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3 to 5-356: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1959.03.08 (일), 한국 전본부교회

5-333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시편 : 121편

[기 도(Ⅰ)]

저희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 앞에 불초한 모습들이 찾아나왔사오니, 아버지, 맡아 주시옵소서. 당신의 합당한 뜻대로 취하여 주시옵소서.

생명권에 속하는 아버지 앞에 송영 드리기를 원하오나 사망권에 속한 죄악의 근성이 오늘까지 저희들을 사로잡고 있사오니 새로운 권(圈)내로 인도하시기 위해 구원섭리를 해오신 아버지, 이 시간 현현하시어서 사망의 권한을 제거시키시옵고, 생명과 부활의 은사를 허락하시옵소서.

영원하신 아버지시여! 창조의 가치를 갖춘 하나의 생명체로서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엎드린 몸들이 아버지의 지극히 선하심을 노래할 수 있으며 지극히 아름다우심을 찬양할 수 있는 송영의 모습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하늘과 땅의 생명의 인연이 끊어지게 됐사옵고, 천사세계를 대신하여 송영을 드려야 했던 천사장은 하늘을 배반함으로써 송영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을 부르셨사오니, 송영을 받지 못하심으로 말미암아 쌓인 아버지의 원한을 저희를 통하여 푸시옵소서. 의논하시지 못한 내적 사정을 저희들과 의논하여 주시옵고, 만민과 하늘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인연의 존재로 저희들을 세워 지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창조의 즐거움을 저희들과 함께 나누고자 고대해오신 아버지 앞에 모든 충절을 다 바치고, 아버지를 협조하는 생명의 실체로서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은 지극한 마음으로 송영 드리려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 오늘 저희들이 지극한 협조의 대상으로 아버지 앞에 서기를 고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늘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주관하게 하시기 위하여 창조이념을 세우시고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살펴서 아버지 앞에 무한한 협조의 존재로, 무한한 송영의 존재로, 무한한 은혜의 존재로 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불초한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전에 모였사오니, 저희만을 중심삼고는 하늘이 요구하시는 어떠한 조건도 성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어서 저희 자체를 넘어서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살필 줄 알고 아버지의 사정을 더듬어 헤아릴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뜻 앞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도 많았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 만이라도 아버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고, 선의 실체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식구 식구를 은사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불충스런 몸들을 굽혀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고자 하오니 이 한 시간 오로지 당신만이 주관하시옵소서.

어두운 세력이 침범하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시옵고, 성별된 자리에서 아버지와 심정을 나누고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여 경배드릴 수 있는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5-335
기 도(Ⅱ)
본래 하늘 땅을 통치하기 위하여 오셨던 그리스도의 실체의 형상을 기념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골고다산정에서 피를 흘리시며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심정을 기념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에 슬픈 일이 있다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뼈살에 사무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슬픈 사정과 심정을 저희들이 체휼할 수 있고 하늘의 애달픔과 원통하심을 알아 민족과 인류,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탄까지도, 미래의 후손들이 나갈 방향까지도 염려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서글픈 사정을 느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체면도 없고 면목도 없는 저희들을 붙드시기 위한 수고의 역사와 슬픔의 섭리를 거듭해 오시기를 6천년, 한날 한 시간도 쉬임없이 저희를 염려하시고 심정의 상처를 개의치 않으신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마음문을 넓혀서 그 심정을 본받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몸을 움직여 그 수고의 발자취를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죄악의 노정을 돌고 돌아서, 그 죄악에 취하여 하늘을 배반하기를 일삼던 저희들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지치고 지친 몸으로 아버지 존전에 모였사옵니다. 이 몸들이 존전에 서기에는 합당치 못한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를 찾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연고로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흠모하여 이 자리에 엎드렸사오니, 긍휼의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붙들기 위하여 참아나오셨사옵고 싸워나오신 아버지, 오늘 다시 권고의 채찍을 드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악의 요소가 있사올진대 이것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권고하시어서 듣지 아니하거든 채찍을 가해서라도 악의 요소를 제거해 주시어서 저희들이 하늘의 심정에 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응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이 삼천만 민족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슬픔의 골짜기를 넘으며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왔고, 길을 잃어 방황하면서도 오늘 이 시간까지 나온 남은 무리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갈 바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이 민족 앞에 하늘의 의롭고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부활의 제단을 쌓을 수 있는 한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영광의 시간을 이 민족 앞에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모아 놓으시고 아버지께서 민족 앞에 제물되라 명령하신 것을 알고 있사오니, 하늘 앞에 책임을 감당치 못한 부족한 자신을 자탄하는 입장에 머물 것이 아니라 아버지 뜻에 모든 것을 바치는 제물, 하나의 폭탄으로서 사탄도성에 쳐들어가 터질 수 있는 아들 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무리가 이 민족뿐만이 아니오니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 위에도 새로운 여명의 종소리를 울려 주시옵고, 생명의 빛을 나타내시옵소서. 아버지의 영광의 한날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을 불러 세우시어서 하늘의 전체적인 섭리의 뜻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시여! 오늘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았사오니 저희들이 그 뜻을 위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능력을 행사하시옵소서.

주저하는 저희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시옵고 머뭇거리는 이 한 몸을, 아버지, 충동시키시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선의 복지를 향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갖고 전진하고 전진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모인 당신의 아들 딸들 굽어 살피시옵소서. 갈급한 심정을 갖고 엎드렸사오니 긍휼의 손길을 펴주시옵소서. 사랑을 품에 품으시옵고, 재창조의 영광을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한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경배드리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간곡히 호소하는 그들의 모든 내적 심정을 아버지 알아 주시옵고 그들 앞에 소원성취의 한날을 허락하시어, 아버님께서 친히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시는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경배하고자 하오니 갖고 나온 예물은 없다 할지라도 더럽혀진 저희의 심정을 아버지 앞에 다 내놓고 통회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에 침범된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다 폭로시키어 긍휼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회개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관념을 모두 제거시키시옵고,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하늘의 힘에 붙들려서 하늘의 움직임을 화하여 움직일 수 있고 생명에 취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억만 사탄이 이 시간도 노리고 있사오나 시험에 드는 아들 딸이 한 생명도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5-337
기 도(Ⅲ)
아버님, 저희들은 고아와 같이 갈팡질팡, 목적도 방향도 모르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역사와 흐름에 따라 뒤넘이치면서, 생명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밀리고 밀리면서 오늘까지 나온 불쌍한 모습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반면 이러한 저희들을 붙드시고, 저희들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사옵고, 사망권내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저희들을 찾으시기 위해 밤과 낮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수고해 오신 주인공이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사옵나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심정이 하늘과 땅을 통하는 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위하여 애쓰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고 저희의 생애를 염려하시는 더 크신 하늘이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마음 몸으로 아버지를 대하여 황공하게 생각할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상처받기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상처받는 자리에 서셨다는 사실, 저희들의 몸이 피곤하여 쓰러지게 될 때에 저희를 붙들고 품어 주시고 위안하시어 갈 길을 다시 권고해 주신 아버님의 심정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말로만 살아온 자신들을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아버님을 알고 아버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아들 딸로서 아버지와 심정일체를 이룰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고, 나누어질래야 나누어질 수 없고, 아버님과 저희를 갈라낼 아무런 존재가 없고 확고한 위치에서 하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하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하늘의 일을 나의 일로, 하늘의 책임을 나의 책임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위치에 서서 억만 사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책임자의 입장에 선 것을 알고,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물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준엄한 사실들을 체휼할 수 있는 아들 딸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은 저희들이 졸고 있는 시간에도 졸지 아니하시고, 자고 있는 시간에도 주무시지 아니하시며, 이 한 무리를 깨우치고, 이 한 것들을 인도하시면서 수고하신 아버님 앞에 불초한 저희들이 다시 나왔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자는 자나 조는 자가 있사오면 다시 경책하여 주시옵고, 상처를 입은 자가 있사올진댄 아버지, 기름을 바르시고 싸며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을 찾으려고 애달파하는 자가 있사올진대는 그들을 품으시고 위로해 주시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사정 사정을 아시는 아버님이시고, 그 사정의 주인공이시며, 용납하지 못할 모든 어려운 사정까지도 용납해 주시는 아버님이신 것을 저희들이 알지 못했사옵니다. 이제 심중에 사무친 모든 어려움과 슬픔과 염려를 아버님 앞에 다 내놓고 아버님 것으로 바꾸어 취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의 마음에 옳지 못한 일체의 요소를 제거시키시옵고 아버지의 심성에, 아버지의 성상에 화화여 아버지와 일체가 될 수 있는 확고한 각오와 결심을 원하옵나이다.

자아의 관념으로 아버지의 전체의 성품을 헤아리려 하는 아들 딸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완전히 순응하고 화합하여 아버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빚으시는 모형대로 움직일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용납치 못할 요소가 있다 할진댄 일체를 제거하여 주시옵고 친히 좌정하시어서 명령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제 이들에게 주시고 싶으신 말씀을 내려 주시옵소서. 인간의 어떠한 말씀보다도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울려나오는 새로운 말씀이 저희들에게 지극히 필요하옵고, 거리를 두고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지 않고 즉각적으로 느끼고 움직이는 아버지의 심정이자 저희의 심정이요, 아버지의 느낌이자 저희의 느낌이라 할 수 있게 인도해 주시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체휼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릴 수 있고 마음과 몸에 새로운 말씀의 충격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고 하나되게 하시옵고, 이 한 시간 은사에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이날도 지방에 널려 경배드리고 있는 외로운 식구들 위에 아버지의 긍휼이 손길을 일률적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5-339
말 씀
인간들은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도 모르며 오랜 역사노정을 걸어 왔습니다.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그 이념을 통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당도할 것인가. 또 어떠한 가치로서 그 목적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인간들은 완전한 해결을 짓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존재의식에 대해 말을 할 때, `나’라는 존재는 출발도 하늘이요, 그의 결과도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하늘 뜻 앞에서 하나의 가치를 찾아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은 종교인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갖고 사는 때가 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봅니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중심삼은 것이로되 그것의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 어떠한 이념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와 현재의 우리와는 시간적인 거리와 공간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를 타파해 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어떠한 학설도 아니요 어떠한 수단방법도 아닙니다. 이 거리는 오로지 심정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타파될 수 있습니다.

`심정’ 이것은 종교계에서 문제가 되는 동시에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도 문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정 자체를 두고 말한다면 개인적인 심정이 있을 것이고 가정 차원의 심정, 혹은 사회, 국가, 세계 차원의 심정이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창조주 즉, 실존의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는 그 주인공 역시 심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5-340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사람이 살고 움직이고 하는 것은 심정을 중심삼은 것들입니다. 심정을 중심하여 사정을 해결하고 심정을 중심삼고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들은 움직이고 있고, 사회도 움직이고 있고, 세계도 움직이고 있고, 천륜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우주 더 나아가서 천주를 통찰해 볼 때, 우주와 천주는 심정을 근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즉, 이 심정을 기반으로 한 법도를 벗어난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떠한 심정을 갖고 있는가, 이 사회와 세계 사람들은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의 통일적인 천주를 이루어 놓고자 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을 갖고 계시는가. 또, 그 심정 심정은 어떠한 관계와 방편을 통하여 연결지어 지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개인의 심정을 초월하고 사회, 국가, 세계를 넘고 피조세계 전체를 넘어 하나님의 심정에까지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종교가 나온다 할진대 모든 피조만상은 그러한 종교권내로 자연적으로 들어오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더 좋은 선의 지향하고, 더 아름다운 미를 찾아나가고, 더 정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창조주의 천적인 심정과 인연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의 심정, 천륜의 심정, 인륜의 심정을 살펴 볼때, 이 심정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의 인륜과 섭리의 법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천륜이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교라는 명사를 빌어 말하면 타락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창조주의 심정과 천륜의 심정, 인륜의 심정이 상충되어 있는 서글픈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신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부활한 피조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창조주의 심정을 다시 바라볼 줄 알고, 사회의 실상을 다시 바라볼 줄 알고, 자기의 마음과 몸을 다시 주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러지 않고는 새로운 이념의 세계, 새로운 정적인 세계는 인류역사에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선 우리들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주시는 그 분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우리와 인연을 맺기 위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움직이고 계시는 분을, 우리의 생활 환경을 단속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어떠한 존재를,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입니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눈을 들어 지극히 작은 미생물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또 눈을 들어 사망이 물결치고 죽음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는 사회적 실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또 눈을 들어 내 마음의 세계와 무한한 이념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원하는 정적인 이념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미생물인 세균으로부터 천체(天體)를 내 한 개체와 관계를 지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나 하나를 중심삼고 평면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 즉 마음의 세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5-342
하나님의 창조목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우주의 법도에 의해서 변함없이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지구 자체가 그렇거니와 태양 자체도 자전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130만배나 되는 질량을 가진 태양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이런 태양계 질량의 2천억 배나 되는 광대한 은하계가 있습니다. 이런 은하계를 소우주라고 하는데, 우주에는 은하계와 같은 성운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대우주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광대무변한 대우주의 세계를 마음을 넓혀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반경만 해도 수천억 광년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대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대우주를 변함없는 법도에 의해서 수억천만년을 움직여 나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가지고 이 모든 천체를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그 웅장함과 위대함에 자연히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대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아버지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실존하시는 위대한 주인공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을 넓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대우주를 창조하시고 지어진 대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바라보시며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한날의 소망을 그리면서…. 만일에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또 자랑하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이 자랑하셨겠습니까!

이러한 어마어마한 천체, 우리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가치의 천체지만 그 천체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태양계 안의 하나의 위성인 지구라는 땅덩이 위에, 대우주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보잘것없는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인간을 중심한 하나의 이념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고마움과 그 기쁨과 그 영광됨과 장함이 얼마나 커야할 것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또 우리가 삼라만상, 자연계를 바라볼 때, 사계절을 따라 변하는 자연현상과 때에 따라 모든 만물이 화동하여 미를 나타내는 것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무의미한 심정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날으는 새를 본다거나 나비나 벌을 볼 때, 흐르는 물이나 솟아있는 산봉우리를 볼 때도 이 모두가 창조하신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반영된 모습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있고 많은 문학가가 있지만 모든 예술가와 문학가들은 한결같이 많은 형용사를 동원하여 피조세계, 즉 만물의 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은 예술이나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피조세계, 즉 자연을 배놓게 되면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상대적 조건이 말할 수 없이 감소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이요,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자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의 심정을 갖고 자연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구형이나 섬모형 등 여러 형태를 갖고 있는 지극히 미미한 세균으로부터 박테리아 세포, 광대무변한 천체까지, 생물이나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든 존재물은 질서정연하게 자기도 모르게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작용하고 있고 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주께서는 어찌하여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지으셨는고. 그것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 천체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인간들을 위하여 천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마음문을 열어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으신 만물을 보고 기뻐해야 할 것이었는데 기뻐해 본 일이 없으니, 인간에게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러한 슬픔을 느낄 줄 모르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슬퍼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인간이 슬퍼하기 전에 슬퍼하셨고, 인간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시면서 인간을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십니다.

5-344
종교생성의 근원이 되는 경지
이러한 하나님을 여러분은 마음문을 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한 순간이 있어야만 인간의 가치가 회생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되 우리가 갖고 있는 감성의 주체로, 의식의 주체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천체를 움직이시며 영원을 향하여 쉬임없이 나아가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를 지켜 주셨다는 사실, 인간을 쉬는 때가 있었으나 하나님은 쉬는 시간이 없었고, 인간은 자는 시간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럴 시간이 없었고, 인간이 알아 주든말든 언제나 인간을 알아주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시간까지 만우주가 움직이는 모든 법도를 주관하셨고 한편으로는 인간을 재창조하시어서 그 인간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우주를 주관하는 가치적인 존재로 세우시기 위하여 섭리하셨다는 놀랍고도 고마운 사실을 여러분은 뼈살에 사무치도록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진정한 종교적인 심정이 우러나는 그 순간에는 만물을 바라보고 머리 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거나, 자연을 보거나, 천체의 무수한 성운을 바라보게 될 때 신비스럽고 숭고한 감정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게 됩니다. 이런 감정으로부터 종교가 출발된 것입니다.

나를 넘어 자연의 현상을 바라보고 높이 평가할 줄 알고, 움직이는 자연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내 심정세계의 고귀한 것을 대신하여 노래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자연적인 음악과 같이, 자연적인 예술과 같이, 자연적인 문학과 같이 느낄 수 있는 심정이 내 마음에서 우러나게 될 때 비로소 천체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심정이 강해져야만 사물을 대할 때 다시 감정할 수 있는 심적 기준이 잡혀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그대로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지음받은 만물은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우주는 이러한 인연으로 엉클어져 있는데 다시 인간과 관계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우주는 이러한 인연으로 엉클어져 있는데 다시 인간과 관계맺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며 자연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만물이 이렇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엉클어져 있는 것은 지극히 작고 미미한 존재인 우리 인간과 연결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만물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또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우리의 마음은 이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수시로 자신을 그런 방향으로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서 예술이 출현하고 종교이념이 생겨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광대무변한 우주를 바라볼 때 무의미하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입장에서, 또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느끼는 입장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거기에서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우주적인 변동이 있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신념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하나님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놀라운 인연, 하나님이 심정으로 연결될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몸 마음이 천륜과 통하고 인륜과 통하여 자신도 모르는 어떠한 힘이 부딪치는 것을 감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오는 힘인 것이며, 창조적인 원리법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와 인연되어진 작용의 힘인 것입니다. 또 그 힘은 이념의 세계와 심정의 세계 혹은 현상의 세계에까지 일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동시에 무형세계를 통할 수 있는 심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5-346
하나님의 위대성과 인간 본연의 위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입자에서 만물을 대할 줄 알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할 줄 아는 자, 천체를 지으시고 기뻐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할 줄 아는 자, 사람을 지으시고 기뻐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할 줄 아는 자, 이념의 세계가 선하고 귀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는 것을 노래할 줄 아는 자, 그러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된다 할진대 여기에서 비로소 천정이 맺어지고 인정이 맺어집니다. 또 천륜과 인륜을 통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섭리적이고 창조이념적인 심정의 인연을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과 우리와 같은 형상을 하신 분으로 알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앙생활 도중이나 기도할 때 혹은 어두운 밤에 홀로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연계를 바라볼 때나 심각한 마음으로 마음문을 열어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을 느끼면서 자연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자연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 무수한 천체 세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실감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그 순간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감정으로 기도하는 어떠한 시간보다도 더 숭고한 기도의 시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나 그 아버지가 우리를 지켜주시는 줄로만 알았지 그 아버지가 이렇게 크시고, 그 아버지가 이렇게 위대하시고, 그 아버지가 이렇게 세밀하시다 는 것을 몰랐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하루도 아니고 창세전부터 오늘날까지 수천년동안 우리 인간을 위하여 수고해 나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진정 마음으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진정한 마음으로 느끼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위대하다는 말을 그분에게밖에 쓸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요, 크다는 말을 쓴다면 그분에게밖에 쓸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요, 놀랍다는 형용사로 찬양하고 위대하다는 형용사로 찬양하고 존엄하다는 형용사로 찬양한다면 그분밖에 찬양할 존재가 없을만큼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모시고 있고 또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바라온 소망은 왜 그렇게 작았던고! 생각하고 통찰하고 관점이 왜 그렇게 좁았던고? 가지고 있던 감정이 왜그렇게 사특(邪慝)한고! 우리는 이런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념세계의 감정을 느끼는 경지에 들어가서 자기도 모르게 머리 숙여 눈물흘리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성상 앞에 쌍수를 합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세계를 주관하라 하신 그 주관의 목적을 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잘것 없고 미미한 개체지만 이 개체가 어떠한 피조만물의 가치보다 귀한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이뇨? 그 모양이 아름다와서 그런 것이 아니요, 그 형태가 위대하고 굉장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 창조이념의 세계에서 내적으로 흐르고 있는 정을 통할 수 있는 존재인 연고로 귀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광대한 천체세계,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계이지만 그것들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떤 자극적인 감성과 충격을 유발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면에 있는 아버지의 창조이념의 심정을 어느 한 순간에 포착하여 그것을 나타내어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천체의 창조적인 심정의 흐름을 순식간에 포착하여 그 감정과 동일한 감정으로 그 심정에 화답할 수 있는 존재는 만물이 아닙니다. 외계에 나타난 만물이 아니라 만물을 주관하라고 지어 놓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심정이라는 것을 빼놓으면 인간의 가치는 미물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거니와 우리의 행동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념을 세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 앞에 미의 자체, 사랑의 자체, 선의 자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역사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시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생활적인 느껴지는 감정, 또 자기 중심삼고 바라보는 어떠한 욕망이나 희망, 자신을 중심삼은 행복감이나 어떠한 감정보다도 더 숭고한 감정의 인연이 우리의 앞길에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겠습니다.

5-348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어떤 사람이 `나는 행복한 사람이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요, 인간중의 위대한 승리자다’라고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웃을 정도의 행복이 남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성공한했다고 자랑하더라도 그것을 비웃을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자기 자신이 돈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종말시대인 오늘날 하늘이 우리를 찾아오고 우리는 또 그하늘을 찾아나간다 할진대, 우리는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크며 인간의 성공이 얼마나 위대하며 역사적인 인물을 비웃을 정도의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더 위대한 성공을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기뻐하는 것은 완전한 기쁨이 아니요, 성공했다고 하는 완전한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의 과정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도취되어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마 16:26)”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의 목숨, 즉, 생명은 타락권내에 있는 우리들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생명은 무엇이뇨? 그것은 창조주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까지의 역사적인 감정이 아닌 창조본성에 흐르는 감정과 연할 수 있는 감정, 창조본성과 통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을 가진 가치적인 인간의 생명을 걸어 놓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도상에서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노정이 가로놓여 있는 연고로 행복하다고 자랑하되 자기를 중심삼은 행복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자기 민족을 중심삼고 행복을 논하고 자도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중심삼고 행복을 논하는 자도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어떠한 이념의 제창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네 일개국을 중심삼은 이념이나 땅 위의 세계를 중심한 이념을 걸어 놓고 투쟁한다면, 그 역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우리는 어차피 거쳐가는 역사노정에 서 있는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살고 있는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는 그 주인은 어디 있느뇨?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행복의 감정을 지배하는 주인은 어디 있느뇨? 우리가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가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희망하는데, 그성공을 지배하는 주인은 어디 있느뇨?

그 주인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도 아니요, 우리를 이끌고 있는 어떠한 주의도 아니요, 어떠한 종교도 아닙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헤아려 볼 때 우리는 걷고 있는 발걸음을 멈추고, 참된 이념과 행복과 성공을 소개하는 참된 심정으로 우리를 지켜 주는 그러한 분은 없을 것인가 하고 다시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중심삼고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이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자기를 중심삼은 그 성공은 6천년 인류역사 아니 영원한 천주의 역사에 무슨 공헌을 하겠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를 위하는 입장에서 공을 세웠다면 충신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자기를 중심삼은 입장에서 공을 세웠다면 충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자신은 누구의 것인가. 내 자신은 누구에게 지배받고자 하는가? 또 내 심정은 누구를 모시고 싶고, 누구를 위하고 싶은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은 무슨연고인고. 여러분이 생활권내에서 이것을 생각했다 할진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으로 고대하는 이념의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인류 앞에 행복을 소개하려는 분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최대 행복의 요소를 지배하고 우리를 역사의 흐름으로 몰아내는 주인이 있다 할진대 그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아야 되겠습니다.

5-350
역사의 방향성과 그 원동력
여러분은 잘 모르지만 역사는 목적지를 향하여 흐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이념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조작으로 된 것도 아니요, 인간들의 어떠한 공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이 흐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수 없는 흐름인데 이것은 내 주위를 휩쓸고, 내 마음을 휩쓸고, 내 국가와 세계를 휩쓸어가는 어떠한 힘이 있는 연고로, 또 나는 목적하는 세계를 향하여 달려야 할 과정에 있는 존재인 연고로 아니 흐를래야 아니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시 한 번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흐름에 있어서 우리의 발걸음은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좌쪽인가 우쪽인가? 아니면 종적인가 횡적인가? 이러한 흐름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는 자기를 중심삼은 어떠한 행복을 주장할 수 없고 자기를 중심삼은 어떠한 성공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위대한 예술적인 감정의 세계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본래 피조세계 전체와 관계를 맺어 피조세계 전체를 대하여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할 가치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 만물 만상 앞에 자신을 내세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성공하기 전에는 그런 심정의 흐름을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이러한 길입니다. 이러한 위대하고 놀라운 인연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관계의 세계를 거쳐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서는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어 자기 스스로 창조주 앞에 자랑하고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들은 그런 하나의 성공자, 행복자, 자유로운 자를 흠모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이끌기위하여 종교가 나오고 예술 문화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문제를 수습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가정적인 감정으로, 가정적인 감정에서 국가적인 감정으로, 국가적인 감정에서 세계적인 감정으로, 세계적인 감정에서 천주적인 감정으로 넓혀 왔습니다. 과거의 예술이 이러한 방향을 지향해 나왔던 것입니다.

자연계와 인간이 내적인 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이들을 정적인 이념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 예술이 있고 문학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주의형태를 갖추어 나가면서 인간을 이끌고 있습니다. 과학은 외적인 모든 자연법도를 통하여 우리의 생활적인 환경을 연결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길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냉정한 길이고, 예술이나 문학의 길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애달픈 길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이념을 향해 움직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종교는 어떠한 것이뇨? 과학과 예술 문화가 아무리 인간세계에 공헌을 하고 외적인 우리의 감정을 넓혔다 할지라도 내적인 감정세계를 영원한 세계까지는 연결시키지 못했고, 본래의 천적인 감정의 세계까지는 연결지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적인 감정의 세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나온 것이 왈 종교입니다.

종교는 예술의 내적인 분야를 대신한 것이요 문화는 내적인 방면을 대신한 것으로서, 예술인이나 문학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어떠한 무형의 주체를, 그리고 그분에 의해 미의 충격을 받으며 살아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파로 갈라진 종교가 합류되어야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이것은 어떠한 종교라는 테두리를 중심삼고 되는 것이 아니요, 어떠한 예술이라는 테두리를 중심삼고 되는 것도 아니며, 전체적이요 직접적인 무대가 되는 존재인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 이러한 종교의 이념이 있다 할진대 그 이념은 핵심을 통할 수 있고,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술작품이 아름답고 자극적인 무엇을 느끼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종교적인 분야와 연결짓지 못한다 할진대는 역사적인 실패라는 규탄을 받고 이 지구상에서 추방 당하고 말 것입니다.

5-352
인간 최고의 복된 자리와 안식처
그래서 중간적인 나를 찾아야 할 우리인데, 종교가 오늘날까지 시대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이 공헌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어요. 왜? 심정의 세계를 대신한 연고로 발전이 없습니다. 몇 천년전이나 몇 억만년 후나 발전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심정, 자기 동족과 자기 친척을 사랑하는 심정, 이러한 심정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 심정 하나 붙들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 하나를 가지고 완전성을 대신할 수있고, 그 심정 하나가 전체 행복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 최고의 행복지는 어디며, 최고의 안식처는 어디인고? 하나님이 어떠한 주체로 계시다면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고, 그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곳, 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정적인 기반 위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지상에 벌어진다 할진대는 그 순간부터 인간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인류가 바라던 최대의 성공의 세계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이념을 갖고 나온 사람이라도 다 선을 지향하여 선에 대한 감정을 충족시키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나는 하나님과 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노정에 이 이상 위대한 사실을 선포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대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라고도 하였고, 제자라고도 하였습니다.

인간의 전체적인 생활감정을 움직여 모든 요소를 자극시킬 수 있는 전체 요소를 들어 그의 주체적인 가치를 대신 주장하셨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종교의 교주도 예수와 같은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온 만상을 바라볼 때 정적인 심정으로 바라보셨고, 역사적인 인물들을 대할 때에도 평면적으로 대하지 않고 역사적인 심정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은 타락된 세계였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습관적인 인연을 맺고 정적인 관계를 가진 세게 앞에 일대 폭탄선언이었고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건 왜? 예수님은 자신이 느끼고 자신의 마음 속에 흐르는 사랑의 심정으로 인간들을 바라볼 때, 하늘 땅을 통하고 인류의 모든 심정을 통하고 시작과 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견지에서 바라볼 때, 그때까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한것은 하늘로부터 본연의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나선 예수님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원수였습니다.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신 걸음은 슬픈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픈 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원수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실 때의 그의 슬픔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또 그가 소망과 희망을 품고 바라보았던 기쁨의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도 무한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슬픔이 무한대의 슬픔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한계권내의 소망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을 탄식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의 슬픔은, 감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몇천만년 생각해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슬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반면 하나님의 심정이 무한한 슬픔으로 얼룩지기 전에는 인간을 소망하고 그리는 무한한 기쁨의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한한 슬픔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 아니라 슬픔을 박차고 무한한 기쁨을 찾아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심정을 붙들고 싸워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생활을 요셉가정에서 추방을 당하여도 그 슬픔보다 더 슬픔이 있는 것을 아셨고, 국가로부터 몰림을 당하고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림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몰림을 당하고 배척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자리에 들어가서도 내가 죽는 자리에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에, 원수에 대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자신의 심정보다도 더 큰 슬픔의 심정이, 더 큰 슬픔의 역사가, 더 큰 슬픔의 기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5-354
하늘의 심정을 찾아나서는 용사가 되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예수를 버리시고도 세상을 버리지 못하셨는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도 원수들을 버리지 못하신 것은 무슨 연고였던고. 예수가 죽어가는 이상의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우리들은 이러한 무한한 천정을 찾아 우리를 지켜 주시고 섭리하신 역사적인 심정을 체휼하여, 하나님 앞에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게 될 때, 이 세상은 기쁨의 세상이 아닙니다. 또 인류역사는 슬픔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기쁨으로 출발한 역사가 못되고 슬픔으로 시작된 역사였던 연고로 오늘날 인류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어떠한 개인이 자기의 슬픔을 붙들고 울부짖는 것을 보면 여러분들은 동정할 줄 알았지요. 그러나 개인의 슬픔을 동정하고 충고한 자신을 놓고 즐겨하지 마십시오. 개인을 넘어서 가정, 더 나아가서는 국가, 세계, 하늘의 슬픔까지 우리와 연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흔히 개인의 불만이나 혹은 자기 개인의 불행, 자기 개인의 어려움, 자신의 심중에 사무친 슬픔을 갖고 통곡하여 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인의 슬픔보다도 더 큰 슬픔이 가정에 남아 있고, 사회에 남아있고, 국가, 세계, 하늘 땅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의 심정을 찾아나서는 용사가 되려면 우리 마음의 슬픔을 느끼되 궁극적인 슬픔까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행로에서 내가 배척을 받고 배반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몰림을 받고 하는 것이, 천정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그것들이 최후의 것들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 끼리끼리 맺혀진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크고 높으시다면 그 창조주의 이념이 크고 높고 그의 선이 크고 높은 것은 당연한데, 그 선과 이념을 그리시는 그 마음 앞에 슬픔이 크고 높은 것은 당연한데, 우주적인 선을 대신하여 무한한 대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천정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되 자기를 중심삼고 출발하여 자기를 중심삼고 결과를 맺기 위해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는 자기를 붙들고 망해 버릴 것입니다. 가정을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가정을 붙들고 망할 것이요, 국가를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국가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세계를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세계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까? 천정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하나님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타락한 인간인 연고로, 슬픈 역사노정을 편답하여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하는 인간인 연고로 오늘 여러분이 느끼는 고통, 여러분이 당하는 그 슬픔이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예요.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의 고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슬픔의 고개를 넘어서 천적인 아들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죽음의 고개를 밟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러한 마음의 충격으로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용서하실 수 있었고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종교의 걸음은 무엇을 찾아가는 걸음이냐? 하나님은 종교를 세워, 좋고 귀한 것을 인간 앞에 소개해 주셨지마는 인간은 좋고 귀한 걸음을 걷지 못하고 어렵고 슬픈 걸음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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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늘이 6천년 동안 수고하고 슬퍼하신 것은 종교의 어떠한 경전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과 우리들이 살 수 있는 복지(福地)에 대해서는 면밀히 소개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은 이러한 방편을 취해 나왔던고?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연고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연고로 이 방편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찾아나가는 것도 그렇지만 기쁨은 한날에 대번에 찾아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길을 지나고 난후에는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는 자가 땅 위에 있다 할진대, 하늘의 참다운 아들 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는 `내 일생에 하나님의 6천년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손을 들어 기도하고 통곡할 줄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걸고 외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입장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슬픈 입장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발견한 그 사람이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선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 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눈에 있어 눈물을 흘렸다 할진대는 이 땅 위의 어떠한 호수나 대하의 물보다도 더 많이 흘렸을 것이요, 하늘과 땅에 채울 곳이 없을 만큼 눈물 흘리며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할 줄아는 사람은 산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산을 하늘의 수고와 고통의 산정으로 느끼고, 바다를 보면 그 바다를 하나님의 눈물로 느끼고, 초목을 바라보면 그것을 하나님의 걱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크고 높고 깊고 넓은 광대무변한 온 천체를 바라볼 때, 그 모든 현상이 아름답지마는 그 아름다움이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에게는 슬픔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느낄 줄 아는, 그러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아들 딸들이 이 땅 위에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참다운 효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즐거워하는 데에서만 효자 효녀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효자 효녀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기쁨보다도 아버지의 슬픔, 아버지의 어려움을 대신할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만 효자 효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거늘 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을 연하여 흐르는 인연이 기쁨으로 맺어질 수 없는 타락한 세계인 연고로, 슬픔과 곡절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인간인 연고로 우리는 이 손이 부르트고 이 몸이 피곤해지고 찢겨지더라도 하늘을 향하여 달려가겠다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떠한 인간을 붙들고도 사정할 수 없을 만큼 슬픔에 잠기어서 `아버님!’ 하고 부르짖는 그 한 시간이 곧 잃어버린 천정과 인연맺을 수 있는 시간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시간을 회복해야 되겠고, 자기 일생에 있어서 하늘을 대하여 머리 숙여 눈물지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하늘이 찾아오는 순간이요, 하늘이 웃을 수 있는 순간이요, 하늘이 기쁨으로 손을 들어 내 아들 딸이라고 축복할 수 있는 시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가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걸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새로운 슬픔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인간을 지켜 주시기 위하여 슬픔의 길을 걸으신 하늘이 계셨다는 것을 몰랐던 인간들, 자기를 놓고 자탄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걸어놓고 자탄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의 골고다를 넘으면서도 하늘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었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수고의 심정과 하나님의 슬픔의 심정을 땅 위에 인간으로서는 느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슬픔을 풀지 못한다 할진대는 하나님 속에 있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선과 영원한 행복은 땅 위에 있는 인간과 영원히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어디로 갔는고.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은 여러분 자신이 살기 위하여 많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손은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이발걸음은 누구를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가, 이 몸과 마음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그리며 찾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에 처해 있는 자신임을 명심하고, 소망의 한날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고, 새로이 각성하고 과거의 생활을 비판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바라는 내가 못 된 것을, 하늘과 인연을 맺지 못한 내 자체를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선 나는 가정 앞에도 면목이 없고, 국가 앞에도 면목이 없고, 세계 앞에도 면목이 없구나’하는 심정을 여러분은 언제나 느낄 것인가? 이러한 심정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우러난다면 가정을 봐도 눈물이요, 나를 봐도 눈물이요, 세계를 봐도 눈물이요, 하늘을 바라보아도 눈물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서 이런 일이 없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검은 장막을 헤치고 깊이 숨어 있는, 지극한 경지 밑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녹음 불량으로 3분간 중단되었음)

이제 우리는 생활하면서 나를 위해 사는가 분석하여 나를 지켜 주시는 그 한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내가 몰라도 지켜 주시고 알아도 지켜 주시는 한분, 내가 어떠한 곤란한 입장에 있어도 지켜 주시는 그 한 분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