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 to 6-35: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
1959.03.15 (일), 한국 전본부교회

6-07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
열왕기상 19:1-21

[기 도(Ⅰ)]

오늘, 당신이 허락하신 날을 맞아 부족한 자신들을 염려하면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존전에 모였사오니, 이제 저희의 마음들이 어느 곳에 있는 가 통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생명의 길을 개척해 오신 노정은 지극히 엄숙한 노정이었고, 지극히 성별된 노정이었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여기에 존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 주시옵고, 허락하신 승리의 기준을 세우시어 성별된 무리라 인정해 주시옵고 찾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겨진 섭리의 노정이 슬픔의 노정이라 할진대, 이 슬픔을 가로막아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하늘의 무한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그 슬픔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남겨진 하늘의 슬픈 심정과 남겨진 하늘의 싸움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남겨진 하늘의 슬픈 심정과 싸움을 책임질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큰 슬픔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며, 누구보다도 억울한 자리의 싸움터에서도 낙오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몸들이 하늘 앞에 바쳐지는 승리의 제물이 될 수 있는 가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이 시간 참석한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님께서 왔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하였사오나 예수님이 갈보리산상에서 쌓으시던, 하늘이 함께 우시던 참다운 승리의 제단은 이 땅위에 나타나지 않고 있사옵니다. 하늘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땅 위의 인간들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 하늘과 땅이 접하는 세계적인 골고다산정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사옵고, 겟세마네 산정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하늘이 찾아와 기뻐하실 수 있는 무리가 없는 것을 알면 알수록, 아버지의 심정을 염려하는 아들 딸들은 이 땅을 바라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소원의 한날을 고대하시는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이 크면 클수록 아버지를 위하여 충성하는 한 모습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심정도 크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다 드려서 아버님의 손길에 붙들릴 수 있으며 아버님의 심중에 세워질 수 있는 아들 딸이 되어서 역사적인 모든 서러움을 맡을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통하여 저희의 마음과 몸이 새로이 부활되는 이 시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희들에게 맡기신 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눈물어린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저희 한 개체들을 찾아오시기 위해 당신께서 수고의 걸음을 개의치 않으신 사실을 망각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각자 과거의 모든 부족한 것을 깨닫고,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하고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 나설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이들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옵고, 이들의 생명을 부활시키는 주인이 되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이들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옵소서. 이들이 아버님을 떠나서는 움직일 수 없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교단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민족 앞에 허락하실 축복을 이 시간을 통하여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승리의 한날을 책임진 당신의 아들 딸들, 그 사명과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이 민족에게 있음을 아옵니다. 그 책임을 완수해 나가는 과정에는 무한한 시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시련의 노정에서도 책임을 다하여 아버님을 대신하여 나설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뜻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인류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생명과 사망의 물결이 휩쓸려 가는 이때에 아버님을 붙들어 당신의 아들 딸이 될 수 있는 무리가 이 인류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류를 심판의 채찍으로부터 피하게 해 주는 전체의 책임을 감당하여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는 아들 딸이 이 땅의 인류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사명과 이와 같은 때와 이와 같은 책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할진대는 저희를 통하여 경고시키시옵고, 그들이 끝날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지방에 널리어 외로운 심정을 품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무리들 위에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허락하신 승리의 한날을 찾아 세우기 위한 싸움의 도중에서 떨어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붙들어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어둠의 권한이 움직이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6-10
기 도(Ⅱ)
뜻을 위하여 이 땅 위의 많은 사람들이 수고의 길을 거쳤사옵고, 피눈물의 혈투를 거듭해 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은 하늘 앞에 그 피의 결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고, 남겨진 섭리의 터전 위에 승리의 깃발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한 시간, 저희 자신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저희의 것이 아니요, 움직이고 있는 저희의 생명도 저희 것이 아니요, 바라고 있는 욕망도 저희 것이 아니므로 저희 자신을 중심으로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대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것으로 시작된 저희들이오니 아버지 것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 것이 되어야 되겠고, 저희의 몸도 아버지 것이 되어야 되겠고, 저희의 주의 주장도 아버지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용납하지 마시옵소서. 저희의 마음 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는 악의 요소가 있사올진대 제거해 주시고, 아버지 것이 아닌 모든 주의 주장을 제거해 주시어서 오직 아버지 것으로서만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시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 위에 아무리 잘난 자가 있다 할지라도 하늘을 대하여 설 자가 누구이옵니까? 어떤 변명의 조건을 갖고 아버지 앞에 나타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으로 뉘우쳐야 할 저희들이요, 죄악의 역사에 젖어 있는 저희 자체들이요, 역사적인 죄악 위에서 사탄의 제물이 되었던 저희 자체들인 것을 깨달을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저희의 것이 되어야 하고, 저희의 몸이 저희의 것이 되어야만 하는 데, 사탄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것을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것을 통분히 여기는 통회의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자기를 깨닫고 자기를 발견하여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무수한 사탄이 저희의 마음과 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사올진대, 아버지시여! 나타나시어서 능(能)의 권한으로써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 앞에 굴복할 수 있게 하늘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움직이실 때 땅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사옵고, 땅이 하늘을 대하여 요구할 때 하늘이 이루어 주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진정한 마음을 갖고 참다운 심정으로 하늘을 자기 것으로 붙들기 위해 싸우는 하늘의 아들 딸이 있사옵니까. 하늘의 모든 사정을 자기의 사정으로 알고, 하늘의 일을 자기의 일로 알고, 하늘의 이념을 자기의 이념으로 알고 이것을 붙들기 위해 싸우고, 이것을 붙들기 위해 천대받고, 이것을 붙들기 위해 몰림받으면서 한평생을 산 자가 있사옵니까? 저희가 그런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할진대, 저희는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범죄자인 것을 직고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저희들은 알지 못하고 있사오나, 하늘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선열을 보내시어 피의 제단을 쌓게 하셨사옵고, 이 민족에게 충신 열사들을 보내시어 민족의 갈 방향을 잡아 주셨사옵니다. 그러기 위해 어느 지역을 개의치 아니하셨고 민족을 초월한 어떤 영역까지라도 내적으로 섭리해 나오신 아버님의 수고가 있었음을 잊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이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성심을 기울이셨사옵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사옵고, 어떤 희생도 각오하시고 저희들을 찾아주셨사온데, 이러한 아버지의 은사 앞에 면목을 세우지 못하는 뻔뻔스런 아들 딸이 되지 말게 해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하늘이 계신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알았사옵니다. 아버님과 저희는 어떤 인연을 맺어야 할 필연적인 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오늘 이와 같은 심정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아버지의 서러움을 내 서러움으로, 아버지의 통탄과 슬픔을 내 통탄과 슬픔으로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과 격전을 벌이기 위해 나서는 천적인 행군이 이 민족 앞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동안 하늘을 대하여 참소하던 원수 사탄들을 이 지구상에서 몰아내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찾으시던 이상동산을 어서 속히 건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민족이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여 주시옵고, 교단이 가야 할 방향을 밝혀 주시옵고, 참다운 아들 딸들이 가야 할 길을 명시하여 주시옵소서. 혼돈하고 혼란하여 흑암권세에 사로잡혀 들어가는 역사적인 슬픔의 때가 온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때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세워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류를 대해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께는 슬픔이 걷힐 새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을 회고하여 볼 때, 그는 남 모르는 눈물도 흘렸사옵고, 남 모르는 굶주림의 생활도 했사옵고, 남이 모르는 핍박의 노정에서 서럽게 우셨던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걸음을 걸으셨고, 그 뒤를 따른 수많은 성도들도 피의 길을 개의치 않고 걸었고,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싸워나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하늘을 향하여 경배드리고 산 제물을 드려 축복을 받아야 할 끝날이 가까와 오고 있사옵고, 생명 전체를 드려 하늘의 영광을 노래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사온데, 하늘 앞에 산 제물을 드릴 당신의 아들 딸들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송영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은 어디 있사옵니까? 그러한 모습들이 어디 있는 지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슬픈 일이 있다면 당신의 상대를 찾지 못한 것이요, 영광의 한 실체를 찾지 못한 것인 줄 아옵니다. 이러한 하늘의 서러움이 오늘 저희들이 움직이는 발자취를 통하여 천추만대의 후손에게까지 연하게 될까봐 두려워 떠는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게,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무엇을 바라고 나왔사옵니까? 무슨 뜻을 바라고 나왔사옵니까? 이들이 가야 할 곳은 이 자리가 아니고 아버지의 집이옵니다. 이들이 머물러야 할 곳은 아버지 마음의 중심자리이온데, 아버지의 보좌 위에 앉은 자가 있사옵니까?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될 자가 있사옵니까? 저희들이 그러한 모습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저희들은 억천만 사탄의 조롱거리와 제물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마음 모아 아버지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성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산정까지 가야 하고, 십자가의 피흘린 자리까지 나아가 핍박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슬픔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오늘도 내일도 이 골고다의 길을 가기에 전력을 다하는 무리를 하늘이 찾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의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고, 민족을 대신하여 나타난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형제가 형제를 물어뜯는 이 때이옵고, 식구와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되어 천륜을 배역하고 인륜을 파탄시키는 이 때이옵고, 하늘을 부르는 무리들이 또한 하늘을 부르는 자를 농락하고 잡아 먹기에 굶주린 사자보다 더 허덕이고 있는 실정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서러움을 아는 자는 통곡해야 할 이 때요 탄식해야 할 이 때이온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민족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참길을 찾아 헤맨다 할진대 그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요, 참다운 살 길을 찾아 헤맨다 할진대 밤낮을 개의치 않고 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온데, 삼천만 민족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운명을 책임진 자 그 누구이며, 이들을 대신하여 하늘의 슬픔을 체휼하는 자 그 누구이옵니까? 이들의 운명을 책임질 자도 없사옵고, 하늘의 슬픔을 풀어 드릴 자도 없사옵고, 하늘의 탄식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자도 없나이다. 그러한 자가 나온다 할진대 하늘의 슬픔은 땅에 사무치지 않을 것이며, 하늘의 심판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오늘 이 시대에 슬픈 심정을 토로하시던 예수의 슬픔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역사적인 예수로만 아는 것은 필요 없사오며, 우리의 환경 속에서 현재적인 예수를 알아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그 높고 존엄하신 심정 앞에, 그 사랑 앞에 저희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오직 그 하나의 심정에 사무쳐 죽든지 살든지 하늘만을 향해 울부짖는 무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무리는 이 땅 위에서 몰릴 자들이요, 교단 앞에 버림받을 자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이 그와 같은 자리를 사수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하늘의 슬픔이 이 민족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신의 편안함을 좋아하는 저희들이옵니다. 저희는 일신의 편안을 누리기 이전에 하늘의 슬픔이 있고, 자신이 싸우기 전에 이미 하늘의 싸움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무리들이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이옵니까? 어떠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옵니다. 어떠한 친구를 사귀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옵고, 어떠한 학식 있는 자를 만나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를 만나기 위함이요, 아버지의 슬픔을 알기 위함이요, 아버지의 십자가를 맡기 위함이옵니다. 이를 싫어하는 자, 아버님이시여! 여기서 제거시켜 주시옵고, 이 일을 책임지지 못할 자, 성별시켜 주시옵소서. 최후의 성벽을 지키기 위해 사탄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자신은 하늘을 위해 쓰러질 줄 아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찾아들어온 이들은 남이 모르는 슬픔을 체휼해야할 뿐만 아니라 남이 모르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들의 사정을 아버님께서 이렇게 만드셨을진대는 이들의 사정을 책임져 주시옵고, 이들의 환경을 이와 같이 만드셨을진대 그 환경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책임지신 아버님은 변치 않으셨사오나 변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시고 당신이 탄식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마음은 한분의 마음으로 나타나 4천년 역사를 통합하기 위한 심정의 기준을 세웠지만, 인간들이 그것을 유린하고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인류는 처참한 상태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이들의 슬픔이 아버지의 슬픔임을 알지 못하는 이 땅 위의 수많은 인류를 , 아버지, 돌이켜 주시옵소서.

이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제단을 쌓을 줄 아는 외로운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야곱도 광야노정에서 슬픔의 제단을 쌓았고, 모세도 그리하였으며, 엘리야도 그리하였음을 알고 있나이다. 하늘의 뜻을 책임졌던 우리의 선조는 어느 한 사람도 그런 노정을 걷지 않은 자가 없었던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의 전통을 물려받는 저희들이 되고자 하오니, 남겨진 제단을 쌓고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아 아버지의 지성소를 갖추어서 아버지를 모실 줄 아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아버지, 당신께서 허락하실 축복이 있사옵니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못하다면 아버님의 슬픈 심정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기의 죄상을 폭로하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일으켜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한국 교계가 나가는 길을 염려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몰림받고 있는 무리들의 사정을, 아버지, 알아 주시옵고, 쫓김받아 탄식하고 슬퍼하는 무리들을 알아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최후의 승리의 한날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넘고 가야 할 과정에서 허덕이면서도 꾸준히 걸어가는 수많은 인류에게 광명의 새아침을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아버지 앞에 충성하지 못했다 할진대 머리 숙여 아버지 심중에 찾아 들어갈 수 있는 간절한 심정과 흠모와 사모의 열이 충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심정권에 들어갈 수 있어서, 아버지의 긍휼의 은사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인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도 이 시간 같은 은사로 품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6-16
말 씀
하나님께서는 타락의 역사가 시작된 후 기나긴 세월 동안 무수한 수고를 개의치 않으면서 택한 이스라엘을 붙들고 나오시다가 3천년 만에 그때의 이스라엘민족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크나큰 소망과 기대를 갖고 사울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 때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즉 사울을 세워 이루려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솔로몬왕 때까지 120년간이다 연장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6-16
분열하여 이방신을 섬기던 유대민족
솔로몬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성전을 짓고 그의 민족을 통솔하여 성전과 하나되게 해야 할 천적인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사탄으로부터 농락받는 입장에 내주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결국 솔로몬왕이 죽은 후, 여로보암왕과 르호보암왕에 의해 이스라엘(북조)과 유대(남조)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지도자가 나와서 그가 좌 하면 같이 좌 하고, 그가 우 하면 같이 우 해야 할 택함받은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께서 수고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이끌어주시던 민족이, 하늘의 이끌림을 받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늘의 소망과는 달리 남과 북의 두 왕조로 갈라졌던 서러운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 전체는 하늘편에 서서 하나의 제단을 중심삼고 하늘과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하란을 향해 갈 때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셨고,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얍복강을 건너기 전 길르앗산에서 돌무더기를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라반과 약속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늘로부터 축복을 받아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권한을 행사하실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로서, 하나의 주권민족으로서 하나되어 성전을 받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천적인 사명을 저버리고 12지파는 북조 10지파와 남조 2지파로 갈라졌습니다. 이 서글픈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피눈물의 3천년 역사와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면서 죽다 남은 무리요, 몰리다 남은 무리요, 천대받는 서글픈 노정에서 남아진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을 유린하였던 수많은 이방민족과 하나님의 뜻을 배신한 수많은 사탄들을 원망하고 원수시하여야 할 입장을 망각하고 동족끼리 혈투전을 벌였습니다. 이런 서글픈 사실을 저끄러 놓은 이스라엘과 유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는 가를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로 가나안복지에 들어간 이스라엘민족은 솔로몬왕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대로 갈라져 서로 다투었고,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 나오신 하나님은 슬픔에 사무치게 되었고, 그 사무친 슬픔은 역사를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연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서러움은 어디로 갔으며, 민족적인 서러움은 어디로 갔으며, 더 나아가서 천적인 서러움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이러한 조건들이 여러분의 심정을 싸고 돌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조건들이 하늘을 찾아나가는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초월하여 우리의 갈 방향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몰랐습니다.

6-17
소명받은 엘리야의 마음
이러한 처참한 환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은 길르앗땅에 살고 있는 농민 가운데에서 엘리야라는 사람을 찾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있었고, 10지파의 족장도 있었으나 다 제쳐놓고 길르앗땅에서 한갖 농민 생활을 하고 있던 엘리야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슬픈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국가를 지배하면서 하늘의 성전을 거쳐야 할 이스라엘 왕은 그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하늘을 배척하고 원망하며 민족을 유린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원수인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민족 앞에 내세우고 섬겼습니다. 이런 아합왕을 하늘이 얼마나 증오하셨겠는 가를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증오의 심정을 억제하실 수 없어서, 택한 백성이 사탄의 유린을 당하는 것을 보셔야 하는 슬픈 심정을 억제하실 수 없어서 그 서글픈 사정과 심정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택함받은 사람은 나라의 왕도 아니요, 황족도 아니요, 어떤 족장도 아닌 평민 엘리야였습니다.

하늘은 찾아야 할 자를 찾지 못하고, 가져야 할 자를 갖지 못하고, 거느려야 할 자들을 거느릴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안타까운 심정을 붙안고 왕으로부터 족장들과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으나 찾지 못하고, 그 시대의 민족적인 슬픔과 천적인 슬픔을 알고 염려하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며 울부짖는 하나의 모습을 찾아 세우셨는 데, 그가 엘리야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엘리야였습니다. 여러분! 그 엘리야를 회상해 보십시오. 엘리야는 종족의 후원을 받았던 사람도 아니요, 자기를 옹호하고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옹호해 주는 환경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심정을 알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나타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대하고 바라보고 거한 환경은 아합왕의 주권하에 있던 원수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하늘의 불림을 받은 엘리야는 죽더라도 이 민족을 붙들고 죽겠다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했습니다. 죽더라도 민족적인 섭리역사노정에서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하였던 선지선열의 전통을 존중하고자 했던 엘리야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을 염려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민족과 역사를 대신하여 눈물을 흘린 엘리야였음을 여러분은 회상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이러한 엘리야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입니다.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 이런 내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3천여년의 슬픈 심정을 대신하여 엘리야를 찾아 주셨습니다. 즉,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으며 느낀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당신께서 손을 들어 이스라엘이라 축복해 주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염려하신 하늘이신 고로 야곱 이후 엘리야 때까지 1천여년의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섭리해 내려온 심정을 붙안고 엘리야를 찾아주셨던 것입니다.

6-19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신 심정과 책임자로 세우신 방법
원수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민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엘리야를 세우신 하나님에게는 슬픈 반면 소망스러운 면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이스라엘민족이 아합왕과 그의 왕비 이세벨과 함께 이방의 바알신을 숭배하고 아세라 우상을 만들어 더렵혀져가는 것을 보시고 슬픔을 참으실 수 없어서 엘리야를 부르실 때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이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 옳소이다. 당신이 원하시는 그 길을 제가 가겠나이다. 당신이 부르시는 뜻을 제가 책임지고 가겠나이다’라고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아닌 평민이로소이다. 하늘이시여, 저보다 훌륭한 족장도 많고, 왕도 있고, 왕족도 있으며, 수많은 이스라엘민족이 있사온데, 저같이 미미한 것을 찾아주신 일은 어인 일이옵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양심을 가진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염려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사심 없이 하늘 앞에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시기로 보아 그 민족 전부를 찾아 세울 수 없고 엘리야가 아니면 안 될 것을 아셨던 연고로 엘리야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그 사명을 당장에 하도록 명령하여 몰아친 것이 아니었고, 그 환경을 정리시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충격을 주어 자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아합왕에게 나타나게 될 때, 하늘은 ‘아버지의 명령이니 제가 당장 하겠나이다’ 하는 순간적인 결심을 하게 했던 것이 아니라,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갈 수 없는 환경에 부딪치게 하시고, 자기의 처참함과 민족의 처참함이 더해 가는 것을 알게 하셔서, ‘민족 대신 제가 죽겠사오며, 종족 대신 제가 죽겠사옵니다’ 하는 각오를 갖게 한 이후에 싸움의 책임자로 내세웠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20
노아와 마리아의 신앙자세
우리의 조상인 노아도 그러했습니다. ‘120년 후에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리니 너는 방주를 지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나가면서 노아는 내적인 싸움노정에서 하늘을 의심할 수 있는 때도 많았을 것이고, 자기 자신의 미약함을 탄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일 때도 많았을 거예요. 그러나 노아가 그런 입장에서면 설수록 마음에 사무친 것은 이 땅 위의 인간들이 물에 쓸려가는 심판을 받을 날이 가까와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마리아를 보십시다. 그녀는 순결한 처녀요, 이스라엘민족을 누구보다도 깊은 심정으로 염려하였던 이스라엘의 참다운 여성이었습니다.

하늘이 수천년 전부터 약속하였던 우리의 지도자 메시아는 언제나 올 것인가하며 메시아를 고대하는 심정이 이스라엘민족의 어느누구보다도 강한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마리아였습니다. 이렇게 메시아를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민족을 대표한 마리아의 심정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였으나 하늘은 알았습니다. 이런 심적 기준을 마리아는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의 심적 기준은 민족을 대신하여 원수를 쳐부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의 서글픔을 청산하기 위해 싸움의 용자로 나서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심정, 당시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민족의 배후에 슬픔의 역사노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심정, 택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처참한 실정을 통탄하는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나야 할 늠름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 모습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눈물 흘리고, 뼈에 사무치는 심정을 품고 있다는 그 공적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역사적인 심정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연고로, 예상치도 않은 때에 천사가 현현하여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눅 1:31)”라고 청천벽력과 같은 통고의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저하며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눅 1:34)”하니, 천사가 다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리라(눅 1:37)”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천사의 이러한 말을 듣고 마리아는 서슴지 않고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늘의 심정과 인연 맺으려 했던 마리아의 심정은 간곡하였고, 자신의 생애가 파탄되고, 끝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입장에 처했지만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말이 퍼지게 되면, 그 당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 당장에 돌에 맞아 죽어야 하고, 민족으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하고, 종족으로부터 용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이스라엘민족 가운데 어느누구 한 사람 자기를 환영해 주지 않을 것이지만 마리아는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슬픔에 사무쳤던 내적 심정과 실제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거기에서, 마리아는 역사적인 주인공이요, 시대적인 주인공이요, 미래적인 주인공이요, 세계적인 인류의 주인공인 메시아를 탄생시킬 수 있는 모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6-21
엘리야의 눈물과 충절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 앞에 엘리야는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늘이 그를 찾으실 때까지 엘리야는 남이 알지 못하는 눈물을 흘린 눈물의 왕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왕보다도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린 눈물의 왕자였습니다. 불쌍한 처지에서 눈물을 흘린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흘린 눈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린 눈물이로되, 하나의 평민이었지만 엘리야가 자신의 환경과 위신을 잊어버리고 흘린 눈물은 자기 자신을 넘어선 눈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이 이끌어주신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는 가’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컸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애급고역 4백년을 거쳐 광야의 40년 노정에서 60만 대중을 잃어버리고 남아진 민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국가를 이룬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의해 이런 일을 당하고 원수에게 농락을 받으며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권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사무친 슬픔을 가졌던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누구보다도 하늘을 향하여 정성을 많이 드렸습니다. 그러한 엘리야만이 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었기에 하늘은 그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하늘 앞에 불리움을 받은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엘리야야, 엘리야야’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어인 연고입니까? 이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요,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황공해 하며 크나큰 뜻 앞에 나서게 될 때 하늘은 ‘내가 있으니, 가서 아합왕에게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그 말씀에 엘리야는 하늘을 대신하여 아합왕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방나라에서 온 왕비 이세벨을 통하여 들어온 바알과 아세라 목상으로 말미암아 오래 안 가 심판날이 다가올 것을 염려했던 엘리야요, 다년간 하늘의 슬픔과 민족을 부둥켜안고 슬퍼했던 엘리야였던 고로, 하늘의 명령에 ‘아버지여, 민족이 살 수 있다 할진대는 이 몸이 제물되어 그 일을 단행하겠나이다’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같이 하늘의 명령을 받고 나서, 아합왕을 향하여 출발한 그날부터 엘리야의 생활에 기쁨이란 명사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보는 것도 예상치 않은 현상을 보아야 했고, 듣는 것도 생각지 않은 것을 들어야 했고, 먹고 입고 눕는 환경도 편치못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이방신을 숭배하면 망하게 될 것이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아합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도망쳐 그릿개울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야의 심정 역시 무한히 슬펐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몰랐던들, 그에게는 누울 수 있는 집이 있고,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고, 형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살 수 있는 땅도 있었을 것이요, 자기를 인정해 주는 환경도 가졌을 것이로되, 하늘을 붙들고 나선 그날부터 그는 생각지도 않던 계곡에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하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아합을 원망하였고, 민족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이세벨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쫓기고 몰림받는 환경에서 하늘에 대한 충절의 마음이 없었다면, 엘리야는 그런 환경을 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의 환경이 조여오면 조여올수록 더욱더 하늘의 슬픔을 붙들고 민족을 붙들었습니다. 하늘을 붙들고 슬퍼하는 생활이 잠시 동안 기쁨을 느끼는 생활보다 큰 것을 아는 엘리야였던 연고로 역사적인 선조들의 공적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개의치 않고 하늘 앞에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엘리야는 , 형제가 생각해 주는 이상 하늘이 자신을 생각해 주시고, 친족이 염려해 주는 이상 하늘이 염려해 주시고, 부모가 염려해 주는 이상으로 하늘이 자기를 염려해 주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언제나 지나고 난 후에 하늘의 심정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을 찾아나가는 슬픈 사정입니다.

6-23
엘리야의 중요 행적과 고난
엘리야는 그릿개울에 피신해 있는 그 환경에서도 각오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물리치고 이스라엘민족을 구하기 위해 피신해 있던 엘리야의 애달픈 심정을 사람들은 몰라주었지만, 까마귀가 찾아와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굶주리는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하늘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무리들을 찾겠다고 다짐하던 엘리야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민족으로 인해 하늘의 슬픔이 사무쳐 있고 그 사무친 심정이 가해져 심판날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늘의 뜻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하나의 동지를 엘리야는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만큼 자기 앞에 나타나는 동지들을 사랑하고 싶고, 하늘을 사랑하는 만큼 자기 앞에 나타나는 동지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무쳤던 엘리야였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의 마음이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이요,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무리를 포섭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하늘과 인간을 인연 맺게 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이런 심정이 있었던 연고로 하늘은 그를 택하셨고, 그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한번은 굶주린 엘리야가 하늘의 인도로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떡을 얻어먹게 되었는 데, 그 불쌍한 엘리야를 협조해 준 과부는 자기가 먹다 남은 밀가루로 떡을 해 준 것이 아니라 한 끼니밖에 먹을 수 없는 밀가루를 가지고 떡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 후 사르밧 과부는 식량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물 때 병들어 증세가 위중하던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과부는 그 아이를 붙들고 엘리야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 과부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엘리야가 하늘 앞에 기도를 하니 죽었던 어린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또, 갈멜산 꼭대기에서는 바알신의 선지자와 아세라신의 선지자 8백여명을 잡아 죽였는 데, 이것은 거짓신과 참신을 갈라 세우기 위한 일대 싸움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민족을 사랑하시는 연고로 자신을 부르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심은 원수를 미워하는 당신대신 싸워달라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예요. 민족을 대신하여 불렀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선지자들을 대해 싸울 수 있는 책임자로 부르신 것을 알고, 엘리야는 물에 적셔진 제단을 하늘이 불을 내려 타게 할 때, 바알신의 선지자와 아세라신의 선지자 8백여명을 잡아죽였던 것입니다. 이 일이 끝난 후에 흉년과 굶주림으로 비탄 중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을 불쌍히 본 엘리야는, 갈멜산 산정에 올라가 생명을 걸어 놓고 하늘 앞에 일곱번이나 거듭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합왕이 돌아가기 전에 비가 내리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자기들이 섬기고 있는 바알신 거짓신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뉘우쳐서 엘리야의 뒤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엘리야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군중에 들어가 이세벨에게 그 일을 상세히 고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네가 칼을 들어 베어 버린 바알의 선지자와 같은 운명에 놓이리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유대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곳에 사환을 머물게 하고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정도 더 나아가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늘 앞에 제단을 쌓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소망하였던 유대땅으로 갔으나 갈 길이 막혔습니다. 허락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택함받은 것을 안 엘리야는 수많은 역경과 수많은 싸움의 노정을 거치면서 수고할대로 수고하였으나 그 실적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땅으로 도망해 갔으나 갈 길이 막힌 엘리야는 무릎을 꿇고 ‘하늘이여, 당신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렸기에 저를 세우셨사오나, 하늘을 찾고 하늘을 대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진 자를 찾을 수 없고, 또 저들이 저를 잡으려 하오니 저는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사옵니다.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6-25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섭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믿고 불러 세우신 목적을 이뤄 드리기 위하여 수고하며 민족을 이끌어 나온 엘리야가 몰리는 슬픈 자리에서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늘은 더 가중된 슬픔을 느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쫓김받고 몰림받아 피신해 있는 엘리야를 수많은 이스라엘민족보다도 더 귀하게 느꼈고, 이스라엘 땅에 둔 소망보다도 더 큰소망을 그에게 두셨습니다. 지칠대로 지치고 소망도 끊어진 채 그 나아갈 방향도 가릴 수 없는 광야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려 줄 것을 호소하였던 엘리야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민족을 이끄신 하나님, 엘리야를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하셨던 하나님, 엘리야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여러 모양의 이적으로 도와 주시고, 집에서부터 그를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이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유대땅에도 머물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엘리야는 40주야를 걸어서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에서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신 산, 그의 조상들이 하늘과 인연을 맺었던 시내산 가까이에 있는 호렙산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국경을 넘어야 할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도망가는 엘리야의 갈 길이 멀고 또 그가 가는 길에 친구도 없고 동정자도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통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한병의 물을 주며 먹으라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다시 힘을 얻어 하늘의 슬픔과 민족의 슬픔을 품고, 원수를 갚기 위한 적개심을 품고, 슬픔의 땅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달음질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대로 호렙산을 향하여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렇게 40주야를 걸어 호렙산의 어느 굴에 가서 잠을 자는 엘리야는 패잔병과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길을 이탈한 후 자기 일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하여 굴 속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를 하늘은 또 찾아 주셨습니다.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하자, 엘리야는 ‘하늘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나는 선조들보다 약한 자외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고 있던 엘리야를 산에 세워 놓으시고 여러 모양으로 권고하셨습니다. 강한 바람으로, 혹은 지진으로, 혹은 불길로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엘리야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는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예언자들이 모두 저들의 손에 죽고 이스라엘민족 앞에 나만 남았나이다.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몰리고 몰리는 이 자리에서 저는 어이 하오리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이 아합의 수중에 있으나 그 가운데 할례를 지키며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7천여 무리가 있으니 이들을 어찌할 것인고’라고 하셨습니다. ‘아합왕의 수하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 바알에게 굴하지 않는 7천여 무리는 어찌할 것인고……’이것이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서러운 심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다시 결심하여 하늘의 명령대로 다메섹으로 돌아가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발걸음을 돌리며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남은 7천여 무리를 하늘이 염려하신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섭리의 뜻을 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수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피눈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몰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슬픔과 통분함과 억울함의 자리는 누구 때문에 생기게 되었는 고. 민족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6천년의 원수인 사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치밀려 들어오고 핍박의 폭풍이 휩쓸려 들어오는 사정에 놓여지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을 살리기 위함이요, 하늘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늘 뜻을 대하는 사람들도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6-27
십자가상에서도 하늘을 염려하고 원수를 사랑한 예수
예수는 교단으로부터 몰림받고 민족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교단의 이단자로, 율법의 파괴분자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종족에게 몰렸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 일당한테도 몰렸습니다. 광야에 나갔으나 거기서도 사탄에게 몰렸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전체가 동원하여 십자가의 길로, 골고다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반역자로 내모는 민족을 위하여 오히려 눈물을 흘린 예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어떤 제사장보다 그들을 위해 더 피눈물을 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어느 한 사람도 자기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없었으되 예수는 그 시대의 친구였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림받았으되 민족의 충신이었고, 교단의 이단자로 몰림받았으되 교단의 충신이었습니다.

그의 걸음은 어떠한 걸음이었느뇨. 찢지고 몰리고 쓰러지는 , 십자가를 진 처참한 걸음이었습니다. 그 길 뿐이었습니까? 무모한 악당들이 채찍을 들어 내모는 사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만일 예수가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또다시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세 제자를 뒤에 놓고 기도하게 될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정도 딱 하나 자기 일신은 민족의 제물이요, 인류의 제물이요, 천륜의 제물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신 예수는 자기의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나타났으나 민족 앞에 배반받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것인가 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늘의 황태자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가 처참한 십자가의 운명이 웬일이뇨? 하고 탄식하려면 이 우주를 동원하여 탄식할 수도 있었으나 탄식할 수 없는 자기 자신임을 느끼셨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면목없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교단을 규합시키고 민족을 규합시켜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아버지 품에 안겨 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졌던 예수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원망할 어떤 무엇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이 잔을 피하게 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도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이 가중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쓰러지면 후대의 세계 인류 앞에 가중될 십자가가 남아지고, 그로 인해 슬픔의 역사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골고다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죽음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골고다의 길을 가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골고다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뿐만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 남아질 것을 아신 예수였다는 거예요.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자리, 가시 면류관을 쓰는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이것이 자기에게서 그쳐지지 않을 것을 아시고도 예수는 하늘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 십자가의 길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울며 염려하는 마음의 호소가 하늘과 통했다는 것이에요.

예수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앞에 저끄렸던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산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던고. 죽어가는 예수의 그 모습, 하늘을 염려하며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실 때, 인간세계에 분함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이요, 하늘의 4천년 역사노정에 분함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장에 노아 때 이상의 심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예수가 민족을 붙들고 죽고 교단을 붙들고 죽고 십자가를 붙들고 죽은 연고로, 하나님은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심적인 인연이 후대의 인간, 남아진 이스라엘민족과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반하는 후대의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어 나오고 계십니다. 배반하는 후대의 교단을 붙들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6-29
우리가 해야 할 일
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이제 이런 하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런 심정으로 하늘을 대하기를 고대했고, 이러한 생애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의 종족이요, 예수의 후계자요, 예수의 위업을 상속받아야 할 우리, 하늘 앞에 영광의 실체라고 자랑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할 우리, 이런 사명과 책임을 짊어지고 천적인 기대 앞에 선 오늘날 우리는 이제 무엇을 찾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예수의 친구가 되고 예수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으므로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 앞에 맺혀지게 하였던 역사적인 한을 풀어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탄식의 인연을 우리 후대에 남기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싸움의 노정을 죽음의 골고다로 남기지 말고 승리의 골고다로 남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책임을 질 자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끝날의 사명이 믿는 신도들에게 있다 할진대, 심판의 날을 고대하고, 부활의 주를 찾아 영광의 터전에 서기를 바라는 우리는 예수의 심정과 노아가정을 대했던 하늘의 슬픈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 앞에 세워진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끝에 홍수심판을 면하게 될 때, 하늘은 남아진 노아의 여덟 식구를 통하여 그 동안의 원한을 다 풀고자 하셨는 데,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재탄식의 조건이 남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노아가정의 슬픔을 다시 풀어줄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의 실수로 말미암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땅을 떠나 애급으로 들어가 4백년의 고역시대를 거치게 됩니다.

하늘은 이스라엘민족을 가나안복지로 복귀시키기 위해 모세를 세워 수고케 하셨으나 그 복귀노정에서 이스라엘민족은 여러번 하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뜻을 대하여 나오고 있으나 하늘이 ‘오냐, 네가 뜻을 다 이루었다, 내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칭찬과 축복을 받은 무리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선조들로 인하여 슬픔의 심정에 사무쳤던 하늘의 마음까지 여러분들은 알고, 오늘 드린 말씀과 같이, 아합왕 앞에 갖은 핍박과 몰림을 받던 엘리야와 같은 입장에 설지라도, 초로의 인생으로 사라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붙들고 나가야되겠습니다.

겟세마네동산과 골고다산정에서 예수가 품었던 것과 같은 심정을 엘리야가 품었던들, 그래서 하늘과 인연맺었던들 하늘은 거기에서 역사적인 슬픔의 일단을 해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슬픔은 예수에게까지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뜻은 해원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연장되어 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6-31
이 시대의 엘리야
오늘날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아합왕의 시대에 벌어진 것과 맞먹는 현상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저버리고 다른 무엇을 숭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 많은 인류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문명이라는 우상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아합왕을 바라보던 엘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즉, 아합왕을 바라보며 하늘의 슬픈 심정을 내적 심정에 가중하여 느끼던 엘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 할진대,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위로하며 ‘이 땅을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아들 딸로 세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그들은 엘리야 이상의 분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무리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없다 할진대 내 자신이 비록 천하다 할지라도 선조들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륜의 도를 세웠고, 섭리의 전통을 세워 섭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이 비록 부족하다 할지라도 부족하다 생각하지 말고 남 모르는 가운데 제단을 쌓고 남 모르는 눈물을 흘리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무리가 이 땅 위에 나타나 싸우지 않는 다 할진대는 이 세계의 종말적인 형상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왕이 하늘을 배반하고 이스라엘민족을 농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물질을 우상화하고 그 문명의 노예가 되어, 자기의 생명의 중심이 어디 있으며 자기가 갈 방향과 위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하늘을 찾아가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는 옛날 아합왕에게 사로잡힌 무리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세계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아합왕과 이스라엘민족 앞에 심판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기에 있는 우리 앞에 우상의 보따리를 깨뜨려야 할 심판의 한날이 있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늘은 엘리야를 대하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가지고 오늘날 여러분을 대하신다는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반성해야 됩니다.

아합왕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죽어도 성전이요, 살아도 성전이라는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고 하늘의 전통을 계승하고 하늘의 혈족을 이루기 위해 수고했어야 했는 데,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아합왕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은 혈투전으로 끝을 맺고 말았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실정은 시대적인 실정으로써 오늘날에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세계도 세계거니와 우리는 이 시대를 바라보고 우리 민족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한의 아들 딸입니다. 조상으로부터 피와 살을 이어받은 대한의 혈족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민족의 장래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들게 하기 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피 흘리고 눈물을 흘린 충신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민족의 역사에도 없는 슬픔과 비극의 처참한 환경을 거쳐왔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충신 여사들이 피의 길을 걸어간 역사를 가진 민족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을 인계받아 인륜적인 것보다도 천륜적인 것을 갖고, 아합왕 시대의 우상과 같은 이 세계의 문명을 밀어놓고, 하늘이 군림하실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할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염려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되겠습니다. 나의 슬픔보다도 민족을 붙들고 슬퍼할 줄 알고, 나아가 세계 인류를 붙들고 슬퍼할 줄 알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하늘 땅을 위해 슬퍼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타락권내에서 탄식하고 있는 민족을 품고 하늘 대신 울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주인공은 어디에 나타날 것인고? 만일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이신 주가 강림한다 할진대는 틀림없이 세계적인 이념을 갖고 올 것이요,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인류와 심적 인연을 맺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주는 여러분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념을 갖고 통치하실 주가 와도 그러한 이념의 세계를 꿈꾸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세계와 하등의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거예요. 생각이라도 하고 염려라도 하고 공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여러분은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을 염려해 보았습니까? 도탄 중에 신음하고 있는 가정을 염려해 보았습니까? 어떠한 사회나 국가를 염려해 보았습니까? 그렇지 못한 자리에 선 자기를 발견하거든, 우주역사 앞에 범죄자인 자기의 정체를 폭로시키고 하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만일 그러한 마음조차 없다 할진대 이 민족은 어떻게 될것인가. 5천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한민족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거치고 고난의 역사를 거쳐 남아진 민족이지만, 그런 무엇이 없다면 세계사, 혹은 세계 문명권내에서, 혹은 하나님의 섭리권내에서 무엇을 가지고 공헌할 수 있을 것인고.

우리가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늘과 천적인 인연을 못 맺으면 오히려 하늘에 슬픔을 가중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6-33
역사의 주인
역사는 몰리고 몰리는 무리들이 주역이었습니다. 역사를 지배해 나온 주의는 그런 무리들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자리에서 호화찬란히 살면서 진수성찬을 즐기는 무리가 어떤 주의를 만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몰리는 자리, 밟히는 자리, 불쌍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 눈물의 발걸음을 옮긴 자들입니다.

민족이 부패하고 세계가 혼란스러울 때, 세계를 붙들고 하늘을 대신하여 눈물 흘리는 무리는 세계적인 엘리야의 후계자들입니다. 그런 무리들은 엘리야가 염려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야요, 나는 나’라고 하다간 망합니다. 하늘이 울고 하늘이 슬퍼하시거든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합니다.

말씀으로만 계신 하늘이 아닙니다. 말씀과 실체와 심정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도 모르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이 주장하시는 하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심정이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체가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잘남을 자랑합니다. 허나 그것을 자랑한다 한들 몇 세기 동안이나 자랑할 수 있을 것인고. 과거 어느 시대에 자랑하던 이름은 몇 세기나 갔던고. 그러기에 인간에게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 할진대는 남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민족이 공통적으로 간 길을 간 사람이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린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간 사람들이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려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가 걸어온 노정도 이런 노정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는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예수 이후 성신을 보내어 2천년 동안 수고한 역사를 안다 할진대, 현실의 기독교를 바라보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인들은 이 시대의 교인보다도 더 교회에 가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보다 더 잘 예식과 형식을 구비했습니다.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요, 역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요, 자랑할 조건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교를 하늘 앞에 자랑할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뇨, 그것은 그들이 하늘의 새로운 섭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여 ‘예수님의 심정이 내 심정이요, 갈보리산정에서 못박히던 예수님의 몸이 내 몸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해 울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으면서도 말 못했던, 심중에 사무치도록 마음으로 그리던 신부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신부를 만나는 날에야 마음을 터놓고 그의 생애 전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6천년 동안 역사하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서글픔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성경에 있는 말씀과는 다를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이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 딸 앞에 있다 할진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 앞에 있다 할진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때는 점점 최후의 해결점을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역사도 흐르고 있고, 종교도 흐르고 있고, 주의도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니 여기도 싸움이요, 저기도 싸움이요, 여기서도 탄식하고 저기서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기에, 믿을래야 믿을 수 없고 걷잡을래야 걷잡을 수 없는 때에 엘리야가 나타나 새로운 심정의 일단을 토로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하늘의 심정을 토로하는 어떤 새로운 음성은 없을 것인고,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6-35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
주의와 사상은 오늘날 여러분을 시시각각으로 자극시키고 있습니다. 더우기나 이때는 묘한 때입니다. 역사에 대한 공포가 여러분을 몰아내고 있는 데, 그 공포와 싸워 개인적으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자는 누구일 것인고.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고. 사망이 뒤넘이치고 있는 데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해방을 부르짖는 소리는 어디서부터 나올 것인고. 어서 빨리 나와야 될 것인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하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종교의 싸움을 거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민족의 싸움, 국가의 싸움, 세계의 싸움, 주의의 싸움, 종교의 싸움은 다 지나갈 것입니다. 마음의 싸움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휩쓸리더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때가 왔습니다.

이 세계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를 중심하고 보면 여러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3천만 민족이 여러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는 줄 알지만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를 중심하고 보면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이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던 그 부르짖음은 엘리야의 부르짖음만 되어서는 안 되고, 오늘날 이 끝날에 심판받아야 할 무리의 부르짖음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입장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생명을 누가 보증해 줍니까? 부모도 아니요, 사랑하는 처도 아니요, 자식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요, 주의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생명을 존중시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밑도 끝도 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 자기 정체를 해명할 수 없는 허무한 자신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세계 인류는 갈멜산정에서 싸우던 엘리야의 투쟁역사를 거쳐야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던 엘리야와 같이 하늘 향해 호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역사노정을 거쳐 역사의 종점에 선 자신들을 어떤 주의가 구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늘을 향해 머리를 높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머리를 높이 들고 마음이 지향되는 곳, 마음을 해방시켜 주는 곳, 그런 곳을 소망하여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욕망에 사무쳐야 하고, 우리 가운데 생명이 약동해야 하겠고, 우리가 해야 할 남아진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예수께서 갈보리산상에서 하늘을 대신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무리가 있습니까? ‘하늘이여, 나만 남았나이다’ 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때가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한날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역사를 출발시키려는 섭리의 뜻이 여러분 앞에 남아 있다는 걸 아는 이상 여러분은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왜? 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없고, 어떤 주의도 믿을 수 없고, 어떤 가정, 친척, 스승도 믿을 수 없고, 어떤 도(道)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그 어느것 하나도 믿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향해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는 하늘을 향하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마음으로부터 이렇게 울부짖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는 투쟁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루어야 할 천적인 뜻이 있고, 찾아야 할 민족이 있고, 성별시켜야 할 교단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편에 있는 사람들은 뜻을 위해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