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to 6-93: 신앙자의 태도

신앙자의 태도
1959.03.29 (일), 한국 전본부교회

6-58
신앙자의 태도
히브리서 11:1-32

[기 도(Ⅰ)]

오늘 불초한 저희들이 아버지 무릎 앞에 다시 찾아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의 지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성을 향하여 출발을 하고 있사오나, 아버님의 심중을 바라보고 나가는 참다운 아들 딸들이 얼마나 되는 지 생각하게 될 때, 염려하는 마음 갖고 아버지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를 부르시고 찾으신지가 6천년이었사옵니다. 만물의 주인으로 친히 저희를 부르시고 찾으셨사온데, 저희가 그에 합당한 기쁨의 열매로서 아버지의 무릎 앞에 나와 있는 가 스스로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 자신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모든 것들을 아버지 앞에 다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평소에 저희들이 움직이는 것 전체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며, 오늘을 계기로 하여 내일 또 움직이는 전체의 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면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고대하시는 본래의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었고, 찾고자 하시는 모습은 자랑스런 모습이었사오나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모습이 되지 못하였고, 부르실 수 있는 참된 본연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렇게 자탄할 수밖에 없는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아버지 앞에 면목없는 자신을 뉘우치는 간곡한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향하여 나서게 될 때 어느 누가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고 싶지 않은 자가 있겠사오며, 하늘을 향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맹세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 딸로 선 자가 심히도 적었사옵니다. 맹세한 자들을 취하여 이끌어 나오셨사오나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서 나타난 자가 심히 적었던 것을 역사과정을 통하여 저희들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지닌 모든 타락의 흔적과 허물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참다운 마음으로, 참다운 심정으로, 참다운 행동으로 저희를 찾아 오셨사오나, 참것으로 대하지 못한 모든 불비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는 아버님께서 함께 손길을 붙들고 땅을 바라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을 그리워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딸을 그리워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었다가도 저버리는 자리에 나감으로써 잊혀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하늘을 향한 일편 단심으로 내 몸을 거느리고 내 생명을 바쳐서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사정을 아뢸 수 있고 남아질 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번 기간 저희들의 마음을 분별시켜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시여, 약속하신 그 때를 바라보는 저희에게는 부족한 점이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걷고 있는 저희의 발걸음은 이미 지쳐 있사옵고, 바라보는 시선도 불비한 입장에 있사옵고, 하늘을 향하여 양심 깊은 곳에서부터 간곡하게 부르짖던 마음마저 사탄이 빼앗아 가려 하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접할 적마다 하늘이 슬픈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저희가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선이 승리의 표적을 들어내야 할 때가 가까와오면 가까와올수록 저희를 붙들어 줄 수 없고, 권고할 수 없는 하늘의 내적인 사정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남아진 운명의 길, 원한의 그 길을 저희들이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사람이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을 배척하며, 하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설지라도 저희들만은 불변의 심정을 품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환희의 한날을 찾아가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삼천만 이 민족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생명과 운명을, 발걸음을 책임질 수 있는 주인이 땅 위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믿는 자로서 그 책임을 감당하게 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스스로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 믿을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어, 맡겨주신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전체적인 책임이 저희의 잔등에 지워져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저희들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음으로만 움직이는 저희들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림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 시간에 제단에서 외로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남기신 본향의 이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된 저희들, 이제 아버지의 심정을 일신에 지니고 그 이상을 지상에 실제로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부족한 저희 인간을 구해 주시기 위해 나오셨사옵니다. 이제 최후의 승리의 한날을 향해 가는 저희들, 기도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불효하는 자리에 서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시여! 저희를 권고하시옵소서. 아버지의 그 뜻에 대한 전체의 책임을 진 저희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사오니, 끝까지 아버지의 명령 앞에, 아버지의 심정에, 아버지의 사랑에 불효하지 않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 역경을 넘으며 섭리역사노정에서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어 아버지 허락하신 뜻 앞에서 불효하는 저희가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의 몸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맡아 주시옵소서. 부족한 모습들이 아버지 앞에 모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저희의 마음을 아시고 받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처음부터 끝시간까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61
기 도(Ⅱ)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들을 이 민족 앞에 세우시기 위해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수고하신 아버지의 눈물 자국이 저희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슬픔과 탄식의 사망권내에 휩쓸려 하늘과 인연맺을 수 없는 불효의 자식들이었사오나, 내리신 은사 앞에 황공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의 본성을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셔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오라 하시는 그 길이 있는 것을 안 그때부터 눈물의 길에도 아버지께서 같이 하시는 것을 알았사옵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슬픔의 길, 쇠사슬에 매이는 그 길까지도 같이하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딸들의 배후에서 수고하시며 역사노정을 밟아나오신 아버지의 그 가시밭길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을 모아 놓으시기 위해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수고의 역사를 거듭하였던 것을 알고 나니, 이와 같이 수고하신 아버지의 면모를 마음으로 그리며 경배드리는 저희들이지만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충격의 심정으로 저희 자체들을 사로잡아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뜻이 있고 하늘의 소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리움 받은 저희였사오니, 오늘 저희에게 닥쳐오는 십자가의 길도 저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추만대의 후손까지도 선조들이 수고한 역사적인 그 인연의 길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들이 무한한 기쁨과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할진대, 그것은 저희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것도 아니요, 어떤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시작하고 하늘로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을 저희의 몸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 하늘이 움직이셨던 그 터전을 그리워하며 이것을 붙들고 눈물지을 줄 아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외로운 이 한 자리에 찾아온 당신의 아들 딸들, 이들이 갈 방향을 당신은 알고 있사옵고, 이들이 취하여 나아갈 길도 당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마음의 시작도 자기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옵고, 이들의 권고의 자리에 서는 것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고, 남을 위하고 아버지를 위함이었을진대, 끝까지 그 심정이 변하지 말게 주관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남아진 고난의 이 한 기간을 통하여 아버지께 불효하여 떠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고,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의 슬픔을 느끼고도 이 어려운 시기를 넘어가지 못하는 아들 딸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아버님의 심정을 지니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를 염려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할 줄 아는 ,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할 줄 아는 아들 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지는 때가 되었사옵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길을 가는 자는 그만큼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때가 왔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 한날 아버지 무릎 앞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생명의 권고에 기뻐하는 모습들이 되어, 아버님께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이 한시간 되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의 마음엔 아버지의 것 외에는 일체 요구되지 않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오늘의 고난을 밟고 넘어가 약속의 동산을 바라보아야 되겠고, 영원한 축복의 하늘나라를 그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나타날 하나님의 축복은 말할 수 없이 큰 영광의 자리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오늘의 저희들, 아버님에 대한 심정을 변치 않고 끝까지 참아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싸워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도 있사오니 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날도 외로이 지방에 널리어서 아버지 앞에 통회의 시간을 갖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허락해 주시옵고, 그들의 마음 마음을 분별시켜 주시옵고, 도중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고, 저희가 아버지의 은사를 입는 이 시간, 저희 마음이 아버지의 것으로 움직여 아버지의 승리의 영광을 체휼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이후의 시간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6-63
기 도(Ⅲ)
아버님! 당신의 은사를 천만번 죽을지라도 보답할 수 없는 것들이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아버님을 복된 아버지로 알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존귀한 자리에 있는 아버지로서만 모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만군의 아버지시요, 만우주의 주인이요, 만천하의 권한을 가지신 주인공이었사오나 아들 딸들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불쌍한 사정이 처하여 계시니,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 시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남기신 섭리의 원한의 고개를 바라보고 패자와 같이 약한 모습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못 갈지라도 아버지께서는 가셔야 할 섭리의 길이요, 또 저희들이 아버지를 저버릴지라도 아버지는 저버림을 당하시면서도 슬픔을 머금고 가셔야 할 길이요, 민족을 거치고 세계를 향하여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개의치 않고 가셔야 할 아버지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아는 자들이 땅 위에 심히도 적어 아버지의 서러움이 이 땅에 사무친 것이요, 아버지의 탄식이 땅에 닿아질 것이며, 아버지의 심판이 땅에 내릴 것을 염려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긍휼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의 심정에 아버지의 약속의 뜻이 살아 있사올진대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목을 놓아 울면서 심정의 제단을 쌓는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천년의 뜻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나가게 될 때에 믿어 오던 자들보다도 더 믿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핍박에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외면에도 이기는 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배반의 기수가 될 수 있는 저희들이지만 이 자리에 찾아왔사오니, 아버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변함없는 충효의 아들 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걷던 이 걸음을 멈추게 될 때, 민족의 서러움은 더 가해질 것이며 저희들의 탄식도 더 가해질 것을 알고 있사오니, 가야 할 길을 가게끔, 아버지, 재촉하여 몰아내 주시옵고, 아버지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핵심을 이뤄놓게 끝까지 몰아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전하게 될 때에 아버님의 아들 딸로 서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하늘의 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땅 위의 누구도 모르는 자리에서 이 때문에 번민해 오셨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바치고 새로운 맹세와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이오니, 이 땅 위에 오셔서 서러움을 남기고 가신 그 예수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자 하였던가 반성하게 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맹세와 각오를 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잠들어 있는 이 민족 위에 능력의 손길을 펴시옵고 성령의 단비를 내려 주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승리의 한날을 자랑할 수 있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나서게 될 때에, 모든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갈 것을 각오하셨던 예수님의 그 외로운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사옵니다. 이제 각오하고 나선 저희들이 품고 있는 소망을 자랑할 때는 왔사오니, 하늘편에 서서 앞장서 나가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이 남기고 싶으신 것을 남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 심정에 심정을 가하여 아버지를 위로하며 아버지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참다운 무리를 붙들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간에 대한 섭리를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념이 있는 것을 알고, 이제 나타나야 할 하늘의 진심을 알고, 맞고 돌아가야 하는 하늘의 슬픔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참된 이스라엘이 되고자 충성하는 자들과 고락을 같이하게 품어 주시옵소서.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를 유리했던 무리들도 눈물어린 고통 가운데 있다가 뜻을 배반했던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전환의 기운이 오늘날 저희에게 나타나고 있사오니, 저희로 하여금 역사적인 해원을 하는 무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세운 뜻 앞에 있어서 자신이 부족함을 느껴야 되겠고, 역경 속에서도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제단을 건설하고자 했던 모세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의 염려와 아버님의 고통과 아버님의 수고는 오늘 저희들이 당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무한한 수고의 노정을 걸어가시고 걸어오신 아버지의 그 정상(情狀)을 바라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무한한 고통의 길을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성상을 바라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당하고 있는 억울함, 저희들이 받고 있는 비난, 저희들이 당하고 있는 핍박,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하여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사실을 저희들에게 깊이 알게 깨우쳐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최후의 승리의 터전 위에 설 때까지 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심정으로 권고해 주시옵고, 그 모든 것을 개의치 않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 모였사오니 하늘의 권고가 저희의 마음 몸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 슬픔이 있고, 저희에게 외로움이 있고, 저희에게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라고 부를 줄 아는 의식을 가진 자라 할진대는 , 감히 자기라는 존재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친히 개개인의 마음 몸 위에 찾아와 주셔서, 아버지, 생명의 일체감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은사를 가해 주시옵소서. 끝날까지 참아 남아질 수 있는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맹세를 갖추고 나설 줄 아는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도 외로이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식구들이 있을 줄 아오니, 이 시간 그들의 아버지요, 그들의 친구로서 나타나시어 일률적인 역사로 대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66
기 도(Ⅳ)
아버님, 이 시간엔 오로지 아버지의 심정에 어리는 저희의 마음 몸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본연의 그 마음에 어리는 , 아버지의 심정에 이끌려 감을 느낄 줄 아는 이 시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대하여 아버지에게로 달음질쳐 나아가 아버지의 목을 안을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저희의 몸 마음에 싹틀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은은한 가운데 은은히 나타나셔서 저희 마음을 털어놓기 전에는 동하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더렵혀졌을 망정 아버지를 향하는 충심만은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 심정을 통하여 저희들을 찾아 주시옵고, 이 심정을 통하여 명령하시옵소서. 몸의 부족함을 뉘우치고 과거의 생활이 불충했음을 깨달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을 ‘내 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이 우러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그 누구도 보호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을 찾아 나오는 자의 친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은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눈물 뿌리는 자들의 친구요 영원히 같이 살 아버지로서 나타나기를 즐거워하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은은한 가운데 권고하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그립사옵고, 은은한 가운데 품어주시던 그 놀라우신 사랑의 감촉이 그립사옵니다. 그러한 저희의 마음을 통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한 순간이 그리워지옵고 손을 들어 내 아버지라 자랑하고 싶고 부르짖고 싶사옵니다.

멀리멀리 계신 아버지이신 줄 알았더니 저희의 마음속에 계셨고, 그 아버지를 만나던 순간이 기뻤사옵니다. 멀다 할 때 가까운 심중에 계셨고, 심중에 계시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 멀리서 부르짖으시던 아버님이셨사온데, 오늘날 인간들은 여기에 박자를 맞출 줄 모르고 있사옵니다.

나를 버리신 줄 알았던 그 자리가 아버지와 가까운 자리요, 나와 함께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 과거의 저희 자신들을 이 시간 뉘우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들이라 명명하시옵고 사랑하는 딸이라 명명하시는 이상, 그 아들 딸들을 고생의 자리에 두고 싶지 않으신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사옵니다. 아버님의 곡절의 심정을 모르는 저희들은 수고의 길에 내놓으신 아버님을 매정하고 무정한 아버님이라고 알았고, 그 동안 아버님을 대하여 자탄한 때도 많았사옵고 원망한 때도 많았사옵니다. 아버지와 저희들 사이에 가로막힌 곡절의 벽을 알지 못하여 원망도 하였고, 배척도 하였고, 부정도 하였고, 불신하는 자리에 나간 것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우리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저끄러 놓은 죄상 때문이었고 인류 역사상에 원한의 핏자국을 남기고 선지선열들이 죽은 연고임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의 기준이 높은 자리에 있습니까? 그 마음을 불살라 없애 주시옵소서. 내 몸과 내 위신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신하고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성상 앞에 면목 없는 이 몸을 치고 처참한 입장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깨달아,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아들 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 것을 알았사옵니다. 말씀을 전하였는 데 행하지 못하는 무리를 보시고 하늘이 슬퍼하시게 될 때, 말한 자는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슬픔은 날로 가중되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한 이 슬픈 사정을 하늘은 알고 있으나 땅 위의 인간은 모르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하늘은 그런 인간들을 저버릴 수 없어서 염려하시며 다시 권고해야 할 하늘의 입장임을 다시 알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거룩한 날이라고 모였사옵니다. 말씀을 고대하여 모였사옵니까. 하늘의 은사를 고대하여 모였사옵니까. 그 무엇을 바라고 모인 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참된 자체를 바랄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참된 자체로부터 내려지는 말씀과 명령을 들을 줄 아는 자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님의 뜻을 따라 40평생의 노정을 걸어오면서 슬픈 일이 있어도 낙망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시련을 당할 때 패배하여 후퇴하기를 원치 않았음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아버지, 이제 남은 길에도 수없이 연속되는 고난의 역사가 남아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오늘의 불충함을 아버지 앞에 머리 숙여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원컨대 역사의 서러움을 이 한 몸에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남아진 고난의 전부도 이 한 몸을 제물삼아 하늘이 밟고 넘어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안식할 수 있으며, 모든 탄식을 저버리고 기쁨의 한 순간을 맞아 서로 목을 껴안고, 내 아버지요, 내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순간이 그립사옵니다. 저희들이 어떠한 희생과 어떠한 각오와 어떠한 비참한 모습으로 땅 위에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충절의 일편단심만은 이 땅위에 세우고 사라질 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길을 가기를 각오하고 있는 저희들이오니, 아버지, 개의치 말도록 몰아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새로운 마음과 몸으로 각오하고 맹세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허락하신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지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을 전하려 하오니, 그 심정 그대로 전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받는 자의 마음과 화하여 하나의 일체적인 심정이 되고 아버지의 크신 품에 안기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69
말 씀
이 시간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신앙자의 태도’입니다.

‘신앙자의 태도’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6-69
신앙의 본질세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믿는 다고 자처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이 나라를 소망삼아 걸어나온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본 일도 없고 간 일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그럴 것이라 믿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 연고로 신앙의 본질이 현실의 모든 조건과 타당성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크고 무한한 하늘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이념의 동산으로 존재하여, 나라는 존재와 상반적인 관계를 갖고 언제나 나의 이념을 재촉해야만 거기에서 신앙의 길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느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하는 그 나라는 꿈으로나 상상으로나 또는 어떠한 지혜로운 추측으로서도 이렇다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세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무한한 세계인 것이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선과 행복과 사랑과 이념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나라,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신앙의 천국입니다. 그 세계의 본질을 통해 신앙하는 사람을 땅을 중심삼고 보면 불쌍하다면 지극히 불쌍한 것이요, 외롭다면 지극히 외로운 것이요, 처량하다면 지극히 처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서도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 심정권내에서 미쳐지는 충격과 자극을 느끼는 자가 있다면 땅 위의 어떠한 핍박이나 고통이나 죽음의 길이 가로막더라도,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막을래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6-70
진정한 신앙자의 생활
이런 심정이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 마음이 몸을 재촉하여 사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한한 경지를 향하여 걸어 나가게 되는 생활의 일편 일편을 체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신앙자의 생활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감촉과 이러한 충격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멀리 있는 이념을 실제 생활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힘의 충격으로 주위에서 휩쓸려 들어오는 사망의 물결까지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반을 닦아야, 하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하여 진정한 신앙자로 인정하리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어떠한 입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게 될 때에, 거기에서 자아의 인식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어떤 주의나 사상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크고, 그것이 심적 혹은 육적, 또는 생활환경의 핵심적인 빛의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결정적인 입장에서 승리의 일로를 거쳐 나가는 놀음이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는 핍박이 가중되어 왔고, 슬픔이 가중되어 왔으며, 십자가의 길, 혹은 죽음의 길이 가중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노정을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적인 신앙노정을 배반해서는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바른 신앙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70
어려운 신앙의 길을 늠름히 넘어가려면
어린 신앙의 길을 가면서 어려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을 늠름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생겨난 것도 자신이 생겨나고 싶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고 싶어서, 이러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러한 부자유스런 환경에 태어나고 싶은 의식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 수 없는 어떤 움직임에 휩쓸려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나 스스로 자랑할 나가 아니라 나에게는 역사를 들어, 전체를 들어 혹은 미래를 들어 이념적인 권내(圈內)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이런 신념과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의 신앙길에는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슬픈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어려운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억울한 죽음까지 부딪치게 되며, 천륜의 인연을 저버리는 신앙자의 태도를 취하기 쉽게 되고,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념에 대한 사무친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내 생활을 이 이념에 의해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신앙세계의 이념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은 우주적인 인연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 제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런 느낌이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이 땅 위에 감히 여러분을 침범하거나 굴복시킬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인연을 많이 느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고 시작된 그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선민의식이 유대민족사를 만들어 왔고, 복귀섭리역사를 계승시켜 새로운 복지동산을 건설하는 노정에 있어서 소망의 터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비단 그 민족뿐이 아니라 민족을 거느렸던 민족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이후 1600년 동안 하늘을 저버렸던 인류 앞에 다시금 새로운 약속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택하여 천추의 한을 푸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노아였기에, 노아는 하늘의 뜻, 하늘의 명령을 붙들고 120년 동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는 하늘이 세워주고 불러주고 명령하였던 그 인연이 귀중함을 알게 될 때, 그 앎이 크면 클수록 하늘과의 인연이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뜻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을 더 깊이 느꼈던고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이 비웃고 배척했지만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 생활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72
중심인물들의 마음가짐과 생활
그의 동족들, 그의 친근자 등 모든 사람이 배반하였는 데 오로지 그만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할 수 없다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졌던 원인은 무엇이뇨. 그래도 자기를 찾아주신 하늘의 인연이 자기의 형제를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고, 자기의 친척을 저버리는 것보다도 더 크고, 자기의 일생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허락하신 그 뜻 앞에 불쌍한 사정이 미쳐지면 머리를 숙이고 눈물로써 그 인연에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세계를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은 모세에게 있어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스러운 환경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하여, 선조들의 뼛골을 통하여 자기의 피살에 뻗혀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에 그것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애급의 모든 문화를 통달하고 원수 나라의 모든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내적으로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적인 인연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의 서글픔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이에요. 자유로운 환경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선민의 후손이 되었다는 그 인연에 사무치게 될 때에, 그는 바로 궁중을 적대시하고 애급 백성을 원수삼아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바로 궁중을 뒤로 하고 하늘과 인연이 있는 무리인 이스라엘민족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뜻을 알고 있는 모세는 이런 심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으되, 그 뜻을 모르는 유대백성은 그러한 모세를 알아보지 못한 연고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슬픔과 탄식이 사무치게 된 것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민족을 찾아 주었던 모세는 민족조차 자기를 저버리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길을 걸을지라도 하늘의 선민된 절개와 지조를 지니고 그 몸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품은 신념을 그 누구에게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바로의 학정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민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민족이 잠들어 있고 무지한 가운데 있을 망정 눈을 들어 축복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자지 못하며 심정의 피기름을 짜면서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고, 민족을 대한 서글픈 심정을 갖고 하늘 앞에 통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한 모세였기에 그 시대의 주인적인 책임을 질만 하였고 하늘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러한 인연의 역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인연의 요소를 다시 갖추기 위하여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민족 앞에 모세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6-73
예수님이 지상에서 느낀 것과 각오
그뿐만 아니라 그 외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어온 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이후 4천년 만에, 타락한 아담의 모든 실수를 그 몸에 담당하고, 하늘의 슬픔과 만민의 슬픔과 온 만상의 슬픔을 그 몸에 지니고, 하늘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모든 흑암의 조건들을 홀로 담당하고 이것을 타파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제2의 인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회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땅 위에 어떤 분으로 오셨던고. 그는 4천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죄로 말미암은 슬픔을 감촉하지 아니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선의 감촉과 선의 심정에 사무쳐서 지으셨던 본연의 아담 해와를 그 마음으로 동경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이 되어야 할 아담 해와의 모습을 대신 복귀하기 위한 역사적인 인연과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대신하여 왔다고 하는 신념이 사회의 어떠한 환경보다도, 살아가는 자기의 어떤 심적 동향(動向)보다도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외로움이 있다고 하면, 그 외로움은 하늘과 인연되어 있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외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외로움을 헤아리게 될 때에 자기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어떤 소망이나 이념에 사무칠 적마다 인류 앞에 그 소망과 이념을 소개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드려야 하고 선조들이 타락으로 저끄린 모든 죄상을 탕감해야 할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진 자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타락한 아담을 원망하기에 앞서, 타락한 후손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아가서는 천사장을 원망하기에 앞서 그 원망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한걸음 더 나아가 창세 이후 4천년의 서러운 복귀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아버지요 아들이라 할 수 있는 ,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자기 자체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자기 자신은 하늘 땅을 대신한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장한 자리에서 느껴진 그 인연의 충격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성상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땅의 성상이, 만민을 바라볼 때 만민의 성상이 자기와 영원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그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었던가. 기쁜 인연이 아니라 슬픈 인연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기쁨의 인연을 갖추고 영원한 이념의 동산을 건설하여 하늘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일체의 조건이 아버지의 기쁨의 조건을 자극시켜 드리고 그 기쁨의 심정을 노래해야 했으나, 기쁨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슬픔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면 느낄수록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던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자기 선조들이 맺은 인연이 기쁨의 인연이 아니고 슬픔의 인연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슬픈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슬플 적마다 각오하였고, 어려울 적마다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륜의 기쁨의 제단을 갖추어 서지 못하는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슬픔은 컸습니다. 교단을 알고 보니 안 만큼 슬프고, 민족을 알고 보니 민족을 안 만큼 슬프고, 자기의 종족, 자기의 사정을 안 만큼 슬펐습니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그 앎이 기쁨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슬픔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연한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시고 애통함을 가지시고 가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한히 영광된 선한 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였으나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자탄할 수밖에 없는 무한히 슬픈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두 교차점에 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6-75
신앙자의 바른 태도
그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시고 이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분이었음을 역사 이래로 신앙자들 가운데에서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게 될 때, 예수님의 그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감돌고 여러분 자체를 휩쓸어 움직이는 느낌이 없다면, 이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불쌍한 이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 슬퍼할 줄 알고, 하늘을 찾아나가는 교단들이 산산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자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역사를 대신하여, 현시대를 대신하여, 미래의 후손을 대신하여 슬퍼할 줄 알아야만, 여러분의 후손에게 이스라엘에 허락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인연의 조건이라도 지상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른 신앙자의 태도는 자기라는 것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야 하늘과 기쁨의 인연을 맺고 사라지는 그 시간에 ‘아버지여,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맺어왔던 슬픔과 원한의 인연을 종결짓고 기쁨으로 얽힌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소유할 것이 영원한 나라요, 이러한 자들이 살 곳이 하늘나라요, 이러한 자를 찾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여러분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올 때에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인연이 맺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발길을 돌리려 해도 무엇인지 미련을 가지게 하는 인연이 여러분들을 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 나로 말미암은 인연이 아니라면 누구로 말미암은 인연이었던고. 피눈물의 역사를 해원하기 위해 세운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이 우리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감촉이 심중에 느껴질 때마다 자기 존재의식조차 잊어버리고, 쓰러지면서라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최후에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고개를 넘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될 때에 비로소 주를 맞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북받치고 사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도 알 수 없는 역사적인 한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알 수 없는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인적(人的)인 인연이 오늘의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뇨? 땅 위에서 슬픈 인연을 다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여! 하늘의 슬픈 인연을 제가 다 탕감하겠사오니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슬픈 인연의 세계에서 남아지고 그 세계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모습이 되고 민족이 되게 하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 할진대는 수많은 십자가가 오늘 우리의 마음에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무슨 뜻이었던고. 하늘의 슬픔을 탕감하는 노정에서 자기 일신의 죽음을 통해 어느 한계까지만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하나님의 심중까지 연결되어 들어가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처참한 죽음의 길이 남게 되지만, 영적인 구원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기의 죽는 것 정도는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거예요.

6-77
참된 신앙의 길
이러한 느낌이 여러분의 마음에 용솟음친다면 비록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늘 땅을 소유한 자요, 비록 동지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 땅이 동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길은 인연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길이요, 하늘과의 인연의 탑을 쌓아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세상의 친구도 사귀었다가 헤어지게 될 때에는 서운해 하고 슬퍼하거늘, 하물며 하늘을 중심삼고 나가던 인연의 노정이 끊어지는 그 순간은 어떠하겠습니까. 역사적인 슬픔의 순간이요, 천지의 슬픔의 순간이요, 인류와 천상의 슬픔의 순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를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가도 가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래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배웠듯이 오늘날 우리 개체가 선 위치는 하늘 땅과 저나라에 있는 영인들의 한까지 해원성사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사적인 운명의 제단에 놓여 있는 여러분입니다. 이렇게 제물된 자신의 입장이 슬프다면 무한히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영인들의 슬픔,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의 슬픔,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하늘 땅의 수많은 존재들의 슬픔이 여러분의 슬픔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러분은 하늘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서 낙망할래야 낙망할 수 없을 것이요, 탄식할래야 탄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느껴지는 이러한 감촉, 내 마음에 인연되어진 이 충격이 어떠한 영원한 이념까지 인연맺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필코 이러한 이념을 성취시켜 그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있다 할진대 그 영이 즐겨 살 수 있는 그 세계까지 우리가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인연된 그 폭과 높이로 말미암아 그 세계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이렇게 움직이거나 저렇게 움직이면서도, 혹은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죄인이란 심정을 금할래야 금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늘을 찾아 나가는 신앙자의 길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0년을 이 길을 걷고 있는 저 역시 각오하고 이 길을 나서게 될 때 ‘하늘이여! 제가 하늘을 찾아가고자 하오니, 오늘 하늘과 약속한 이 인연을 죽는 그 시간까지 저버리지 말게 하시옵소서.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없어지고 이 몸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인연에 따라 살고 그 인연에 따라 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고, 십자가가 부딪치고, 핍박이 가중되는 그런 순간 순간마다 하늘과 약속했던 자신을 그리워하며, 그런 환경에서도 하늘 앞에 눈물지으며 머리 숙여 자기의 미급함과 자기의 불완전함과 자기의 무기력함을 탄식하면서 하늘을 붙들고 울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을 찾아 가는 자의 발걸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진 모든 것이 선생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여러분 것으로서 맺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것으로서 남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심정을 통하여 인연되어 있는 민족인 것을, 종족인 것을, 개인인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하는 신이 거짓되지 아니하고, 내가 바라는 이념이 거짓되지 않는 다 할진대, 여러분이 하늘의 뜻을 부정한 만큼 심판의 조건에 걸리지 않겠는 가 염려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심정을 가지셨기에 죽어도 가야 했고 살아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셨기에 만민이 동정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79
선생님의 생각
내가 알건대 여러분이 나를 따르고자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하려고 하지만 그 정성 그 모심을 받기를 주저하고 있는 스승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이 땅 위에서 그런 한날을 맞이하지 못하셨고, 내가 먼저 아버지 앞에 기쁜 마음으로써 성심을 기울여 매일 매일 경배드리지 못하고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늘을 대하지 못하는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여러분의 성심을 거부한 때도 많았고, 하늘 앞에 울부짖는 애달픈 심정을 알지 못하게 짤라 버리는 것 같은 입장을 취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나의 어떠한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연의 세계의 원한을 생각하고 현실 세계의 만상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아니 그럴래야 아니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을 바라볼 적마다 거기에 싹터 있는 하늘의 슬픔을 염려하는 심정을 가진 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만나서 좋아하였다면 좋아한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그 슬픔이 오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요, 땅 위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인 것입니다. 이러한 땅의 슬픔을 해원하고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줄 알며, 땅의 기쁨을 노래하여 아버지의 심정에 묻혔던 기쁨을 드러낼 줄 아는 주인공들이 어느 날에야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인고.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지니고 그러한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무시할 수 없고 여러분도 역시 나를 무시할 수 없어요. 여러분 끼리끼리는 눈물과 슬픔의 6천년 역사를 거쳐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늘은 하늘의 식구를 고대하였고,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민족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는 민족이 되지 않으면 그 민족은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민족을 바라는 가정이 되지 않으면 그 가정도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는 개인이 되지 않으면 그 개인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6-80
하나님의 아들 딸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
나를 넘고 가정과 민족을 넘어 국가적인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고 그 이념권내에서 슬픔을 탕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가 형태의 이념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슬픈 인연을 넘은 국가를 소망하여 나오신 아버지를 위안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하늘의 아들 딸로 결정될 것이요,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하늘과의 인연이 회복될 것이며,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기쁨의 역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느 민족도 주권이 없게 되면 오고 가는 사람이 농락하고,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비웃을 수 있지만, 주권이 서는 그날부터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지나갈 수 없고,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상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못 되어 있습니다. 하늘 주권이 있는 하늘 백성이 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백성을 거느릴 수 있는 주권을 갖지 못하면 그 민족은 당하고 저버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을 중심삼고 애급에 천국의 주권을 회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주권의 나라를 소망하여 60만 대중을 인연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로 내몰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고? 이런 저런 핍박을 받고 죽음의 고개를 거쳐서라도 하늘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를 세워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망이 물결쳐 들어오는 광야로 이스라엘 민족을 내몰았던 하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국가 형태를 갖추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고 유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늘의 섭리를 보게 될 때에,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교파를 위주하여 나갈 때가 아닙니다. 선민주의적인 사상을 넘어서 천민주의적인 사상을 하늘의 사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의 백성된 위신과 절개를 가지고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역사적인 인연과 인간적인 인연을 맺고, 하늘을 중심하여 단결할 수 있는 제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단이 나타나지 않는 한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는 수많은 원수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인연이 있고, 농락당했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인연이 사무쳐 있고, 사탄으로 인해 하늘이 슬퍼하였던 뼈저린 역사의 인연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만나는 것은 일개인이요, 대하는 것은 한낱 인간이지만, 하늘의 인연과 하늘의 사정이 얼크러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 이면에는 우주사적인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이나 하늘이 주권을 찾아 헤맸고, 하나의 주의를 찾아 헤맸고, 하나의 인연을 찾아 해맸고, 참다운 심정을 갖춘 동지를 찾아 해맸습니다. 모든 것은 출발에서부터 종결까지 이런 역사적인 인연을 거부할 수 없으며, 이런 통합적인 인연의 역사과정을 상속하고 상봉하며 살아나가는 신앙생활이라 할진대, 아무리 동지에게 결핍됨이 있고, 아무리 식구에게 부족함이 있고, 아무리 식구가 여러분에게 자극을 준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늘과 인연맺기를 바라는 마음 이상의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인연을 저버릴 때 느끼는 슬픔 이상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충신이라 하고, 가정과 친척을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저버리고 효성을 다하는 사람을 효자라 하고, 가정을 붙들고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제물 삼아 산 여성을 열녀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연의 역사를 바라보면, 하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라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이 인연, 이 상대적인 인연에는 역사적인 시선이 주시하고 있고 역사적인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인연의 심정을 느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순간, 그 자아의 의식이 돌아오게 될 때, 그 나는 오늘의 나로되 이 땅 위에 한정된 나가 아니요 영원한 세계의 이념권내에서 보장하는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늘은 완성한 자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제가 알진대는 참된 신앙자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연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의 은사도 오늘의 기쁨의 인연이 미쳐진 은사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을 인계받은 은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82
하늘이 안심하고 명령할 수 있으려면
오늘 나에게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 앞에 먼저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은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진리를 통하여, 어떠한 사정을 통하여, 하늘과 땅에 맺혀진 인연을 통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결심한 바를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고 마음에 맹세한 바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결심, 그 맹세, 그 심정에 느껴진 충격을 그날로 종결지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종결지어야 하고 역사와 더불어 해결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의 은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갖고 있는 고로 결심한 그 결심이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며, 혹은 맹세하였던 그 맹세도 역사의 해결점과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책임적인 사명을 느끼는 자가 있어야만이 하늘은 안심하고 명령하실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에 사무쳐 있다 하나 지금까지 하늘의 인연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저버리는 마음을 지닌 사특한 인간을 대하는 하늘의 슬픔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늘은 이러한 인간을 걸어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겠습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인연입니다.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고 지옥에 가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인연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에 가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6-83
본연의 인연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우리
여러분을 만난 시간이 짧다 하더라도, 하늘 앞에 은사 받은 것이 1개월, 2개월, 혹은 1년, 2년, 3년, 4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도 여러분이 그 기간만큼 은혜 받은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이 6천년이나 되었소이다’ 할 수 있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러나오면 여러분들은 하늘 대하여 황공할 것입니다. 천만번 죽어 마땅할 이 한 일신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는 하늘이 하셨는 데 기뻐하기는 내가 하는 이런 사악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인연에서 살고, 본연의 인연에서 울고, 본연의 인연에서 죽는 무리, 그 무리가 역사의 주인이요, 시대의 주인이요, 미래의 개척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자들을 모으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세우기 위하여 인연맺는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섭리해 나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심판이 있다 할진대 이 인연을 저버린 자 이상 두려운 심판을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여기에 있는 이 건물을 생각하는 자도 아니요, 세상의 어떤 진리를 믿는 자도 아니요, 여기에 모여 있는 이 무리를 생각하는 자도 아닙니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과 인연지어진 통일교회를 인식할 줄 알고, 그런 통일교회의 진리에 자복할 줄 알고 그런 인연으로 모인 통일교회 식구의 감정을 통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통일교회 식구입니다. 더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6-84
하나님이 고대하는 인간
그 다음 신앙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고대하는 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연을 갖고 있는 연고로 고대하지 않을래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고대하느뇨? 신앙자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신앙자가 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명사를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여기에 서 있지만 여러분은 하늘이 고대하는 그 나가 아닌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을 위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과의 인연이 있다 할진대 본연의 나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자신의 생활 표준으로 세워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찾는 때에는 , 그 나를 자랑하고 나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그런 나를 찾던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고대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심정을 잃어버린다 할진대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6-85
신앙자의 제일 표준이 되는 본연의 나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시작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해결짓고, 자기를 중심삼고 비판하여 나가는 길이 제일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은 하늘이 찾고 있는 상대적인 나를 추구하는 것보다도 상대적인 나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 마음에 더(加)하여 직접적 인연을 가진 자기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나를 찾기 위하여 울고 싸우고 하는 충격이 나에게서 시작하여 나 자신을 격동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격동된 나와 소망의 내가 인연을 맺는 느낌을 가져야만 어려운 신앙의 행로를 무난히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이 선생은 오늘의 인간을 대해 무한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처한 인연을 내적으로 무한히 저주하고 싶은 일면 소망하는 그 나를 대해서는 노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은 마음을 시간 시간을 통하여, 생애를 통하여 느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나 교회관계에 있어서나 어떠한 환경과 처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그런 나를 찾아가는 걸음이거늘, 그 일을 내 어이 저버릴 수 있으며, 내 어이 더디할 수 있으며, 내 어이 주저하고 바라볼 수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노정에서 후퇴하는 자라면 바라던 그 나를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서부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의 생활을 계속하면 탄식과 자포자기와 자멸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체를 탄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신앙자에 제일 가까운 표준은 그 소망의 나를 찾아 고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느 한 날 그 나를 상봉할 것이냐 하는 심정에 사무쳐 있다 할진대 하늘을 바라볼 줄 알 것이요, 그 나를 찾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6-86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창조이념을 세워 놓으시고 바라셨던 한 자체의 모습이 역사과정을 통하여 소망의 모습으로는 나타났으되 실질적인 모습으로서는 나타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6천년 역사노정을 참고 싸워 나오실 수 있었느냐 하면, 소망의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이, 소망하는 인간을 고대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강하신 연고로,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언젠가는 그 실체적인 모습과 상봉할 날이 있을 것을 아시는 연고로 하늘은 지금까지 참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은사를 갖추었으나 그날을 자랑하지 못하고 ‘다시 오마’ 하는 소망의 그날을 세워 놓으시고 가셨습니다. 그 이후 ‘다시 오마’하신 한 날을 그리면서 2천년 동안 싸워 오고 계십니다. 하늘도 이렇게 가거늘 땅 위에 있는 오늘의 우리도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땅에 지어 놓으신 본성의 모습, 그 나를 세워주기 위한 하늘의 수고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고, 하늘의 체면과 위신을 염려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소망의 그날을 노래하면서 나아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영광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나는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나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이것을 찾는 날까지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가겠다는 그러한 결의와 맹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했다 할진대는 오늘날까지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나를 유린하는 생활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 이후 2천년 역사과정을 거쳐 오면서 하늘은 다시 올 소망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참고 나온 것입니다. 역사 행로의 발자취가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땅 위에서 내가 식구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식구를 찾아가 권고하는 이 모든 것은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신랑되신 주인공을 맞기 위한 그날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하나의 단장물이요 하나의 장식물인 것을 알고,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세계는 멀고 무한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존재라는 마음을 갖고 하늘에 사무쳐 호소하는 자리에 나가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아 주실 것이고 소망으로 찾아온 나를 환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여러분의 영적인 체험시간이요, 영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와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사무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 마음이 없는 자는 아버지 앞에 세워질 제2의 자아를 찾을 수 없고 나아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6-87
신앙을 하는데 참을성이 필요한 이유
그 다음에는 참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도 참아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그날부터 이날까지의 역사노정은 참음의 노정이었음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민족을 대해 나오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더라도 참으시며 눈물을 흘리신 길이요, 참으시며 피를 흘리신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나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독생자를 원수들이 농락하고, 죽음의 제물로 사라지게 할지라도 하늘은 참아 나오셨습니다.

또 하늘이 택한 이스라엘민족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세계 어떤 민족 앞에 나타날 때도 유린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몰리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민족의 하나님이요 그 백성의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참아 나오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지 못하여 타락한 인간이 되었던 연고로 참는 자가 승리의 한 날을 세울 때까지는 하나님도 참지 않을래야 참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뜻을 어겼으니 참는 한 자체를 찾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해원될 수 없습니다. 즉, 참아서 하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리고, 참아서 민족을 해원하고 우주를 해원하여 행복의 한 날을 소망하고, 싸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에서도 남아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만나시기 전까지는 참아 나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없고 심판의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6천년 동안 참아 나오시며 분한 마음이 사무쳐 있으시되, 심판의 권한이 있으시되 심판하지 못하고 참으시는 아버지의 서글픔과 아버지의 비통함과 아버지의 원통함이 있는 고로 참는 것으로 출발하고 참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는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 데 그 심판은 무엇이뇨. 하늘이 참아 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한때를 고대하며 참아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풀 수 있습니다. 심판의 권한을 갖고 심판대에 나서서 원수를 심판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6천년을 참으신 하나님의 그 참으심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노정에서 참으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고 또 인계받아 ‘아버님! 참으시던 심정을 풀어 놓으시고 나로 말미암아 해원성사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지고 나서는 자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은 뜻을 세우시고 선열들을 대하여 시대 시대 또는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말할 수 없이 무지무지한 싸움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참아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참아나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에 여러분의 전체의 마음을 다 합하여 참고도 남음이 있는 여유의 마음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참으시던 심정의 기준을 넘을 수 없고 그로 말미암은 해원의 기준을 세워 심판을 재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끝날에 7년 대환난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종말에는 택한 자도 미혹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끝날에는 이 환난 가운데서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 다고 하셨음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6-89
참음의 종착지
그러면 그 참음의 종착지는 어디인고? 인내의 종착점은 어디인고? 여러분은 그 종착점을 더듬어서 헤매어 봤습니까? 그곳이 아담 가정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노아가정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역대 선지자들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내 한 자체에도 역시 참음의 역사가 남아 있고, 이 한 사회에도 참음의 역사가 남아 있고, 내 이후 후손에게도 참음의 역사가 남아지려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나는 참음의 왕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나타나야 겠습니다. 6천년을 참아 나오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 앞에 나가겠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자들이 땅 위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참음이 있다 하지만 그 참음이 역사적인 참음의 종착점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인연된 사람들이 ‘지쳐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좋지만 어려워서 못 가겠다’ 하는 말을 듣게 되는 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일 거예요. 땅을 두고 보면 행복한 자일지 모르나 하늘을 두고 보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는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보고 울고, 느끼고 울고, 싸우면서 우는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이 그칠 시간이 이때인 줄 알았더니 아닙니다. 눈물이 더 연속되어야 하는 , 즉, 더 참음의 눈물을 고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이 처량한 모습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참았다는 그 사실도 하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나왔으나 아직까지 내 참음의 한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끝나기를 바라는 그 시간서부터 자기를 살필 것이며, 그 시간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느껴봐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요, 참으신 그 분이 나와 영원히 같이 살 나의 아버지며, 참으신 그 분이 내가 모실 신랑이라고 여러분은 마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늘 앞에서 기뻐하고 영광을 누린 자가 있다 합시다. 그를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참음의 자리에서 늠름하고, 참음의 자리에서 태연자약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앞에 참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자가 오늘의 이 혼란된 역사에서, 참음의 역사과정에서 행복스러워하는 자보다도 귀한 자인 것을 느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오늘의 이 혼란된 시대를 넘어갈 줄 모르는 자는 하늘에 대해 배반자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에게 물질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을 참아야 되겠습니다. 지식으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도 참아야 되겠습니다. 내 일신에 대한 심적인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도 참아야 되겠습니다. 참음의 6천년 역사를 배반하는 그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참고 참고 또 참아야겠습니다. 망하는 줄 알았더니 남아진 것이 하늘의 역사요, 쓰러지는 줄 알았더니 소생해 나온 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육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민족의 혼이 꺾어지려 할 때, 민족정신이 흐려지려 할 때 다시 민족을 새로운 소망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터전은 무엇이었던가. 그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음의 길도, 죽음의 길도, 어떠한 고통의 자리도, 가혹한 창칼도 참았던 그 터전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족정신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늘의 전통적인, 천적인 정신을 이어받을 자 그 누구뇨. 참음의 제단을 높이 받드는 자입니다. 참음의 제단을 받들고 하늘을 향하여 고대하고 있는 무리가 그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가공적이고 공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감정, 실제적인 촉감에서 느껴져야 하겠습니다. 그 느껴지는 것은 내가 참을 약속하고 맹세하였던 것과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고 비웃을 수 있고 그런 여유가 여러분의 뱃심으로부터 그 세포까지 움직여져야 합니다. 그런 충격이 없다 할진대 남아진 고난의 도수를 어떻게 채울 것인고. 민족이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세계가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하늘이 넘어가야 할 이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고난의 성을 쌓고 죽음의 성을 쌓으면서 참는 과정을 거친 후 복지가 나타나지 않는 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참으심도 어느 한 날에 끝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6-91
참된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늘 우리들은 신앙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이념을 찾아 나간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생명을 노래하고, 내일의 소망을 찾고, 내일의 희망을 기준삼고, 내일의 나라와 내일의 백성, 내일의 민족, 내일의 가정, 내일의 나를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그 나는 오늘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찾다가는 전부다 낙망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걸을 바의 고난의 길을 다 걸어야 되겠고, 고대할 바의 간절한 심정의 기준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세울 바의 인류 역사가 남아 있는 한 이것을 청산하기 전에는 그날이 되어지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걸음은 그 소망의 이념을 위하여 행차할 준비를 하고 출발한 하늘의 정병이거늘, 그 발걸음은 앞밖에 모르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뒤에서 소리가 난다고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원수의 소리입니다. 옆에서 다정하게 군다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노리는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환경에는 참다운 친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아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참다운 지도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참다운 진리를 찾고 여러분이 참 지도자를 찾는 자리에서만이 참다운 하늘의 지도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짓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참된 자라도 거짓된 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과정에는 아무리 참다운 생명의 인연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거짓된 생명의 인연으로 나타나야 했던 곡절이 있었습니다. 참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의 스승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집안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고향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나라를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소망의 이념을 귀일점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중심하여 환경적인 어두움과 싸워 그 인연을 자랑해야 되겠고 갈급한 심정으로 소망이 이루어지길 고대하여야 되겠습니다. 이런 참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며 주위의 환경을 해치고 나갈 때에 비로소 하늘의 역사는 가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의 결정선에서 최후의 한 발짝을 내디뎌 그 선을 끊어야 여러분에게 새로운 소망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날을 맞을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 소유할 것입니다. 그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서 인연맺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할 천적인 조건이 남아 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인 운명을 앞에 놓고 가고 있는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런 견지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가서 반성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신앙자의 태도를 갖추고 있습니까. 소망의 마음을 세워 나오기 위한 신앙이었습니까. 그것을 바라던 나였습니까. 묵은 믿음을 갖고 다 될 줄 알고 모든 것을 해결짓고자 하면 그 길을 못 갑니다.

바른 신앙의 태도를 지니고 가야 할 우리인 연고로 이제 우리에게 사망의 위력이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 사망의 힘을 청산하고도 남음이 있어야겠습니다. 남아지는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내 정열도 그렇고, 내 충성도 그렇고, 내 노력도 그렇고, 내 참는 데도 그렇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남아지는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상속의 제1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복잡한 유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망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마음에 품고 소망의 나 한 자체를 고대하면서 이것을 찾아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는 무한한 원수들이 가로막을 것이나 이들과 싸우고 또 싸워야겠고, 나가고 또 나아가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참음의 제단을 내 어깨로 고이고, 발로 고이고, 손으로 고이고, 몸으로 고이고, 머리로 고이고, 참음의 고개를 넘기를 각오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자의 태도를 지닌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하늘의 진리를 찾아나가는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6-93
기 도
아버지시여! 때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부활의 주를 만나기를 주저하는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때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죽음의 슬픈 인연을 품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연상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형틀에 달려 돌아가신 그는 원한을 품고 가신 분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그가 거니신 골고다의 산정은 인연의 눈물고개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가 흘리신 피와 땀은 오늘까지 인연의 역사에 살아 남아 인류의 심중 심중에 부활되어 들어가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역사적인 섭리의 뜻 가운데서 흘리신 피와 땀이었던 연고로 그 인연이 존재할 때까지 그 피와 땀으로 인해 모든 것이 움직여 나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그런 심정에 사무치는 저희, 그런 경지에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렇게 가신 주님, 신랑되신 주님은 인연의 역사를 거쳐 다시 찾아주마 하셨사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 몸을 기울여 저희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심정이 간절하신 줄 아오니 저희들 자신의 모습을 갖추어 만민 앞에 단장된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게 허락하여 주시업소서.

그 길을 나가려니 악한 세상이요, 주가 가시던 그 길이 남아 있으므로 참고 또 참고 또 참아 민족의 남은 고개를 걸어야 되겠사옵고, 세계의 남은 고개를 걸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땅에 남아진 십자가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순교의 역사를 참음으로서 지탱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이 비로소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이제 말씀을 듣고 보니 아버지 앞에 황공하옵고, 알고 보니 죄송한 마음이온데, 이제 무엇을 더 아버지 앞에 변명하며, 아버지 앞에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자랑할 아무것도 없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인연을 느끼고, 새로운 마음으로 고대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참으면서 아버지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그날까지 나아갈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맺혀진 슬픔의 인연을 넘을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쁨의 인연을 자랑할 수 있는 그 시간까지 참고 남아져서 사망의 권한을 밟고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줄 아는 아들 딸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이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