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7 to 5-234: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
1959.02.01 (일), 한국 전본부교회

5-207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
마태복음 8:18-22

[기 도(Ⅰ)]

아버님, 불충스러운 몸들이나마 아버지를 찾아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저희를 오라 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저희의 마음과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과 영원히 인연맺을 수 있는 이 한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저희의 심정이 되고, 당신의 성상(聖像)을 접할 수 있는 저희의 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와 영원한 인연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 아버지께서 움직이시면 저희들도 움직일 수 있으며, 그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모이게 한 이 사실이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사망의 권한을 끊기 위하여 저희들을 모아 주셨사옵고, 사탄을 이긴 제물로 세우기 위하여 저희들을 불러 모았사오니, 당신의 소원의 뜻대로 저희들을 맡아 주시옵고, 당신께서 기뻐할 수 있는 제물로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자신을 중심한 어떠한 조건도 갖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당신 앞에 해가 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갖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마음과 몸이 통하고 오직 당신만 통할 수 있으며 당신이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당신의 심정으로써 하나로 화할 수 있는 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몸을 당신이 친히 임재할 수 있는 성소로서, 저희의 마음을 당신이 친히 임재할 수 있는 지성소로서 만들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 마음이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이 되게 빚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마음문을 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죄악의 요소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 앞에 합당치 못한 모든 요소를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생명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주일 동안 사는 가운데 부족한 것이 많았을지라도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렸사오니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재창조의 고난 가운데에서도 저희를 다시 사랑하여 주시옵고, 이 한 시간만이라도 번제의 제물로서 아버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었사오니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삼천만 민중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심정을 연모하고 당신의 천륜의 뜻을 바라고 있는 수많은 아들 딸위에 아버지의 직접적인 은혜의 손길을 나타내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세계적으로 섭리하고 계시는 것을 저희들이 마음 몸에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 아버지의 뜻 하나를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그 아들 딸들 위에 일률적인 은사를 내려 주시옵고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시련과 핍박 중에도 끝까지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5-208
기 도(Ⅱ)
갈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던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이 한자리로 이끌어 주심으로,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존전에 부복하였사옵나이다.

아버님 앞에 드릴 것을 갖추지 않았사오나 이끌어 주시옵고 긍휼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님, 저희들의 피로한 손길을 붙드시옵고, 의지할 곳 없는 저희의 몸을 안아 주시옵소서. 영원한 그 세계의 사랑을 저희에게 베푸시옵고 고대하였던 소망의 아버지로서 저희를 훈계해 주시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진정한 심정을 털어놓고 아버지를 대하고자 하오나 아버지와의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을 느끼옵니다. 그러나 이 한 자리에는 당신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맹세한 자들도 많사옵고, 당신 앞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각오한 자들도 많사오니, 아버님, 아버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가 가는 길도 아버지를 위함이고, 저희가 사는 것도 아버지를 위함이고, 저희에 속한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 하나를 위한 것이오니, 이제 저희의 한 몸을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친히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인간과 인연맺고자 하시는 그 뜻이 아버님의 사랑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고, 찾고자 하시는 본연의 한 자체를 이 한 시간을 통하여 다시 빚어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가고 싶어서 이 길을 나선 걸음이 아니었사옵고, 아니 가래야 아니갈 수 없는 천륜의 뜻이 있어 찾아나왔사옵니다. 당신의 수고하심과 피어린 노정을 일고 그 뜻을 완결짓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사오니, 저희의 마음과 몸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당신이 세워주신 생명의 등대를 찾아나왔사옵고,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그리워 찾아나왔사오니 아버님, 분부해 주시옵소서. 영광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옵고 재창조의 손길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합당치 못한 저희의 모든 것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아버님의 선의 역사만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실 수 있으며 저희들 기쁜 마음과 몸으로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새로운 동산을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사옵고, 새나라의 이념을 흠모하고 있사온데, 아버님이시여, 이 길을 막는 원수들이 많사옵니다.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사오니, 아버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극적인 힘과 충격을 이 한 시간 시간을 통하여 가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사랑을 흠모하는 간곡한 마음만이 저희의 생활을 주관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환경을 움직여 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 나라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이 원하는 것은 희망의 제단이옵고 자유의 동산이옵니다. 하오나 허락하신 이상세계와 하늘의 운행하심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들을 깨우쳐 주시옵고, 이들에 대한 저희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아오니, 오늘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엎드린 저희들, 이 민족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흑암의 권세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땅 위의 인류를 구원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각성 할 수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의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번 기간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목자로 보내놓은 그들이 당신을 향하여 호소하는 이 시간이었사오니 일률적인 은사로 품어 주시옵고, 남아진 싸움터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되게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고, 낙오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불충스러운 몸둘이나마 가다듬고 아버지의 거룩한 성전에 모였사오니, 아버지 앞에 합당치 못한 일체의 요소를 제거시켜 주시옵고, 나를 중심삼고 주장하는 어떠한 주의나 관념이나 인식까지도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당신만이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만이 관여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맡기었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5-211
기 도(Ⅲ)
아버지여! 알 수 없었던 섭리의 뜻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회상해 볼 때, 우리의 선조가 타락한 이후 6천년이란 긴 역사를 지나왔지만 인간들은 아버지의 그 심중을 통하여 못하였던 사실들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아버지의 사정이 어렵고 딱하다는 것도 이미 배웠사옵고, 아버지의 소원이 오늘날 땅과 온 인류와 하늘 앞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저희들은 알았사옵나이다.

오늘날 저희가 아버지의 소망권내(所望圈內)에 서서, 아버지의 심정의 동산에 서서, `아버님이여, 내가 있사오니 위로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존엄하신 아버지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아들 딸의 절개를 가졌는가 생각해 볼 때, 저희들은 너무나 먼 거리에 처해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의 그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소원의 실체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땅 위에 다시 나타나실 때에, 천륜의 심정을 찾아 헤매는 자는 그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륜의 사정을 통하여 헤매는 택한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그들의 사정이 예수님의 사정과 하나되었어야 할 것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을 보낸 아버지의 소원이 만민을 위한 소원이었다는 것을 이스라엘민족은 알았어야 했사온데, 소원의 실체인 예수님을 몰라봄으로 말미암아 이 서러움이 오늘날 저희들에게까지 연장되어 내려오게 된 이 역사적인 슬픔 또한 느끼게 되옵니다.

이제 아버님을 대하여 부르짖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아버님을 향하여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저희의 선조들이 갖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심정을 예수님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저희들도 그 심정을 소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사정과 소원을 소유하여 끝날에 아버지와 같은 심정을 지닌 존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당신을 대한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과 마음을 합하여 아버지 존전에 엎드렸사오나 무엇 갖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무슨 사정으로써 아버지의 사정에 동반할 수 있사오리까. 또한 무슨 소원을 갖고 아버지의 6천년 소원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사오리까. 아무런 것도 갖지 못한 불초한 모습들이옵니다.

이러한 자리에 처해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는 아버님이신 것을 아는 연고로, 긍휼의 심정이 크신 아버지이신 것을 아는 연고로,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시며 참아나오신 아버지께서 `오라’하신 것을 아는 연고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불충하고 부족한 모습들이오나 두 손을 합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무릎을 연한 비참한 이 모습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아버지의 말씀으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실 것을 바라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사정에 화하게 저희들을 훈계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아버님, 저희들을 대해 참으셨던 분한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을 풀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억울하고 통분한 마음이 있더라도 보잘것없는 저희들이나마 저희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이 해원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2천년 전에 왔다 가셨던 예수님은 정말 불쌍한 분이셨사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그의 사정과 소원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땅을 보나 만민을 보나 당신의 뜻을 펼 수 있는 터전이 없어 30여년의 생애를 서글프고 처참하게 살다 가신 예수님의 사정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예수의 심정을 닮은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소망을 품고 예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천년 동안 찾아 세우신 유대교단은 어디 갔으며 이스라엘민족은 어디로 갔습니까? 세우신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었사오나 예수님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였고, 준비한 유대교단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준비한 민족도 예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몰아치는 자리에 섰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외로운 자리에 홀로 서서, 몰아치는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아는 자들이 이 시간 여기에 많이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는 명령을 들었기 때문이옵니다.이제 저희들의 가는 발걸음에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는 줄 알고 있사옵고, 눈물어린 시선을 갖고 죄악된 세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사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통해야 할 때가 왔기에 저희들을 부르신 줄 아옵니다. 그러기에 아버님의 마음을 저희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의 사정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저희의 소원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저희의 원수로, 아버님의 이 싸움을 저희의 싸움으로 하여서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던 예수의 한 맺힌 사정, 저희들이 운다고 해서 풀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들이 죽는다고 해서 풀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그 원한의 사정을 이 한 시간에 저희들이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삼위신(三位神)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이 한 모임이 아버님께서 머리 둘 곳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깃드실 곳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많은 말씀보다도 아버지의 심정을 전하게 허락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사정을 전하게 허락하여 주옵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없이 움직일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각자 각자가 산 성전으로서 아버지와 동(動)하고 정(靜)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시간 성별(聖別)된 제단을 쌓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며,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5-214
말 씀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제목은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입니다.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5-214
개척자가 되셔야 했던 예수의 애달픈 사정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붙들고 구원섭리하시기 위하여 무한히도 애써 나오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악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찾아 주고, 우리를 위하고 우리에게 복지를 소개해 주기 위해서 수고하신 분이 있다고 하면, 그는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도 아니요, 어떠한 정(情)으로 인연맺어져 있는 자식이나 부부도 아닙니다. 또한 국가도 아니요, 어떠한 성현 현철도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치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소망의 전체를 개척해 주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수고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사정과 심정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엉클어진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쉬임없이 수고하며 싸워 나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역사 이래 이 시간까지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개척의 수고를 이어받아야 할 인간이 무지한 입장에 있었지만 변함없이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해 한 날의 소망을 두고 행복의 동산을 목표해 나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역사를 거쳐 오면서 한걸음 한걸음 그 세계를 향하여 찾아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이후 4천년 동안 개인을 통하고 민족을 거쳐오면서 이스라엘민족을 세워 놓고, 당신의 소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4천년 수고한 터전 위에 하늘의 전체적인 사명을 인계시키고 하늘의 심정과 소원을 인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믿고 있던 유대교인들과 택함을 받아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던 이스라엘민족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수고로 인하여 택함받은 이스라엘민족은 그의 수고를 해원성취하기 위하여 보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지 못했고, 교단이 받들지 못했고, 사회와 가정 어느누구도 받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소원하셨던 개척의 뜻은 좌절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의 일로(一路)를 걸어야 할 이스라엘민족은 실패의 일로, 즉 죽음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의 노정을 걸어오시면서 수고하셨고, 예수님은 이 개척의 뜻을 완수하여 하늘의 수고에 보답해야 할 영광의 사명을 지니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택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추방하니, 예수님께서는 4천년 수고해 나오신 하늘 앞에 그동안 개척해 놓은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하여 다시 개척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택한 민족들이 소망하는 이념의 세계를 건설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를 바라고 있던 이스라엘민족은 정작 나타나신 예수님이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인 줄을 몰랐습니다.여기에서 하늘의 슬픔과 비극의 장면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그릇된 방향으로 전개된 이 한 사실을 놓고 우리들은 하나님 대신 슬퍼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심정이 없다 할진대 인간을 대하여 개척자의 사명을 해오신 하나님의 심정, 택해 세운 민족앞에 개척자의 뜻을 품고 나타났던 예수의 심정을 우리들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터전과 소망의 동산을 이루기 위해서, 그 교단과 민족은 예수님이 선두에 서서 죽음의 고개를 가면 같이 가야 했고, 예수님이 행복과 기쁨의 고개를 가면 역시 같이 가야 했습니다. 하늘은 4천년간 수고하시면서 끊을 수없는 천적(天的)인 인연을 맺어 주었으나,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과의 인연을 배반하였고, 하늘의 개척의 공로를 배반한 이 사실들을 우리는 통분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5-216
예수님의 준비기간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은 불신할 수 있는 요소를 지녔던 이스라엘민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또, 천적인 심정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할 유대교단이 모세가 받은 율법의 형식적인 면에 사로잡혀 하늘 제단의 입장을 떠난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어떠한 곳이 자기들이 살 곳이고, 어떠한 방향이 자기들이 가야 할 방향인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이스라엘민족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개척의 노정을 통하여 자신을 세우고, 자신으로 하여금 이들을 수습하여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무리로 세우려는 목적 아래 자기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심정은 비장한 심정이 아니 될래야 아니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마굿간에서 탄생한 이후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도왔습니다. 그의 생활은 한정된 환경 가운데의 생활이었지만 그의 이념은 이스라엘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온 천주까지 연할 수 있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명령하고 있는 요셉도, 그를 따르고 있던 동생들도 이 한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자리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물정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스며있는 내적 심정을 알고, 현세(現世)에 처하여 있는 땅의 사정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것들이, 즉 심정과 사정과 물정이 하나로 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정은 심정대로, 예수님의 사정은 사정대로, 세상의 물정은 물정대로 갈래갈래 혼돈되어 움직였습니다.

이 한 사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어떠한 각오와 결심을 하였던가. 30년 준비의 노정을 거친 후 실천노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한때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슬프면 슬플수록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고 땅을 향하여 갈 길이 막막하면 막막할수록 그 사정을 인간을 통하여 풀고자 하셨습니다.

하늘의 심정이 자신과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세상이 자신과 가까와야 하고, 택한 민족과 하늘이 세운 교단이 자신과 가까와야 하는데, 하나님에는 가까움에 반하여 민족은 오히려 멀어짐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예수님의 생애야말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심각한 생애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예수님은 하늘의 심각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 백성들을 대하여 원망하고 갈 것이 아니라, 이들의 생활을 뚫고 가야 하고 이들의 마음문을 열어 놓고 가야 하고 나중에는 이들의 심정을 품고 넘어가야 할 행로(行路)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너희들이 바라는 소망의 구주다’라고 주장할 수 없었던 서글픈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경 가운데 서서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개척자의 사명을 하면서 이루어 놓으신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 하늘의 이념을 세울 수 없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민족을 대하여 싸우겠다는 비장한 심정을 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여 `하나님이여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저에게 새로운 방향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저로 하여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비장한 결심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늘대해 내적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늘을 대해 말없이, 심중으로 자문자답하는 생활을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거듭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신 예수님은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개척자의 사명을 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던가. 하늘을 위하여서는 막혀진 하늘의 문을 열어 천국을 건설해야 할 개척의 사명을 느꼈고, 또 땅을 위하여서는 엉클어져 있고 막혀 있는 만민의 마음세계, 하늘과 막혀 있는 마음의 세계를 개척하여야 할 사명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죄악된 세상을 다시 한번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오신 복귀섭리역사를 중단시킬 수 없고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하더라도 자신은 변치 않고 그 하나의 목적을 성취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걸어가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움직이신 그 내적인 인연, 그 천적인 인연을 생각하게 될 때, 이처럼 비장한 각오를 그 일신에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당시의 환경권에서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개척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개척자가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민족을 대신하고 선민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었고, 그의 각오를 하나님이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5-218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예수님의 노력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였던가. 준비기간을 거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마음에 인류의 마음을 접붙이고자 하셨고, 하늘과 땅이 동하고 하늘과 사람이 동할 수 있는, 즉 일체적인 이념을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신을 걸고 하늘과 땅이 하나되고 인간과 땅이 하나되고 땅과 하늘이 하나되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을 성취하는 개척자로 나서려고 했던 예수의 각오는 말할 수 없이 비장한 것이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택한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을 세우셨고, 또한 땅 위에 있는 온갖 피조만물을 위해 자신을 세우셨으니, 땅이 자신을 배반해도 민족이 남아 있으니 자신을 버릴 수 없었고, 민족이 배반해도 하늘이 남아 있으니 자신을 버릴 수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그러하여 그는 내적 심정으로부터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갖고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세계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비분(悲憤)의 심정과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심중으로부터 폭발되면 폭발될수록 그는 무한히 서러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충일된 준비기간에 있어서 예수는 몇 백번, 몇 천번, 몇만번을 마음속으로 맹세했을 것입니다. 이 이념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 있어서 4천년 동안 하늘을 대신하여 나오던 이스라엘선민의 역사를 회고해볼 때, 이스라엘민족은 하늘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는 어려운 핍박이 있을 것을 예상하시고 새로운 각오를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이 처참한 환경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을 찾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찾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을 느낀 예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민족이 하늘이 세워주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무한히 슬픈 심정을 느꼈습니다. 또한 이 지상세계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찾아 오실 수 있는 발판이 되지 못하고 선의 터전이 되지 못한 이 땅, 사탄이 주관하며 유린하고 있는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4천년 동안 수고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할 수 없이 슬픔 심정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슬픔에 잠기는 그 시간마다 `나는 하늘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이 땅을 위하여 하늘편에서 싸우겠다’는 각오와 `어떠한 핍박이나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것을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그에게서 용솟음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준비기간에 다짐한 것은 앞날의 실천노정에서 일대 싸움을 전개하리라는 각오였습니다. 불신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민족 앞에 배척의 제물이 되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나는 이러이러한 길을 가야겠고, 이러이러한 방편을 찾아 세우겠다고 각오했습니다. 믿으면 이렇게 할 것이고 안 믿으면 이렇게 한다는 방안을 누구도 생각치 못하는 가운데 생각하였고, 누가 염려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늘을 대하여 기도하였던 예수였음을 알아야겠습니다. 또한 30년 동안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형제들이 기뻐하더라도 기쁨의 얼굴을 할 수 없었고, 친척과 교회 등 모든 모임이 즐거워한다고 해도 즐거움을 표시할 수 없었던 예수였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하늘이 바라는 방향과 인간의 생각하는 방향이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예수는 더 굳은 결심을 하셨고,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간격은 장차 자신이 메워야 할 일임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역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도 가정에 도움이 되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의 30년 준비기간을 슬픔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5-220
개척자로서의 결심
예수가 30년 준비기간에 개척자로서 가진 바의 결심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죽음의 고개가 있어도 나는 간다, 핍박의 길이 있어도 나는 간다, 망하는 일이 있어도 나는 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이 준비기간에 자신의 생활적인 환경을 청산할 수 있고, 자기를 위한 생애의 이념을 청산할 수 있고, 민족적인 모든 인연을 청산할수 있고, 구약과 법도를 중시하는 유대교단의 형식까지도 모두 청산할 수 있다는 평생의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온 세계 인류의 마음을 개척해야 할 예수는, 자나 깨나 그 생활에 있어서 그의 심정은 하나님의 이념의 경지에 하루에도 몇번씩 왕래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년 준비기간 동안의 내적 서러움을 이 땅 위의 만민들은 몰라주었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예수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가 대패를 들고 나무를 미는 자리에서도 까뀌를 들고 나무토막을 깎는 자리에서도,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는 자리에서도, 밥을 먹고 쉬는 자리에 머물지라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체휼하기를 바랬고, 하나님의 소원이던 천국이 건설되기를 소원했고, 어느 일순간이라고 그것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4천년 역사를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러한 가치는 저버릴 수 없고, 택한 이스라엘은 저버려도 이러한 가치는 저버릴 수 없고, 택한 교단은 저버려도 이것은 저버리지 못하겠고, 부모 친척 어떠한 것도 다 저버릴 수 있지만 이것만은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심중에 그리고 뼈와 살에 사무치게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철두철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천정(天情)의 심정을 갖추어 소망의 한날을 바라보면서 준비해 나오던 예수의 생애야말로 비장한 생활의 연속이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날을 찾아, 한때를 찾아 준비하던 예수의 심정과 그의 모습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입은 것은 초라하고 그의 모양은 서글퍼 보이더라도, 그의 시선만은 땅의 어떠한 정복자나 어떠한 개척자에게도 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심정과 통하는 그의 시선이었고 우주를 뚫고도 남음이 있는 기막힌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치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심정과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는 시련받는 불쌍한 사람의 모습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고, 서글픔을 지닌 모습이 아니 될래야 아니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회고해 볼 때에, 예수님은 역사노정을 통하여 수고해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심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불신의 이스라엘 민족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커졌고, 불신의 사도들이 될까봐, 또 불신의 제자들이 될까봐 무한히 염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마음을 품고 묵묵히 30년 준비기간을 지냈습니다.

예수가 하늘편에 서서 타오르는 심정의 열도가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그것은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소망에 불타올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일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다만 이스라엘민족을 위하고자 함이요, 그의 심정도 이스라엘민족을 위하고자 함이요, 전세계를 위하고자 함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무한히 슬픈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기간에 예수는 십자가의 고개를 한번만 각오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죽는다는 소문이 있으면, 그가 회생시켜야 할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느끼기를 몇 백번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억울하고 몰리고, 불쌍한 처지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정을 자기의 사정으로 바꾸어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벌어지는 사회의 처참한 현상을 자기 일신의 실천노정 위에 벌어지는 실증적인 제물과 같이 생각하면서 바라보았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5-222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예수님의 공생애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 30년 준비기간을 서글프게 사셨던 예수, 그 예수 앞에는 심정에 어리어 그를 알고, 그에게 경배드리며 그를 모실 수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보기에 추한 불구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사실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었던들 오늘날 후대의 우리 인간들은 면목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들은 하늘 앞에 빚진 것이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30년 준비노정을 바라보면서 무한히도 기대를 가졌던 예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생애의 노정을 출발하는 실천의 한날을 바라고 있던 예수님이 드디어 준비기간을 거쳐 실천과정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민족이 환영할 줄 알고 혹은 세계 요한이 환영할 줄 알고 찾아가 보았으나 민족도 세례 요한도 냉대하고 반대했습니다. 유대교단도 반대했습니다. 준비기간에 있어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온 예수가 실천의 일보를 나서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민족을 터로 하여 세계를 대하여 싸워야 할 것이 본분인데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반대하고 나서니, 오히려 이스라엘민족을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참한 실천노정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메시아 준비를 했던 이스라엘민족은 제2차로 밑바닥부터 다시 개척의 사명을 하게 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섭리하여 쌓아 왔던 전체 발판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직후에 섭리하시던 그 역사노정의 절대성을 가지고 다시 되풀이하여 전체 백성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의 슬픔을 우리가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택한 백성이라고 찾아갔던 걸음이었는데 오히려 그들로부터 쫓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간 곳이 어디인고.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웠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늘을 배반하고 오히려 사탄의 입장에 서니, 이것을 바라보는 예수의 서글펐던 심정을 누가 알 것인가.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 나가 40일 금식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예수가 이렇게 불쌍한 분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하늘의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가 인간 세상을 찾아와 인간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광야에 나가 먹을것 먹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수인 사탄 앞에 시험을 받는 분통한 이 사실을 그 시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의 분한 노정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분함을 어떻다고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분함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아픔을 느끼고 있는 예수는 자기 일신의 서글픔을 보고 하늘이 염려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슬픈 심정도 표시하지 않으시고 하늘 대하여 지극한 효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들이 회상해 볼 때, 예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늘을 배반하던 그런 경지를 떠나 자기를 위하여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슬픔을 놓고 응당히 기도해야 할 입장인데도 이것을 피하고 분한 마음을 억제하면서 하늘을 위로하려 했기 때문에, 타락의 슬픔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30년 준비기간에 있어서 이것을 실천의 노정으로 찾아 세우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자기의 나선 발걸음이 민족을 원수삼아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선조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슬픔의 역사를 빚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은 변화산상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민족적인 서러움을 염려하면서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 대신 기도하기를 바랐습니다. 바로 이러한 제단을 쌓아야 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딴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통해 죽음의 한날을 예고받는 입장에서 새로운 각오를 했고 그날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생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5-224
제자를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수고
그러면 하나님의 작전법은 어떠한 것이냐? 한 사람을 찾으려면 그 한사람의 가치만큼 맞고서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입니다. 하나의 가정을 찾으려면 그 가정만한 것을 하늘이 대신 맞고서야 그 가정을 빼앗아 옵니다. 따라서 민족을 다시 찾아 세우려면 하나님께서 그 정도만큼의 타격을 받고서야 찾아세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천노정에 있어서 이것이 하늘의 작전법인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야 할 예수였던 연고로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의 제물이 되고, 가정의 제물이 되고, 교단의 제물이 되고, 민족의 제물이 되어 얻어맞는 희생의 개척노정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의 실천방법을 갖고 나타나신 예수는 준비한 유대교단으로부터 자기의 동지를 구하려고 했으나 한 사람도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실정을 놓고 보더라도 어부라 하면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빈천하기가 짝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그 때 당시에 무지몽매한 어부들을 찾아가신 예수가 어떠한 입장이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보는 것과 같이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대번에 감동되어 따라 나왔다고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그 배후의 생활적인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만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민족 앞에 저버림을 당한 예수는 노동자 모양으로 나타나 가지고, 어부의 친구 모양으로, 그들과 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소원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시어서 그들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이루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적인 내용과 심적인 이념을 갖고 증거하고 싸우셨던 연고로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 따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식한 제자들을 택해 놓으시고 3년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세우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며 봉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워 놓으시고 봉사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12제자를 택해 놓으신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소망이 크셨습니다. 유대교단을 움직이고, 제사장들과 모든 서기관들을 주관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념은 컸고, 그가 가진 욕망도 컸고, 그의 심적 기준도 높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실체이념을 갖고 하나의 개척자의 입장으로 나타났던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타락 직후의 아담 해와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던가. 하늘이 4천년 동안 선민을 세우기 위하여 봉사의 노정을 거쳤고, 사탄 대해 희생과 제물의 노정을 거쳐 나오신 그 역사적인 전통을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노정으로 거치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을 것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제자들을 찾으셨으며, 입을 의복이 있으면 자기가 헐벗은 것을 생각치 않고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제자들을 그 자리에 두시고 자기는 천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하늘과 결합된 이러한 마음과 이러한 이념을 갖고 생활했던 예수님의 3년 공생의 노정이 필연적으로 승리적인 성과를 거두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과를 얻지 못했던 그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5-226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준행하지 않은 제자들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를 이용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놀음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는 땅을 치며 울어도 그 마음을 풀 길 없고, 하늘 대하여 통곡하여도 이를 풀 길이 없는 서글픈 심정을 갖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사명의 노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 마음을 억제하고 제자들을 대하여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심중에 사무친, 자신의 뼈살에 사무친 결심의 일단을 재차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것은 예수의 말이지 자기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여러분! 요한의 모친이 자기의 두 아들을 끝날 영광의 자리에 세워달라고 할 때에, 답답하고 참담하였던 예수의 그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는 불쌍한 분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그렇게 훈계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제자들은 자기들이 기쁘다 하는 행동은 나타냈지만,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훈계해 준 것을 본받아 자기들이 예수님이 따르는 무리 앞에 본이 되고, 예수님을 높여주고 예수님을 섬기는 이런 제물적인 입장에는 서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제자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넘어 교단이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고, 교단에게는 교단을 넘어 민족이 부르짖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고, 민족에게는 민족을 넘어 세계가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세계 인류에게는 세계를 넘어 하늘이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어느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정에 처해 있는 예수님,자기만을 대하여 달라는 몇몇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이러한 예수님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이상의 슬픔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천신만고의 지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배고플 때에는 떡을 만들어 먹이셨고, 그들이 때를 위하여 울 때 그들을 위로하셨고, 낙망하게 될 때에 팔복(八福)의 말씀을 통해 하늘의 축복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낙심할까봐, 혹은 떨어질까봐 염려하셨던 예수님의 심적인 애달픈 사정을 표현한 것이 바로 복음서의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한 가지 사정을 걸어놓고 말하면 말할수록 그 말씀을 듣고서 가까워져야 할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더 먼 자리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시는 예수의 심정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다 못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 도리는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이셨기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슬픔을 느끼면서도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것은 기뻐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편안하여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줄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여기에는, 이 땅에는 몸 둘 곳이 없고, 이 우주 안에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늘을 대하여 호소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장한 경지에 계셨던 예수의 간곡한 모습을 여러분은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정을 안 해줄 수 없는 서글픈 사정에 처하여 손을 들어, 아버지시여! 하고 부르게 될 때에 여기에서 이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뼈살이 녹아지는 슬픈 장면에서 외치는 그 한 사정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 이적 기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그 이적 기사를 예수가 태만해서 혹은 좋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벳세다 들에서 5천여 무리가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요, 택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십니다’라고 손에 손을 흔들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이익이될 수 있는 입장일 때는 찾아왔으나, 시일이 지나 예수가 자기들과 심적 기준이 달라지고, 사정이 달라지고, 표준이 다른 경지에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니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걸어온 실천노정에 있었던 현상입니다.

5-228
실천노정에서 품었던 예수님의 마음
그러나 아무리 외적인 여건이 달라진다 해도 예수의 마음은 변할 수 없고 그의 가는 길도 변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길은 타락한 우리 인류가 필히 가야 할 운명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따라가야 할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를 배반했고, 따르던 무리가 배반했고, 응당히 예수를 믿고 섬겨야 할 제자들마저도 그와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달리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에는 서글픔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이 보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핍박을 받아야 할 자신임을 아시고, 가정적으로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을 아시고, 교단적으로, 민족과 국가적으로, 당시의 세계를 대신하여 로마 제국 앞에 핍박을 받아야 할것을 아시고,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 변화산상을 넘어 갈보리산을 찾아가는 그는 `어떠한 핍박이나 고난이라도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말아라. 나는 내 때를 향하여 넘어야 할 것은 넘어야겠다’는 각오를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을 넘지 못하면 준비노정이 슬픔의 일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각오하던 이 고개, 죽음의 고개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이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제물로서 이 인류에게 나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고 가겠다는 각오가 천심을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를 대신하여 천심(天心)에 북받쳐 각오하고 걷는 예수의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기간에 각오했던 바 그 결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걷는 그인 줄을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을 배척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원망할 줄 모르는 예수요,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누구보다 더한 분함을 갖고 있는 예수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한 뜻길을 다시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책임감을 느끼셨던 예수였습니다. 4천년의 인연을 통한 하나님의 심정이 가해진 것을 아시는 예수는 버릴 수 없는 민족이었기에 저들이 배척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살려주시옵소서’, `저들이 핍박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이 민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나중에는 제자들이 배반하는 자리에 처하여서도 `나를 통하여 구원의 뜻을 이루시옵소서’라고 하늘 대해 간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노정을 걸어가셨습니다.

12제자들이 예수님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각오로 `주여! 어디에 가시든지 함께 가겠나이다’라고 하였던 이 말은 예수께서 복음을 들고 나타나게 될 때에 한 말입니다.

따르는 제자들이 ‘선생님이 어디에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나이다’라고 각오하던 것은, 예수님이 처음 출발하던 심정과 겟세마네를 향하던 때의 심정과 방불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읍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구나’ 하시며 `내 몸과 머리와 심정을 아버지 품에 맡기옵니다’라고 하신 기도는, 얽혀진 인류의 탄식과 역경을 다 밟고 올라가 수고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안타깝고 서러운 자신의 심정을 맡기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겟세마네동산의 단판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세워 놓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나서는 걸음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길을 걷는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는 바치어지겠다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때까지 섭리의 뜻을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배반해 나온 타락인간을 대표하여 반대하던 인류 앞에,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결심을 갖고 나아가던 예수의 걸음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실천의 노정도 슬픔으로 종말을 지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실천의 노정에 있어서 어느 한 사람의 동지도 갖지 못하고 종말을 지었습니다. 외적인 심정에서도 그러했고 실천적인 생활환경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는 역사의 제물로서 홀로 피살을 뿌리며, 다시 새로운 생명의 노정을 인류 앞에 제시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간 걸음이 바로 그의 실천노정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5-230
맞고 나서 복귀해 나온 섭리역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운명하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는 기도 끝에 이제는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민족을 믿고, 그 민족을 중심삼아 성취하여야 할 이념적인 세계를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30년의 준비기간에 있어서 `슬픔의 행로가 벌어지는 날에는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던 그 결심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씀이 기쁨의 말씀이 아니요, 예수가 온 인류에게 자신의 슬픈 심정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 서글픈 심정을 말씀하신 최후의 유언인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예수의 내적 슬픔의 행로를 개척하여 진정으로 `다 이루었다’할 수 있는 한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재림의 날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거 알아야 돼요.

예수가 작정하고 사탄 세계와 대결해 나오던 행로가 바로 십자가의 노정이었던 연고로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그 길을 본받아 나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은 맞고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민족이 배반했고, 12사도까지도 예수를 부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예수가 부활하여 찾은 존재가 누구였느냐 하면 12제자들이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맞고 찾아나옵니다. 또 예수를 믿고 있던 스데반은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 이처럼 하늘편이 스테반이 죽임을 당하자 하늘은 대신 사울을 찾았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여 자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을 다시 찾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다 죽이는 그때에 예수는 부활의 권한을 행사하여 사울을 빼앗는 일, 즉 맞고 찾아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사울은 바울로 개명을 한 뒤에 12제자들 대신 맞았습니다. 이와 같이 쫓김받고 몰리던 바울이 사도 중의 사도가 되어 기독교의 기반을 닦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예수를 쳤느냐?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쳤고 이스라엘민족 전부가 쳤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도적으로 친 것이 누구냐 하면 로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맞은 것을 더하여 탕감복귀해야 할 원칙이 남아 있어서 로마에 들어가 대신 맞았습니다. 12사도와 70문도, 또 믿던 수많은 군중이 민족을 대신하여 맞은 것을 다시 탕감복귀해야 할 원칙이 남아 있는 연고로 때리고 난 로마는 그대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로마제국시대를 지나고 구교가 성하였던 봉건사회를 지나 가지고 개혁기에 들어가면서 부패한 구교는 루터가 반기를 들었을 대에 이를 때렸습니다. 이처럼 때리면 맞던 신교는 그후 그 자리를 떠나 천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너 그들이 자랑하고, 그들이 세워나오던 문화를 일으켜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외적 가나안형을 쫓김받는 기독교 무리를 통하여 세워나왔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민주국가를 대표하는 이러한 사회형으로 벌어졌으니, 하늘은 또 한번 맞는 무리를 찾아 헤맬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때는 역사적인 전환기입니다. 역사가 맞는 무리를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는 교단 가운데, 민주국가에서 맞고 쫓기는 무리가 나와야 될 것입니다. 쫓기는 무리는 그 주의와 이념이 기존의 것과 다릅니다. 왜? 예수가 갖고 온 이념은 지상이념이 아니라 천국이념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통하던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에 따라 살려는 백성은 그 이념의 건설자가 예수였기 때문에 천지개벽적인 변혁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찰나에 어떠한 무리가 나타나야 할 것인가? 역사의 종말시대에 예수의 골고다의 길을 따라가며 믿는 신령패들, 즉 하늘의 축복받은 무리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골고다의 산정을 향하여 몰림받고 쫓기면서라도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이런 길을 되걷고 있는 무리가 나와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개인적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혹은 교단적인 골고다의 짐을 지고 가는 교파가 나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차지할 것은 맞고 차지했습니다. 로마에게 맞았으니 로마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래 가지고 교단복귀운동과 국가복귀운동과 세계복귀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맞는 골고다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교단적으로 맞는, 즉 골고다의 길을 가는 교단이 나와야 되겠고, 민족적으로도 골고다의 길을 가는 민족이 나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이것이 하늘 가는 공식적인 길입니다.

5-232
우리가 준비하고 서야 할 자리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하늘을 찾아 준비기간을 지나고 실천기간을 지나 천륜의 본성을 찾아 나서야 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되느냐. 또 어떠한 입장에 서야 되느냐. 예수가 30년을 준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적인 천적 심정으로부터 인간의 심정을 대신하여 혹은 모든 주권을 대신하여 대결하고 나서서 홀로 나가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러한 각오를 갖고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가는 무리가 반드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으로는 섭리완성의 종결점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노정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군천사와 영인과 피조만상이 머리 숙여 ‘오 당신의 소원 성취의 날이 오늘이오니 영광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날을 준비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크리스찬들은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다’라고 하던 그날을 넘어서 살아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1차적인 완성기에 있어서의 천적인 개척자의 사명을 여러분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는 세계를 위하여 죽은 것 같으나 세계적인 무대에서 핍박받지 못했습니다. 민족과 국가적인 무대에서 핍박받았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적인 골고다를 넘어야 할 완성기인 기독교 종말시기인 오늘날에 있어서 여러분은 세계적인 무대를 기반으로 하여 예수의 30여년 생애의 준비기간에 지녔던 그 마음, 그 결심을 갖고, 또 3년 실천노정에 지녔던 작전법을 갖고 어떠한 골고다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을 이루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원수라도 치지 않고 개척자의 사명을 대신 감당하여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새로운 제2차적인 무대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던 예수의 내적 심정을 붙들고 넘어설 줄 아는, 즉 세계적인 사명을 인계받은 크리스찬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완성의 한날,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때, 즉 영광의 한날을 맞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은 번번히 미완성의 행로를 거듭하면서 이 길을 책임지고 개척자의 사명을 하였으나 이제는 완성의 일로를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이념을 마음에 품고 준비하여 나오던 그 제1차적인 이념이 제2차적인 이념으로 나타난 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인계받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제1차적으로 예수의 심적인 한을 해원하고 그 다음 6천년의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앞에 죽지 않고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그 날을 맞이하여야겠습니다.

사탄 대하여 싸우는 비운의 역사노정을 감추어 두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싸워 나가는 승리의 한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 여러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던 예수와 같은 심정을 갖고, 또 그의 실체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하늘 앞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예수가 이 땅 위에 와서 양면의 개척자의 사병을 다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남긴 그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개척해야 할 자신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쫓기게 하고 몰리게 하던 그들을 쳐버리지 못하고 민족을 붙들고 원수를 붙들고 기도하며 넘어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무리를 붙들고 복 빌어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되겠고, 죽음을 넘어서서 하늘을 붙들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안길 수 있는 세계적인 아들딸, 세계적인 새로운 동산의 개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우고 가신 천국이 내 마음에, 예수가 찾고자 하던 사랑의 마음이 내 마음에, 예수가 찾고자 하던 세계가 내 한 몸에서 전부 완결지어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이 아무런 미련도 가질 수 없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새로운 우주적인 개척자로서 하늘의 영광위 깃발을 갖고 나서야만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복귀의 사명이 종결되고 예수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이 완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5-234
기 도
아버님! 황공하옵게도 저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부르짖는 애달픈 그 음성에 저희의 뼈골이 움직이는 은사를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믿음이 저희들의 마음이 아니라,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는 아버님의 마음인 것을 알았사옵고, 불쌍한 것들을 붙안고 몸부림치시는 하늘의 심정을 알게 되옵니다. 목을 놓아 울어도 끝이 없을 황송한 그 은사 앞에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여 죄인된 종족, 죄인된 자체임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옵니다.

사랑의 아버님! 찾아 주셨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오늘의 찾으신 걸음은 기쁨으로 찾아오셨사오나, 내일의 떠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희의 송영(頌詠)의 날을 약속하고 떠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되지 못할까봐 두렵사옵니다.만나기는 기쁨으로 만났사오나 헤어지는 날은 슬픔으로 헤어지는 것이 인간을 대해 나오신 아버지의 곡절의 노정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보다도 내일이 아버지 앞에 그리워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청춘기보다도 노년기에 들수록 더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의 깊고 높은 그 세계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줄 아는 아들 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을 위로하고 예수의 원한을 해원하고 역사상의 선조들의 원한을 해원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날 종말적인 사명, 천적인 해원성사를 저희들로 말미암아 이루어 받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은 개척자의 심정으로 오셨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영광이 변하여 개척자가 왠말입니까. 세례 요한이 배반한 연고였사옵고, 교단이 배반한 연고였사옵고, 민족이 배반한 연고였사옵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배반한 연고였사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사에 남아진 사실(史實)인 것을 아는 한, 예수가 준비기간으로부터 실천기간을 통하여 완성기준을 향하여 넘어가던 그 내적 결의의 심정이 종말기에 남아진 저희들의 마음터 위에 용솟음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민족적인 원수, 국가적인 원수를 대했사오나 오늘날 저희들에게는 민족을 넘어 세계적인 원수, 우주적인 원수를 대해야 할 책임, 즉 마지막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사오니, 아버지, 저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책임을 홀로 지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끝까지 늠름히 걸어 나아가, 승리하는 영광의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