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2 to 7-123: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
1959.07.26 (일), 한국 전본부교회

7-102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
로마서 8:12-27

[기 도]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모아 놓으신 저희들에게 많은 말씀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에게는 오로지 아버님의 품에 무한히 안기고 싶은 심정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가운데 뼛골에서 은연히 솟구쳐 오르는 흠모의 심정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고 불러주시는 그 한마디만이 저희들의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사옵고, 또 그럴 수 있는 자리가 해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가 천성을 대하게 될 때 심정에 사무쳐서 몸 둘 곳을 모르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고, 흠모의 마음이 충천하여 모든 의식을 초탈해서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리를 고대하고 있는 저희들임을 아시오매, 이 시간 저희에게 그런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말씀을 받아 하늘을 아는 자들이 되지 말고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 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 앞에 구원받아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먼저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하시고 고통당하셨는가를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는 저희들이 되어 머리 숙이고 위로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가진 것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이 저희 것이 되게 하여 주옵고, 자랑할 무엇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이 저희의 자랑의 조건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생애의 목표가 있다 할진대 심정으로 생애의 목표를 추구하게 하여 주시옵고, 생활의 내용을 갖춰야 한다면 하나의 심정만이 저희들 생활의 내용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사람이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이들이 누구를 위해 머물러 있으며,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너는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주인도 갖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너는 영원히 나의 심정과 더불어 있을 자다’라고 인정을 받을 자가 있다 할진대는, 그 이상 행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영원하신 생명과 영원하신 이념과 영원하신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찾아 주시는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심중에 같이 계시며, 아버지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아버지 것으로서 둘이 아닌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노래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아들 딸의 모습을 그리워하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도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 앞에 모든 영광의 요소를 찾아드리고 난 후 환희하며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기를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아시오니,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켜서 과거 천상의 모든 것과 지상의 모든 것을 움직여내어 심정세계에 모두 화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의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충격과 기쁨의 경지에서 저희들이 각오하고 결심할 수 있는 이 한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옵니다. 말씀의 내용만 전하기를 원치 않사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내정을 살필 수 있고 스스로를 찾을 수 있는 이 시간의 말씀으로 나타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을 만드는 것이 사탄의 작용임을 알고 있사오니, 하나의 마음에 화하여, 하나의 심정에 화하여, 서로 서로가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7-104
말 씀
오늘은 여러분 앞에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7-104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려면
지금까지의 인류 가운데에는 제아무리 권세가 많고, 제아무리 인격이 고매하고, 제아무리 영광스런 것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세워 `나는 하나님의 참아들이요 참딸이다’ 하고 자랑하며 나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참아들딸이 되려면 참부모를 가져야 되고, 참가정의 인연을 통하여야 되고, 참형제와 연결된 어떠한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들의 환경, 아들의 위치, 혹은 딸의 환경, 딸의 위치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인류를 대하여 어떠한 섭리를 해 나오신다 할진대, 이 하나님이 섭리해 오시면서 바라는 최고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참아들이요 참딸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참아들딸과 영원한 심정을 통하고 존재세계의 모든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아버지’요 `아들딸’이라는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날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한날을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이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조주라 하고, 만우주의 근본이라 하고, 모든 존재세계의 주체가 되는 하나의 중심이 있다 할진대, 그 중심이 바라는 이상세계는 이 땅 위의 존재세계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천상에 있는 어떠한 이념의 세계도 아니요 그렇다고 외적인 세계도 아닐 것입니다. 그 세계는 심정의 인연을 중심삼고 움직여낼 수 있는 정적인 흐름 앞에 전체를 걸어놓고 아들이요 딸이라 불리워질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한 분이요 창조주요 절대자라 할지라도, 그 역시 그런 내용을 갖춘 사람을 소망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참된 사람,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참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인연 가운데 표준이 되는 인연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부자의 인연입니다. 이 인연에서 비롯된 심정은 어떠한 존재의 권한에 의해서도 굽혀질 수 없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유일한 것입니다. 또 이 심정의 권한을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모든 존재물은 그 존재 앞에 머리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심정의 권한을 가지고 움직이게 될 때에 만천하는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철칙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 할진대 우리들이 바라는 진정한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며, 하나의 절대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 연고로 아무리 높고 크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내사랑하는 참아들아 딸아’ 할 수 있는 한날을 가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이 이상 슬퍼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인연을 통하여 지음받은 인간이라 할진대 그러한 하나의 사람, 그러한 하나의 아들딸을 땅으로부터 내세우지 못한 것이 최대의 슬픔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슬픔 중의 슬픔인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내 아들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참아들딸이 있어 그들을 부르시면서 6천년간 해왔던 수고를 잊어버릴 수 있고, 지난날의 모든 곡절을 잊어버릴 수 잇는 순간이 이 땅 위에 온다 할진대, 거기서부터 하늘의 해원성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인류는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예상해야 합니다.

인류와 천륜 앞에 끝날이 있다 할진대, 그 끝날은 어떠한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날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너는 영원히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참아들딸이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야 원한을 다 풀었노라’ 할 수 있는, 마음 턱놓고 안위할 수 있으며 마음 턱놓고 즐길 수 있는 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는 그날, 그 때가 와야 하나님의 새로운 이념세계는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아들딸을 나오지 않았고 참아들딸의 인연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때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참아들이라고 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소망은 완결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7-106
참아들딸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와 종교의 사명
오늘날 우리는 타락한 후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누가 제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어떠한 전통을 자랑하고 어떠한 역사적인 면에서 자기의 공헌한 것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모두가 타락한 후손의 자랑일 뿐입니다. 또 자기가 갖춘 바 형세나 모습이 늠름하고 이 세상에서 하늘을 꿰뚫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역시 타락한 후손의 권한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역경과 하늘이 허락해 줄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연고로 인간 세상은 하늘과 상치(相馳)되고 반대되는 죄악 세상입니다. 죄악된 인간, 죄악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나없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아들딸의 모습은 지선지고(至善至高)한 모습인데,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지극히 악하고 지극히 누추한 모습이 되어 있으니, 이 간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격을 메우고 연결시키기 위하여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수고해 오셨고, 인간들은 아나 모르나 역사의 배후에서 피어린 혈투전을 계속해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하늘의 수고를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천상을 바라보기에 민망해 하고 황공하게 여기며 자기 스스로를 뉘우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종교라는 명사를 세워서, 혹은 종교의 내용을 갖춘 지도자를 세워서 인류 앞에 예고하고 권고하는 것은 무엇이뇨. 생의 노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섭리하신 역사적인 내용을 앎과 동시에 나의 감성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나가라고 우리에게 교시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심정 심정을 통하여 뻗어나오는 인연을 무시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오늘에 나타난 사실에만 집착하기 쉬운 것이 종교인의 입장이었습니다. 종교의 중대한 과업은 타락의 인연을 벗어나 심정의 세계에 입각하여 하늘이 지금까지 인류를 붙들고 나오시며 슬픔과 고통을 당했던 역사와 더불어 동반할 수 있는 심정, 역사적인 고통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심정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지금까지 그러한 내용을 갖춘 입장에서 인류 역사를 보충하고 인류의 심정을 연결시키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참아들딸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사무친 마음을 갖고 시대와 세기를 거쳐오면서 참아들딸을 그리워하며 인류를 대하여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십니다.

하늘은 이 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인을 세우시고 가정을 세우시고, 민족과 국가를 세우시고, 세계적인 주도이념을 세워 놓고 섭리해 오셨습니다. 하늘은 이 한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토록 수고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책임지고 달성해야 할 하늘이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론지 가버렸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끌어낸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20년 동안 수고하여 세웠던 노아 가정도 그랬고, 아벨의 제단도 역시 간데없이 다 사라지고 말았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를 알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은 개인으로부터 참다운 아들딸을 중심삼은 가정으로, 민족으로, 국가로, 세계로, 천주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이념인데도 불구하고 땅 위에는 `나는 영원한 아버지의 심중을 통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이외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마음을 위로하고 그 마음의 곡절을 해원할 수 있는 영원한 딸이외다’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딸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그런 가정도 없었거니와 그러한 민족도 없었고 국가도 없었고 세계도 없었습니다.

7-108
끝날과 재림주
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참을 통할 수 있는 자녀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 천주까지를 인연지어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복귀의 사명입니다. 이런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 구원의 역사요, 섭리의 뜻이요, 천륜의 목적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때를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냐? 참다운 아들딸이 나타나 온 천하를 천리법도에 따라 치리(治理)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아들딸이 나타나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해 버리고,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종결짓고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한날, 이러한 분수령의 때, 분수령을 이루는 날이 바로 끝날인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누가 온다고 하였습니까? 성경은 밝히 말하였습니다. 주가 오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는 누구시뇨. 재림예수입니다. 재림예수는 어떤 분일 것이뇨. 그는 만천하의 역사를 동원하여 하나님이 수고하신 끝에 찾아질, 하나님께서 `너는 영원무궁토록 내 마음 속에, 내 몸 속에, 내 지은 세계 속에 살 수 있는 아들이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분이 오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가셨습니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그것은 아들될 수 있는 주인의 현현과 더불어 딸이 될 수 있는 신부의 모습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가지고 아들과 딸이 상봉하고, 찾아 나오시던 하나님과 아들딸이 상봉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있어서 참아들딸의 입장은 제한된 입장이 아니고 한계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그 날은 그 아들딸과 인연되어 있는 세계가 한꺼번에 동원하여 하늘을 찬양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인류와 더불어 참아 나오시고, 인류와 더불어 슬퍼하시며, 인류와 더불어 싸워나오신 하나님 앞에, 인류가 고개 숙여 기도할 것이 무엇이뇨. `하늘이 세우고자 하는 참된 아들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참된 아들은 어떠한 분인가. 그는 참된 아들인 동시에 참된 신랑의 자격을 갖추어 참된 신부를 찾고 참된 인류의 부모가 되어야 할 분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인간들을 이끌어 그 참된 아들딸과 접붙이기 위해 섭리해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너희는 양자의 영(靈)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했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양자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제아무리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늘 앞에 양자밖에 안 됩니다. 하늘의 아들이 있다 할진대 그 아들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고. 아들 아닌 사람이 있고 양자가 있고 참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내 아들이 아닌 남의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을때 대신 다리 놓을 양자가 있고 참아들이 있습니다. 천지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땅은 선악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혼란이 벌어져 참도 참이 아닌것 같고 참 아닌 것이 참인 것 같이 엉클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늘은 참다운 아들을 찾고 딸을 찾지 위한 이념을 갖고, 또 그런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하며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 참다운 아들딸이 누구입니까? 인간들은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세계의 아들 아닌 자들을 양자의 모양으로 수습하여 이들을 다시 직계의 자녀로 종결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아들의 인연이라는 것은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혈통이 직접 연해 있든가, 자기의 아버지나 선조의 혈통이 연해 있든가 어떠한 혈통적인 조건을 가진 입장에서만이 아들딸의 명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가 창조된 그날부터 하나님의 심정이 그들의 뼈골로 흘러 하나의 귀결점을 세우고, 그 이념의 전부도 아담 해와에게 화하였던들, 우리는 하나님의 직계혈통의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다른 혈통과 인연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혈통이 다르니 양자입니다, 양자. 아무리 섭리의 뜻을 위하여 지성을 다해도, 남의 자식을 끌어다가 잇는다 해도, 양자의 혈통을 이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복음을 세워 지금까지 섭리해온 신약 구원섭리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양자를 세워서 내 참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고통과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심정에 어린 말씀을 한다 할지라도 그 심정을 통하는 입장에 서지 못한 사람은 `그럴 것이다’ 하는 정도밖에 모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겠지’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긴 무얼 그래?’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여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떠한 인연권에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심정에 슬픔이 스며들 때 그 말을 듣고도 심정에 슬픔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야만 같은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7-110
인류의 소원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
오늘날 인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양자라는 명사를 제거시켜 버리고 직계의 참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바라고 역사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적이요,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는 하나님의 중심목적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구원의 목적이 달성되고 구원섭리가 종결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하신 하나님, 사랑의 본체요, 사랑의 중심 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양자의 입장에서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 원치 않습니다. 골수의 심정이 스며들 수 있는 사랑이 일체인 아들딸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제아무리 도의 생활을 하고 제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해도 그 아버지의 내용은 여러가지입니다. 아들 아닌 입장에서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혹은 양자의 입장에서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하늘이 요구하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뇨. 양자의 이름이 아니라 양자의 위치를 넘어선 직계의 참아들딸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가 양자의 인연을 복귀해 준다 하였다 해서 그 이념 세계에서 만족한다 하더라도 그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간 수많은 성도들이 저나라에 갔으되 그들은 낙원, 즉 천국 가는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신 목적은 우리들에게 양자가 아니라 직계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정으로 얼크러질 수 있는 아들딸, 교훈을 통하여서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모습을 바라보고 움직일 수 있고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들 딸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역사적인 노정에 왔다가 간 성현 현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너는 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들은 미완성품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돼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하여 내 아버지라 했고 나는 그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천주의 근본, 천륜의 근본을 꿰뚫어 심정세계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세우고 실체을 갖춘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아 우리는 예수가 만민의 메시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 구주가 무엇입니까? 사망권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살려낼 수 있는 표본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만이 가진 사랑의 조건이라면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면, 하나님이 아무리 높고 선의 주체자요 절대자라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것은 내것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소망의 최고 기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사랑의 기준을 표방하고 인간을 대하여 나왔다 할지라도 그 사랑의 목적지가 되는 자리까지 인간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거짓된 분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섭리를 해왔지, 인간의 이념과 전체의 이념을 세우기 위한 섭리를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참아들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7-112
하나님이 참아들딸들을 찾아나오시는 이유
성서 66권을 통해 보면 이 내용에 해당하는 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혈통적으로 죄와 인연이 없는 입장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바의 목적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 예수와 인연을 맺게 하고 그들을 예수에게 접붙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 아닌 사탄세계의 인간들을 양자의 인연을 거쳐 직계 아들의 수속까지 해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 땅위에 와서 직계의 자녀될 수 있는 수속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양자될 수 있는 내용만을 설명하고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오시는 주를 고대하느뇨? 온 천하의 인류는 어찌하여 예수의 재림날을 고대하느뇨? 제 아무리 잘났다 해도 양자의 입장밖에 되지 못하는 인간 앞에 직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 놓고 그 수속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천하의 인간들이 그날을 고대할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는 그러한 사명을 갖고 왔다 가신 예수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시는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나아가는 우리들, 신부라는 대상적인 명사 밑에 움직여 나가며 그 목적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재림의 날은 어떠한 날인가. 하늘의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을 다 털어놓고, 하늘이 슬퍼하신 6천년의 슬픔을 다 잊어버리고, 고통 당하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날입니다. 찾아진 아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슬픔도 간 데 없고, 고통도 간 데 없고, 억울함도 간 데 없이 `오냐,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환희의 한날입니다. 그날은 천상이 고대하던 날이요, 지상의 인류들이 오랜 역사노정을 통하여 고대해 나오던 날인 것입니다.

즉, 양자의 한을 벗어나 직계의 자녀로서 내 아버지의 천국을 내천국이요, 내 아버지의 주관하는 세계를 내가 주관할 수 있는 세계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와 같이 참다운 동산의 주인으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만물을 주관한다 해도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없다면 만물도 주관받지 않으려 합니다. 참다운 아들 딸이라 할진대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할 수 있는 입장에 선 아들 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말했어요. `피조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참 아들 딸이라고 인정을 받지 않고 나타나는 사람이라 할진대 만물도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고로 하늘의 원한을 해원하는 역사노정을 오늘날 우리들은 거쳐 나가야 합니다.

7-113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있는가
이러한 섭리노정을 거쳐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진정 하늘의 심정과 인연이 맺어져 아버지가 동하면 같이 동하고, 아버지가 정하면 같이 정하고, 아버지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아버지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할 수 있는가. 체(體)는 다를지라도 내용에 들어가 심정세계에서는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가. 인연되는 관계에 있는가.

갖추고 있는 외적 환경이 아무리 호화찬란하다 할지라도 심정에 어긋난다면 이것은 사라져버릴, 불사를 감밖에 못된다는 거예요. 세상도 그래요. 사랑하는 아들 딸이 갖고 있는 물건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그 아들 딸이 죽어버리면 불사를 감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통한 참아들 딸이 되는 것이 천륜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이요 인륜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적이라 할진대,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단계에 있는지 냉정한 입장에서 비판해 보십시오. 어차피 우리들은 참아들 딸이 되어야 할 해원의 역사를 중심삼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천지의 운세권내에 우리가 처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과정을 거쳐나가는데 어떻게 해명하여 들어갈 것이냐. 돌아가는 방편은 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심정이 어떠냐 하는 것을 놓고 삼자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할 때입니다.

천륜이 지향하는 방향이 그렇고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날이 그렇다 할진대, 오늘날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경지에 있습니까? 심정이 통하는 참아들 딸의 경지에 있으면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아버지’하고 부르기만 하면 피 살이 움직이는 듯한 충격에 가슴을 메이고, 아버지의 심정이 내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직계의 아들 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타락의 한울 풀 수 있을 것이요, 죄악세계의 타락된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슬퍼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했던 지긋지긋한 죄악의 인연을 벗어나려고 수고한 내 자신을 생각만 해도 나는 소름이 끼칠 지경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느낌을 느껴 보았습니까? 자신이 비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심정적인 인연을 갖고 찾아 헤매는 하나님 앞에 아들이라는 명사를 갖출 수 있는 입장에 어느 정도 가까이 있습니까? 심정적으로 인연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양자가 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버지되는 사람의 고통의 내용은 모르지만 그 말을 들을 때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어야 됩니다. 심정적으로 체휼은 못해도, 심정적으로 그렇다고 긍정할 수 있는 입장에는 못들어가더라도 그 말에 대해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나갔습니까?

예수는 이 땅 위에 인류의 참아버지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땅의 인간을 대해 나오며 가지신 하나의 결심을 갖고 왔을 거예요. 그의 사지백체는 4천년 역사노정에서 하늘이 인간을 통해 세우고자 하신, 참다운 아들을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신 부분 부분의 실체를 대신하여 나타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의 눈은 4천년 동안 바라보신 하나님의 눈의 대신이요, 그의 귀는 4천년 동안 얘기해 오신 입의 대신일 것이요, 그의 감정도 그렇고 몸도 그럴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인 실체요 역사적인 결실체였던 거예요. 그러기에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7-115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예수는 유대나라와 유대민족을 바라보고 유대교단을 바라볼 때,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있었던 나라요 민족이요 교단이었지만 `하나님이 품고 사랑할 수 없는 나라요 민족이요 교단이 되었구나’ 하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들은 4천년 동안 하늘의 인연의 역사를 거쳐왔으나 그 4천년 역사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를 몰라보았습니다.

이게 웬 말입니까?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4천년 역사노정의 종말시대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전 타락 직전의 아담 해와의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품어나오던 한 부분이요 분자와 같다는 것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복귀섭리라고 한다면 복귀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인데, 하나님은 무엇을 찾아나오시는 것인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찾고 잃어버린 해와를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나와 있지만 끝날에 처한 여러분 자신들에게는 6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사탄과 대결해 싸워 나오다 남아질 조상, 즉 타락의 인연을 걷어치우고 승리의 권한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자랑하고 나설 수 있는 조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한 조상이 돼야 할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아담이 되어 버렸으니,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은 실체를 찾기 위해 아담으로부터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그 실체를 소망하며 찾아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떻구 어떻구 어떻다……’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렇게 안 돼 있어요. 우리는 그러한 내용을 박차고 강한 각오를 갖고 나선 것입니다. 참과 거짓이 있는데 또 참 같은 것과 거짓 같은 것도 있어요.

7-116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참아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를 바로 알고 모시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 품에서 자라지 못하게 된 후 사탄과 대적하여 싸워 나온지 4천년 만에야 비로소 유대나라 앞에 나타난 예수였음을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그 예수 앞에 굴복했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올 때 실패한 것도 승리요, 노아 가정이 실수한 것도 승리요,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한 것도 승리이며, 라벨이 죽은 것도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실체였습니다. 역사적인 산 실체예요. 섭리하시면서 찾으시던 4천년의 전의 산 실체. 아담은 죽었으나 그를 세워나오시던 아버지의 심정은 죽지 않았기에 그것은 산 실체입니다.

끝날에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을 중심삼고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하는 식의 종교관을 갖고 나옵니다. 그런데 4천년을 거쳐 6천년을 역사해 오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거예요. 아담이 실수했기 때문에 대신 보내신 예수는 어떤 분이냐. 제2 아담 입니다.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니 뭐니 하고 있으나 그게 아니에요. 성경에도 예수를 후아담이라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찾으시는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참된 아들은 제3아담입니다. 제3아담의 수속이 끝나 참아들의 입장에 서기 전에는 어느누가 아무리 무슨 신부라 무슨 양자라 해도 안 됩니다. 예수도 아들의 영광을 갖고 이 땅 위에 왔지만 아들의 행세를 다 못했습니다. 행세를 하려면 하늘의 수속을 마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들만 가지고 안 됩니다. 신부를 갖추어야만 수속이 끝납니다.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잃어버렸어요?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담과 해와는 인류의 참조상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참조상을 잃어버렸으니 참조상을 잃어버렸으니 참조상을 복귀해야 합니다.

예수는 아버지격입니다. 인류의 참아버지격이예요. 그리고 성신은 어머니 신입니다. 인류의 참어머니. 이와같이 참아버지 참어머니를 영적으로 세워 놓고 이를 실체 형상으로 이 땅 위에 나타내려는 것이 재림의 목적입니다.

인류 앞에 참다운 아들 딸이 나타나는 때가 끝날이거늘, 그 때는 어떠한 때인가. 참조상을 잃어버림으로 타락한 후손이 되고 참부모와 혈통적인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반대의 경로를 통해서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아들 딸을 찾는 때입니다. 거꿀잡이 역사, 복귀역사로서 인연을 맺어 그들을 양자로 승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 말을 듣고 틀린다고 생각하거든 영계에 가서 항의하십시오. `아무때 아무 아무개가 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이 맞소 틀리오?’ 하고 물어보면 틀림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망상적이고 공상적인 신앙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관념적인 신을 믿고 그 이념 밑에서 사는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뼈와 살이 심정에 부합되는 기준을 갖고 아버지라 할 수 있고, 그 아버지의 6천년 역사하신 심정을 오늘 내 심정에 귀일시켜 그 심정적 기준을 통한 입장에서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늘을 찾아나가는 인류, 혹은 목적의 세계를 찾아나가는 인류는 이런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삼강오륜을 세웠던 것입니다. 천적인 마음을 다하고, 충신이 되라, 열녀가 되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양에서는 무엇으로 보든 내적인 사조를 갖추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은 외적입니다. 외적으로 돌아 들어옵니다. 두고 보십시오.

양자들이 출세하는 때는 지금까지의 20세기 문명이고, 앞으로 참아들딸이 출세하는 때는 이상세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거 아니겠어요. 옛날에는 남의 자식들이 잘 살던 때였고, 오늘날은 예수의 이념을 중심삼고 민주진영을 중심한 양자들이 잘 사는 때이며, 이 시대를 넘어 참아들딸이 잘 사는 때가 크리스찬들이 바라는 재림시대요 이상시대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자리에 남아질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때, 한 시간에 참아들딸의 명분을 갖고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나는 수십년을 잘 믿었습니다’ 하며 배를 쑥 내미는 소인배는 안 됩니다. `아, 나는 아무 교회 목사요, 아무 교회 지도자요, 나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중심삼고 기쁨의 요소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전부 안 됩니다. 왜 그러뇨?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섭리해 나오시면서 하루 한 시간도 기쁨의 날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아들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가 아들 딸도 찾지 못하고 무슨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까?

역사를 지나오면서 인류는 기쁨의 시간을 갖고 향락한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어떤 집권자들은 자기의 권력을 중심삼고 하나님 대신 영광을 누렸을는지 모르지만, 4천년, 6천년 역사를 허덕이고 허덕이면서 참아들딸이 그리워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시간이 없었습니다. 영광을 누리고 기쁨을 누려야 할 하나님은 아직도 그런 한 시간을 갖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7-118
하나님의 처지와 예수의 생애
하나님은 슬픔의 주인공이요 고통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실 아버지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으되 그런 내용을 가지고 기뻐하거나 영광을 누려보지 못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대신 무엇을 가졌느뇨. 타락의 한과 더불어 슬픔과 고통의 내용을 지니신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오늘날 우리는 천국이 행복의 동산인 줄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가 보십시오. 아무리 기쁜 내용이 있는가 하고 샅샅이 뒤져 봐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영광을 누리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내용만을 가져야 할 하나님에게 기쁨과 영광과 선의 결실, 이상의 요소는 다 없어지고 슬픔과 고통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원통하다는 거예요. 슬프고 슬픈 일 중에도 이 이상 슬픈 일이 천지간에 없을 것입니다. 이 원통함에 사무쳐 `아버님’하고 뼈살이 에인듯이 몸 둘 곳을 몸부림치는 사람은 하늘에 가까운 아들 딸일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지도자의 권한을 인정받고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그날부터 그에게는 기쁨의 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땅의 인류를 위하여, 만민을 구하실 구세주로 나타났으나 그의 몸에는 영광이 오지 않았습니다. 영광이 오기 전에 고통의 세계를 가야 했고 슬픔의 길을 걸어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왜 그런가? 4천년 역사를 탕감해야 할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려면 먼저 슬픔의 왕자로 합격해야 되고 고통의 왕자로 합격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상의 슬픔을 통하여 거쳐간 수많은 영인들을 위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30여년의 생애에서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쳐 가신 예수의 행로는 슬픈 행로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되 4천년 역사노정에서 선조들이 흘린 눈물의 골짜기를 헤매었습니다. 4천년 역사노정에서 피어린 죽음의 고개 고개를 넘으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갔던 사람들의 뒤를 고스란히 인계받아 수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의 왕자요, 행복의 왕자요, 영광의 왕자인 줄로 알았으나, 고통의 왕자요 슬픔의 왕자라는 것입니다.

7-119
끝날의 심판 내용
끝날 심판의 한때는 올 것입니다. 심판의 한날이 오거늘, 그날 하늘은 무슨 내용을 갖고 나타날 것이고. 나는 이런 영광과 이런 행복의 요소를 갖고 있는데 너희는 왜 이런 행복과 이런 영광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느냐 하고 묻지 않습니다. 심판의 내용은 6천년 동안 싸워나오신 슬픈 인류의 역사와 슬픈 하나님의 역사, 고통스러운 인류의 역사와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노정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손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 앞에 아들의 영광을 갖추어 서고자 하는 자, 딸의 소망을 갖추어 서고자 하는 자에게 너는 이 역사와 더불어 얼마나 슬퍼했으며, 이 역사와 더불어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는가 하고 하늘은 물을 것입니다. 그때 `없습니다’ 하는 사람은 아들의 영광을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의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있습니다. 예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고, 예수의 심장에는 창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는 죽었으되 슬픔의 왕자요 고통의 왕자로 합격되어 하나님의 한을 청산하기 위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신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정에 있어서 합격자였으니 심정의 지도적인 권한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주는 무슨 구주예요. 몸뚱이 구주? 아닙니다. 뼈에 사무쳐 그립고 또 그립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영원히 같이 살고 싶은 심정의 구주인 것입니다.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내용을 갖고 그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의 슬픔을 밀어내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고통을 이 인간세계에서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준, 일편단심의 심정에서 예수는 구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다시 한 번 헤아려 봅시다. 끝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끝날은 기필코 오고야 말 것인데, 이 끝날에 하늘은 무엇을 가지고 심판행사를 벌이겠습니까? 똑똑히 아십시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믿고 있는 분이나 믿으려 하는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그 끝날에 하나님은 기쁨의 내용으로 웃으면서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도 그럴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오 주여!’ 하며 붙들려 할 때 붙들지 말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슬픈 예수의 심정을 통하고, 고통 당한 예수의 심정을 통하여 천륜의 고통과 슬픔의 노정을 통하고 난 후에야 예수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단단히 알아야 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슬픈 눈물을 흘리고 고통당하는 경지에 들어가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될 때 아버지의 성상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아버지의 눈은 6천년 동안 눈물이 그치지 않은 눈입니다. 아버지의 귀는 6천년 동안 모든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과 비소를 끊임없이 받은 귀입니다. 아버지의 입은 6천년 동안 하시고 싶은 말씀도 못했거니와 굶주린 인류와 더불어 굶주림에 허덕이신 입입니다. 아버지의 손길은 피눈물이 어려 있고, 피 땀이 어려 있는 손길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발걸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골고다의 험산준령을 몇 백번 몇 천만번 넘은 발걸음입니다. 아버지의 몸은 상처를 입고 억울하게 매맞은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그랬겠는가. 불쌍한 인류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황공망극한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은 천만번 죽어도 아버지의 서러움을 막아낼 수 없으며, 나 같은 죄인은 천만번 죽어도 아버지의 눈물을 씻어드릴 수 없습니다’ 응당 이런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댄 회개, 회개해야 합니다

7-121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뜻
우리는 심판의 한날을 두려움의 날이라 믿고 그날을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나타나서 `온 천하에서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철칙의 제1조입니다. 성경 내용 중의 내용이요, 복음의 중심 중의 중심입니다. 역사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역사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하여 역사와 더불어 살았다 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만, 역사와 더불어 싸워나온 예수와 역사와 더불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심판 날에 주님이 오셔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영광의 세계에서 공중 혼인잔치를 벌이고, 자기를 참석시켜 줄 것이라 믿고 있지만, 가소로운 놀음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안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이 오셔도 반대 할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놓인 우리는 역사적인 죄상 앞에 유린을 당한 혈통을 받은 후손입니다. 그러기에 천만번 유린을 당해도 역사와 더불어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수고와 하나님의 슬픔 앞에 황공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섭리하시는 아버님의 뜻이 있기에, 찾아 주신다는 그 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될 수만 있으면, 할 수만 있다면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 만일에 그런 심정을 버리고도 천당을 간다면 천당은 아무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판대에 나서야 할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슬픔 가운데 계심을 선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역사의 경로를 거쳐오신다는 것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예수의 슬픔은 무엇인가. 참이요 옳은 입장에 계시면서도 거짓이요 가장된 것으로 꾸며져서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슬픔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고통은 무엇이었는가. 친아들 딸을 찾아가는 길을 막고, 사랑하는 신부를 찾아가는 길을 막고 유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아들 딸을 찾아가는 길, 아들 딸을 만나는 길은 갈보리산상을 넘어야 할 길이기에 이 땅에는 예수시대의 골고다가 남아 있는 동시에 끝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늘의 영광을 대신해 오시는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재림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죽어 부활하신 예수를 그냥 만날 생각 마십시오. 죽어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기 전에 여러분 자신들이 살아서 세계적인 골고다의 고개를 넘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을 줄 알아야 돼요. 세계적인 골고다에 마음과 피 살, 나아가 생사를 걸어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7년 대환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신부로서 환희로운 주의 동산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6천년 역사노정에서 고통을 대하여 싸워 이긴 승리의 왕자이며, 슬픔의 심정을 품는 데 있어서도 인류를 대표한 슬픔의 왕자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신부로 맞이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의 길을 가는 데는 절대적으로 행복의 요소를 부정합니다. 왜 그러는가. 하나님은 기뻐해 보지 못하신 분이십니다. 지으신 피조물에게도 주인 행세를 해보지 못하셨고, 축복을 하여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즐겨보려 하셨던 아담 해와마저 사탄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늘 땅에 탄식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 하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사탄 주관 하에 들어가고, 아들 딸은 물론 만물까지 유린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슬프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품은 마음 그대로, 역사와 더불어 또 다시 슬픔을 거듭해 오셔야 했던 하늘임을,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7-123
통일신도들의 갈 길
통일신도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2천년 동안 혹은 6천년 동안 예수나 하나님이 귀로 듣던 그런 음성을 들 수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눈 앞에 민족을 바라보고 눈물짓고, 세계 인류를 바라볼 때 `이 어찌할 것인고’ 하며 가슴을 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입장에 있거든 고맙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먹을 것을 못 먹고, 먹으면서도 목이 메이고, 말하고 싶은 사정이 많아도 차라리 다물 수 있는 입을 가졌다면 그 입은 복된 입일 것입니다. 여러분, 손이 있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되 사탄과 더불어 혈투전을 못하는 분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뻗어나오는 사탄 세력 앞에 용맹스런 발자국을 디딜 수 있으되 이것을 가다듬고 한날을 기다리는 서글픈 심정이 있습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은 먼 데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멀다 할 때 가까이 계시고 가깝다 할 때 멀리 계십니다. 역사노정에서도 하늘 앞에 가까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멀다고 송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머물렀던 것입니다.

고통이 가중된다고 한하지 말고, 핍박받는 환경에 부딪친다고 한하지 말고, `아버님의 심정에 어린 슬픔을 내게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심정에 사무쳐 엉클어진 고통을 내게 걸머지워 주시옵소서. 사탄의 참소와 사탄의 유린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진대 그 참소를 내 한 몸에 지니고 역사적인 슬픔의 전부를 탕감하고 고통의 전부를 탕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어린 심정과 눈물어린 손길로 몸부림치는 아들 딸이 있다 할진대 그는 아버지가 붙들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영광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영광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있다면 고통과 슬픔뿐입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생명의 요소로 소화시킬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고 끌어주어도 바라보기에 민망해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여러분들이 된다 할진대, 심판의 한날, 슬픔 역사와 고통의 역사 앞에 선언하는 그날에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못들 망정 하늘의 손길은 여러분 앞에 머물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 천국을 그리워하고, 고통의 생활 가운데서 천국을 그리워하고, 슬픈 역사 가운데서 슬픈 주님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고통의 역사 가운데서 고통의 주님을 맞아 위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슬픔을 체휼하고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도, 가중되는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 놓고 위로할 수 있는 자가 있다 할진대, 아무리 영광을 돌리고 위로한 자라도 그 사람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통일신도들의 갈 길은 이 길입니다.

몰리고, 천대받고, 외롭고, 한없이 서러운 자리에서도 슬픔의 하나님을 모셔놓고 그 고통을 억제하고 그 슬픈 마음을 억제하면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버지의 고통을 다시 짊어지겠다고 하는 자들이 끝날의 심판대에서 남아질 무리인 것입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무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밥을 거르면서도 `아버지시여, 저만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류가 이런 자리에 있습니다. 저보다 불쌍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며 또 다시 인류의 슬픔을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간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은 참다운 아들 딸들을 찾아 나왔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그 손길은 지난날의 내 손길과 방불하구나’,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지난날 내 모습과 방불하구나. 아버지의 심정과 안타까움도 지난날 내 심정과 안타까움에 방불하구나’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한 마디는, 역사의 모든 비운을 제거시킬 수 있고 행복의 결정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 식구들, 크리스찬들, 혹은 세계 만천하의 성도들은 알아야만 됩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정과 어떠한 내용의 심정을 가지고 참석하였는지 모르나, 지금 그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할진대 그 느낌은 거짓이 아닙니다. `옳지! 그래야 되겠다’ 하는 느낌이 있어서, 그것과 더불어 일생을 각오하고, 그것과 더불어 결심하고, 그것과 더불어 싸우고, 그것과 더불어 쓰러지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다가오는 심판 날에 품어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참아들딸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