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5 to 6-231: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 딸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 딸
1959.05.17 (일), 한국 전본부교회

6-195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 딸
요한복음 14:1-24

[기 도(Ⅰ)]

사망의 물결이 뒤넘이치는 도탄 중에 있는 저희 인간들은, 이 땅 위에 긍휼의 한날을 펴시기 위하여 기나긴 세월 동안 수고하고 억울함을 당하시면서 싸움의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사옵고, 아버지께서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죄인들인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이제 애급고역과 같은 6천년의 역사를 해방시키옵소서.

영광의 한때와 한날을 약속하심을 감사하옵니다. 수많은 선지선열들로 하여금 먼저 피눈물의 길을 걷게 하시어 갈 길이 이렇다 하고 그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저희들은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사옵니다.

긍휼의 아버님이시여! 사랑의 아버님이시여! 자비의 손길로 이 땅을 붙드시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불충하고 불비한 모습들이오나 당신의 긍휼함을 흠모하고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 아버지 존전에 나왔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탄식과 슬픔이 남아 있는 이 땅에서 생을 갖고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현실의 생활에서 허덕이고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염려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 땅을 눈물과 슬픔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또 하늘을 위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을 저희들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원컨대 그와 같은 심정에 사무쳐 가나안 복지를 소망하는 애급고역 노정과 같은 6천년 시련 역사의 탄식권을, 아버님,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인간을 바라고 믿고 따라 나왔사옵니다. 가는 길이 고역의 노정이었사옵고, 가는 발걸음이 슬픔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고 있사오나, 원한의 타락행위를 저지른 인간인 고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사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는 인간은 하늘의 약속을 알고 난 그날부터 이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허덕이지만, 오늘날까지 사탄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그 중에 누구보다도 저희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살기 위하여 오로지 살아 계신 아버지를 불러야 할 때가 되었사옵고, 섭리의 뜻을 세우신 아버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아들 딸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사오니, 불비한 자신을 원망하고 미비한 자체를 탄식하고 불충한 자신을 치면서 오늘도 내일도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허덕이겠다는 간곡한 심정이나마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나선 걸음이었사옵고 싸움의 방패를 들었사오니, 그날 그날의 싸움에 하늘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한날을 예고하시옵소서.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고난의 그 노정을 거쳐나갈 수 없고 황무지인 광야의 노정을 개척할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바로 궁중을 탈출할 때에는 기쁨의 환호성이 하늘에 충천하였사오나 그 뒤에 바로의 병거가 따르게 될 때에는 탄식하고 하늘을 원망하였던 선조들의 발걸음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나설 때 기쁨의 심정이 있사옵니까? 그 심정에 반하여 하늘을 원망하는 심정이 커질까봐 두렵사옵니다. 환희하였던 그 한날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만민이 즐거이 하늘을 노래할 수 있는 끝날의 한날을 소망삼아야 되겠사옵니다.

어떠한 곡절과 어떠한 슬픔이 부딪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원수들이 죄악의 구렁텅이를 파놓고 기다릴지라도 꾸준히 싸워 하늘의 정병다운 절개를 상실치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가는 길에는 산고개도 있을 것이요, 자갈밭도 있을 것이요, 황무지도 있을 것이요, 원수들이 저희들을 노리는 때도 있을 것이오니, 이미 각오한 결심으로 모든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오늘도 내일도 싸움의 일로를 개척하고 약속한 가나안땅을 해방할 때까지 그 마음 마음에 책임을 느끼게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용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아버지 앞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이날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이 아버지 앞에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새로운 결심과 각오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약속한 한 때를 위하여 마음으로 몸으로 준비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아버지시여!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여! 이 한 시간을 성별시키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합당치 못한 저희의 마음과 자아를 중심삼은 어떠한 주의 주장이나 관념, 또한 뜻 앞에 옳지 못한 것이 있거든 일체를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이 시간 아버님이 운행하고, 아버님이 주관하고, 아버님이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간곡한 심정만이 사무쳐서 아버지 심정과 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고, 삼위신이 운행하시어 모든 악의 요소를 분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승리의 조건만을 제시하여 아버님의 영광권내에 사로잡힐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지방에 널려 외로이 뜻을 위해 싸우며 염려하고 있는 수많은 아들 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들에게 허락하신 은사를 베풀어주시옵고 생명의 은사를 이 한 청중 위에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봉화를 들게 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고, 만민이 회생할 수 있는 은사의 불길을 내려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맡기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6-198
기 도(Ⅱ)
한없는 슬픔이 하늘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이 땅에 사는 인류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한없이 고통스러운 것이 하늘의 역사라는 사실을 저희들은 하늘을 믿고 나오면서도 몰랐사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셨사옵고, 지금까지 인간들이 찾아 헤매고 헤매었으나, 찾지 못했던 그 소망의 한 때를 저희들에게 예고해 주시니, 아버님, 황공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감히 천주 앞에 마음 몸을 굽히고 아버님을 대해 부르짖기에는 민망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는 길을 나선 저희들, 그 길이 기쁨의 길인 줄 알았사온데, 가다보니 한없이 눈물 뿌리며 가야 될 길임을 알게 되었사옵고, 남 모르는 가운데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원한의 심정을 품지 않으면 안 될 서글프고 외롭고 걱정스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그 길은 살고자 하는 자는 가지 못할 길이요, 죽고자 하는 자만이 남아지는 길임을 체휼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이 외로운 아들 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마음에 천적인 이념이 움직이고 있사옵니까? 그 이념을 자기를 중심삼은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이념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념을 통하여 움직이는 심정이 있사옵니까? 그 심정은 자기 일대에 머무는 심정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받은 바의 은사와 느낄 바의 은사를 이들이 체휼하였을진대, 이제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 혼자서만 하늘나라를 이루어 살 것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은 당신이었사오니 자기의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바쳐드릴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는 그 길을 나설 때에 저희들은 모든 것을 이미 아버지 앞에 다 드렸사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저희의 심정까지도 아버지 것으로 드렸사옵니다.

전체를 드리고도 즐거워 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아버지는 그리워하고 있사온데, 없어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저희가 되어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전부를 내맡기고도 무한히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마음을 소유한 자는 아버지의 전체를 소유할 자요, 이렇듯 하늘 대한 간곡한 심정을 품고 가는 자는 하늘 땅에서 승리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생활 환경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것은 아버지께서 즐거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전체를 저희에게 인계시키기 위한 섭리의 뜻이 있었음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곡절의 뜻을 가지고 저희를 찾지 않으면 안 되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고, 오라하지 않으면 안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옵니다. 아직까지 지기를 중심삼은 의식이나 감촉이 남아 있사올진대, 지금 그것을 다 아버지 앞에 내놓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만상을 바라보고, 아버지 앞에 무한히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만을 저희의 몸 마음에 채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슬퍼하심을 바라보고 슬픈 자신이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수고하심을 바라보고 저희들도 수고하는 자신이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늘의 싸움의 노정을 바라보고 저희들도 그와 같은 자리에 있음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한 존재들을 아버지 품에 품어 주시옵고 세워 주시옵기를 ,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나에서부터 전체가 아버지 것으로서 인연 맺을 수 있는 시간이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외로운 발자취를 더듬어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일주일 동안에 입은 모든 상처를 아버지, 맡으시옵고, 위로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은사의 손길을 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고, 이 땅과 인연맺고자 하는 천상의 시간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과 선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이 땅 위의 인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더우기 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이는 곳곳마다 선의 역사로 협조하여 주시옵고, 거기에 당신의 능의 역사를 가하시어 사망이 물결치는 이 땅위에 승리의 한 표적을 세워 아버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님께서 이 시간 나타나시어 영광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고, 직접적인 역사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200
기 도(Ⅲ)
바라고 기다리던 소망의 한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 불신하는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수많은 외로운 무리들을 품으시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해놓고 역사를 끌고 오다가, 약속하였던 한 존재를 보내시던 그 날은 아버지의 영광이 하늘에 사무쳤어야 했고, 만민의 환희의 심정으로 말미암아 천성에도 기쁨이, 땅에도 기쁨이 충만해야 할 것이었사온데, 4천년의 설움이 예수님 한 분을 대해 가해졌다는 역사적인 통분의 사실을, 아버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마굿간에서 탄생하여 사신 30여년 생애는 그렇게도 처참하였고, 그렇게도 외로웠고, 그렇게도 의지할 곳 없었사옵니다. 땅 위에 그렇게도 믿을 자 없었던 예수님, 땅 위에서 자신의 흉금을 털어 놓고 그 간곡한 심정을 전하지 못한채 원한의 주인공으로 가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권고하여야 할 천적인 말씀이 남아 있었사오나 받아야 할 인간이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품고 가신 서러움, 2천년 전 예수님의 서러움을 모르고 있는 만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래도 하늘을 따르던 제자들을 모아 놓고 권고하시고 부탁하신 말씀과 기도를 저희들은 들었사옵니다. 땅의 인연과 하늘의 인연이 상봉하는 그 순간 하늘의 기쁨이 나타나야 했고 나아가 땅 위에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어야 할 것이었는 데, 부딪치는 그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탄식과 서러움이 시작되고 원한의 십자가의 길이 생긴 역사적인 통분의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선조들은 하늘 앞에 빚을 졌고 저희들도 하늘 앞에 우주적으로 빚을 지고 있사온데, 그것을 탕감할 줄 모르고 자기의 안일을 위해 허덕이는 무리가 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외로운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권고할 말씀이 있사옵거든 권고해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많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전하고 보니 아버지의 슬픔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알려주고 보니 우리가 아버지의 염려를 가지고 통일되지 못하였음을 알았사옵니다. 인간을 대하는 아버지의 서러움이 그와 같은 노정 노정마다 나타났사옵고, 세기 세기, 시대 시대마다 나타났음을 알았나이다.

아버지, 비통한 심정을 체휼하여 땅을 염려하고 하늘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있사옵니까? 아버지, 심히 희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불쌍한 만민을 구하시기 위해 수많은 수고를 개의치 않으시고 외로운 저희들을 권고하시기에 시일을 경과해 오신 아버지, 저희들 앞에 새로운 약속을 세우시옵소서. 이들에게 새로운 약속과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기시려는 천적인 뜻이 있다 할진대,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민족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한반도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이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요 의지할 곳 없는 민족이옵니다. 자랑할 전통도, 자랑할 아무것도 없사옵고, 하늘 앞에 내세울만한 민족성도 갖지 못한 민족이옵니다. 이 민족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사오니, 불쌍한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은 외로운 민족이오니 이들의 살 길을 열어 주시옵고 이들의 갈 길을 염려하여 주시옵고, 이들이 서 있는 위치를 돌아보시어 동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땅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민족이오니 하늘의 심정을 통하는 것으로써 이 민족의 살 길을 개척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대하여 땅을 대하여 이 민족의 비참함을 호소하는 무리가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갈 길이 막혔다 하여 쓰러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시고, 갈 길이 막힌 그 사실을 놓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며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핍박받는 통일교회의 길을 찾아든 당신의 아들 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러한 길을 가기 원치 않았사오나 이 길에 들어서 남모르는 일을 알고 남과 다른 책임을 지고 보니,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외로운 길로 인도하신 아버지의 심정과 뜻을 세워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오니, 외로운 저의 뒤를 따르고 있는 자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애달픈 심정으로 호소하는 자가 있다면 그 뒤를 따르는 자도 그와 같은 처지임을 알았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동정하여 주시옵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들은 인간의 일을 통하여 움직이지 않았사옵고, 인간의 사정에 얼크러져 움직이지 않았사옵니다. 천정의 사랑을 통하여 출발하는 걸음이어늘 인간으로 말미암아 그 발걸음을 잃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그 가는 과정에서 낙망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노정을 회고해 볼 때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여 나온 사람들은 그 시대에 몰림받는 무리였사옵고, 몰리고 몰리다 남아진 무리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움직임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늘의 뜻을 품고 당신을 위한 충절의 마음을 가진 아들 딸들, 억천만 가지 고통이 휩쓸어 올지라도, 아버지께서 원하는 뜻일진대 이 일을 위하여 죽고 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실적을 남기고 쓰러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남기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끝까지 싸우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4월 10일(음력)이옵니다. 아버지시여,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인류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셨을진대 거두지 마시옵고, 진리의 사도들을 이 천지간에 보내주시옵고, 사랑의 사도들은 온 땅 위에 보내 주시옵소서. 신의를 세워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신의의 사도들을 보내 주시옵소서.

찾고, 고대하고, 바라고, 싸워 나오시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에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지시여,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고 하나가 되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시간에는 아버지 뜻과 아버지 심정과 아버지 사정에 나도 모르게 얼크러져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맹세와 각오를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6-203
말 씀
여러분에게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 딸’입니다.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 딸’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6-203
인간이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
인간 시조가 실락원의 슬픔을 체휼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에게는 마음의 슬픔이 있고, 몸의 슬픔이 있고, 생활의 슬픔이 있게 되었고, 그 슬픔은 전세계와 하늘까지 연하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한 목적을 추구해야 할 우리 인간들이 두 목적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함으로 말미암아 한분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대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 외에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 인간은 두 목적의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생활을 통하여 체휼하는 바이고, 그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인간은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이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였는 데, 타락한 그 날부터는 두 주인을 대하고 두 목적의 이념을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악은 내 한 개체의 환경권만이 아니고 전세계에까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에까지 이런 인연이 미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적 세계를 향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 양심이 어떤 방향성을 지향하여 나를 재촉하고 있는 것을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인간들은 현실적인 사회의 모순을 대하게 될 때, 세계의 복잡한 실정을 초월한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마음으로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나로 하여금 그러한 심정을 느끼게 하고 나 자신도 모르게 어떤 감촉을 통하여 내 마음을 그런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동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목적과 이념을 지닌 하나의 주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은 하나의 이념을 지니고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인간과 하나의 세계를 재창건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생활환경을 간섭하며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건해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문화세계를 창건해 가면서 그 문화를 통할 수 있는 마음세계의 이념까지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편안한 나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이 실락원의 한을 품은 그날부터 그 슬픔의 감정은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은 역사적으로 실증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심정을 통하여 생활적으로 체휼되는 그 사실을 무엇으로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놓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뜻을 품은 어떤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이 한되고 슬픈 곡절의 인연을 풀기 위하여 하늘 땅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호소하며 허덕이는 입장을 모면할래야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의 그러한 모습이 되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과 이념을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시대를 만들기 위하여, 이러한 뜻을 세우기 위하여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선을 지향하고 선의 이념을 찾아나가는 섭리를 우리 선조들을 붙들고 해나오시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심정이 선을 지향하도록 어떠한 충격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할진대, 그 순간은 숭고한 순간입니다. 숭고한 순간이예요. 이는 역대 우리 선조들이 여러분을 세워 온 인류가 바라는 선한 목적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이 자신을 세워주고자 하는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6-205
인간의 심정이 선을 지향하도록 충격을 느끼는 순간은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이념, 참다운 중심의 뜻을 향하는 양심의 움직임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습하여 자기 마음의 중심으로, 몸의 중심으로, 생활의 중심으로, 이념의 중심으로 혹은 목적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 허덕였는 가 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간이 그 자체를 비판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는 세계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창조주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심정을 가지고 허덕였다 할진대, 우리 인간의 심중에 맺혀진 한의 고개는 벌써 역사노정의 어느 한때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늘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늘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늘은 이러한 일을 어느 한 때에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모임, 어느 한 국가에게 예고시키고 섭리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러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흔적을 찾아서 추구해 볼 때, 그 한의 역사를 청산하는 일은 어떠한 논리적인 방편이나 이론적인 형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세계를 찾아들어가 선의 이념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서는 영적인 세계, 즉 초자연적인 차원의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지고 인간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종교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우리가 느껴야 될 것은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념, 하나의 중심이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종말시대까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관된 사상으로 흘러가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선악의 기준, 다시 말해 선한 민족, 선한 사람, 선한 일을 무엇을 기준하여 판단하겠습니까? 시작과 종말이 동일한 것은 하늘이요 선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합니다. 참다운 선, 참다운 하늘이라 할진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목적, 그 이념, 그 방향이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하나의 이념을 세웠으며 역사의 변천이 있을지언정 그 이념은 변치 않고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6-206
하나님의 실존체가 나타나게 되면
인간의 슬픔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슬픔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졌다 할진대, 이 슬픔을 해원할 수 있는 한날을 예고하는 어떠한 뜻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있어야 함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고 이 일을 책임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던 분이 종교적으로 보면 도(道)의 책임을 진 자인 것입니다.

전세계적인 어떠한 도의 사명, 구세주의 사명을 가지고 오는 것을 두고서 기독교적으로 예수의 강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존재가 천상의 슬픔과 지상의 슬픔을 해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난다면 절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체가 나타나는 데 있어서는 역사의 과정을 부정할 수 없고 시대상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슬픈 과정을 거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주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이념의 주체요, 목적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로 이 땅 위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실존한다는 것은 인연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존의 토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역사적으로 인연된 그 슬픈 심정을 체휼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대표해서 그런 심정을 체휼하는 반면 하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슬픈 심정까지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륜적으로 보는 관과 종교적으로 보는 관은 다릅니다. 인간들이 볼 때에는 자기를 부정하고 전체를 대신하여 대중의 고통을 지고자 하는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 하여 추앙하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슬픔을 대신하는 동시에 천륜의 슬픔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으로 저끄러지고 엉크러진 그 원한의 곡절을 품어야 할 인간들이 반드시 갖추지 않으면 안될 천적인 요구요 전인류의 요구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러한 원한을 해원하고 타락으로 저끄러진 곡절을 타파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 할진대, 그는 4천년 인류 역사노정에서의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하나님이 슬픈 심정을 느끼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천년 역사노정에 나타났던 어떠한 주의보다도 하나님의 심정 깊숙이 사무쳐 있는 슬픔의 감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땅 위의 인간 중에 하늘의 슬픔 심정을 체휼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눈물없이 땅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까지 슬픔에 사무쳐 탄식하고 통곡하는 경지에 부딪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이었던가. 첫째는 하늘 때문이요, 하늘이 인간을 위하여 그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그 다음엔 인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슬픔을 품고 인간을 붙들고 울어야 했던 예수님이요, 인간의 슬픈 사정을 붙들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며 울어야 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일소했다는 한 시간, 즉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슬픔을 해소시킬 수 있는 한 시간이 찾아오지 않는 한, 인류의 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고 천적인 하나의 이념도 이 땅 위에서 결실의 한 때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곡절에 처해 있는 여러분, 이런 곡절에 사무쳐 허덕이고 있는 오늘날 인류가 이제 새로운 각성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울려오는 경종의 소리에 우리들은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때는 역사상에 두려운 때가 많았다 할지라도 이 이상 두려운 때가 없었고, 슬픈 때가 있었다 할지라도, 이 이상 슬픈 때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모가 자식을 모르고 자식이 부모를 모르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정적인 인연을 자기 마음대로 포기하고 파탄시켜 버리는 그들이 어디에 가서 자신의 슬픔을 위안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 이상의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6-208
오늘의 인류가 처한 상황과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과 태도
슬픔이 내 마음에 사무쳐 있는 데 또 한편으로 공포의 세계가 나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내 한 자체에게 있어서 안정된 심정의 동산은 어디일 것이며 안식과 자유의 한 동산은 어디일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인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절박하고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권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임을 재인식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른손을 들고는 ‘하늘이시여, 저희의 손을 붙들어 주시옵소서’라고 힘을 다하여 외치고, 왼손을 들어 ‘인류여, 나와 더불어 전진합시다’ 하고 외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충격을 마음으로 느낄래야 느낄 수 없고 그런 자극을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이 땅 위에서 어찌할 것인가?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들끼리 찾아보고, 싸우고, 별의별 놀음을 다 해봤지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결과는 절망과 사망과 멸망밖에 없었어요. 우리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인류는 역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어느 한 분야에서 하늘과 인연을 맺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늘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날이 개인에서 싹트면 개인이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날을 찾아 헤매는 민족, 국가, 세계에는 이 새로운 인연의 세계를 찾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이념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늘이 있어 이러한 세계상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심적인 세계에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공포의 자극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시대가 촉박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더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 그 방향을 그대로 취하여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다가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생사에 위협을 느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길은 본연의 심정을 가진 인간의 갈 길이 아닌 것을 재인식하고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보는 여유의 심정이라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땅 위에나 하늘 앞에 충성을 한 그 이상 충성하고, 고난 받은 이상 고난을 받고, 어떠한 정열을 기울인 이상의 정열을 기울여야 합니다.

6-209
본연의 나
어떠한 선의 주체, 어떤 선의 목적체, 이념의 세계가 그 마음에 사무쳐 가지고 여러분이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고 아니 허덕일래야 아니 허덕일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되었다 할진대 여러분은 어떠한 목적 세계를 찾아갈 수 있는 동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가진 어떠한 합리적인 논리를 통하여 세워진 주관이나 인식을 통하여, 자기 나름대로 세워 놓은 관념을 가지고 자기의 전생애를 내맡기고 생활하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그 배운 지식이 자기를 자승자박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밑창을 들추어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감정의 흐름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체요 실존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모습은 우주적인 모습이요, 우주적인 증거물이요, 역사적인 증거물이요, 이념의 증거물이요, 한분의 주체에 대한 대상적인 존재가 되고 있음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제 하늘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주체이신 하늘이 대상인 내 개체를 100퍼센트 신임해 주는 그 한날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 목적에 대해 100퍼센트 신념을 가지고 그 한 곳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100퍼센트의 신념을 가지고 돌진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갖추어야겠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후의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의 환경을 넘어가야 할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이것을 해결하는 어떠한 조건을 세워 나왔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역사노정에서 어떻게 섭리해 오셨던가. 인간 시조가 타락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더 들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앙의 3대 요소,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한 것입니다.

6-210
신앙자들의 소망의 표준
우리들의 최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은 천적인 인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해원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인 조건, 섭리적인 조건, 미래적인 조건이 있다 할진대, 그 조건들은 무엇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고 있는 가?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모시지 못하였던 연고로, 믿음의 운동을 제시했고 사랑의 운동을 제시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믿음의 터전을 닦기 위해 허덕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는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싸우셨으나 그 뜻을 다 이루시지 못하고 신랑 신부의 이념만 세워 놓고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류를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주인공을 맞이한 그날 이후부터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생활 속에서 그 분을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곳이 지상천국입니다. 그와 같이 무한히 모시며 사는 세계, 그러한 천국 세계에서 사는 자는 신앙자들의 소망이요 표준입니다. 역사의 섭리노정도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슬픔에 사무친 인간을 찾으시려면 역설적인 요소와 역리적인 조건을 통해 순리적이요 법도적인 조건을 찾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의 곡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슬픔도 크지만 하늘의 사무친 슬픔이 더 큰 것인데, 인간은 그런 하늘의 슬픔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한 인간 앞에 법도를 세워 순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찾아 오셔야 하는 하늘의 슬픔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는 신의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믿음의 한 기준을 조성하고 또 그 기준을 높여 나왔고, 선의 실적을 쌓아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한 중심으로 이땅에 오셨으나 오신 목적을 다 수행하지 못하고 가신 연고로, 앞으로의 신의(信義)의 시대에서 시의(侍義)의 시대로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슬픈 환경 가운데 놓여 있는 내 한 개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6-211
인간이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 있는 조건 – 믿음과 실천
역사적으로는 무엇을 통하여 하늘이 인간을 찾아 주셨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찾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믿음의 조건을 세우게 하시는 한편 인간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하셨느냐? 실천을 요구했습니다. 하늘과 내가 인연되어 슬픔의 감정을 제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서는 믿음을 중심삼고 하나의 실천적인 행로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인연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나 개인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고 하늘이 가는 방향을 따라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우리 개인을 몰아 세계와 천주를 위한 방향으로 그 방향성을 갖추어 나가기 때문에 선의 방향성이라는 것은 나를 중심하지 않습니다. 선의 표준은 나를 중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대상이 되어 있고 하늘이 대상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늘은 믿음과 실천을 강조하면서 인류를 대해 섭리해 왔습니다.

오늘날까지 믿음과 실천을 강조하여 나온 역사가 6천년, 이 6천년의 역사를 검토해 보면 말할 수 없이 슬픈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은 인류의 슬픔보다도 인류를 붙들고 나오는 하늘의 슬픔이 더 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천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아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하늘을 추방해 나왔고 선지선열들을 죽였던 역사적인 선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인간이 무한히 믿고 실천하면서 당신을 찾아주기를 바라고 계셨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심정이 없고,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고 실행할 수 있는 발판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믿음의 발판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늘의 슬픔을 동반할 수 있는 감정을 통할 믿음, 감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실천해야만 하늘의 믿음과 인간의 믿음이 맞부딪쳐 인간의 모든 슬픔을 해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런 경지에 서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새로운 이념을 향하여 나아가고 새로운 뜻을 지향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의 믿음을 자신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 자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인연을 거부할 수 있는 내 생명체를 갖지 못했다 할진대, 역사적인 인연의 환경을 개척해야 할 실천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설혹 믿고 있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천정의 슬픔을 체휼하여 하나님의 믿음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실천에 사로잡히고자 하는 감정이 앞서지 않는 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찾아 이루시고자 하는 천국과 하등의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등의 관계가 없을 것이에요.

인간 끼리끼리의 신의도 슬픈 면과 기쁨 면이 상대적 관계를 맺어야만 그것이 오래 유지될 수 있고 그 신의를 기반으로 해서 약속된 일들을 오래도록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대하는 신앙노정에 있어서나 실천노정에 있어서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쁜 면과 슬픈 면을 느끼면서 믿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쁨의 자아가 되려면 슬픔의 자아를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주인공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만민을 대신하여 믿음의 중심이 되는 심정을 가지고 참된 신앙자의 모습을 갖추어 하늘 앞에 나타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예수가 만민을 대신하여 당신과 믿음의 인연을 맺고 그 예수가 만민과도 인연맺기를 바라셨으나, 바라신대로 다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하늘은 인연을 맺었으나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는 소원하시던 바의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지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성도들은 믿음을 세워 실천한다고 하였지만 믿음과 실천이 자신에게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날을 맞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213
참된 믿음과 실천
천국이란, 참된 믿음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참된 실천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이 그런 참된 믿음과 실천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정에서 하늘이 당하는 고초와 슬픈 감정을 체휼함에 있어서 그 감정의 한계를 분석하고 동감하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할진대, 그는 아직까지 천국이념의 세계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없는 입장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옮기시는 발자취는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한마디 말씀이 서면 하늘이 서는 것이요, 그 말씀을 실행하면 하늘의 뜻이 실행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기준을 맞추어 살아가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염려하는 마음이 컸고, 하늘을 염려하는 마음이 컸고, 하늘 땅의 슬픔을 체휼하는 감정이 컸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기쁨에 넘쳐 춤을 추며 말씀한 귀절은 없습니다. 왜? 하나님도 아직까지 기쁨의 동산에서 자녀인 인간에게 말씀하지 못한 고로 예수님께서는 심중에 기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늘 땅을 넘을 수 있는 기쁜 감정으로 자유로이 말씀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쁨의 감정을 가지고 소개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했는 데 말씀하신 그 자체는 슬픔의 감정을 통하여 하신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제 그런 감정에 사무쳐서 말씀의 존엄성을 깨달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역사성을 초월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현실의 생의 이념권내에서 인연맺을 수 있는 말씀이 못된다 할진대 그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 아닙니다.

6-214
신앙자의 본질과 하나님의 소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진리의 길을 찾아 신앙노정을 부활시키려 하는 갈급한 심정이 있다 할진대는 , 예수님께서 슬픈 감정으로 말씀하시던 신앙관념의 최후의 한계선은 어디인가를 알고 그 한계선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천주의 슬픔을 해원해야 되고 인류의 슬픔을 해원해야 될 중간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픈 심정이었습니다. 인류의 슬픔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의 심정을 느꼈고, 나아가 하나님의 천만 가지의 슬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의 슬픈 감정을 통하여 나타난 말씀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기준이 서야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혔던 인연이 다시 맺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신앙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웃음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에 대해 한가지를 알고 보면 가슴이 막히고, 두 가지를 알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통곡이 나오고, 알고 알고 또 알고 보면 자기 스스로가 제물되어야 할 입장임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에서의 신앙, 그런 감정에서의 실천을 하게 되면 죽은 인간을 살릴 수가 있게 됩니다.

하늘 앞에 제아무리 훌륭한 공적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 공적의 결과는 자기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로 말미암아 된 것이에요.

그러면 섭리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 가? 인간의 마음이 하늘의 슬픔과 통하는 그 순간에 새로운 섭리역사는 개척되어 쌓여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믿음과 실천의 노정을 걸을 것을 촉구하시면서 6천년의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온 인류를 대해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간곡히 바라셨습니다. 온 인류 앞에 하나님 자신을 100퍼센트 세워 드릴 수 있는 실체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늘은 한없이 믿고 행하고도 그 사실을 잊어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하늘의 표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이 쓸데없고 실천하라는 말이 필요없는 그런 존재를 찾으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 주신 말씀을 세울 수 있고 실천의 명사를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를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하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그 한계성을 넘어서 실천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6-215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
오늘날 기독교의 수많은 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심정의 한계성을 넘어 실천노정을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천적인 자녀가 어디 있는 가? 천적인 자녀가 어디 있는 가?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믿음의 명사를 꿈에라도 바라고 세울 수 있어야 되겠고, 어떠한 한 사실을 놓고도 시대성과 역사성을 초월하여 영원에서 영원까지 자유자재로 내것으로 여기어 즐길 수 있고 내것으로 응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해 믿음의 바탕이 되는 길을 세웠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신의(信義)의 법도를 잊어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 실천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실행의 가치보다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경지에서 하늘의 뜻에 사무치게 될 때 하늘은 비로소 ‘내 아들아, 내 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아들과 딸을 찾지 못한 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이 땅 위의 인류의 슬픔입니다. 이 인류를 아들 딸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절대자를 놓고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말은 가지고 있으되 하나님을 이렇다 하고 소개할 때 진정으로 감정이 통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감정을 떠난 말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통하고 감정으로 접할 수 있는 신(神)은 어디에 있을 것인고? 여러분이 신앙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절실한 심정을 가지고 이런 문제에 부딪쳐서 믿음이란 명사와 실천이란 명사를 넘어서서, 아버지에게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세포와 자기 심정이 동하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필시 그런 외침이 생리적인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한 존재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가 울어야 할 일이 있다 할진대는 인류 전체가 책임하지 못한 것을 놓고 서러워 하며 울어야 할 것입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을 슬프게 하였던 역적이요 배반자인 우리 선조들을 대해 서러워 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 내 한 자체를 놓고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들이 어떠한 한계권내에 헤매 나오지 않았는 가를 생각도 해 보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다면, 그러한 우리를 대해 하늘은 ‘옳구나’ 하겠습니까 ‘슬프구나’ 하겠습니까? 그 심정은 4천년을 지나 6천년 역사의 인연을 가한 슬픔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대해 탄식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모심의 생활을 잃어버린 심정에 흐르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뭣인지 모르는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슬픈 감정이 싹트고, 어떠한 의식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생활적인 분야에 있어서, 주위 환경에서 슬픔이 찾아오는 시간이 있을진대 하늘이 찾아오는 시간인 줄 아십시오. 그러한 시간에 그 슬픔의 실체를 붙들고 눈물로 인연을 맺는 이가 있다면 그는 소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맺어야 할 인간이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늘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대할 수 없기 때문에 평면적인 주인공으로 이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실체 주님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4천년 슬픈 역사노정에서 몰리고 쫓기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늘의 슬픈감정을 품으신 예수님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었던들 그 민족은 오늘날 세계 앞에 이름을 드날리는 민족이 됐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민족을 잃어버리고 주권을 잃어버리고 국토를 잃어버리고 유리하는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에요. 그렇지 않았겠어요?

6-217
기쁨보다 슬픔이 더 컸던 예수님의 생애
통일교회는 본래 험한 길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바라볼 때 환영하는 마음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영하기 보다는 주저하는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내용과 하늘의 실정, 즉 우리 인간을 대하여 찾고 계신 하늘의 사정이 이렇게 간곡하였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찾아 세울 수 없고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의식과 자기 주관으로는 비판할 수 없는 경지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는 어떠한 존재로 되어 있다면, 그런 경지의 슬픔을 느끼는 반면 주체적인 입장에서 하늘을 안심시키고 위로할 수 있는 한 부분을 맡아서 연결짓는 그 자리에서만 이 길을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이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길 가기 원하는 사람은 이 길로 오지 마십시오. 내가 걷고 보니 그 걸음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걸음이요, 동지가 없는 걸음이요, 사정을 통할 수 없는 걸음이요, 의지할 수 없는 걸음이요, 믿을 수 없는 걸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걷고 보니 그런 곡절을 지니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오늘날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먼저 슬픈 면의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밥먹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슬픈 가슴을 붙안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몰리며 쫓겨 다니시던 예수님, 그 시대의 어느 누가 그의 심정을 알고 친구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늘은 서러운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고자 했던 선지자도 서러운 제물이었는 데 예수님마저 죽게 되니, 뜻을 품고 계셨던 하늘, 그 하늘은 서러운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이 누구인가? 알고 보니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알고 보니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우리 인류는 아버지의 서러움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 서러운 심정을 알려줘야 할 책임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왔고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6-218
예수님은 슬픔의 왕자
하늘은 지금까지 고대해 왔고 요구하고 나왔습니다. 예수가 가던 슬픈 신앙의 노정, 예수가 싸우던 슬픈 신앙의 싸움, 그 싸움은 오늘날 자녀의 명분을 갖고자 하는 자는 대신 싸워서 승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아직까지 땅 위에서 기쁨의 한날을 갖지 못하였고 영광의 한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놓고 슬픈 감정에 동하여 하늘을 부르게 될 때는 나도 모르게 하늘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알건대는 예수님은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몇 군데밖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입니다. 산천을 바라보고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요, 널려져 있는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요, 무한한 하늘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었습니다. 책임을 지워놓고 실천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 것을 바라보시면 더욱 슬픈 심정을 가지셨고, 그 위에 또 하늘을 위로해야 할 입장에서 위로해 드리지 못한 슬픔, 인간을 구원하여야 할 구주의 책임을 감당치 못해서 가해지는 슬픔 등 그는 진정 슬픔의 왕자이셨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만왕의 왕자, 영광의 왕자, 승리의 왕자이기보다도 슬픔의 왕자이십니다. 뜻을 위한 슬픔의 왕자이심을 우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의 이단자로 낙인을 찍힐는 지 모르지만 알고 보니 그렇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민 앞에, 역사 앞에 처음으로 나타난, 하늘의 슬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왕자이셨구나!’ 하며 감격에 북받칠 수 있는 순간을 가져야만 여러분이 그 분과 인연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고통의 왕자이셨습니다.

6-219
예수님의 깊은 심정과 사정
하늘 배반하기를 일삼고 하늘 대하여 저주하는 데에 선봉에 섰던 자들은 누구였던고? 그들은 믿고 따르라고 세운 유대교인이요, 이스라엘민족이었습니다. 하늘은 예수를 잡아 죽이라고 4천년 동안 준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웠을 리는 만무합니다.

이걸 볼 때 예수님은 온전히 승리하고 가신 분이 아닙니다. 완전한 승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도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완전히 승리한 것이라면 수난의 한날이 그 이상 기쁠 수가 없을 것이며,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그 순간이 최후의 승리의 순간이요 만민 만상을 동원하여 기뻐할 수 있는 순간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기쁨의 순간이 못되었던 것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환희의 심정으로 맞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오지 말라고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와 더불어 기쁨에 사무쳐 하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걸 못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슬픔을 품은 예수요, 애통해했던 죽음이요, 슬픔을 품고 이루어진 부활이 되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슬픈 심정을 체휼하면서 자기의 몸 둘 곳을 모르고, 자기의 생활의 방편도 잊어버리고, 문전 문전마다에서 눈총을 받으며 이 마을 저 마을로 허덕이면서 쫓겨다니던 그 초췌하신 예수님의 동지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 앞에 몰렸고, 교단 앞에 몰렸고, 친척 앞에 몰렸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몰렸습니다. 이와 같이 슬픔중의 슬픔을 느끼신 예수님이었지만 하늘의 심정을 품고 세계 인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다는 마음을 가졌고, 또한 인류를 믿어 주려는 마음을 지니셨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픈 감정으로 통할 수 있는 인류를 대한 인연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심중에 품었던 그 간곡한 소원, 간곡한 마음, 간곡한 사정을 인류 앞에 다 알려주고 가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끝날에 있는 성도들은 말씀을 붙들었다는 그것만으로 자기가 하늘의 왕자 앞에 설 수 있는 약속의 신부라고 자처하고 나서지 마십시오.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시여! 저희가 말씀이 두렵고 저희의 행함이 부족하옵니다’ 하는 황공한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라 부르기에 눈물이 앞서고, 아버지라 생각하기에 가슴이 막혀 애타는 심정이 동해야 합니다. 자기는 천만 번 제물될지언정 역사를 이끌어 오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자기를 세워 무엇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해 가고 가도 부족하고, 가고 가도 황공하고, 가고 가도 민망한 심정에 사무쳐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자라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또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 11:23)”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동하여 말씀을 파헤쳐 볼 때 그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말씀으로서 뼈 살에 사무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새로운 이념, 새로운 각오, 새로운 결심을 갖고 새로운 목적의 시대를 지향해야 되겠고, 그러한 충격을 지닌 모습으로 주위 환경을 개척할 수 있는 신의(信義)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본질세계를 통한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신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를 찾아준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한편 무엇을 말씀하셨는 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의의 하나님 등등 하나님의 여러 면을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면을 대표할 수 있는 결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다’하는 정의를 세워서 우리를 지도하셨습니다. 즉, 참된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6-221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의 뜻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너를 믿어주고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이요, 또 하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계에 책임자들이 있다 할진대, 허덕이는 양떼를 보고 자기의 뼈 살에 사무쳐 그들의 생명을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이 없으면 천법에 걸리는 교역자가 될 것입니다. 천법에 걸려요. 그렇지 못한 목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죽은 목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말보다 먼저 심정이 앞서는 것이 특징입니다. 심정에 사무쳐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말씀 앞에 사탄은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그런데에서부터 굴복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악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사무친 심정이 발로되어서 인간의 생명이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을 분하게 여겨 가지고, 그것을 자기 일신의 고통으로 느낄뿐만 아니라 자기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몸을 던져, 그들을 구해 주기 위해 붙들고 싶은 사무친 심정이 앞서야 거기에서부터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실 때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십자가 상에서도 하늘을 떠나 원수 앞으로 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아픈 심정보다도 그들을 대한 불쌍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원수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가로막을 수 없었고, 손을 들어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앞에서만 사탄이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위해 살고자 하고 하늘 앞에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먹고 있는 그 자체가 남보다 더 나을 때는 가책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입고 있는 것, 사는 것, 보는 것 자체를 놓고 가책의 마음을 앞세우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굶는 법이 없고 쫓기는 법이 없고 몰리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 사탄세계에서는 몰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늘의 심정을 찾아가는 무리들 앞에는 몰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날 여러분의 감정으로 느끼는 그런 사랑의 심정이나 한계지어진 사랑이 아니예요. 6천년의 서러움을 해원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해야 했던 그 서러운 심정, 나아가 지옥에 갈 생명까지 불쌍히 여겨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사랑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응당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 하더라도 사탄과 하늘 앞에 놓여진 조건의 법도가 있으므로, 그 법도의 조건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때리고 나서 서러워하고, 버리고 나서 또 붙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반역하는 이스라엘민족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배신자요 배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을 버렸다가 취하고, 다시 버렸다가 취해 나왔습니다. 취했던 개인을 버렸다가 다시 취하였고, 거기서 번식된 가정을 취했다가 또 버리고 한 가정을 세워 하늘 앞에 수백, 수천, 수만 가정을 취했다가 또 버리고 취했다가 버리면서 이스라엘민족을 세워 오늘날 제2 이스라엘민족형인 세계기독교를 전개시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2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는 세계기독교를 세워 나왔던 것입니다.

6-222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와 인연 맺을 수 있는 출발점
여기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사탄에 대해서 까지도 미련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사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법도를 생각하고, 섭리하며 싸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제 그런 심정을 가진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오늘날 여러분은 하늘을 배반하였던 죄와 자신이 부족하여 저끄어뜨린 과거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무조건 섬기고 싶은 마음, 무조건 위해주고 싶은 마음이 동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도 잊어버리고, 부모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움직여 질 수 있는 그 한 경지가 하늘의 입장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부모도 자식의 허물을 잊어버리고자 하거든 하물며 천정(天情)을 대신해야 할 우리는 더우기나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이 그런 심정을 동하고 그런 아버지인 것을 체휼하여 그 아버지를 무한히 존경하고 무한히 섬겨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체를 다 빼앗기고, 또 누가 자기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저는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심정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을 강조하시고 사랑의 주체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생활은 봉사의 생활, 주기 위한 생활이었습니다. 주지 못해 허덕인 예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생명을 주려 하였고, 자신에게 있는 말씀을 주려 하였고, 자신의 영광을 주려 하였고, 자신의 보좌까지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주어도 받지 아니하니 마침내 자기의 몸, 자기의 피와 살까지 인류를 위하여 던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을 표방하여 실천한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추구하여 나가는 자신이라 할진대는 오래 믿었던 사람을 보면 스스로 머리 숙여지고, 하늘 앞에 수고한 사람을 보면 스스로 섬기고 싶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심정이 없다 할진대 천적인 사랑의 인연은 끊어질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명사를 걸고 그 영원한 사랑을 찾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천적인 사랑의 이념에 부딪쳐서 사랑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은 대우주의 소유권한을 결정할 수 있는 가치의 감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천적인 사랑에 접촉되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을 잃고도 미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세계는 망상적이 아니예요. 어떠한 가공적인 공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적인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런 감정이 오늘날 인류의 심정 내에, 대우주권 내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천정의 세계에서 인류를 향하여 돌고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진수를 소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류를 대신하여 수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늘을 섬기고 위하려는 마음에 사무쳐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의 세계가 그랬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세계요, 둘째는 사랑의 세계였습니다. 사랑의 세계는 신랑 신부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제 앞으로의 시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 모심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과정을 통하고 사랑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모심의 시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통일 용사들은 믿음의 논리를 주장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사랑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표어를 가지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6-224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공
사랑은 내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넘어 세계와 하늘을 사랑하기게 미칠 줄 아는 심정입니다. 자신에게 열이 있고 힘이 있고 살아 있는 한 정성드리고 싶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요, 세계를 넘어 하늘과 인연맺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오늘도 역경 내일도 역경이 닥쳐온다 해도, 주고 또 주고, 섬기고 또 섬겨야 했던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에게 ‘회칠한 무덤같은 자들이여’ 하며 책망하고 저주한 적이 있는 데, 한없이 위해 주고 싶고, 한없이 받들어 주고 싶었으나 그들이 그 마음을 몰라주니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위하여 사는 사람을 못 찾고 있습니다. 진정 위하여 사는 사람을 못 찾고 있습니다. 이 한민족은 위하여 사는 민족이 못 되고 있습니다. 위하여 사는 어떠한 이념을 못 가졌습니다. 과거의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못 가졌고, 현재의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못 가졌고, 내일의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못 가졌기 때문에, 위해 주려는 하늘 섭리의 뜻과는 상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체도 그렇습니다. 자동적인 발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할 수 있는 마음이 나타나야 됩니다. 내가 성공하여 이름을 내겠다 하는 등자기를 중심삼는 것은 타락의 길입니다. 타락의 길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떠한 주권자의 입장에 섰다 할진대 그는 높임을 받아야 하는 자가 아니요, 삼천만이면 삼천만 전체를 위해 주어야 하는 자입니다.

이 민족 모두가 밥 한 숟갈을 먹더라도 삼천만의 피와 살을 먹는 심정이 되고, 옷 한 벌을 입게 되더라도 그런 심정이 동할 줄 안다면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강조해야 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개인, 그러한 목자, 그러한 기독교가 나와야만 민족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비애와 곡절의 탄식권내인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제시하였던 사랑의 표어를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일면이 무엇이었던고? 살이 찢기고 피를 뿌리면서도 위하여 복을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온 우주에 꽉 차고 넘치어서 하나님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마음을 지닌 한 존재가 나타난다 할진대, 그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심정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정 세계의 이념을 찾아 세워 나왔던 하늘까지도 그 사람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단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여러분의 신앙노정에 있어서 중요한 일면인 사랑이라는 명사를 세웠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도 사랑을 찾아 나가는 데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에 사무쳐 위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없다 할진대는 사랑의 예수님도 여러분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탄식을 해원하기 위해 세워졌던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잃어버린 천국 복귀였습니다. 잃어버린 참아들딸, 영원히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 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잃지 않고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아들 딸, 타락전 아담 해와와 같은 본연의 인간들로 복귀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226
하늘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
타락한 인간이 신앙노정을 다 거친 후 심판대를 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갖춰 아버지의 자녀로 나타나고자 할진대는 , 먼저 본연의 아담 해와의 형을 갖춘 입장에서 믿으라는 말이 필요없고, 슬픔의 경지를 넘어 사랑하라는 말과 모시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감정으로나 몸으로나 행동적으로 또는 생활 전체, 이상 전체가 그러한 면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법도적인 조항에 의하거나 명령계통을 따라 움직이는 것 보다도 우리의 심정이 법도를 앞서고, 우리의 양심작용이 어떠한 논리, 어떠한 최고의 법규를 넘어서는 곳이라야 천적인 인연이 완성된 세계입니다. 천적인 심정에 사로잡혀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아니 행할래야 아니 행할 수 없고, 아니 사랑할래야 아니 사랑할 수 없고, 아니 위할래야 아니 위할 수 없는 그런 숭고한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최고의 신앙의 표준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이 현실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를 상봉하는 그 순간,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하게 될 때 예수님이 막았던 그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오냐 죽음의 길도 오너라’ 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되겠고, 실천의 길을 거치면서 사랑의 심정을 품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허덕이고 몰리면서도 그 고비를 넘어 부활의 은사에 감사할 수 있고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리 수 있는 순간, 사랑의 심정을 품고 모실 수 있는 영광권에 들어서야만, 거기서부터 천국생활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천국이라는 명사가 관념적인 명사로 남아 있습니다. 그 관념적인 명사가 나에게 있어서 언제 생활적인 명사로서 전환되겠느냐 이것이 문제예요. 하늘이 있다면 이 전환점을 이룰 수 있는 한 점을 찾아 세우실 것입니다. 그때를 왈 끝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늘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을 놓고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늘을 믿는 다 하고 하늘을 사랑한다 하는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신앙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을 자기에게 예속시키려고 하였고, 대실천자이신 하나님을 자기가 실천해야 할 것을 대신하는 조그마한 존재로 세우려고 하였고, 우주적인 사랑의 주인공을 자기 사랑의 심정권내에 찾아 세우려고 하였고, 위함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대하여 자기를 위하는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였던 과거를 자탄하며 서러운 심정에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순간을 맞이하여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하고 부를 수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몸이 녹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바울이 삼층천에 들어가 체험했던 것 같이 자기가 몸 안에 있는 지 몸 밖에 있는 지 분별할 수 없는 경지에 부딪쳐야만 천적인 기준을 생활로 넘어간다고 나는 보고 있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경지를 찾아 헤매는 하늘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그 하늘이 계신 곳은 어디이며 그 하늘은 어떠한 하늘이냐. 그곳은 우리의 나라, 영원한 내 나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살 곳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예요. 그런 아버지를 , 그런 나라, 그런 생활무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환희의 노래를 불러 드리고 사탄 대하여는 격분하여 무찌르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그 때가 바로 심판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탄을 무찌르고 ‘주여, 승리의 한 기준이 섰사오니 다스려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품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환대하여 주지 못하셨던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할 노정이 남아 있는 데 그녀는 그 노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노정을 거치지 못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리에 들어가 하늘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게 되면 온 우주를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내 몸에 대한 의식을 잊어버리고 그 아버지를 믿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믿게 될 때에 자기 감정이 없어집니다.

이제 내 아버지를 원수시했던 사탄 대한 분개심을 품고 그에게 심판의 일격을 가한 후,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쁨과 서러움에 사무쳐 울고 난 신앙자라야만 천국생활 이념시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할 우리입니다. 소망의 천국은 맞이했으나 모시고 실천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천국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즉, 생활적인 주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6-228
하나님과 일체된 신앙 생활을 해야 할 우리
하늘은 예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관념상으로는 신의 실존하심을 알고 있고 대상적인 신앙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알았으나, 직접적으로 내 양심의 주체요, 내 몸의 주체요, 내 생활의 주체요, 내 생활권내에서 찾아지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이 실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신앙의 한계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또 사랑의 심정과 접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복귀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끝날의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어떠한 희생,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핍박이 있더라도 천성의 슬픔과 천주의 원한을 풀어드리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하늘의 깃발을 들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무리가 어떠한 민족 앞에 나타나면 그 민족에게는 선한 마음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지적인 것을 추구하고 진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진리를 움직여내는 동기는 체(體)였습니다. 체를 움직여낼 수 있는 동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실체는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만으로는 만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는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한곳으로 지향시키고, 심정의 움직임을 한곳으로 지향시키고, 영적인 감정까지도 한곳으로 지향시킬 수 있는 세계가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이념의 세계가 온다고 믿고 그러한 세계를 찾아나가려 하는 오늘날 우리들은 관념적인 것에 취해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하늘을 대하여 노래할 줄 아는 승리의 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그런 신앙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꿈속에서도 그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또 가능성이 있고 하늘이 있다 할진대 실제로 한번 그것을 실현해 보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라도 가져야만 하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간곡한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을 초월하여 생활적인 면에서 6천년 전 인간이 에덴에서 부르던 노래를 오늘의 노래로 부를 수 있어야 되겠고, 그 때의 감정을 오늘의 감정으로 살릴 수 있어야 되겠고, 타락한 후부터 느껴온 서러운 감정을 오늘에 와서는 기쁜 감정으로 바꿀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모심의 주체인 동시에 역사적인 해원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나와야만 여러분은 그와 관계를 맺어 승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요 하늘 땅의 슬픔을 풀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속에서 여러분이 슬픔과 고난의 심정을 가진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의 아버지요, 내 나라, 내 집의 주인되시는 분임을 실감할 것이고, 또 여러분은 신랑되신 분의 슬픔 전부를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러한 길을 찾아 나서고 보니, 아버지가 슬픈 아버지이심을 알았습니다. 그 슬픈 아버지의 아들 딸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국을 회복하기 위하여 슬픈 자리에서 싸워 나오시는 하늘의 분함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억울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수를 대하여 분함과 억울함과 적개심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민족보다도 역사적인 승리의 표어를 내걸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자신있게 승리하겠다는 하나의 기준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몸에서, 생활적인 분야에서 확고하게 섬으로써 승리의 역사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실체를 가지고 부활권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실체를 쓰고 천국복귀동산에 들어가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대하여 아들 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6-230
하나님의 소원 – 천국 복귀
이러한 경지에서 심정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러분들은 자신을 위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겠다는 관념, 내가 무엇하겠다는 관념을 버립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천국가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우주를 위하여 믿고, 민족을 위하여 믿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믿는 다는 신앙관념을 가지셨습니다. 이는 가공된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은 나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행한다, 세계를 위해서 행한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행한다 하는 믿음, 이 얼마나 통쾌합니까.

내가 사랑함은 내 일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걸어 놓고 사랑한다, 인류를 걸어 놓고 사랑한다, 하나님을 걸어 놓고 사랑한다, 하늘 땅을 걸어 놓고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심도 인류를 걸어 놓고 모시고 하늘을 걸어 놓고 모셔야 되겠습니다. 또 모시면서 감사하는 마음, 믿으면서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섬길 줄 알고, 마음으로 모시면서 생활로써 감사할 줄 알아, 나를 넘어 믿고, 나를 넘어 사랑하고, 나를 넘어 모신다는 관념을 지니고 여러분의 신앙행로를 걸어 나간다 할진대 거기에는 절대로 사탄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사탄의 유혹의 손길이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이런 신앙자들에게는 터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원이 무엇이뇨. 잃어버린 천국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부모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나라, 내 백성, 내 부모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부모의 참다운 자녀가 되어 6천년의 모든 원한을 잊어버리고 사탄을 물리치고 승리의 조건, 사랑의 조건을 자랑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슬픈 역사를 거쳐온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6-231
기 도
아버님, 극단의 말을 해 놓고 보니 아버지 앞에 민망한 심정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사옵니다.

거리가 멀고 한계가 큰 그 세계의 움직임이 좁고 거칠고 부족한 저희들과 어떠한 인연을 맺겠사옵니까?

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생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교역자들이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버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날을 통하여 슬프다 할 줄 아는 자기의 모습을 찾아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를 흠모할 수 있고, 실전의 자리에서도 쓰러지지 않아 영원히 승리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에게만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를 대하여 내 아들, 내 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한날이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신앙길을 가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인류의 시조로부터 저끄러진 죄로 말미암아 인류가 슬픔의 길을 가야 함을 알았사옵니다. 지금까지 사탄의 생각을 품고 살아온 인류는 망령된 모습이었다는 사실도 알았사옵고, 저희의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사망의 고개를 넘어 이것을 해원하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터전이 저희 목전에 당도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하늘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어야겠고, 당신을 참아버지라 부르며 모실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인류를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에 사무치어, 어떠한 역경, 어떠한 슬픔, 어떠한 불편함도 이겨낼 수 있도록, 아버지, 인도하여 주옵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 딸들 가운데서 자기들이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이 말씀 중에 감동되고 느끼는 무엇이 있을진대 생명의 불길을 발동시켜 주시옵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천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역사적인 오늘의 환경을 개척해 나가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인연 맺을 수 있는 이 한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전하는 말씀이 저희 심중의 표준과 저희의 생활표준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옵고, 이들의 생활관에 자극적인 한 표준이 되어, 언제나 불의한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산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시며, 심중과 그 뼈살을 움직여 낼 수 있게끔 역사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외로운 환경에서 아버지 앞에 눈물지으며 호소하는 식구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수많은 인류에게도 축복의 손길을 펴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