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0 to 6-288: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
1959.06.07 (일), 한국 전본부교회

6-260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
요한복음 3:1-15

[기 도(Ⅰ)]

어려운 인생길을 거쳐가는 저희들이 슬픈 사정에 잠겨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고통의 사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알고 있사옵고, 어느 한날 기쁨에 잠기어 아버님과 이 땅과 만민을 대해 노래할 수 있는 심정을 갖지 못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슬픔에 지치고 어려움에 지쳐, 갈 방향조차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던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저희에게 허락하신 은사가 놀랍고 크신 것을 느끼는 저희들이었사오나, 그 은사를 받고도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하는 불충한 저희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슬픈 세상에서 그 슬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저희에게 미리 제시해 주셨사오나, 그 예고하신 뜻을 받들기에 충분하지 못한 저희들이었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고통스러운 행로를 가야 할 저희들이었사오나, 이것을 피할 수 있는 한 길을 저희들에게 세워 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 앞에 감사하며 그 길로 가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남은 바의 생애를 아버지의 기쁨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의중에 맡기고 살기를 바라고 있사오나, 땅 위에 사망의 권한과 죄악의 권세가 워낙 강하게 저희 주위를 둘러싸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시오니, 긍휼의 아버지, 이 시간 현현하시옵소서.

아직까지 해방된 자리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며 아버지 앞에 기쁨을 돌려드리는 저희들이 못 된 것을,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힘과 능력의 손길을 펴시어서 어둠의 권한을 제압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승리의 모습으로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망의 권세가 저희를 휩쓸고 있사온지라 생명의 감촉과 생사의 판가리를 거쳐서 이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자동적인 힘과 자발적인 능력이 필요하오니 아버님, 이 시간 그것을 염원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있사올진대, 그들에게 친히 능력을 가하시옵고 부활의 권한을 허락하시어서, 내일의 소망을 품고 하루 하루의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걸어나온 모든 생활이 부족하였다 할지라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뜻이 있다 할진대, 그 뜻과 그 이념과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개척자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때는 자기 스스로 성별할 때이옵고, 자기 스스로 감정하여 아버지 앞에 나서야 할 때이옵니다. 의지할 곳을 찾을 수 없는 때이옵고, 참다운 중심을 통하여 저희의 모든 것을 통할 수 없는 때인 것을 알고 사옵니다. 아버님이여, 끝날에는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줄 아는 자, 자기 스스로 사탄의 세력을 제거시킬 줄 아는 자, 자기 스스로 승리한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줄 아는 자가 필요하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그와 같은 존재들을 세우기 위하여 저희들을 불러 주셨사온데, 오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는 모습이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길을 가는 데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들었사옵고, 아버지의 은사를 증거하는 행동도 보았사오나, 저희들이 그 뜻을 받들어 아버지 앞에 충성된 제단을 세우지 못하고 하늘의 정병이 되지 못함으로써 아버님의 탄식이 가해질까봐 두렵사오니, 아버님,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을 대하여 충성했다 하는 자가 있사오며, 아버님을 대하여 스스로 옳다 하고 나설 수 있는 자가 있겠사옵니까? 부족한 것만이 있고, 불충스런 면만이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선을 지향하시는 아버님의 심정을 알고, 선의 뜻을 세우려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뜻대로 행하지 못하는 불충한 몸들이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사정이 얼크러져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앎으로써 저희들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아버지가 취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재정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아버지의 심정을 부둥켜안고 아버지에게 붙들려 아버지께서 가시는 곳곳에 저희가 따라갈 수 있고, 아버지께서 움직이는 대로 저희도 같이 움직일 수 있으며, 아버지께서 행동하시는 대로 저희들도 행동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이 삼천만 민족을 재창조해 주시옵소서. 이들의 생명을 다시 아버지의 소망의 동산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뜻 앞에 저희들을 먼저 불렀을진대, 이들에게 하늘의 심정을 통고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말씀을 전할 줄 아는 아들 딸들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이제 각자의 심정 심정이 다를 지라도, 그 마음 중심은 같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를 위하고 싶고, 아버지를 따르고 싶고, 아버지의 심정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오니, 이것을 기반으로 아버지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움직이시어서 저희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보이시옵소서. 그리하여 해방의 은사권내에 저희들을 옮겨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 아버지와 저희 사이에 틈이 없는 가 하고 억만 사탄들이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심정과 저희의 심정이 통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형상과 저희의 몸, 아버지의 사정과 저희의 사정, 아버지의 소원과 저희의 소원이 일치하여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실 수 있는 이 한시간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럼으로써 저희들이 밀려들어오는 사탄의 어떠한 권한도 막아내고 아버지 앞에 승리의 영광을 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최후의 결정을 지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시간 맡겼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스스로 옳다 할 자 없사오니, 긍휼의 아버지시여, 이 시간 품어 주시옵고, 친히 저희 앞에 분부하실 말씀이 있다면 분부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부족하여 아버지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면 채찍을 들어 쳐서라도 깨달을 수 있게끔,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전체 시간을 성삼위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천천만 성도들이 옹위하여 사탄이 일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별된 마음, 성별된 몸, 성별된 심정으로 산 제물로서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치어져 아버지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친히 주관할 수 있는 이 한 예배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참석하지 못한 식구들이 있사올지라도 아버지, 같은 은사로 보호하여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심정을 품고 지방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어린 아들 딸들도 이 시간 같은 은사로 보호하여 주시옵기만을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263
기 도(Ⅱ)
이제 저희의 마음이 어떤 곳에 머물러 있는 가를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몸은 비록 한 곳에 모여 있사오나, 마음들은 천태만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흙덩이가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는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게 될 때 아담이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의 마음도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의 형태는 하나의 제단 형태를 갖추었으되, 마음의 본형과 본질은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지성소가 되어 있는 지, 이 시간 염려하는 마음으로 존엄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온유하신 아버지의 성상을 대해 간곡한 심정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 수 있는 마음의 감촉이 없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이 느끼고 있사옵니다. 깊은 가운데 의논하시기를 즐겨하시고 은은한 가운데 현현하시어서 저희의 사명을 밝히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움직임의 역사를 저희들은 마음으로 바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들이 은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은밀한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모습이 되지 못했을 때, 슬프고 외로운 분은 아버님이셨고 딱한 입장에 계신 분도 바로 아버님이셨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 계신 아버님을 저희의 친아버지로 모시고 일체적인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나뉘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묶어져야 되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할 터인데, 저희의 마음에 이런 심정이 떠오르지 않는 다 할진대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딸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아버님과 저희가 나눠질 수 없는 인연이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한 저희들이라 할진대는 허락하시고자 하신 천국 이념도 저희와 관계가 없게 되고 역사적으로 수고하신 아버지의 위로의 터도 저희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의 아버님, 사랑의 아버님, 불쌍한 것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영영 헤어날 수 없는 모습들이 되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저희가 잘난 것이 무엇이 있어 아버지 앞에 옳다 하고 나설 수가 있사오며, 저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족한 것 뿐이요, 느끼는 것은 황공한 마음 뿐이오니,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바라는 사망의 무리를 ,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의 손길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긍휼히 보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섭리의 때는 끝날을 재촉하고 있사옵고, 사망의 물결은 저희 주위를 휩쓸어 저희 개체를 여지없이 삼키려 하옵니다. 저희가 혼란된 환경에 처하여 있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염려하시는 심정이 이 땅에 남아 있고, 수고하신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런 것을 보시고 아버지의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초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사오나, 아버지, 이 시간 이들을 긍휼히 보시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외로운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 이 시간 털어놓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꾸어 가져야 하고, 슬프고 말할 수 없이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의 기쁨과 생명의 심정으로 바꿔 가져야 할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이것을 아시는 아버님이시여, 아버님의 힘든 입장을 대신 담당하고 덜어드려야 할 저희들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희의 어려운 사정을 맡기고 아버지께 다시 힘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타락권내에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모인 자의 심정 심정이 통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망권내에서 허덕이던 저희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고 인연이 없던 저희들이 한 식구라는 명목을 갖고 모였사옵고, 아버지의 천적인 이념을 대할 수 있는 섭리의 이념을 흠모하여 모였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고 찾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 누가 아버지 앞에 자신을 가질 수 있사오리까? 아버지께서 자신이 있다고 하시기에 저희들도 자신을 갖기를 바랐사옵고, 아버지께서 이렇다 하시기에 그렇다는 것을 느끼기를 바랐사오니, 여기에 그릇됨이 있사오면,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고,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삼천만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사옵고, 생사의 기로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사탄의 저울대는 높아가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것을 슬퍼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의 길과 이들의 사망줄을 깎아 내려 승리의 터전을 높여야 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힘이 부족하오면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용단 용맹의 마음이 부족하올진대 용단 용맹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하여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던 그러한 충고의 말을 이 시간 허락해 주시어서 저희들을 충고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저희로 하여금 이 삼천만 민족을 아버지 제단 앞에 이끌어내어 아버지의 생명과 연결시킬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것을 끊고자 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 할진대는 이것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나갈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 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외로이 지방에 널리어 있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슬픈 심정을 품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시옵고, 그들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옵소서.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고,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슬픈 사정에 처해 있어도 인간 대하여 그 사정을 토로할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하였고, 외로운 입장에 처하여도 그 심정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식구들을 갖지 못한 당신의 아들 딸들을 긍휼히 보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심정에 연한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하여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도 같은 심정에 연하여 하늘의 마음이 동하면 그들의 마음도 동하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을 아버지 심정에 다시 얽어매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허락하신 시간에 말씀을 갖고 나타나려 하오니, 아버지,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좋은 말도 필요치 않고 복된 말씀도 필요치 않사옵니다. 필요한 것은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옵고, 죄인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심판대 앞에 설까봐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오니, 그러한 몸과 그러한 심정을 갖고 허락하신 말씀을 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심정이 연하여 아버지의 은은한 심정으로 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은은한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도 모르게 경배하고 싶은 심정으로 화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옵나이다. 아멘.

6-267
말 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 입니다. ‘새로운 나와, 그 새로운 내가 살 수 있는 천국’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6-267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과 우리가 처한 현실
땅 위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이 동경하면서 찾아나온 이상세계가 어디냐 하면, 그것이 이제 말하였던 천국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잘 살고 복된 자리에 처하기를 바라는 자는 많으나 ‘잘 살았다’ 하고 ‘복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심히도 적은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놓고 볼 때,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 천국생활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생활형태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경계선에 서 있는 내 한 자체는 천국을 향해 찾아가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찾아가서 살아야 할 입장인 우리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더 좋은 이념을 찾고 있고 우리의 몸도 더 좋은 안식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역사 이래에 이것이 최고 좋은 것이요, 이곳이 인간의 본심을 통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장담하고 제시할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생활방식,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조직은 아직까지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치않는 생활환경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늘도 어려움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내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생의 생애 노정에서도 역시 우리는 소망의 세계를 흠모하는 환경권내에서 탄식과 원망을 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어느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나 자신을 끌고 끌며 넘고 넘어 소망의 동산, 이념의 동산, 행복의 세계는 어느 때에 이루어 놓고 살게 될 것인가, 또는 어느 때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중심삼고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중의 문제요, 인류가 다시 제창하여 해결해야 할 난문제 중의 난문제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라 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세계에서 끊어 버리고 살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6-268
우리는 행복의 동산에서 태어났느냐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한 생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잘 되었는 지 잘못 되었는 지, 우리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인간들 중에는 현실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참다운 생애냐 참답지 못한 생애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나서 살다가 어차피 육신을 벗고 가야 할, 죽어가야 할 입장에 처하여 있습니다. 우리 한 개체들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죽음이 참된 죽음이고 또 자신이 참다운 곳에서 죽느냐, 그렇지 못한 곳에서 죽느냐, 이러한 문제가 여러분과 직접 관계되어 있고, 여러분의 생애를 통하여 인연되어 있습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맺어야 할 이런 권내에 우리는 처하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부모의 혈육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를 자랑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참다운 부모의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면 낳아 놓은 자식을 바라보고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태어난 순간 그 아이가 행복의 보금자리에 누웠다고 해서 고고의 음성을 울리는 그의 일생이 행복스러울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한, 그 낳아 놓은 부모 자신도 역시 기쁨의 심정을 체휼하기 전에 슬픈 심정을 체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탄생이 행복의 동산에서 나지 못한 것을 인정할진대는 , 그가 나서 사는 생활도 그러할 것이고, 그가 살다가 가는 죽음의 고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런 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임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너는 참다운 생을 고대한 때가 있었느냐, 너는 참다운 생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최후에 맞이할 죽음을 승리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다면, 어느 누구도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개인 개인들이며 이런 모든 인간들은 타락권내에 처해 있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적인 마음의 세계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세계, 비정상적인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나가는 생활 전체, 즉 태어난 그날부터 죽는 그때까지, 어느 누구든지 행복이라는 명사를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바라는 행복이니, 이상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오늘날 여러분과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는 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소망의 실체를 이룬 심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소망을 이룬 가운데서 기뻐할 것인데, 오늘의 나는 그런 기쁨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이념적인 실체를 이루었더라면 만상을 대하여 나를 따르라고 자기를 세워 당당히 호령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인데, 오늘날 나는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참된 이념을 가져야 할 이간이 참된 이념을 갖지 못하였고, 행복된 환경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행복의 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 앞에 내 심정에 스며드는 행복의 전체 요소를 가지고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는 데,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이 이상 불쌍한 것이 없고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자리에 예수님이 4천년 역사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4천년 역사에 왔다 갔던 선열들의 전체 책임을 짊어지고, 또 4천년 역사노정의 인간들이 품었던 모든 이념과 소망을 짊어지고, 행복과 천국의 이념을 짊어지고 왔다 할진대는 , 그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마음 세계에서 친구 중의 친구요, 중심 중의 중심이요, 우리의 생활 전체의 중심이요, 소망이나 이념, 더 나아가서는 생사의 중심까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행복이라는 한 명사를 남기고 갔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런 탄식권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불행한 사망권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다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천국 이념권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6-270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그러면 이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먼저 어떠한 작전을 갖고 나와야 되느냐? 하나의 사람을 세워 거룩히 성별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 그대로는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없기에, 하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인간과 인연을 맺기 위해 선민을 택하여 나오셨습니다. 이 선민 가운데에서도 선민을 택하여 나오신 섭리의 역사노정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노아를 택함도 그러한 것이요, 아브라함을 택함도 그러한 것이며, 모세를 택함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세워 놓고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시고,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모든 해원을 성취코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또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오던 택한 이스라엘 선민도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또 선민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살고 있던 세계의 인류 역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자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때 있던 만물, 즉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연하여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피조물이든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없으면 모르거니와 하늘이 있다 할진대는 , 하나의 실체인 인간이 바라는 이념의 중심, 혹은 행복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 반드시 어떤 하나의 원칙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섭리의 철칙일 것입니다.

공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문제를 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적인 원한을 박차고 인류의 심정에 소개할 수 있는 하나의 원칙적인 기준이 서지 않는 다면, 하늘의 어떠한 행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고, 하늘의 어떠한 이념과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늘의 행복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 전체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은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그러한 심정을 품고 그러한 이념을 받들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이 하늘과 실체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행복의 동산, 선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271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고? 4천년 역사노정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쁨을 소개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이 소개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행복의 동산이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역사적인 새로운 존재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모습은 선조들이 소망하던 하나의 실체요, 선조들이 싸워나오면서 찾고자 하던 소망의 존재였다는 것을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 한 자체는 선조들의 소망을 다시 부활시킨 존재요, 또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던 땅을 대신한 소망의 존재요, 또 하나님이 심중으로 동경해 마지 않던 천국이념을 인간 세상에 이루어 놓기 위하여 보내셨던 하나님 대신의 존재요, 또 인간 앞에 있어서는 행복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우리의 대신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으되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못 되었고, 새로운 세계의 백성을 못 가지셨고, 새로운 세계의 생활을 개척해 놓지 못하셨고, 새로운 세계의 사회와 새로운 세계의 국가를 건설해 놓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타락한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던 실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라든가 환경이라든가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중을 그냥 그대로 통할 수 없는 환경이요 사회요 나라요 세계인 연고로, 하늘은 이 세계를 대하여 심판의 명사를 걸고 바라보고 계시다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새로운 것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앞에 나타나게 될 때,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랑하는 바리새교인들 앞에 나타나게 될 때, 말씀하시기를 , ‘너희들이 주장하고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천적인 새로운 실체로서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우주관을 갖고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를 통해야 된다는 것을 명시하시기 위하여, 그런 입장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나서서 싸우신 것이 그의 3년 공생애노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나타난 수많은 무리, 이런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들을 대해, 예수님은 다시 한번 새로운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새로운 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가 새로운 심정, 새로운 이념, 새로운 생명, 새로운 행복을 소개하였다거나 이것들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믿고 따른 사람은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 가지고 자기가 품었던 새로운 이념, 새로운 주의, 새로운 생활방식, 새로운 세계형태, 이것을 다 말씀하시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품고 허덕이는 예수님 앞에 니고데모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유대의 관원이요 택한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스승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 우리도 다시 나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역사의 종말기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에 이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지어야 할 것으로 하늘은 보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 죄악 세상을 어느 한때에 심판하여 청산지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끝날을 두려워하면서 신앙노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끝날은 어떤 때이뇨? 옛것을 청산해 버리고 새것을 주장하여 나오는 때라는 것입니다.

6-273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지고 오신 것
역사노정을 헤아려 보면, 과거의 수많은 주의 주장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변천해 나왔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여 서로 선후를 노리고 있는 이런 판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반드시 이 싸움판에서 새로운 한 방향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하늘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새로운 제2의 자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은 오늘의 내가 아닌 좀더 새로운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이래서는 안 되는 데,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면 안 되는 데’ 하면서 이와 같은 사회, 이와 같은 세계 실정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양심작용이 있음으로써 내 마음과 내 모든 이념을 통할 수 있는 , 즉 심중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심중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종결짓기 위하여 오셨는 데, 무엇을 갖고 오셨는 고? 새로운 생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갖고 오신 동시에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신 동시에 새로운 사랑을 갖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정을 통해야 할 천륜의 어떠한 운세가 있다면, 그 운세와 연합할 수 있고 같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습니까? 모든 존재, 천지의 이념적인 일체의 존재물을 움직여낼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이념의 심정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모든 만상을 품고 그 심정으로 녹여낼 수 있는 어떤 사랑의 심정을 체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6-274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명력을 가진 어떤 존재물이라도, 오늘 이 시간도 움직이는 동시에 또 오늘 이후 영원한 미래에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주체가 되시는 분인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생명을 가진 것은 어떤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활도 같이하고 싶고, 생사까지 같이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념권내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지으신 만물을 대하여 자기 정열을 다 기울여 사랑과 정적인 인연을 갖고 만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심정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이념은 어디에서 끝이 날 것인고? 인간과 인간이 개재된 곳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직접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역사적인 종말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은 무어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돼 있던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을 다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간접적인 조건을 청산해 버리면 인류와 하나님이 직접 부딪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은 계시나마나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런 목표를 중심삼고 섭리하시지 않는 다 할진대는 , 오늘날 기독교에 있어서 심판이라는 명사가 없어야 할 것인데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 것을 보니, 이러한 목적을 중심삼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275
6천년의 섭리역사와 나
우리는 타락한 연고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생명의 주체되시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요, 이념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요, 사랑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생명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더 나은 우주적인 이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정은 더 고차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후 인간들이 찾아나오는 생명력, 인간들이 찾아나오는 이념, 타락한 인간들의 정을 중심삼고 엉클어진 그 사랑이란 것은 타락역사의 출발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나님의 이념이 이루어진 동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6천년의 역사적인 모든 것을 미련없이 밀어낼 수 있는 생명력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생명력, 6천년 동안 내 힘과 생명의 가치를 자랑하였던 그 모든 것을 다 밀어낼 수 있는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6천년 역사는 어떤 역사냐?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회복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6천년 동안 사탄이 옹호하고 사탄이 지배하던 권내에서 움직이던 이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우리들은 새로운 나로서 다시 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나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 오늘날까지 6천년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의 형태를 갖춘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밀어낼 수 있는 이념을 내가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역군으로서 나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6천년 역사를 거부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지금까지의 어떤 주의 주장 또는 인간이 찾고 있는 이념적인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갖지 않는 한, 새로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예요.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가정만이라도 정으로 얼크러질 수 있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이념을 실천시킬 수 있는 완전한 발판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끝날에 가서는 다 깨뜨려진다는 걸 알아야겠습니다.

6-276
끝날은 어떤 때인가
오늘날 인간들은 20세기 문명을 이루어 놓고 세계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의 위력은 이 세계를 움직이기에는 지극히 약한 자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이념도 지극히 몰락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정적인 심정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물질적인 면에서도 세계형을 갖추어 나오고 있으되, 내적인 생명력에 있어서는 지극히 미약한 것이 20세기 문명인들입니다. 이념에 사무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시대, 더 나아가서는 참다운 인간의 사랑의 심정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역사는 흘러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찾아봐도 부부지간이나 부자지간에 있어서 하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찾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동기간도 그렇고, 친구간도 역시 의리와 인륜의 법도는 물론 정적인 기준까지 다 끝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때입니다. 하늘이 그것들을 전부 다 깨뜨려 부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 끝날인 오늘날은 이 혼란된 세상을 수습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이 필요한 때이며 이념적인 권한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한 때가 왔습니다. 이제 생명의 위력을 가진 사랑이 결탁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전체가 단결할 수 있는 , 이러한 형태의 움직임이 필요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뭇 인간들을 대하여 말씀으로 예고하였습니다. 끝날에는 사랑이다 식어버릴 것을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늘을 배척하고 하늘을 배반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다 수고와 고통의 길에서 쓰러질 것을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위력이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문제되지 않을 테지만 끝날에는 고통에 지칠 것이요, 하늘을 배반할 것이요, 사랑의 심정이 갈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때가 끝날입니다.

6-277
주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세상을 없애버리고 말 하늘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이념으로써 찾아오실 하늘이기 때문에, 그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올 것이뇨? 생명의 위력을 갖고 올 것이요, 또 이념의 권한을 갖고 올 것이요, 사랑의 원천을 갖고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기독교에서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역사노정을 엮어오고 또 걸어온 우리들에게는 내가 즐길 수 있었던 어떠한 생명의 감촉보다도 더 강하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생명의 감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감촉되는 한 자리는 영원한 안식의 자리요, 그 자리는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인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변화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세 제자는 그 변화산상에서 계속 있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이 나의 영원한 복지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시작과 끝의 한계를 볼 수 없는 그런 경지에서 살 수 있는 심정을 가져보고, 또 그런 체험을 해보았습니까? 온 천지만물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 그는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헤아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념세계는 온 피조만물이 안식할 수 있고 깃들 수 있는 이념, 만물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와 머물고 싶어할 수 있는 그런 이념과 심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예요.

또 어떠한 정적인 심정이 우러나온다 할진대는 온 만상이 그 심정과 더불어 화동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 심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정적인 경지가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인류역사 종말시대에 벌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파괴의 섭리로 종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섭리하셨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 앞에 새로운 생명의 동산, 새로운 이념의 동산, 새로운 사랑의 동산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6-278
끝날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면 오늘날 이 끝날을 맞이하는 내 한 자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고? 이 문제를 해결지으려면 우리를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를 붙들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는 하늘이 사랑하는 택한 선민을 통해서 하신 역사였고, 사랑하는 아들 딸들을 품기 위한 역사였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6천년 역사를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지려면, 6천년 역사를 움직여 나오던 천적인 내용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다 가신 예수님께서도 역사적인 하늘의 심정을 통하여 4천년 역사를 밀어냈습니다. 4천년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한 토대위에 새로운 동산을 건설하고자 했던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심정을 붙들고 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그의 심정을 붙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예수님의 그 심정을 붙들고, 당시에 어떠한 새로운 이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했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대해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어차피 역사적으로 부정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잘했다고 변명하고 스스로 세워 놓은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내 한 자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타락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권내에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되어야 할 생애요, 부정되어야 할 생활이요, 부정되어야 할 죽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 같으나 정상적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생애를 살았고, 비정상적인 생활을 했고, 비정상적으로 죽었으되,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이냐? 정상적으로 나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고, 정상적으로 죽는 사람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옥과 천국을 분별하시고 지옥의 문을 닫고 천국의 문을 개방하여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할진대는 , 부정당할 수 있는 이념을 갖고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사랑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때 누구를 찾아오셨던고?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천신만고 끝에 선민이라고 세워 놓았던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을 찾아 오셨고 그 가운데에서 택해 세운 유대교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민을 종교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십자가에 달려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예수님이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279
예수님의 가치와 십자가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셨느뇨? 하늘을 대신해 나타나셨지만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품고 역사노정을 걸을 수 있는 인간들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나올 줄은 알았으되 심정을 따라나오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들어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정은 받들고 나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오직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타났고, 섭리의 배후에서 움직이신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정은 4천년 역사를 총합한 실체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교인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생명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이념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심정을 거치지 않는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이념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심정에 있어서는 4천만 역사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그 심정은 천적인 심정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통해 나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천적인 심정을 대신한 그 자체는 역사적인 생명의 실체였고, 역사적인 소망과 이념의 실체였으며, 역사적인 사랑의 실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한 분을 이스라엘민족보다도 더 중히 여겨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보다도 더 중히 여겨야 하고, 유대교단보다도 중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중요한 예수님을 그때의 유대교인들은 잡아 죽였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심정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섭리적인 심정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념과 우주 전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그 때의 유대교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몰랐기에 예수를 잡아 죽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믿어야 할 것은 죽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생명을 갖추었고, 새로운 사랑의 심정을 갖추었던 실체인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디로 갔는 고.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가버렸으니, 죽여 버렸으니, 가고 말았으니 이 땅에는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느 때 다시 오실 것인고? 지상에서 한 때를 사시다가 가셨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시게 될 때에 새로운 형태의 이념을 세워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과 심정으로 엉킨 새로운 역사와 민족을 건설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겠다는 명사를 남긴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명사, 이 말은 무한히도 슬픈 뜻을 가진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영광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영광의 말로 알기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슬퍼하고 난 후에 다시 소망으로 바라야 할 그런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 있다 할진대 그분을 받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나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한, 6천년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하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모세를 따라 나오던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은 모세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의 2천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그것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싸우는 무리가 되어야만 하늘의 심정세계에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6-281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한 우리의 신앙자세
어떤 효자 효녀가 있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생활적인 면에서 즐거워하는 부모를 대한다고 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효자 효녀가 아닐 것입니다. 즐거움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파란곡절의 과거노정을 그 마음에 느끼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진실로 효자요 효녀일 것이로되, 즐거움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부모 앞에 불효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상정이라고 할진대는 , 천륜을 대해야 할 미래의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던고? 4천년 역사와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실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노정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 하늘 땅에 대신해서 새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그때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녹음 중단으로 중략)

예수님이 사두개 교인을 위해 오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제사장이나 교법사들이 알았던들, 유대교 교인들이 그에게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어서 가시옵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다 막아 버렸으니, 30여년의 생애를 살다 가신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불쌍하게 사시다가 불쌍하게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죄일 뿐, 하나님의 죄도 아니요, 예수님의 죄도 아닌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통하여 보내마 약속하셨던 그 메시아의 실체가 누우신 곳이 말구유였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말구유가 웬 말이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좋다고들 축하하고 있지만 가슴 아픈 일입니다. 통곡, 통곡, 통곡해도 그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날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오시기를 고대한 그 정성에 사무쳐 있는 사람, 그 지성이 천성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 있었던들 오시는 메시아를 그렇게 모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맞아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어야 할텐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끝날을 맞이한 시대에 있어서, 2천년 이전의 선조들, 다시 말해 6천년 전부터 4천년까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에 대하여 원망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원망은 무슨 원망이냐, 오신 메시아를 박대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한 선조들의 처사에 대하여 원망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2천년 전의 유대교인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원한을 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분함이 있었다고 하면,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 선민인 그들을 버리고 가면 하늘의 발판이 끊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천적인 그 심정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 자신이 그들을 원망하며 버리고 가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늘의 역사가 전부 다 끊어지고 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 죽음에 있어서는 민족적인 서러움이 있으되 역사적인 인연이 끊기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원수에 대하여 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뻐서 복을 빈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을 사랑해서 복을 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서 복을 빈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데있어서 사무쳤던 그 심정에 염려를 가중시킬까봐 인류를 위해 복을 빌었던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분하게 가신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있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분을 품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어야 할 예수님이 죽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니 예수님도 슬펐고 하늘도 슬펐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요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죽이니 그날은 천지가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283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사셨는가
예수님은 인간 역사노정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이 땅 위에 태어나셨으나 사는 것은 불쌍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사셨던고? 예수 자신을 위해서 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몰림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이념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열렬한 사랑의 위력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다 펼쳐보지 못하고 사신 분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사셨느뇨?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살다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산 실체를 가지고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후 2천년의 역사노정입니다. 그분의 30여 년의 생애는 누구를 위한 생애였던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사신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를 위한 생애였다는 거예요.

또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애쓰셨느뇨? 하나님께서도 지금까지 자신을 위하여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타락하여 죽어진 이 백성들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떤 때뇨?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못하셨으니 그 예수님께 자신을 세워 살 수 있는 한 때를 인류가 부여해 드려야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움직이지 못하셨으니, 그 하나님께 자신을 위하여 움직일 수 있는 한 때를 세워 드려야 됩니다. 그러한 때가 끝날입니다.

오늘 이 때까지 하나님은 타락의 혈통을 받은 인간, 죽은 인간들을 살리시려고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2천년 역사를 거쳐 오면서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어진 인간들을 붙안고 다시 살려 주기 위하여 새로운 날을 회복하시는 섭리를 6천년 동안 해 오셨습니다.

6-284
우리는 어떤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새로이 탄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에 스며드는 생명의 위력을, 생명의 감촉을 느낀 바가 있었습니까? 이것만이 전인류가 찾아야 할 하나의 이념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것만이 최후에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혹은 새로운 역사를 창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생활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이 가신 걸음을 다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땅을 바라보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근심이 스며 있고 하나님이 이루어야 할 수고의 역사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이여! 그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시옵고 안식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시니 하나님도 슬퍼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 하나님도 죽음의 고통을 느끼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신 예수님을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한, 여러분이 부활하여 끝날의 심판대를 넘어서 가지고 부활하신 주를 다시 모실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여도, 여러분의 마음은 영광의 세계를 흠모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천국주권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안위시키고 만민을 안식시켜야 할 분이었으되, 한 때도 그런 말, 그런 심정을 가지고 즐거워해 보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사시다 가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늘이 아직까지 이땅을 붙들고 있고, 예수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성신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으니, ‘하늘이여! 삼위신이여! 이제 땅은 제가 붙들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6-285
진정한 송영이 되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했느뇨? 나실 때도 마굿간에서 나셨고, 사실 때도 몰리고 천대받으면서 사셨고, 죽으실 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의 길’을 통과한 그 심정을 느껴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신도들 앞에 놓인 과제인 것입니다.

영광이 있다면 내가 영광을 노래하기 전에 주님이 아버지 앞에 노래하고 아버지께서 만민 앞에 노래하셔야 됩니다. 그런 후에 내가 영광을 노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민 앞에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하려면 먼저 이 땅이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먼저 하늘을 안식시켜 드려야 되겠고 예수님을 안식시켜 드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창조주로서의 위신이 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겠고, 예수님에게도 구주로서의 위신이 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신은 일개 족속과 제한된 어느 민족 앞에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의 모든 존재물,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 지옥에 가 있는 영인들까지도, 심지어 사탄까지도 ‘당신은 하늘의 아들’이라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슬픈 역사노정이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았고, 심판의 때가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천적인 생명을 느끼고, 천적인 이념을 품고, 천적인 심정의 충격을 받았다 할진대 그 생명, 그 느낌, 그 이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물론 여러분에게 하늘의 소망을 인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목적입니다.

하늘의 근심과 예수님의 근심이 이 민족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이 민족 앞에 남겨진 그 모든 근심을 맡고 예수님을 해방시키고 하나님을 안식시킬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마음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어떤 싸움의 실적을 갖고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만 비로소 여러분들은 실체를 가지고 부활단계에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 부활했기 때문에 오늘날 지상에서도 그렇게 살아 가지고 부활했다 하는 자리를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되겠습니다.

6-286
부활의 과정
하나님의 역사는 새로운 개인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가정을 찾으셔야 하고, 새로운 민족을 찾으셔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으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천국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자체로서 그의 인격적인 가치, 천적인 인격의 기준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가지 못하신 연고로, 지상에 오셨다 가실 때에 신랑 신부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천적인 개체를 세우시어 가정을 찾고, 그 가정을 표준삼아 민족을 찾고, 그 민족을 표준삼아 국가를 찾고, 그 국가를 표준삼아 세계를 찾고, 더 나아가서 하늘 땅을 복귀하여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나, 부활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변명할 수 있고, 네 생명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이념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사랑과 심정을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어떠한 무엇이 침범해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 하는 기준이 있으면 쳐도 또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수많은 사탄들이 쳤다 할지라도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적인 권한, 이념적인 권한, 사랑적인 권한이 하나님의 심중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을 갖고 대신해서 움직였던 예수님의 실체는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갖고 있으면 내 생명의 위력을 누가 침범하며, 내 이념의 위력을 누가 침범하며, 내 정적인 위력을 누가 침범하겠습니까? 하늘과 더불어 있다 하면, 사탄에게 천만 번 맞더라도 또 천만번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살아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갖고 심판대 앞에 나서야만이, 새로운 기준을 가진 새로운 나로서 하늘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천국백성으로 인정 받을 수 있고, 천국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다’고.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모든 것이 전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끝날이 되면 나 자신이 죽어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날이 오기 전에 사탄세계에서 죽어져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죽음의 권한을 밟고 올라서서 부활의 영광을 느낄 수 있어야만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심정을 품고 땅 위에 어떠한 폭풍우가 불어와도 늠름하게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이념과 하늘의 심정을 품고 그것을 녹여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고대하던 제2의 나의 모습, 새로운 나의 모습,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의 자격을 갖춘 모습,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6-288
하나님의 소원
지금 땅 위에는 하늘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혈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을 갖추고자 하는 민족이 없어요. 하나님의 생명이 연결되어 억천만대 연면히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혈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모든 것을 사탄이 점거하여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양자입니다. 양자. 혈통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직계의 자녀가 되려면, 직계의 형태를 갖추어야, 즉, 천적인 생명의 위력, 생명의 감촉, 생명의 이념, 생명을 지닌 사랑의 충격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는 , 새로운 나로서의 천국백성이 될 수 없고, 새로운 천국의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원인데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생명을 찾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못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6-288
기 도
오고 가는 사람은 무수하였사오나 아버님을 대신하여 온 자, 아버님을 대신하여 간 자는 심히도 적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땅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았사오나, 아버님을 붙들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리고 동경하는 것은 소망의 동산, 이념의 동산이었으나, 아버님을 붙안고 이것을 소망의 전체라고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사옵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이제 느낀 바의 무엇이 있다 할진대는 , 아버님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이념의 전체요, 아버님이 생명의 전체요, 아버님이 사랑의 전체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모든 뜻을 대신할 수 없는 저희인 연고로, 오늘 아버님께서는 그 위신을 세울 수 있는 환경에서 저희를 대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움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의 위신을 세워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위신을 세워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셨사오니, 땅 위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도맡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겠사옵니다. 땅 위에 있다 할진대 이것은 내가 맡아야 할 것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의 저희들은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야 되겠고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슬픔과 어려움은 내가 도맡겠다는 각오를 하게 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밀어내고 아버님의 생명의 은사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전환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저희가 새로운 마음 바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심정을 지니고 아버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한 기준을 갖지 못했다 할진대는 , 역사의 심판과 더불어 청산 받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님도 이 일을 위하여 사셨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30여년의 생애를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않고 민족과 타락한 인간들을 위하여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천국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그 시대의 택한 자로 서기 위해서는 , 땅 위에 예수님의 겪으신 십자가의 고비 고비의 모든 길을 다 넘어 승리한 실체의 모습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허락받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과업이 저희에게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도 이러한 내용을 알았을진대는 그 실체와 그 뜻에 자신을 부합시키고, 그 뜻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실체적인 제물을 준비해야 될 줄 아오니,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인정할 수 있는 승리의 제단을 조성하여 본연의 성전을 갖출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이후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에 행하는 전체의 일정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이 민족과 식구들 위에도 일률적인 보호의 손길을 떼지 마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