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8 to 6-193: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
1959.04.26 (일), 한국 전본부교회

6-158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
마태복음 7:1-20 마태복음 25:1-13

[기 도(Ⅰ)]

하늘의 영광을 찾으시기 위하여 오랜 역사과정을 참으시며 싸워 나오신 아버지! 그 섭리의 영광을 아버지 홀로 누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이 천지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세우신 본연의 뜻을 인간이 실수한 그날부터 무수한 사탄들 앞에 여지없이 유린당하여 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 땅 위의 인간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할 뜻이 유린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한 하늘의 사정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뜻을 대하는 사람이 없기에 아버지 홀로 수많은 수고의 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애쓰셨고, 아버지의 심중에 사무친 뜻을 인간 앞에 옮겨 주시기 위해 무수히 수고하신 역사가 오늘날까지의 구원섭리역사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저희들 나타난 구원섭리의 뜻을 통하여, 역사노정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그 뜻을 마음에 소유하고, 아버지의 영광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 바칠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뜻은 참다운 아들 딸을 찾는 것임을 아오니, 이제 저희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아들 딸로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그 나라, 그 세계, 그 천지를 이룰 수 있게 함께해 주시고, 또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의 나라요, 소원의 뜻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아들 딸들이 전체의 만물을 송영을 드리는 것이 6천년을 싸워오신 아버지의 최대의 기쁨이요, 소망임을 저희가 알고, 그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그날 그때까지는 무한한 거리가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 가운데 택해 세워진 아들 딸임을 알고, 이제 아버지의 영광의 한날을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싸움의 길, 억울한 길, 죽음의 길을 개의치 않고 생명을 바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당신의 아들 딸들이 소망하는 땅 위에서 뜻을 중심한 심정을 품고 아들의 영광을 대신하여 나왔사오니 보살펴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친히 여기에 임재하시어서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참다운 뜻을 품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께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곳마다 무수한 사탄의 세력이 침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 각자의 마음과 몸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어둠의 세력을 제거하여 주시옵고, 저희를 아버지의 너그러우신 품에 품으시어 산 모습으로서 아버님의 영광의 시대를 이루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만 백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삼천만 민중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영광과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난 일주일을 지내는 가운데 아버지 앞에 옳지 못한 모든 조건들을 이 시간 청산하고, 이제 하늘의 뜻을 품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서 산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친히 움직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160
기 도(Ⅱ)
아버님! 오늘 이 날을 기억해 주시옵고 허락하실 은사를 나타내 주시옵소서. 허락하실 생명의 움직임을 오늘 저희의 심중 심중을 통하여 나타내시옵고 부활의 영광을 불충한 저희들에게나마 허락하실 수 있사오면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마음이 있으되 저희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고, 몸이 있으되 저희의 것이 아님을 알았사옵나이다. 마음은 선한 방향을 지향하되 몸은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오매, 그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요, 하늘의 탄식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희들인 것을 아버님께서도 아시고 저희를 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버님, 이런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어서 저희에게 하늘의 생명의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심중에 강력한 부활의 힘을 가하여 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몸은 마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하늘의 뜻은 마음이 몸을 쳐서 마음 앞에 몸을 영원히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의 한 기준을 찾아 이루는 것이옵니다. 이런 기준을 오늘날 저희 자신을 통해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싸움이 저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런 연고로 저희 앞에 연이어 나타나는 싸움은 저희들이 두려워할 싸움이 아니옵고, 이런 싸움의 환경에서 부닥쳐오는 온갖 슬픔이 큰 슬픔이 아니라 마음과 몸의 싸움에 있어서 마음이 몸의 주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슬픔이라는 것을 오늘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아버님이시여! 강한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고, 강한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이 몸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일이 저희들로부터 성취되지 않으면 전체 생명의 부활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마음을 중심삼은 생활을 통하여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의 마음이 용솟음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나이다.

생명을 대하는 마음, 은사를 대하는 마음, 부활의 역사에 화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에 받은 충격과 감격이 저희의 몸을 휩싸고 저희의 환경을 휩쌀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천적인 재창조의 역사가 저희의 몸 가운데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마음은 아버님의 영광을 향해 무한히 솟구치고 있사오되 아버님이시여! 이런 환경을 조절하여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기쁨의 동산이 이 땅의 만민 앞에 어서 속히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 딸들이 있을진대 역사에 길이 남기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을 주관하고 하늘을 움직여 낼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 위에 사는 인간에게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없는 문제가 있을진대 말씀에 근거한 천국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 할진대 평화의 나라는 건설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먼저 저희의 심중 깊이깊이 아버님을 대하여 감격하고 아버님을 대하여 기뻐하여 아버님을 대하여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에 몸이 움직여 화할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을 하늘은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 나왔사오니, 승리의 모습을 회복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무리들이 모이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간곡한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아버지 모시고, 원한의 조건이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승리의 손길이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기를 ,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마음의 천국, 마음의 평화가 저희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다 할진대 그 영광스러운 천국도 저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가운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버지를 직접 대할 수 있는 영광된 자격을 갖고 있는 자가 있사옵니까? 아버지를 위한 천륜의 심정에 어리어 산 제물된 입장에서 경배를 드리려 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가고자 하는 그 갸륵하고 눈물겨운 마음이 무한히 하늘의 심정에 동반함으로써 생명의 움직임으로 화하여 평화의 한 모임을 갖고자 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그러한 마음이 저희들에게 없다면 하늘도 슬플 것이요, 저희 마음도 슬플 것이요, 오늘의 이 모임도 슬픈 모임으로 나타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영광의 모습으로 현현하시옵소서. 친히 주인으로 나타나시옵소서. 그런 은사를 느낀 자가 있다 할진대 그의 마음문을 여시옵고 아버지의 소망을 다시 주입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생명들이 흑암권세에 사로잡혀 사망세계에서 신음하고 있사올진대 생명의 부활을 일으켜 주시고, 부활의 권한을 가하여 주시어서, 다시 빚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찾아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쌍수를 합장하여 아버지 앞에 경건히 경배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충성하고자 했던 존재는 많은 시험을 받았던 것을 이 시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수없이 하늘을 배반한 선조들의 후손인 것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지금까지 사탄의 제물이 되어서 하늘의 길을 막기에 누구보다도 앞장 섰던 모습들임을 깨닫고, 황공한 마음을 금할 바 없어 눈물을 뿌리며 아버지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경배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여기에 모인 청중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들의 마음에 사탄이 침범코자 하오니 분별해 주시옵고, 이들이 마음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등대가 되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모인 전체 청중들에게 친히 아버지께서 찾아 주시옵고, 그 마음을 통하여 몸까지도 아버지의 은사로 말미암아 기쁨 속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입은 상처가 심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부터 멀어져 그릇된 자리에서 슬픔에 잠기었던 모든 사실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친히 향유를 발라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그립다 할 수 있고 인칠 수 있는 은사를 이 시간 모인 청중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삼위신은 불쌍한 자를 돕기 위해 수고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긍휼을 바라며 자기의 천함을 탄식하고, 아버지의 귀함을 노래하고자 하는 자를 찾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이 그러한 아버지의 존귀하심을 알고 자기의 천함을 탄식하게 하여 주시어서, 아버지께서 찾아주시는 은사를 맞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삼천만 민중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온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도 저희들을 옹위하여 기쁨의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아버지, 친히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지방에 널리어 외로운 심정을 품고 뜻을 염려하면서 기도하는 식구들이 모인 곳곳마다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을 거두지 마시옵고, 사랑의 손길로써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남은 수고의 고개를 넘는 데 있어서 지쳐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끝까지 참고 나가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에 받아주시옵소서.

어려움 가운데 일을 이룰 수 있고 슬픔 가운데 뜻을 세울 수 있으며 낙망 가운데서도 이 뜻을 높일 수 있어서,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통하여 저희들을 아버지의 특별한 은사의 품에 품어 주시옵고, 남기신 은사를 약속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그날까지 붙들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 한 시간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163
기 도(Ⅲ)
아버님! 말씀을 대하니 2천년 전 예수님의 성상이 그리워지나이다.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 앞에는 삭막한 세상이 놓여 있었고 자신을 위주하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었사온데, 그러한 무리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에 무한한 슬픈 심정이 흐르고 있었음을 깨닫겠나이다.

유대교단은 교파 교파끼리 싸우고, 교인들은 교인들끼리 다투는 실정을 바라보시던 예수님! 자기의 흠은 숨기고 남의 흠을 들추어 자기를 내세우기에 허덕이던 그때의 시대상을 저희들이 회고하게 될 때에, 과연 세상과 시대를 책임지고 오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무한히 슬펐음을 알겠나이다.

그런데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외치시던 예수님의 심정이 측량되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자들은 민족이었고 교단이었고 개인이었으나, 구해야 할 자들이 구할 줄 모르고 찾아야 할 자들이 찾을 줄 모르며 두드려야 할 자들이 두드릴 줄 모르는 것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인간을 대신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인간을 대신하여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으니, 아버지! 슬픈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찾아주기를 고대하여 보냈던 메시아가 오히려 찾아야 할 입장에 계셨고, 인간들이 모셔주기를 바라며 하늘은 오랜 역사노정을 준비하였사오나 인간들로부터 모심받지 못한 입장에 계셨던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을 저희들이 이 시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땅의 인간을 대할 때 눈물 지으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지만 오히려 아버님께서 축복해 줄 수 있는 땅이 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성상이 오늘 저희의 목전에 현현하게 역사해 주시옵고, 저희들이 그의 분부하시는 음성을 들어 묵묵히 그 내심에 흐르는 천적인 심정을 사모하고 체휼하여 눈물 지으며 경배드릴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벌거숭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는 아버지밖에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소망과 저희의 욕망과 저희의 일체의 요구 조건은 아버지 것 외에는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한한 아버지의 심정에 사무친 그 마음을 붙들고 살고, 그 마음을 체휼하며 살고, 그 마음과 더불어 싸우며 살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청중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자기의 마음과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오니, 그 마음과 몸 그리고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주도적인 권한이 나타나게 역사해 주시옵고 이 시간이 친히 아버지의 아들 딸이라 하시며 인칠 수 있는 약속의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말씀을 갖고 나타났사오니 여기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인간 끼리끼리의 인연을 맺어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일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뜻대로 나타내 주시옵기를 부탁드릴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165
말 씀
하나님의 소망인 실존체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의 기나긴 세월을 간곡한 심정과 애절한 심정으로 수많은 선지와 수많은 선조들을 세워 역사해 오셨습니다.

6-165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를 섭리해 오신 단 하나의 목적은 소망의 실체인 예수님을 세우시어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의 기점에서 하늘의 소원과 역사적인 선조들의 바램과 전 인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순간을 바라시어 하늘은 역사해 오셨고 우리의 선조들은 싸워나왔다는 사실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예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실 때 그는 둘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이 세계의 만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예수가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수 있고, 예수가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으며, 예수가 영광을 누릴 때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였습니다. 그가 아니면 하늘의 보좌도, 영계도, 지상의 어떤 만물도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체의 중심되는 가치적 존재가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적인 가치를 지니고 오셨던 예수, 이 예수를 인간적으로 보게 될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선조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자기들이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했지만, 그는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상의 나타났던 어떠한 의인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를 버리고는 자기 생명도 취할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교단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민족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나라도 세울 수 없는 , 없어서는 안 될 하늘과 땅의 중심존재였습니다.

하늘이 이 분을 인간들에게 보내신 것을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이 분을 맞이하여 낙망하고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이 분을 통하여 기뻐하기 위하여 보내셨고, 땅의 인간들이 이 분을 맞이하여 기뻐하도록 하기 위한 중심존재로 보내셨습니다.

6-166
하나님이 바라시던 예수의 생애와 나타난 현실
그런고로 예수의 일거일동 모든 것은 하늘의 영광을 그릴 수 있어야 했고, 그가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영광의 감정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생애는 그러한 생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인간들은 예수를 맞이한 그날부터 누구보다도 그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모시고, 누구보다도 그를 위하고, 누구보다도 그를 칭송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은 민족대로 떠나버리니 예수는 민족을 잃어버린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붙들기 위해 예수를 보내셨지만 그 예수를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잃어버리고 나니 하늘의 기쁨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천국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할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운에 부딪쳐 십자가에 사라지신 예수님은 그런 비운을 겪지 않고 승리의 영광을 갖추어 하늘 땅이 기뻐할 수 있는 한날을 다시 세우마고 약속하셨는 데, 그날이 왈 끝날이요, 재림의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167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려면
하늘의 보내심을 입고 땅 위에 나타나 지상 생애를 거쳐 영계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도 성부와 성신과 더불어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워해야 할 우리입니다. 그 예수님을 다시 소유하여야 할 우리입니다. 그 예수님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되려면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어야만 예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데,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인류역사의 소원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영광으로 현현하실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걸어야 될 것인고?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시는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땅을 찾아오시지만 우리는 그 예수님을 땅에서 맞을 수 없습니다. 인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오늘 이 자리에서 그냥 맞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붙안고,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셔야 했던 일을 다하고 종결지은 후에라야만 오시는 예수님을 대접하고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다시 맞게 되는 날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재림의 한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땅 위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땅 위에서 책임을 감당하고 난 후에라야만 예수님을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드리려는 말씀의 제목은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입니다.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6-168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던 마리아
천사는 마리아 앞에 나타나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매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늘이 하시는 일임에 성령을 통하여 잉태하게 될 것이다’하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대답한 순간은 4천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한낱 미미한 처녀가 하늘을 향해 역사적인 답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를 생각하게 될 때 흔히 주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영광의 부활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올라가 마리아의 신세를 생각하고 요셉가정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하시어 인간을 찾아주신 하늘의 최후의 한 마디가 마리아에게 들려졌을 때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던 마리아의 이 한 마디가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늘의 발판을 이루었다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뜻을 품고 오시는 그 존재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고대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 우리는 동정녀의 순결한 심정으로 이스라엘나라에 구주가 나타나기를 누구보다도 간곡히 고대하던 마리아였음을 추상할 수 있게 됩니다.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을 보아 마리아는 하늘의 숨은 뜻이 나타나기를 무한히 소망하고 기도하면서 생활해 나왔던 사람이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뜻을 생각하는 토대를 통하여 하늘이 찾아 들어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단 예수뿐만 아니라 선지선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사람의 선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선지를 맞을 수 있는 발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들을 땅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선지를 품을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된다는 것, 그 부모가 먼저 뜻의 발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6-169
예수를 탄생시킬 수 있게 한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
마리아가 예수 탄생의 예고를 받고 난 후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이루시옵소서’라고 했듯이 이 말은 타락한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 해야 될 말입니다. 비단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찾아 나아가고 하늘 노정을 찾아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한 마디의 답변을 하지 않는 다 할진대 예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터전 위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태아가 자람에 따라 누구보다도 더 뜻을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가 탄생되는 그날에는 민족의 소원인 구주가 나타나 민족의 원한을 풀 수 있고, 민족의 슬픔을 청산할 수 있다고 믿고, 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그 시간을 누구보다도 더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탄생되었습니다.

만일에 요셉 가정이 없었던들 예수가 어떻게 태어났을 것인가? 동정녀로서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과 시대적인 여건에서 용납받지 못할 위법 중의 위법이요, 민족의 수치 중의 수치로 남아질 오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이 모든 환경을 거부하는 자리에서 뜻을 대해 나설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뜻만을 생각하고 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악한 세상에 부딪치는 순간마다 하늘은 살 길을 개척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이런 걸음을 쭉 거쳐 나오셨습니다. 애급땅으로 피난을 가 거기에서 3년노정을 거치고, 돌아와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수의 일을 하던 아버지 요셉을 협조해 주는 보조자의 한 사람으로서 묵묵한 생활을 하면서 뜻을 펼 수 있는 한날을 바라고 준비하시던 예수님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가운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며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는 귀절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개척의 노정을 출발할 때에 간곡한 심정으로 외치신 말씀입니다.

6-170
유대민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취한 생활태도
예수님께서는 그 민족이 메시아를 모셔야 할 입장인 것을 아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간곡한 마음으로 메시아의 실체를 구하여야 할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구할 줄 모르는 입장에 있는 민족, 누구보다도 애달픈 심정으로 찾아야 할 입장에 있는 유대교단들이 그런 입장을 떠나 찾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사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두드려야 할 유대교인들이 두드릴 줄 모르고 있는 실정을 바라보시며 사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실체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이 간절하지 못한 민족을 바라보신 예수님께서는 , 멀지 않아 하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민족과 관계를 맺어 천적인 뜻을 이루겠다는 심정을 품으셨기에, 한 날, 한 시간, 한 초도 뜻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의 실천자로 오셨던 예수님의 심정은 마리아가 뜻에 대해 염려하던 심정 이상의 심정이었습니다. 요셉 가정에서 생계를 위해 요셉의 일을 묵묵히 협조하던 예수님의 심정은 민족을 바라보면 볼수록, 민족에 대한 신망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뜻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새로이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30여년의 준비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뜻을 염려하는 간곡한 심정을 품고 남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늘을 위하여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을 다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의 생활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간곡한 심정으로 구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하늘 문을 두드리기에 끊임없이 수고하신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171
사생애 기간의 예수님, 그 심정과 생활상
예수님께서는 철이 든 후부터는 먹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먹었고 사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고심했던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신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알아 예수님을 붙들고 구한 자가 없었고, 예수님을 붙들고 찾아나선 자가 없었으며, 예수님을 붙들고 그의 심중을 두드린 자가 그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불쌍한 예수님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늘을 위하여 민족 대신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위로는 하늘을 대신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반면, 아래로는 땅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여 간곡히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간곡한 심정을 품고 찾으면 민족의 심정을 두드려 민족의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위하여 30여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이시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시여!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요,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생명을 아버지와 인연맺기 위함임을 아오니, 민족의 실수와 민족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불신과 배반의 민족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민족이 자고 있을 때도 향락을 누리고 있을 때에도 편히 자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즐거워 하시지 못하고 민족을 붙들고 하늘과 인연 맺어주기 위해 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자신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민족 중의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심정을 위안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환경과는 동떨어졌던 예수님의 심정은 뜻의 때를 고대함에 반하여 말할 수 없이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0여년이 지나 뜻의 실천노정을 각오하고 나서던 예수님의 심정은 비장하다면 말할 수 없이 비장할 것이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체휼할 수 없는 애달픈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뜻을 실천하려는 공생애노정을 염려했던 예수님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6-172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시게 된 이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늘을 대신하여 오시고 만민의 구세주로서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구원을 받아야 할 민족 가운데에 그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나타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심중은커녕 그의 30년 수고의 노정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생활을 하고 민족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던 세례 요한 일당마저도 반대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슬픈 심정으로 민족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에 대한 한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세례 요한마저 예수님을 외면하고 나서게 될 때 예수님에게는 더 큰 슬픔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민족 앞에 하늘의 복음을 갖고 나타나야 할 때가 가까와오는 데도 불구하고 민족이 간 곳 없고 민족 앞에 하늘이 세우신 세례 요한도 간 곳 없어져, 예수님께서는 인간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노정을 거치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있었던 40일 금식기간이 영광스러운 기간이요, 예수님께 반드시 있어야 할 기간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간을 거치시게 된 것은 예수님 앞에 민족이 사라진 연고요, 세례 요한 일파가 사리진 연고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동방의 세 박사와 안나, 시몬, 그리고 뜻을 품고 예수를 잉태하였던 요셉가정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실천노정을 나설 때에 그를 알아 주지 못하였던 연고이기도 했습니다. 땅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이요,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신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님이요, 또한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 새로운 하늘 제단을 꾸며야 할 예수님이 이루셔야 했던 하늘 제단은 영광의 제단이요, 기쁨의 제단이요, 승리의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제단을 꾸미기 위해 나선 예수님은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굶주리는 예수가 되었고, 사탄의 시험을 받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그 장면은 온 인류가 가장 비통하게 여겨야 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주리신 후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그 사탄이 제사한 여러 조건의 시험을 당하는 슬픔의 시간은 원래 민족이 겪어야 할 시련기간이 되어야 했는 데, 도리어 예수님의 슬픔으로 인계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하고 그 민족을 끊어버리고, 그 민족을 원망하고 저주하여야 할 입장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굶주린 몸을 일으켜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민족을 위해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처한 자리는 이스라엘민족도 모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각오를 하고 하늘 앞에 나타나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은 어떤 슬픔의 자리를 거쳐서라도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이 품은 아버님의 뜻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의 아버지의 뜻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하려는 것임을 아시는 예수이시고 그 뜻을 존중하는 예수였던 연고로, 굶주림과 헐벗음도, 부딪쳐오는 어떠한 핍박과 시험도, 그가 30여년 동안 뜻을 고대하고 바라던 마음을 깨뜨릴래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뜻을 품고 나타날 적마다 예수님은 하늘을 대신하여 자기가 겪게 되는 서글픔과 하늘이 당하시는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런 자리에서 뜻을 대하여 더 한층 굳은 결심을 했기에 배반한 민족과 배반한 무리를 다시 찾아 나설 수 있었다는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민족이 찾아주기를 바라셨으나 그렇게 해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반대로 죽고난 후에 찾아주어야 할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민족이 예수를 모셔 주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해야 할 예수님이 죽어서 구원의 역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실체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두드려야 하고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데, 죽고 난 뒤에 두드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세요 전세계 인류의 신세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 때문입니다.

6-174
하나님의 슬픔과 분함과 원통함이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이뇨? 하나님의 분함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원통함은 무엇일 것인가?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리에서 구해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찾아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두드려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비밀을 밝힐 수 있게 그 문을 개봉해야 할 환경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비밀을 밝힐 수 있게 그 문을 개봉해야 할 환경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고 보니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영계에 가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을 보낸 인간은 가신 예수를 대하여 구해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신 예수님을 찾아야 할 신세가 되었고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두드려야 할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시기 전에 구할 줄 알고, 가시기 전에 찾을 줄 알고, 가시기 전에 두드릴 줄 알고, 가시기 전에 찾을 줄 알고, 가시기 전에 두드릴 줄 아는 인간들을 찾아 세우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이요, 인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비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노정에서 뜻을 품고 나설 때,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그러한 걸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은 전부 예수님 생애의 전반적인 사실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하는 자리, 찾는 자리, 두드리는 자리를 거쳐 뜻을 찾아 나서서 걸으신 예수님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산준령이었고, 영광스럽고 큰 승리의 궁전이 아니라 좁은 십자가의 문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이 믿지 않고, 민족이 따르지 않고, 민족이 바라보지도 않는 입장에, 민족이 싫다 하는 입장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5)”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환경과는 반대의 입장에 있는 자신을 예로 하여 자신과 그 사회환경의 중간 입장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민족 앞에 나타나 실천 노정을 걸으실 때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단이 가로막고, 민족이 가로막고, 세례 요한이 가로막았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갈 길이 있다 할진대 그 길은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도 문이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닦아야 했고 가로막힌 담에 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걸음을 걸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6-175
선민의 불신으로 초래된 고난의 길
4천년 섭리역사노정의 터에서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세워 하늘과 만민이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보내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이스라엘민족이 믿고 받들었던들 평화의 길은 열렸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워 놓은 유대교단은 하나님께서 왕래하실 수 있는 대로(大路)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백성들의 출입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이 반대하니 민족의 갈 길이 막히고 민족의 문이 막혔으며, 교단이 반대하니 교단의 갈 길이 막히고 교단의 문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에게 몰리고, 유대교단에게 몰리고, 자신의 증거자들한테 물리고, 나중에는 제자들에게까지 불신당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인간으로서 갈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의 길을 아니 가실래야 아니 가실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4천년 역사노정에 천성을 찾아가는 데는 문이 많은 것 같고 6천년 역사를 통합해 보면 천국으로 가는 문이 더욱 많은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열고 가신 문은 단 하나요 그 문이 아직까지 이 땅 위에서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많습니다. 자기들의 신앙을 고취하고 교파를 세워 소개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이들이 가는 길이 하늘로 가는 길처럼 보이고 이들이 안내하는 문이 하늘로 안내하는 천국문 같이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개척하시던 그 길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열던 그런 좁은 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6-176
예수님께서 가신 길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애 실천노정에서 생명을 걸어놓고 싸우다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피를 뿌리며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지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민족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교단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부모 형제,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 더 나아가서는 세 제자까지 배반하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따라 수많은 인류들이 가야 할 길인데, 예수님께서 가신 이후 그 길은 막혀버렸고,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문은 닫혀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간 길만 열려 있으니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사도들이 간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을 따라 어디로 갈 것이뇨.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야 되는 데 그 길을 따르는 데는 목적이 뚜렷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목적은 무엇이냐?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러이러하다는 그 목적이 뚜렷해야 되는 동시에 내용도 뚜렷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뜻의 길이었습니다. 이 뜻에 대한 내용과 목적은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수고하여 찾은 내용이요, 수고하여 세운 목적이었습니다. 그 내용과 목적은 30여년의 생애를 희생하여 찾아진 내용이요 목적이었기에, 어떤 환란이 일시에 예수님을 친다 할지라도, 죽음의 장벽이 휩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뜻으로 남아진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신 예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 험한 길을 가셨으니, 오늘날 우리들도 그의 뒤를 따라 그러한 길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길을 가셨느냐. 죽음의 고비에 부딪쳐서 사망의 물결이 휩쓴다 할지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께서는 내게 부활의 권한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박차버리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부활의 권한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6-177
신앙자들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슬픈 세상을 바라보시며 구하던 마음을 느끼는 자, 사망의 땅을 바라보시며 예수가 찾던 마음을 품은 자, 멸망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두드리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생명을 주입시키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늘이 바라는 목적을 심중에 지니고 이 땅을 대하여 싸우겠다는 각오를 갖고 나서기 전에는 하늘이 우리를 예수님께서 가신 길로 인도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쳐 가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끝날의 성도들이 역사적인 원한을 풀어드려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택함받은 제1이스라엘이 택하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선민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선포하신 진리로 말미암아 민족을 넘은 전세계 크리스찬들은 제2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이 제2이스라엘 선민의 권한을 갖고 있는 끝날에 처한 기독교 성도들은 하늘을 배반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되지 말고,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잃어버린 제1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는 제2이스라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영계에 가셔서 수고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이뇨? 이땅에 오셨을 때 산 실체를 가지고 제2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지 못하신 것이 탄식의 내용인 연고로 예수님께서는 2천년 동안 성신과 더불어 만민을 동원하여 제2 이스라엘 선민권을 조성해 나오고 계십니다.

6-178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이스라엘 선민권이 조성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날의 성도들은 12사도들의 문을 거쳐 예수가 들어가신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끝날의 성도들 앞에 열려 있는 천국문은 12사도형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의 성도들이 천국을 들어가는 데는 이 12사도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수많은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개하는 문이 사명을 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칙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12사도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니 끝날 성도들은 그 12사도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종말에 찾아져야 할 예수님 당시의 제 1이스라엘형인 제 2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교파에 속하여 어떤 문을 거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12사도의 한 이념의 표지를 이마에 받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님 당시의 사명을 대신하여 그 시대의 사명을 실체로써 종결지어야 할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12사도형의 문을 찾아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무수히 갈라졌던 종파는 천지운세에 따라 자기들도 모르게 통일이념형태를 갖춘 환경권내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외의 각 교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 가를 알아 예수님의 12사도의 반열을 찾아 들어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12지파와 70장로를 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민인 이스라엘을 수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역시 12제자와 70문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이념을 세계적인 이념으로 세우고자 하셨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연고로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제2이스라엘권내에 있습니다.

제2이스라엘권내에 있으되 그들은 자신이 제2이스라엘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 지 모르는 , 지파 반열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 기독교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사도로 말미암아 택한 민족을 수습하고 12지파의 반열을 재수습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다시금 12지파, 70문도, 120문도의 형을 땅 위에 세워 천적인 섭리와 맞춰야 할 사명을 갖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여러분이 사도의 문을 거치고 나서 예수님의 문을 거친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 땅 위에 참다운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잘 믿는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너는 어느 지파냐? ‘ 하고 물으면 ‘나는 어떤 지파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하나의 지파, 하나의 지도자를 못 가졌다 할진대 천국건설 이념시대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이념이나 하나의 민족 앞에 있어서 자기의 위치가 뚜렷하지 않으면 애매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때는 교파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끼리끼리 모아야 할 때입니다. 끝날은 어떠한 때냐 하면, 6천년 역사노정에서 선한 사람을 거두어들이는 인류역사 종말시대의 수확기입니다. 수확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밭에 여러 가지 곡식을 심는 시기였습니다. 곡식을 심을 때는 한 밭에 여러 가지 곡식을 심을 수 있었으나 추수기에는 같은 종류의 곡식만을 한 창고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추수기입니다.

6-180
끝날은 어떤 때냐
예수님께서 당시에 오셔서 하셔야 할 일은 무엇이었던고? 이스라엘 12지파의 반열을 다시 수습하여 천국 창고에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하셨기 때문에 가시면서 이것을 재차 실현하시기 위해 세우신 날이 다시 오리라 하신 약속의 한날인 재림의 날입니다. 그날을 앞둔 땅 위에 성도들에게는 유대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두개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본연의 지파와 본연의 지도자를 찾아 헤매야 할 때입니다.

그러려면 과거의 어떠한 이념, 인습적인 어떠한 절개, 전통적인 어떠한 법도,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모든 관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면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늘날 여러분은 제1 이스라엘 시대였던 예수님 당시의 시대와 맞먹는 세계적인 이념시대를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마음 맞는 성도 끼리끼리 갈라져 나갑니다. 교파는 자꾸 자꾸 분열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통일형을 부르짖고 있으나 내적으로는 분열형을 갖추어 나갑니다. 겉으로는 통일된 것 같으나 속으로는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한때가 오는 데 그때가 재림시대입니다.

내적으로 수습할 때가 오면 외적인 통일형이 반기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올 때 그 껍질은 반대로 터져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입니다.

씨알맹이와 생명의 싹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 내용에 있는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6-181
예수님의 소원
그러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도 소원하신 것은 무엇이었던가. 자신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오직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의 소원이요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명체를 이루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들이 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구하고 두드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세워 모세가 세워 놓은 12지파의 권한을 그대로 상속시켰어야 했는 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또한 살아서 하늘 앞에 구하여야 할 예수님께서 그러지 못하셨고, 살아서 하늘을 찾아야 할 예수님께서 하늘을 찾지 못하셨고, 살아서 하늘로 향한 문을 두드려야 할 예수님께서 하늘로 향한 문을 두드리지 못하셨으니, 끝날의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는 살아서 예수님께 구하여야 할 때가 옵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찾아야 할 때가 옵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심정의 문을 두드려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도 이것이며 예수님의 소원도 이것입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떨어졌으니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려면 먼저 사도의 문을 두드려야 됩니다. 이제는 전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님 당시 쓰러져간 사도적인 모습이 나타날 때가 왔습니다. 전세계 기독교를 수습하고 12지파의 대표형을 갖추어 나설 수 있는 세 사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요 제자 중의 제자인 이 세 제자는 동쪽 문을 대신하였습니다. 하늘은 천국문을 상징하여 동서남북의 각각 세 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동쪽의 세 문, 남쪽의 세 문, 서쪽의 세 문, 북쪽의 세 문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중심한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동쪽의 문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기독교는 베드로적 기독교, 야고보적 기독교, 요한적 기독교로 상징되는 데 구교는 베드로적 기독교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상징하고 야고보는 소망을 상징하며 요한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종적인 기독교 역사는 베드로적 기독교, 야고보적 기독교가 나왔는 데 야고보적 기독교가 신교입니다.

6-182
끝날에 요구되는 것
그러면 끝날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냐. 요한적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죽지 않고 주를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순교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날에 요한적 기독교가 새로이 나타나 주님을 상봉하게 될 것을 예지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서 귀염을 받았고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사랑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적 기독교는 사랑의 기독교인데, 끝날에는 이 요한적 기독교, 사랑의 기독교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었거늘, 아직까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적인 문도 좋고 야고보적인 문도 좋으나 우리는 요한적인 문, 사랑의 문을 통해 찾아가야 합니다. 이 사랑의 문은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바라보신 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을 바라보시며 6천년 동안 싸우셨고 예수님도 그 문을 바라보시고 2천년 동안을 싸우셨거늘 역사적인 소망의 문은 아직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 문을 열 수 있는 한 대표자를 세워 약속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왈,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신부라는 명사를 세워 놓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세계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기도해야 됩니다. ‘당신께서 땅 위에 오셔서 남기신 슬픔이 이것인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 생전에 해원하시지 못한 그 원한의 곡절이 이것인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의 원한을 걸어 놓고 슬퍼하시며 싸우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 하고 예수님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을 배반하던 사도 대신 산 사도, 배반하기 전의 그 사도들과 같은 성도가 되지 못하면 역사적인 인물, 역사적인 구원의 완성자가 되어야 할 인류, 구원섭리를 완수해야 할 인류는 하늘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날인 오늘날 재림의 한날을 예비하고 바라고 있는 세계 기독교인들은 겟세마네동산과 갈보리산상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하던 세 제자와 같이 되지 말고, 교단을 통솔하고 수많은 성도들을 품에 품고 예수님 대신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개도 대신 넘어갈 수 있는 제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모임이 되어야겠습니다.

6-183
재림주님 앞에 세계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종교역사는 복귀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고 하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타락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을 영원성으로 말한다고요?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영원성이 아닙니다. 타락이라는 명사가 생겼기 때문에 알파가 생겼고 복귀하여 다시 돌아가는 오메가라는 명사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나라에 오셔서 예수님이 성취해야 했던 알파적 이념이 끝날인 오늘날 성도들의 오메가적 이념으로 거두어지지 않는 다 할진대는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기쁨이요 인류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의 알파적 이념이 오메가적 이념으로 종결되기 전에는 기쁨의 모습으로 인류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러한 예수님으로 나타나지 않는 다 할진대 예수님은 다시 슬픔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의 천국은 건설되지 않습니다. 자기 멋대로의 신앙관념, 자기 주장, 자기의 이념으로는 천국의 심정을 통할 수 없더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의 성도들은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개방하신 그 문을 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문을 거쳤더라면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 하였으되 막았던 것입니다. ‘너를 사도로 세운 것이 아니니 사도의 문을 통하여 오라’ 이겁니다. 천법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6-184
성경 말씀이 제일이다라고 하게 된 이유
그런 연고로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 인류 앞에 사도와 같은 사명을 가진 자가 있는 지 찾아봐야 됩니다. 지금이 그러한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방언을 하였고 신령역사를 하였고 예언을 하였고 별의별 일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에서 신령한 역사가 많이 벌어짐으로써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들이 영적인 현상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혼란하게 되니, 그것을 막기 위해 ‘성경 말씀이 제일이다’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끝날에는 내 영을 많이 부어주리라(행2:17)’.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현상이 종말의 기독교 역사세계에 나타나 사방에서 미쳤다, 이단이다, 하는 말을 듣는 무리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그 중의 대표적인 한 멤버(member)로 들어 있습니다.

6-184
끝날에 영적인 현상이 많은 이유
영(靈)의 부음을 받은 자는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이유를 모르면 하늘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가 눈을 뜨면 영계(靈界)를 보고, 그가 행동을 하면 영계 사람의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행동과는 판이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옛날 예수님도 뭐 똑똑한 사람으로 보였어요?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멍청이였어요.

앞으로 이와 같은 영적인 현상이 휩쓸 것이며, 민족을 휩쓸 것이며, 교단을 휩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 수 없는 정신계통의 환자와 신경계통의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공포의 세계, 불안하고 초조한 세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초조감과 불안감과 흥분된 심정을 갖고 일생을 거치시고 뜻을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운세가 그렇게 휩쓸린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방향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고, 참것이 거짓것 같고 거짓것이 참것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거짓이 우세하고 참이 열세가 되는 시대, 거짓이 번성하며 참이 말할 수 없이 미약한 상태가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거쳐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날이 끝날이라 할진대 세계적인 이스라엘로 나타난 기독교, 즉 제2 이스라엘을 수습해야 할 12사도는 어디 갔는 고, 12사도를 통솔할 하나의 주인공 메시아는 어디로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이 뜻있는 크리스찬들이 해결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6-185
끝날의 성도가 할 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사방으로 갈라졌으니, 이를 복귀하는 데는 오실 주님을 걸어 놓고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가 다시 이 땅에서 세계적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땅 위의 어느 곳에서도 겟세마네동산에서와 같은 기도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후에 남아진 사도들이 기도하던 그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 자기가 베드로다, 야고보다, 요한이다, 안드레다 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납니다. 까꿀잽이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이 열 두 사도와 같은 그런 지파의 반열이 없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우리는 12사도 중에서 사도 중의 사도인 세 제자 또 그 세 제자 중에서도 요한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1차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소원성취의 한날을 바라보시며 싸워나가시던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동반하고 기도하시던 겟세마네동산을 그리워하는 기도의 시간을 여러분 가져봤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는 데 세 제자는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한 그들은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서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모두 배반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무리를 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그렇게 가셨거늘, 그 심정을 체휼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유대교단 앞에 몰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원수를 대해 복을 빌던 것과 같이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는 하나의 모임, 하나의 무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들은 누구일 것인가? 그들은 이단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이단자예요. 그들은 예수님 같이 민족 앞에 반역자요, 주의와 사상에 있어서 이단자요, 기성관념의 파괴분자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나와야만 세계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갈 것입니다.

6-186
궁극적인 소망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
기성종교를 가지고는 여러분의 마음에 덮여 있는 모든 흑운을 제거하여 버리고 삶의 변혁을 가져오는 심령의 해방운동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어떠한 논리, 어떠한 철학적인 사상을 통해서도 심적인 변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들의 수단을 가지고는 몇 천년이 지나도 안 됩니다.

온 인류는 과학만능을 부르짖게 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세계평화를 건설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종교를 일으켜 세계만민을 구할 줄 알았더니, 하나님의 선민을 통해 잃어버린 만민을 구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당에 단 하나 필요한 것은 묵묵히 십자가에 달려 못박히면서도 인류를 위해 복을 빌던 그리스도의 성상입니다. 죽음을 초월하여 생의 애착을 버리고 자기의 소망 전체를 버리는 자리에서도 그 소망을 원수들 앞에 남기고 가신 그러한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 대로 오마’ 하시고 ‘알파요 오메가’라 하셨으니, 기독교의 종말시대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하나의 신부가 나타나야 할 것이고 12사도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한 데가 여기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기독교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온다 할지라도 까딱 잘못하면 옛날 이스라엘의 노정을 반복하는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걸은 전철의 노정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겟세마네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야 되겠습니다.

가슴에 사무친 천적인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빚어졌으니, 자신도 그런 천적인 심정을 품고 하늘을 위로하여 ‘제가 이런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을지라도 가겠사오니, 저를 받아 주셔서 그 심정에 사무친 원한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끝날의 성도들은 그러한 동지, 그러한 친구, 그러한 지도자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땅 위에 오셨던 예수님, 구하면 주실 수 있었고, 찾으면 찾아 주실 수 있었고, 두드리면 열어 주실 수 있었던 그 예수님을 다시 상봉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만민 앞에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성교단이 분열되는 현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이 생명의 발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뜻있는 지도자, 하늘의 심정을 품은 청년 남녀들은 분기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성세력을 대해 가지고 분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마 7:15)”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하셨는 데 그 거짓 선지자는 누구였느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대교단,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사회적인 발전상이 그런 코스를 밟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하라 하시고 외식하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어 쳤습니다. 또한 외식과 외형으로 흘러가는 유대교를 타파하는 데 선봉자로 나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골고다 산정에서 원수들을 대해 복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탄을 굴복시켜 사탄의 품에 있는 사람을 빼앗아 와야 했기 때문에 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사탄의 품에 있는 그들에게 소망을 걸고 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해당 세력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형식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뜻있는 지도자, 청년 남녀들이 있다 할진대 생명을 잃어버린 그러한 기독신자들에게 교회를 맡길 수 없다는 운동이 반드시 벌어질 것입니다. ‘목사, 장로들에게 교회를 못 맡기겠다. 우리 교회는 우리 교인 끼리끼리 맡자’ 하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때가 되거든 마지막인 줄 아십시오. 그때가 되면 마지막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시대가 지나고 장로시대가 옵니다. 이 장로시대에는 무슨 장로, 무슨 장로가 나와 날뛰게 됩니다. 이 시대가 지나면 집사들이 날뜁니다. 그 뒤 평교인들이 날뛰는 때가 오거든 그때가 끝날인 줄 아십시오.

역사를 더럽히고 배반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역사적인 지도자였던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지도자를 끌어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분명히 아십니다. 이제는 평민을 중심삼고 해방운동을 해야 할 때입니다. 제1차 대전 이후에는 상류계급이 출세했고,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중류계급이 출세했으며, 지금 때는 하류계급인 노동자 농민이 출세할 때가 왔는 데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지도자를 지도자로 믿지 말고 자신의 양심을 지도자로 삼아 가지고 다시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는 거예요. 어떠한 지도자를 앞에 놓고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하신 말씀은 천상에서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땅에 보내심도 천국에서 필요해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냥 그대로도 있을 수 있으되, 그가 땅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역사가 이러이러해서 망했기 때문에 하늘은 이 망한 역사의 원한을 풀기 위해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용자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새시대의 용자는 누구일 것이뇨.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사도의 심령에 불탈 수 있는 청년 남녀, 주님이 채찍을 맞는 것을 보고 쫓아가서 대신 맞을 수 있는 청년 남녀들입니다. 오늘날 부패한 이 기독교를 바라보고 자신의 몸이 찢기고 매를 맞더라도 책임지겠다는 청년 남녀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청년 남녀들이 단결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구하는 한날이 끝날에 찾아올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한국 교회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6-189
새시대의 용자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기독교의 단체는 많습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단체인 NCC, WCC등 외형적인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심정에 불타고 무지한 네로 황제의 압정하에서도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성도들, 그와 같은 하늘의 청년 남녀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하늘의 용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이 끝날에 실증적으로 벌어진다 할진대 크리스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문예부흥이 고대의 헬레니즘 문명을 복고하고 인본주의 사상을 개척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2천년 전의 기독교를 회상하여 예수님적인 신본주의 천국을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중간 다리가 필요없습니다. 지금의 때는 끝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뭐나장로, 박장로, 통일교회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영적으로 분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세계적으로 70문도의 역사시대가 옵니다. 역사는 복귀섭리 역사이므로 법도에 의해 다시 올라갑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니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70문도시대 다음에는 12사도시대가 옵니다. 한국에는 그러한 입장의 철학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가 사라졌습니다. 다음에는 3제자시대가 옵니다. 세 가지 형태의 대표적인 움직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6-190
여러분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노정이라 할진대 여러분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습니까? 예수님의 광야시대에 머물러 있습니까? 혹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자라던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까? 어느 곳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는 인간으로서 가야할 길을 가신 인간의 전형적인 생애였습니다. 인간의 표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의 40일 금식기간에 있습니까? 혹은 3년 공생애 노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혹은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혹은 십자가에서 최후의 생사를 판결짓는 그러한 길을 걷고 있습니까?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우리는 사도의 문인 기독교의 문,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거쳐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좁은 문을 찾아나서는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날 교직자와 교역자들은 오히려 좁은 문을 찾아가려는 성도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 어디로 가느뇨? 인간 세상을 잊고 영계에 들어갑니다. 영계에 들어가서 또 쉬지 않고 기도하면 어디로 가느뇨? 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더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과 성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야 할 미지의 행로, 즉 예수님이 가신 미지의 세계의 관문을 헤치고 나가야 할 기독교인들의 길은 막혀 있습니다. 사도들이 죽을 수 있는 자리까지는 안내했으나, 천국이 어떤 곳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이 어떠했다는 것까지는 해명해 주시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해명함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생애 동안 느끼신 심정을 체휼하게 할 수 있는 진리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나온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고 들어가신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그 자리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이 사명을 책임지기 위하여 전세계 앞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서 다시 땅에 나타나신 목적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걸으신 부활의 노정을 우리가 다 따라 걸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활 승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시고도 하늘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사망권내에 있는 인류를 찾아 나섰습니다.

6-191
우리가 가야 할 길
여러분도 은혜를 받고 하늘의 뜻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의 자리에 선다면 그때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칠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되겠습니다. 땅을 향하여 달음질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그러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부활하신 후에도 땅을 구해야 한다는 하나의 중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중의 배반자인 제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어떠한 민족, 어떠한 교단이 배반한 것보다 더 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반자 중의 배반자인 사도들을 다시 찾아 세웠기에 땅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노정을 다 간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그리고 부활한다면 부활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땅 위에 와서 해야 할 일을 다하여 자기가 머물 수 있고 자기를 증거할 수 있는 혈족을 만들어 놓고야 주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님이 그러했거늘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사무치는 은사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간에 노력하셨던 것처럼 6천년의 슬픔을 품고 핍박받으면서도 우리들 자신에게 필요한 천적인 기반을 찾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해도 그런 기반, 그런 환경적인 토대를 갖지 못한다면 신랑되신 그 주님 앞에 신부로서 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기반을 찾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이것은 선의 뜻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 뜻은 예수님이 바라신 뜻이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요, 성신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은 이루어야 됩니다. 그 뜻을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 뜻의 목적과 내용도 역시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까지 나아가려면 여러분들이 오늘 부활의 은사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은사를 입은 자로서, 땅 위의 사망권내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하늘 앞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하늘 앞에 세울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이라도 세워야 되겠습니다.

6-192
뜻이 지향하는 목적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12사도를 찾고 70문도를 다시 찾고 120문도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의 성신이 강림하여 하나의 교단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귀노정에도 먼저는 참부모님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아의 8식구가 있어야 되고 야곱의 12형제가 있어야 되며, 그 다음에는 70가족이 있어야 되고, 120친척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뜻의 기반이 종결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실천적인 제 2의 행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오늘날 믿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할진대,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산 예수의 형(型)이 되어서 산 사도와 같은 자를 세워야 되고, 산 70문도와 같은 자들을 세워야 되고, 120문도와 같은 산 교단을 세워 놓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비로소 천국건설운동이 벌어집니다.

성경 말씀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2-23)” 하였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 이외는 내 앞에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하시면서 천지법도를 찾으려 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에 맺힌 것이 무엇인가. 그 찾으려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 그 뜻을 이뤄 드리는 자만이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길을 보여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의 원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예수님의 목적체로서 하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만 예수님의 본을 받아 그의 뒤를 따라가는 자가 될 것이요, 그의 뜻을 이룬 신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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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아버님! 지금까지 저희들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사옵니다. 역사적인 뜻도 몰랐고, 시대적인 뜻도 몰랐으며, 개인의 생애와 생활에 대한 뜻도 몰랐사옵니다. 그러나 황공하옵게도 역사적인 뜻을 알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시대적인 심정, 생애적인 심정, 생활적인 심정, 시간적인 심정까지도 가르쳐 주신 은사에, 아버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이 심정을 품고 저희들은 사도의 문을 거쳐야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고비에서 싸워 이겨 부활의 은사를 얻고도 남을 수 있는 자가 되어 다시 땅 위에 부활된 선의 종족을 남겨 열매를 맺게 해야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을 알고 있사옵니다.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 찍어버린다고 하셨사오니 선한 나무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선한 나무가 되어서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도 선한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2천년 동안을 싸워 나오셨사오니, 오늘날 저희도 부활의 은사를 입어 선한 나무로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땅 위에 그 씨를 뿌려 놓고 갈 줄 아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이것이 땅에 찾아오신 아버지의 목적이요, 이것이 아버지께서 싸워 나오신 내용인 것을 알고 그 뜻, 그 목적, 그 내용에 사무쳐 살 수 있고 싸울 수 있고 아버지를 붙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기신 뜻을 다 이루고 달려갈 길을 다 가서 주님을 위로할 수 있으며, 아버님의 위로할 수 있는 최고의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