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0 to 5-205: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의 슬픈 심정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의 슬픈 심정
1959.01.25 (일), 한국 전본부교회

5-190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의 슬픈 심정
마태복음 17:1

[기 도(Ⅰ)]

아버님! 이날을 기억하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이 자기를 중심삼은 채 아버님의 존전에 나오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아버님께서 친히 임재하실 수 있는 거룩한 지성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운행하실 수 있으며, 훈계하실 수 있는 숫것의 제물로서 아버님께 드려질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상한 심정과 지친 몸 마음을 갖고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손길을 펴시사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저희들에게 부여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과 저희와의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인연을 맺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기뻐하시면 저희들도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시고, 아버님께서 슬퍼하시면 저희들도 슬퍼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행하시면 저희들도 행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싸우실 때에 저희들도 함께 싸울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영원히 지워질 수 없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저희 선조들도 아버님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무한히 애써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을 당신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으로서, 영원히 품고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들로 세워 주시고,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의 인연을 맺어 아버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이 시간 맺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아버님의 사랑의 심정과 저희들이 하나될 수 있는 인연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중이 이 한 시간 같은 은사를 받을 수 있고, 아버지의 사랑권내로 찾아질 수 있는 간접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 아버지를 대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식구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그들도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줄에 엉클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랑의 동산에서 얽힐 수 있는 귀한 모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저희의 모든 것을 바치오니 당신 것으로 취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마음 속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일체를 이루는 존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아버지의 것으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채우고, 진정한 마음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체 위에 아버님의 축복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5-191
기 도(Ⅱ)
아버님이시여! 당신께서 모으신 자녀들을 앞에 놓고 허락하신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저희 마음의 주인이 되시고 저희 몸의 주관자가 되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소망의 한 기준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처량한 순간에 하신 말씀을 보았나이다.

아버님이시여! 때와 시기는 이미 지났사오나 심정의 세계는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예수님을 보내시고 염려하시던 아버님의 분한 심정이 저희의 분함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가 저희의 생애에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을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사실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땅 위에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불초한 자들을 모이시어서 많은 말씀으로써 하늘의 심정을 소개하시고, 가지고 있는 사정을 통하여 저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사오나, 저희에겐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사오며 갖춘 것도 없사옵니다. 오직 아버지 앞에 드릴 것은 죽어질 수 있는 하나의 산 제물밖에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마음을 통하여 저희 마음이 움직이고, 아버님의 심정을 통하여 저희의 심정이 움직이어 서로 서로가 손을 붙들고 하늘 종족의 무리로서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아들을 배반했던 사실을 분히 여길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다시 맞을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간곡한 심정이 이 청중의 마음을 통하여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허락하신 짧은 시간에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저희의 심정과 인연이 맺어지기 전에는 저희 자신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 저희에게 운행하셔야만 그러한 인연을 맺어질 것을 알고 있사오니,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옵니다.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도 이 시간 같은 품에 품어주시고, 같은 은사로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올 때에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5-192
말 씀
기독교가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의 슬픈 심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여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변화산상을 찾아 올라가는 예수의 모습을 이 한 시간 다시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산정까지 올라가신 예수님은 과거 역사에 있었던 전체 섭리를대신한 존재요, 그 시대 전체를 대신한 존재를 대신한 존재요, 더나아가서는 앞으로의 후손들 전체를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산상에 기쁜 마음으로 오르시지 못하고 비장하고 슬프고 쓸쓸한 심정을 가지고 오르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건을 비단 그 순간만의 그쳐진 비장한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 이전 시대와 예수님 당대와 예수님 이후에까지 그 양향이 미쳐지는,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5-193
예수님과 산
예수님께서 중대한 일에 봉착할 때마다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신 곳은 높은 산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리고 난 후 사탄의 3대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는 하늘에 대한 염려와 인류에 대한 염려와 피조 만물에 대한 염려를 그 신에 지니고 전후좌우를 명백히 갈라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진 예수에게 있어서 그 장면은 하늘과 사탄, 하늘 일과 사탄의 일을 판가리 해내야 할 중대하고도 비장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역시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끌리어 올라가 산상봉에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과 인연된 산을 살펴보면, 예수 앞에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올라갔던 한 산이 있었고, 유대백성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최후의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하늘 앞에 결정짓기 위하여 찾아간 변화산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넘어가기 위한 결정적인 기도를 했던 겟세마네동산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들을 우리는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산을 찾아가던 예수의 발걸음이 어떻게 움직였으며, 그가 느끼던 슬픔과 서러움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었던가를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2천년 전 광야로 나가던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을 대하여 싸움의 노정을 가던 예수의 애타던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광야노정의 3대시험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한 곳도 높은 산 꼭대기였습니다. 택함받은 세례 요한과 그 일당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민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찾아가는 광야노정의 걸음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 어느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슬픈 심정을 가지고 걸었던 걸음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독생자요, 4천년 역사를 해결할 자요, 또한 그 시대와 천추만대의 후대 앞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적으로서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가 백성도 뒤로 하고, 교단도 저버리고, 택한 세례 요한도 요셉가정도 남겨 두고 친구도 없이 홀로 광야로 나가던 서글픈 심정을 우리들은 회상치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심을 하고 나선 예수는 40일 금식을 하면서 그 한 장소에서 무엇을 회상하였던고. 옛날 선조들이 걸어나온 슬픔의 노정을 자기 일신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시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3대시험 과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던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4천년 역사 전체의 노정을 마음으로 염려하면서 최후의 승리의 방패를 세우 사탄을 굴복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비장한 심정을 갖고 높은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가던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걷던 예수는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쫓겨난 후 에덴동산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 역시 그 동산을 찾아 헤매야할 것을 그 마음에 회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 이후 슬픔의 동산에서 살아온 역사적인 선조들을 회상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산이라는 명사와 함께 산에 대해서 그 마음에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김을 받았던 것을 쫓김받지 않았던 입장으로 원상복귀하기 위하여 1,600년 이후에 나타난 노아가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아라랏산기슭에서 모든 역경을 참으면서 방주를 만들었던 그의 절개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와 같은 생애를 보낸 것은, 오늘의 나 한 자체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아가 이와 같이 산정에 올라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수고했을 것이라고 예수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5-195
산을 찾은 선조들의 충절을 회상하며 각오하신 예수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시대로 와서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한 이후 이삭 번제의 명령을 받고 산상을 향하던 것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라의 만득자(晩得子)인 이삭을 속여서 모리아산상으로 데리고 가던 아브라함의 비장한 심정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누구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아브라함은 누구를 위하여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물론 아버지를 위함이요, 동시에 오실 메시아를 위함이었다는 것,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세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궁중 40년과 미디안 광야 40년의 수고의 노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서글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모세 앞에 호렙산 기슭의 불붙은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약속을 하시던 그 장면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자기가 찾아오신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나 불변의 인연을 맺는 장면, 원수인 사탄을 이 우주에서 기필코 제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에 대하는 모세의 충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모세가 인연 맺는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백성을 애급 땅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80노객이요 광야에서 시달린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모습이야말로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표준을 갖고 있던 모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60만 대중을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인 광야로 끌고나온 입장에서,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진 모세는 그들이 잘못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정에서 모세는 40주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내려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세의 사정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렇듯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를 위함이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선민을 세우시어서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복귀된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사탄편인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그러한 장면은 모두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회상을 하며 걷던 예수께서는 선조들이 산정에 올라가서 판가리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하늘 앞에 기도했던 그 사실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함이요, 나아가는 자기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회상하며 비장한 심정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의 심중의 세계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노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가던 그 발걸음은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며 걷던 걸음이 아니였습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알다시피, 예수님은 개인 복귀와 환경 복귀와 세계 복귀를 해야 할 것을 그 심중에 품고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의 과정을 거쳐서 산정(山頂)에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대 시험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역사적인 새로운 선조로서 전통을 세우고 하늘의 심정을 상속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탄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셨던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장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에 나가셨던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정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역사노정을 회상할 때 자기 일신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함을 느낀 동시에, 그 당시 택한 이스라엘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에도 역사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의 심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세례 요한을 세워서 하늘의 뜻을 성취할 수있는 새로운 길을 닦게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터를 닦게 하기 위해 미리 세례 요한을 보냈는데, 그 세례 요한이 예수를 불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민족을 선민으로 축복하시고 4천년 동안 끌고 나온 그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나타날 수 있는 백성과 택한 자가 간 곳 없어졌습니다. 그런 연고로 잃어버린 무리를 다시 찾아야 했던 예수님의 그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예수님은 낙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과 세워진 무리를 생각하게 될 때는 슬픔에 북받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를 만든 동기와 기원을 더듬어 살피고, 또한 그 당시까지의 역사적인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이런 곡절을 있게 한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필코 사탄에게 승리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사탄의 시험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장한 장면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197
또다시 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의 외로운 처지
사탄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고 말했으나,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을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탄 앞에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웠던 것입니다. 또 그럼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슬픔과 시대적인 슬픔에 연결시킬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획득해 가지고, 역사적인 인연의 발판이 되어 있는 택함받은 이스라엘과 세워졌던 유대교를 향하여 다시 찾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예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는 광야노정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워가지고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단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모두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가는 길과 머무는 곳곳마다 환영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핍박과 반대와 조롱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첫번에 배척을 받고 광야노정에 나간 것도 섭섭하고 분한데, 사탄을 대하여 승리한 조건을 갖고 다시 백성을 찾아나선 예수 앞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유대교와 이스라엘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비통하고 서러운 심정에 사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했던 예수를 오늘날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핍박받는 어지러운 환경에서도 민족과 교단을 돌이키기 위하여 산정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3년 공생애 노정을 통하여 사탄과 싸웠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끝에는 자기가 죽어서라도 기필코 무지한 백성을 경각시켜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변화산상에 올라가셨던 거예요.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해도 성과가 거두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긴 죽어 제물이 되어 피와 살을 뿌려서라도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그들, 하늘의 심정에 연하여 있는 그 무리를 구하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품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은 훌륭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받아줄 수 있는 제자의 집도 아니고, 그 나라의 백성의 집도 아니요, 당시 유대교인들이 집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였느냐 하면 변화산상이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 변화산상을 이리 저리 걸으시던 예수님의 서글펐던 심정을 여러분들은 더듬어 살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서글픈 광야노정을 걸었던 것도 선조들이 불신하고 책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았던 것인데, 3년 동안 하늘의 심정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산을 찾아 올라가야 했던 그 서글픈 심정과 그 발자취를 우리들은 회상해 보지 않으면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던 발걸음은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겠다는 기준을 가지고 민족을 붙안기 위해 나섰던 발걸음이었지만, 변화산상으로 찾아가는 그 발걸음은 가졌던 결심을 다 버리고 자신의 몸을 민족 앞에 나누어 주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가는 걸음이었습니다. 이 시간 그렇게 산을 오르던 예수의 심정과 모습을 회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애달픔으로 체휼할 수 있고, 또 그런 심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늘 대한 예수의 서러움과 민족을 대한 예수의 서러움, 그리고 교단을 대한 예수의 서러움까지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99
예수님이 변화산을 오르시게 된 전후 사정과 비장한 결심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는 세 제자가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기에 민족을 대표해서 택한 제자 입장이었으나 산에 오르시는 예수 앞에 아무런 도움의 조건도 세워드리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광야를 찾아나갈 때는 그래도 천사가 와서 수종을 들어 주었는데,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며 변화산을 오를 때는 민족을 대표하여 따르던 세 제자마저 예수의 수종을 들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슬픔으로 시작되어 슬픔으로 끝난 예수의 생애는 비통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내게 있는 모든 정성을 다 들여 원하시는 뜻을 따라나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선조들보다 굳은 지조와 충의와 성심과 노력을 기울여 3년공생애 노정을 걸었으나 민족에게 몰리었고 교단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친척과 제자들 어느누구 한 사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자신이 외로운 자리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역사의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고하기에 민망스러운 심정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있는 예수에게 민족에 대한 원망심이나 교단에 대한 원망심, 혹은 타락된 아담 해와에 대한 원망심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여지가 없었던 예수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 선조들은 슬플 때 하늘의 위로를 받았으나 예수는 슬픈 자리에서도 슬프다고 기도할 수 없는 자신임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기도하기 전에 흐느낌의 눈물이 먼저 예수의 무릎을 적시었으리라고 나는 봅니다. 그 모습은 하늘 땅 위에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의 역사를 거듭하여 섭리하셨던 하나님 앞에, 승리의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패배의 일로에서 서글픈 사정을 품고 변화산상에 홀로 나타나 하늘을 대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된 예수는 차마 입을 열어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과 사정이 딱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보내시어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의논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슬픔에 잠길 것을 안 예수는 백성을 위하여, 또 이 후대를 위하여 하늘을 염려하실 것을 아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놓고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서라도 소망이 없고 앞길이 가로막힌 가운데 처해 있는 유대백성들을 살려야 할 것을 느낀 예수는 엘리야가 `아바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던 그러한 기도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참으로 비통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대하여 나오는 데 있어서 그 행한 일들이 이렇듯 슬픈 역사를 남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사상에서의 제자들이 자기들이 죄의 종족임을 알고 예수와 같은 심정으로 또는 예수 대신 민족의 서러움을 염려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를 위로해 드리고 예수 대신 기도해 주기를 원하셨으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선조들이 걸어나온 역사노정의 실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예고받은 예수는 그 죽음의 한날을 남몰래 준비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날이 점점 촉박해지고 사태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자신이 십자가에 나가기 전에 먼저 세상의 모든 만사를 다 종결지어야겠다는 심각한 심정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심정이 그의 몸마음에 어리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최후의 길을 가야 할 구세주의 사명을 짊어진 자신임을 예수는 알았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거친 후에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이러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서러움과 시대적인 서러움, 그리고 미래의 서러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를 넘고난 후에까지도 저끄러진채 남아 있을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심정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예수를 알아준 사람은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사정을 알아주는 하나의 제자도 없었습니다. 예수의 사정을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신만이 아는 서글픈 심정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비운의 장벽과 검은 구름이 앞을 가로막는 환경, 죽음 앞에 몰리는 비참한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심정이 슬프다면 이 땅위에 어느누구보다 슬픈 심정이었을 것이요, 분하고 억울하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5-201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그러면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 위에 오셨던가?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여, 또 민족과 교단을 위하여 왔었으나 그가 나아가는 길은 너무도 슬펐습니다. 예수는 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슬픔이 역사적인 슬픔으로 시대적인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또한 미래의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몸 둘바를 모르고 초조한 심정에 잠겼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 찾아가신 곳이 겟세마네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최후의 슬픔을 토로한 곳은 제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믿고 있는 유대교단도 아니요 유대나라의 궁중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의논하여 모든 것을 결정짓기 위하여 올라가신 곳은 깊은 밤에 아무도 가지 않는 겟세마네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있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려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흘렸던 눈물을 대신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또 그러한 예수의 제2의 모습을 그리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슬픔을 품고 시대와 미래를 위하여 우셨던 예수, 처참하고 불쌍한 사정에 처해서 세 번씩이나 피땀을 흘리며 우시던 예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밤이 새도록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분하다면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럽다면 말할 수 없이 서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4천년 역사가 하루에 넘어가고, 수많은 이스라엘민족이 하루 아침에 망하고, 4천년 섭리의 터전이 한 시간에 무너지고, 세워졌던 유대교단이 한 시간에 무너질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가 흘린 피땀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땀이요, 그가 흘린 피눈물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백성들은 이러한 내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르겠다고 맹세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그 비통한 심정을 누가 인계받고, 누가 이비통한 피눈물의 사정과 인연을 맺었던가. 땅 위에는 그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예수께서 홀로 행하고 가셨지, 이 땅 위의 인간 중에는 그러한 심정을 인계받을 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하늘을 대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호소는 하늘 땅이 터져나가는 한마디요, 사망세계가 권세를 갖고 들어서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비장한 한마디였습니다.

따라서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죽은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세기를 지나도 이 애달프고 피어린 최후의 호소의 음성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 하늘이여’라고 부르짖던 예수의 심정에 여러분의 심정이 같이 동하는 한날을 소망하여 하늘은 다시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끝날에 있는 성도들은 성도들은 갈보리산상과 겟세마네동산에서 호소하시던 예수의 그 역사적이고 비장한 심정을 이어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겟세마네동산에서 잠을 자던 예수의 세 제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각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당도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던 것과 같은 심정을 품고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 주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5-203
예수의 피와 눈물의 터전이 되었던 산
예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때, 그와 같은 심정으로 `아바 아버지여,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 대신 내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의 택한 신자가 없었고 하나의 택한 민족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생애노정은 산꼭대기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비장한 일의 연속이었지 기쁨으로 되어진 일을 하나도 없었습니다. 외로울 적마다 감람산 골짜기를 찾아들었고, 슬픈 적마다 고요한 삼림을 동무삼아 무언의 설교를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하나를 붙들고 그의 깊은 심중의 내용을 호소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대할 적마다 슬픔과 서러움을 갖고 대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에게는 소원이 있었으니 그 소원은 무엇일 것인가. 그는 보이는 모든 산천이 하나님의 눈물과 인연 맺어져 있고 선조들의 애달픈 심정과 인연지어진 터라는 것을 회상하면서 이 모든 산천이 슬픔과 눈물의 산천이 되지 말고, 기쁨과 영광의 제단을 꾸며 승리의 송영을 드리는 산천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산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껴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선조들이 과거에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든 슬픔의 역사를 이 산에서 종결지으려 한 것을 안다 할진대, 그 산들이 선조들이 사탄세계를 대해 승리해 줄 것을 바랐다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산들은 예수께서 비장한 장면 장면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기도한 곳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에서 승리와 영광의 제단을 쌓고 `아바 아버지여,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안 여러분들은 이제 산을 바라보게 될 때에, 예수의 피와 눈물의 터가 되었던 산임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의 풀포기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이며, 하나의 바위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바위 그 풀은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의 심정에 연하여 그 심정 가운데 잠길 수 있었으니 그 당시 인간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슬픔의 인류가 된 것을 자탄하고, 만물을 보기가 부끄럽고 산을 보기가 부끄러운 자신들임을 깨달아 끝날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는 예수를 산으로 쫓아버리던 유대민족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가정에서부터 주님을 모시고, 사회에서 모시고, 국가에서 모셔야 되겠습니다. 들이나 산 어디서든지 심지어는 산꼭대기에서까지도 주님을 모셔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늘앞에 기쁨의 존재로, 영광의 존재로 그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 그 주님의 한마디는 슬픔의 말이 아니고 기쁨과 사랑이 어린 말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해 드려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산아! 산천아! 하시며 슬픔의 역사를 탄식하시던 하나님의 눈물자국을 받은 산들, 혹은 이 땅을 대해서, 또는 피조 만물을 대해서, 역사노정을 대해서, 이 시대를 대해서 어느 하나의 존재물도 하늘은 서글픈 눈물을 통하여 바라보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존재물에게도 슬픈 심정을 품고 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산에서부터 출발하여 산으로 산으로만 걸으시던 예수의 행로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정에서부터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고 생활환경에서도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날을 소망하신 예수님인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산을 찾아가셔서 승리의 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의 역사적인 심정이요, 예수의 시대적인 걸음이요, 또한 예수의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오늘의 광야노정에서 예수 대신 사탄과 싸워야 되겠고, 변화산상에서 싸우시던 예수 대신 민족과 국가 세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역사적인 인연을 맺으시던 예수의 심정을 갖고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터지는 벅찬 심정을 가지고 이 땅과의 인연을 맺고자 하시는 하늘의 심정을 인계받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세워 놓지 않으면 예수께서 걸으신 산정(山頂)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205
기 도
아버님! 종교를 찾아나오는 인류에게는 명승 명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산과 인연을 맺어 산과 더불어 사정을 토로하고 산과 더불어 생사의 기준, 승패의 기준을 결정지어 나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대표하여 가신 분으로서 그가 가시는 곳은 산정이었고, 마음을 연결시켜 하늘을 대하여 사정을 호소하시던 곳은 산정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나온 것이 산이었음을 알았사오니, 이 삼천리 반도강산에 널려 있는 산정에도 하나님의 아들 딸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리며 역사적으로 산에서 맺혀진 원한을 탕감해 드릴 줄 아는 자랑스러운 자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저희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또한 종교와 민족과 세계가 이 산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은 하늘 땅을 대신하여 산정을 오르내리시던 예수의 심정을 본받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그가 남기신 발자취를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에 승리의 제단을 산정에 쌓아 호산나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날까지 저희들은 변할 줄 모르고 싸우는, 또 그 싸움에 임하여 지칠 줄 모르는, 후퇴할 줄 모르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런 각오와 결심이면 아버님께서 협조해 주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정한 일념으로써 어떠한 곡절의 길이라도 뚫고 나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원하신다면 찾아가서라도 그 뜻을 받들어 아버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책임을 짊어지는 참다운 아들 딸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