기종목들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려야 됩니다. 이 경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온 세계 인류, 더 나아가서 과거에 왔다 갔던 수많은 인간들과 앞으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의 수많은 인간들에게 이 경기의 분야 분야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상급 주는 한날이 무슨 날이야. 기독교의 명사를 빌린다면 심판날입니다. 심판날은 상급 주는 날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적인 명사를 빌린다면 끝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자신에 돌아와서 여러분은 하나의 경기 종목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웠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반성해야 될 문제입니다. 달리는 데는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 놓고 자기 멋대로 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요, 또 경기장에 들어와서 정상적인 코스를 달리기는 하되 갖춘 역량이 부족하여 중간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끝까지 달리기는 하였으되 상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상급 받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셨으나 아직까지 경기자들에게 친히 상급을 주지 못한 입장에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계 인류 앞에 나타나셔서 지금까지 달려나온 수많은 경기자들에게 그 경기종목에 따라 상급을 줄 수 있는 그 한날을 영계의 영인들도 바라고 있고 지상의 우리들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날이 끝날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132
경주자가 갖춰야 할 자세
이렇게 달려가야 할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야 할 바에는 어떻게 가야 될 것이냐. 경기장에 나서는 자로서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준비. 준비는 무슨 준비? 내적 준비와 외적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신념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명령하에 이러이러한 코스를 달려야 할 나인데, 그 코스에 장애물이 있으면 그 장애물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되겠고, 또 그 신념을 중심삼고 실제로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내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심신을 연단함으로써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데 있어서 최후의 목적지까지 가기 전에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누구한테도 지지 않겠다는 신념, 최후의 승리자로 서기 위한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최후의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데 있어서 내 몸이 어떤 장애물에 부딪치더라도 이것을 밀고 달려나갈 수 있다는 신념이 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되, 과연 경주장의 경주자의 입장에 서 가지고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태세를 갖춘 자가 얼마나 됩니까?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역사의 움직임에 휘감겨 나가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여러분 자신은 그러한 욕망 밑에서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경주자의 태세를 갖춘 자체가 되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느 분야에든가 소속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머물 수 있는 위치와 처지를 갖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어떤 목적을 향해 어떤 코오스를 달려 나간다는 관(觀)이 서 있지 않은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거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필요한 것은, 나는 이러한 목표 밑에서 이런 각오로 마음과 몸을 연단하여 달음질쳐야겠다는,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 이겨야 되겠다는 스스로의 내적인 준비와 외적인 준비를 하는 한때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준비의 한때를 갖지 못한 자기 있을진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내적인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자기 개인을 위한 준비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국가를 대표하는 어떤 마라톤 선수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달리게 될 때, 최후의 우승을 하여 그 영광을 자기가 지니기 위해 달리는 것보다도 내 배후에는 나를 낳아준 민족이 있고 세계 앞에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달린다면, 그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개체의 영광과 자기 개체의 목표만을 위해서 달린다면, 괴로움에 부딪치게 되면 거기에서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념을 갖는 데 있어서 그것이 자기를 위주한 신념이어서는 안됩니다. 민족을 위주한 신념, 세계를 위주한 신념, 더 나아가서 하늘과 땅을 위주한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 천지간에 있는 피조만물 전체의 승패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신념을 갖고 달린다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달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나가다가는 지금까지 지탱해온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는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바랐던 소망 이상의 어려움이 휩쓸려 들어올 때에는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신을 단련시키는 일과 하늘과 땅을 대하여 어떤 사명적인 하나의 목표 밑에서 내가 달리고 있다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막연하나마 하나님을 위해, 선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선은 제한된 환경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선은 한정된 것이 아니예요. 제한되고 한정된 한계선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막연하나마 그런 표준 밑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7-134
경주장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떤 경기 종목에서 기필코 어느 등수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출발선에 나서서 달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왔다 갔던 성현들은 우리 인간 앞에 어떤 사업분야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사업으로 성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갈 길, 마음의 갈길, 정신의 갈 길, 우리의 생명이 움직여 나갈 길을 지시하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의 사상이 움직일 수 있는 길, 우리의 생명이 움직일 수 있는 길, 이길은 내 개체의 길만이 아닙니다. 천추만대를 걸어 놓고, 혹은 역사를 걸어 놓고, 어느 시대든지 공식적이요 공통적인 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길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는 하늘의 백성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할진대, 그 목적이 이뤄지는 날 나로 말미암아 하늘땅이 같이 즐거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을 대표하여 나선 경주자가 우승할 때는 민족 전부가 우승한 것이 됩니다. 그 경기 종목은 적더라도 그 가치의 영광은 전체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내적인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가치적인 표준 밑에서 그 가치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체의 가치적인 신념을 단련할 수 있는 한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달리고 있으니, 패자가 되든지 승자가 되든지 할것입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결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는 이기겠다는 신념과 목표를 향한 불변의 심정을 가져야 하고, 외적 준비로는 달리기에 간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나가는 사람은 될 수 있으면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방향으로 내 몸이 어느 때든지 움직여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연단이 필요한것입니다.

그런데 경주장은 내 목표를 향하여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달리는 이 경주 마당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습니다. 그 장애의 고비 고비는 우리의 선조들이 패배하여 쓰러진 장면 장면인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의 결심을 자랑하고 나서는 어떤 위인이라도 그 장애물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우리의 앞길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장애물에 걸려 쓰러진 고비 고비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될 수 있으면 심정이 움직일 때 그 몸이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간단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몸을 스스로 연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연단하려면 편안한 자리에서 안 됩니다. 연단이라는 것은 들이침을 받는 자리에서 되어집니다. 이러한 내적 준비의 수련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들이칠지라도 이것을 쳐부수고 나갈 수 있는 내 몸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적 결심도 변할 수 없거니와 이 몸에 뒤넘이치는 시련이 부딪쳐 온다 할지라도 거기에 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을 대하여 하늘은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물을 깁고 있는 베드로를 부를 때,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도의 길을 찾기 위하여 산중수도하는 것도 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 각오 밑에 거기에 대비되는 외적인 각오, 청산조건을 구비해 놓고 어떤 것에 부딪쳐도 나간다는 자신, 맨 밑창에 떨어져도 심신을 지탱할 수 있는 자신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달릴 수도 없고 경주 마당에 나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경주 마당에서 하나의 종목을 택해 달려야 할 하나의 경주자이니,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변치 않는 신념을 갖고 연단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자의 태도, 달리는 자의 태도, 도의 길을 가는 자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그 목표를 정복하기 위한 결의에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는 막연하게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천당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 어떠한 종목을 통과한 그룹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막연하게 나는 예수를 믿고 천당 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늘이 협조해 주는 분야도 있지만, 여러분 자신들이 갖추어야 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주자로서 준비할 바는 내적 준비와 외적 준비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경주자로서 알아야 할 것은 달려야 할 코오스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어딜 가면 어떤 무엇이 있고 또 어디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알아야 할 것은 옛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코오스를 달렸으나 실패했던 코오스라는 것입니다. 달렸다고 다 우승한 것이 아니라 달리다가 그만 둔 코오스라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7-136
달음질하는 자가 알아야 할 것
도의 길이 그렇습니다. 역사가 생겨난 이후 도의 길을 간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도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 앞에 나선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최후의 승리자’라고 하며 상급을 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지금도 달리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달리는 목표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전체 경주의 목표인 우주성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종목이 작다 하더라도 우주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때까지 지속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100미터 경기종목에서 한때에 우승한 자가 있다면 그것으로써 그를 우승자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승한 그 가치와 영광을 끝날까지 지탱해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달리는 마당에 서 있는 우리들은, 이 달리는 코오스의 고비 고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진 사정도 알아야 됩니다. 어떤 때는 어떻게 쓰러졌으며 어떻게 싸우다가 어떻게 꺾어져 나갔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막연하게 목적지를 향하여 달렸었는데,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들은 막연한 목표 밑에서 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달릴 바에는 그 코오스에 대한 모든 내용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코오스를 달리기 위해서는 복귀의 코오스를 거쳐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세요. 하늘을 찾아가는 노정에서 경주자로 나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출발은 어디서부터 할 것인가. 아담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인간이 출발한 기점은 어디서부터냐. 아담가정에서부터입니다. 거기서부터 달려 나왔습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 인류가 동반하여 6천년 동안 달려 오늘 이 시간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경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선조로부터 달려나오던 모든 전통적인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럴 게 아녜요. 무슨 경기를 하고 어디에 소속되어 어떤 놀음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무슨 경기 종목에 참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과거 어느 누구 누구가 기록을 냈다는 것도 알아야 되고, 어느 누구 누구가 어떻게 실패했다는 것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악조건 혹은 선의 조건을 알아 가지고 그 악조건에 걸릴 수 있는 모든 것에 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행로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장애물을 놓고 가로막고 있습니다. 보이는 장애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상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쓰러진 고개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고비 고비와 고개 고개가 있으니 여기에 대한 상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고 미래를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경주자가 알아야 할 상식입니다. 이런 코오스로 나가다가 주최자측이 어떠한 목표 밑에서 계획했던 그 코오스를 달리할지라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선지자들이 달려나온 역사적인 코오스를 알고 또 그 코오스에서 싸워나온 경로, 그리고 싸우고 있는 현실의 사정과 앞으로 싸워야 할 계획을 다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 알아야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자의 생활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해 나왔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어떠한 프로, 어떠한 계획하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는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 선 사람들을 경주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역사해 나오면서 이 경기종목을 운영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골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로부터 인류의 종말시대까지 일관된 목표 밑에서 일관된 프로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7-138
하나님의 섭리를 대신할 수 있는 종교
이런 견지에서 내가 어떠한 인생행로를 달리는 경주자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역사성을 띤 종교를 찾아야 될 것입니다. 또 시대성을 띤 종교를 찾아야 되고 미래성을 띤 종교를 찾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종교라야 인간이 최후까지 믿어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지만 그 수명은 몇세기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헤아려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르는 가운데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시작하여 우리들이 가고 난 후 미래까지 섭리하실 것이어늘, 그런 섭리를 경영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프로를 대신할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어떤 종교이어야 할 것인가? 역사적인 면에서 공헌하는 종교요, 인류역사 시초의 인연을 갖고 나온 종교라야 됩니다. 그리고 선악의 기원을 논단하는 종교여야 할 것이며, 인생행로의 모든 역사상을 포용하고 미래의 최후 목적지에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종교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다 할진대, 오늘 이 시대에 잘했다고 하여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나라에는 수많은 경주자들이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노정에서 경주 마당을 달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 있는데, 경주 마당에서 죽어간 사람, 혹은 어떠어떠한 천태만상의 사정을 갖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다 모아 놓고 그들을 대표하여 상을 받아야 할 존재라면, 그는 옛날의 선조들이 가지 못한 것을 다 갔다는 승리의 조건을 갖추어야 되고, 또 오늘날의 인간들 앞에서도 승리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또 미래의 인간들도 `옳소이다’ 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춘 자라야만이 하나님께서 표창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행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최후의 한날의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뇨?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더 나아가서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우신 목표를 역사적인 목표요 시대적인 목표요 미래적인 목표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이러하고 우리 인간들이 바라는 소망의 기준도 그렇다 할진대, 하나님도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상을 주실 때 슬퍼하며 주실 것이 아니라 기쁜 가운데 주실 것입니다. 그 상을 주는 분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 와야 합니다.

수많은 종교는 몇 천년 혹은 몇 백년 동안 나오다가 이 시대적인 사조 앞에 밀려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지금까지 수천년간 나왔지만 미래의 한때를 걸고 다시 넘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만일 골수에서 우러나온 하나님의 어떠한 경기 코오스가 있다 할진대, 그 코오스는 역사적인 코오스요, 시대적인 코오스요, 미래적인 코오스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에 어떠한 새로운 진리가 있다 할진대, 그 진리는 이 시대적인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청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시대성만 띠어 가지고는 절대 안 됩니다. 무슨 주의 무슨 사상이 있다 하더라도 한시대 한 때에 맞는 것이라면 그 주의와 사상은 지나가고 말이요. 연면한 역사의 배경을 가지고 이 시대의 사조를 통해 넘어갈 수 있는 이념, 새로운 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7-139
하나님과 더불어 동락(同樂)하며 승리할 수 있는 경주자
왜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적인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이시니, 우리들도 역시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조건을 갖춘 경주자로서 거기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여러분은 미래의 어떠한 사조에 휩쓸려 나갈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더 나아가서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라는 것은 사정에 엉클어져 있습니다. 사정은 상대적 관계입니다.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 시대적인 아버지의 심정, 미래적인 아버지의 심정이 이러니 그 심정을 중심삼고 경영하는 아버지의 경기 프로에 대한 그 모든 지식을 갖추어 심정의 분야까지 맞추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승하되 최후에 만족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상봉하여 영원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기를 하늘은 바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는 것은 진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도라는 것은 진리만이 아니예요. 주의와 사상은 진리를 중심삼고 나가지만 종교는 진리 외에 심정이 내포되는 거예요. 이것이 달라요. 주의와 사상에는 심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자식과 부모가 말없이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무엇이 얽혀져 있습니다. 논리적인 조건을 넘어 움직이는 어떤 내용이 갖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종교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는 조직적인 결합니다. 심정적인 결합이 아니고 조직적인 결합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경주자의 태도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역사적인 그 코오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되고, 시대적인 실정을 잘 파악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미래적인 내용, 그 계획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아야만 달려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경주자가 가져야 할 상식입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하여 내 생명을 걸고 나가는데 있어서 하늘의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까지 갖춘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 코오스를 세워 나오고 닦아 나오기에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쳐도 무난히 뚫고 나가리라고 봅니다.

다음에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데 있어서 싸움의 심정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지식이 있는 어떠한 원수를 대하여 싸우더라도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싸움에 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천분야는 싸움입니다. 이 땅 위의 어떠한 무엇과도 싸워서 승리하고 맨 나중에는 상을 주는 하나님이 나를 들이치더라도 나는 굴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7-141
시험이 많은 도(道)의 길
도의 길을 가는 데에는 반드시 시험이 많습니다. 이 경주 마당을 달리는 데는 내 자신이 힘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각지 않은 무수한 시험이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악령들이 우리를 시험하는 과정이 있고, 그 코오스가 지나가면 천사들이 시험합니다. 또 그 코오스가 지나가면 어떠한 도인과 도주(道主)들이 시험합니다. 만일 예수를 믿고 나간다면 예수가 시험합니다. 처음엔 끌어주다가 맨 나중에는 시험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나를 이끌어 주다가는 최후에 상을 줄 때 가서는 시험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상을 주기 위해 자연환경을 지어 놓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련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험 없이 주려고 했으나 시험받을 조건에 놓여 있으니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6:4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하늘은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용자로서 내가 달리는 것도 달리는 것이려니와, 거기에는 마음의 싸움과 몸의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심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달리는 데에 마음의 싸움과 몸의 싸움이 엉클어져 나타나게 된다는 거예요. 6천년 코오스를 거쳐온 그 고비 고비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이 싸워오던 내적 고충이 달리는 자의 심중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싸우던 것이 내 한 자체에 부딪쳐 옵니다. 그래서 그런 내적 고충과 외적 고충이 오늘의 나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나 자신은 그저 달리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싸움과 외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동시에 하늘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인생행로에서 승리하려면 그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역사가 6천년을 경과했지만 이 코오스에서 아직까지 골인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간다’ 했지만 결승점까지 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7-142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천당에 가 있는 줄로 믿고 있지만 낙원에 가 있어요. 예수님이 낙원에 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낙원은 천국 들어가는 대합실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낙원문을 헤치고 천국문을 개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땅 위에서 할 일을 다 못했으니 다시 달려서 최후 결승점에 골인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달리고 있는 경기의 종목은 신앙이란 명사를 건 최후의 코오스입니다. 경기로 말하면 아마 마라톤 경기와 같을 거예요. 경기 중에 제일 빛나는 종목이요 경기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종목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기의 종목에 들어선 우리들은 어떻게 달려야 되느냐? 내 결심만 가지고 달려서는 안 돼요. 여기에는 여러가지 싸움이 가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싸움과 몸의 싸움, 원수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걸어 놓고는 세상이 당기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는데 몸을 걸어 놓고는 세상이 당기고 있고 마음을 걸어 놓고는 주의 사상이 당기고 있습니다. 그 목표가 어디입니까. 막연합니다. 가는 그 길에는 무수한 원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고 믿고 있던 예수도, 하나님까지도 최후에 가서는 `넌 누구냐’ 하고 모른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싸움의 용자로서 어떠한 결심을 해야 되느냐? 내가 달리는 이 길의 목표가 틀림없다는 결단을 딱 내렸을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가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코오스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망하는 데에도 최고로 망하겠다는 결심, 죽는 데에도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게 죽고, 고생하는 데에도 제일 고생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생하신 것보다 하나 더 고생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7-143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려면
여러분, 지금 달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봅시다. 더우기나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은 이러이러한 목표가 있다고 해서 나왔고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달리는 생활은 싸움이요, 싸움에는 몸을 끌고 당깁니다.

지금까지 믿고 나오던 신앙관념이 끌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원수들이 들이칩니다. 그것이 끝나면 최후에는 하나님이 들이칩니다. `네가 내 아들 딸이야? 자신 있어?’ 하고 반문할 거예요. 그럴 거 아녜요? `너 무엇에 우승했어?’, `예, 이러이러한 것에 우승했습니다’, `정말이야?’ 이렇게 되면 실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승들도 자기 제자에게 자기의 어떤 무엇을 맡기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최후에 남아질 인생의 코오스를 달리는 경주자로서 싸움의 용자임을 알아야 하고, 하늘의 정병임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정병으로서의 각오를 해야겠습니다. 몸을 쳐도 `치려면 쳐라’, 어떠한 이념과 사상이 쳐도 `좋다’, 어떠한 핍박이 와도 `좋다’, 국가가 세계가 하늘이 이 모두가 동원하여 들이치더라도 `좋다’, 하나님까지 나서서 반대하더라도 `반대하려면 하십시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천지가 동원하여 반대하더라도 거기에서 승리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너한테는 안 되겠다. 복귀섭리노정을 출발하여 인간을 찾아 나선 뒤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만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모두 다 항복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생사를 걸어 놓은 싸움이든 어떤 싸움이라도 그렇습니다. 제가 체험한 견지에서는 내용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끝날에 이러한 최후의 도의 길을 달리고 있는 경주자가 있다 할진대, 최후의 우승을 바라고 달리는 경주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각오해야 됩니다. 믿고 있는 교주가 구주가 아닙니다. 최후에는 실력전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냐? 구원섭리가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경기장에서 모든 경기가 끝나지 않는 한, 모든 경기가 끝나 가지고 하나님이 상을 주지 않는 한 싸움은 계속이예요.

7-144
하나님이 세우시고 싶은 섭리적인 대표자
2천년 전에 예수가 이 경기마당에서 승리하여 4천년 역사를 대신한 메시아의 사명을 했으나, 기독교인들이 그 메시아의 승리의 바톤을 받아가지고 지금까지 그 2천년 역사를 산 역사로서 하나님 앞에 세워 나와야 했는데 못했다는 거예요. 예수가 왔다 가신 후 지금까지 기독교의 형태는 갖추었으나 심정문제라든지 그외에 갖출 바 싸움에서 승리한 기준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반대해 보고 하나님도 반대해 봐서 `응 너는 됐다’ 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손을 들어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떠한 장애물이라도 극복해야 됩니다. 그럴 거 아녜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어떠한 섭리적인 대표자를 세우고 싶을 것인가? 사탄 앞에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도 그 앞에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 딸을 세워 사탄세계나 하늘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일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 그렇거든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우리들, 통일교회 식구들, 최후에는 하나님이 시험합니다. `이 길을 가지 말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갑니다. 나는 달리다가 죽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성경 이상의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가 왔다 가신 이상의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절대 안 나옵니다. 예수 이후 하나님이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코오스를 달리는 데는 예수 이상의 십자가도 와라, 하나님이 6천년의 섭리노정에서 당했던 그 고생과 슬픔의 고통도 와라, 오늘날이 땅위의 27억 인류 전부가 동원되어 한꺼번에 화살을 쏘아대는 자리까지도 와라, 하나님의 섭리도 인간을 중심삼고 하고 사탄의 반대도 인간을 중심삼고 하니, 전세계 인류를 동원해서 와라, 지옥도 최고로 가고 천당도 최고로 가겠다는 신념을 갖추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긍정도 해 보고 반대도 해 보고 또 실증도 해 보아서 틀림없다는 결심이 나면 달려야 됩니다. 달리는 데는 누구도 스톱시킬 수 없어야 합니다. 어떤 무엇이 와도 물리치고 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6천년 동안 한으로 가로막혔던 고개를 무난히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도 여러분들, 여기에 선생님이 있다 할진대 그 선생님에게 와서 `해 봅시다’ 할 수 있는 기백을 갖춘 용자를 하늘은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뜻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만일 그러한 지식을 갖추고, 그런 결심을 갖고, 그런 싸움의 각오를 하고 나서는 아들 딸이 있다면 하늘이 그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늘이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시여,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심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역사적인 소망, 시대적인 소망, 미래적인 소망이 이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 단계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하면서 미래적인 소망의 조건을 갖추고 나오면 예수 아니라 어느 누가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은 `오냐 네 말이 옳다’ 하고 인정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7-145
승리한 자가 받을 상(賞)
과거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성현, 혹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구주는 그때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세우셨던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던 미래의 것을 갖고 예수 앞에 나타나 항의하면 예수는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어느 누가 섭리를 중심삼고 이 시대 이후의 미래의 섭리적인 내용을 갖고 `하나님이시여! 이것을 빨리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보다도 이것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 하면서 현재의 것을 무시하고 미래의 이것을 들고 나선다고 해도 하늘은 그를 치지 못합니다. 도리어 칭찬할 겁니다.

우리는 그런 싸움의 각오를 갖고 나가야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이 인정하는 날에는 어떠한 상을 받느냐? 오늘날 세상에서 어떤 경기종목의 승리자가 되면 주최자가 거기에 해당하는 상을 주는데, 하나님의 6천년 경기 마당에서 최후로 승리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무엇을 줄 것이고. 여러분, 무슨 경기에 우승해서 상 탈 때는 좋지요.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지 않습니까. 지나고 나면 그 경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이 또 다른 사람이 우승을 하고 상을 받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경기장에서 최후의 결승점에 골인한 사람은 두번 다시 없습니다, 없어요.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끝나려면 영원히 끝나지 또 무엇이 없습니다.

끝나는 그 경기에서 상을 받는 기쁨은 오늘만이 아닙니다. 영원이야 영원. 그 이상 좋을 수 있는 내용이 전개될지 몰라도 그 이하로 떨어질 내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한 그들에게 하늘은 무슨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영광을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들 앞에 맡기실 것입니다. 하늘의 어떠한 왕궁이 있다면 그들을 거기에 살 수 있는 하늘의 왕족으로 허락하실 것입니다. 영원 무궁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승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준비한 천국 전부를 동원시켜서 환영잔치를 할 것입니다. 그 잔치는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 세계가 바로 천국, 파라다이스(Paradise)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한 이념 밑에서 달리는 경주자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146
승리할 수 있는 그룹
오늘날 종교가 많습니다. 유교, 불교, 회회교 등 여러 가지 종파가 많습니다. 경기장 안에 달리는 길도 많아요. 그렇지만 하늘은 장소를 지정합니다. 요 경기장, `경기종목은 요것이다’ 하고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파, 어느 종파, 어느 누구의 명령 밑에서 움직이는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은 한스러운 일이예요. 인간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하나님의 경주장에 참여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종목에서라도 달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민족 민족이 다릅니다. 하늘이 원하는 경기는 민족별 경기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기입니다. 말하자면 올림픽 대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경기장에는 각 민족 민족의 대표자가 선발되어 모이는 곳입니다. 이 경기장에 와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귀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의 우승자를 찾기 위해 섭리해 나옵니다. 많은 경기중에서도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이 마라톤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계통이 세워져서 나와야 좋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 대한 상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만일에 거기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할진대 아무리 준비했다 하더라도 승리할 사람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가르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해서는 우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몸 마음의 준비와 지식을 갖추어 가지고, 최후의 싸움터에서 하늘과 땅이 모두 동원되어 반대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싸우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인생행로의 최후 코오스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룹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7-147
기 도
저희의 선조들은 달렸사옵니다. 아담도 하나님의 경기 종목 중 한 분야를 맡아서 달리던 도중에 자기를 존중하다가 쓰러졌사옵니다. 하늘 대하던 황공한 마음으로 노아를 대해야 할 함이 함부로 대했던 그 장면 때문에 노아도 달리던 도중에서 쓰러졌사옵니다. 아브라함도 하늘을 대하는 노정에서 작으나 크나 모든 것을 하늘 것으로서 지극히 존중하며 그것들의 상대적인 가치를 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연고로 꺾어졌사옵니다.

저희들이 모세노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민족도 쓰러졌고 모세도 역시 쓰러졌사옵니다. 하늘이 노하기 전에 노해서는 안 될 모세였고, 하늘이 낙망하기 전에 낙망해서는 안 될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하늘이 노하기 전에 모세가 먼저 노하여 반석을 두 번 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입장에 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된 연고로 모두 광야에서 쓰러졌사옵니다.

예수님 시대를 볼 때, 세 제자 마저 예수를 배반하던 일은 어떠했습니까? 생명을 걸고 가야 할 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가기 싫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싸여서 사라지던 세 제자들의 처량한 모습이 인류의 한의 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복귀원리를 통하여 역대의 선지들이 가신 길이 곧 우리가 가야할 길임을 배웠사옵니다. 아담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고비 고비에 부딪친 역사적인 모든 것이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 예수님 시대에 와서야 그분이 비로소 생사를 걸어 놓고 승리자의 모습을 갖춘 줄 아옵니다. 이제 저희들도 그러한 모습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대, 이 경기 마당에서 경주자로서 싸울 수 있는 자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복귀의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복귀하여야 할 저희들의 각오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오며,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 이 경주 마당에서 패배자가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땅 앞에 맹세한 저희들, 어떠한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휩쓸려 온다 할지라도, 아니 인류 전체의 반대가 폭풍우와 같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할지라도, 또 천지가 변할지라도, 세운 바의 중심은 변치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그 모든 어려움을 제거시키고 검은 구름을 헤쳐내어, 광명한 천지에서 하늘의 기쁨의 은사를 바라볼 수 있는 승리한 영광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참석한 저희들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차피 달리는 이 한 마당에 섰사오나, 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사오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달려야 할 이 운명적인 코오스를 피해가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부딪쳐 오는 환난과 시련을 달게 받아 그것을 저희 것으로 소화시킴으로써, 아버지 앞에 자랑과 영광의 조건을 세워드리고, 그것을 하나의 제물적인 조건으로 삼을 수 있는 늠름한 모습으로 저희들을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6천년 동안 상을 주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 마음속에 숨겨진 유업, 그것은 아버지의 심정의 유업임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을 논위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였고, 이것을 논위하여 나는 너희의 참아버지요 너희는 나의 참아들딸이라 하셨사옵고, 참가정, 참국가, 참세계를 논위한 것이 아버지였음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희들에게는 가정도 없고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사옵니다. 어느 하나도 충실하게 갖춘 것이 없는 불쌍한 저희들, 그 모든 것을 회복하려는 부모 앞에, 하늘 가정 앞에, 하늘나라 앞에 꺼릴 것이 무엇이 있으며, 주저할 무엇이 있사오리이까? 각오한 결심한 일편단심의 정열을 기울여, 달리고 또 달려서 사탄 진영을 점령하고, 하늘의 승리의 깃발을 세워 `아버님, 한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감수하면서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인생행로를 달리는 경주자로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바라고 세워 주신 그 기상을 잃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그 심중을 상하게 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내일도 생애를 걸고 늠름하고 씩씩하게 달려갈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코오스에서 낙오되는 아들 딸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경주장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만천하 앞에, 만존재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귀한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