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3 to 6-257: 한 많은 아버지를 모실 이

한 많은 아버지를 모실 이
1959.05.24 (일), 한국 전본부교회

6-233
한 많은 아버지를 모실 이
마태복음 23:1-39

[기 도(Ⅰ)]

아버님께서 계시는 곳은 무한한 인내의 세계요, 무한히 수고하는 자리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선조 이래 지금까지 저끄러진 모든 죄상을 대하시는 아버님의 심정과 뜻을 아는 저희들은 창조 본연의 존재를 찾기 위하여 그다지도 수고의 길과 참음의 길을 걸어오신 아버님 앞에 민망스런 심정으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기나긴 세월을 하루와 같이 저희의 선조와 더불어 참으시고, 선조와 더불어 싸워나오시면서 인간들을 붙들기 위하여 허덕여나오신 아버님을, 저희들이 이 시간 마음을 넓히고 몸을 숙이어 마음에 모셔들이고 몸으로 붙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수고의 길을 피해 가는 사람은 많사오되, 당신의 사정을 알고 당신의 심정을 마음 몸에 지니기 위하여 수고의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심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님을 위하여 충성하고, 아버님을 위하여 제물이 되어 아버님의 제단을 꾸미고, 아버님의 참으시는 심정을 땅 위에 나타내는 인간들이 심히도 적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아버님께서는 지극히 불쌍한 분이신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면서도 탄식하시는 아버님이시며, 인간을 대해 염려하며 수고하시는 아버님이심을 저희가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나의 아버님이여! 이제 그와 같은 아버지의 사정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 앞에 옮겨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인류의 가슴 가슴에 그와 같은 아버지의 사정이 사무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한 날, 이 거룩한 날에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복을 받기를 고대하는 무리가 많사온데, 복은 하늘의 것이고 수고와 고난과 참음의 노정은 인간이 담당해야 할 것임을 알지 못하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것은 하늘로 돌리고 인간 것은 인간이 맡아 책임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심히 적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의 저희들이 그런 무리와 마찬가지로 이 시간 아버지를 대하는 민망스러운 모습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아버지 것으로 돌리고, 행복과 감사함의 심정이 있다 할진대 그것도 아버지의 것으로 돌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슬픔과 원한에 사무친 아버지의 서러움의 노정을 저희 것으로 맡는 아버지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일주일 동안 험난한 세파에 시달리고, 아버지 이 심정과 일치되지 못한 자리에서 싸우다가 지친 당신의 아들 딸들이 있사옵니까? 지친 그 마음은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고 있사오며, 피로한 그 몸은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은사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의 마음을 찾아 주시옵고 몸을 붙들어 주시어서 그들이 가야 할 곳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이 저희가 맡은 책임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권고의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고, 충격을 일으키는 은사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이날 저희의 심정을 통솔하여 주시옵고, 죄에 시달린 저희의 일체의 관념을 통솔하여 주시옵소서. 굽힌 머리 위에서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을 거두지 마옵시고, 심정을 기울여 아버지의 염려의 마음을 찾고자 하는 저희의 마음을 긍휼히 여겨 주시어서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를 대하여 주시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도 지방에 널린 외로운 식구들이 무릎을 꿇고, 싸움의 노정에서 지친 몸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일률인 축복의 손길을 가해 주시어서 몰리는 자리에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쓰러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아버지 앞에 제단을 쌓아 경배드릴 수 있는 성별된 무리가 되게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불쌍한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허락하신 뜻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 뜻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 그리고 끝날에 큰 뜻을 위하여 살고 큰 뜻을 위하여 모이는 민족과 교단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맡기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일절 틈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천만 성도가 옹호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기쁨과 영광을 이 시간 드러내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6-235
기 도(Ⅱ)
이 시간 저희의 몸과 마음이 어떠한 자리에 머물어 있는 가 살피고 또 살펴,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 계시는 곳에, 저희의 몸도 아버지의 성체가 계시는 곳에 있기를 원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그 한날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를 그리며 아버지를 향하여 달리는 저희들,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여 아버지 앞에 감사와 기쁨의 송영을 돌림으로써 지으신 만물을 화동시킬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 몸은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지은 것이오니, 온전히 아버지를 닮은 아들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슬픈 마음이 땅 위에 서려 있는 것을 인간들이 모르고 있사옵고, 하늘의 서글픈 눈물자국이 인류역사의 발자취에 스며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한없는 하늘의 탄식이 저희의 마음과 몸에 감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는 하늘 앞에 면목을 세울 수도 없고 하늘의 신임을 받을 수도 없는 패역한 인간의 후손이 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땅에는 당신의 눈물을 거두어 드릴 자가 없사옵고, 당신의 슬픔을 붙들고 위로해 드릴 자가 없사옵고, 당신이 가시는 그 길을 지킬 자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한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하늘의 한이 사무친 땅이라는 것이요, 슬픔이 있다 할진대 하늘의 슬픔이 사무친 땅이라는 것이요, 원한이 있다 할진대 하늘의 원한이 사무친 땅이라는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슬픔의 제물이 되지 않을래야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사옵고, 한스러운 자리를 넘지 않을래야 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사옵니다.

낙망 가운데에서 최후의 음성으로 하늘을 향하여 ‘아버님이여! 저희를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때가 되었사옵고, ‘아버님이여,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인류를 찾아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할 끝날이 당도하고 있사온데, 이러한 때에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서러워한 자 누구이오며,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고 통곡하는 자 그 누구이옵니까? 그런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 딸이라 할 수 있고, 또 아버지의 실체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저희의 마음에 힘을 일으켜 주신 아버님, 애절하고 통분한 아버지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동기가 그립사옵고, 그 심정의 원천에 접하고 싶사오니, 접할 수 있는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심정에 화한다 할진대 그 자리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폭로시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사옵고, 인간의 죄상을 대신하여 회개하지 않을래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불초하고 부족한 저희들, 반석되지 못한 저희들을 세우시고 염려하시는 아버지 앞에 민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과 슬픈 심정을 위로해 드림으로써 영광 가운데 현현하실 수 있는 터전을 갖추는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아버지의 힘과 능으로써 부족한 저희들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얽히고 설킨 죄악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다 할진대, 사랑의 손길을 펴시어서 다시 주관하여 주시옵고 다른 모습으로 빚어 주시옵소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던 능권이 아버지께 있는 것을 아오니, 저희를 아버님 품에 품어 주시고 아버지의 장중에 쥐시옵소서. 아버지 것만을 남기시옵고 아버지 것 이외의 일체는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존전에 제물로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 아버지의 것으로 취해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 딸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 자체들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신앙노정에서 억천만 사탄들이 세력에 휩쓸려 들어갈 때가 많았사오나, 반면에 아버님을 염려하는 심정이 있사오니,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들은 땅에서 승리할 최후의 한날, 최후의 한 시간까지 아버지를 위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하고 나선 몸들이오니, 이들의 일편단심이 변치 말고 승리의 동산으로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성도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억만 사탄들이 저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할지라도 천주를 대하여 지성을 다하려는 저희의 심정 앞에는 그 자취를 감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능과 능의 역사를 일으키시어 저희의 마음과 몸이 부활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기를 ,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 자리가 저희들만 참석하는 자리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억천만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방향을 잃고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위기를 당하여 허덕이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 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끝날, 불쌍한 인류 앞에 생명의 실체를 예고시키시어 그들을 아버님 편으로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지의 존엄하신 영광을 드러내어 자랑할 수 있는 심정을 갖춘 아들 딸들을 아버지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한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시련과 환난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저희는 아버지를 위하여 제물되기로 이미 각오하였사오니, 그 마음을 다시 사탄에게 빼앗기는 아들 딸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 마음 이미 아버지께 맡겼사옵고 드렸사오니, 죽든지 살든지 아버지 것으로서 취해질 수 있으며 바쳐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아버님께 맡기오니 저희 것이 움직이는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해주시옵고, 당신 것으로 남아질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외로운 식구 식구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238
기 도(Ⅲ)
이 시간 제가 전할 말은 아무 것도 없사오니 아버지께서 나타내고 싶으신 말씀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 안에 있는 것 이외에는 나타내기를 원치 않사오니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이 한 시간만이라도 어떤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동하면 동할 수 있고, 정하면 정할 수 있고, 화하면 화할 수 있는 ,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그러한 마음의 터를 아버지, 이 한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동기가 되시옵고 저희는 결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움직임에 따라 저희가 움직일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 몸을 이 시간 다시 빚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오니 같은 은사의 손길로 보호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봉독한 성경말씀은 하다 하다 할 수 없는 입장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처참한 심정에서 우러나온 최후의 저주의 말씀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끝날 저희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오거든 마음의 문을 열고,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여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듣기를 고대하여 귀를 열고, 보기 위하여 눈을 밝히는 아들 딸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 모인 무리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품에 품으시어서 새로운 말씀으로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은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 받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받는 자의 마음이 전하는 자의 마음에 감촉을 일으켜,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실 수 있고 아버지와 주고 받는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성별된 제물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삼위신이 일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어두운 세력이 틈타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6-239
말 씀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래지 않아 작정한 길을 가야할 것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을 대하여 걸었던 소망과 기대가 간곡하고 컸던 만큼 그들 앞에 뜻을 세우지 못하고 가야 하는 자신의 슬픈 심정에서 우러난 최후의 저주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삼고 ‘한 많은 아버지를 모실 이’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6-239
한의 인간, 한의 역사, 한의 하나님
오늘 우리들은 행복된 생활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유의 천지를 마음으로 동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중으로 바라고 동경하며 기대하는 것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실제면과는 상충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일상 생활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날을 사는 동안에도 상충된 것들을 수습하고 지배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심중에 가져야 할텐데 갖지 못한 연고로 마음이 그리는 곳을 향하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또 심정으로 바라는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기를 원해도 마음대로 옮겨지지 않는 것을 우리들은 생활면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또 느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이념도 갖지 못하고 자기 환경을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고민도 없는 우리 자신인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생활 속에서 큰 소망과 희망을 품고 노래하며 살고 있지만 반면에 심중에는 한스러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시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도 이런 한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같은 한스러운 무리들이 합하고 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스러운 자기 자신을 연속시켜 사회로 국가로 세계로 한의 역사를 뻗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노정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비단 우리 인간만이 한스러운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한스러운 노정을 걷고 있는 연고로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도 이런 한스러운 환경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는 창조주, 천륜을 경륜하여 하나의 이념세계를 다시 찾고자 하는 절대자가 계시다 할진대, 그도 역사 한스러운 역사를 거쳐 오는 인간들 때문에 이 땅을 대하게 될 때 기쁨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한스러운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한스러운 사실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 이 세계 전반에 걸쳐 한스러운 사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이 한스러운 일이 인류 끼리끼리에서 시작되어 인간 개개인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넘어 역사를 섭리해 나오는 천적인 영역에까지 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사실이 그런 것입니다.

타락 이후 6천년 동안 인간을 붙들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6천년 동안의 한스러운 생활을 끝내기 위하여 섭리하시는 그 하늘의 한스러운 일과 오늘 여러분 일대에서 자기 심중에 스며드는 한스러운 일과 견주게 되면 대조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참다운 인간이 있어 인간세상의 모든 한스러운 요소들을 제거시키고, 하늘이 한스러워 하던 것을 해원해 드리고, 땅 위에 평화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어떤 주의와 사상을 가고 나온다고 하면, 그는 자기 개인의 한스러운 역경에서부터 인류의 한스러운 고비고비와 그 애절한 심정을 전부 거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천상의 한스러운 전체의 심정, 하늘의 애절한 심정을 헤쳐, 이것을 해결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인간 세상에는 한탄스러운 역사를 밀어내는 한의 침범을 받지 않는 평화의 세계, 행복의 세계, 자유의 동산은 건설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헤치고 스스로 자문 자답하여 보십시오. 내가 누구이며 누구를 위하여 어떠한 목적을 놓고 헤매고 있는 가 반문하여 볼 때에 그 물음에 어떠한 답변이 나옵니까? 어떤 확실한 신념과 가치를 가진 답을 얻지 못할 때, 그 물음이 심각하며 심각할수록 거기에 부딪쳐오는 여러분의 한탄의 심정도 정비례 될 것입니다.

6-241
한을 풀기 위한 하늘의 섭리
오늘날 우리가 역사의 원한과 천륜의 곡절을 종합하여 청산지어야 할 입장에 있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태도로 그 물음에 답변할 수 있겠는 가. 만일에 하늘이 인류 역사를 붙들고 원한에 사무친 심정을 품지 못한 채 인간을 대해 나온다 할진대-또 사실이 그렇습니다-그런 하늘의 원한의 심정을 풀어 드릴 자가 누구일 것인가. 이 한의 곡절이 생긴 원인이 하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이러한 원한의 곡절을 풀어야 할 입장에 처한 자신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곡절을 해명하지 못한다 할진대, 원한의 역사는 돌고 돌아 시대를 지나고 세기를 지나도 하늘의 섭리와는 유리되어지는 역사로 계속되어 나갈 것입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이러한 역사를 가로막고 하늘의 한과 인류의 한을 청산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찾아 헤매실 것입니다. 하늘은 그 하나의 사람을 세우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을 모시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역사를 지배해 오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을 돌이켜 이런 면을 다시 회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늘은 그 한 사람을 보내기 위하여 약속하셨고, 그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무한한 싸움을 해 나오셨고,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무한한 고통의 역사를 거듭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역사 노정에 그 한 사람을 모시고 산 사람이 없었고, 그 한 사람을 붙든 사람이 없었던 연고로 하늘은 지금도 원한의 심정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늘의 원한의 노정을 따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한이 쌓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앞에 자신의 한스러움을 터쳐 놓을 수 없고 인간 앞에 자신의 한스러움을 통고할 수 없는 원한에 사무친 분이십니다. 이 사무친 하늘의 원한은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인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한을 품고 이 한을 해원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하시며 인류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고, 시대를 세워 섭리해 나오셨으며, 미래를 개척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원한의 심정을 품고 애쓰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늘이 계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한을 풀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하나의 존재를 살리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았으니, 역사적인 종말에 처해 있는 오늘날 여러분은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하늘의 한을 해원할 수 있는 그 한날을 세울 수 있도록 은사를 허락해 주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한 한이 많은 하나님이시니, 우리 인간들은 한에 사무쳐 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역사적인 빚을 진 자들임을 망각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은 지금도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인류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인류의 모든 슬픔의 곡절을 제거시켜 주기 위하여 천신만고의 수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살고 있는 생활을 정리하고, 지나온 생애를 청산하고 한스러운 심정을 붙들고 살 것입니다. 이런 충격을 마음대로 느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한에 사무친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도 한을 품으신 하늘을 모시고, 한스러운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한 많은 이 세상을 청산해야 할 천적인 사명을 짊어진 아들 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연고로 한 많은 아버지의 심정을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생애를 걸어 놓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243
예수님이 재림해야 할 이유
그러기에 하늘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4천년의 역사를 경고하여 선민을 택하여 세워 놓고 그들에게 ‘너희의 지도자요, 너희의 주인이요, 너희의 평화의 왕자요, 자유의 왕자요, 행복의 왕자가 될 사람을 보내 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은 행복의 주인공이요 평화의 주인공이요 자유의 주인공이며, 하늘의 한을 풀고 하늘의 복을 소개할 수 있는 한 존재로,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약속하였던 그 한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약속하였던 그 한 분이 나타났으나 택함받은 이스라엘 선민들이 그 한 분을 모시지 못하고, 환영하여 그 뜻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 그분의 뜻대로 단결하여 하늘의 뜻을 세우고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하여 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스러운 역사는 지금까지 연장을 거듭해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평화의 왕자요 행복의 왕자요 자유의 왕자로 오셨던 그분은 누구인가 하면, 타락 이후 4천년 역사과정의 한스러운 심정을 도맡아 갖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4천년 인류 역사를 책임져야 할 예수, 4천년 하늘의 섭리를 책임져야 할 예수님은 역사적인 한과 천적인 한을 품고 오셨던 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한을 풀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했었던가? 슬픔의 과정을 거치고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야 한이 풀리고 기쁨의 한때가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4천년 역사노정에서 누구보다도 슬픔의 한을 체험하신 분이요, 고통의 한을 체험하신 분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를 만왕의 왕이요, 하늘의 독생자요, 자기들의 구주로 믿고 있으며, 평화의 왕자요, 자신들에게 행복을 소개해 주는 행복의 왕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좋은 면에 선 예수라고 알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은 그가 슬픔의 왕자요, 고통의 왕자요, 전인류의 한을 품은 한의 왕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한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그 심정은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당시의 인류를 위함이었고, 인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위함이었습니다. 한스러운 심정, 그 심정은 하늘로부터 가지고 온 심정이요,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 갖고 오신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스러운 심정을 이어받아 한스러운 입장에서 하늘과 더불어 한을 풀기 위해 악을 대하여 싸워 이기기 위해 나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아신 예수의 슬픔도 컸거니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한은 더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땅의 역사도 원한에 사무쳐 있고, 이 시대도 원한에 사무쳐 있으며, 우리들 자신도 원한에 사무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친 원한의 역사, 사무친 원한의 시대, 사무친 자신들의 한을 제거시키고 싶지만, 우리들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무친 한의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한 주인공과 상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어가신 예수, 부활하여 승천하셨던 예수께서 이 한스러운 심정의 곡절을 청상하기 위하여 한탄스러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입니다.

6-244
하나님의 한(恨)과 끝날의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자세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인류를 사랑해 내려오신다고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슬픔이 있다 할진대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스며드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고, 고통이 있다 할진대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스며드는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또 기쁨이 있다 할진대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스며드는 기쁨 이상의 기쁨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늘은 사랑이라 하였는 데 사랑이신 하늘이 기뻐하셨는 가. 그렇지 못하셨습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고 계시는 하늘,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하늘은 오늘날까지 기쁨의 한날을 갖지 못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았는 데, 그 사랑의 하나님께는 기쁨과 행복과 평화만이 스며있는 줄 알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심정을 가졌기에 인간을 구하려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심정에 스며든 슬픔이 크다는 것을 느끼는 자가 이 땅 위에는 없습니다. 그 사랑의 심정에 사무쳐 있는 천적인 고통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에요.

인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당하고 계시는 피흘리는 곡절의 심정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날에 처한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뇨? 사랑의 하나님을 안 이상 그 하나님의 심정에 스며드는 천적인 슬픔을 알아야 되겠고, 그 하나님의 심정에 스며드는 천적인 고통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만일에 사랑을 통한 천적인 기쁨이 이 땅 위에 허락된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듯이 기쁨을 바라고 있는 성도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기쁨은 역사를 통하여 부여해야 하는 하나의 행복이요, 역사 앞에 약속되어진 하나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과 희망은 나를 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끌고 가는 역사와 더불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오늘날 그 사랑의 하나님을 붙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슬픔을 붙든 자요,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고통을 붙든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라야만이 하늘의 사랑을 통하여 소개되는 행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한은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을 믿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 주는 백성이 없는 것이 아니예요. 사랑의 하나님에게 한스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슬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의 한을 수습하고 천적인 한을 해원하여야 할 끝날이 온다 할진대 그때에 우리들은 어떠한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느뇨. 하늘을 대신하여 슬픔의 심정을 붙들고, 고통의 심정을 붙들고 ‘인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를 붙들고 ‘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할 것이 아니라 인류를 붙들고 ‘인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무친 심정을 통하여 가지고 모르게 행동으로 움직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 세상에 천적인 슬픔을 증거하는 자요, 천적인 고통을 체휼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6-246
예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
그러기에 하늘의 한을 풀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은 행복을 가지고 나타나지 못하셨고, 자유를 갖고 나타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최고로 선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이상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 천상이 환희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인데도 불구하고 지상에서는 밟힘의 왕자요, 핍박받는 왕자요, 사라져가는 왕자와 같이 사시던 예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신과 자기의 처신, 그리고 사명받은 것을 다 이루지 못하고 역경에 부딪쳐 말없이 사라져 갔던 예수님 이상 슬픈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늘이 수고하여 선민으로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받았습니다. 섭리의 뜻을 받들게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사랑해 나오던 유대교단 앞에 핍박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종족에게 몰림을 받았고, 사랑하는 제자 앞에 몰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 만일 예수가 인간적인 한을 가졌다면 이들에게 저주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왔으나 교단이 배반하였고, 종족과 친척 혹은 택한 자들을 위하여 왔으나 그들에게서 마저 배반당한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가 원한을 품고 그들을 대해 저주를 하려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저주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도리어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당했던 그들의 슬픔의 한을 붙들고 자신을 잊고 염려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천국 건설의 왕자인 줄 알았더니 아니예요.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선을 바라고 뜻을 바라 나온 역사노정의 애절한 심정, 사무친 원한의 심정을 체휼하고 나선, 역사를 대표한 슬픔의 왕자였습니다. 흑암의 세계에서, 사탄 주관 하에서 신음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슬픔의 심정을 책임지고 외적으로는 고통의 짐을 책임져 이것을 사탄 앞에 해결지어야 할, 그리하여 하늘 앞에 승리의 발판을 세워야 할 슬픔과 고통의 왕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그토록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의 슬픔 이상, 예수의 고통 이상, 예수가 느끼는 한스러움 이상 한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고이 고이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허락된 자유의 동산에서, 허락된 이념의 세계에서 하늘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행복스럽게 살아야 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을 잃어버리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그 한 사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한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담 해와가 하늘의 품을 떠나 사탄에게 유린당하고 사탄에게 옮겨가는 것을 바라보셔야 했던 하늘의 한스러운 심정, 그 한스러운 심정을 잊지 못하시는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4천년의 한스러운 인류 역사를 뒤바꾸기 위하여, 그 한탄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행복스런 복귀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으나 이렇게 오신 예수님을 모셔야 할 민족은 어디 갔던고? 받들어야 할 세례 요한은 어디 갔던고? 섭리를 대하여야 할 제자들은 어디 갔던고? 다 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을 택한 것은 예수님께 한스러운 고난의 길을 거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보냈다면 이스라엘민족을 4천년을 통해 선민으로 택해 세울 리가 만무하다는 거예요. 이 예수님을 모셔야 할 민족이요, 받들어야 할 교단이요, 섬겨야 할 세례 요한이었고, 예수님 앞에 충신이 되어야 할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가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무엇을 느꼈을 것인고.

6-248
제1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예수님의 슬픔과 제2이스라엘의 사명
땅을 위하여 왔던 걸음이었지만 땅을 버리고 가야 하고, 민족을 위하여 왔던 걸음이었지만 민족을 버리고 가야 하고, 교단을 위하여 왔던 걸음이었지만 교단을 버리고 가야 했던 예수님의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슬픈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감람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며 하늘 대하여 호소하던 예수님은 무슨 기도를 하셨을 것인고. 자신이 억울한 입장에 있는 것을 슬퍼하신 것보다도 자기를 보내신 하늘이 슬퍼하실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민족과 더불어 잘 살고, 민족을 통솔하여 만방을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예수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 길이 막혀 하늘 앞에 애절한 기도를 드려야 할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더 큰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도상에 나가시면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던 마음, 자신을 이러한 자리로 몰아내어야 하는 아버지의 슬픔과 원한이 더 큰 것을 아셨기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그 마음이 있었기에 역사적으로 하늘이 슬퍼하던 심정과 예수의 사명적인 슬픔이 예수의 일신을 통하여 하나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이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의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전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한이 맺힌 아버지의 가슴에 예수의 죽음은 더욱 한스러움을 가중시키는 사건이었으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한탄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통을 한하여 나타났기 때문에, 땅을 대하여 심판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한을 푸는 노정을 지금까지 개척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2천년 역사를 경과하여 나왔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제1이스라엘은 다 깨져 나갔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중심하여 다시 수습하는 노정이 제2 이스라엘 선민의 노정입니다. 그런고로 제2이스라엘 선민인 오늘날 세계에 널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을 통합해야 할 때가왔습니다.

과거 제1이스라엘은 선민권을 자랑하였으나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인 크리스찬들은 제2이스라엘 사상을 고취하여 가나안 복지인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총궐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계에 널려져 있는 제2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천민권을 세워 오셨고, 심판의 역사를 거쳐 나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한스러운 역사를 품고 나오신 하늘의 슬픔 심정은 어느 때에 풀릴 것인고. 과거에 선민권을 자랑하던 제1 이스라엘은 사탄 앞에 몰리고 유린당하였으나 천민권을 자랑할 수 있는 제2 이스라엘은 사탄세계를 몰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날 우리 신자들로 말미암아 한스러운 역사는 풀릴 수 있고, 한스러운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앞에, 예수의 죽음 이후 2천년 동안 수많은 곡절과 고통을 거쳐온 예수와 성신 앞에 해원의 한점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역사의 종말에서 한탄스러운 역사를 박차고 한스러운 인류와 세상을 넘어서서 한스러운 아버지의 가슴을 헤치고 그 심중의 슬픔과 고통을 체휼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모든 비애의 곡절과 사무친 원한을 품고 그 한의 원인이 된 억만 사탄을 대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겠다는 각오를 갖는 하늘의 아들 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때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250
역사적인 원한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하려면
오늘날 이러한 세상을 만든 장본인이 사탄이요, 이런 세상을 이끌어 나온 것도 사탄이요, 이런 현세의 실상을 만들어 놓은 것도 사탄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도들은 천적인 슬픔과 천적인 고통을 가슴에 품고, 또는 몸에 걸머메고 천민의 권한을 가지고 움직여서, 역사적인 원한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주권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하늘은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 가. 우리 통일신도들은 복귀원리를 배워 알듯이 우리들 자체가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치는 체휼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름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실감적이고 사실적인 아버지로 체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모습을 바라보고 한스러워 하시던 하나님 대신 무한히 한스러운 심정을 가지고 울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바라보실 때 무한히 한스러워 하시던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 이후 1600년을 지나 노아, 그로부터 400년을 지나 아브라함, 그로부터 400년을 지나 모세, 또 그로부터 1600년을 지나 예수때까지 시대 시대마다 천적인 사명을 지닌 책임자로서 보내졌던 수많은 선조들이 슬픔과 원한에 사무쳐 싸워나온 역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4천년을 지나고 6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대표적 섭리의 담당자들이 슬퍼하였던 그 마음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사는 사람들 모두 그들을 대신하여 슬퍼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적인 각오를 갖고 고통과 슬픔을 초래했던 원한을 체휼하여 역사적인 분함과, 하나님의 심정적인 분함을 풀어드려야 되겠다는 북받쳐 오르는 심정을 갖는 자가 되지 않는 다 할진대, 예수가 찾고 하늘이 찾으시는 끝날의 소망의 한 자체로 세워질 수 없고 신부의 자리에 나갈래야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끝날의 성도들 가운데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무한히 한탄스러운 심정에 스며드는 고비고비에 부딪치게 되는 데, 그런 고비를 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한, 시대적인 한, 미래적인 한, 그 한스러운 곡절의 원인을 청산하여야 할 때가 끝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끝날을 찾아가고 있는 우리는 한스러운 역사와 더불어 울고, 시대와 더불어 울고, 미래와 더불어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행복을 잊어버리고 인류의 슬픔과 고통을 책임지고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있게 될 때, 하늘의 기쁨은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소개될 것입니다.

6-251
예수님이 세우려 하신 복음의 내용과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자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많은 말씀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랑의 심정에 사무친 신앙생활을 어느 만큼 해 왔습니까.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한 많은 역사를 바라보며 한 많은 뜻을 염려하고 한 많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까? 사랑의 심정을 내세워 인류를 오라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소개하고 반기려 하시는 기쁨의 마음보다도 우리를 찾아 주시려는 슬픔과 고통이 더 많으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체휼하여 보았습니까? 이런 마음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하늘을 보니 말할 수 없이 서럽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보고 뜻을 생각할 때, 한없이 슬퍼해야 할 인류를 바라볼 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하는 마음, 이것이 예수가 지녔던 하늘을 대한 충절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슬픔과 고통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기쁨이 있다 할진대 아버지의 것으로 하시고 슬픔과 고통은 내게 맡기시옵소서’ 하던 예수, 기쁜 것은 아버지 것으로 돌리려는 것이 예수가 세우려 하던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복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허덕여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복을 찾게 하고 하늘의 복을 소개할 수 있는 길을 누가 닦을 것이고, 이러한 터는 누가 닦을 것인고. 이 길과 터를 닦을 수 있는 책임자는 누구일 것인고. 이 길을 닦는 데는 기쁨으로 닦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슬픔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슬픔의 종교요 고통의 종교인 것입니다. 비단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도(道)라는 명사를 가지고 나가는 어떠한 종교도 이러한 형태로 움직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역사적인 슬픔과 인류의 슬픔을 붙안고 뒤넘이치는 한 순간을 체휼했습니까? 역사적인 고통과 더불어 인류의 고통을 붙안고 뒤넘이치는 한 순간을 체휼했습니까? 체휼하지 못했다 할진대는 죽어서라도 해야 됩니다, 죽어서라도. 그곳이 지옥입니다. 슬픔의 곳, 그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상의 성도들은 지상에서 지옥의 슬픔을 박차고 넘어서야 되고, 지상에서 지옥의 고통을 밟고 넘어서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죽기 전에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적인 원리입니다.

민족을 구할 자는 어떤 자이뇨. 민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 민족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라야 합니다. 세계를 구할 자는 누구뇨. 오늘날 선진국은 미국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들 앞에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세계의 심부름꾼은 될 수 있으되 지배는 못 합니다. 만일에 그들이 세계의 슬픔을 아는 민족이라면 모릅니다. 세계의 고통을 아는 민족이라면 몰라요. 세계의 슬픔과 고통을 알지 못한다 할진대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일개 국가의 충신이라 할진대, 그는 그 국가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살고자 하는 개척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이념을 세우고 이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뇨. 세계의 슬픔을 붙안고 우는 자들이요, 세계의 고통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자들입니다. 이들로부터 세계의 기쁨은 소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칙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불쌍한 민족입니다.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왔지만 다른 민족 앞에 장담하고 나설 수 있는 어떠한 내용도 민족성도 갖지 못한 민족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어요. 그러나 이제 이 민족이 21세기의 신문화시대에 하늘이 소망하시는 심정을 품고 인류의 슬픔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민족이 되고, 인류의 고통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민족이 된다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민족이 된다면, 세계를 지도하고 하늘의 사랑을 받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6-253
예수님이 왕중의 왕이요 메시아로 결정될 수 있었던 이유
예수는 어떤 자리에서 왕중의 왕으로 결정되었던고. 어떤 호화찬란한 왕궁의 보좌에 앉아서, 행복한 입장에서 만민 앞에 자랑하며 노래 부르는 자리에서 만왕의 왕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십자가 도상에서 역사적인 서러움과 인류의 서러움, 역사적인 고통과 인류의 고통을 붙들고 만민 앞에 하늘의 기쁨의 도화선이 되고자 하는 심정에 미친 자였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미친 자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만민을 구할 수 있는 구주가 되었고, 슬픈 천상의 역사노정에 뚜렷이 드러나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늘이 걸어온 고통의 역사에 자랑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고, 슬픈 역사노정 위에, 고통의 역사노정 위에 미래의 신앙역사에 나설 수 있는 왕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슬픈 역사노정을 거쳐간 수많은 영인들도 예수를 구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될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왔다 갔지만 오늘 이 땅의 인간들이 그를 구주로 모시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소망을 성취하는 한 개체로 나타나서 신부가 되려 하는 자는 자기를 중심삼은 신앙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을 염려하고 하늘의 역사적인 근심을 품고 하늘의 역사적인 고통을 품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자기에게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은 하늘것이요,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내것이라 할 수 있는 심정을 소유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라야만이 천상을 지배할 수 있고 지옥까지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까지도 지배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들이 가져 왔던 신앙관념, 믿고 천국 가겠다는 신앙관념을 끊어 버리십시오. 내가 믿고 천국 가겠다는 신앙관념을 끊어 버리세요. 예수는 자신이 왕자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천국의 왕자라고 생각했으면 죽긴 왜 죽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책임진 입장에서 ‘아버지여!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간구(懇求)의 말씀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자기들의 슬픔에 울고 자기들이 고통에 허덕이는 민족에게는 절망만이 있을 것이로되, 자신을 넘어 민족을 붙들고 세계를 붙들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길로 재촉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이 한민족 앞에 나와야 됩니다. 하늘의 신앙 방편이 이 한민족 앞에 세워져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이 통일용사의 심정, 통일용사의 정신을 품은 자는 , 그 심정에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믿는 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믿는 것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지옥문을 개방하여 원한에 사무친 지옥의 영인들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믿는 다는 심정……,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품고 한 가지 일을 하면 그 일은 억천만 가지 일의 가치와 맞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랬기 때문에 역사적인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당을 출입하는 기독교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가는 걸음은 무엇을 위해 가고 있습니까? 자기 일개인의 생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움직이렵니까? 그러면 하늘의 아들 딸이 될 수 없습니다. 백성은 될 수 있을지 모르고 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들 딸이란 명사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6-255
하늘의 아들 딸이 되려면
하늘의 아들 딸이 되려면, 하늘의 아들 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늘의 슬픔이 미쳐져 있는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인류를 슬픔에서 해방할 수 있는 해방운동의 선각자로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천적인 싸움의 용자로서 원수들을 대하여 진격할 수 있는 정신적인 무장, 이념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이념 말고 온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이념으로 무장을 하고 나서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늘의 하늘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하늘은 복귀섭리의 문을 열어 놓고 끝날의 성도들을 대하여 개인적인 대표자, 가정적인 대표자, 민족적인 대표자, 국가적인 대표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가 어디 있느냐. 오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하늘이 찾고자 하시는 그러한 개인을, 가정을, 국가를 , 세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중심삼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체의 생존의식을 갖되 세계의 생존의식과 더불어 가질 줄 알고 천륜의 생존의식과 더불어 움직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찾아진 의식을 갖고 그것이 생존의 가치인양 살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역사는 그를 비웃을 것입니다. 이 시대도 비웃을 것이며 천륜도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넘어 세계의식이 있고 세계의식을 넘어 천적인 의식을 통하여 스며드는 슬픔과 고통의 고개를 넘어서 환희의 한 모습으로서, ‘하늘이시여! 저희를 대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부활의 모습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한 길을 갔던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의 길을 거쳤으나 우주적인 새로운 의식의 힘과 더불어 새로운 이념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의 감촉이 부딪히게 될 때, 예수는 사망권을 헤치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사적인 탈을 벗으려 하는 이 세계 앞에 새로운 대우주의 광명의 빛을 비춰 가지고 새로운 자아의식을 세우고 나오는 사람이라야만 끝날 재림부활시대에 하늘이 찾는 영광의 국민으로서, 영광의 아들 딸로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 역사적인 한을 거친 자요, 천적인 한을 풀어 드린 자요, 또 이 시대에서 하늘의 기쁨을 들고 나설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돌이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딸들을 핍박받게 하셔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서러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한을 품고, 그 아들이 못박혀 간 이후 2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당한 그런 한을 품으시고 그렇게 유도하신 목적은 어디 있느뇨.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수고하신 것도 우리를 위함이었고, 하늘이 한의 길을 걸어오신 것도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의 신세를 지고 하늘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하늘이 역사노정에서 느끼신 심정을 평면적으로 체휼하여 하늘 앞에, ‘슬픔과 고통을 다 벗고 나섰사오니, 아버지시여! 나를 보고 영광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으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슬픔의 왕자, 고통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 인류와 더불어 죽고 산다는 신념을 갖고 죽음의 고개를 현실에서 타파하고, 고통과 슬픔의 고개를 현실에서 타파하여 오늘날의 모든 역경을 헤치고 천적인 기쁨을 체휼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 대하여 ‘아버지여! 나를 보고 기뻐하시옵소서. 만민이여! 나를 보고 기뻐하소서. 만우주여! 나를 보고 기뻐하소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존재가 나와야만 하나님의 한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어서 보고 싶었던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맞고 싶었던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같이 살고 싶었던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될 때 하늘의 한, 역사노정의 한, 하늘의 슬픔, 역사노정의 슬픔, 하늘의 고통, 역사노정의 고통이 나로 말미암아 해결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존재가 되어야만 통일왕궁의 아들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6-257
기 도
아버지여! 한스러운 역사는 오늘날 저희 자체들을 휘감아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이 한스러운 생활환경에 처하여 이는 저희들에게 한스러운 역사를 수습하고 한에 사무친 하늘의 심정을 풀어드려야 할 어마어마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사명을 짊어진 저희들은 하늘 땅의 심정을 품고 슬픔을 체휼하고 고통을 느껴 천만번 죽더라도 아버지를 위안해 드릴 수 있는 자리에서 죽고자 하는 아들 딸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실 당시, 많은 교단들과 신자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메시아가 자기들이 소망하는 정도 이상의 모습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신 메시아는 기쁨의 메시아가 아니었고 인류의 총합적인 슬픔의 메시아요, 인류 역사의 고통이 부합된 고통의 메시아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천국 대표자로 오시는 메시아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는 보여진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사실을 끝날에 그대로 재현시켜 탕감복귀한다는 원칙을 배우고 있사오며, 에덴동산에서 슬퍼한 감정, 역사노정에서 슬퍼한 감정, 종적으로 흘러 나온 역사의 슬픈 감정을 저희 개체들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전개시키고 횡적으로 수습하는 횡적인 면의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 드려야 할 책임이 끝날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 저희가 세계를 위하여 충성하기를 원하옵니까. 만인류를 위하여 하늘의 복지를 건설하기를 원하옵니까. 그럴려면 하늘의 사무친 슬픔과 고통을 상속받는 주인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다 소화시키는 자라야만이 천적인 기쁨의 상속자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사오니, 오늘날 자신들의 마음의 기쁨을 찾아 헤매는 민족, 이는 패할 것이요, 이는 망할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기쁨을 찾아서 헤매고 싸우는 자는 승리의 실적을 갖지 못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슬픔이 있으나 고통이 있으나 참고 ‘전체의 생명을 위하여 내가 살겠습니다’ 하고 나선 사람이 역사적인 제물의 제단을 높인 자요,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또 그런 사람이 망하는 민족과 망하는 세계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끝날 교단을 바라보아도 한스럽고, 인류를 바라보아도 한스럽고, 하늘 땅을 바라 보아도 한스러운 이때에 오늘날 저희들이 누구를 믿겠사옵니까? 어떤 지도자를 따를 것도 아니요 어떤 교주를 모실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싸우고, 살지 않으면 안 될 최종적인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사온대, 아버지, 저희들 가운데 마음 전체가 자기도 알 수 없는 그늘에 휩싸인 자가 있사옵니까? 그 그늘을 타파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슬픔의 감정이 휩쓸어와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매는 사람은 오늘 죽을지라도 내일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도 알 수 없는 우주의 고통 가운데 휩쓸려 탄식과 죽음의 길을 헤매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있사옵니까? 이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생사가 경각에 달리게 된 결과가, 슬픔과 탄식과 고통이 생기게 된 결과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오니, 그것을 인간이 청산짓고 또 이 땅 위에 천국이념을 이루고 기쁨의 동산을 이루어 놓고 하늘을 찾아야 비로소 하늘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들려준 말씀이 당신의 아들 딸의 심중에서 잊어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 많은 생애를 청산하고, 한 많은 민족, 한 많은 세계, 한 많은 하늘을 바라보고, 이 한스러운 심정, 한의 역사를 밟고 올라서서 기쁨의 심정으로 승리의 모습을 갖추어서 ‘아버지, 슬퍼하지 마시옵소서. 당신이 고대하던 영광의 아들 딸들이 왔사오니 품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늠름한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땅 위에 기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 딸의 모습을 저희들의 노력과 희생으로라도 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천만번 제물이 되어서라도 그런 아들 딸들을 아버지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길을 닦는 , 터를 닦는 사람이라도 되게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